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나라 2
임영대 지음 / 새파란상상(파란미디어)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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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한 이순신의 앞날은 명약관화하다. 성공하면 권력을 잡고, 실패하면 역적으로 능지처참을 당할 뿐. 썩어빠진 조정을 갈아엎고 선조를 상왕으로 몰아낸 후 세자를 보위에 올린다는 이순신의 공언. 진정 권력에 욕심이 없기에 가능한 순진한 발상. 조정 측도 그를 따르는 부하장수들도 이를 믿지 못한다. 권력은 나눌 수 없다. 새 군주에게 권력을 돌려주면 이순신 일파가 위험에 빠지고, 이순신이 계속 권력을 지니고 있으면 필연코 군주와 반목할 수밖에 없다.

 

마포나루 전투에서 관군을 격파한 이순신 군은 도성에 입성하고 선조는 또다시 급거 피난길에 오른다. 임진강이 막히자 임진년과 달리 함경도로 발길을 돌리는 임금, 그리고 이를 추격하는 반군. 거사의 성공 여부는 언제 어디서 임금 일행의 신병을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 시점에서 작가는 고민을 했을 것이다. 자체로 진압할 군사력이 부족하여 왜란에는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한 정권, 내란에는 누구에게 손을 벌릴 것인가? 뜻밖에 야인, 즉 여진족을 등장시킨다.

 

왕조 초기부터 북쪽 국경지역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 온 여진족. 내부의 적을 제압하기 위해 외부의 적을 끌어들이는 무리수를 감행한 임금. 한줌의 자존심도, 민족과 국격의 일말의 자부심도, 당연하지만 백성의 고달픔에 대한 눈꼽만큼의 인식도 정권 유지를 위해서는 깡그리 외면 받는다. 그리고 이것이 반군의 세력을 오히려 강화하고 이순신의 분노를 더욱 깊게 하는 촉매 역할을 하고 만다. 작가로서는 당연한 수순이다. 이순신이 주도하는 새 세상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선조 일당은 패망해야 한다. 정도가 문제될 뿐이다.

 

작가는 불가피하지만 다소간 무리한 두 가지 선택을 한다. 먼저 야인들로 하여금 선조와 세자, 그리고 주요 종친을 살해하도록 함으로써 이순신 집권의 최대 난제를 자연스레 해결하게끔 한다. 도덕적, 윤리적 명분을 잃지 않고 내홍의 근원을 제거하며 동시에 이순신의 집권과 개혁의 정당성을 두드러지게 만든다.

 

반군 세력은 일종의 연합군이다. 수군의 이순신과 육군의 배설. 반군 측의 성공 가능성이 높아질수록 훗날의 목표와 방법론으로 갈등의 개연성은 충분하다. 배설을 페이스메이커 역할에 불과하다. 주인공을 빛내기 위해 적절한 시점에서 무대에서 퇴장해야 하지만 명분과 수단이 훼손돼서는 안 된다. 역시 야인의 손이 적당하다. 나라와 백성의 원수인 이 여진족 군을 함흥 회전에서 격파하여 명분과 실체를 모두 확보하는 대목은 비록 작위적인 설정이지만, 어차피 이 소설 자체가 그러한 법 아니겠는가.

 

배설이, 이원익을 필두로 한 이항복, 이덕형 등의 명신이 이순신을 선택하고 지지한 이유는 분명하다. 자신의 안위와 권력에만 급급한 임금이 아니라 백성을 진정으로 아끼고 그들의 삶을 평안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믿어서다. 배설의 처절한 유언이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순신이 개창한 새 나라는 분명 이를 구현할 것이다. 이순신 생존 시는 물론 잘하면 아들과 손자때까지도 가능할 수 있다. 선조와 인조처럼 혼군(昏君)이 왕위에 있을 때 왜란과 호란이 발발하였음을 기억하라. 왕조 정치의 단점은 임금이 모두 성군일 수 없다는 데 있다. 법과 제도가 아니라 인물 개인에 의존하는 한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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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나라 1
임영대 지음 / 새파란상상(파란미디어)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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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되짚어보면 기대와는 달리 선인, 의인이 승리를 거두지 못하는 사례를 쉽게 목도한다. 굵직한 역사의 변곡점이나 결정적 순간에 선택과 우연이 달리 작용했다면 이후 역사가 어찌 전개되었을까 덧없는 상념에 사로잡힐 때도 많다. 그런 면에서 가상역사소설은 짜릿한 기대감을 안겨준다. 그것을 값싼 감상이라고 치부해버려도 좋다.

 

이 소설의 제재는 너무나도 친숙한 역사상의 위인인 이순신 장군이다. 최후의 전투에서 적탄에 맞아 순사한 구국의 영웅 이미지는 소설과 드라마 등을 통해 많이 희미해졌다. 댓가없는 충성과 애국의 결과는 권력의 견제와 질시를 초래하고, 주변의 모든 이를 살리기 위한 극단적 선택으로 귀결되는 극적 시나리오가 한층 지지를 받고 있다. 만약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살아남고 조정의 부당한 탄압에 궐기하였다면 조선의 역사는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이 소설이 가상으로 써내려가는 지향점이 바로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일 수 있다.

 

역사를 뒤집는 설정이다 보니 응당 허구가 개입할 수밖에 없지만 의외로 당대 역사의 사실에 충실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등장인물과 정세를 실제에 근접하게 구현하기 위한 작가의 수고도 만만치 않았으리라. 역사와 가상의 영역을 넘나드는 작가의 의도에 부응하여 거의 사실에 가까운 추정과 완전한 허구 사이의 짜릿한 줄타기에 몸을 맡기면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금부도사와 백성들 간의 팽팽한 대결과 수하 장수들의 거사 여부에 대한 갑론을박이 작품 초반을 이끌어간다면 중반부는 거병한 이순신과 이를 저지하기 위한 전라우수군 및 충청수군과의 해전이 압도적이다. 김억추와 대비되는 충청수사 이시언의 장렬한 선택은 결국 유교적 가치관에서 전형적 사대부의 길이 아닐 수 없다.

 

이 소설에서 이순신과 함께 거병의 한 축을 담당하는 비중 있는 역할을 맡은 이가 뜻밖에도 경상우수사 배설이다. 실제 기록에 따르면 전장에서 달아났다가 후에 추포되어 사형을 당했던 그가 여기에서는 백성의 안위는 털끝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임금과 조정에 극도의 반감을 품고 무리를 모아 역모를 일으키는 강렬한 캐릭터로 부활한다. 한편 선조의 냉혹한 정치인식과 처절한 권력욕은 작중에서도 끊임없이 반복된다. 권력 앞에서는 인륜도 무의미함을 이미 조상들이 왕조 초기에 몸소 입증해보이지 않았던가. 선조는 암군(暗君)은 아니지만 지위불안에 사로잡혀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없는 임금이라고 밖에. 당대의 신하들을 보면 쟁쟁하기 이를 데 없다. 일찍 세상을 뜬 율곡은 그렇다 치고 유성룡,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등 오늘날까지도 명신(名臣)으로 일컬어지는 그들이 있음에도.

 

반군의 전격적인 한강수로 진격으로 혼란에 빠진 관군. 수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강가의 수많은 인가와 창고에 망설임 없이 불을 놓는다. 맹자가 말했다. 인의를 저버리는 군주는 일개 필부에 불과하다고. 흥미진진한 1권은 이런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지옥의 겁화처럼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는 이순신의 눈 속에서도 불꽃이 일렁였다. 모든 것을 태워버릴 것 같은 불꽃이. 그리고 그 불꽃 속에는 새 나라를 만들고 말겠다는 의지가 불타고 있었다. (P.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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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성 탈출
피에르 불 지음, 이원복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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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책을 읽었다. 맞다, 저 유명한 영화 혹성 탈출의 원작 소설이다. 두 편의 영화에 깊은 인상을 받은 나로서는 원작이니깐 한번 읽어보지 하는 가벼운 생각으로 책을 펼쳐들었다. 그리고 소설속 세계에서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었다. 책장을 덮고 나서 겨우 온전히 숨을 쉴 수 있었으나 영화보다 강렬한 결말은 뇌리에 뚜렷이 각인되고 말았다. 원작은 영화와 달리 배경이 미국이 아닌 프랑스라는 점을 제외하면 대체로 비슷하다. 다만 혹성 탈출 사연이 기록된 유리병을 발견한 두 인물은 작중 내용에 당황한 독자에게 쐐기를 박는 작가의 고약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당혹감은 유인원이 지극히 인간다운 반면 인간은 동물과 전적으로 흡사하다는데 있다. 이것이 소로르 행성에서는 명백한 법칙이다. 인간과 유인원의 현재 지위를 바꿔놓으면 모든 게 자연스럽다. 유인원은 언어를 사용하는데 인간은 말을 하지 못한다. 고릴라들의 인간 사냥은 인간들의 동물 사냥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인류의 이익을 위한 동물 실험이 유감스럽지만 불가피하게 받아들여지는 만큼 유인원의 인간 실험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이 과거 법정의 변호사와 검사에게서 유인원을 연상하고, 소로르 증권거래소의 유인원에게서 인간을 떠올리는 것은 양자가 본질에서 동일함을 가리킨다. 윌리스는 자신의 벌거숭이 차림에 당황스럽지만 다른 인간도, 유인원도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인간이 나체 상태라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개나 고양이가 자연의 모습 그대로 행동하는 것처럼 그들에게도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윌리스가 유인원 과학자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라에게 구애 행위를 하는 장면은 그래서 동물적인 동시에 인간스럽다.

 

그렇다. 만물의 영장으로 태어난 나는 노바의 주위를 둥글게 돌기 시작했다. 수백만 년에 걸쳐 가장 우월한 존재로 진화한 나는......탐욕스럽게 나를 관찰하는 이 모든 유인원들 앞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노바 주위를 동물처럼 맴돌며 구애하기 시작했다. (P.103)

 

인간 윌리스는 유인원 사회에 간신히 용납된다. 자기들과 마찬가지로 언어와 지성을 갖춘 존재를 외면하기는 어렵다. 하나의 지성적 인간 개체는 불편하고 낯설지만 어쨌든 무해하며 인간 연구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인간의 수가 점점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그들은 유인원 사회에 잠재적 위협 세력이다. 역지사지하면 당연한 결론에 이른다. 돌연변이 종을 박멸하는 것. 윌리스와 임신한 노라가 소로르를 탈출해야 하는 절박한 사연이다.

 

소로르 행성에서 인간과 유인원의 지위 역전 현상은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한다. 안락과 게으름, 무기력에 허우적대며 두뇌를 쓰지 않는 인류의 미래. 의연하고 굳세게 진화를 거듭하는 유인원과 종의 진화를 거꾸로 한 것처럼 퇴행하는 인류의 대비.

 

이렇게 쉽게 체념하는 무기력한 인류가 이제 주인으로서의 임기를 끝내고 더 뛰어난 다른 종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P.220)

 

인간과 유인원을 현시점에 맞게 인간과 로봇으로 대체하면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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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기봉 : 현대어본 조선 왕실의 소설 10
임치균.김인회 옮김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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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실의 소설시리즈 중 현대어본은 현재로서 이게 마지막이다. 당나라 후기의 실존인물이었던 명장 이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역사드라마를 써내려 가고 있다. 당나라는 현종과 양귀비, 그리고 안사의 난으로 사실상 끝난 줄 알았는데, 어쨌든 부침을 겪으며 150여 년간 잔명을 유지한다. 이때 이성이 당나라를 보존함에 있어 큰 공을 세운 명장이라고 하는데 과문하여 처음 들어보았다. 1313책의 구성으로 5백면에 가까운 장편소설이다.

 

주인공은 천상의 혈통이다. 탁월한 외모에 비할 바 없는 학문을 갖추었으며 덕성과 효성이 지극하다. 게다가 문무를 겸비하며 지략마저 으뜸이다. 한마디로 전형적인 일세의 영웅이라고 하겠다. 영웅소설이라면 뛰어난 주인공이 역경을 헤치며 자신의 영웅적 면모를 세상에 발현시켜야 하는 법. 이 소설 전반부의 대립구도는 계모가 담당한다. 주인공과 사이좋은 계모가 등장하는 고전소설이 있기나 한지 의문스럽다. 장자독식의 체제에서 자기 아들을 적통으로 만들기 위한 과도한 욕심은 당연히 실패로 끝나고 우여곡절 끝에 회개한 계모와 주인공은 화락한 관계를 유지한다.

 

당대의 준걸을 임금이 가만둘 리 없으니 군자에 어울리는 요조숙녀를 아내로 맞아들인 주인공에게 아끼는 화양공주를 강제로 시집보낸다. 공주로서는 보기 드문 덕성을 갖춘 덕택에 두 부인이 돈독한 우애를 유지함은 <천수석>의 동창공주와 마찬가지다. 궁궐과 집안을 넘나들며 오늘날의 막장 못지않은 드라마는 쉼 없이 전개되는데, 여타 소설과 다른 점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완벽한 이성이 비현실적이어서 덜 인간적인 반면 동생 이무는 적당히 뛰어나며 보다 인간적이라는 점이다. 기대했던 아름다운 아내가 아니어서 실망한 그의 눈에 비친 미녀는 그의 사리분별을 흔들어놓는다.

 

명장으로서 이성의 진면목을 보여주려면 전장에 나서야 한다. 실제 역사도 그러했는지 알 수 없으나 작품 속에서 이성은 사방의 전쟁을 종횡무진 한다. 훈육과 토번의 연합군을 무예와 신통력으로 항복시키고 서번절도사의 봉기를 진압하며 돌궐의 침략마저 물리친다. 7권 중반에 상당한 탈락이 있은 후 갑자기 주차의 반란군과 대적하는 장면으로 이어지며 다시금 토번의 침입을 격퇴한다. 이어 진왕 영의 강력한 세력마저 제압하는 등 굵직한 전쟁의 발발은 삼국지 못지않아 군담소설에 가깝다, 다만 분량에 쫓겨 세부적인 치밀한 묘사와 드라마적 요소가 부족하다. 후반부는 이성 본인보다는 그의 동생과 아들들의 맹활약이 두드러진다. 위구르족, 산남지방의 반란세력 등 당나라 후기의 어지러운 정세를 반영하듯 사방에서 변란이 끊이지 않는다.

 

천하의 이성도, 뛰어난 자식들도 일생을 당나라의 수호에 몸 바치지만 이성의 죽음에 임하여도 당나라는 안정을 찾지 못한다. 이성 본인은 혼암한 임금의 변덕에 시달려 총애와 내침을 자주 겪는다. 집안에서도 첫째 부인의 자리를 노리는 제수씨와 며느리 등으로 풍파가 멈추지 않는다. 하늘이 내린 인물이라도 혼자만의 힘으로는 역사의 대세와 세상만사를 해결할 수 없다는 의미일까? 이성의 죽음은 고전소설의 행복한 결말과는 무관하게 어수선한 정국 속에서 홀연 듯 다가온다. 소설도 한 치의 미련 없이 바로 이 대목에서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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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문의 비밀 - 갑골문과 무정 왕 그리고 부호 왕비 고려대중국학연구소 문화시리즈 3
신영자 지음 / 문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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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고사는 신화와 역사가 혼재하여 상나라[은나라]의 역사적 실체가 확인되었을 뿐 삼황오제와 하나라는 여전히 신비의 안개 속에 남아 있다. <사기>도 해당 내용은 <서경>의 복사판에 불과할 정도이므로 사마천조차도 다른 문헌자료를 구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상나라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건국자인 탕왕과 재상 이윤에 이어 무정 왕과 재상 부열은 상나라를 중흥시킨 공로로 유독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발견된 갑골문의 상당수가 무정 왕 시대의 것이라고 하며, 더욱이 사서에 전혀 언급되지 않는 부호 왕비의 존재는 역사의 공백을 메꾸는 흥미로운 대목이라고 하겠다.

 

갑골문이 상나라 후기, 즉 은허시대에 주로 사용되었고 나라의 대소사를 묻는 용도였으며 거북 등갑을 관리하는 별도 직종이 존재하였다는 점 등에 이어 갑골문으로 해석한 상나라의 정치, 군사, 사회제도 등의 소개 부분은 중국 상고사 이해에 큰 도움이 된다. 예컨대 선진(先秦)시대 이전의 각종 문물을 나타내는 명칭을 보면 유사한 기능을 갖는 물건을 지칭하는 용어가 여럿 존재하여 헷갈린다. 이 책에서는 사진 자료와 함께 차이점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훨씬 유익하다. 예컨대 솥을 나타내는 정()과 력(), 시루 언()을 쉽게 구별할 수 있다.

 

핵심은 무정 왕과 부호 왕비 이야기다. 무정 왕은 고종으로 시호가 정해질 정도로 상나라 역사에 중요한 임금이다. 갑골문에 따르면 무정 왕 당시의 혁혁한 업적의 상당수가 부호 왕비가 이루어낸 것이다. 기실 갑골문 상의 부호 왕비는 무려 3천년 이전의 시기를 감안하면 중국사에서 단연 독보적인 여성영웅이라고 할만하다. 두 명의 왕을 낳은 왕비이자 정치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봉지도 하사받으며, 대군을 이끌고 사방의 외적을 물리치고 적극적인 정벌활동도 이끌었다. 갑골문 기록을 보면 무정 왕이 부호 왕비의 출산과 출병에 관하여 묻는 내용이 자주 등장하여 그 비중을 알게 한다. 참고로 부호의 묘는 1976년에 원형 그대로 수많은 부장품과 함께 발굴되어 실체적 사실임이 한층 입증되었다.

 

갑골문 자체에 관심을 가졌다면 제3부가 매우 유익할 것이다. 대표적인 갑골문자를 다수 소개하는데, 현재의 한자와 갑골문자를 비교하여 한자의 어원이 무엇이었으며, 이것이 시대적 흐름에 따라 변모된 사실도 친절하게 풀이한다. 사람 인()은 알려진 것처럼 사람과 사람이 서로 기댄 모습이 아니라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서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성인 성()의 원 의미는 하늘과 사람의 소리를 듣고 전달하는 사람이다. 개인적으로 닭 유()와 원숭이 신()의 풀이가 흥미로웠다. 술과 관련된 한자는 닭 유를 항상 부수로 쓰는데, 닭과 술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 의아하였다. 갑골문자에서는 유()가 애초에는 술병에 담긴 술을 의미했는데, 후에 10번째 지지인 닭 유로 쓰이게 되어 술을 지칭할 때는 술 주()를 대신 쓰게 되었으며, 원 글자는 여전히 술을 의미하는 부수로 남아 있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도 원래는 번개를 뜻하다가 9번째 지지로 뜻이 바뀌게 되었고 원 의미는 귀신 신() 또는 땅 곤()에 자취가 남아 있다고 한다.

 

무정 왕과 부호 왕비를 포함한 상나라 역사와 문화를 폭넓게 파악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갑골문자와 한자의 어원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를 가능케 해주는 좋은 입문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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