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와 초콜릿 공장 (양장) - 로알드 달 베스트
로알드 달 지음, 퀸틴 블레이크 그림, 지혜연 옮김 / 시공주니어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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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본 동명의 영화의 잔상이 뇌리하게 강렬하게 남아 있다. 원작소설 읽기에는 대체로 불리한 게 일반적이지만 이 경우는 유익한 점도 있다. 무엇보다 화려한 색채의 그로테스크함과 색채들의 선명한 대비는 상상력을 시각화하는 영상의 장점이다. 그만큼 이 소설에서 색채적 효과는 두드러진다. 초콜릿 공장뿐만 아니라 찰리의 가족과 집에서도.

 

작품은 현실을 기반한 듯 하면서 기이한 상상을 불어넣고 있다. 윌리 웡커는 초콜릿 공장을 일행에게 안내하면서 무엇이 바쁜지 연신 달음박질 한다. 언뜻 지적으로 뛰어난 듯 보이지만 허술한 구석이 노골적이다. 게다가 움파룸파 사람들이라니. 지리 교사인 솔트 부인이 알지 못하는 움파룸파에 대해 웡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희한한 얘기만 늘어놓는다. 불리하거나 원치 않을 경우에는 슬그머니 못들은 척 외면하는 습관이 곧 알 수 있다.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는 움파룸파 사람들의 노래를 통해 명백하다. 멍청한 욕심쟁이 아우구스투스 굴룹, 껌만 씹어대는 버르장머리 없고 못돼 먹은 바이올렛 뷰리가드, 버르장머리 없는 버루카 솔트, 텔레비전만 보는 마이크 티비. 특히 버루카 솔트와 마이크 티비는 그 책임이 부모에게 있음을 강조한다. 웡커가 어리석은 네 친구들이라고 부른 네 아이는 결국 중간에 탈락하고 찰리만이 끝까지 남는다. 찰리가 남게 된 이유는 네 아이와 비교하면 쉽사리 이해할 수 있다. 그가 사고와 행동 면에서 다른 아이들과 전혀 다르다는 점은 비교적 길게 소개된 찰리의 가족관계와 어려운 가정형편, 그리고 웡커의 특별한 초대장을 얻기 위한 노력에 동참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통해 분명하다.

 

이 작품이 발표된 1960년대는 미국이 대량생산 체제 중심의 자본주의 경제가 극도로 발전을 거듭하며 경제적으로 세계 초강대국으로 거듭나던 시절이다. 또한 사회에서 전통적 가치관이 쇠퇴하고 자유분방함이 최고의 덕목을 떠오르던 시절이다. 이를 감안하면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추론이 가능하다. 극심해지는 빈부의 격차와 사회적 가치의 불안정을 찰리네 가족과 네 아이들 가족으로 전형화하고 있다. 처음 네 장의 초대장이 발견되었을 때 이들에 대한 뉴스를 접한 찰리네 가족의 반응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또한 웡커가 찰리에게 대하는 태도가 나머지 아이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있음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찰리의 질문에는 친절하게 답하는 반면, 다른 아이들의 말은 무시하거나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특히 마이크 티비에게 유독 정도가 심하다. 이로써 웡커가 찰리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점과 마지막 승자가 찰리임은 예정된 수순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동화의 공통점인 행복한 결말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작품이 현대 미국의 대표적 동화로 성공한 연유는 무엇보다 초콜릿의 힘이 크다. 각양각색의 초콜릿과 사탕, 껌 등 아이들이 좋아하는 군것질거리를 소재로 하여 여기에 초콜릿 폭포와 강, 텔레비전 초콜릿, 식사대용 껌 등 기상천외한 상상력과 결부하였으니 독자들이 열광하지 않을 수 없다. 대놓고 지적하는 따끔한 교훈과 훈계마저도 거부감을 없앨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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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체스코의 작은 꽃들 세계기독교고전 14
우골리노 지음, 박명곤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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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체스코에 관한 성자담 모음집이다. ‘작은 꽃들은 명문집을 뜻한다고 한다. 프란체스코 사후 1세기 후에 전승되고 수집한 이야기들이므로 당대의 신앙적 현장감이 그대로 남아있다. 더욱이 프란체스코뿐만 아니라 버나드 형제, 레오 형제, 주니퍼 형제와 길레스 형제들을 포함한 그의 제자들의 행적도 다수 수록하고 있어 초기 프란체스코 교회의 면모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앞서 읽은 헤르만 헤세의 프란체스코 글을 통해 기본적인 지식을 가지고 책에 접근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전 특유의 낯섦과 충실함에 놀라게 된다. 종교적 차이 여하를 떠나서 일단 이야기 자체가 흥미롭다. 비이성적이고 터무니없을 것 같은 행위에서 종교적 가르침이 배어나며, 마귀를 쫓아내며 이적을 행하는 등 전설과 설화에서 기대할 법한 일화들이 가득하다.

 

이 모든 어록과 행적이 지향하는 바는 동일하다. 프란체스코가 신앙 면에서 얼마나 뛰어난지를 입증한다. 그는 말 그대로 예수를 그대로 따르고자 하였다. 가족을 버리고 자발적 가난을 추구하며, 한없는 겸손과 고행을 실천하며 묵상과 설교의 길을 따랐다. 이러한 행적을 보여주는 일화들에서 수도사들과 민중들은 1천여 년이 지나면서 때가 묻고 간과되었던 그리스도의 참 가르침이 무엇이며 이를 따르는 올바른 길이 어떠한지를 묻고 있다.

 

그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위하여 기도하시고, 한 사람 곧 가난한 작은 거지 프란체스코를 통하여 자신의 생활과 수난을 새롭게 하시기를 원하셨다. (P.244)

 

무엇보다도 그 유명한 오상(五傷)’에 얽힌 실체를 알 수 있는데, 헤세는 언급하지 않았던 사항이다. 그는 행위와 생애 자체로써 뛰어난 전형적 인간을 찬미한 것이지, 기적과 같이 초자연적으로 인간 자체를 가리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쨌든 오상(五傷)이 있었기에 프란체스코는 사후 성인으로 추증되었고,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여지껏 존속하고 있다. 다만, 오상(五傷)을 단지 흔적에 불과한 피상적으로만 이해했는데, 프란체스코 자신에게는 큰 고통을 수반하였다고 하니 현실적 상처임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너에게 나의 수난의 상징인 오상을 주어 너로 하여금 나의 기수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또한 내가 죽던 날 이 거룩한 상처의 공로로 말미암아 연옥에서 발견한 모든 영혼들을 구원해낸 것처럼, 너의 죽음의 날에 네가 연옥으로 내려가서 그 오상의 덕으로 너의 세 수도회......와 네게 헌신한 모든 사람의 영혼을 데리고 천국으로 인도해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노라. (P.218)

 

프란체스코는 계시에 따라 묵상과 전도에 동등한 가치를 부여하였다. 깨우침을 얻기 위한 수행과 묵상도 중요하지만, 자신과 수도원 내에 가둬두지 않고 어리석고 고통 받는 민중들을 구제하는 데 진력하였다. 물론 오만하고 권위적이며 시혜적인 태도가 아니라 낮은 곳에서 섬기는 자세로 말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술탄을 회개시키거나 새에게 설교하는 유명한 장면도 이러한 시각에서 전모를 이해하게 되었다. 훗날 성 안토니가 물고기에게 설교하는 장면은 이에 대응하는 대목이다.

 

서론 부분을 통해 우리는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결코 평탄하게 발전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당대부터 수행과 전도의 비중에 대한 내부적 갈등이 존재했고, 프란체스코의 사후 신앙적 분열로 이어져 커다란 혼란을 빚게 되었다는 점도 알게 된다. 따라서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 중 몇 편은 이런 역사적 배경을 반영하고 있다. 엘리아스 형제는 이 분열을 초래한 주동자로 작품 내에서는 철저히 배신자이자 부정적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마사의 야고보 형제가 본 나무의 환상에 따르면 보나벤투라 교황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다. 이 모두가 작자의 종파적 입장과 관련되어 있음을 서론의 해설에서 가리킨다. 나무의 환상은 프란체스코 사후 수도회가 고난에 처할 것이며, 프란체스코와 요한 형제를 거치 자신들에게 이어지는 정통파만이 진정한 교회의 후계자라는 입장을 명백히 반영한다.

 

주님께서 달콤한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채워 주셨기 때문에 프란체스코와 제자들은 함께 자신들의 몸을 벗어나 황홀경에 빠졌다. 그들은 죽은 사람들처럼 완전히 의식을 잃은 채 바닥에 누워 있었다. (P.83)

 

행적들을 읽다 보니 몇 가지 반복되는 전형이 눈에 띤다. 프란체스코와 수도사들은 깊은 묵상을 통해 그리스도와 직접적 교감하고 황홀경에 빠져 기절하곤 하였다. 수행 과정에서 엄격한 절제와 고난을 무릅쓰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세상을 경멸하는 현실 경시적 인식을 일관하였는데, 청빈과 겸손은 이의 일환으로 이해된다. 그는 현세의 고난을 무릅씀이 내세의 구원에 가깝게 될 것으로 믿었다. 앞서 읽은 헤르만 헤세의 글에서 이해된 프란체스카와는 상반된 모습이다. 이 작품에 따르면 밝고 유쾌하기는커녕 속세의 타락을 통렬히 비난하며 묵언과 고행의 수행으로 일관하는 음울한 수도사들이 연상된다.

 

그 모든 악과 모욕과 매질을 기쁨과 인내로써 참으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인하여 그 고난을 인내로써 참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 레오 형제요! 그것이 완전한 기쁨이라고 기록하라. (P.69)

 

승천 축일이 되자 성 프란체스코는 엄한 극기와 절제로 자신의 몸을 고행하고, 뜨거운 기도와 철야와 채찍질로 자신의 영혼을 위로하며 금식을 시작하였다. (P.208)

 

프란체스코와 그 형제들의 참모습이 무엇인지 혼란스럽다. 아무래도 다른 자료들을 더 읽어봐야만 할 것 같다.

 

신자가 아닌 탓에서 가톨릭 내에서 프란체스코의 위상이 어떠한지 알지 못한다. 이 책의 저자를 포함한 수도사들은 프란체스코를 제2의 예수 또는 예수의 최측근으로 이해하는 게 분명하다. 오상(五傷)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는 것, 프란체스코가 계시와 이적의 능력을 보유했다는 점, 또한 그가 고난에 처하고 임종을 맞이할 때 마귀들이 넘볼 수 없을 정도로 주위에 천사들이 지키고 있었다는 등등의 언급이 그러하다.

 

이 모든 것을 떠나서 인간 자체만으로 그의 행동은 매우 탄복할 만하다. 쉽지 않은 길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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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헤르만 헤세 컬렉션 (열림원)
헤르만 헤세 지음, 정성원 옮김 / 열림원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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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성 프란치스코[프란체스코]를 궁금해 왔다. 도대체 어떤 인물이고 무슨 활동을 하였는가. 분명히 기독교의 성인 중 한 명임은 틀림없을 텐데 별도의 관련 책도 있고, 리스트나 오네게르 같은 음악가 들이 그를 다루는 작품을 썼는지. 마침 도서관 서가를 지나치다 친숙한 헤르만 헤세가 그에 관한 글을 남긴 사실을 알게 되어 입문서 삼아 읽는다.

 

이 책은 작가의 머리말과 간략한 전기, 그리고 작가가 선별한 다섯 편의 성인담과 마지막으로 맺음말로 구성된 얄팍한 글이다. 부록으로 그림과 서평, 단편을 추가로 곁들였다. 이 글의 본문은 1904년에 발표되었다. 이때는 헤세가 그의 저명한 작품들을 발표하여 이름을 처음으로 알리기 시작한 시기와 맞물린다.

 

십대와 이십대 초의 열정의 시기에 무려 10여 년이라는 시간을 헤세는 프란치스코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고 하는데 무슨 연유였는지 머리말을 통해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세상의 주인인 로마 교회는 인류의 평화에 매진하기보다는 군비 확충, 동맹과 외교, 금지와 처벌에 더 기를 썼다. 두려움에 휩싸인 민중에게는 심각한 위기가 닥쳤다. (P.10)

 

세계가 자신의 욕심을 충족하기 위하여 가녀린 평화를 사정없이 깨뜨릴 때 고초를 겪는 것은 무수한 힘없는 평민들이다. 헤세는 제국주의가 절정으로 치닫던 시절 임박한 어둠과 고난의 시절을 예감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더더욱 평화를 지향하고 애호하던 한 인물에 주목했는지도.

 

순수하고 고귀한 사람의 삶은 늘 거룩하고 신비롭다. 그 삶은 엄청난 힘을 발산하고 저 먼 곳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이 점은 그 옛날의 다른 영웅과 위대한 인물 들 대부분보다 아시시의 가난한 사람의 삶에서 훨씬 더 또렷이 드러난다. (P.65)

 

프란치스코는 극적인 삶의 방식을 살아간 사람이다. 한없는 방탕함에서 세상 누구보다 낮고 가난함으로. 세속의 명예를 추구하기 위한 출전에서 문득 계시를 받고 이후로는 세속의 영광은 뒤돌아보지 않는다. 심지어는 혈연관계마저도. 그의 온 몸과 마음은 오로지 하나님을 섬기는데 헌신한다.

 

프란치스코를 예수 바로 아래 위치시킨 오상(五傷)에 대해 헤세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 성자 프란치스코를 찬미할 뿐, 이성의 관점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의 힘에 기대지 않는다. 따라서 기독교 성인으로서의 프란치스코를 알고자 한다면 헤세의 글쓰기에 다소 불만족을 느낄 수도 있겠다.

 

헤세가 바라본 프란치스코의 진면모는 그가 우월한 지위에서 민중을 경시하거나 훈도하지 않고 항상 낮은 곳을 지향하며, 동굴에 틀어박혀 세속과 단절되어 깨달음과 구원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프란치스코는 수행과 순례를 등가로 보았다.

 

프란치스코는 결코 우울한 빛을 띠며 참회하거나 세상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웃음 가득한 말과 기분을 북돋우는 유쾌한 말을 즐겼고, 아무리 고단하고 힘겨운 날이 닥쳐도 그 누구에게도 우울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P.45)

 

헤세는 이렇게 말한다.

 

영혼이 똑같이 순수하고 고귀했던 다른 성인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남들보다 조금 더 기억될 뿐이다. 프란치스코는 천진난만한 시인, 사랑의 위대한 스승, 모든 피조물의 겸손한 친구이자 형제였다. 사람들이 그를 잊는다면 돌과 샘, 꽃과 새 들이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할 것이다. (P.33)

 

프란치스코가 마세오 형제의 질문에 답하는 성인담에서 그의 한없는 겸허함을 알 수 있으며, 새들에게 설교하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한 장면이다. 헤세는 프란치스코를 훗날 르네상스를 이끌어낸 선구자로 찬양한다. 그의 소박한 인간미와 온화한 품성을 예술로 재현하려는 정신이 교회의 경직된 틀을 탈피할 수 있는 영감과 활력을 주었다는 것이다. 진위 여부를 떠나서 매우 참신한 논거라고 하겠다.

 

프란치스코의 성인담은 풍부하게 남아있는데 비해 헤세는 <태양의 노래>를 포함한 여섯 편만을 선별하여 싣고 있다. 그의 창작의도가 프란치스코의 이적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점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서평은 <성 프란치스코의 작은 꽃다발> 독일어판에 대한 것이며, 단편은 프란치스코의 유년 시절의 에피소드를 상상하여 그려낸 것이다. 한편 중간에 포함된 조토의 프란치스코 연작화는 프란치스코의 일생의 주요 대목을 프레스코화로 재현해 낸 것으로 13세기 당대에 성인 프란치스코의 위상을 짐작케 한다.

 

마지막으로 프란치스코에 대한 헤세의 종합적 평가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하늘의 천사가 씨앗을 뿌리듯 민중에게 근원적인 힘과 가슴속에서 불타오르는 말과 영원에 대한 생각과 태곳적 인류의 그리움을 뿌리는 사람은 드물다. 그리고 아름답게 꾸민 글과 예술이 아니라 오로지 순수하고 고귀한 존재로 수 세기에 걸쳐 사랑과 찬미를 받고, 지고지순한 곳에서 우리를 비추는 복된 별로 서 있으며,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헤매는 인류를 위해 미소 짓는 찬란하고 온유한 길잡이와 통솔자인 사람 또한 드물다. (P.7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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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 팜팔론 - 동방의 성자들에 관한 전설
니콜라이 레스코프 지음, 이상훈 옮김, 비탈리 콘스탄티노프 그림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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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품>

1. 광대 팜팔론

2. 하느님의 마음에 든 나무꾼 이야기

3. 아름다운 아자

4. 양심적인 다니엘에 관한 전설

5. 그리스도인 표도르와 그의 친구 유대인 아브람에 관한 전설

 

레스코프의 작품이라 관심이 쏠렸고, 기독교 성자전이라는 점에 망설였다. 그래도 레스코프가 쓴 글인데 터무니없지는 않을 거라는 일말의 기대감은 이내 안도감으로 다가왔다. 여기에 수록된 다섯 편은 고대 그리스의 성자들 이야기다. 작품해설에서는 창작 성자전이라고 하는데 완전한 창작인지는 판단이 애매하다.

 

공산화되기 이전의 러시아의 국교는 러시아 정교임을 알고 있다. 멀리 동로마 제국 시절에 가톨릭과 분화되었지만 그리스도를 숭배한다는 점에서 같은 뿌리의 종교다. 여기 실린 성자들은 굳이 가톨릭인지 정교인지 구분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절, 종교간 분화가 본격화되고 고착화되기 이전이므로, 게다가 아직은 종교적 순수성과 열정의 자취가 남아있을 때이므로.

 

1. 광대 팜팔론

표제작인 동시에 분량이 130쪽에 가까운, 이 책의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제법 긴 이야기다. 동로마의 한 고위 관리가 타락한 세상에서 깨끗함을 유지하고 싶어 세상과 인연을 끊고 수행의 길에 들어선다. 고행의 도중에 그는 구원의 가능성에 회의적이 되지만 중동의 광대 팜팔론을 찾아가라는 계시를 받는다. 고생 끝에 찾아간 팜팔론은 아무리 살펴봐도 모범적이거나 존경스러운 인물이 아니다. 종교적 생활과는 전혀 거리가 멀고, 오히려 불경한 환경에서 희희낙락하는 재주를 부리며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다.

 

아니요, 절망한 게 아니라, 단지 걱정하지 않고 즐겁게 사는 사람이 되겠다는 거지요. 그러니 나하고 믿음에 관해 말하는 건......, 어울리지 않아요. (P.49)

 

내가 너무 앞뒤를 가리지 않기 때문이지요. 누군가 도와주어야 할 사람이 있으면, 난 내 자신의 영혼 따위는 생각하지 않거든요. (P.58)

 

한마디로 말해서, 난 나무통, 그것도 타르 통이며, 아무 쓸모없는데다가 구제 불능인 무용지물에 불과하지요. (P.133)

 

팜팔론과의 대화를 통해 그의 삶의 이력을 알게 되자 비로소 예르미는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에 대한 소박한 믿음, 일상의 생활을 즐겁고 보내고자 하는 충실한 자세. 그리고 이타적인 삶의 태도

 

또한, 자기와도 관련된 얘기를 들으면서 자신의 죄악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자기애(自己愛).

 

자기 자신의 영혼만을 위해 세상을 등졌답니다. 무서운 노인네지요! 하늘이 그의 고행자적 자기애를 용서해주시기를. (P.111)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처럼 자기구원에 중점을 두는지 세상의 구원에 대한 헌신에 노력하는지는 여러 종교의 숙명적 과제인 듯 싶다. 예르미는 통상적인 관점에서 전혀 비판받을 인물이 아니다. 그럼에도 작가는 예르미보다 일개 광대를 우위에 놓으면서 종교인의 진정한 본분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제기하고 있다.

 

2. 하느님의 마음에 든 나무꾼 이야기

이 이야기도 전자와 유사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극심한 가뭄을 끝내는 기도는 신분 높은 주교가 아니라 보잘 것 없는 나무꾼에 의해서다. 나무를 팔아서 생계를 꾸리는 노인네, 날씨가 나쁘면 굶지만 날씨가 좋으면 나무를 하러 가며 자신의 삶에 하등 불만과 욕심을 부리지 않는 평범한 사람. 소박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해준데 대하여 주님께 감사를 드리는 그의 모습이야말로 하느님의 마음에 쏙 들 수밖에.

 

3. 아름다운 아자

한 이집트 처녀의 영락하고 고통스러운 삶의 이야기는 또 무엇일까. ‘아름다운 아자로 일컬어질 만큼 빼어난 외모와 풍족한 재산을 가진 그녀는 어려운 처지에 빠진 타인을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내어놓는다. 순식간에 영락한 그녀는 밑바닥 삶을 전전하다 일개 창녀의 신분이 되고 만다.

 

상식을 지닌 우리들은 아자를 비난할 뿐이다. 타인에 대한 동정도 정도가 유분수지 말이다. 하지만 아자는 삶이 고통스러울지라도 당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육신의 안온과 정신의 평안 사이에서 그녀는 후자의 길을 걸어갔으므로. 그녀는 이렇게 묻는다.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고통 속에 빠져들어야 할 것인가? 3의 길은 진창과 석탄불 사이에서 허덕이며 걷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우리 가슴에 동정의 마음이 주어진 것일까? (P.164)

 

한 가닥 남은 기력으로 교회를 찾아가 일원으로 받아주기를 간구하였으나 소외당한 아자는 지쳐 생을 마감한다. 외견상 타민족이자 창녀인 그녀가 죽어 구원을 받았음을 알았을 때 교회의 사람들은 무척이나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4. 양심적인 다니엘에 관한 전설

한 기독교인이 자신이 사는 땅을 침략한 야만인을 죽인다. 그 일로 다니엘은 양심의 괴롭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이 죽인 야만인의 잔영이 가슴 한가운데 자리 잡고 눈알을 부라린다. 세속을 다스리는 영주는 물론 신앙을 관장하는 주교를, 대주교를, 그리고 교황을 찾아가도 이는 죄가 아니라고 한다. 그럼에도 자신은 괴롭기 그지없다.

 

현대에 와서도 마찬가지의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전쟁이 났을 때 나라와 가족과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적군을 죽이는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 현실에서는 훈장도 받고 영웅 칭호를 듣게 될 것임은 당연하다. 하지만 인간의 본질적 측면에서는 어떠한가.

 

다니엘은 자기를 괴롭힌 양심이야말로 가혹한 신의 형벌이 아니라 다니엘 자신이 죄에 무감각해지지 않도록 경고하는 선()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너무나 기쁜 마음에 행복의 눈물을 흘리며 탄성을 질렀다. (P.206)

 

다니엘은 문득 깨닫는다. 양심은 죄의식을 상기시키는 등대임을. 저지른 죄를 돌이킬 수 없다면 죄 씻음을 구하기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했음을. 사람을 죽였다면 반대로 사람을 살리기 위한 행위가 필요했음을. 그래서 자신의 제자가 되겠다는 젊은이에게 다니엘을 말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마음으로 가서 사람들을 섬기게. (P.210)

 

5. 그리스도인 표도르와 그의 친구 유대인 아브람에 관한 전설

기독교인과 유대인. 종교적으로는 결코 화합될 수 없는 관계다. 히틀러의 악행은 정도가 심하였을 뿐 중세와 근대 유럽에서 유대인에 대한 탄압과 핍박은 줄을 이었다. 레스코프 시대에도 갈등과 차별은 다르지 않았음을 이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그것은 오늘날 중동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기독교와 이슬람 국가 간의 반목과 갈등에서 여전하다. 자신과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생명을 빼앗고 재산을 침탈하며 거주지에서 쫓아내는 게 정당한 행위인지 말이다.

 

사이비종교가 아닌 진실한 종교라면 궁극의 지향점은 동일하다. 인간의 구원과 영원한 행복이라는 정상에 오르는 길은 단 한 가지가 아닐 수 있다. 자신의 길이 아니면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얼마나 오만방자한 인식인가. 표도르와 아브람의 신앙을 초월한 우정은 그래서 더욱 아름답고 뜻깊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결코 어떤 신앙이 더 낫다거나, 어떤 신앙이 더 신의 뜻에 맞는가 하는 문제로 싸워본 적이 없기 때문에 현재도 서로의 신앙에 관한 논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신앙을 올바로 이해하고 악한 생각이나 평화를 해치는 악습이 없다면, 그 어느 종교든지 인생을 바른 길로 이끌 수 있을 것이라고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P.243)

 

역으로 작가는 종교 간의 갈등을 봉합할 수 있는 해법도 제시한다. 그것은 아직 머리가 굳지 아니한 아이 때부터 종교와 다른 아이들을 한 곳에서 교육시키는 것이다. 차이를 존중하는 방법을 어릴 때부터 익힌다면 커서 어른이 되더라도 차이로 인한 분쟁은 줄어들 것이다. 팜필로스가 종교분리 교육을 하라는 당국의 명을 거부하면서 하는 말처럼.

 

어린 시절부터 영혼의 평화와 상대방을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이 몸에 밸 때까지 아이들을 분리하는 일을 미뤄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개별적인 생각의 차이를 깨달을지라도 아이들의 마음이 분열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P.226)

 

 

레스코프가 단지 종교적 열정이 들끓어서 성자전을 썼을 것 같지는 않다. 성자를 소재로 한 단지 흥미를 주기 위한 목적도 아닐 것임은 확실하다. 그가 보기에 당대의 종교와 종교인들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에서 더없이 멀어졌고 타락했다. 그래서 그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순수성을 당대에 되살려 경고와 교훈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성자전이라고 특정 종교적 관점에서 백안시할 필요도 없다. 이야기 자체로서도 흥미진진하다. 특히 마지막 이야기는 종교간 갈등에 사로잡힌 세간의 행태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함께 종교를 아우르는 형제애를 통한 평화의 간구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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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과 천둥
온다 리쿠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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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현대문학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탓으로 작가는 알지 못한다. 단지 알라딘 인터넷서점의 클래식 음반 메뉴에 동명의 음반이 나와 있는 것을 보고 그나마 흥미를 갖게 되었다. 클래식 음악에서 일본의 세계 최대의 시장이라고 한다. 그만큼 애호가도 많고 매니아층도 넓다는 뜻이리라. 언제나 감동을 주는 <노다메 칸타빌레>와 같은 기억을 남겨주길 바라며 책장을 펼친다.

 

노력만으로 이루기 어려운 분야 중 특히 예술이 그러하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의 한탄은 그래서 우리 같은 범부(凡夫)의 심정을 대변한다. 단지 1%, 아니 0.1%의 차이로 좋은 연주가와 거장의 넘을 수 없는 벽이 생긴다. 노력한다고 모차르트가 될 수 없음을 알지만, 재능이 있다고 가만히 있어도 모차르트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 치열한 경연의 현장이 음악 콩쿠르다. 무명의 음악이 단순에 세상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무대에 등장하는 계기.

 

소리의 느낌을 글로써 풀어내는 것은 쉽지 않다. 단순히 글 솜씨가 뛰어나다고 충분하지 않다. 작가 자신이 클래식 음악에 대한 지극한 애호와 관심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일반 독자가 아닌 소위 음악을 좀 아는 독자의 비웃음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 온다 리쿠는 다행히도 그러하다. 물론 일본인 특유의 뭐랄까, 호들갑스럽고 과장되게 찬미하는 버릇은 여전하지만.

 

작가는 이 두툼한 소설에서 여러 얘기를 하고 싶은 모양이다, 음악과 삶에 관한,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고 감상한다는 의의에 대해서 말이다. 그것은 연주가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예술을 통한 삶의 의미에 관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리쿠는 먼저 작품의 굵직한 플롯인 요시가에 국제 피아노콩쿨의 예선과 본선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르포르타주처럼 세밀하게 기술하여 독자에게 콩쿨의 세계를 속속들이 알게끔 한다. 참가자들의 처지, 선곡의 목적, 음악에 임하는 태도 등 비록 나와는 다른 영역에 속하지만 그네들 역시 한 사람으로 갖는 불안과 초조, 기대 등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

 

생활 속에서 음악을 즐길 줄 아는, 뛰어난 귀를 가진 사람은 할머니처럼 평범한 곳에 있다. 연주자 또한 평범한 곳에 있어도 되지 않을까?

......‘평범한 곳에 머물고 싶었다. 할머니 같은 사람이 사는 세계에 속하고 싶었던 것이다. (P.80)

 

그런 면에서 다카시마 아카시에게 응원의 염이 쏠림을 어쩔 수 없다. 가정을 갖고 생계에 애쓰는 그나마 일반인에 가까운 그가 예술과 생활을 병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보다 인간미가 있으므로. 예술은 외따로 고립되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 공감하고 수용될 때 본연의 가치가 빛을 발한다. 시대를 앞서간 천재는 후대에 영예를 누리지만 생전은 불우하기 십상이다. 감식력 있는 귀가 없더라도 음악이 들려주는 음 자체와, 선율과 리듬에서 즐거움을 찾고 누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요즘 연주가는 작곡가의 의도를 얼마나 정확하게 읽어내고 작곡 당시의 시대나 개인적 배경을 상상하는 데 중점을 둔다. 연주가의 자유로운 해석, 자유로운 연주는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풍조가 있다. (P.226)

 

가자마 진 같은 괴짜 천재의 사례는 무어라고 해야 할까. 심사위원들 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당혹스럽다. 콩쿨에서 전혀 비콩쿨 스타일의 연주를 하는 그는 오늘날 거의 사라져버린 연주가 유형이다. 작곡가의 의도 구현에 목매단 나머지 도전과 개성을 상실하여 박제화 된, 또는 균질적인 연주가들이 득실거리는 시대에. 그는 의식하지 못한 채 음악의, 그리고 연주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새삼 청중과 독자에게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작중의 저명한 유지 폰 호프만은 세상에 그를 내보내며 선물이 될 지 재앙이 될 지는 음악계에 달렸다고 유지를 남긴 것이다.

 

이 아이는 반대다. 곡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고 할까, 프로나 잔소리꾼들이 싫어하는 방법을 쓴다. 아니, 그렇지 않다. 곡을 자기 세계의 일부로 만들어버린다. 곡을 통해 자기 세계를 재현하고 있다. 어떤 곡을 연주해도 뭔가 커다란 그림의 일부로 만들어버리는 듯한. (P.535)

 

솔직히 마사루와 아야의 기묘한 우연과 뜻밖의 재회는 작위적이다. 천재적 재능이 지닌 두 젊은이를 굳이 엮어놓을 필요는 없을 텐데. 완벽한 연주로 청중과 심사위원을 모두 사로잡는 마사루는 기교와 예술을 절묘하게 조화시키고 개성마저 뚜렷하다. 아마 현시대가 요구하는 가장 탁월한 연주가의 전형일 것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그에게 한 가지 여운을 남긴다. 재현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만들고자 하는, 즉 음악 창작의 욕구 말이다. 연주 자체도 창작의 일환이지만 순전한 창작에는 미치지 못한다. 고고한 예술혼에 치중한 나머지 세상과 고립된, 자신만의 음악에만 매몰된 음악이 아니라 모차르트나 베토벤 당대처럼 청중과 교감하는 음악.

 

그것은 새로운클래식을 만드는 것. 현대에 클래식으로 불리는 작곡가들처럼 새로운피아니스트 작곡가가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P.458)

 

소위 말하는 대부분의 현대음악은 한없이 좁은 시장에서 활동하는 작곡가 본인과 평론가를 위한 음악이지, 반드시 연주하고 싶고 듣고 싶은 곡은 아니다. (P.459)

 

표제는 상징적이다. 꿀벌은 가자마 진, 천둥은 에이덴 아야와 결부된다. 일찍이 자연에서 음악을 발견한 뛰어난 재능. 전자는 뒤늦게 유지 폰 호프만의 섬세한 가르침으로 살아있는 음악을 만들 줄 알게 되었다. 후자는 천재 소녀로서 회자되다가 어머니의 죽음 이후 소진 증후군으로 음악계를 떠나버렸다. 여러 참가자와 심사위원이 등장하지만 에이덴 아야가 핵심적 인물이다. 등 떠밀려 콩쿨에 참가한 아야는 경연 과정을 통해, 참가자들이 들려주는 음악의 일깨움을 통해 음악인의 본질에 다가선다. 음악을 정면으로 마주한다는 것의 의미.

 

치열한 콩쿨은 어느덧 끝나고 각자는 순위가 매겨져 흩어진다. 그럼에도 독자는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이 그네들에게 있어 대단원이 아니라 눈부신 시작에 불과하다고. 그들 앞에는 음악을 향한 새로운 세계로 이어지는 길이 펼쳐져 있음을. 가자마 진은 이렇게 되새긴다.

 

행복. 행복하다. 세상은 이토록 음악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실내에서 음악을 데리고 나가, 함께 세상을 채워갈 것이다.

동지도 있다. 동지를 찾아냈다. (P.692)

 

온다 리쿠의 글쓰기는 영화를 연상시킨다. 카메라는 인물들 전체를 조감하다 쓱 하나의 인물 깊이 파고들어 그들의 과거와 내밀한 심경을 파헤친다. 주변 인물들에도 소홀하지 않고 적절한 배분을 아끼지 않는다. 인물 몰입이 지나칠 때쯤 문득 콩쿨에서 연주되는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으로 분위기를 전환한 후 영탄어린 감상으로 고조시킨다. 양념으로 인물의 개인사와 인물들 간의 은근한 러브라인도 반영하여 다른 의미에서 독자를 지루하지 않게 한다. 무척이나 능숙하고 효과적인 작법이다.

 

내가 나름 클래식 음악 애호가라서 더 집중과 몰입이 용이한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예술과 사람에 대한 작가의 시각과 기술이라면 음악 애호 여부와는 상관없이 소설 자체로서 충분히 설득력이 높다는 생각이다. 새삼 다른 작품도 읽고 싶은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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