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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 팜팔론 - 동방의 성자들에 관한 전설
니콜라이 레스코프 지음, 이상훈 옮김, 비탈리 콘스탄티노프 그림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4월
평점 :
<수록작품>
1. 광대 팜팔론
2. 하느님의 마음에 든 나무꾼 이야기
3. 아름다운 아자
4. 양심적인 다니엘에 관한 전설
5. 그리스도인 표도르와 그의 친구 유대인 아브람에 관한 전설
레스코프의 작품이라 관심이 쏠렸고, 기독교 성자전이라는 점에 망설였다. 그래도 레스코프가 쓴 글인데 터무니없지는 않을 거라는 일말의 기대감은 이내 안도감으로 다가왔다. 여기에 수록된 다섯 편은 고대 그리스의 성자들 이야기다. 작품해설에서는 창작 성자전이라고 하는데 완전한 창작인지는 판단이 애매하다.
공산화되기 이전의 러시아의 국교는 러시아 정교임을 알고 있다. 멀리 동로마 제국 시절에 가톨릭과 분화되었지만 그리스도를 숭배한다는 점에서 같은 뿌리의 종교다. 여기 실린 성자들은 굳이 가톨릭인지 정교인지 구분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절, 종교간 분화가 본격화되고 고착화되기 이전이므로, 게다가 아직은 종교적 순수성과 열정의 자취가 남아있을 때이므로.
1. 광대 팜팔론
표제작인 동시에 분량이 130쪽에 가까운, 이 책의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제법 긴 이야기다. 동로마의 한 고위 관리가 타락한 세상에서 깨끗함을 유지하고 싶어 세상과 인연을 끊고 수행의 길에 들어선다. 고행의 도중에 그는 구원의 가능성에 회의적이 되지만 중동의 광대 팜팔론을 찾아가라는 계시를 받는다. 고생 끝에 찾아간 팜팔론은 아무리 살펴봐도 모범적이거나 존경스러운 인물이 아니다. 종교적 생활과는 전혀 거리가 멀고, 오히려 불경한 환경에서 희희낙락하는 재주를 부리며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다.
아니요, 절망한 게 아니라, 단지 걱정하지 않고 즐겁게 사는 사람이 되겠다는 거지요. 그러니 나하고 믿음에 관해 말하는 건......, 어울리지 않아요. (P.49)
내가 너무 앞뒤를 가리지 않기 때문이지요. 누군가 도와주어야 할 사람이 있으면, 난 내 자신의 영혼 따위는 생각하지 않거든요. (P.58)
한마디로 말해서, 난 나무통, 그것도 타르 통이며, 아무 쓸모없는데다가 구제 불능인 무용지물에 불과하지요. (P.133)
팜팔론과의 대화를 통해 그의 삶의 이력을 알게 되자 비로소 예르미는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에 대한 소박한 믿음, 일상의 생활을 즐겁고 보내고자 하는 충실한 자세. 그리고 이타적인 삶의 태도
또한, 자기와도 관련된 얘기를 들으면서 자신의 죄악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자기애(自己愛).
자기 자신의 영혼만을 위해 세상을 등졌답니다. 무서운 노인네지요! 하늘이 그의 고행자적 자기애를 용서해주시기를. (P.111)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처럼 자기구원에 중점을 두는지 세상의 구원에 대한 헌신에 노력하는지는 여러 종교의 숙명적 과제인 듯 싶다. 예르미는 통상적인 관점에서 전혀 비판받을 인물이 아니다. 그럼에도 작가는 예르미보다 일개 광대를 우위에 놓으면서 종교인의 진정한 본분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제기하고 있다.
2. 하느님의 마음에 든 나무꾼 이야기
이 이야기도 전자와 유사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극심한 가뭄을 끝내는 기도는 신분 높은 주교가 아니라 보잘 것 없는 나무꾼에 의해서다. 나무를 팔아서 생계를 꾸리는 노인네, 날씨가 나쁘면 굶지만 날씨가 좋으면 나무를 하러 가며 자신의 삶에 하등 불만과 욕심을 부리지 않는 평범한 사람. 소박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해준데 대하여 주님께 감사를 드리는 그의 모습이야말로 하느님의 마음에 쏙 들 수밖에.
3. 아름다운 아자
한 이집트 처녀의 영락하고 고통스러운 삶의 이야기는 또 무엇일까. ‘아름다운 아자’로 일컬어질 만큼 빼어난 외모와 풍족한 재산을 가진 그녀는 어려운 처지에 빠진 타인을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내어놓는다. 순식간에 영락한 그녀는 밑바닥 삶을 전전하다 일개 창녀의 신분이 되고 만다.
상식을 지닌 우리들은 아자를 비난할 뿐이다. 타인에 대한 동정도 정도가 유분수지 말이다. 하지만 아자는 삶이 고통스러울지라도 당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육신의 안온과 정신의 평안 사이에서 그녀는 후자의 길을 걸어갔으므로. 그녀는 이렇게 묻는다.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고통 속에 빠져들어야 할 것인가? 제 3의 길은 진창과 석탄불 사이에서 허덕이며 걷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우리 가슴에 동정의 마음이 주어진 것일까? (P.164)
한 가닥 남은 기력으로 교회를 찾아가 일원으로 받아주기를 간구하였으나 소외당한 아자는 지쳐 생을 마감한다. 외견상 타민족이자 창녀인 그녀가 죽어 구원을 받았음을 알았을 때 교회의 사람들은 무척이나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4. 양심적인 다니엘에 관한 전설
한 기독교인이 자신이 사는 땅을 침략한 야만인을 죽인다. 그 일로 다니엘은 양심의 괴롭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이 죽인 야만인의 잔영이 가슴 한가운데 자리 잡고 눈알을 부라린다. 세속을 다스리는 영주는 물론 신앙을 관장하는 주교를, 대주교를, 그리고 교황을 찾아가도 이는 죄가 아니라고 한다. 그럼에도 자신은 괴롭기 그지없다.
현대에 와서도 마찬가지의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전쟁이 났을 때 나라와 가족과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적군을 죽이는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 현실에서는 훈장도 받고 영웅 칭호를 듣게 될 것임은 당연하다. 하지만 인간의 본질적 측면에서는 어떠한가.
다니엘은 자기를 괴롭힌 양심이야말로 가혹한 신의 형벌이 아니라 다니엘 자신이 죄에 무감각해지지 않도록 경고하는 선(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너무나 기쁜 마음에 행복의 눈물을 흘리며 탄성을 질렀다. (P.206)
다니엘은 문득 깨닫는다. 양심은 죄의식을 상기시키는 등대임을. 저지른 죄를 돌이킬 수 없다면 죄 씻음을 구하기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했음을. 사람을 죽였다면 반대로 사람을 살리기 위한 행위가 필요했음을. 그래서 자신의 제자가 되겠다는 젊은이에게 다니엘을 말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마음으로 가서 사람들을 섬기게. (P.210)
5. 그리스도인 표도르와 그의 친구 유대인 아브람에 관한 전설
기독교인과 유대인. 종교적으로는 결코 화합될 수 없는 관계다. 히틀러의 악행은 정도가 심하였을 뿐 중세와 근대 유럽에서 유대인에 대한 탄압과 핍박은 줄을 이었다. 레스코프 시대에도 갈등과 차별은 다르지 않았음을 이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그것은 오늘날 중동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기독교와 이슬람 국가 간의 반목과 갈등에서 여전하다. 자신과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생명을 빼앗고 재산을 침탈하며 거주지에서 쫓아내는 게 정당한 행위인지 말이다.
사이비종교가 아닌 진실한 종교라면 궁극의 지향점은 동일하다. 인간의 구원과 영원한 행복이라는 정상에 오르는 길은 단 한 가지가 아닐 수 있다. 자신의 길이 아니면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얼마나 오만방자한 인식인가. 표도르와 아브람의 신앙을 초월한 우정은 그래서 더욱 아름답고 뜻깊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결코 어떤 신앙이 더 낫다거나, 어떤 신앙이 더 신의 뜻에 맞는가 하는 문제로 싸워본 적이 없기 때문에 현재도 서로의 신앙에 관한 논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신앙을 올바로 이해하고 악한 생각이나 평화를 해치는 악습이 없다면, 그 어느 종교든지 인생을 바른 길로 이끌 수 있을 것이라고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P.243)
역으로 작가는 종교 간의 갈등을 봉합할 수 있는 해법도 제시한다. 그것은 아직 머리가 굳지 아니한 아이 때부터 종교와 다른 아이들을 한 곳에서 교육시키는 것이다. 차이를 존중하는 방법을 어릴 때부터 익힌다면 커서 어른이 되더라도 차이로 인한 분쟁은 줄어들 것이다. 팜필로스가 종교분리 교육을 하라는 당국의 명을 거부하면서 하는 말처럼.
어린 시절부터 영혼의 평화와 상대방을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이 몸에 밸 때까지 아이들을 분리하는 일을 미뤄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개별적인 생각의 차이를 깨달을지라도 아이들의 마음이 분열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P.226)
레스코프가 단지 종교적 열정이 들끓어서 성자전을 썼을 것 같지는 않다. 성자를 소재로 한 단지 흥미를 주기 위한 목적도 아닐 것임은 확실하다. 그가 보기에 당대의 종교와 종교인들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에서 더없이 멀어졌고 타락했다. 그래서 그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순수성을 당대에 되살려 경고와 교훈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성자전이라고 특정 종교적 관점에서 백안시할 필요도 없다. 이야기 자체로서도 흥미진진하다. 특히 마지막 이야기는 종교간 갈등에 사로잡힌 세간의 행태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함께 종교를 아우르는 형제애를 통한 평화의 간구를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