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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트란토 성 ㅣ 환상문학전집 2
호레이스 월폴 지음, 하태환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1764년에 출판된 괴기 소설의 효시다. 이 작품으로 호레이스 월폴은 공포 소설의 선구자라는 명예를 걸머쥐게 된다. 괴기 소설, 공포 소설, 그리고 고딕 소설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는 이 문학의 본질은 ‘환상’에 있다. 오늘날 환상 문학은 문학 장르를 넘어 애니메이션, 영화를 통해 이미 주류에 진입하였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비주류의 B급으로 치부되었는데 말이다.
<오트란토 성>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단지 시대적 선행이 아니라 작가가 서문에서 밝힌 명확한 문제의식과 목적의식에 있다.
기적, 유령, 마술, 꿈, 그리고 다른 초자연적 현상들은 현재 소설로부터 추방당했다. 그렇지만 이 작품의 작가가 글을 쓰던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서문>, P.18)
상상적 허구는 항상 있어왔지만, 공상에서 솟아나는 강력한 원동력은 소설이 일상적인 사건들에 엄격히 종속되면서 소설로부터 추방되었다. (<재판 서문>, P.10)
고딕풍의 장중한 성은 내부에 무수한 미로와 지하실 등 어둠침침한 영역이 도사려있다. 중세 기사도의 예법과 로맨스는 비록 퇴색했음에도 영광의 자취를 여전히 드리운다. 기독교가 절대 신앙으로서 위상을 공고히 하는 가운데, 미신과 이적(異蹟)은 종교와 이성의 틈을 파고들어 지워지지 않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여기에 어둠과 밤이 가세하면 괴기와 공포가 대체로 완성된다. 백주 대낮을 배경으로 하는 환상 문학은 공감대를 얻기 힘들다. 이성과 인지로 해결이 불가능할 때 사람은 두려움을 느끼고 의지할 무언가를 찾게 마련이다.
성의 하단부는 어두운 회랑들로 이뤄진 미로였기 때문에 그토록 고뇌에 찬 사람이 지하 동굴로 이르는 문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간간이 불어닥치는 돌풍 소리만이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어두운 미로 속에서 메아리로 울리면서 지하 통로의 무시무시한 침묵을 끊곤 했다. (P.41)
TV 막장드라마의 필수요소가 있다고 한다. 삼각관계와 출생의 비밀. 테오도르를 사이에 둔 마틸다와 이사벨라의 사랑이 순수하다면, 이사벨라를 향한 만프레드 대공과 마틸다를 향한 프레데릭 후작의 마음은 탐욕과 저열함이 배어 있다. 그 빗나간 정념과 광기가 합세하여 대공이 자신의 딸을 살해하는 비극적 사건이 발발하였다.
출생의 비밀은 어떤가. 거대한 투구, 거인의 손, 그리고 알퐁스의 동상은 초자연적 비밀이 개입할 것을 암시한다. 주변 인물들을 통해 반복하여 상기시키는 가문의 숨겨진 비밀. 테오도르와 알퐁스의 닮은 외모. 이처럼 내재한 복선은 결말에 이르러 다소 당혹스러운 이적으로 표출한다.
테오도르가 나타나자, 그 앞에서 만프레드가 서 있던 벽이 엄청나게 강력한 힘에 맞은 듯 무너져내렸다. 그리고 거대한 알퐁스의 영상이 폐허 가운데서 솟아올랐다. (P.185)
사필귀정과 권선징악이라는 진부한 전언은 외피에 불과하며, 독자가 흥미를 느끼는 부분은 만프레드 대공의 무서우리만치 집요한 결혼 의지다. 죽은 아들 약혼녀와의 결혼 추진은 누가 봐도 터무니없지만 그의 결심은 단호하다. 단순히 개인적 탐욕과 호색의 차원이 아님은 중반부에 이르러 명확해지는데, 자신의 가문과 공국의 소유권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방안이라고 할 때 그에게도 일말의 동정심이 생김은 어쩔 수 없다. 작중 당대 또는 우리 옛 조선 왕조에서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한 예외적 행위를 저지르는 인물의 사고에 대해 우리 시대의 사람은 완전한 이해와 공감을 가질 수 없다.
어둡고 침울한 작중 분위기에 따스함을 가져다주는 장면은 테오도르와 두 공녀 간 러브라인인데, 보다 노골적 익살미는 하인들에게서 드러난다. 특히 만프레드 대공과 비안카의 대화는 이사벨라의 비밀을 캐려는 대공의 절실함과 어리석게 느껴질 정도로 의도된 비앙카의 과도한 순진함이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이들 간에 주고받는 동문서답은 비록 어이없지만 긴장과 중압에 허덕이는 작중 분위기를 이완시키고 있다.
부록으로 월터 스콧과 폴 엘뤼아르의 작품비평을 수록하고 있는데, 특히 전자는 20쪽 가깝게 상세한 평을 하고 있어 작품 전모를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두 사람의 작품명 개요를 소개해본다.
<오트란토 성>에서는 옛 로망에서 나타나는 기사도 풍의 위압적인 어조와 사건의 화려한 극적 전환에다가 현대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 또는 그려져야 하는 인간 성격의 날카로운 묘사 및 감정과 정열의 대비를 합치려 하였다. (월터 스콧, P.196)
<오트란토 성>은 회화적인 드라마이다. 그 형태는 몹시 신랄하고 거칠지만 사랑의 불행을 가장 잘 재단했다. 유일한 불멸자들인 욕망들은 냉정하게 그들의 길을 간다. (폴 엘뤼아르, P.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