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튼 동물기 1 시튼 동물기 1
어니스트 톰슨 시튼 글, 그림 / 논장 / 200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큰아이가 <시튼 동물기>를 읽고 싶다고 하여 부랴부랴 구입하였다. 두 아이가 경쟁적으로 책장을 넘기며 보고 또 보고 하는 모습을 지켜보니 흐뭇하며 기특하다. 근래 사다 준 책 중에서 가장 열심히 흥미진진하게 읽는 책인 듯싶다. 불현 듯 생각나서 나도 간만에-아니 처음인 듯도 하다- <시튼 동물기>를 읽는다.

 

나의 주제는 무심하고 적대적인 인간의 눈에 비친 한 종의 일반적인 생태가 아니라, 각 동물의 진정한 개성과 삶의 관점이다. (P.7)

 

시튼의 동물기가 특히 두드러진 점은 위와 같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 인간과 동물은 대등한 존재이며, 각 동물이 주인공으로서 인간 중심의 독선적 사고관을 벗어나 있다. 그렇기에 독자는 미처 알지 못하던 동물의 삶을 피상적 관찰과 이해에서 벗어나 살아 숨 쉬는 존재로서 인식하며 깊은 공감을 품게 된다.

 

한 야생 동물의 삶이 인간의 삶보다 훨씬 더 흥미로울 수 있음을 보여 준다. (P.103)

 

<커럼포의 늑대왕 로보>

우리는 로보의 맹렬함과 영리함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무수한 목장주와 사냥꾼의 유인과 추격에도 로보는 굴함이 없이 먹이사슬의 최상위 포식자로서 당당한 역할을 한 치의 주저함이 없이 수행하였던 것이다. 블랑카가 아니었다면 과연 가엾은 영웅 로보가 덫에 걸려들었을까? 사랑하는 이와의 갈등 또는 상실로 이성을 잃는 사례는 사람들도 비일비재하다. 로보의 체포와 죽음에 유달리 동정이 가는 연유다. 그는 의연하고 당당하였다.

 

<산토끼의 영웅 리틀워호스>

이 편에서는 본능에 충실하며 영리하고 순수한 동물과 잔인과 탐욕에 물든 인간이 진한 대비를 이룬다. 리틀워호스를 포함한 산토끼들에게 불행이 닥친 것은 인간의 무지와 간섭으로 자연의 균형을 깨뜨린 탓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이 망가뜨린 자연과 멸종시킨 생물은 참으로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사냥개와 산토끼 간의 목숨을 건 경주는 흡사 로마제국의 콜로세움에서 벌어진 사투를 연상시킨다. 쫓기는 산토끼나 쫓는 그레이하운드나 오로지 본능과 생존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동물의 죽음을 수반하는 유희를 즐기는 인간, 여기에 오직 이익과 흥미가 있을 뿐 정당한 규칙과 올바른 원리는 없다. 결코 정직하다고 할 수 없는 미키의 일갈이 선명하다.

 

공정한 경기라고! 너희들이 말하는 공정한 경기가 이런 거냐? 이 거짓말쟁이, 더러운 사기꾼, 이 치사한 겁쟁이들아!” (P.86)

 

<지혜로운 까마귀 실버스팟>

까마귀들은 조직의 소중함을 알고 있으며 병사들처럼 훈련이 잘 되어 있다. 사실 까마귀들은 웬만한 군대보다 훨씬 낫다. (P.103)

 

까마귀들의 사회성과 조직 규율이 이처럼 세밀하고 철저한 지 미처 알지 못하였다. 게다가 영리하기까지 이를 데 없으니 말이다. 무엇보다도 화자가 까마귀들 간에 의사전달을 위한 각종 구호 체계를 악보에 음표로 정리한 부분은 기상천외하며 압도적이다.

 

올빼미에게 습격당한 실버스팟의 죽음은 그의 지혜로움에 대한 평판을 훼손시키지 않는다. 누구도 회피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재난은 동물은 물론 인간도 모두 해당되므로.

 

<야성의 개 빙고>

인간과 개의 끈끈한 유대는 인간이 개를 길들이면서 시작하였다. 개는 자신의 야성을 포기하면서 동물 사촌들과 거리가 멀어지고 인간에게 생을 의존하게 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야성을 간직한 개는 다소간 우려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자칫하면 어느 순간 강렬한 야성으로 개의 본성을 잃을 수 있다.

 

빙고는 늑대처럼 자유롭게 사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의 야성은 사냥개 탠을 죽이고 암코요테와 짝짓기를 한 것에서 절정에 이른다. 개는 가축과 야생의 중간에 계속 머물 수 없다, 아니 인간이 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빙고는 늑대처럼 살다가 늑대처럼 죽어 간 것이다. 독자는 알고 있다. 빙고가 인간에게 충실한 개였음을, 그가 두 번이나 화자의 목숨을 구해 주었음을.

 

인간은 늑대를 공공의 적으로 간주하고 무차별 살육하였다. 언젠가 늑대 시체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옛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오늘날 늑대는 일부 지역에서만 명맥을 유지할 뿐이다. 화자 역시 늑대와 코요테 사냥으로 생계를 꾸려나간다. 그에게 있어 그들은 단지 생계 수단으로 간주될 뿐 하등의 감정적 연민을 품지 않는다.

 

덫에 걸린 늑대로 지금의 나와 같은 심정이었겠지. ! 내가 여태껏 얼마나 몹쓸 짓을 해 온 걸까! 이제 그 죗값을 치르는가 싶었다. (P.159)

 

역지사지. 화자가 늑대와 같은 곤경에 처하고 보니 동물의 심정에 공감과 연민을 알게 된다. 시튼이 독자에게 주는 메시지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동물을 단순한 사물과 객체로서 바라보지 말고 심장에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의 친척으로 봐주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독일인의 사랑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20
막스 뮐러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남녀 간 사랑의 본질과 관련한 주제는 인류 역사와 궤를 나란히 한다. 진부한 듯 하지만 싫증을 유발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생명의 본질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생명체로서 생존과 번식에 사랑은 필연적이다. 그럼에도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제각각이다. 누구나 자신의 체험을 반추하며 사랑의 의미를 곱씹는다. 체험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가슴 속에 품은 이상화된 사랑의 모습을 열렬히 간구한다. 이 작품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사랑의 모습 역시 작가 개인의 시각과 관념에서 형상화된 양태이다.

 

무수한 모방을 이끌어냈던 젊은 베르테르의 사랑은 비극적이다. 뜨겁고 격렬하여 목숨마저 무가치하게 만들 정도의 폭풍 같은 사랑. 많은 소설가와 시인들이 제재로 다루었고 찬미해마지 않았던. 작가는 이를 거부한다. 순수하고 완전한 사랑이 아니라고 판단한다.

 

그것은 이미 순수하고 완전한, 기쁨에 충만한 어린이의 사랑은 아니다. 그것은 두려움과 궁핍이 섞인 사랑-작열하는 불꽃이요, 타오르는 정열일 뿐이다. 달아오른 모래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스스로를 소모하는 사랑-갈망하는 사랑이지 헌신하는 사랑이 아니다. 나의 것이 되어달라고 요구하는 사랑이지 너의 것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본위의, 의혹이 뒤섞인 사랑이다! 이것이 바로 시인들이 노래하며 젊은 남녀들이 믿고 있는 사랑이라는 것의 실체다. (P.27)

 

그러면 작가가 생각하는 참된 사랑의 모습은 무엇인가라는 반문에 이 소설로 응수한다. 이 책은 소설화한 사랑학 개론이자 시화(詩化)된 산문이다. 단순한 줄거리와 구성은 글의 힘과 문체로 정면 승부를 보겠다는 작가의 의지를 피력한 셈이다. 기기묘묘하고 이채로운 풍경에 대한 열광은 찰나적이며 비반복적이다. 한적한 시골길의 돌담 위에 자리 잡은 이름 모를 들꽃의 질박한 아름다움이 차라리 나그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플라토닉한 사랑은 예찬보다는 조소에 가깝다. 젊은 남녀의 사랑은 정신과 육체의 결합을 통해 완성된다. 그들의 결합이 법률적으로 인정되면 곧 결혼이다. 시행착오는 있을망정 사랑은 결국 결혼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자연적이면서도 세속화된 사랑의 외양이다. 작가 역시 이를 긍정한다.

 

, 육체 없이도 정신이 존재할 수 있다는 듯이 정신을 들먹이지 마라! 완전한 현존, 완전한 의식, 완전한 기쁨이란 오로지 정신과 육체가 하나인 곳에만 있을 수 있다......실재하는 삶이란 어디에서든 육체적, 정신적 삶이요, 실재하는 향유란 어디에서든 육체적, 정신적 향유다. 또한 실재하는 만남이란 어디에서든 육체적, 정신적 만남이다. (P.142~143)

 

주인공과 마리아의 사랑은 순수하지만 세속적 잣대에 익숙한 우리의 시선으로는 불순하다. 간계와 음모가 숨어 있고 순진을 기만하는 속임의 가면을 쓴. 두 사람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세상은 고귀한 사랑의 가치를 믿지 않는다.

 

두 사람의 사랑은 운명적이다. 그들은 단번에 상대방의 의미를 깨닫는다. 여주인공의 이름 마리아는 상징적이다. 이름 자체에서 순수함과 고결함을 배어나와 여느 사랑과 같을 수 없음을 암시한다. 그들은 평범한 연인이 될 수 없고 부부도 될 수 없다. 사회적 신분의 차이와 마리아의 불치병. 통념적 사랑의 수순을 밟아갈 수 없는 처지. 사랑의 기쁨을 누리기에도 힘겨운 육체적 쇠약과 멀지 않은 나날.

 

여기서 두 사람의 사랑을 좀 더 공감해 보련다.

 

그녀를 본 첫 순간에 나는 그녀의 전부를, 그녀의 내부에 감춰진 모든 것을 알아보았다. 우리는 인사를 하면서 동시에 서로를 인식했던 것이다. (P.62)

 

나의 소유는 아니지만 당연히 나의 것이어야 하며, 나의 것이고자 원하는 존재임을. 내가 나 자신처럼 믿을 수 있는 존재, 나와 동떨어져 있지만 나 자신보다 더 가까운 존재, 그것이 없으면 나의 생명은 이미 생명이 아니며 나의 죽음조차 이미 죽음이 아닌 존재, 그것이 없으면 내 가엾은 현존이 한숨처럼 허공으로 사라지고 말 그 존재 (P.143)

 

그녀를 다시 못 만난다니? 나는 진정 그녀 곁에 있을 때만 살아 있음을 느낀다. 조용히 있을 테다. 그녀에게 아무 말도 걸지 않고, 그녀가 잠들어 꿈을 꿀 때 가만히 창가에 서 있을 테다. 그런데 그녀를 만나지 못한다고? 작별 인사조차 할 수 없단 말인가? 그녀는 알 리가 없다. 내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다. , 하긴 나도 그녀를 사랑하는 것은 아닐 거다. 나는 그녀를 탐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희망하지 않는다. 실로 그녀 곁에 있을 때처럼 내 심장이 평온히 뛰는 적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그녀가 곁에 있음을 느끼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그녀의 영혼을 호흡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P.91)

 

이처럼 내 마음이 깨끗해진 순간에 있는 그대로 내 온 마음의 사랑을 고백하게 해주십시오. 우리가 초지상적인 것을 이처럼 가까이 절감하고 있는 지금, 우리를 다시는 갈라놓지 않도록 영혼의 약속을 맺읍시다. 사랑이 어떤 것이든 간에, 마리아,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느끼고 있습니다. 마리아 당신은 나의 것이라는 것을. 왜냐하면 나는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P.129)

 

양자의 사랑이 흠 없이 순수하다고 주장하지는 않으련다.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들 역시 세속적 사랑의 순서를 따라갔을 것이다. 사랑고백의 대사와 뒤이은 키스는 남들과 다를 바 없다. 다만 사랑의 발현과 인정, 고백에 이르는 일련의 감정의 흐름은 자체로 더없이 순수하였다.

 

마리아는 기쁨과 행복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자신의 짧은 생에 이보다 더 큰 의미를 부여해 준 경험은 일찍이 없었으므로.

 

마리아는 묻는다. 왜 당신은 나를 사랑하나요?”

주인공이 대답한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겁니다.”(P.151)

 

이 이상 완전한 대답이 있을 수 있겠는가?

 

작가는 작품의 사상과 감성을 심화하고 구성의 단조로움을 깨기 위하여 적절한 인용을 비중 있게 삽입하고 있다. 작자미상의 <독일 신학>에 대한 논의가 그러하며, 매튜 아널드의 <파묻힌 생명>(P.80~85)과 워즈워스의 <산지의 소녀>(P.115~119)이라는 장시도 흥미롭다.

 

사랑이란 만인의 심장을 타고 흐르는 대양이 아닌가. 그래서 누구든 저마다 그것을 자신의 사랑이라고 부르지만, 실은 온 인류에게 생명을 주는 맥박인 것이다. (P.114)

 

의사는 주인공에게 당부한다. 마리아와의 사랑을 일개인적 체험으로 축소하지 말고, 이루지 못한 사랑을 기반으로 전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하고 승화시킬 것을, 그리하여 보다 큰 차원에서 사랑을 이루어낼 것을. 표제의 독일인을 지역적으로 국한해서는 안 되는 연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뜬세상의 아름다움 태학산문선 105
정약용 지음, 박무영 옮김 / 태학사 / 200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의 구성을 먼저 언급한다. 판형치고는 300쪽에 가까운 제법 볼륨감이 느껴진다. 다만 227쪽부터는 한문 원본이다. 한문을 애호하는 독자라면 환영하겠지만 일반 독자에게는 관심 영역 밖이다. 결국 200쪽을 살짝 넘는 아담한 분량인 셈이다. 앞부분에 30쪽에 달하는 작가 해설이 상세하다. 각 글마다 친절한 작품 해설도 덧붙여 있으니 다산 정약용의 산문을 알리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다산은 조선 후기의 거인이다. 그의 장대한 학문세계에 기죽기 마련이지만 여기에 실린 글들을 읽다 보면 그도 새삼 평범한 인간이었음을 알게 되며 그의 희로애락에 공감하게 된다. 청년기에서 노년기에 이르는 전 생애를 포괄하는 글들은 명승 유람의 기행문에서 동병상련의 형에게 보내는 서신, 죽은 아이들을 기리는 글, 아들들을 훈계하고 당부하는 글 등 다양한 성격을 보여준다. 이는 옮긴이가 논설문을 배제하고 다산의 인간적 면모를 드러내는 서정적 글 위주로 선별한 취지에 따른 결과다.

 

1. <적벽, 물염정><서석산 유람기>, <곡산 북쪽의 산수>는 기행문에 해당한다. 전자를 통해 화순 적벽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고 언젠가는 꼭 가보고 싶다. 서석산은 오늘날의 무등산을 지칭한다. 여기서 다산의 감상은 단순히 풍경 자체에 대한 감흥을 뛰어넘는다.

 

조공은 이 산이 다른 모든 산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홀로 알아보았으니, 그 산과 사람이 모두 위대하다고 하겠다. (P.45)

 

<금강산에 가는 까닭>에서는 우리가 자연을 애호함을 마음을 기르는 것으로 인식하여 그 가치와 중요성을 십분 강조한다.

 

마음을 기르는 것은 설령 탐닉하며 돌아 나올 줄 모르더라도 군자는 탐욕스럽다고 하지 않는다. (P.55)

 

2. 탄탄대로를 걷던 그의 관로는 정조의 죽음과 함께 끝나고, 서학 세력으로 몰려 가문이 몰락하고 그는 유배를 떠나게 됨은 대체로 알려진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그가 많은 사색과 깊은 고뇌를 거듭했음은 당연하다. 자신의 비참한 현재 처지와 알 수 없는 앞날의 불안감 등은 새삼 자신을 돌아보게 하였다.

 

대체로 천하만물이 모두 지킬 필요가 없는데, 오직 만은 지켜야 한다......유독 이른바 라는 것은 그 성질이 달아나길 잘하며 들고남이 무상하다......나는 허술하게 간직하였다가 를 잃어버린 자다. (P.94~95, <나를 지키는 집>)

 

망설이기를 겨울에 시내를 건너듯, 겁내기를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듯 한다. (P.87, <겨울에 시내를 건너듯>)

 

윗 대목에서는 그의 또 다른 유명한 호인 여유당의 출처와 의미를 알게 해주는데, 사방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그의 처참한 심경을 그대로 드러낸다.

 

지금 천하가 온통 다 떠다닙니다......생각해보면, 떠다닌다는 것도 아름답지 않습니까? (P.109~111)

 

이 책의 표제이기도 한 <뜬세상의 아름다움>은 나산처사의 추상적인 떠다니는 삶을 구상으로서의 뜬세상으로 변용한다. 일종의 언어유희로 나산처사를 희롱하는 듯 하지만 실은 그에 동의를 하면서 뜬세상의 답답함을 표출하고 있다. 굴원의 고사를 상기시키는 듯 한 뉘앙스가 가슴에 스며든다.

 

3. 다산이 천주교도인지 아닌지는 명확하게 드러난 게 없다고 한다. 나는 여기에 수록된 글로써 그가 천주교도가 아님을 믿고 싶다. 그는 현세주의자 내지 현실주의자다. 그는 피안을 중시하지 않는다.

 

이미 가버린 것은 뒤쫓을 수 없고 앞으로 올 일은 기약할 수 없으니, 하늘 아래 지금 누리고 있는 처지처럼 즐거운 것이 없다. (P.67, <지금 여기서>)

 

그가 천주교도였다면 자식들에게 보낸 글에서 아래와 같은 훈계는 결단코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서학을 믿지 않았음을 처절하게 부정하였다.

 

사대부의 마음이란 비 갠 뒤의 바람이나 달과 같이 털끝만큼도 가리워진 곳이 없어야 한다. 하늘과 인간에게 부끄러울 일은 칼로 끊은 듯 범하지 말아라. (P.204, <입을 속이는 방법 가훈>)

 

4. 사상가 다산이 아닌 인간 다산의 면모는 그가 죽은 아이들을 위해 쓴 여러 편의 묘지명에서 우선 확인할 수 있다. 의학이 발달하지 못한 당대에 천연두와 홍역 등의 질병으로 목숨을 잃은 아이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그들을 잊지 못하고 삶의 흔적을 기록으로 남기는 수고와 배려를 아끼지 않은 이가 또 누가 있겠는가? 다산의 애틋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아아, 내가 하늘에 죄를 지어 이처럼 잔혹한 일을 당하는 것이니, 어찌 하겠는가. (P.126, <소라껍질 두 개>)

 

형 정약전의 죽은 아들의 양자를 들이는 과정에서 벌어진 집안 내 갈등도 원칙과 예법보다 인정을 우선시하는 다산의 변모된 모습을 보여준다.

 

옛 경전을 고지식하게 지키느라고 화기를 상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P.153, <예법과 인정 형님께 4>)

 

다산의 학문적 동지이자 정신적 의지자인 형 정약전의 죽음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형의 뛰어난 인품과 학식을 세상은 물론 가족들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지음(知音)을 잃은 자신의 슬픔이 <나무나 돌도 눈물을 흘리는데>에서 절절히 드러난다. 앞서 정약전의 건강을 염려하여 개고기 요리법도 적어 보낸 다산이었지만, 오히려 다산의 참혹한 건강 상태가 두드러진다. 이런 처지를 무릅쓰고 그는 거작들을 완성해 냈던 것이다.

 

중풍은 병근이 이미 깊어져서 입가에는 항상 맑은 침이 흐르고, 왼쪽 다리에는 늘 마비증세가 느껴집니다. 머리 위에는 두미협에서 얼음 낚시 하는 늙은이들의 솜 모자가 늘 얹혀 있습니다. 게다가 근래에는 혀도 굳고 말도 엇갈립니다. 살 날이 길지 않음을 스스로도 알겠습니다. (P.145, <꽃 피자 바람이 부니 형님께 2>)

 

5. 유배 생활이 장기에 접어들고 사면에 포함되지 못함에 따라 다산은 귀향의 마음을 서서히 놓는다. <뜬세상의 아름다움><은자의 거처>를 보면 다산이 자신의 유배지를 이모저모 아담하게 가꾸었음을 알게 하며, 그가 꿈꾸는 은자가 머물만한 거처의 모습과 요건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하였는데도 끝내 돌아갈 수 없다면 이것도 운명인 것이다. (P.211, <세상의 두 가지 저울 연에게>)

 

하지만 제아무리 체념하고 이곳의 생활을 미화하고 포장하지만 인간인 이상 어찌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겠는가? <마음 속 계산 형님께 6>에서 대사면에 포함되지 못한 서운함을 여기가 낫다며 역설적으로 표현하지만, 돌아가고 싶은 못나고 약한 마음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다.

 

6. 다산이 유배지에서 쓴 무수한 글은 자신의 두 아들을 위한 것이다. 졸지에 몰락한 집안, 아버지마저 죄명을 쓰고 머나먼 타지에서 귀양살이하는 형편에 놓인 두 아들. 그는 아들들이 올바로 자라지 못할까 노심초사한다. 엄격하게 훈계하고 때로는 당부와 애원도 마다하지 않는 다산의 부성애가 너무나 사실적이다.

 

내가 저술에 전념하는 것은 눈앞의 근심을 잊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남의 아비가 되어서 이처럼 누를 끼치고 있는 것이 부끄러워 이로써 속죄하려는 것이다. (P.166, <남의 아비가 되어>)

 

내 책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후세의 사람들은 오로지 사헌부에서 올린 장계와 심문 기록으로만 나를 판단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어떤 사람이 되겠느냐? 너희들은 반드시 여기까지 생각해서 분발하여 학문에 힘써라. (P.172, <자포자기하지 말아라 아이들에게>)

 

그는 자식들을 통해 자신의 글이 세상과 후대에 전해져 자신이 진실로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올바로 평가받고 싶어 하였다.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과 자식들이 세상에 당당하게 설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다산의 글을 읽으며 새삼 그의 인간적 면모에 주목하게 된다. 자신의 약점과 단점을 솔직히 시인하며 더 나은 세상, 올바로 선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처지와 애환에 등 돌리지 않는 다산. 사상가를 넘어서 인간 정약용.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백조의 트럼펫 - 지혜가 자라는 책꽂이 1 지혜가 자라는 책꽂이 1
엘윈 브룩스 화이트 지음, 프레드 마르셀리노 그림, 윤여숙 외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1년 7월
평점 :
절판


<스튜어트 리틀>, <샬롯의 거미줄>, 그리고 이 작품. 공통점은 동일한 작가가 쓴 동화라는 것과 모두 동물이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동화라는 장르에는 인간보다 동물을 전면에 내세우는 게 적합하다고 생각한 때문일까. 이 책의 주인공은 루이라는 이름의 백조다. 트럼펫 백조라는 종류인데, 우리말로는 울음고니라고 한다. 우는 소리가 트럼펫 소리 같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란다.

 

우는 소리로 유명한데 언어장애로 소리를 내지 못하는 백조가 있다면 참으로 난감할 것이다. 루이가 바로 그러하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며, 의사소통도 어렵게 되어 사회생활이 여러모로 힘들게 되기 마련이다. 우여곡절 끝에 학교에 가서 글자를 깨우치지만 인간에게는 유효해도 백조에게는 무용지물이다.

 

책은 샘이 어느 봄날 아빠와 캐나다의 숲지대에서 캠핑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고즈넉하고 인적조차 드문 깊은 들판. 이곳에 남쪽에서 날아온 트럼펫 백조 부부가 둥지를 튼다. 평화로움과 여유로움이 공존하는 문장이 독자의 인내심을 시험하려는 찰나 우연한 계기로 샘과 트럼펫 백조 부부는 친구 사이가 된다. 훗날 태어난 새끼 백조 루이도. 이 작품은 루이와 샘의 깊은 우정이 끝까지 이어지고, 샘의 도움으로 루이는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게 된다.

 

아빠 백조가 훔쳐온 트럼펫으로 소리를 내지만 한편으로 빚을 갚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게 된 루이. 그는 샘의 도움으로 온타리오의 청소년 캠프, 보스턴의 공원 호수, 필라델피아의 나이트클럽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며 돈을 저축한다. 이 대목에서 인간과 백조가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모습을 작가는 천연덕스럽게 기술한다. 처음엔 어리둥절하고 의구심을 표하지만 금방 인간 사이의 관계처럼 대등한 존재로 인정한다. 나아가 인간의 (돈을 향한) 탐욕도 말미에 슬쩍 보여주면서 백조의 정직함과 대비시켜 부끄러움을 유발케 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암컷 백조 세레나와 재회하여 사랑과 행복을 성취하고, 열심히 모은 돈으로 아빠 백조는 떳떳하게 빚을 갚으며 모두가 만족스러운 결말로 이어지는 것은 동화의 전형적 구성이다. 또 다른 동화의 특징인 우연성을 작가는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 주요 대목마다 의존하고 있어 단순히 운이 좋다고 하기에는 자연스런 전개와도 다소 어긋난다. 루이가 너무도 쉽게 샘을 발견하는 것, 필라델피아 호수공원에서 폭풍에 휘말려 떨어진 세레나와의 조우 등. 아마도 이 작품의 약점을 꼽으라면 이게 대표적이 아닐까 싶다.

 

작품의 축은 아빠 백조의 부성애, 루이와 샘의 우정, 그리고 루이와 세레나의 사랑이다. 장애를 지닌 아들을 위해 위험과 명예를 무릅쓰고 트럼펫을 훔친 아빠 백조. 유난히 드높은 자부심을 지닌 그로서는 불가피하지만 양심에 생긴 흠집은 회피할 수 없다.

 

밤하늘을 날면서 아빠 백조는 자신의 물음에 스스로 분명하게 대답했다.

그건 내 아들 루이를 사랑하기 때문이지.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어.” (P.103)

 

루이와 샘의 우정은 각별하다. 샘의 도움으로 루이는 글자를 익혔고 돈을 벌 수 있게 되었으며 세레나와의 사랑과 자유를 무사히 이루어 낼 수 있었다. 샘은 루이를 통해 자연과 동물에 보다 깊은 이해와 사랑을 품게 되었으며 자신의 진로 방향을 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루이와 세레나의 사랑.

 

루이의 마음은 오로지 아름다운 사랑, 세레나한테만 쏠려 있었다. 오직 세레나만을 위해 그 곡을 연주했던 것이다. (P.196)

 

이제 루이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백조였다. 마침내 진짜 트럼펫 백조가 된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말하지 못하는 불행과 어려움을 마침내 이겨 낸 것이었다. (P.200)

 

이 작품은 동화를 떠나서 트럼펫 백조의 생태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미국과 캐나다 사이를 오가며 둥지를 틀고 새끼를 키우는 방식, 군집으로 어울리며 생활하는 습성, 그리고 사랑과 짝짓기 등이 작품 전반에 세심하게 반영되어 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트럼펫 백조에 대한 준 전문가적 식견을 자부할 수 있을 정도다.

 

자유는 정말 멋졌다! 사랑하는 것은 정말 행복했다! (P.2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버지의 뒷모습 태학산문선 401
주자청 지음, 박하정 옮김 / 태학사 / 2000년 5월
평점 :
품절


주자청의 이름을 처음 듣게 된 것은 윤오영의 글을 통해서라고 기억한다. 지난세기 초의 중국에서 전개된 소품문학 운동과 함께 인용된 주자청의 글의 평가는 꽤나 인상적이었다. 과거의 문장은 도덕적이며 군자연하며 추상적인 거대담론 지향적이라면 주자청의 글은 솔직하고 감정에 충실하다.

 

표제작 <아버지의 뒷모습>은 장성한 자식도 안심 못하며, 하나라도 챙겨주고 싶어 하는 부모의 마음과 모습이 코끝을 찡하게 한다. 대개 자식의 반응은 지나친 신경 씀에 부담스러워하고 촌스런 부모의 행동에 성질을 버럭 내게 마련이다. 하지만 훗날 상기하면 그때의 장면이야말로 돌아갈 수 없는 부모의 사랑을 절실히 깨닫게 해준다. 풍수지탄이다.

 

,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 당시 난 지나치게 똑똑하게 굴었던 같다. (P.84)

 

<죽은 아내에게>는 세상을 뜬 지 3년이 지난 시기에 죽은 아내에 대한 추억을 풀어놓는다. 비슷하게 <내 친구 백채>, <매화후기>, <위악청을 그리며>는 죽은 친구에 대한 회상이다. 풍경과 시절을 다룬 글도 제법 있다. 그 중 <>이 인상적이다. 피천득의 표현을 떠올리게 한다.

 

봄은 갓 태어난 아기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선한 채 새롭게 성장해 가는 것.

봄은 아리따운 처녀처럼 꽃단장을 하고서 미소지으며 걸어가는 것.

봄은 건강한 청년처럼 무쇠같은 팔뚝과 허리와 다리로 우리를 인도해가는 것. (P.201)

 

주자청이 살다간 시절은 격동과 전화의 시기다. 청 제국이 수명을 다하고 쑨원과 군벌과 열강의 침탈, 그리고 중일전쟁으로 대륙 전체가 몸살을 앓던 때, 일세의 지성인으로서 그의 심경도 결코 편할 리 없다. 봉건의 잔재에 치를 떨며 외세에 무력한 현실에 분개하고 할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시대에 개탄한다.

 

! 7전에 너의 모든 생명을 사들였다. 너희 피와 살이 결국 하찮은 7개의 동전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냐. 생명이 정말 참으로 하잘 것 없구나! 생명이 정말 너무나 싸구려란 말이다! (P.57, <7전짜리 목숨>)

 

내가 당황하고 공포감마저 느낀 것은 오만하게 나오고 유린했던 자가 다른 사람이 아닌 십여 세에 불과한 백인꼬마였기 때문이다. 정말 불과 열 살 안팎의 백인 꼬마였기 때문이다. (P.79, <백인종-하느님의 귀염둥이>

 

진정 자신의 말을 하는 사람은 몇몇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진정한 생활을 하면서 그 생활을 음미하는 사람은 몇몇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일반사람들은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고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다들 그렇고 그렇게 살아간다. (P.179, <‘할 말이 없음에 대하여>

 

그럼에도 주자청의 본령은 <여인>, <아하> 그리고 <야경에 노젓는 소리 들리는 진회하>에 있다고 생각한다. <여인>은 친우의 입을 빌려서 작가의 미인론을 전개한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화자는 이상적 여인을 예술적인 여인으로 칭하며, 예술적인 여인의 신체 조건을 허리, 종아리, 어깨 및 얼굴 등 세밀하고 관능적으로 묘사한다. 현대라면 여성론자들의 반감을 살 정도로 솔직하고 대담하다.

 

예술적인 여인의 현실적 구현이 <아하>의 여주인공이다. 화자는 몸종 신분의 아하에게 이성으로서의 감정을 품지만 내색하지 못한다. 아하의 개가 소식을 접한 화자의 반응은 아하의 이중성에 대한 충격과 더 이상 아하를 그리워할 수 없음에 대한 아쉬움이 상반된 탓이리라.

 

나는 곧 깨달았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그저 멍하니 아제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의 얼굴에서 어렴풋이 아하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 내 무슨 말을 하리오! 운명의 신이 그녀를 영원히 감싸주기를 바랄 뿐이다. (P.123~124)

 

<야경에 노젓는 소리 들리는 진회하>는 수록작 중 가장 긴 글인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글로 손꼽고 싶다. 남경의 옛 영화를 추억하며 한밤에 뱃놀이를 하는데, 다가오는 화려한 조명의 배에 탄 기생과 노랫소리. 유혹과 본능이 체면과 이성과 줄다리기하는 가운데 은밀하고 관능적이며 몽환적인 정서가 전편을 휘감아 아우른다. 황홀하지만 덧없는 한 여름밤의 꿈.

 

주자청은 친구, 아내, 주변 인물 및 사물, 풍경 등 일상을 소재로 하여 담백하게 글쓰기를 한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당연한 게 아니냐는 반문도 있겠지만 백여 년 전 중국 문단에서는 파격적이고 선구적인 글쓰기로 평가받는다.

 

역사적 평가를 차치하더라도 그의 글은 가식의 탈을 벗어던진 지극히 인간적인 현자의 향취가 풍긴다. 온전히 벗은 모습이 누구나 항상 아름다운 법은 아니지만 주자청이라면 안심해도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