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튼 동물기 4 시튼 동물기 4
어니스트 톰슨 시튼 글, 그림, 햇살과 나무꾼 옮김 / 논장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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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육체적 능력의 한계를 지력과 도구의 힘으로 뛰어넘어 먹이사슬의 최상층에 자리 잡게 되었다. 초식동물은 물론 사나운 맹수조차 인간의 위세에 굴복하여 쇠락과 멸종의 길을 걷게 될 정도다. 그렇다고 인간이 자부심을 가져서는 안 되고 가질 수도 없다. 야생동물은 자신의 야생성, 즉 자유를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할 것이며, 종내에는 자유를 목숨과도 맞바꿀 각오를 품고 있다.

 

여기 세 편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모두 인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종 분투하였다. 성공의 끝자락에서 실패로 귀결된 사례도 있지만 어찌 그들의 실패를 탓하겠는가. 오히려 그들을 기어코 정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야만성이 두드러질 뿐이다.

 

<야생마 페이서의 최후>

갈기를 휘날리며 드넓은 평원을 질주하는 야생마의 모습은 낯설기 그지없다. 몽골 초원에 가면 볼 수 있으려나.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야생마의 생활상과 개척민들 간의 갈등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잡기도 힘들뿐더러 잡아봤자 길들이기도 어려운 야생마. 가만히 내버려두면 방목하던 말들의 잠자던 야생성을 일깨우기에 눈에 띄는 즉시 사살의 위험에 빠지는 야생마. 여기서 자연은 단지 경제적 효용성으로만 재단된다.

 

압권은 인간들의 잇따른 야생마 페이서 추격전의 과정과 실패에 대한 생생한 기술이다. 갖은 꾀와 술수를 총동원하지만 페이서는 언제나 예측을 뛰어넘어 생존을 연장한다. 명성이 드높은 야생마를 잡고자 하는 인간들의 욕망과 자연이 부여한 생명을 유지하고자 하는 페이서의 본성이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삼손을 생포한 것은 델릴라 덕택이었고 늑대왕 로보도 짝 블랑카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되었다. 페이서를 잡기 위한 인간의 선택 또한 암말을 이용한 치졸하며 반자연적 수법이다. 페이서는 자연의 순수한 본능을 좆았기에 자유를 박탈당하였다. 여기서 야생마가 사로잡혀 길들여졌다면 시튼은 페이서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리라. 그가 찬미한 것은 정복당하지 않는 야생의 정신이었으니까.

 

생명은 끊어지고 육체는 처참히 부서졌지만 결국 야생마는 자유의 품에 안긴 것이다. (P.53)

 

<위대한 늑대 빌리의 승리>

아메리카 대륙에서 늑대의 존재는 상상 이상으로 강력하고 위협적이었던 듯싶다. 동물 이야기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동물은 늑대와 개로 추정되는데 야생동물로 한정짓는다면 단연 늑대이리라.

 

전반부는 고아가 된 빌리가 새 어미를 만나서 당당한 늑대로 성장하는 과정을 차근차근 밝히고 있다. 어미 늑대는 세상살이와 위험에 필수적인 모든 것을 가르쳐준다. 새끼 늑대만이 아니라 사람들도 늑대의 생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된다. 특히 늑대가 냄새로 상황을 분석하고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세세하게 보여주어 인간만이 고등 동물로 자부할 수 없음을 일깨운다.

 

두려움이나 경계심 또는 의심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영리함보다 더 가치가 있었다. 검은 목털이 무사히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육체의 힘 못지 않은 신중함 덕분이었다. (P.86)

 

자연은 무자비하다. 단 한 번 실수의 대가는 목숨의 상실로 이어진다. 홀로서기에 내몰린 늑대 빌리는 일대 목장주들에게 악마와도 같은 존재로 낙인찍힌다. 피해를 감당 못한 그들은 대대적인 늑대 추격전을 벌이는데 이야기 후반부는 전적으로 이에 관한 내용으로 흥미진진하기 이를 데 없어 한편의 스릴 넘치는 어드벤처다.

 

지독한 추격전 끝에 좁은 벼랑 끝에 빌리를 몰아넣는데 성공한 십여 마리의 사냥개들. 비록 사냥꾼들은 멀리 떨어져 도울 수 없는 처지에 있지만 이제 늑대의 운명은 경각에 달렸다. 시튼은 미리 당부하는데, 그것은 전혀 허튼소리가 아니었다.

 

개를 사랑하는 사람은 지금부터 책을 덮는 게 좋다......늑대는 바위 옆에 굳게 버티고 서 있었다. 싸움은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났고 남은 것은 늑대뿐이었다. (P.106)

 

영화의 한 장면을 상기시키는 결과에 대해 우리는 누구도 탓할 수 없다. 늑대, 사냥개 그리고 인간. 그들은 자기네 관점에서 모두 최선을 다하였다. 단지 빌리가 이겼고 그는 위대한 늑대가 되었을 뿐. 동물 영웅이라 불릴만하다.

 

<솜꼬리토끼 래길럭의 모험>

언제까지 이렇게 도망쳐 다녀야 하는 걸까? 근근이 목숨만 부지할 뿐인 이 삶은 그 얼마나 비참한가! 힘이 없다는 이유로 증오스러운 놈한테 최고의 먹이터와 아늑한 은신처, 고생고생해서 닦아 놓은 길들을 빼앗기고 말았다. (P.147)

 

힘 약한 초식동물의 비애라고 할까. 한탄이 절로 나올만하다. 실제로 솜꼬리토끼의 적을 쭉 나열하면 이러고도 살아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 여우, 고양이, 스컹크, 너구리, 족제비, 밍크, , , 올빼미, 사람, 심지어 곤충(P.138)마저도.

 

이 편은 솜꼬리토끼의 모험이라기보다 생존 기법의 집대성이라고 할만하다. 가만히 웅크리고 있기, 꼼짝 않기, 들장미덤불의 비밀, 철조망 수법, 개울 등등. 사방에 온통 적들뿐이니 위기탈출 방법도 다양하다. 이 모든 걸 알려주는 이는 래길럭의 어미 몰리다. 이야기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차라리 몰리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솜꼬리토끼 모자는 낯선 수토끼의 역경은 헤쳐 나갔지만, 늙은 여우의 습격에는 온전하지 못하였다.

 

가엾은 솜꼬리토끼 몰리! 몰리는 진정한 영웅이었다. 하지만 스스로를 영웅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작은 세계에서 최선을 다해 살다가 죽은 몰리 같은 토끼들은 수없이 많다. (P.158)

 

늙어 죽는 야생 동물은 없다고 시튼은 단언한다. 비극적인 최후는 시기의 빠르고 늦음의 차이만 있을 뿐 그네들의 운명이다. 그런 면에서 빌리와 래길럭도 이야기에서는 비교적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이후는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동물의 삶이 고통과 비극의 연속만은 아닐 것이다. 천적들의 희생자는 한마디로 병약한 개체라고 한다. 개체는 슬픈 운명을 맞이할 수 있지만 종 자체의 건강성 유지에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인간의 무자비하고 무모한 개입만 없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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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튼 동물기 3 시튼 동물기 3
어니스트 톰슨 시튼 글, 그림, 햇살과 나무꾼 옮김 / 논장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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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튼 동물기 전반을 관통하는 대체적 흐름을 복기해보자. 동물 대 동물의 자연 질서에 인간이 개입하여 인간 대 동물 간 대립이 발생한다. 잠시 저항을 해보지만 힘의 우열은 도저히 극복될 수 없기에 동물은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고 만다. 인간과 동물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은 정녕 불가능할 것인지 안타깝기만 한데 이번 권의 이야기에서는 가능성과 한계가 동시에 제시된다.

 

<비둘기 아노스의 마지막 귀향>

아노스를 야생동물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전서구로 훈육되고 인간의 보살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을 테니. 매와 송골매보다 인간에게서 한층 유대감을 지녔을 것이다.

 

비둘기로서는 실패한 가정생활에도 그가 맹렬히 집을 그리워하고 독보적인 귀소 감각을 발휘한 것은 단지 본능이었을까? 아니면 적으로 가득한 사방을 둘러보았을 때 그나마 안전을 유지할 만한 곳은 집밖에 없다는 슬픈 진실을 깨달았을 수도 있다.

 

전서구를 애호하는 인간의 포획이 아니었다면 아노스의 곤경은 발생하지 않았다. 조금 양보해서 총알을 날린 사냥꾼만 없었어도 그는 매와 송골매를 우습게 여기며 가뿐하게 귀향에 성공했으리라. 인간과 천적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오로지 집을 향해 질주하는 비둘기를 무모하다 비판할 수 없다. 아노스의 귀향은 목숨을 각오한 행위다. 그러기에 작가는 고양된 정서로 아노스의 비행을 기술하고 찬미를 아끼지 않는다.

 

이 고귀한 새의 가슴 속에서 끊임없이 타오르는 집에 대한 사랑, 위대한 하느님이 씨를 뿌리고 인간이 가꾼 그 사랑은 아무리 강렬하게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아무리 찬미하고 찬송해도 모자란다. (P.39)

 

<소년을 사랑한 늑대>

생물의 본성은 모두 동일하다. 자신에게 잘 대해주면 친근감과 애정을 느끼고 학대하고 괴롭히면 미워하며 증오심을 품게 된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는 이 원리를 잘 이해하면서도 사람과 동물 간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일이 빈번한데 이는 인간들의 우월의식에 연유한다.

 

어린 늑대가 지미를 사랑하는 반면 술 냄새 풍기는 남자들과 개들을 증오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늑대를 죽이기 위해 다수의 사냥개와 총을 동원한 사람들의 유희는 그들에게 일개 심심풀이에 지나지 않지만 늑대와 사냥개들은 생사를 건 혈투를 벌여야 하는 지경이다. 이들을 향해 퍼부은 어린 지미의 욕은 기실 아이의 입을 빌려 비인간적인 인간에 대한 작가의 비난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위니펙의 늑대를 떠나지 못하게 묶어 두었던 끈은 오직 하나다. 그것은 위니펙의 늑대를 온통 사로잡았던 간절한 요구이자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었다. (P.81)

 

 

자유를 탈취한 늑대는 굳이 마을 근처의 숲에 머물 필요가 없었다. 사랑하던 지미도 이미 병들어 죽은 마당에 그가 인간들에게 미련을 둘 까닭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늑대는 떠나지 않았다. 사랑하는 지미 곁을 결코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릴 적에 고아가 된 늑대의 생에서 유일하게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해주었던 소년.

 

늑대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했다. 숨 가쁜 사건들로 채워진 짧은 삶을. 오래도록 평화롭게 살 수도 있었지만 끊임없는 시련 속에서 3년 만에 생을 마감한 것이다. 위니펙의 늑대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고귀하지만 짧은 길을 택했다. (P.80)

 

<하얀 순록의 전설>

하얀 순록 역시 위니펙의 늑대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에게 마음을 주었다. 스베굼 영감은 하얀 순록을 강압과 두려움이 아니라 온화함과 따뜻한 배려심으로 길들였다. 시간과 노력은 많이 이러한 사육 방식의 절대적 효과성은 다른 동물들을 길들일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 편이 이색적인 것은 시튼의 주 무대인 북아메리카가 아닌 노르웨이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다. 게다가 하얀 순록을 노르웨이의 역사와 긴밀하게 연결시켜서 글자 그대로 전설화하고 있다. 노르웨이의 독립운동과 보르그레빙크에 관한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인지 알지 못한다. 어쨌든 이 편에서는 배신자 보르그레빙크의 간악한 책략을 저지하기 위한 스베굼 영감과 하얀 순록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순록을 몰 때는 조심하라! 순록도 분노할 줄 안다. (P.108)

 

순록은 소와 말처럼 완전히 길들여진 동물이 아니라 본성은 야생이다. 앞서 롤도 그렇고 보르그레빙크도 자기중심적이어서 자신의 생각과 목적에만 관심을 둘 뿐 썰매를 끄는 순록이 살아 있는 생명체라는 점을 외면한다.

 

소처럼 순하던 순록의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하얀 순록은 화가 나서 씩씩대며 거대한 뿔을 흔들어 댔지만, 멈춰 서서 자기를 때린 사람에게 복수를 하지는 않았다. 더 중요한 복수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P.122)

 

시튼은 요툰헤임, 트롤 같은 환상의 지명과 존재를 등장시켜 이야기 전체에 짙은 환상성을 불어넣고 있다. 실재적 역사와 가공의 옛날이야기가 혼재하여 진실인 듯 아닌 듯 전설을 이야기하고 있다.

 

<소년과 살쾡이>

인간은 지능과 도구 덕분에 야생동물을 압도할 수 있었다. 불과 총, 덫은 사나운 동물조차 인간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맹수들은 서서히 또는 대대적 사냥을 통해 대부분 멸종의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누구를 탓하고 비난할 수 없다.

 

자신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인간을 향한 야생동물들의 증오는 정당하며, 가축을 습격하는 맹수를 보며 터뜨리는 인간의 분노 또한 응분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이 편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정면대결이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시튼의 여타 이야기들과는 관점을 전혀 달리하고 있어 흥미진진하다. 연약하고 자신을 지킬 수단도 없는 인간은 맹수들에게는 그저 또 하나의 먹이에 불과하다.

 

살쾡이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것이다......토번은 살아 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워야 했다. (P.160~161)

 

인간을 사냥하려드는 야수, 얼핏 잔인하지만 생존을 위해 필사적인 그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그렇다고 인간이 무력하게 잡아먹힐 수는 없다. 사자와 호랑이도 아닌 고작 살쾡이한테 말이다.

 

토번과 자매들이 열병으로 앓아눕고 굶주리지 않았다면 대결 자체가 성사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살쾡이 퇴치를 위해 혼신의 기력을 쏟아 결투를 벌이는 일도 없었으리라. 어쨌든 토번은 살아남았고 살쾡이 가족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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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튼 동물기 2 시튼 동물기 2
어니스트 톰슨 시튼 글, 그림, 햇살과 나무꾼 옮김 / 논장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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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튼 동물기를 읽다 보면 인간과 동물 간에 존재하는 차이란 게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만물의 영장이라 자부하는 인간의 우월감이 어떻게 어리석은지를 깨닫게 된다. 이 책에 나오는 회색곰 왑과 여우 빅스는 한층 그러하다.

 

<고독한 회색곰 왑의 일생>

왜 남들은 불행한 나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을까? 왜 모두들 나를 못살게 굴까?......왑은 모든 적들을 잊지 않았고 그들을 미워했다. (P.36)

 

자신을 괴롭히는 대상을 향한 미움은 인간이나 동물이나 마찬가지다. 당장은 외롭고 약하기에 도망치거나 감내하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되갚아 주리라고 누구나 마음속에 되새긴다.

 

동물기 중에서 상당히 긴 이야기에 속하는 이 편은 고아가 되어 야생의 삶을 살아가는 동물의 고군분투 생존기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눈에 그런 회색곰은 단지 사나운 맹수로서 제거의 대상일 뿐이다.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는 외면하면서.

 

왑의 행동은 지극히 정당했다. 잭은 왑의 영토에 침입했고 왑을 죽이려다가 자기 목숨을 잃은 것이니까 말이다. (P.57)

 

왑이 무너진 것은 젊은 곰의 잔꾀에 속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튼은 동물기의 주인공들이 비극으로 생을 마치는 연유를 언급하곤 하였는데 그것은 맞서 싸우지 않으면 결국 생존을 위협 받는 엄혹한 자연의 규칙에 따른 것이다.

 

<용감한 개 스냅>

반려견의 관리에 대한 사회적 이슈가 있었다. 내게는 귀엽고 사랑스런 가족이지만 생면부지의 타인에게는 언제 위협적 본능을 드러낼지 모르는 일개 동물일 뿐이다. 인명을 해친 반려견과 스냅이 아마 유사한 종일 것이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스냅은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망설임과 두려움을 품지 않고 상대를 향해 맹렬하게 뛰어드는 본성을 발휘한다. 길들이고자 하는 화자의 자기합리화와 노력이 가상할 정도다.

 

동물기에 따르면 과거엔 많은 개들이 늑대 사냥에 동원되고 희생된 것을 알 수 있다. 개와 늑대는 일대일로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임은 자명하니 결국 숫자와 인간의 힘을 빌어야 할 것이다. 화자는 스냅의 용맹함을 두드러지기 위해 사냥개들의 비겁함과 망설임을 은근히 조소하지만 그것은 당연하다. 제일 먼저 덤벼드는 개가 십중팔구 희생될 테니까. 그걸 알면서 나선다는 것은 인간에게도 흔치않은 경우다.

 

그렇다. 그들은 곧 덤벼들 것이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 한숨 돌리는 대로. 늑대 따윈 두렵지 않다. , 그렇고말고. 개들의 목소리에는 용기가 깃들여 있었다. 개들은 제일 먼저 덤벼드는 놈이 상처를 입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결코 개의치 않을 것이다. 열기를 북돋기 위해 조금만 더 짖는 것뿐이다. (P.138)

 

스냅의 용맹은 맹목적이고 무모하다, 본성에 따른 것이겠지만. 그것이 여타 동물기와 스냅의 사례가 차별되는 까닭이다.

 

<어미 여우 빅스의 마지막 선택>

여우는 옛날 동물우화 등에서부터 똑똑한 동물로 나온다. 약삭빠르고 잔꾀를 부리다가 오히려 제 꾀에 빠지는 경우도 있지만. 확실히 이 이야기를 통해 여우가 과연 영리한 동물임을 알게 된다. 자신을 추적하는 사냥개를 따돌리고 심지어는 사람마저 가뿐하게 속여 넘길 수 있는 동물이 많지 않을 것이다.

 

이야기 전반부가 여우 부부가 타고난 능력을 신출귀몰하게 발휘하는 무용담인 반면 후반부는 여우 입장에서는 매우 비극적이다. 제아무리 잘난 동물도 인간이 마음먹고 목숨을 앗을 수 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만큼 자연에 대한 인간의 책임도 느끼게 된다.

 

빅스의 용기와 변함 없는 성실함은, 비록 너그럽게 이해할 수는 없다 해도 충분히 존경할 만했다. (P.177)

 

어미여우 빅스가 마지막 남은 새끼를 위해 쏟는 지극한 모성애는 여우에 대해 살짝 부정적인 뉘앙스로 기술하던 작가의 감정마저 누그러뜨린 듯하다.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였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새끼를 구해낼 방법이 없는 빅스.

 

빅스는 새끼를 비참한 죄수로 살게 할 것이야 죽일 것이냐를 두고 선택해야 했을 때, 가슴속의 모성애를 누르고 마지막 남은 출구를 열어 새끼를 자유롭게 해 준 것이다. (P.178)

 

그의 선택은 야생동물의 수준을 능가하며 오히려 어지간한 인간들보다 깊은 고뇌의 결과일 것이다. 그래서 더욱 가슴 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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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편의 동화 부클래식 Boo Classics 58
테오도르 슈토름 지음, 이미선 옮김 / 부북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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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 작품>

1. 레겐트루데

2. 불레만의 집

3. 키프리아누스의 거울

 

동화는 메르헨의 번역어다. 이 세 편의 이야기를 읽고 나서 전형적인 동화로 간주하는 독자가 과연 있을까 의심스럽다. 동화와의 연관성을 따지자면 초자연적 요소와 권선징악적 결말 정도다. 따라서 굳이 동화라고 여길 필요는 없다. 전통적 옛날이야기의 요소를 차용한 비사실적 성격이 강한 이야기 정도로. 작가가 여기서 교훈성을 강조하는 성 싶지도 않다.

 

<레겐트루데>

세 편 중 그나마 온건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비의 요정이 오래 잠든 사이 불의 요정이 활개를 쳐 지독한 가뭄으로 고통 받는 설정은 생소하지 않다. 비의 요정을 깨워야만 가뭄을 물리칠 수 있다. 마렌은 연인 안드레스와 긴 여정을 시작한다. 도중에 마주친 정경은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비의 요정 레겐트루데가 잠이 든 연유다.

 

오래전부터 인간들은 내게서 멀어져 갔어. 그리고 더는 아무도 오지 않았어. 그래서 난 더위와 지루함 때문에 잠이 들었던 거야. (P.43)

 

문명이 발달하면서 이성적 사고가 대세가 되면서 레겐트루데는 도깨비, 망상, 아무것도 아닌 뭣”(P.12)으로 취급받는다. 레겐트루데의 존재를 믿지 않는 부류를 작중에서는 새로운 종교를 가진 사람”(P.12)으로 부른다.

 

마렌과 안드레스의 활약으로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레겐트루데의 전언은 절실하다.

 

집에 가거든 사람들에게 나에 대해 전하고, 앞으로는 나를 잊지 말라고 전해. (P.47)

 

<불레만의 집>

어둡고 그로테스크한 작품이다. 동화라면 잔혹동화에 해당된다고 할 정도. 이야기 중에 한 부분이라도 밝은 대목이 떠오르지 않는다. 오로지 돈만 탐닉하고 인간미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매몰찬 인간상. 세상과의 연을 거부하고 칩거하며 혈육의 정마저 부인하는 불레만. 영원히 죽지 못하며 뒤늦게야 신의 자비를 간구하는 그의 처지는 딱하기보다 우스꽝스럽다. 그럼에도 악인에 대한 응징과 처벌이라고 쉽게 말하기 어려운 것은 작품의 비전형적 괴기성에 독자마저도 낯설기 때문이리라.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반전은 불레만 씨가 키우던 애완 고양이 두 마리의 변신에 있다. 삽시간에 커다랗게 자라나 맹수처럼 돌변해 버린 그들의 정체가 무엇일지 궁금하다. 그들은 불레만 씨가 집밖으로 탈출하지 못하도록 영원한 감시자의 역할을 한다.

 

<키프리아누스의 거울>

선한 생모와 악한 계모의 대비는 신데렐라와 장화홍련 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옛이야기의 소재가 되어 왔다. 그 점에서 이 동화는 전통을 계승한다고 볼 수 있다.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건이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점 등도 그러하다.

 

등장인물의 전형성이 두드러진다. 천사 같은 백작부인, 유혹에 흔들렸지만 근본 심성은 선한 백작. 대비되는 악인 유형은 새 백작부인과 하거 대령이다. 이들의 성격은 외모에서부터 드러난다. 특히 새 백작부인의 외모 묘사는 대표적인 팜므 파탈에 가깝다.

 

키프리아누스가 보내준 거울은 강력한 힘을 지녔지만, 그것은 현실의 선과 악을 투영할 뿐이다. 선한 사람이 선한 의도로 사용하면 선한 결과를 가져오지만,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선대의 백작과 백작부인의 이야기는 후대의 백작과 백작부인으로 반복된다. 선대의 계모는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망치고 말았지만, 후대의 계모는 비극을 끝내고 거울을 되돌려 놓는다. 선대의 아이들 이름과 후대의 아이들 이름이 똑같게 되는 점도 상징적이다.

 

 

이 세 편의 동화는 작가의 섬세한 손길을 거쳐 옛이야기와 동화의 상투성을 벗어던진다. 인물은 유형화된 정형성을 탈피하고 내면에 복잡한 감정과 사고의 흐름을 보여준다. 불레만 씨와 새 백작부인을 일방적으로 매도할 수 없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작가는 스토리 전개에만 치중하지 않는다. 레겐트루데를 찾기 위한 여정에서 보여주는 아름답고 환상적인 정경 묘사는 대표적이다. 불레만 씨의 파멸을 보여주기 위해 급히 내달리지 않고 가정부 앙켄 부인의 죽음, 고물상의 아들과 어린 크리스토프의 우정도 빠뜨리지 않는다. 이런 점들이 결합하여 세 편의 동화를 매우 독창적인 이야기로 만들고 있다, 독자의 취향과 호오를 떠나서 말이다.

 

현실과 환상의 세계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볼 수 있는 세계이지만, 두 세계는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 환상의 세계에서는 현실을 인지하고 있는데, 현실의 세계에서는 환상의 세계를 보면서도 믿지 못한다. (P.139)

 

작품해설에서 <불레만의 집>과 관련하여 기술한 대목이다. 인간의 이성이 설명하지 못하는 영역, 의식을 초월한 불가해한 세계. 이것이 환상이 존재할 수 있는 근거이며 동화로 대변되는 옛날이야기부터 현대의 환상문학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면면히 이어져오는 원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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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첫사랑
빌헬름 마이어푀르스터 지음, 염정용 옮김 / 로그아웃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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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원작이 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카를 하인리히>이고, 희곡으로는 <알트 하이델베르크>인 이 작품은 여러모로 영화 <로마의 휴일>을 떠올린다. 남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하이델베르크의 휴일이라면 너무 앞서 나간 셈인가.

 

늙은 대공의 말처럼 권좌는 외로운 자리다. 군주는 자신의 권력을 나눌 수도 괴로움을 공유할 수 없다.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하고 인내해야 하며 모두를 지배해야 한다. 궁정에서 진정한 우의와 교분을 맺을 수 있을 것을 기대하면 안 된다. 군주의 삶은 공적인 영역이다.

 

모든 시민들의 삶은 비뚤비뚤 갈 수도 있고 아래위로 요동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군주의 삶은 앞으로 언제까지나 계산되어 있고, 정확히 측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확실하면서도 단조로웠다. (P.172)

 

태자와 박사의 궁정 삶이 답답하고 재미없을 것은 충분히 짐작된다. 태자는 다른 경험이 없어 그나마 나을지라도 태자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고용된 박사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이렇게 한탄한다. 두 사람이 카를부르크를 떠나 하이델베르크로 떠날 때 박사는 영원한 작별을 고한 셈이다. 결코 다시는 돌아올 생각이 없었으므로.

 

궁정으로 들어온 것이하고 그는 종종 말했다. “나의 불행이었어. 그토록 쾌활하고 자유롭던 내가 지금은 어떻게 변했단 말인가! 이상은 물거품이 되었고, 자유도 사라졌고, 건강마저 잃었어. 저 성에서 그들이 내 숨통을 조여 이렇게 만든 거야.” (P.8)

 

작중에서 박사와 루츠 씨는 대비적 인물이다. 루츠 씨는 궁정 생활에 최적화되어 그곳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을 수 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루츠 씨의 우스꽝스러움은 자기자리를 찾지 못한 데 연유한다. 반면 박사는 태자에게 탈 궁정 생활의 즐거움을 불어넣고 유혹한다. 교육자로서 박사의 역할에 대해서는 독자마다 다른 의견을 품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가 반복하여 태자에게 천명한 청춘과 자유로 가득한 삶의 중요성은 간과할 수 없다.

 

사랑하는 카를 하인츠, 넌 허비하고 있어. 더구나 인간이 가진 가장 소중한 걸 말이다. 바로 시간, 청춘이란다!......우리가 놓친 시간 하나하나는 지나간 것이고 다시 돌아오지 않아.” (P.122)

 

젊음을 소중히 간직하거라, 카를 하인리히. 그게 내가 너에게 바라는 전부다. 지금 이 상태로 남아 있고, 만약 그들이 널 다르게 변화시키려 한다면-다들 그렇게 하려 들 거야-거기에 맞서 싸워라. 젊은 기상을 지닌 그런 사람으로 남아야 한다, 카를 하인츠. (P.140)

 

태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지낼 나날의 실체를 미처 알지 못했다. 박사가 주입시킨 단편적 이미지, 그리고 막연한 동경뿐. 청춘의 끓어오르는 열정과 활기, 신분 차를 거리낌 없이 넘나드는 우정, 이성과의 자유롭고 솔직한 감정 교환 등에 맞닥뜨린 그가 어찌 보면 광란으로 점철된 시절을 보낸 것은 당연하다. 케티와의 첫사랑, 태자도 케티도 그것이 아름다운 결실로 맺어질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장래를 바라보기 보다는 당장 눈앞의 현재의 행복과 기쁨에 가슴 벅찼으리라. 시종 루츠 씨를 제외한 모두가.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토록 행복한 적이 있었나? 결코 없었어! 어제와 오늘 나에게는 수많은 인상들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들었지만, 거기에 불협화음은 전혀 섞여 있지 않았어. 그것들 모두가 조화롭게 합쳐져 단 하나의 행복의 화음으로 울려오고 있지. (P.72)

 

하지만 그것은 시한부의 행복일 따름이다, 길어야 1년인. 게다가 늙은 대공의 와병으로 그는 몇 개월 만에 귀국하게 된다. 빛나는 백일몽에서 깨어나 암울한 현실로. 하이델베르크의 기억은 가슴 한켠에 남아있을 뿐이다.

 

하이델베르크! 그 시절을 떠올리면 그의 가슴 주위가 마치 청동 죔쇠처럼 조여 와 그를 금방이라도 질식시킬 것만 같았다.

지난 일이야! 사라졌어! 영원히! (P.154)

 

여기서 끝이라면 이 작품은 청춘 찬가의 자격이 없다. 우연한 계기로 억눌렸던 추억이 되살아나고 그는 일탈을 감행한다. 마음을 위한 백신 처방이리라. 허겁지겁 귀국하는 바람에 그는 그 시절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하였다. 마음의 매듭을 영원히 품고 지낼 수는 없는 법.

 

달려라! 기차가 얼마나 빠른지! 더욱 멀리! 누구도 이 기차를 따라잡지 못해! 짖어 대는 사냥개들은 점점 더 뒤로 처지고 그는 자유로워졌다. (P.179)

 

잔뜩 기대를 품었던 재방문은 현실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깨어난 백일몽은 다시 꿈꿀 수 없다. 잡힐 듯 말 듯한 아련한 추억으로 남기는 편이 더 행복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미련을 포기 못한다. 한 가닥 허상에 불과함을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씁쓸한 미소를 짓게 되는 것이다. 태자 역시 그러하다. 그럼에도 그는 운이 좋은 편이다. 꺼진 줄 알았던 사랑의 불씨가 차디찬 잿더미 속에서 숨죽이고 있다가 돌발적 재회에 소생하였다. 각자의 갈 길이 서로 다르며 눈앞에서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서로를 향한 뜨거운 마음을 더욱 불어넣은 듯 싶다.

 

훗날 카를 하인리히가 문득 청춘 시절의 하이델베르크를 떠올릴 때 가슴 한켠이 시려올 것이다. 흐뭇함과 회한의 양가적 감정으로.

 

그는 이날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이날은 그에게 지나간 청춘 시절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정점에 이른 찬란한 햇빛 아래서가 아니라 흐릿한 저녁놀 속에서 비치는 청춘이었다.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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