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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나메 ㅣ 아시아클래식 5
아볼 카셈 피르다우시 지음, 헬렌 짐머른 영역, 부희령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4년 7월
평점 :
‘샤’는 왕, ‘나메’는 책으로 즉, ‘왕의 책’이라는 뜻이다. 11세기 초 이란의 시인 피르다우시가 삼십여 년에 걸쳐 지은 서사시로 6만 행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라고 한다. 헬렌 짐머른에 의한 1883년 영문 축약본을 번역하였다.
작가는 페르시아의 고대 신앙인 조로아스터교(선의 신 오르마즈드와 악의 신 아리만)와 고대 영웅 서사를 교묘하게 직조하여 굽이굽이 흐르는 왕들의 연대기를 그려냈다. 워낙 장대한 시기를 다루고 수많은 영웅이 등장하기에 축약본에서는 인물과 사건의 전개를 따라가기에도 호흡이 가빠질 정도다. 선과 악은 경계가 없다. 시대를 주름잡는 영웅도 한순간의 자만과 방심에 빠지면 즉시 아리만의 노예가 되어 비참한 생을 마침을 알 수 있다. 무려 700년간 이란을 평화롭게 다스린 젬쉬드가 뱀왕 조학에게 무참하게 무너지고 만다.
잔혹한 뱀왕 조학을 응징한 페리둔의 500년 치세에 비로소 이 작품의 본류가 나타나는데, 장자 실림에게는 오늘날 터키, 차남 투르에게는 오늘날 중앙아시아를 주고, 삼남이자 막내인 이리쥐에게 이란을 물려준 것이다. 이후 이란의 정통은 페리둔과 이리쥐의 자손인 미누치르, 카이 코바드, 카이 카우스, 카이 코스로 등으로 이어지며, 투르의 자손인 아흐라시얍이 호시탐탐 이란을 정복하기 위해 침공하는 대립 구조로 형성된다. 대를 이은 갈등과 전쟁은 이란과 아흐라시얍의 투란과 지역적, 민족적 적대감을 강화하여 양국은 불구대천의 원수 관계가 되고 말며, 끝없는 침공과 살육, 보복의 원정과 정벌로 악화하고 만다.
작품 분량 면에서나 사건의 다단함을 고려할 때 핵심적 인물은 왕가에서는 카이 카우스와 카이 코스로이며, 왕국의 수호자인 펠리바 잘과 루스템이라고 하겠다. 유혹에 취약한 카이 카우스의 잇따른 잘못을 수습하기 위해 잘과 루스템은 분통을 터뜨리면서도 샤와 이란 국민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며 그로 인해 영웅담을 풍성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카이 코스로는 투란을 정복하고 아흐라시얍을 끝내 죽임으로써 아버지 샤이아우쉬의 복수에 성공하고 이란의 영광을 빛내지만 자만심에 빠져 선대의 잘못을 반복할까 봐 스스로 경계하여 창조주의 곁으로 홀연히 사라진다.
루스템은 태생으로 볼 때 이란 적통이라고 할 수 없다. 루스템의 어머니 두다베는 뱀왕 조학의 후손이기에 잘이 두다베와 결합할 때 샤가 우려했으나 잘을 시험하고 신탁의 결과로 허용하였다. 루스템은 봉신으로 육백 년간 여러 샤를 지키고 옹위하는 등 이란의 위기를 구하고 영광을 드러내는 기둥 역할을 헌신적으로 수행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일체의 사욕도 품지 않았으니 올바른 선택이었던 셈이다. 그에게 도전한 여러 영웅들(그중에는 아들인 소랍과 샤의 아들 이스펜디야르도 있다)을 모두 물리쳤지만 끝내 믿었던 동생의 배신으로 죽음에 이른 루스템과 함께 이 장대한 서사는 막을 내리니 작품 내에서 그의 비중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루스템과 단짝인 라쿠샤도 결코 잊지 말자.
이 작품은 인간성에 내재한 선과 악의 경계의 모호성과 취약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일세의 영웅이 불명예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례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단순한 선악의 대립을 넘어서는 사유를 끌어낸다. 특히 후반부에는 제르두싯이라는 선지자가 새로운 신앙을 전파하고 아리만의 힘을 없애버렸으며 젠드아베스타라는 경전을 가르쳤다고 하여 후기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나타내고 있어 특기할 만하다.
* 이란과 투란의 강역 오류
페리둔은 투르를 튀르크와 중국의 주인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란과 투란의 영토는 제이한 강을 경계로 하고 있음을 곳곳에서 알 수 있는데, 옮긴이는 역주에서 제이한 강이 소아시아에 있는 강이라고 표기(P.79)하였다. 역주에 따르면 투란은 이란의 서쪽, 즉 오늘날 터키지역인데, 이는 작품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 내용으로 볼 때 투란은 이란 동북쪽이며, 잘과 루스템의 지배지역인 자불리스탄의 북쪽에 있어야 한다. 나중에 아흐라시얍이 패배하여 중국으로 도주하였으니 위치상 투란의 위치는 이게 맞다. 네이버 지식백과에서도 제이한 강에 대한 소개가 역주와 일치하여 역자의 단순한 실수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에 대해 위키백과 등에서도 게시자가 간 혼란이 있음을 알 수 있었는데, 세이한 강이 페르시아어로는 지훈 강이라고 한다는 것을 통해 마침내 지훈 강이 오늘날 아무다리야 강임을 알게 되었다.
이런 혼란은 짐작건대 튀르크와 터키에 대한 혼동으로 발생한 듯하다. 서구사회에서 튀르크와 터키를 혼용한 것은 오스만 튀르크에서 비롯하였는데, 튀르크족의 원 거주지는 오늘날 중앙아시아, 소위 스탄 지역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나중에 서진하여 셀주크족과 오스만족이 소아시아를 기반으로 대제국을 건설하고 유럽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기에 자칫하면 튀르크를 터키로 착각하기 쉽다. 이들의 서진은 11세기부터 이루어졌으므로 피르다우시가 이 서사시를 작업한 이후 시대인 셈이다. 따라서 작품 내 터키는 현재의 중앙아시아를 지칭하며 따라서 모두 튀르크로 표기해야 작품 이해에 혼동이 생기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