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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토피아 뉴스 (보급판 문고본)
윌리엄 모리스 지음, 박홍규 옮김 / 필맥 / 2008년 7월
평점 :
19세기 후반 자본주의의 본격적 전개에 따라 사회적, 문화적으로 부정적 인식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안내해 주리라는 장밋빛 전망 대신 잿빛 하늘이 드리우기 시작함을 예민한 사람들은 알아채기 시작하였다. 흡사 소위 제4차 산업혁명에 열광하는 작금의 현실과도 남다르지 않다.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우선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과연 이것이 문학으로서의 소설인지 아니면 미래세계를 예언한 사회학 내지 정치학 저술인지 경계가 모호하다. 형식은 문학이지만 내용은 비문학이다. 이전의 유토피아 소설도 대체로 작품 의도라는 측면에서는 유사하지만, 이 작품처럼 대놓고 정치적 목적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았다.
여기서 묘사하는 당시로서는 머나먼 미래인 서기 2150년 미래사회의 모습은 분명 이상적 유토피아에 가깝지만 전혀 미래답지 않고 오히려 회고적이다. 작품해설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미래보다는 산업화 이전의 중세 시골사회의 정경에 가깝다고 함이 사실이다. 그것은 퇴행적 의미라기보다는 이 작품의 의도가 도래하지 않은 이상향을 추구하기보다 현실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하는 제국주의적 산업자본주의의 폐해를 노정하고 그 문제점을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인 연유라고 하겠다.
산업자본주의의 폐해는 노동자가 자본에 종속당한다는 데 있다. 우리는 자아실현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고자 노동을 하지 않는다. 노동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필요악에 불과하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시장의 균형은 허상에 지나지 않으며, 자본을 소유한 자들은 상류층이 되어 정계와 재계를 휘어잡고, 나머지는 노동을 통해 연명한다. 법과 공권력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든든한 안전장치다. 학교 교육도 공장과 다를 바 없으며, 남녀 관계도 차별을 당연시하였다. 모두가 최상의 가치로 인정받는 신성한 사유재산에서 귀결된 것이다.
작가는 단지 산업적 영역을 벗어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각 방면에 전 방위적으로 비판의 날을 세운다. 템스 강을 여행하면서 마주친 사람과 정경, 해몬드 노인과의 장시간에 걸친 대화에서 화자[작자]는 추악하고 불행하였던 당대 사회가 어떻게 낯설면서도 행복이 가득한 사회로 변모하였는지 낱낱이 질문하고 답변을 듣는다. 이 장면이 작품 전체 중 가장 길면서도 내용상 핵심적인 대목이라고 하겠다.
이제 전제정치는 끝났고, 우리는 더 이상 그런 기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유롭기 때문에 그런 기관은 결코 이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당신이 생각하시는 의미의 정부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P.139)
정치와 관련해 우리는 매우 잘하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P.150)
우리는 오직 필요에 의해서만 물건을 만듭니다. 사람들이 전혀 알지도 못하고 통제하지도 못하는 막연한 시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마치 자신을 위해 물건을 만드는 것처럼 이웃이 사용할 물건을 만듭니다. (P.169)
시장에서 최고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 그럼으로써 남보다 많은 사적 재산을 획득하고 보유하는 것이 권장되는 체제. 시장에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가사 노동과, 시장 자체가 형성될 수 없는 자급경제는 무가치한 것으로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모두가 시장과 사적 소유를 향해 맹목으로 질주하는 세상, 그 속에서 우리는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산다. 우리는 행복한가? 작가의 물음도 마찬가지다.
혁명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분명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혁명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 외에 그 어떤 것으로 반혁명의 시작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나날의 행복한 일이 없이는 진정한 행복이란 불가능하지요. (P.162)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 속에 차차 즐거움을 심어 넣게 된 것이지요. 나아가 우리는 그런 즐거움을 자각하게 됐고, 그것을 육성했으며, 그것을 한껏 누리는 태도를 갖게 됐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이 얻어졌고, 우리는 행복한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그러하기를 바랍니다. (P.225)
극심한 빈부격차가 존재하고 계급 간 대립이 치열하게 펼쳐지는 사회가 아니며, 개인이 생계를 위한 마지못해 노동을 하지 않으며, 일하는 행위 자체가 즐거움을 안겨주며 정신과 신체 활동이 공히 동등한 평가를 받는 사회. 소수 층의 절대적 부의 축적을 배제하고 모두가 적정한 생활수준을 유지할 정도의 경제를 유지하는 사회. 이곳의 삶은 자연히 행복할 수밖에 없다.
현재로 비약하자면 미국과 스위스의 삶 중 어디가 바람직한가와 일맥상통한다. 혹자는 이렇게 반박할지 모른다. 스위스가 행복지수가 높고 행복할지 모르지만 인류 역사에 기여한 공적이 없다며. 우스운 일이다. 역사라고 하는 것은 사건과 사고의 집합체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 삶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다. 질병과 재해가 난무하고, 거대한 전쟁으로 수많은 인명이 몰살당할 때 역사는 관심을 갖는다. 역사와 행복을 교환할 인물이 있을지 자못 의심스럽다.
나는 그가 가리키는 것들을 바라보면서 그 정교함과 풍부한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그것들은 생활 그 자체를 즐거움으로 받아들이고, 인류의 공통된 욕구를 만족시키는 일과 그렇게 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일이 최선의 인간에게 알맞은 일임을 마침내 알게 된 사람들이 만든 작품이었다. (P.301)
나는 강에서 평야로, 다시 평야에서 언덕으로 펼쳐지는 이 아름다운 시골의 풍경을 떠올렸다. 부를 포기하고 풍요를 얻은 이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렸다. 이내 내 마음에 기쁨이 넘쳤다. (P.334)
작가는 당대 젠체하는 지식인들에 대한 따끔한 비판도 아끼지 않는다. 육체노동을 경시하고 정신노동을 우월시하며, 계급적 사고에 물들어 있으며 학문과 예술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숭배하는 지적인 사람들. 시장상업주의 못지않게 유럽제국주의의 세계 침탈도 그의 펜을 피해가지 못한다. 작품해설에 따르면 모리스와 사회주의자들은 제국주의의 선봉장인 당대의 영웅 탐험가 스탠리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고 한다. 진정한 사회주의 운동가로서 모리스의 진면모라고 하겠다.
윌리엄 모리스는 사회주의 사상가인 동시에 예술가로서도 후대에 지대한 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존 러스킨의 감화를 받은 그는 소위 공예예술의 주창자이며 디자인 영역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기계 대신 수공, 시장 대신 생활을 강조하는 그의 예술관은 이 작품 속에도 그대로 녹아 있다.
만인이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것이라면 예술이 무슨 소용인가? 만인이 나눌 수 있는 예술을 모리스는 생활예술이라고 불렀다. 제작자에게나 사용자에게나 행복을 느끼게 하고 민중을 위해 민중에 의해 이루어지는 생활예술이야말로 모든 예술의 근본이라고 모리스는 믿었다. (P.391, ‘작품해설’에서)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이 작품을 통해 윌리엄 모리스가 소설가뿐만 아니라 저명한 시인이자 예술가이며, 평생 굳건한 사회주의자로서 사상사적으로도 중요한 인물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그의 지향점이 발전적이 아니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솔직히 그의 주장 중 상당수는 현대사회와 현대인이 받아들이기 어렵다. 우리는 기계와 대량생산, 시장의 개념에 너무 익숙하고 물질적 풍요로움에 길들여져 버렸다.
시장은 완전하지도 공정하지도 못하다. 부실한 시장을 떠받치기 위해 무수한 사람들이 고통 받는 현실을 우리는 각종 매체를 통해 접한다. 내가 그네들이 아닌 점에 안도하며, 나와는 다른 세상 이야기라고 치부하며 위안 삼는다. 기계가 육체노동을 대체하듯이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인공지능이 단순반복적인 정신노동을 대체하면 우리의 미래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궁금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모두가 고부가가치의 창의적인 지적 활동에 매진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 작품이 오늘날도 여전한 가치가 있다면, 당대와 현대의 사회가 본질적으로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점을 드러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