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 종교문화사
이보 안드리치 / 문화과학사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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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이보 안드리치가 역사가임을 알지 못하였다. 그의 고향이 보스니아이므로 그 지역의 역사를 연구하였음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하필 종교 문화를 다루었는지는 보스니아가 유럽 내 종교의 모자이크라는 별칭을 통해 이해할 만하다. 가톨릭, 정교, 그리고 이슬람교가 화합과 경쟁, 반목과 충돌을 반복하는 게 발칸 유럽, 특히 보스니아에 해당한다. 더구나 보스니아에는 보고밀교라는 기독교 분파가 한때 세력을 지녔다.

 

보고밀교 교인들은 스스로 보스니아 교회로 불리기를 즐겨하였다. 이 보고밀교는 독립 보스니아 시절의 정치, 종교 생활의 영역에서 가장 커다란 영향과 의의를 지녔던 보스니아의 세 가지 지배적인 종교 중의 하나였다. (P.28)

 

저자는 오스만 점령 이전의 보스니아에서 보고밀교의 역할을 중시한다. 보고밀교가 큰 세력을 형성하였기에 보스니아는 가톨릭과 정교 양 세계의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였다. 좋게 말하면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었고 반대로 표현하면 유럽의 주류 문화권에서 배제당한 셈이다. 그 후 이슬람에 점령당하면서 고립은 한층 심화되었다.

 

유럽인에게 있어 오스만의 수백 년간 발칸 유럽 지배는 수치이자 역사의 퇴보이다. 근현대 세계사의 지배자로 우월감을 지닌 그들로서는 당연할 것이다. 반면 여기에 참여하지 못한 보스니아 등 피점령지역들은 한층 애석함을 품는다. 그들에게 오스만의 제 방면이 긍정적으로 비칠 리는 없고, 부정적 편향으로 인식됨이 현저하다. 저자는 나름대로 온건한 표현을 사용하지만 기저에 흐르는 인식은 어쩔 수 없다. 이슬람교의 사회적 행정적 제도가 비무슬림 주민의 생활에 미친 영향은 한마디로 부정적이다. 자고로 지배국가가 피지배국가의 진정한 행복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사례는 전무하다. 게다가 종교와 문화가 이질적 세력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니 응당 이웃 기독교 세계와 단절이 생기고 고립되었다. 보고밀교에 이어 양 세계의 주변부로서 소외와 고립, 그것이 보스니아의 역사적 운명이 되고 말았다.

 

터키 지배하에서 카톨릭교회와 프란체스코 수도회 회원들의 공적이 서구와의 끊임없는 관계를 계속해서 유지시켜 준 것이라면, 세르비아 정교회는 민중들 속에서 그들의 생생한 힘을 보호 유지시켰으며, 새로운 시대까지 지적 생활과 민족 전통을 단절되지 않고 계승되도록 하였다는 데 그 공적과 의미가 있을 것이다. (P.150)

 

안드리치는 오스만 지배 아래 가톨릭과 정교가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분투한 모습과 그 결과 보스니아 지적 전통을 보전할 수 있었음을 상세히 보여준다. 억압받는 가운데서도 양 종교는 괴멸되지 않은 채 종교적 전통을 지킬 수 있었고, 민중들과 함께 계속 숨 쉴 수 있었다.

 

저자는 이미 20세기 초에 종교 문화의 지성사 측면에서 오스만 지배 보스니아를 역사적으로 조망하고 있다. 20세기 말에 보스니아를 휩쓸었던 종교 분쟁을 목도한 우리로서는 저자의 선구적 혜안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 책의 미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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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의 역사
마크 마조워 지음, 이순호 옮김 / 을유문화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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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 유럽을 소개하는 강좌를 K-MOOC에서 수강하며, 발칸 유럽에 참으로 무지하다는 사실을 절감할 수 있었다. 유럽의 화약고,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 티토이즘, 독재자 차우셰스쿠, 참혹한 유고 내전과 코소보 사태. 이게 내가 아는 그 지역의 대략적인 전부다. 그네들의 개별 국가와 지역의 현황은 차치하고 발칸 유럽의 역사조차도 서구 중심의 역사 체계에서는 변두리에 불과하다.

 

이 책은 엄밀한 의미에서 독자가 통상 기대하는 사서류-시대적 흐름에 따른 왕조의 변천을 다루고 사회, 문화 설명이 뒤따르는-와 다르다. 미시사와 대비되는 발칸에 대한 거시사라고 할 만하지만, 발칸 유럽의 통사도 아니고 저자의 관심은 전적으로 근대로 맞추어져 있다. 발칸의 명칭에 대한 고찰에 이어 영토와 주민들을 소개하고, 본격적으로 쇠퇴하는 오스만제국 치하와 부상하는 서구 열강 사이에서 발칸지역 민족들의 근대 민족국가 건설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고찰한다. 즉 발칸 유럽의 근대를 개별 국가들의 국가 건설의 관점에서 조망하고 있다.

 

오스만제국 치하의 발칸 유럽은 서구의 정통적 관점에서 보면 매우 이질적인 현상이다. 유럽 세계의 안위를 위협하고 오랜 기간 상당한 지역을 지배한 막강한 제국이 인종, 종교와 문화가 상이한 생경한 동방 민족이라니. 근대와 현대의 독립 발칸 유럽 국가들이 독립투쟁과 그 성과를 지고의 가치로 높이고 오스만제국 지배 시절을 암흑기로 규정하며 제국 자체를 부정적으로만 기술하면서 역사 인식의 편향은 더욱 심화되었다.

 

하지만 가까운 1990년대에 벌어진 일련의 반인륜적 사건들-보스니아 내전, 코소보 사태 등-에서 이성이 무너지고 종교와 인종에 기반한 집단학살이 공공연히 자행되는 모습은 오스만제국 시절과 대비되어 참혹함이 두드러져 민족과 국가의 가치가 무엇인지 근원적 의문을 제기하게끔 한다.

 

저자의 발칸 유럽사는 깊이와 폭에 있어서 나의 얄팍한 역사 이해 수준을 뛰어넘기에 매 대목마다 감탄을 일으킬만한 신선한 자극을 제공한다. 발칸 유럽, 나아가 19세기와 20세기 초 유럽 정세를 이해하는데 정말로 큰 지적 자극이 되었음을 밝힌다. 학창 시절 제1차 세계대전을 제국주의 간 충돌이라고 배웠는데 왜 하필 사라예보에서 발발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독립투쟁 과정에서 벌어진 발칸 전쟁과 러-투전쟁, 그리고 양차 세계대전으로 발칸 유럽의 국경선은 종교와 민족이 분리되는 결과를 빚어냈고, 해당 국가들은 여전히 웅대했던 기억의 편린을 놓지 못하고 여기에 선동정치가 등장하여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킨 역사적 정황은 비단 과거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유효하다.

 

발칸 정치에서 사명감의 추진력이 된 것은 영토 확장에 대한 꿈이었다. 모든 나라는 강대국들에게서 분배받은, 다시 말해 자국 영토 외곽에 놓인 회복 안 된이웃사촌들의 땅이나 역사적 땅은 모두 자국 땅이라 고집했다. (P.165)

 

그들은 오스만제국의 압제에서 벗어나 스스로 독립국가를 형성할 독자적 역량을 보유하지 못하였다. 19세기 말에도 오스만제국은 쇠약했지만 여전히 왕성하여 서구 열강의 강력한 원조와 개입이 없었다면 발칸의 독립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저자는 단언한다. 그는 20세기의 혼란을 19세기와 연계하여 발칸 국가들의 국가 건설을 위한 어지럽고 기나긴 투쟁 과정으로 인식한다.

 

따라서 발칸 지역과 그들의 역사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은 긍정적이다. 발칸 유럽에 비판적인 서구 일반의 시각-유럽에 있지만 유럽이 아닌-을 오히려 비판한다. 발전한 서구인에게 갓 독립하여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발칸 유럽은 같은 유럽이라고 칭하기에 부끄러웠을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20세기 후반 문명의 중심지에서 발생한 대규모 유혈사태 또한 곤혹스럽기 그지없었으리라. 다만 저자의 발칸 유럽 옹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인종 청소는 발칸에만 있는 특수 현상이 아니었다. 히틀러 전쟁이 치러지는 동안과, 전쟁이 끝난 바로 직후 중동부유럽의 많은 지역에서도 인종 청소는 일어났다......따라서 최근의 인종 청소와 같은 이 같은 만행의 뿌리는 발칸인들의 사고 체계에서 찾을 게 아니라, 현대 기술자원으로 치르는 내전에서 찾을 일이다. (P.239)

 

발칸 유럽의 폭력성을 변호하기 위한 발언이지만, 2차 세계대전 전후와 21세기를 목전에 둔 시대적 차이를 외면하고 양자를 동일시한다. 저자에 따르면 50년 동안 인류사회는 이성과 도덕의 가치 측면에서 한치의 발전도 없었던 셈이다. 저자의 발칸 유럽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지만 이것이 저작 전체의 신뢰성과 가치를 저하시키고 있어 한편 아쉽다.

 

독재정권의 몰락, EU 가입과 유로존 합류 등 오늘날 발칸 유럽도 정치, 사회적으로 안정을 찾고 평화와 발전의 내일을 전망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다만 세르비아와 코소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스릅스카공화국의 존재는 아직도 불씨가 상존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일진광풍이 불어닥치는 순간 불씨는 일순간 걷잡을 수 없는 불꽃으로 피어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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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마법의 약을 만들다 시공주니어 문고 2단계 14
로알드 달 지음, 김연수 옮김, 퀸틴 블레이크 그림 / 시공주니어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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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알드 달의 동화는 뻔하지 않은 인물과 개성적 전개로 기존의 동화와 차별화한다. 기존의 동화 주인공은 대개 착한 인물 또는 악인에서 개과천선한 사람이 등장하며, 내용 또한 우여곡절이 있지만 결국은 사필귀정이고 권선징악이라는 교훈적 내용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반면 로알드 달은 그렇지 않다.

 

이 작품의 인물들-조지, 할머니, 조지의 부모-을 보면 선악을 분별하기 어렵다. 조지는 언뜻 착하게 여겨지지만, 할머니를 골탕 먹이기 위해 온갖 물건으로 마법의 약을 만드는 장면에서는 단지 나이로 감싸기에는 악의적 요소가 넘쳐흐른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조지의 아버지는 한술 더 뜬다. 거인으로 변한 할머니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며, 마법 약의 조제법에만 열광적인 관심을 보인다. 할머니에 대한 크랭키 씨의 반응은 오히려 냉소적이며, 할머니가 매우 작아져서 영영 사라져버렸음에도 일말의 놀람과 동정 대신 만세를 부를 정도다. 못된 버릇이나 심술을 부리는 존재로 언급하는 사위는 물론 할머니의 딸조차 할머니가 집안의 골칫거리였음을 인정할 정도다.

 

조지가 정말 무서워한 것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차가운 미소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할머니의 얼굴이었다. (P.23)

 

이 동화에서 할머니와 손자의 관계는 애정과 친밀함과는 거리가 멀다. 작가가 묘사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차라리 마귀할멈에 가깝다. 심술과 불평, 악담과 냉소로 점철된 할머니를 조지가 좋아할 리 없으며, 골탕 먹이자는 생각에서 일련의 사건이 발생한다.

 

마법의 약을 복원하려는 노력은 실패하였고, 조지의 할머니는 소멸하였다. 지붕은 구멍이 뚫려버렸고, 가축들은 엄청나게 커지거나 작아지거나 아니면 다리만 길게 자랐다. 이것이 작품의 결말이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다. 과연 이것이 동화로서 아이들 정서 함양에 적합할지조차 의심스럽다.

 

작달만한 키에서 거인이 되고, 통증도 사라져버린 채 시원한 공기를 한껏 들이켜며 즐거워하는 할머니. 거실 한구석에서 웅크린 채 은연중 또는 대놓고 가족들에게 부정적으로 표현되는 할머니. 그도 가족들에게 나름 할 말이 있다. 건강이 안 좋아 이십 년간 집안에 갇혀 사는 그에게 집안사람들은 별다른 관심과 배려를 보이지 않는다. 딸조차도 자식인 조지만을 챙길 뿐이다. 거인이 된 지금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점은 동일하다.

 

넌 그저 조지밖에는 모르는구나! 조지가 먹을 무엇무엇, 조지가 입을 무엇무엇! 이제는 정말이지 진절머리가 난다!” (P.143)

 

아무리 좋게 봐도 이 작품은 마법의 약의 우스꽝스러운 효과와 장면을 통해 포장하고 희석하려 노력하지만 결국은 불행한 가족의 끔찍한 결말을 다룬 잔혹 동화일 뿐이다. 동화로 인정받을 수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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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의 시대 - 누가 세계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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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는 누가 세계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 전작인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와 일맥상통한다. 굶주림의 원인이 식량 부족이라면 증산하면 된다. 기술적 문제인 셈이다. 하지만 전작을 통해 이미 절대적 부족이 아니며, 정치적, 경제적 사안임을 확인하였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는 망언은 굶주림의 본질은 가난임을 모르거나 일부러 외면한다.

 

우리는 흔히 의문을 제기한다. 3세계의 국가들은 왜 자국민이 기아에 허덕이도록 방치하는가? 자신들의 권력과 치부만 중시할 뿐 국민들의 목숨은 하찮게 여기는 봉건적 가치관에 매몰되어 있는가 등등. 저자는 부채의 문제를 지적한다.

 

기아는 부채가 낳은 직접적인 산물이다. 왜냐하면 가난한 나라들은 부채 때문에 농업이나 사회기반 시설, 운송과 유통 등을 위한 설비 건설에 투자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P.116)

 

부채의 일부가 권력층의 부패와 밀접함은 사실이지만 모든 걸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제아무리 썩어빠진 독재자라도 자국의 국부 증대에 무관심하지 않다. 더군다나 피압박을 헤치고 정당한 방식으로 정치권력을 획득한 지도자는 더더욱 그러하다.

 

저자는 별도의 장으로 에티오피아와 브라질의 사례를 자세히 설명한다. 지글러는 여러 혼란과 곤경에도 불구하고 자립을 향한 에티오피아의 사회와 문화의 자발성과 활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은 어떠한가? 야심한 기아 제로 사업은 사실상 실패하였다. 참고로 양국은 모두 부채에 대한 이자와 원금 상환으로 국고가 텅 비어버린 상태다. 다국적 회사들의 이익을 보장하는 브라질의 새 정책에 대해 저자는 부정적 판단을 보류한다. 중환자에게는 치료에 앞서 어쨌든 생명 유지가 우선이니까.

 

저자는 상황의 극적인 개선을 위해 제3세계 국가의 부채를 전면 탕감해주자고 제안한다. 그러면 제1세계 국가의 국민과 기업은 길거리에 나앉지나 않을까하는 우려에 대해 단언한다. 부자는 여전히 부자로 남아있을 거라고. 지글러가 이렇게 부채 문제를 역설하는 이유는 기아 해결을 위한 근원적 접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아는 핵심적 인권의 실현과 맥을 같이한다.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볼 때 이러한 주장에 반대를 할 개인이나 단체는 없을 거라고 믿는다면 순진하다. 신자유주의를 추종하는 월가와 다국적기업은 인권에 그닥 관심이 없다. 3세계 국가의 부채 탕감과 경제 발전은 항구적 경제 착취 체계를 유지하려는 이들로서는 인정할 수 없으리라. 그래서 지글러는 이들을 신흥 봉건제후라고 지칭하며 맹목적 이윤추구에 급급한 이들이 민주주의와 인권을 무시하고 파괴하는 원흉이라고 비판한다.

 

세계화 지상주의자들은 인간들을 착취하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인권을 좋아한다. (P.324)

 

장 지글러의 문장은 뜨거운 열기를 품고 있지만 단단한 대지에 굳게 기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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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와 반지 동화는 내 친구 42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 지음, 이지원 옮김, 안나 센지비 그림 / 논장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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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의 시장>으로 유명한 영국의 문호 새커리가 쓴 동화다. 새커리의 세계로 입문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개인적 심정이다.

 

요정, 착한 왕자와 공주, 못된 왕자와 공주(?), 왕위 찬탈, 마법을 부리는 물건 등 우리가 옛 동화에서 기대할 법한 온갖 요소들이 죄다 등장한다. 동화답게 해피엔딩을 갖추는 미덕도 잊지 않고, 심각 진지하거나 잔인한 장면(사자가 불한당 호기나르모 백작과 간수들을 한입에 먹어 치우는 대목을 작가는 슬그머니 외면한다)에서도 가벼움과 해학미를 동반하여 과연 크리스마스를 위한 용도임을 상기시킨다. 너무 스토리를 옹기종기 다듬어서 산만하고 어수선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장점일지 단점일지 독자에 따라 다른 반응을 보일 것이다.

 

안젤리카 공주와 벌바 왕자는 주변과 세인에 완벽함 그 자체로 비친다. 몸에 지니는 사람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강력한 장미와 반지의 위력이란. 그것을 상실했을 때 그들의 진면모는 과연 어떠한지. 외피만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차별하는 시속에 대한 풍자라고 하겠는데, 오늘날도 별로 다름이 없다. 로잘바 공주와 지글리오 왕자에겐 더는 마법의 도움이 필요 없는데 사랑의 마법은 무엇보다 강력하기 때문일 것이다.

 

옛이야기에서 주인공을 영웅으로 성장시키는 역할을 맡는 빼어난 스승이 등장하기 마련인데, 이 작품에서는 마법의 트렁크가 바보처럼 어리석은 지글리오 왕자를 교육하고 훗날 갑옷 일체도 제공한다. 전쟁 장면에서도 역시 검은 막대 요정의 마법이 힘을 발휘한다. 사람들 마음속에는 초자연적 요소에 대한 환상과 염원이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알게 한다.

 

선남선녀의 결합과 되찾은 왕국이라는 행복한 결말에 맞서 주인공은 마지막 시련을 겪는다. 섣불리 내뱉은 서약이 자신에게 족쇄로 다가와 아름다운 공주 대신 우스꽝스러우며 늙고 추악한 그러패너프 백작 부인과 결혼해야만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 이 대목에서 작가는 노련한 수완을 발휘하여 일찌감치 매설한 복선을 시원스럽게 터뜨린다. 단 한 사람 백작 부인인 젠킨스 부인만 쓰러질 뿐 모두는 환호하고 기쁨에 넘쳐 흐른다. 진정한 결말이자 즐거운 끝맻음.

 

동화에서는 주인공 왕자와 공주가 결혼하고 왕국을 다스리면 말 그대로 모두가 행복해한다. 우리는 여기에 추호도 의심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과연 사실이 그러할까? 지배층에서 내홍이 일고 귀족 간 전투가 벌어지는 치열한 왕위 다툼이 벌어졌다 한들 일반 백성들의 삶에 얼마나한 영향이 있을지 자못 의심스럽다. 역성혁명을 하든 쿠데타가 발생하든 평범한 이들과는 무관한 그들만의 다툼일 뿐이다. 작가는 이 점을 별거 아니듯이 무심히 꼬집는다.

 

하지만 서민들은 이 모든 사건들을 매우 잠잠히 받아들였는데, 왜냐하면 기억하는 한, 지금 파델라 왕 밑에서뿐 아니라 카볼피오레 왕 때도 세금은 똑같이 많이 내고 있었거든요. (P.117)

 

결국 동화는 동화일 뿐이다. 이 작품 역시 벽난로 옆의 팬터마임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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