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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의 역사
마크 마조워 지음, 이순호 옮김 / 을유문화사 / 2014년 2월
평점 :
발칸 유럽을 소개하는 강좌를 K-MOOC에서 수강하며, 발칸 유럽에 참으로 무지하다는 사실을 절감할 수 있었다. 유럽의 화약고,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 티토이즘, 독재자 차우셰스쿠, 참혹한 유고 내전과 코소보 사태. 이게 내가 아는 그 지역의 대략적인 전부다. 그네들의 개별 국가와 지역의 현황은 차치하고 발칸 유럽의 역사조차도 서구 중심의 역사 체계에서는 변두리에 불과하다.
이 책은 엄밀한 의미에서 독자가 통상 기대하는 사서류-시대적 흐름에 따른 왕조의 변천을 다루고 사회, 문화 설명이 뒤따르는-와 다르다. 미시사와 대비되는 발칸에 대한 거시사라고 할 만하지만, 발칸 유럽의 통사도 아니고 저자의 관심은 전적으로 근대로 맞추어져 있다. 발칸의 명칭에 대한 고찰에 이어 영토와 주민들을 소개하고, 본격적으로 쇠퇴하는 오스만제국 치하와 부상하는 서구 열강 사이에서 발칸지역 민족들의 근대 민족국가 건설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고찰한다. 즉 발칸 유럽의 근대를 개별 국가들의 국가 건설의 관점에서 조망하고 있다.
오스만제국 치하의 발칸 유럽은 서구의 정통적 관점에서 보면 매우 이질적인 현상이다. 유럽 세계의 안위를 위협하고 오랜 기간 상당한 지역을 지배한 막강한 제국이 인종, 종교와 문화가 상이한 생경한 동방 민족이라니. 근대와 현대의 독립 발칸 유럽 국가들이 독립투쟁과 그 성과를 지고의 가치로 높이고 오스만제국 지배 시절을 암흑기로 규정하며 제국 자체를 부정적으로만 기술하면서 역사 인식의 편향은 더욱 심화되었다.
하지만 가까운 1990년대에 벌어진 일련의 반인륜적 사건들-보스니아 내전, 코소보 사태 등-에서 이성이 무너지고 종교와 인종에 기반한 집단학살이 공공연히 자행되는 모습은 오스만제국 시절과 대비되어 참혹함이 두드러져 민족과 국가의 가치가 무엇인지 근원적 의문을 제기하게끔 한다.
저자의 발칸 유럽사는 깊이와 폭에 있어서 나의 얄팍한 역사 이해 수준을 뛰어넘기에 매 대목마다 감탄을 일으킬만한 신선한 자극을 제공한다. 발칸 유럽, 나아가 19세기와 20세기 초 유럽 정세를 이해하는데 정말로 큰 지적 자극이 되었음을 밝힌다. 학창 시절 제1차 세계대전을 제국주의 간 충돌이라고 배웠는데 왜 하필 사라예보에서 발발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독립투쟁 과정에서 벌어진 발칸 전쟁과 러-투전쟁, 그리고 양차 세계대전으로 발칸 유럽의 국경선은 종교와 민족이 분리되는 결과를 빚어냈고, 해당 국가들은 여전히 웅대했던 기억의 편린을 놓지 못하고 여기에 선동정치가 등장하여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킨 역사적 정황은 비단 과거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유효하다.
발칸 정치에서 사명감의 추진력이 된 것은 영토 확장에 대한 꿈이었다. 모든 나라는 강대국들에게서 분배받은, 다시 말해 자국 영토 외곽에 놓인 ‘회복 안 된’ 이웃사촌들의 땅이나 역사적 땅은 모두 자국 땅이라 고집했다. (P.165)
그들은 오스만제국의 압제에서 벗어나 스스로 독립국가를 형성할 독자적 역량을 보유하지 못하였다. 19세기 말에도 오스만제국은 쇠약했지만 여전히 왕성하여 서구 열강의 강력한 원조와 개입이 없었다면 발칸의 독립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저자는 단언한다. 그는 20세기의 혼란을 19세기와 연계하여 발칸 국가들의 국가 건설을 위한 어지럽고 기나긴 투쟁 과정으로 인식한다.
따라서 발칸 지역과 그들의 역사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은 긍정적이다. 발칸 유럽에 비판적인 서구 일반의 시각-유럽에 있지만 유럽이 아닌-을 오히려 비판한다. 발전한 서구인에게 갓 독립하여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발칸 유럽은 같은 유럽이라고 칭하기에 부끄러웠을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20세기 후반 문명의 중심지에서 발생한 대규모 유혈사태 또한 곤혹스럽기 그지없었으리라. 다만 저자의 발칸 유럽 옹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인종 청소는 발칸에만 있는 특수 현상이 아니었다. 히틀러 전쟁이 치러지는 동안과, 전쟁이 끝난 바로 직후 중동부유럽의 많은 지역에서도 인종 청소는 일어났다......따라서 최근의 인종 청소와 같은 이 같은 만행의 뿌리는 발칸인들의 사고 체계에서 찾을 게 아니라, 현대 기술자원으로 치르는 내전에서 찾을 일이다. (P.239)
발칸 유럽의 폭력성을 변호하기 위한 발언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전후와 21세기를 목전에 둔 시대적 차이를 외면하고 양자를 동일시한다. 저자에 따르면 50년 동안 인류사회는 이성과 도덕의 가치 측면에서 한치의 발전도 없었던 셈이다. 저자의 발칸 유럽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지만 이것이 저작 전체의 신뢰성과 가치를 저하시키고 있어 한편 아쉽다.
독재정권의 몰락, EU 가입과 유로존 합류 등 오늘날 발칸 유럽도 정치, 사회적으로 안정을 찾고 평화와 발전의 내일을 전망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다만 세르비아와 코소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스릅스카공화국의 존재는 아직도 불씨가 상존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일진광풍이 불어닥치는 순간 불씨는 일순간 걷잡을 수 없는 불꽃으로 피어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