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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마누엘레 피오르 그림,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5월
평점 :
모 아동문학책에서 소개되었길 때 호기심에 읽게 되었는데, 솔직히 난감했다. 작품 자체는 꽤나 흡인력을 지니고 있으며, 시사점도 제법 깊이가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다만 과연 이 책을 아이들에게 추천할 수 있느냐는 고민이 필요하다. 창녀의 자식, 소위 엉덩이로 벌어먹는 여인들의 구역을 배경으로 하며, 게다가 여장남자마저 등장한다. 결말은 어떠한가? 사랑하는 이의 시신을 썩어문드러질 때까지 감추고 옆에 머물러 있는 아이의 행동. 개방적, 포용적 문화의 프랑스라는 점을 감안해도 어린이를 독자로 도저히 볼 수 없다.
선량한 사람들에게는 창녀의 아들이란 곧 뚜쟁이, 포주, 범죄행위, 청소년 범죄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내 오랜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우리 창녀의 자식들이 선량한 사람들에게 아주 좋지 않은 평판을 받고 있다는 것을. (P.163)
작중 인물은 하나같이 변두리 인간들이다. 주류 프랑스 사회에 편입되지 못하고 슬럼가에 사는 아프리카계 이주민들, 창녀들, 그리고 대학살의 트라우마를 떨쳐버리지 못하는 유대인. 창녀의 아이인 모하메드, 즉 모모는 부모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양육비를 받고 아이를 대신 길러주는 전직 창녀 로자 아줌마가 모모의 유일한 의지처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아이들과 달리 모모와 아줌마는 비록 티격태격하지만 그럼에도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무슬림인 모모와 유대인인 로자 아줌마.
우리가 세상에서 가진 것이라고는 우리 둘뿐이었다. 그리고 그것만은 지켜야 했다. 아주 못생긴 사람과 살다보면 그가 못생겼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정말로 못생긴 사람들은 무언가 결핍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장점이 된다. (P.257~258)
모모는 어리지만 생각은 어리지 않다. 자칭 철학자라고 하며, 감수성과 상상력이 풍부하다. 나이답지 않게 침착하며 시니컬한 구석도 있다. 그런 모모에게 생부의 흔적이 남아있을까 로자 아줌마는 언제나 걱정한다. 솔직히 애지중지하던 강아지를 문득 비싸게 팔아버리고 그 돈을 하수도에 처넣는 행위, 꿈속에서 자신을 돌보는 암사자를 불러내는 대목에서 누군들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모모는 혼자다. 로자 아줌마 외에 친절하던 하밀 할아버지도 노쇠하여 기억이 깜빡깜빡한다. 의사인 카츠 선생님은 결국 프랑스 사람이다. 불안정한 신분의 그들에게 프랑스는 친절하지 않다. 그에겐 자움 씨네 형제와 왈룸바 씨 일행은 더 친근하다. 그에게 사심 없는 동정과 친절을 베푸는 이는 여장남자인 롤라 아줌마로 모모의 눈엔 그가 더없이 좋은 사람이다.
불로뉴 숲에서 몸을 팔아서 먹고사는 롤라 아줌마는 여장 남자인데, 그녀가 우리를 많이 도와주었다고 말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녀만 같으면 세상은 많이 달라질 것이고 불행한 사람이 훨씬 줄어들 것이라고도 말했다. (P.278)
그럭저럭 버티어 가던 그들에게 난관이 닥친 것은 로자 아줌마의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서부터다. 점점 줄어들던 양육비는 끝내 끊겨버리고 아줌마는 정신을 놓기 일쑤다. 병원에 가라는 의사의 권고를 외면한 채 두 사람은 지하 은신처에서 아줌마의 최후를 같이 맞이한다.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제6번은 마지막 악장에서 삶을 거꾸러뜨리는 해머의 타격이 등장한다. 로자 아줌마는 나치 대학살의 아가리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으나 완전히 탈출하지는 못했다. 일평생을 매춘부로서, 전직 창녀로서, 엄습한 충격으로 심신은 서서히 무너져 갔다. 그에게 무슨 커다란 잘못이 있었던가? 운명은 평범한 여인을 헤어날 길 없는 고통의 심연에 던져버렸다. 모모가 보기에 그건 너무나 불공평하다.
로자 아줌마를 고통스런 생에서 구해주세요. 생이란 것은 아줌마를 엉덩이로 걷어차버렸어요. 그놈의 알지도 못하는 하느님 아버지란 작자 때문이에요. 그 작자는 어찌나 잘 숨어 있는지 낯짝도 안 보여요. (P.295)
모모는 자신의 삶을, 앞날을 궁금해 한다. 자신은 결코 엉덩이로 벌어먹는 생활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변두리, 밑바닥 삶을 경험한 그는 나이에 비해 인생에 조숙하다. 그에게 라몽과 나딘은 산다는 것의 본질을 아직 모르는 순진한 어른에 불과하다.
나는 수차례 거울 앞에 서서 생이 나를 짓밟고 지나가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를 상상했다. 손가락을 입에 넣어 양쪽으로 입을 벌리고 잔뜩 찡그려가며 생각했다. 이런 모습일까? (P.173)
에밀 아자르는 자신의 삶을 은폐하고 로맹 가리라는 새로운 가면의 삶을 살았던 연유가 궁금하다. 그 역시 작가로서 기존의 한계를 무너뜨릴 필요를 느꼈던 것인가. 그래서 에밀 아자르로서는 꿈도 꿀 수 없던 생소하면서도 과감한 문학세계를 창조하고 싶었을 수도 있으리라.
이 작품의 메시지가 사랑이라 하더라도 주인공 모모는 여전히 유보적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는 소위 평범하면서도 정상적인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를 둘러싼 사랑은 절름발이고 상처투성이였다. 새살이 돋아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다.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나는 로자 아줌마를 사랑했고, 계속 그녀가 그리울 것이다.
......
사랑해야 한다. (P.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