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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야의 이발사
보마르셰 지음, 이선화 옮김 / 비(도서출판b) / 2020년 8월
평점 :
보마르셰의 피가로 3부작은 이경의 번역본 외에 이선화 번역본이 존재한다. 시기적으로 이선화 번역본이 먼저 출간되었으며, 이경의 번역본이 단권인 데 비해 이선화 번역본은 각 작품이 별권이라는 차이가 있다. 가성비 면에서는 이경의 번역본이 우위에 있다. 단일인에 의한 3부작 번역본이므로 자연스레 비교가 이루어진다.
<세비야의 이발사>의 주인공인 피가로는 작가 자신의 분신이다. 작가 해설 및 연보를 통해 알게 되는 보마르셰는 한 사람의 삶이라고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다채로운 이력을 지녔다. 제1막 제2장에서 피가로의 인생 편력, 특히 마드리드의 문인들에 대한 비판은 작가로서 겪었던 자신의 속내를 낱낱이 토로한다. 서민이지만 귀족을 지향하는 보마르셰와 서민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하는 피가로!
여기서의 백작과 로진은 아직은 세속의 때가 덜 묻었다. 자칭 바람둥이 백작은 로진을 향한 지극한 사랑의 쟁취를 위해 어색해하면서도 몸을 사리지 않고 애쓴다. 로진은 후견인의 굴레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귀족 아가씨로서 세상 경험이 부족함에도 바르톨로와 당당하게 맞대결을 벌일 정도로 쉽게 당하지 않는 순발력과 재치를 발휘하는데 한편 바르톨로의 속임수에 쉽사리 넘어가는 성급한 순진함도 보여준다.
바르톨로는 분명 악역이지만 일말의 공감도 자아낸다. 늙은 나이에 로진과 결혼하려고 하는 주된 동기가 사랑인지 재산인지는 명확지 않으나 막판에 백작과 로진의 결혼에 동의하는 대목을 보면 재산에 대한 욕심도 큰 비중이 있었으리라. 제1막 제4장에서 피가로가 늘어놓는 바르톨로에 대한 인물 묘사를 보면 까칠하고 꼬장꼬장하고 계급관념에 사로잡힌 구시대적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다만 꼼꼼하고 주도면밀하여 피가로를 위시한 주인공들이 대처하는 데 무척이나 애를 먹게 하는 만만찮은 인물임은 확실하다.
등장인물의 면면이나 이들이 맞닥뜨리는 상황, 주고받는 대화를 보면 분명 의도적인 희극적 요소가 다분하다. 제3막 제11장이야말로 이 작품의 최고 묘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서로 다른 이유로 바질의 등장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모든 인물이 합심하여 몰아붙이는 동시에 영문을 몰라 당황해하는 바질이 빚어내는 대조가 압권이다.
이처럼 <세비야의 이발사>의 뛰어난 희극성이 단순히 로시니의 오페라 부파 덕분인 것만은 아닐 텐데, 마음 놓고 낄낄거릴 정도의 재미가 이경의 번역본은 부족하다. 오히려 이선화 번역본은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양자의 번역 사이에는 대사의 어조, 표현 등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대사 자체의 의미가 확연히 다른 경우도 심심치 않다. 전자는 문어체, 귀족적 표현이고, 후자는 구어체, 서민적 표현이라면 지나치려나. 연극 상연을 염두에 둔 작품임을 고려한다며 후자가 더 자연스럽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몇 가지 예시로 확인할 수 있다.
[제1막 제5장] 백작과 피가로의 대화
(피가로) 솔직히, 그리 나쁘진 않은데요. 다리만 좀 더 휘청휘청 대시면. (훨씬 더 술에 취한 어조로) 여기가 집이...
(백작) 어이쿠! 네 놈은 영락없는 술꾼이구나! [이선화 번역본]
(피가로) 사실 그리 나쁘진 않은데 술에 취해 다리가 더 풀렸으면 좋겠어요. (술에 더 취한 말투로) 이 집이 바로...
(백작) 이런! 자네는 서민 티가 나잖아. [이경의 번역본]
2. [제2막 제7장] 바르톨로의 대사
어떤 일이 사실이라 해도! 그게 사실이기를 원치 않으면, 난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우기면 그만이야. 아랫것들한테 내가 옳다는 걸 인정하게끔 만하면 되니까, 권위가 뭔지 맛 좀 보여줄까. [이선화 번역본]
어떤 일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내가 수용할 생각이 없으면 사실이 아닌 거야. 너희처럼 미천한 것들이 모두 옳다고 인정해 버리면 주인의 권위가 어떻게 되겠어? [이경의 번역본]
3. [제3막 제4장] 바르톨로와 백작의 대화
(바르톨로) 허구한 날 머릿속에는 엉뚱한 공상뿐이라니까요.
(백작) 어딘가 써먹을 데가 있을지 누가 압니까?
(바르톨로) 행여나! [이선화 번역본]
(바르톨로) 얘는 항상 낭만적인 생각만 한답니다.
(백작) 낭만적인 생각이 어떤 건지 아세요?
(바르톨로) 천만에, 내가 알 리가 있나! [이경의 번역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