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테크 바벨의 도서관 10
윌리엄 벡퍼드 지음, 문은실 옮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 / 바다출판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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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야화>가 있다. 유럽인들은 오리엔트의 이국풍, 관능성과 잔혹성을 향유할 수 있다. <파우스트>가 있다. 괴테의 것이든 선배격인 크리스토퍼 말로의 것이든 본질은 대동소이하다. 절대 지식을 구하는 인물이 악마와 계약을 맺고 끝내는 파멸한다. 전자의 배경과 후자의 인물을 한데 버무려놓는다면 바로 이 책 <바테크>가 해당한다. 말미의 작가 소개에서도 이 점을 지적한다.

 

동양은 벡퍼드의 상상력을 자극했던 요소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요소이다. 하지만 그것과 동시에 벡퍼드가 호흡했던 파우스트의 분위기를 간과해선 안 된다. (P.196)

 

파우스트를 칼리프 바테크로, 메피스토펠레스를 이단자 인도인으로 대체한다면 무리가 없다. 아 물론 바테크의 어머니인 왕비 카라티스는 특별한 인물이지만. 오히려 이단자 인도인과 왕비 카라티스를 합치면 보다 완전한 메피스토펠레스에 가깝다. 누로니하르는 그레트헨과 헬레나의 조합이다.

 

모르는 것으로 남겨 두어야 할 것을 알려고 하고, 제 힘을 넘어서는 것을 짊어지려고 애쓰는 경솔한 인간들, 필멸의 자들에게 비탄을 내려라. (P.34)

 

18세기 고딕소설의 효시 격인 이 소설은 굉장히 그로테스크하다. 작가는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정통 신앙인 이슬람을 배신하는 칼리프의 광기와 잔인성을 극단으로 몰고 가기 위해 여러 설정을 집어넣고 있다. 공이 된 인도인을 뒤쫓는 광기에 사로잡힌 바테크와 백성들의 장면 이성을 넘어선 맹목적 열정과 광기가 해학미마저 자아낼 정도다. 성지 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사제들이 갖고 온 성스러운 빗자루에 대한 바테크의 야비한 모욕은 정통 신앙에 대한 완벽한 모독인 동시에 이슬람교에 대한 조소가 은연중 담겨 있다.

 

이 작품은 바테크 외에 강렬한 개성을 발휘하는 조연도 여럿 등장한다. 그중 칼리프의 모친인 왕비 카라티스의 존재감이 두드러진다.

 

이 왕비는 자신이 여자로서 사악해질 수 있을 만큼 사악하다는 가책은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것은 모든 경쟁에서 우월함을 뽐내는 성()에게는 뜻하는 것이 적지 않았다. (P.60)

 

소개부터 강렬하게 등장하는 왕비는 백여 명의 백성들을 가벼운 마음으로 교살하는 것을 시작으로 살생과 악행을 서슴지 않고 자행한다. 이에 비한다면 오십 명의 아이들을 낭떠러지에서 집어 던진 바테크의 소행은 미약할 정도다. 참으로 잔인한 모자라고 하겠다. 더욱이 카라티스는 어둠의 마법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으니 마녀라고 불릴 만할 정도다. 카라티스는 아들에 절대 영광을 부여하려는 맹목적 애정을 가지고 작품 내에서 시종일관 아들을 사악한 길로 바르게 인도하기 위해 온갖 수고를 무릅쓰며 악과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데 매진한다.

 

카라티스가 누구인가. 다른 사람이라면 말도 못하게 끔찍하게 여겨 두려워할 일인데도, 그녀는 무엇이 됐든지 간에 온 힘을 다해 즐기는 사람이 아니던가. (P.148)

 

전체적으로 어둡고 악취가 진동하는 작중 분위기에서 한 가닥 밝음과 웃음의 줄기를 던져주는 인물은 누로니하르와 바바발루크다. 우스꽝스러운 우직함을 견지하는 바바발루크에게는 동정심이 생겨날 정도다. 반면 누로니하르는 양면성을 지닌다. 전반부의 그녀는 순진하고 자유로우며 독자성을 지닌 인물로 묘사되는데, 바테크와 행동을 같이한 이후 칼리프보다도 더 적극적이다. 바테크를 구원할 여인상으로 전개될 줄 알았던 누로니하르의 타락은 더없이 극적이기에 한층 인상적이다. 어찌하겠는가, 바테크와 누로니하르의 만남과 결합은 어떤 장애도 꺾지 못할 운명인 것을.

 

제아무리 악인에게도 마지막 구원의 기회는 남아있다. 하지만 선량한 지니가 하는 진심 어린 충고와 경고마저 바테크는 분연히 외면한다. 이후 에블리스와 그의 저주받을 디베들이 움켜쥔 지옥의 제국(P.169)에 입장하는 두 사람. 그들 앞에 펼쳐진 무수한 보화와 가슴을 움켜쥐고 사방을 배회하는 영혼들. 동경하던 위대한 술탄 솔리만의 겁벌을 목도하며 겁에 질린 바테크와 누로니하르. 심판의 순간에 흘러나와 선고하는 목소리와 함께 바테크의 편력은 최후에 이른다. 마지막 단락의 바테크와 굴첸루즈의 비교는 고딕소설의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자그만 사족이다. 부분적 진실도 담겨 있으니 인간 본연의 순수성과 무욕을 지킨 사람의 행복한 미래다.

 

기획자인 보르헤스에 따르면 벡퍼드는 비록 허술하지만 후대 작가들이 창조해 낸 지옥의 화려함을 예고했다고 평한다(P.14). 우리가 고딕소설을 읽는 사유와 재미가 여기에 있다. 일상의 현실과 통상의 윤리관을 훌쩍 건너뛰고 상상과 욕망을 자극하고 확장함으로써 오히려 현재의 우리 자신을 보다 다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 그렇기에 비주류 문학으로서 꾸준히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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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투스트라 2019-01-31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봤습니다^^
 
윌리엄 모리스 노동과 미학 시민 교양 신서 6
윌리엄 모리스 지음, 서의윤 옮김 / 좁쌀한알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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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

1. 예술과 노동

2. 사회주의의 이상: 예술

3. 이 세상의 예술과 아름다움

4. 윌리엄 모리스의 디자인

 

전자 세 편은 모리스가 예술과 노동 내지 사회주의를 주제로 한 강연록에 해당한다. 마지막 부분은 디자인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모리스의 다양한 디자인의 실례를 소개하고 있다. 앞서 <에코토피아 뉴스>로 윌리엄 모리스라는 인물을 알게 되었고, 풍부한 작품해설을 통해 예술가로서의 모리스와 사회사상가로서 모리스라는 양면성에 큰 호기심을 품었다. 이는 마치 존 러스킨과 흡사한 양상인데, 모리스가 러스킨에게서 감화를 받았다고 하니 새삼 우연은 아니다.

 

모리스는 러스킨보다 한층 적극적이고 활동적이다. 러스킨이 이론가에 가깝다면 모리스는 이론가인 동시에 행동가적 면모가 강하다. 그는 특히 노동자 대중을 상대로 사회주의를 설파하는 강연을 많이 행하였으며, 사회주의 시각에서 예술의 역사와 의미를 설파한다.

 

모리스에게 있어 예술은 노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의 예술관은 퍽이나 독자적인데, 인간의 노동을 기반으로 하여 삶의 기쁨을 창출하는 것을 예술로 간주한다. 전문 인력에 의한 극도로 세밀하게 다듬고 가공한 것도 예술이지만, 상업적 관심 없이 실제 사용을 위해 건전한 정신과 노동을 통해 만든 수공예를 더욱 예술의 본질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한다.

 

예술이란 훨씬 더 큰 범위로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의 노동에서 나온 아름다움,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주변 환경을 포함한 인간의 삶 속에서 그 사람이 취하는 관심의 표현, 즉 삶의 기쁨이 내가 말하는 예술인 것입니다. (<예술과 노동>, P.9)

 

모리스는 예술 행위에 있어 주체성을 중시한다. 자의에 의하지 않은 노동, 상업적 관심에 치중한 용도, 기계에 의한 생산의 대량성. 이 모든 것들은 삶의 아름다움을 빼앗는 요소로서 참다운 예술로 인정하지 않는다.

 

모리스의 관점에서 당대의 노동과 예술은 모두 왜곡되어 있다. 한마디로 병들어 있는 상태인 것이다. 자신의 부를 극대화하기 위해 타인의 삶을 지배하는 사회, 생계를 꾸리기 위해 삶의 의지를 저당 잡힌 개인이 넘쳐나는 곳이 당대의 영국, 그리고 런던이다. 사유재산과 상업적 자본주의의 폐해가 극심하게 창궐하던 현실을 목도한 모리스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사유의 귀결이라고 하겠다. 그의 글에서 현저하게 드러나는 당대에 대한 날선 표현은 위기감과 답답함의 발로이리라.

 

노동자는 자신의 일에서 기쁨을 가질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데 어떤 목소리도 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유-노동자가 되었고, 그래서 그에게서 이윤을 뽑아 내는 주인의 고갯짓과 부름에 따르는 기계가 되었습니다. (<예술과 노동>, P.37)

 

최소한 아름다움과 고상한 삶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사유 재산은 공공의 강탈이라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사회주의의 이상>, P.59)

 

병든 예술을 고치는 길은 왜곡된 노동의 본질을 회복하는 데 있다. 무위도식하면서 부를 독점하는 불평등 체제를 깨뜨리고 모두가 평등한 노동을 통해 분배의 공정을 보장받는 사회. 빈부격차가 사라지는 이상사회 속에서 진정한 예술이 재탄생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나날의 노동에서 삶의 온전한 기쁨을 발견하고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이상향의 가시적 모습을 모리스는 <에코토피아 뉴스>에 재현해 놓고 있다. 작품을 읽었을 때의 어정쩡한 당혹감의 실체는 바로 적나라한 사상성에 있었던 것이다.

 

모리스가 지향한 삶의 모습은 중세 유럽을 닮아 있다. <예술과 노동>에서 그는 예술과 노동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그리스 로마 시대에 비하면 암흑기로 인식되는 중세가 부의 분배와 삶의 기쁨의 분배에서 보다 공평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혹자는 모리스의 사상을 과거회귀로 오독하는데, 모리스 자신은 중세로 돌아가야 한다고 결코 주장하지 않는다. 그가 주목한 것은 중세의 상대적인 자유로움과 평등성이다. 그 속에서 수공예 정신이 싹텄다고 본다.

 

물건을 만드는 데는 그 물품이 수작업으로 만들어졌든, 수작업을 돕는 기계로 만들어졌든, 완전히 기계가 대체해 만들어졌든 수공업자의 정신이 어느 정도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수공업자의 정신에서 본질적인 부분은 바로 물건을 그 자체로 바라보고 그 물건의 본질적인 쓰임을 자신이 하는 일의 목표로 삼는 본능이다. (<사회주의의 이상>, P.66)

 

예술의 본질과 예술가의 정신을 되새겨볼 때 모리스가 지향한 예술은 부유한 소수를 위한 예술이 아니라 노동자 대중, 즉 민중 예술임은 자명하다. 그가 다양한 디자인에 관심을 쏟은 연유가 여기서 나타난다. 예술은 생활 속에서 민중과 함께 살아 숨 쉬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 공유되지 않는다면 예술은 자라나고 번영하고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로써는 그래야 한다고 바라지 않습니다......예술을 받아들인다면 예술은 일상의 일부가, 그 일상은 모두의 일상이 되어야만 합니다. 예술은 우리가 가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을 것이고 예술이 없는 곳은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예술과 아름다움>, P.97)

 

아무리 생각해 봐도 소위 장식 미술이라고 불리는 저 소예술을 대예술에서 분리해 낼 수 없었다. (<해제>, P.211)

 

이 책은 윌리엄 모리스의 예술 및 사회사상을 소개함과 동시에 디자이너로서의 모리스를 알 수 있게끔 진귀한 기회를 제공한다. 즉 책 후반부의 1/3 가량에 걸쳐 그의 디자인-타이포그래피, , 일러스트레이션 및 패턴 디자인-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데 무척 이채로운 동시에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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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러스킨 라파엘 전파 시민 교양 신서 7
존 러스킨 지음, 임현승 옮김 / 좁쌀한알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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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러스킨은 사회 사상가이기 전에 당대의 저명한 미술평론가였다. 그의 대표적 저서인 <근대화가론>은 이러한 면모를 대변하는 거작이라고 하겠다. 그는 당대의 일군의 젊은 화가들이 일으킨 새로운 회화 작풍을 옹호하며 이를 하나의 사조로서 적극적으로 체계화하기도 하였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의 표제이기도 한 라파엘 전파이다.

 

서양회화에 무지한 나로서는 전파가 있으니 응당 라파엘 후파도 있겠구나 싶었다. 라파엘이 소위 르네상스의 세 거장 중 한 명인 라파엘로를 지칭한다는 것도 근자에나 알았을 정도다. 러스킨에 따르면 라파엘 개인은 최고의 거장으로서 이후 서양 회화의 표준으로 군림할 정도다. 문제는 그 후대가 라파엘의 미를 전범으로 삼고 라파엘의 길을 따르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으며 한 치도 그 길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데 있다. 어느 영역도 마찬가지지만, 교조화된 체제에서는 독창성과 개성이 숨 쉴 수 없다. 절대미는 존재하지 않는 법이므로.

 

청년들은 남달리 영민한 무언가를 지극히 독창적으로 이루어야 함과 동시에 이 남다른 무언가라는 것은 라파엘로 화풍의 규칙들을 철저히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P.39)

 

이 전복되어 마땅한 특정한 제도란 바로 강직함과 진실함의 희생 아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을 주된 특징으로 하는 제도를 말한다. (P.41)

 

러스킨이 라파엘 전파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그들이 진실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그에게 있어 진실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회화에서 윌리엄 터너를, 건축에서 고딕 양식을, 그리고 사상에서 사회주의를 높이 평가하고 주창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같이 진실을 향하고 있음에서다. 회화에서 그가 찾는 진실은 무엇일까?

 

위대한 화가들은 모두 자신이 보거나 이미 본 것만 그림에 담는다는 진실이 보다 많은 이의 이해를 얻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바로 이 점에서 라파엘 전파주의, 라파엘주의, 터너주의는 교육이 끼칠 수 있는 영향에 있어서만큼은 일말의 차이도 없다. (P.118)

 

러스킨은 이런 관점에서 라파엘 전파의 화가들을 죽 훑어 나가며 품평한다. 그리고 밀레이를 이들의 대선배격인 윌리엄 터너와 함께 나란히 설만한 최고의 예술가로 추켜올린다. 이 대목에서 씁쓸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부록의 상세한 연표에서 러스킨 부인과 밀레이의 불륜, 그리고 이어진 이혼 소송을 접하면서다. 나쁘게 보면 배은망덕이며, 다른 시각으로 보면 진정한 사랑을 발견한 셈인데 러스킨의 복잡다단한 심경을 헤아리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주된 목적은 라파엘 전파에 앞서 회화의 진실을 추구했던 윌리엄 터너를 찬미하고 그의 위대함을 대중 앞에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함이며, 가장 큰 미덕임을 알아야 한다. 책 분량의 절반 이상을 할애하여 간명한 표현으로 핵심을 짚어가며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어 윌리엄 터너에 대해서 잘 몰랐던 나같은 사람조차도 단번에 그에게 호기심을 갖고 작품들을 보고 싶도록 만들 정도다.

 

러스킨은 윌리엄 터너의 작품세계를 3기로 나누어서 각 시기별 주요 작품들에 대한 독자적 해석을 통해 그의 작풍의 장단점과 개별 작품들의 미적 우열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해석과 평가가 통설로서 인정받는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독자 입장에서는 매우 진실 되고 설득력 있음을 밝힌다. 특히 터너의 본격적 개성이 발현되고 절정에 달하는 제2기에 대한 러스킨의 글 - 특히 <몽세니 고개>를 평한 - 을 한번 살펴보면 누구라도 그 생동하는 적확한 표현에 매료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몸짓과 활력이 움트는 모든 장면에서 기쁨이 포착되었으며, 오랜 관찰을 거친 외재적 사실성에 대한 단순 묘사에 그치지 않고 터너 자신의 내재한 감정에 기원을 두는 모종의 위력과 분노를 통해 작품을 이루는 선 하나하나가 비로소 생동한다. (P.89)

 

바로 이런 점들이 터너 제2시기의 특색, 즉 첫 시기와 구별되는 주요한 특색이다. 화가로서 터너의 내면에 태동하는 어떤 원동력, 안정감은 줄이되 구상 속 넘치는 힘과 번뜩이는 정열은 드높여 주는 새로운 활력. (P.90)

 

러스킨이 터너에게 맹목적인 찬미만 한다고 폄하할 수는 없다. 매너리즘에 빠진 나머지 제2시기의 후반부는 몇 편을 제외하고는 졸작들만을 생산해 냈다고 혹평을 아끼지 않는 게 러스킨이다. 이 대목에서 러스킨의 독특한 예술 작업관이 등장한다. 그림을 한층 그럴 듯하게 보이고자 공들여 다듬고 덧칠하는 수고’(러스킨은 이렇게 표현한다.)가 두드러질수록 예술의 위대성은 타락한다고. 러스킨은 본질 외의 것을 덧붙이거나 꾸미는데 거부감을 지닌 듯하다.

 

진정으로 품격이 넘치는 작품들은 자신의 생각을 수고없이 표현해 낸 작업들, 무아의 경지에서 집착 없이 이루어진 작업들 가운데 있다. (P.120)

 

러스킨에 따르면 터너의 제3기는 이러한 폐단을 극복하고 단순명료한 가운데 풍부한 색감으로 평온한 정서를 그리는데 성공했다고 하며, “인간의 지성이 낳은 가장 고결한 풍경화”(P.134)로 평가한다. 이처럼 러스킨이 터너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인습과 인위를 타파하고 자신이 깨닫고 발견한 자연의 진실을 화폭에 담으려고 노력했고 그것이 성공을 거두었다고 본 연유다.

 

러스킨은 라파엘 전파에 대한 글을 쓰면서 그들과 윌리엄 터너를 연결시켜 양자 간의 동질성을 대중에게 뚜렷이 각인시키고자 하였다. 그것은 바로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보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비단 예술에만 국한할 수 없고 그리되어서도 안 된다. 인생과 사회의 모든 면에서도 본질은 마찬가지이리라. 러스킨이 예술에서 사회로 시선을 돌릴 연유는 동일한 맥락에서라고 하겠다. 진실 되지 못한 사회에서 진실한 예술이 탄생할 수 없으므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러스킨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같은 범부들도 품을 수 있는 위대함이 존재한다면, 적어도 윌리엄 터너의 행보를 따르는 것이야말로 이를 도모하는 최선의 길일 것이다.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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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토피아 뉴스 (보급판 문고본)
윌리엄 모리스 지음, 박홍규 옮김 / 필맥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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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자본주의의 본격적 전개에 따라 사회적, 문화적으로 부정적 인식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안내해 주리라는 장밋빛 전망 대신 잿빛 하늘이 드리우기 시작함을 예민한 사람들은 알아채기 시작하였다. 흡사 소위 제4차 산업혁명에 열광하는 작금의 현실과도 남다르지 않다.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우선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과연 이것이 문학으로서의 소설인지 아니면 미래세계를 예언한 사회학 내지 정치학 저술인지 경계가 모호하다. 형식은 문학이지만 내용은 비문학이다. 이전의 유토피아 소설도 대체로 작품 의도라는 측면에서는 유사하지만, 이 작품처럼 대놓고 정치적 목적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았다.

 

여기서 묘사하는 당시로서는 머나먼 미래인 서기 2150년 미래사회의 모습은 분명 이상적 유토피아에 가깝지만 전혀 미래답지 않고 오히려 회고적이다. 작품해설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미래보다는 산업화 이전의 중세 시골사회의 정경에 가깝다고 함이 사실이다. 그것은 퇴행적 의미라기보다는 이 작품의 의도가 도래하지 않은 이상향을 추구하기보다 현실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하는 제국주의적 산업자본주의의 폐해를 노정하고 그 문제점을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인 연유라고 하겠다.

 

산업자본주의의 폐해는 노동자가 자본에 종속당한다는 데 있다. 우리는 자아실현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고자 노동을 하지 않는다. 노동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필요악에 불과하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시장의 균형은 허상에 지나지 않으며, 자본을 소유한 자들은 상류층이 되어 정계와 재계를 휘어잡고, 나머지는 노동을 통해 연명한다. 법과 공권력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든든한 안전장치다. 학교 교육도 공장과 다를 바 없으며, 남녀 관계도 차별을 당연시하였다. 모두가 최상의 가치로 인정받는 신성한 사유재산에서 귀결된 것이다.

 

작가는 단지 산업적 영역을 벗어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각 방면에 전 방위적으로 비판의 날을 세운다. 템스 강을 여행하면서 마주친 사람과 정경, 해몬드 노인과의 장시간에 걸친 대화에서 화자[작자]는 추악하고 불행하였던 당대 사회가 어떻게 낯설면서도 행복이 가득한 사회로 변모하였는지 낱낱이 질문하고 답변을 듣는다. 이 장면이 작품 전체 중 가장 길면서도 내용상 핵심적인 대목이라고 하겠다.

 

이제 전제정치는 끝났고, 우리는 더 이상 그런 기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유롭기 때문에 그런 기관은 결코 이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당신이 생각하시는 의미의 정부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P.139)

 

정치와 관련해 우리는 매우 잘하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P.150)

 

우리는 오직 필요에 의해서만 물건을 만듭니다. 사람들이 전혀 알지도 못하고 통제하지도 못하는 막연한 시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마치 자신을 위해 물건을 만드는 것처럼 이웃이 사용할 물건을 만듭니다. (P.169)

 

시장에서 최고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 그럼으로써 남보다 많은 사적 재산을 획득하고 보유하는 것이 권장되는 체제. 시장에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가사 노동과, 시장 자체가 형성될 수 없는 자급경제는 무가치한 것으로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모두가 시장과 사적 소유를 향해 맹목으로 질주하는 세상, 그 속에서 우리는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산다. 우리는 행복한가? 작가의 물음도 마찬가지다.

 

혁명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분명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혁명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 외에 그 어떤 것으로 반혁명의 시작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나날의 행복한 일이 없이는 진정한 행복이란 불가능하지요. (P.162)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 속에 차차 즐거움을 심어 넣게 된 것이지요. 나아가 우리는 그런 즐거움을 자각하게 됐고, 그것을 육성했으며, 그것을 한껏 누리는 태도를 갖게 됐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이 얻어졌고, 우리는 행복한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그러하기를 바랍니다. (P.225)

 

극심한 빈부격차가 존재하고 계급 간 대립이 치열하게 펼쳐지는 사회가 아니며, 개인이 생계를 위한 마지못해 노동을 하지 않으며, 일하는 행위 자체가 즐거움을 안겨주며 정신과 신체 활동이 공히 동등한 평가를 받는 사회. 소수 층의 절대적 부의 축적을 배제하고 모두가 적정한 생활수준을 유지할 정도의 경제를 유지하는 사회. 이곳의 삶은 자연히 행복할 수밖에 없다.

 

현재로 비약하자면 미국과 스위스의 삶 중 어디가 바람직한가와 일맥상통한다. 혹자는 이렇게 반박할지 모른다. 스위스가 행복지수가 높고 행복할지 모르지만 인류 역사에 기여한 공적이 없다며. 우스운 일이다. 역사라고 하는 것은 사건과 사고의 집합체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 삶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다. 질병과 재해가 난무하고, 거대한 전쟁으로 수많은 인명이 몰살당할 때 역사는 관심을 갖는다. 역사와 행복을 교환할 인물이 있을지 자못 의심스럽다.

 

나는 그가 가리키는 것들을 바라보면서 그 정교함과 풍부한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그것들은 생활 그 자체를 즐거움으로 받아들이고, 인류의 공통된 욕구를 만족시키는 일과 그렇게 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일이 최선의 인간에게 알맞은 일임을 마침내 알게 된 사람들이 만든 작품이었다. (P.301)

 

나는 강에서 평야로, 다시 평야에서 언덕으로 펼쳐지는 이 아름다운 시골의 풍경을 떠올렸다. 부를 포기하고 풍요를 얻은 이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렸다. 이내 내 마음에 기쁨이 넘쳤다. (P.334)

 

작가는 당대 젠체하는 지식인들에 대한 따끔한 비판도 아끼지 않는다. 육체노동을 경시하고 정신노동을 우월시하며, 계급적 사고에 물들어 있으며 학문과 예술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숭배하는 지적인 사람들. 시장상업주의 못지않게 유럽제국주의의 세계 침탈도 그의 펜을 피해가지 못한다. 작품해설에 따르면 모리스와 사회주의자들은 제국주의의 선봉장인 당대의 영웅 탐험가 스탠리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고 한다. 진정한 사회주의 운동가로서 모리스의 진면모라고 하겠다.

 

윌리엄 모리스는 사회주의 사상가인 동시에 예술가로서도 후대에 지대한 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존 러스킨의 감화를 받은 그는 소위 공예예술의 주창자이며 디자인 영역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기계 대신 수공, 시장 대신 생활을 강조하는 그의 예술관은 이 작품 속에도 그대로 녹아 있다.

 

만인이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것이라면 예술이 무슨 소용인가? 만인이 나눌 수 있는 예술을 모리스는 생활예술이라고 불렀다. 제작자에게나 사용자에게나 행복을 느끼게 하고 민중을 위해 민중에 의해 이루어지는 생활예술이야말로 모든 예술의 근본이라고 모리스는 믿었다. (P.391, ‘작품해설에서)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이 작품을 통해 윌리엄 모리스가 소설가뿐만 아니라 저명한 시인이자 예술가이며, 평생 굳건한 사회주의자로서 사상사적으로도 중요한 인물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그의 지향점이 발전적이 아니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솔직히 그의 주장 중 상당수는 현대사회와 현대인이 받아들이기 어렵다. 우리는 기계와 대량생산, 시장의 개념에 너무 익숙하고 물질적 풍요로움에 길들여져 버렸다.

 

시장은 완전하지도 공정하지도 못하다. 부실한 시장을 떠받치기 위해 무수한 사람들이 고통 받는 현실을 우리는 각종 매체를 통해 접한다. 내가 그네들이 아닌 점에 안도하며, 나와는 다른 세상 이야기라고 치부하며 위안 삼는다. 기계가 육체노동을 대체하듯이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인공지능이 단순반복적인 정신노동을 대체하면 우리의 미래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궁금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모두가 고부가가치의 창의적인 지적 활동에 매진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 작품이 오늘날도 여전한 가치가 있다면, 당대와 현대의 사회가 본질적으로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점을 드러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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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천등운 : 현대어본 조선 왕실의 소설 4
임치균.이민희.이지영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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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여 면에 달하는 고전소설로서 보기 드문 장편이다. 주제의식적인 면에서는 뛰어난 재능의 몰락한 명가 자손이 온갖 고초를 겪다가 큰 인물이 된다는 점과 정혼한 남녀가 갖은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상호 간의 정절을 유지하다는 점에서 평범하다. 나는 이 소설을 여태껏 읽은 작품 중에서 가장 극적이며,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무수한 굴곡에 독자가 질릴 정도라고 평하고 싶다.

 

여타 작품과는 차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주배경이 청루, 즉 오늘날로 치면 유흥가 내지 집창촌이라는 점이다. 불가항력의 까닭으로 청루에 몸을 의탁하게 된 왕석작. 그를 둘러싼 환경과 그에게 닥치는 유혹을 기술하려면 자연히 청루 자체에 관한 이야기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청루의 여러 퇴폐적인 장면, 양민에서 강제로 몸을 버리고 창가로 타락한 여인들, 그리고 청루를 통해 부를 축적하는 포주 일당 등. 낙선재본이라는 조선 왕실의 소설에서 주로 여인들이 읽을 책인데 이토록 청루의 소상한 현실이 담겨 있다는 점이 의외로 놀랍다.

 

청루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후마라고 하겠다. 왕석작이 몸을 의탁한 포주의 누이이자 역시 포주인데, 청루 세계에서 온갖 인간 군상을 상대한 탓에서 사람을 대하는 기술이 능수능란하다. 선인과 악인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능력으로 왕석작 또한 후마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자칫 큰 낭패를 볼 뻔하였다.

 

후마의 말은 하나같이 자신의 속마음을 꿰뚫고 저들의 실정을 이른 것이라 아주 그럴듯해 보였다. (P.41)

 

남녀 주인공의 만남이 청루에서 비롯되었으니 웃고픈 대목이다. 숙부에게 팔리다시피 하여 청루에 오게 된 동예아와 왕석작. 비록 후마가 동예아를 창기로 만들기 위한 속임수로 혼인이 추진되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재주와 성품에 감탄하고 진정한 부부를 약속한다. 이는 몇 차례의 목숨을 건 위기에 맞닥뜨리고 황제의 명도 거슬려 가며 지키고자 하는 절대적 가치가 되어 소설 전체를 이끌어 가는 동력이 된다.

 

정조가 무가치하고 거추장스럽기 이를 데 없는 환경인 청루에서 굳센 절개가 피어난다는 점, 그리고 훗날 이들이 청루에 머물렀다는 이유로 동예아의 절개를 의심하는 뭇 사람들의 의심어린 눈초리와 세치 혀. 작가는 그들을 이렇게 평한다.

 

세상의 부녀자들이 집안에 편안히 있으면서 말마다 절개를 일컫지만은, 마침내 절개를 지켜 후세에까지 이름을 전하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소? 매사에 뒤집어지는 것이 두려운 줄을 알겠소. (P.521)

 

왕석작과 특히 동예아가 숱한 위기를 겪으면서도 몸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도운 여러 여인들의 말 그대로 헌신이다. 왕석작의 유모는 그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기꺼이 청루에 내놓았다. 하선과 혜랑은 진흙탕 속의 연꽃 같은 존재로서 두 사람을 돕기 위해 여러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무엇보다 동예아의 시녀인 화연을 놓칠 수 없다. 그녀야말로 주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정조마저 아끼지 않았으며 일생 충심을 다하여 헌신하였다. 작품 중에서 동예아라는 인물 구현이 다소 평면적이고 비현실적이라면 이를 극적으로 보완하는 생동적 인물이 바로 화연이라고 하겠다. 여인의 정조가 목숨과 맞바꿀 정도로 중시되던 조선 사회에서 작품해설에서도 평했듯이 정조까지도 거침없이 버리는 여성들을 서술자가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적”(P.532)인 게 이 작품이다.

 

왕석작의 일편단심 부인 사랑도 작품의 중요한 요소다. 왕석작은 자의든 타의든 동예아와 헤어질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 특히 황귀비의 조카와 혼인하도록 압박받았을 때 황제의 명령을 핑계 삼아 동예아를 버렸다면 모두를 평안케 하였을 것이다. 그는 그러하지 않았다. 이것이 이 소설의 또 하나 주제의식이라고 하겠으니, 부부간 인연의 소중함과 책임감이다.

 

그대를 잃는다면 나 혼자 무슨 마음으로 세상에 있으리오. 그대가 만일 죽을 마음을 끝내 바꾸지 않으면 나 또한 살 이유가 없소. 이 일은 그대가 멀리 생각하지 못한 것이오. 만일 그대가 이곳에서 죽으면 내가 더욱 버리고 가지 못하고 서럽고 아득하여 죽을 것이오. (P.203)

 

우리 부부가 그동안 유리하고 고난을 겪은 것을 생각하면, 부인은 예사 조강지처가 아닙니다. 결코 세상 권세를 탐내어 부인을 두고 그냥 돌아가지는 못하겠습니다. (P.346)

 

우리는 애초에 언약을 하였으니 차마 중간에 저버리지 못한다. 죽기를 각오하고 찾아보고 그래도 끝내 만나지 못한다면, 그 사람과의 약속을 지켜 지하에 가서 선친을 뵙고 죽은 아내를 찾는 것이 좋겠다. (P.406)

 

다만 두 부부가 갖은 난관을 헤치고 절개를 지키는 의의를 현저히 강조하려다 보니, 이별과 재회가 반복되는 과정에서 우연성이 남발되고 말았다. 고전소설의 특징 중 하나가 우연성이라고 하겠지만, 여기서는 지나친 측면이 있다. 한두 번이 아닌 우연한 상봉은 작품 전개의 필연성을 약화시키는 역효과가 있는데, 특히 과거보러 온 왕석작이 죽을 위험에 처해 정말로 우연히도 혜랑과 화연의 배에 구조되는 대목은 어이없을 정도다. 작가도 일말의 부담감을 느꼈는지 왕석작으로 하여금 훗날 면피성 발언을 하게끔 한다.

 

저희 부부는 유달리 천신만고를 고루 겪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항상 기이하게 재회할 것이라 기대하겠습니까? (P.464)

 

이외 성적으로 자유로운 언행과 상황 설정도 유달리 두드러진다. 청루를 배경으로 하였으니 일정 부분 불가피하겠지만, 이후에도 남장한 동예아가 왕씨와 결혼하여 남자인 척 행동하는 장면이나 마지막 대목에서 왕석작과 혜랑이 부부 간 잠자리 사랑을 소재로 주고받는 희언이 그러하다.

 

이 작품이 우리나라 작품인지 아니면 중국 작품인지 논란은 작품해설에 따르듯이 동예아의 앵혈로 분명하다. 왕석작이 동예아와 대화 중 도미 부인과 개루왕 고사를 언급하는 장면은 매우 자연스럽기에 이 또한 우리 고전소설이라는 증거로 삼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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