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트 레이디
윌라 캐더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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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라 캐더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다. 캐더는 미국의 대표적인 지방주의 내지 지역주의 작가이다. 그녀가 어릴 적 거주하였던 네브래스카의 거칠고 황량한 자연, 개척민들의 평범한 삶을 위한 끈기와 노력 등은 작품세계의 핵심을 이룬다. 수년 전 읽은 그의 대표작 <나의 안토니아><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는 자못 감명 깊었다. 번역된 다른 작품이 없는 게 아쉬울 정도로. 그런 참에 근년 들어 몇 권이 새로이 출간된 걸 알았을 때 매우 기뻤다.

 

<로스트 레이디>방황하는 부인또는 길 잃은 부인정도로 해석이 가능하다. ‘Lost Generation’과 흡사한 개념으로 접근하면 이해가 쉽다. 전통적인 시대 가치와 살고자 하는 개인으로서 뜨거운 열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방황하는 포레스터 부인의 모습을 그렸다. 그런 면에서 표제는 적확하다. 최초의 번역본은 아니며, 아주 오래전에 도서출판 오상에서 <그는 꽃다발을 흙탕물에 던져 버렸다>라는 표제로 나온 적이 있다. 다만 그 책은 절판되었고, 도서관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말한 방식으로 간절히 꿈꾸는 일은 이미 성취한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위대한 서부는 전부 그런 꿈에서 싹터서 자랐어요. 이주 농민들과 광부들과 건설업자들의 꿈입니다” (P.67)

 

이 소설은 20세기 초 서부 개척 시대가 막을 내리고 개척정신이 퇴색하는 모습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변하는 시대와 더불어 퇴장하는 인물과 새로운 세태에 재빨리 적응하여 번영하는 인물 군상을 이 소설에서 볼 수 있다. 포레스터 대령과 포머로이 판사가 전자의 전형이며, 화자인 닐 역시 구시대의 교육을 받은 인물이다. 그들은 사리사욕보다는 명분과 양심을 중시하며, 고상한 품위가 스러지고 얄팍한 영리가 득세하는 현상을 수용하지 못한다. 은행 파산에 따른 책임을 거부하는 인물들이라든가 아이비 피터스 같은 사람이 바로 후자에 해당한다.

 

캐더는 찬란했던 한 시대가 저무는 모습에 동정과 안타까움을 표출한다. 오늘날 미합중국을 완성한 서부 개척은 장엄한 낙조와도 같이 자신의 수명을 다한 채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역사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음을 알며, 그 아름다움과 미덕을 간직한 채 흘러갈 수 없음을 알기에 더욱 깊은 감정을 담아 문장을 서술한다.

 

실로 이것은 서부 개척시대의 끝이었다. 쇠의 힘으로 초원과 산을 다스렸던 남자들은 이제 늙었다. 어떤 이들은 가난해졌으며, 심지어 성공한 이들도 죽음으로부터의 짧은 유예와 휴식을 구하고 있었다. 이미 막이 내린 시대였으며 다시는 되돌릴 수 없었다. (P.194)

 

작가는 소설 속에서 주인공 포레스터 부인을 너무나 매력적으로 묘사한다. 아주 빼어난 미모는 아님에도 존재만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개개인을 특별한 존재처럼 느끼게 만드는 능력은 선천적 재능이다. 그녀가 있기에 포레스터 플레이스는 방문객들이 항상 끊기지 않는 유쾌하고 따뜻한 집으로 인식되어 동경해 마지않는 곳이었다. 이처럼 독자와 세인의 눈에 외양의 포레스터 부인과 내면의 그녀는 전혀 상반되기에 당황하게 된다. 부인은 부도덕한 가면의 여왕일까.

 

포레스터 부인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할지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 남편과 같은 시대적 인물과 함께 우아하게 소멸하기를 기대하는 시각에서 그녀는 참으로 부도덕하다. 그녀는 표면적 고상함과는 달리 은밀한 혼외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남편의 죽음 이후 아이비 피터스와 불건전한 관계를 맺었다. 이것은 세상이 기대하는 모습이 아니었으며, 특히 어릴 적부터 그녀를 우상시하였던 닐로서는 차마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손에는 따끈따끈한 야생장미 다발이 여전히 들려 있었다. 그는 철조망 너머로 꽃다발을 던져 냇가 아래 가축들이 짓밟아 놓은 진흙탕에 버렸다. (P.102)

 

한편 포레스터 대령 부부의 결혼 생활은 과연 정상적이고 이상적인 관계였을지 의문스럽다. 20년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부부. 플라토닉한 감정만으로 행복한 결혼이 존속하는 건 아니다. 육체적 관계 맺음을 사랑을 완성하고 유지하는 중요한 동력이다. 메리언은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대령에 대한 보은과 감사의 마음, 그리고 성공한 중년남성이 주는 안정감을 선택했을 것이나, 만족스럽지 못함은 프랭크 엘리저와의 외도를 통해 드러난다.

 

포레스터 부인은 본성적으로 도회풍 여성이며, 사람들 속에서 화려함과 사교를 좋아하는 성격이다. 그런 그녀가 나름대로 스위트워터라는 시골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건 겨울철마다 도회에서 보냈던 덕택이다. 대령의 파산으로 그녀는 연중 시골을 벗어날 수 없었으며, 그건 그녀를 정신적 고통과 절망,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녀의 심정은 작중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내년 겨울에도... 내후년 겨울에도 계속 여기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해 봐! 내가 어떻게 되겠니, ?” 그녀의 목소리에는 공포가, 의심할 여지 없는 두려움이 배어 있었다. (P.92)

 

개척 시대의 화신이었던 남편이 죽고 시대가 달라졌다고 해서 그녀가 스스로 물러나길 기대한다면 지나친 처사일 수도 있다. 고대의 순장 풍속도 아니며, 지아비가 죽으면 평생 수절해야 하는 전통 유교 사회도 아니다. 아직 늙지 않은 그녀는 자신의 삶을 의지대로 살아갈 이유가 있다. 그녀라면 더더욱 생의 의지는 강렬할 것이다. 이것이 닐을 실망케 한 까닭이기도 하다.

 

어쩌면 사람들은 내가 곱게 늙어 갈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라. 하지만 난 그렇지 않아. 살려는 힘이 내 안에서 너무나도 강하게 느껴진단다, .” (P.145)

 

이것이 그가 포레스터 부인에게 품은 가장 큰 불만이었다. 그녀가 이 위대한 남자들 모두의 과부를 자처하여 스스로를 제물로 희생하고 자기가 속한 개척시대와 함께 소멸되기를 거부했다는 것. 어떤 조건에서라도, 그녀는 살기를 원했다는 것. (P.194)

 

F. 스콧 피츠제랄드가 윌라 캐더의 팬이었으며, <위대한 개츠비> 속 데이지와 포레스터 부인과의 우연한 유사성을 밝힌 부록의 대목은 흥미로운 정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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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트위스트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29
찰스 디킨스 지음, 유수아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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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에 읽은 책을 이제야 겨우 끄적거린다. 나태의 만연은 이토록 무섭다. 솔직히 찰스 디킨스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캐럴>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여겼다. 무엇보다 그의 소설은 개개가 방대하다. 천 페이지를 넘기는 작품도 있으며, 당장 이 책만 해도 빽빽한 조판으로 6백 면을 넘긴다. 보통은 두 권으로 분책하는 게 일반적이다.

 

한 가난한 고아가 비참한 생활을 겪다가 마지막에 행복을 찾는다는 줄거리는 너무 진부하고 상투적이지 않은가. 도중에 다소간 행복을 찾으려다 작가의 변덕으로 이내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지길 여러 차례. 독자의 입장에서는 비상과 나락을 반복하는 흥미진진한 전개에 흠뻑 빠져들 수 있지만, 비현실적일 정도로 반복되는 올리버 트위스트의 불행에 차라리 황당함을 품기조차 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는 그러한 범죄 공모자들의 고리를 실제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것, 즉 그들의 뒤틀린 모습과 비참함과 그들의 불결하고 궁핍한 생활상을 현실 그대로 보여주고, 한결같이 삶의 가장 더러운 길을 불안스럽게 숨어다니다가 마침내 저 거대하고 어둡고 끔찍한 교수대에서 생을 마감하게 될 전망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매우 필요하고 또 사회에 이바지하는 시도라고 여겨졌다. 그래서 나는 그 일을 시도했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P.11, 저자 서문)

 

근묵자흑(近墨者黑)라는 성어처럼 사람은 환경에 큰 영향을 받는다. 올리버가 자신을 둘러싼 어둡고 비참한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순수하고 선한 마음을 유지하였음은 참으로 감사하지만 실제적 가능성은 얼마나 그러할지 의문이 들 정도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것처럼 주인공의 비참과 비극의 정도가 심할수록 그의 순결함은 더욱 빛난다. 따라서 작가는 런던의 어두운 뒷골목 사회를 시종일관 집요하게 묘사한다. 그들은 음지의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피카레스크 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페이긴, 사익스, 멍크스로 대변되는 악인- 범블 씨도 잊지 말자 -은 올리버의 앞날을 가로막는 인물이므로 그들의 말과 행동, 사건은 철저하게 악에 기울어져 있다.

 

올리버를 괴롭히는 존재가 단지 악인에만 있지 않다. 그가 고통을 겪고 뒷골목 생활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적 요인이 이를 부추기고 가능케 한다. 당대의 형편없는 구빈원 제도는 오히려 희극적이기에 한층 생생하다. 교육 제도, 산업 구조, 물질 만능주의 등 19세기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발흥으로 경제적 부가 축적되던 시기에 영국 서민의 삶이 어떠했을지 디킨스는 냉철하고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이 소설은 사회 고발 소설이기도 하다.

 

올리버는 말단 교구관의 지시에 따라 꾸벅 감사인사를 올린 다음, 서둘러 커다란 보호소 건물로 끌려가서 거칠고 딱딱한 침대 위에서 훌쩍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이 축복 받은 나라의 자상한 법률에 따른 사례를 어디에서 이토록 고귀하게 보여줄 수 있겠는가! 가난한 자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해주다니! (P.32)

 

이 광경을, 배 속에서는 고기와 술이 썩어나고 얼음 같은 피와 강철 같은 심장을 가진 철학자들이 좀 보았으면 싶다. 올리버 트위스트가 개도 거들떠보지 않을 진수성찬에 달라붙어 게걸스럽게 먹는 모습을 말이다. (P.59)

 

올리버가 악의 소굴에서 벗어나 빛의 삶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된 계기는 브라운로와 메일리, 로스번의 덕택이다. 인간에 대한 선의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은 그들의 인내와 용기는 올리버에게는 필수적이지만 비현실적일 정도로 지극하다. 그가 자신들과 아무런 관련성이 없는 일개 아이에게 관심을 쏟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작가가 그들의 활동을 상세하게 기술하는 까닭은? 그건 사회가 무너지지 않고 정상적으로 존속하기 위해서는 개인주의와 배금주의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중요한 건 어려울수록 더욱 드러나는 인본주의.

 

아가씨, 우리를 가엾게 생각해줘요. 가엾게도 우리에게는 여자로서의 감정 중에 단 하나만이 남아서, 위안과 행복이 아니라 폭력과 고통의 원천이 되어버렸거든요. (P.455)

 

세상 사람이 모두 양극단에 놓여 있는 건 아니다. 낸시를 보자. 일찍이 페이긴에게 붙잡혀서 어두운 삶을 살고 있지만 그녀는 올리버에게 동정적이다. 올리버를 타락시키려는 페이긴에게 낸시가 퍼붓는 대목은 인상적이다. 그녀로서는 이미 자신의 삶은 회복 불가능하지만 올리버만큼은 더러워지길 원치 않았던 것이다. 낸시와 로즈의 만남 장면은 구원을 거부하는 낸시의 비극적 운명을 예감하기에 처연하기조차 하다. 그녀는 작품 전체에서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인물이다.

 

! [......] 우리가 단 한순간이라도 상상 속에서 어떤 권력이나 자만심으로도 없앨 수 없는 망자들의 깊은 증언을 듣는다면, 과연 나날이 이어지는 우리 일상에 상처와 불의, 고통과 비참함, 잔인함과 잘못이 비집고 들어설 자리가 있으랴! (P.330)

 

이 소설은 문학사적으로 유명하지만 동시에 여러 비판을 받는 작품이다. 인물들의 변치 않는 전형성, 올리버와 로즈가 남매지간이라는 설정, 올리버의 일생에 대한 작가의 과도한 감정이입, 무엇보다도 우연의 반복 등. 하지만 온갖 고초에도 올리버가 선심을 유지하는 것, 당대 런던 하류 사회의 현실을 정확하게 드러내고 잘못된 제도를 고발하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는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작품 자체가 상당히 재밌다는 요소. 끝내 권선징악이 실현되는 대리만족도 빠뜨릴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디킨스에게 발을 담갔으니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천천히라도 그의 작품을 하나씩 펼쳐보련다. 아주 장기 프로젝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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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G. 웰스의 세계사 산책 - 세계 대문화와 함께 인류 문명의 위대한 역사를 걷다
허버트 조지 웰즈 지음, 김희주 외 옮김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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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 전에 독서한 책을 이제야 감상을 남긴다. 대단한 게으름의 소치다. 과학소설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웰스가 난데없이 역사책을 집필하였다는 사실이 생소하다. 이 책은 그가 저술한 방대한 세계사의 개론서에 해당한다.

 

그의 역사 인식이 독특한 점은 세계사를 고대 문명의 출현이 아니라, 지구의 탄생(1)과 인류의 탄생(2)으로 시작하는 점이다. 과연 자연과학을 공부한 저자다운 선택이다. 웰스는 인종 개념을 거부하면서 민족 개념으로 세계사를 이해한다. 서양사는 기본적으로 아리아인과 셈족의 투쟁으로 지속되었으며, 여기에 동양, 특히 중국의 한족, 몽골족이 등장하여 세계 전체의 역사가 형성되었다고 본다.

 

권력이 아리아인의 수중에 떨어진 후에도 사상과 체계를 둘러싼 아리아인과 셈족, 이집트인의 투쟁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사실 이 투쟁은 이후 역사 전반에 걸친 싸움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현재도 진행 중인 싸움이다. (P.132)

 

이런 민족간 대립과 경쟁 관계로 역사를 이해하는 개념은 생소하면서 저자만의 시각에 해당한다. 서양사의 중요한 분기점마다 그는 셈족과 아리아인의 관계를 언급한다. 페르시아 제국은 최초의 아리아인 제국이었으며, 아리아인의 최초 전성기는 로마 제국에 해당한다. 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 침묵하던 아리아인은 근대 유럽에 접어들면서 앞선 기계혁명과 자연과학의 덕택으로 근대 세계사를 지배하게 되었다. 셈족은 페니키아인, 유대인, 그리고 이슬람인들이다. 역사에서 맨 먼저 득세한 페니키아인이 로마와의 다툼 끝에 패망하고 오랜 기간 피지배인의 처지에 있다가 다시금 힘을 회복한 게 이슬람 제국이다.

 

포에니 전쟁이 남긴 흔적은 지금도 세상을 뒤흔들고 있다. 로마가 카르타고를 이겼지만 아리아인과 셈족의 대결은 나중에 비유대인 대 유대인의 충돌로 다시 나타나게 된다. (P.213)

 

13~16세기에 유럽의 아리아인들은 셈족과 몽골인에게 자극을 받고 그리스 고전을 다시 발견한 덕분에 라틴 전통에서 벗어나 지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인류를 이끌 수 있는 자리에 다시금 올라서게 되었다. (P.375)

 

현대에서도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은 여전하며 정치적, 종교적 요인뿐만 아니라 민족적 차이에도 있다고 볼 때 웰스의 견해가 터무니없는 것으로 무시하기 어렵다. 웰스가 유럽인이므로 분명 부분적으로 서구우월주의 인식을 가졌음을 부인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그는 비교적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균형적 인식, 다양성의 인정, 그리고 희망적 역사 인식이다. 그가 무조건 서구 사회를 옹호하지 않았으며, 솔로몬의 영광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제시하며, 근대 유럽인들의 무분별한 오만성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고 있음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유럽인들은 기계혁명 덕분에 일시적으로 세계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자, 이전에 몽골인들이 세계를 정복했던 일 따위는 까맣게 잊고 자신들이 앞으로 영원히 인류를 이끌어가리라 확신했다. (P.503)

 

역사적으로 근대 이전 서구 사회를 지탱해 온 건 정치적으로 로마였고, 정신적으로 기독교였다. 저자는 이 두 거대한 제국이 쇠퇴하고 소멸한 원인을 같게 보고 있다. 즉 로마와 기독교를 지키고 유지할 의지가 더 이상 없었기에 붕괴하였다면서.

 

아무래도 서구 중심으로 기술되기 마련이지만 저자가 세계사에서 동양, 특히 중국의 존재와 역할을 인정하는 대목은 그렇기에 더욱 신뢰가 간다. 그는 특이하게도 싯다르타에 대해서 다섯 페이지나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한나라의 비중을 전성기 로마 제국과 비슷한 위치에 두고 있으며, 당나라와 몽골인의 개방성과 역할을 높게 평가한다.

 

서구의 정신이 신학에 대한 집착으로 암울해졌을 때 중국의 정신은 개방적이고 관용적이며 탐구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P.300-301)

 

그다지 독창적인 민족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몽골인이 지식과 방법의 전달자로서 세계 역사에 끼친 영향은 막대하다. (P.369)

 

인류의 역사 발전에 대해 기본적으로 웰스는 낙관적이다. 그는 기원전 6세기의 의미를 강조한다. 이때 비로소 인류가 유아기를 벗어나 자신과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아테네의 고대 철학자들, 인도의 석가모니, 중국의 공자와 노자가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기 전 6세기는 사실 전체 인류 역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시기 중 하나였다. 중국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에서 인간 정신의 대담성이 새롭게 발현되고 있었다. 세계 각지에서 인간이 왕권과 신권, 제물의 인습에서 깨어나 아주 예리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P.187)

 

아울러 근대유럽의 정치적 혼란과 제1차 세계대전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진보할 거라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이러한 혼란은 인류가 노쇠하여서가 아니라 개인이 질풍과 노도의 시기를 겪어야 비로소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듯이 마찬가지 성격이라고 해석한다.

 

인류는 이제 겨우 청소년기에 도달했을 뿐이다. 지금 겪고 있는 문제들은 인류가 노쇠했거나 탈진해서 겪는 문제가 아니라, 인류가 더욱 강해진 힘을 아직 길들이지 못한 데서 생긴 것이다. (P.536)

 

그렇다고 순진한 낙관론을 펴지도 않는다. 인류가 가진 힘은 점점 커지는 데 반해 인간 이성은 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무한한 탐욕이 세계대전을 일으켰음에도 자기반성을 하지 않고 있는 현실을 개탄한다. 그는 단언한다. 평화를 향한 조처와 노력이 부족하다면 다시금 비극은 재발할 수 있다며. 이후 세계사를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섬뜩한 예언이 아닐 수 없다.

 

전쟁을 예측하고 예방할 수 있는 정치적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20~30년 뒤에 훨씬 더 큰 규모의 전쟁이 반드시 일어나고 말 것이다. (P.531)

 

1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직후 출간되었다는 점이 공교롭다. 저자는 이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대규모의 전쟁에 큰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당시 이처럼 비판적 지성을 갖춘 저자가 생전에 또다시 세계대전 겪은 후 어떤 감정과 사고를 지녔을지 궁금하다. 여전히 희망의 끈을 품었을지 아니면 참담함에 비관적으로 돌아섰을지.

 

방대한 세계 역사의 흐름을 이처럼 단 권의 책으로 모두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다. 개별적 사실의 상세한 내용은 개별사에 맡겨야만 할 것이다. 그러면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그것은 역사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인식을 깨우치고 다양한 견해를 품는 데 있다. 역사 전공자가 아니기에 웰스는 오히려 기존의 틀에 박힌 역사 인식을 떨쳐버리고 자신만의 개성적인 역사관을 제시할 수 있었다. 그것은 굉장히 기분 좋고 보람 있는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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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1
치누아 아체베 지음, 조규형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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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개국어로 출간되어 800만 부가 넘게 팔린 아프리카 문학의 고전’. 뒤표지에 쓰인 문구다. 이 작품을 계기로 그동안 외면받았던 아프리카 문학이 세계 무대에 진출하였으니 문학사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소설이다. 아프리카의 처지에서 아프리카인의 시각으로 아프리카를 이해하는 첫 시도다.

 

문학사적 의미와는 별개로 작품 자체에 대해서는 감상이 엇갈릴 수 있다고 본다. 전체적으로 보면 영국의 나이지리아 식민 통치에 대한 고발이라고 하겠는데, 침략 이전 우무오피아를 중심으로 한 토착 부족의 고유한 문화를 알리려는 목적도 분명히 강하다. 다시 말하면 서구 세력은 텅 빈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삼은 것이 아니라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지닌 토착민들을 강압적으로 식민화하였음이다. 그런 관점에서 이 두 가지 대비되는 상황을 극적인 긴장감을 가지고 읽는 독자에게는 확 다가오지만, 아프리카 문화 또는 식민 체제 저항과 관련하여 관심이 덜하다면 그리 흥미롭지는 않을 수 있다.

 

3부 구성인데, 절반을 훌쩍 넘는 분량의 1부는 우무오피아의 인류학적 안내와 다름없다. 다른 지역 독자에게는 매우 생소한 그들만의 문화, 관습 및 종교, 운영 체제를 다채롭게 기술하고 있다. 종족 축제인 씨름 경기를 하는 날이라던지 재판 방식, 결혼식과 장례식 등이 이국적인 신기함을 안겨 준다. 작가는 몇몇 주요 용어는 굳이 영어로 번역하지 않고 원어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 더욱 그러하다.

 

소설의 주인공은 오콩코로, 우무오피아에서 상당한 지위를 지닌 인물이다. 용맹과 재력을 바탕으로 마을의 최고 자리에 오르려는 욕망을 품고 있는 그는 작중에서 그리 호감 가는 성격은 아니다. 독자는 그에게 여러 단점을 쉽사리 찾을 수 있다. 전통 사회에서 치명적 약점인 남자답지 못하고 명예와 지위, 재산도 남기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극도의 반발심은 오콩코의 성격을 이룬 동력이다. 이런 요인들이 결합하여 과도한 폭력성과, 양아들과 다름없는 이케메푸나를 자기 손으로 죽이는 잔인성으로 표출한다.

 

그 두려움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의 것이었다.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두려움, 즉 그가 아버지를 닮은 것같이 보이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P.22)

 

토착 종족의 나름 전통 깊고 체계적인 문화에도 불구하고, 신의 명령이라고 해서 볼모 신분인 이케메푸나를 끝내 죽이는 의식이라든가 현저한 남녀 차별, 불가촉천민, 쌍둥이 유기, 조상신과 무당 등의 샤머니즘과 인습에 지나치게 얽매인 의례 등으로 일방적으로 긍정화하지 않고 사회적 한계가 분명함을 작가는 보여준다.

 

2부는 실수로 부족 사람을 죽인 징벌로 우무오피아를 떠나 외가 마을에서 생활하는 오콩코 일가를 그린다. 일순간의 행동으로 야심이 저지된 오콩코가 와신상담하면서 귀촌을 기다리는데,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음반타에 밀려오며, 장남인 은워예는 기독교에 입문한다. 여기서 기독교로 대변되는 새로운 서구문화와, 토착 종족의 전통 간 대립이 현저하게 드러난다. 은워예의 기독교 귀의는 자신들의 문화와 신앙이 이케메푸나를 죽인 것처럼 도저히 심정적으로 인정할 수 없기에 자발적 발현이라 할 때 이를 무조건 부정적으로 간주할 수 없다. 한편 오콩코의 작별 잔치에서 한 노인의 웅변처럼 새로운 종교가 부족의 전통과 가치, 친척 간의 유대를 급속도로 깨뜨리고 와해하는 현상 또한 바람직하다고만은 볼 수 없다.

 

그때 가슴속에서 뭔가가 무너졌다. 그의 아버지가 그날 밤 이케메푸나를 죽인 다음 들어왔을 때, 그것이, 그 느낌이 다시 그를 엄습해 왔다. (P.77)

 

3부에서 드디어 7년 만에 귀향한 오콩코는 백인 식민 체제가 안착하는 현실을 마주한다. 교회와 시장, 치안판사가 실질적 영향력을 미치는 상황. 오콩코는 다른 부족민들처럼 다소간 유연하게 바라보지 못한다. 전통에 충실한 남자답게 그는 서구 세력에 맞설 것을 주장하지만 대세는 이미 물 건너갔다. 마을의 우두머리들을 불러놓고 체포해버린 치안판사, 죄수처럼 그들의 머리카락을 깎아 버린 전령들, 몸값을 지불하고 겨우 풀려났음에도 보복을 대응하지 못하는 부족민들.

 

오콩코가 보기에 부족의 미래는 두 갈래 길에 놓였다. 서구의 식민 치하를 감내하고 종족의 전통을 서서히 포기하는 것과, 죽음을 각오하고 투쟁을 하는 것. 자신들에게 삭발의 치욕을 안겨준 전령 우두머리를 과감하게 처단하는 오콩코, 하지만 그는 이것이 마지막임을 알기에 자결하고 만다. 그가 의식적으로 행한 유일한 전통 위반 행동이다. 금기에 사로잡혀 나무에서 그의 시신을 끌어내기 꺼리는 부족민들의 모습과 대비로 작가는 끝맺는다.

 

오콩코를 부족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영웅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 동시에 시대를 읽지 못하고 불가피한 변화를 거부하다가 몰락하고 마는 수구 반동의 인물로 바라볼 수 있다. 그의 개인적 흠을 확대하여 그의 판단과 선택을 옹호하지 않고 정당성을 거부하는 시각도 뭐라고 할 수 없다.

 

시대순으로 구성된 우무오피아와 아반티 마을의 변천과, 오콩코의 성공과 몰락은 하나의 서사시이자 연대기에 가깝다. 작가는 은연중 종족의 전통 상실과 서구 식민 지배에 대해 거부감을 갖지만, 나름 한편으로 쏠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과거와 인습에 사로잡힌 토착 종족이 결국에는 세계사적 흐름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작가는 알고 있다. 그것은 오콩코와 같은 개인의 잘못도 아니며, 토착 종족과 서구 세력을 선과 악으로 단순화하여 옹호 또는 비판할 수 없음이다. 물론 후자의 잘못이 훨씬 크다는 것을 전제하지만.

 

치안판사가 그들에게 말했다. “우린 당신들이 행복할 수 있도록 당신들에게 평화로운 통치 체제를 가져왔습니다. [......] 우리는 법정을 세워 위대한 여왕님이 다스리시는 영국에서처럼 사건을 판결하고 정의를 구현합니다.” (P.227-228)

 

서구의 아프리카 식민 경험이 낳은 후폭풍은 지금까지 강력하게 남아 있다. 인위적 국경선 획정, 전통 문화와 체제의 와해, 자율이 아닌 타율성 의존 유발, 무엇보다 독재와 부패에 대한 무감각성. 오늘날 아프리카의 여러 어려움은 기후 문제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식민 유산으로 인한 폐해라고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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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끝의 온실
김초엽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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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를 다룬 과학소설이다. 온 세계를 뒤덮은 더스트로 인류가 절멸의 위기에 처한 소위 더스트 시대. 몇몇 살아남은 인간은 더스트를 막는 거대한 돔 시티에 모여 살고, 돔에 들어가지 못하거나 쫓겨난 사람들, 그리고 더스트 내성종들은 밖에서 나름대로 옹색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분투한다.

 

수십 년의 시간이 흘러 겨우 더스트를 퇴치하고 문명을 회복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 더스트 박멸은 과학기술의 덕택인 줄 알았으나 우연한 계기로 더스트 시대에 이에 저항하고 퇴치를 위해 노력한 사람들의 존재가 밝혀진다. 모든 게 모스바나라는 더스트 시대 후기에 풍미했던 독성 덩굴식물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모스바나는 더스트 시대 후기, 그리고 재건 직후의 빈곤한 시대에 가장 번성했던 우점종이었다. 당시에는 세계 어디에나 모스바나의 덩굴이 가득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과거의 불행한 기억, 혹은 겪어본 적도 없는 시대의 절망과 이 식물을 연관 짓는 것인지도 몰랐다. (P.41)

 

이 작품의 화자는 두 사람이다. 전체적으로 이끄는 이는 식물학자 아영이지만, 사건의 핵심은 프림 빌리지의 생존자인 나오미의 증언에 따른다. 그리고 작품의 주인공은 이희수=지수 씨와 레이첼이다. 전체 3부 구성인데, 1부는 어린 나오미와 언니, 2부는 프림 빌리지 시절, 3부는 아영과 나오미의 만남, 아영과 레이첼의 대면이다.

 

더스트는 기상이변이나 자연재해가 아니다. 인간의 탐욕과 과학기술이 결합하여 만들어낸 비극이다. 디스토피아 작품의 전형적 설계다. 돔 시티는 인류의 구제 수단인 동시에 제한된 공간과 자원으로 불가피하게 대다수 사람을 돔 밖으로 배제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영구적 돔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돔 안의 사람은 악착같이 자신들을 지키려 극단적 선택과 행동을 한다. 더스트에 저항성을 지닌 내성종 사람과 보통의 사람, 전자는 돔 시티 안의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배척당한다. 심지어는 인간 사냥의 대상이다. 동일한 인류로 간주하지 않는 것이다. 내성종끼리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생존이 최우선이기에 인간성을 도외시하곤 한다.

 

돔 안의 사람들은 결코 인류를 위해 일하지 않을 거야. 타인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지켜보는 게 가능했던 사람들만이 돔에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인류에게는 불행하게도, 오직 그런 이들이 최후의 인간으로 남았지.” (P.226)

 

앞선 과학기술의 실체를 확인할 수 없다고?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호버카, 드론 외에 무엇보다도 레이첼이라는 인간형 로봇이 있다. 프림 빌리지를 실질적으로 유지하는 원동력이자 온실의 주인, 식물 연구 외에는 일체의 관심이 없지만 지수 씨와 교류를 통해 독성을 낮추는 약과 저항성을 지닌 농작물을 개발한다. 그가 개발한 식물 중 하나가 모스바나다. 훗날 단지 유해식물로만 인식되던 모스바나가 더스트로부터 프림 빌리지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던 동시에 맹렬한 생장과 전파로 다른 농작물을 살 수 없게 만들어 결국 프림 빌리지를 해체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더스트 폭풍에 살아남으려면 덩굴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덩굴은 사람들을 굶주리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아름다워 보였던 푸른 먼지는 이제 고통의 근원처럼 느껴졌다. (P.230)

 

프림 빌리지. 인류 멸망의 시대에 돔 시티와는 다른 의미에서 인류 생존의 희망이자 외로운 모델이다. 돔 시티 못지않게 프림 빌리지 역시 이중성을 지닌다. 빌리지의 안전과 생존을 위해 외부 침입자는 가차 없이 제거하는 비정함. 나오미 자매가 받아들여진 것은 예외적인 사례다. 차마 죽이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렸다는 판단이리라.

 

프림 빌리지는 외부적 방해요인이 없었다면 영속할 수 있을까.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레이첼의 자비에 의존하여 생명줄을 버티고 있을 뿐. 그러기에 내부적 갈등과 작별이 끊임없이 생길 수 밖에 없는는 취약한 구조가 프림 빌리지다.

 

레이첼이 마을의 해체를 원치 않았던 건 이 마음을 자신의 실험실로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그럼으로써 지수를, 자신의 옆에 붙잡아두고 싶었던 거였다. 정비사가 아닌, 지수를 옆에 두고 싶어했던 것이다. (P.339)

 

지수 씨와 레이첼의 관계를 무엇이라고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레이첼을 수리할 때 감정 기능을 활성화함으로써 지수 씨에 대한 끌림을 느끼는 레이첼, 지수 씨가 떠나는 걸 막기 위하여 프림 빌리지가 간신히 버틸 정도로만 작물 개발을 하는 레이첼을 과연 비난할 수 있을까. 인류에 대한 환멸로 스스로 아웃사이더로 자처하던 지수 씨가 더스트 종식 시대를 살아남아 찾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레이첼을 발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게 되는 걸까.

 

이 책이 중고등학교 추천도서로 지정된 까닭은 무엇일까. 무분별한 과학기술의 폐해, 인류 최후의 순간에도 바래지 않는 인류애, 인간과 로봇의 공감과 공존, 멸절의 위기에도 굴하지 않고 분투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존재.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모두가 해당한다. 한편 소설은 다소 산만하고 혼란스러운 인상을 준다. 작품 속에 너무나 많은 사건과 요소를 담으려고 하다 보니 원래라면 벽돌책 또는 몇 권으로 나왔어야 할 내용을 한 권에 압축하는 작가의 의욕 과다의 결과라고 하겠다.

 

식물의 기계와도 같은 정밀함과 동시에 난관을 헤쳐나가는 유연함에 대한 찬사가 되풀이되는 점도 놓쳐서는 안 된다. 세계 도처에 적응하고 살아남은 모스바나처럼.

 

저는 모스바나가 더스트와 같이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질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모스바나는 공존과 유전적 다양성을 습득하고 더스트 시대의 흔적을 자신에게서 지우는 것으로 살아남았지요. (P.366-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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