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백 개의 산을 넘어 글누림 비서구문학전집 5
레이나 그란데 지음, 박은영 옮김 / 글누림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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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품격> 중 한 챕터로 이 작가의 사연이 소개되어 급관심이 생겼다. 국내에 이 작품이라도 나와 있어 부분적 실체나마 접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 멕시코 출생과 미국 불법이민의 개인사를 겪은 가진 작가가 자신의 체험과 느낌을 고스란히 이 데뷔작에 쏟아놓고 있음을 체감할 수 있다.

 

가난한 멕시코인들에게 이웃 나라 미국은 저 건너편(El Otro Lado)’이다. 국경만 넘어가면 지긋지긋한 가난을 탈출할 수 있기에 그들은 생사의 위험을 무릅쓰고 월경을 시도한다. 후아나의 아버지도 이 대열에 합류한다, 훗날을 기약하면서. 익숙한 장면이다. 우리도 어려운 시절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었으며, 동남아인들 역시 이곳에서 마찬가지의 기대를 품는다.

 

아버지로부터의 소식이 전해지지 않으며 남겨진 후아나와 엄마는 이중고에 시달린다. 경제적 곤란과 버림을 받았다는 심적 두려움과 배신감. 전자를 견디지 못한 엄마는 돈 엘리아스에게 몸을 허락한다. 심적 불안과 도덕적 비난은 그녀가 임신을 하면서 극도로 격해지며, 돈 엘리아스에게 아기를 빼앗기면서 절정에 달한다.

 

밖에서 엄마는 바위에 대고 접시를 던지기 시작했다. 접시는 하나씩 날아가 산산이 부서졌다.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어떻게?” 엄마는 이렇게 소리치고는 컵을 던졌다. (P.107)

 

후아나는 자신의 행위가 원인이 되었다는 죄책감마저 더해진다. 두 사람의 삶은 서서히 수렁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독실한 신앙심도 희미해지고, 엄마는 알코올중독에 빠졌으며 어린 후아나는 생계를 위해 동분서주한다. 사방엔 그들의 처지를 비웃고 비난하는 이들로 가득하다.

 

후아나는 성인들과 과달루페 성모가 자신들을 위해 곁에 있어주었던 오래전을 기억했다. 그러나 지금, 모든 성상들은 먼지에 덮였고, 꽃잎들은 시든지 오래다. (P.173)

 

이후 후아나의 일생은 미국으로 건너가 아버지를 찾기 위한 노력으로 점철된다. 아버지를 찾으려는 후아나의 갈망은 정보와 경비 마련을 위해 창녀 생활마저 감수하도록 만든다. 그 선택의 정당성과 불가피성은 논란이 있겠지만, 아버지 찾기를 절대가치화하는 후아나의 입장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버지만 돌아오면 모든 비정상이 정상으로 회복될 것이다. 아버지가 가족들을 정말로 버렸는지, 그랬다면 이유는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뿐. 이 단계를 거쳐야 비로소 제대로 숨 쉬고 온전한 밤잠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사랑조차도.

 

아델리나, 사랑을 위해서조차도 아버지 찾기를 그만둘 수 없는 거냐?”

사랑을 위해서도요.”

사랑은 찾기 힘들어. 그걸 놓쳐서는 안 된다. 네 젊음을 유령을 찾느라 허비하지 말아라.”

저희 아버진 유령이 아니어요. 저는 그를 찾을 거예요.” (P.209)

 

미국에서 아버지 같은 존재였던 돈 에르네스토의 권유에도 그녀는 포기할 수 없다.

 

이 작품은 계급 대립적 구도를 지닌다. 부유한 미국과 가난한 멕시코, 부조리하지만 잘 사는 돈 엘리아스와 정직하지만 못 사는 후아나의 아버지. 그리고 후아나의 엄마를 위협하고 정복하는 돈 엘리아스와 아델리나에 기생하며 착취하는 헤라르도. 헤라르도는 여러 면에서 돈 엘리아스의 판박이다. 차이점이라면 누구는 죽임을 당했고 다른 이는 살인을 했다는 것인데, 대응되는 여인들의 의지와 주체성의 차이에서 비롯된 결과다.

 

중간에 삽입된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 토막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일조한다. 버스에서 쫓겨날까 봐 아이의 죽음도 내색하지 못하는 아이엄마. 아이들을 만나려고 월경 일행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하는 불법체류로 추방된 여인.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일으킨 교통사고로 아이가 죽었다고 자책하며 무너지는 여인. 대부분의 피해자가 여자라는 점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남성 중심의 엄격한 가부장 체제에서 여성은 종속적, 수동적 지위에 머물 수밖에 없게 되므로. 이에 반발하고 나선 게 페미니즘이다. 이 작품은 엄밀히 여성주의 유형에 속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후아나의 삶은 제아무리 정당화하더라도 아버지의 존재에 매달려 있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상실감이 이렇듯 만사를 비정상화시킬 만큼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온당한 것인가. 그녀에게 아버지는 실제를 초월하여 극도로 이상적인 존재로 미화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야 자신의 죄책감이 조금이나마 경감될 수 있고, 자신의 아버지 찾기 노력이 유의미성을 갖게 되니 말이다.

 

후아나의 미국행은 순탄치 않았다. 비용 마련을 위해 티후아나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일행과 함께 월경을 감행하며 성공을 목전에 두고 실패하는 대목은 영화의 한 장면과도 극적인 스릴이 넘친다. 후아나는 진정으로 아델리나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녀가 없었더라면 후아나는 여느 멕시코 여인들처럼 삶을 살게 되었을 것이다.

 

19년 만에 그녀는 아버지를 찾는데 성공한다. 비록 유골이지만, 그 의미는 남다르다. 이제야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떳떳함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이것은 아델리나가 엄마에게 주는 선물이 될 것이다.

평화.

그리고 진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들을 버리지 않았다. (P.249)

 

후아나(아델리나)가 자신의 친동생과 상면하게 되는 장면은 감동적인 동시에 감상적이다. 후아나(아델리나)의 입장에서는 비밀이 속 시원하게 밝혀지는 게 나을 수도 있지만, 작중 인물의 말마따나 때로는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좋을 수도 있다. 차라리 후아나(아델리나)와 세바스티안과의 관계처럼 알 듯 모를 듯 여운을 남기는 게 결과적으로 좋았지 않았을까. 친동생의 앞날을 위해서라면.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 어떤 남자도 원하지 않았다. 그녀에겐 충분히 많이 있었다. 그녀가 마음속에 머물도록 허용한 유일한 남자는 그녀의 아버지였다. 비록 그가 오직 기억에 불과할 지라도 말이다. (P.122)

 

아델리나가 세바스티안을 만날 때 품은 심정이다. 이때는 단지 아버지의 존재감을 강조한 문장으로 이해되었는데, 후에 아델리나가 되기 전 후아나의 삶을 볼 때 새삼 새롭게 의미가 다가왔다. 그녀는 세바스티안과 정말로 정상적인 삶의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이 작품은 구성이 특이하다. 아델리나와 후아나가 각자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종래에는 한 곳에서 만나게 된다. 양자는 이름만큼이나 시기와 지역에서 차이를 보여준다. 그들의 삶 자체도. 그리고 우리는 알게 된다. 작중 진짜 아델리나를 통해 서로가 연계되어 있음을. 이것은 흘러간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당대에 여전히 진행 중인 상황이며 작가가 상당 부분 체험하였기에 생생함은 논픽션 못지않다. 부분적 아쉬움은 있지만 미국-멕시코의 현대 모습을 담고 있어 무척 흥미롭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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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문화 답사기 : 완도편 - 孤島의 일상과 역사에 관한 서사 섬문화 답사기 시리즈 3
김준 지음 / 보누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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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은 독특한 공간이다. 바다로 인해 육지와 갈라져 바로 눈앞에 빤히 보이건만 이동이 자유롭지 못한 곳. 섬만의 고유한 풍경과 식생, 문화는 분명 육지와는 다르다. 우리나라의 섬은 3천개가 넘는다고 하는데, 무인도를 제외하더라도 최소 수백 개의 섬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네들은 이리도 불편한 섬에서 어찌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섬이라고 하면 대부분 제주도를 떠올린다. 머나먼 울릉도와 독도도 있다. 아니면 연륙교가 가로놓인 강화도, 안면도, 진도, 완도, 남해도 및 거제도도 있다. 강화도 깊숙이 들어가면 널찍이 펼쳐진 논으로 섬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진도와 남해도의 골은 무척 깊다. 이런 섬은 오히려 예외적이다. 바다 가운데 놓인 섬으로서의 의미가 퇴색되고 인적이 드물기는커녕 사람들로 넘쳐나 그나마의 고유문화마저 퇴색되는 곳이 아닌 날것 그대로의 섬사람과 섬문화를 알아보고 싶을 때 이 책을 만났다. 넘쳐나는 관광안내서가 아닌.

 

이 책을 쓴 이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지니고 이 방대한 저서를 내놓았는지 궁금하다. 600면에 달하는 두툼하며 상업성이라고는 전무에 가까운 책을. 정말로 출판지원사업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또 저자의 지극한 섬 사랑이 아니라면 불가능했으리라.

 

섬 많은 곳 하면 전남 신안군을 떠올리지만 완도군도 제법 섬이 많다. 섬으로만 이루어진 행정단위. 650여 개의 큰 섬과 작은 섬, 육지와 가까운 섬과 멀리 외떨어진 섬, 평지가 있는 섬과 산지로만 이루어진 섬. 섬의 조건에 따라 섬사람의 생활 모습과 문화가 제각각 차이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음지와 양지가 뒤바뀌는 곳도 빈번하다. 섬을 바라보는 저자의 심경은 한마디로 애틋함과 안타까움의 상존이다.

 

섬의 숨겨진 역사

 

가리포해전(1605)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지? 그러면 계미민란(1883)? 전자는 임진왜란 이후 소규모로 침입해오던 왜구들 함선 30여척을 가리포첨사 최강이 섬멸시킨 일대 승전이다. 후자는 동학농민전쟁보다 10년이나 앞서 발생한 민중봉기라고 한다. 둘 다 완도의 숨은 역사적 사실이다.

 

완도 옆 장도는 장보고의 청해진 근거지로 추정된다. 오늘날에야 해신으로 추앙받지만 이렇게 신분이 복원된 지 오래지 않았다고 한다. 지배층은 민중의 정치권력 도전을 용납하지 않았다.

 

동아시아 해상권을 장악했던 해신 장보고는 이후 고려와 조선은 물론 해방 이후에도 정치권력에 의해 역신으로 낙인찍혀 기록은 물론 기억에서도 사라졌다. 반역의 땅으로 동토가 된 후 재평가를 받는 데 천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P.85)

 

항일운동의 치열한 흔적을 간직한 저항의 섬신지도와 소안도. 신지도의 항일운동기념탑은 가본 적이 있다. 소안도의 항일운동사는 별도 항목으로 상세하게 수록하고 있다. (P.418~424)

쌀과 소금, 둘을 얻을 수 있는 곳이 고금도였다. 충무공이 고금도를 선택한 결정적 이유였을 것이다. (P.130)

 

명량대첩 이후 충무공이 고금도를 근거지로 선택한 이유도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추사 가 존경하던 명필 원교 이광사가 신지도에서 장기 유배생활을 했다는 사실도 비로소 알게 된다. 신지도가 유배의 섬이었음을.

 

섬과 섬사람의 사연들

 

저자의 기록에 따르면 완도는 상황봉을 기준으로 동쪽은 대부분 갯벌이었다고 한다. 즉 지금의 평야지대와 시가지는 모두 갯벌을 매립한 땅이라는 것인데, 의외의 사실이 놀라움을 안겨준다. 완도가 본디 척박한 섬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해남과 완도를 잇는 섬인 달도의 다리가 세 개인 사유는 어처구니없으며 서글프기조차 하다. 다리를 놓는데 급급하여 제방 형태로 바닷길을 막아버렸다고 하니 김 양식을 망친 어민은 물론 흐름이 가로막힌 바다는 어떻겠는가.

 

금당도를 비롯해 완도 사람들에게 당시 김 양식은 단순히 경제행위가 아니었다. 생활이고 삶 자체였다. (P.183)

 

완도 일대는 과거부터 김의 주산지로 명성을 떨쳤다. 인간의 과욕으로 김 양식이 쇠퇴한 이후 다시마, 전복으로 주력이 변화하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어리석기 그지없다. 한편 매생이와 김의 처지가 역전된 내용은 익히 알고 있지만 최대 산지인 약산도 편에서 소개하니 새삼스레 다가온다.

 

과거 소목포라고 불리며 번성하던 노화도가 보길도의 유명세에 밀리게 된 상황, 편안한 바다인 소안도가 제주도와의 중간 지점인 까닭에 오히려 소안도 주민들의 삶은 편안하지 못했다는 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섬 고유의 문화

 

섬은 생과 사가 한순간에 교차하는 곳이다. 바다는 풍요롭지만 매몰차기 그지없어 인정사정 두지 않는다. 인간이 한계상황에 다다를 때 보다 높은 존재에게 기대면서 종교가 시작된다고 한다. 그것이 오늘날 관점에서는 미신이라고 치부될 수 있는 당할아버지와 당할머니의 섬김이다. 생일도와 덕우도에서는 마을 모두가 당제를 지낸다고 한다.

 

자연조건의 영향을 크게 받는 섬마을은 농촌에 비해 마을의 평안과 풍어를 기원하는 제의가 발달했다. 할머니당이나 할아버지당이 대표적이다. 소나무나 느티나무 등을 신목으로 모시거나 당집에 돌, 철마, 신위 등을 신체로 모시기도 한다. (P.105, <백일도>)

 

청산도는 관광지로 유명한 곳이지만 저자의 시선은 그곳 사람들의 고유 장례풍습인 초분에 주목한다. 예전에는 여러 섬과 육지에서 성행하던 풍속이 거의 소멸되고 이곳을 포함한 일부에서만 명맥을 유지한다. 초분의 세부 절차와 의미에 대해서는 책 내용을 참조하면 되겠지만, 논밭 옆 일상 속에 무덤이 함께 한다는 점이 생경하면서 터무니없지는 않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중간에 초분이 있다. 초분을 하는 이유가 어디 한둘이겠는가. 따지고 보면 모두 산 자를 위한 죽음의 굿이다. 죽어서라도 자식들을 돌보고자 하는 애틋한 부모의 심정을 읽을 수 있다. (P.357)

 

섬마을 중 으뜸이라고 저자가 일컬은 돌담을 보기 위해 소모도에 가보고 싶다. 개발시대, 가난과 궁핍에서 벗어나기 위해 과거의 유산을 퇴행적으로 간주하고 뒤엎는 게 미덕이었던 시절. 상전벽해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시멘트담보다 돌담이 은은한 정서를 자아낸다. 쌀 한 톨이라도 생산하기 위해 바다를 막고 간척하던 게 미덕이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 데 요즘은 갯벌의 환경적, 경제적 가치가 연신 상한가를 경신하고 있다.

 

연륙교가 잇달아 개통되고 있다. 불편한 뱃길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므로 생활면에서는 편리함이 월등하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섬 고유의 전통과 문화가 쇠퇴한다. 접근이 용이해지니 관광객이 증가하고 경제적 가치를 추구하는 개발 붐이 일어난다. 돈만 된다면 무엇이든지 팔 수 있고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 이제 당신은 불필요해진다.

 

완도 정도리에 구계등이라는 몽돌해변이 참 좋다. 아직 때가 덜 묻어서 힘들게 찾아갔지만 좀 더 오래 머물지 못하는 게 아쉬울 정도다. 이 해변과 배후의 숲이 하마터면 사라질 뻔 했는데 마을주민들이 단합하여 살렸다고 한다.

 

돈에 눈이 멀어 몽돌을 팔아 돈을 챙기려는 것을 막은 것도 마을공동체였다. 국가가 나서기 전에 마을의 전통과 문화가 숲과 몽돌을 지켜냈다. 숱한 태풍에도 마을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던 것은 몽돌과 마을 숲 때문이었다. 거친 파도를 온몸으로 막아내며 모난 돌은 몽돌이 되고 나무는 영글어갔다. (P.35)

 

농어촌의 자연적 변이는 인위적으로 막을 수 없다. 농어촌에 노인들만 남게 되는 현상은 안타깝지만 젊은이는 여러 사유로 도회지로 나가고 싶어 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사람이 살지 않으면 마을은 유지될 수 없고 고유의 문화와 전통은 필연적으로 소멸한다.

 

단지 보전을 위한 전통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문화 자체가 삶의 연장이고 그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지속가능한 전통문화는 행사를 위한 자금 지원이 아니라 삶의 지속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일러준다. (P.502, <넙도>)

 

공유수면으로서의 어장과 갯벌의 가치

 

토지는 개인 소유가 인정되지만, 바다는 그러하지 않다. 어장은 특정 개인이 아닌 마을 주민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공유수면이다. 어촌계 위주의 어장 정책은 타당성이 있지만 작은 섬 주민들이 부당하게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점을 저자는 되풀이하여 지적한다.

 

작은 섬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하려면 단지 정주 환경만 개선해서 될 일이 아니다.

섬에 머무는 사람들이 갯바위와 인근 어장을 우선 이용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육지와 달리 바다에서 해 먹을 것이 없다면 섬에 머무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P.251, <우도>)

 

가치로 본다면 섬 면적의 경제적 가치보다는 섬 주변 어장의 가치가 훨씬 크다......땅보다 높아진 바다의 가치는 환영하지만 공유수면이라는 바다의 특성이 사라질까 우려스럽다. (P.119, <양도>)

 

갯벌의 성격 역시 마찬가지다. 갯벌은 어촌 주민들의 텃밭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래서 갱번이라고 불리는 분배의 원칙이 자치규율로 내려왔던 것이다. 특히 작은 섬 마을이 되살아나고 섬사람들이 정착하게 할 수 있기 위해 마을공동체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작은 섬살이를 더 힘들게 만든 것은 큰 섬의 횡포였다......

갯바위의 해초들은 마을어업에 속한다. 마을어장인 것이다.

예로부터 해당 섬 주민들이 논밭처럼 가꾸며 살았다. 그래서 법에 앞서 관행어업으로 인정을 해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작은 섬에 주민들이 자꾸 줄어들면서 인근의 큰 섬에서 마을어업 면허권을 앞세워 권리를 주장하는 사례가 있다. (P.528, <죽굴도>)

 

작은 섬들에 대한 관심과 지원 부족

 

저자가 안타까워하는 점은 작은 섬에 대한 당국의 관심과 지원이 매우 부족하다는 데 있다. 섬에서는 뱃길이 없으면 코앞에 있어도 다가갈 수 없는데 연락선 등 운송수단은 한정적으로만 운영되고 있다. 행정구역과 생활구역이 상이하여 불편을 겪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육지와 가까워 좋겠다는 사람도 있지만 속 모르는 소리다. 해남과 완도의 경계에 있으면서 어느 쪽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는 섬이다. (P.64, <토도>)

 

작은 섬은 아무리 가까워도 쉽게 갈 수 없다. 뱃길이 없기 때문이다. (P.444, <구도>)

 

남획과 과용으로 황폐화되는 어장, 상업주의와 이기주의

 

마지막으로 저자는 사람들의 탐욕을 경계한다. 경제적 가치가 부각되다 보니 바다를 소모품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뿌리 끝까지 뽑아 쓰다 버리면 그뿐이라는 시각. 인간은 역사를 중시하지만 꼭 필요한 때에는 오히려 외면하기 일쑤다. 김 양식의 실패를 전복 양식에서는 되풀이하지 않기를 저자는 기원한다.

 

김 양식으로 호황을 누릴 때 너도나도 김발을 막았다. 결과적으로 바다는 오염되고 윤기가 잘잘 흐르던 김은 상품가치가 떨어졌다. 결국 그것이 가격 하락으로 이어졌다. 노화도 김 양식 쇠퇴 이후 새로운 기회를 얻고 있다. 과욕불급이다. 김 양식 시절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벌써 노화도에 전복 양식을 하던 주민들이 새로운 양식장을 찾아 떠나고 있다. 바다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P.488, <노화도>)

 

 

땅끝 전망대에 올라 삼면 바다를 휘돌아보면 올망졸망한 섬들이 점점이 박혀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전에는 단순히 자연적 존재인 섬 자체로 받아들였다. 우리가 멋진 풍경을 보듯이 말이다.

 

이 책의 미덕은 섬과 섬사람을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 인식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저자의 발길을 따라 동행하는 동안 그네들의 생활과 역사, 아픔과 바램이 무엇인지를 공유하게 된다. 여기에 소개된 섬들 중 작은 섬의 경우는 제 아무리 지도책을 봐도 위치와 실체를 가늠할 수 없다. 네이버지도를 최대한 확대해야 겨우 위치와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섬들이다. 새삼 저자에게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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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가 짐플리치시무스 (천줄읽기) 지만지 천줄읽기
궈한스 야코프 크리스토프 폰 그리멜스하우젠 지음, 박신자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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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름이 유독 긴 이 작품은 악한소설의 주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30년 전쟁을 시대적 배경으로 시골에서 양치기로 살아가던 소년이 전쟁에 휘말려 온갖 체험을 하면서 단순 무지한 초심에서 점차 타락하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악한소설답게 주인공인 어린 소년은 처음에 순수하다. 선악조차 구분 못할 정도로 순수하며 단순하고 무지하여 짐플리치우스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다소 비사실적인 설정인데 백지와도 같은 주인공의 정신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와 함께 그럼으로써 벌어지게 되는 우스꽝스러움을 부각시키고자 함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작가는 소년은 단순 무지함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나는 이토록 완벽하게 무지했기 때문에 내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 자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 번 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내가 당시에 누렸던, , 고상한 인생이여! (1, P.6)

 

평화롭던 주인공의 일생을 굴곡지게 만든 것은 바로 전쟁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파괴적이며, 군인들은 잔인하다. 특히 무력하고 자신들보다 지위가 낮다고 간주되던 농민들에게 더욱 행패가 극심하다. 전쟁의 잔혹함과 군인들에 대한 반감은 제1권의 군인들의 농가 약탈, 농민 고문 및 겁탈 장면, 군인들이 연회에서 폭식과 폭음을 일삼는 장면과 제2권의 전쟁의 참상 장면에 대한 주인공의 시각에 명확히 드러난다. 이것이 단순히 개인의 제한적 상념에 그치지 않고 계급 갈등적 인식으로 확대되면서 소위 나무의 알레고리(1, P.32~37)에서 사회적 의미마저 얻게 된다.

 

세속에 물든 짐플리치우스는 은둔자와 함께 한 정결의 생활을 떨치고 타락과 회개를 되풀이 한다. 악행의 과정에서 주인공은 믿기 힘든 행운을 잇달아 만나게 되고 이는 주인공의 타락을 부채질할 뿐이며,

회개는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는 임시방편일 뿐이다. 주인공의 반성과 타락의 반복은 악한소설의 전형적인 구조라고 하겠다.

 

어떤 종교를 내가 믿어야 합니까? 만약 다른 두 파를 비방하거나, 다른 파는 틀렸다고 꾸짖는 어느 한 종파에게 나의 영적 구원을 맡긴다면 이것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3, P.117)

 

사회의 엄청난 부조리를 체험한 주인공에게 기존의 가치관과 종교관은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믿음 체계가 다르다고 서로가 상대방을 죽고 죽이는 종교전쟁. 짐플리치우스는 특정 종교에 귀의하길 거부한다. 그럼에도 짐플리치우스가 완전한 악의 수렁에 빠지지 않은 사유는 마음 한 가닥 절대 선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아서이다. 이것이 산적이 된 올리비에라와의 차이다. 평민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올리비에라의 주장은 통쾌하기 그지없다. 그는 마키아벨리즘을 언급하며 계급지배가 고착화된 사회구조의 모순을 지적하며 타락한 교회에 날선 비판을 가한다.

 

늘 가난하고 단순한 사람들이 도둑으로 교수형에 처해지는 사실을 보게나. 자네는 그런 일이 법에 따라 처리되었다고 생각할 것이야. 대체 자네는 상류 계급이 나라를 힘들게 했다고 재판을 통해 벌 받는 것을 어디서 본 적이나 있는가? (4, P.153)

 

너는 사람들이 교회를 악덕으로 더럽힐 뿐만 아니라 죽은 후에도 허영과 쓸데없는 것들로 교회당을 채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 (4, P.158)

 

짐플리치우스는 세속적 타락된 삶을 살지만 결코 매몰되지 않고 한구석에 속세에 대한 회의적 마음을 품는다. 그것은 그의 내면에 순수함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를 외견상 바보로 설정한 작가의 의도를 깨닫게 된다. 주인공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바보임을.

 

내면에 바보스러움이 없는 인간은 세상에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같은 종류다. (3, P.112)

 

5권에서 무멜 호수의 후작이 나타나 주인공을 물의 왕에게 데리고 가는 장면은 매우 환상적정이다. 사실성을 중시하는 악한소설로서는 보기 드문 설정에 해당한다. 이어서 물의 왕과 주인공 간에 이루어지는 신앙에 대한 대화는 악한소설의 특징이면서 매우 진지한 신앙 대화라는 점에서 이채롭다. 특히 마지막 장은 온전히 속세를 떠나고자 하는 짐플리치우스의 심경을 기술하며, “세상이여 안녕이라는 문구를 되풀이하여 문장을 구성함으로써 독특한 결미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스페인의 전형적 악한소설과는 다소간 차이가 보이는데, 주인공의 악덕과 타락이 그렇게 심하지 않음이 두드러진다. 전자는 주인공이 완벽하게 타락하여 온갖 사회악을 저지르는데 여기서는 개인적 타락에 불과하다. 오히려 주인공이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겪는 사회적 모순과 개인적 역경을 헤쳐 나가는 장면에 초점을 둠으로써 짐플리치우스의 내면적 순수함이 부각된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나는 단순했고, 깨끗했고, 솔직하고, 성실하고, 진실했고, 순종적이었으며, 잘 받아들였고, 절제했고, 순진했고, 수줍어했고, 경건하고, 명상적이었다. 곧바로 나는 악해지고, 비뚤어지고, 거짓말하고, 아첨떨고, 불안해하고, 매 순간 타락했다. 이 모든 악덕을 나는 스승도 없이 배웠던 것이다. (5, P.191~192)

 

작품 해설에 따르면 이 책은 완역을 한 게 아니라 원본을 축약한 레크람판을 다시 축약(80%) 번역했다. 원본 대비 분량을 알 수 없는 축약본이 아쉽지만, 한편으론 이렇게나마 대략이라도 실제 작품을 접할 수 있다는 점은 그나마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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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비극 - 르네상스 고전드라마 총서 1
Thomas Kyd 지음, 최준기 옮김 / 학문사(학문출판주식회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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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보덕> 보다는 구성면과 사실성이 강화되었음을 금방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무대상연에 보다 적합하며 실제로 당대에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고 하는데 처절하고 각박한 유혈 복수극의

소재 덕도 보았을 것이다. 어쨌든 이 작품은 말로와 함께 문학사적, 희곡사적으로 후배 셰익스피어의 등장이 멀지 않았음을 예감케 한다.

 

<고보덕>과 마찬가지로 고전극과 세네카의 영향이 두드러지는데, 코러스의 존재, 막중 무언극의 상연과 함께 빈번한 라틴어 대사가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무엇보다 주요 사건 진행경과를 대사로 처리하여 넘기는 수법도 그러하다.

 

작품은 안드레아의 망령과 복수의 유령이 불러일으킨 복수극 형태를 띠고 있다. 초인간적 존재에 의한 거역할 수 없는 비극적 운명이 진행되는데 친구 호레이쇼와 연인 벨 임페리아의 죽음마저 초래하는 복수극이 안드레아의 입장에서 온당한지는 알 수 없다.

 

로렌조가 호레이쇼를 살해한 동기는 단순히 누이와의 사랑을 방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발사자의 생포로 공을 다투는 제1막 제2장의 장면에서 로렌조와 호레이쇼의 갈등을 확인할 수 있고 로렌조는 원한 앙갚음과 정적 제거를 도모한 것으로 해석된다.

 

(벨 임페리아) 안드레아의 친구인 호레이쇼를 나는 사랑해야지. 안드레아를 죽음으로 이끈 왕자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도 더욱 사랑해야지. (1막 제4, P.32)

 

벨 임페리아는 이중적이다. 그녀는 연인 안드레아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맹세하면서, 호레이쇼와 사랑에 빠지는 이율배반을 보여준다. 그녀는 정말로 충실한 연인이었을까? 그녀의 사랑이 위의 대사와는 달리 복수를 위한 의도적 사랑이 아님은 제2막 제2장의 달콤한 사랑의 대화에서 드러난다.

 

(벨 임페리아) 사랑의 편지를 쓰십시오. 나도 사랑의 편지로 답하겠습니다. 나에게 입맞춤을 해주세요. 나도 지지않고 당신의 입맞춤을 되돌려 보내리다. (P.45)

 

로렌조는 이 작품에서 간악한 음모꾼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는 초반부에서 호레이쇼의 전공을 가로채고, 호레이쇼를 살해하며, 이 사실을 드러날까 우려하여 페드린가노에게 사베린의 살해를 지시하며, 페드린가노가 교수형을 당하도록 음모를 꾸민다.

 

비극의 진정한 주인공은 호레이쇼의 아버지 히에로니모다. 아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복수는 이 희곡의 중심 플롯이자 핵심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확실한 복수를 위해 매사에 신중함을 유지한다. 벨 임페리아의 편지를 받고도 반신반의하며 망설이고 페드린가노의 편지를 통해 살인자의 정체를 확신하는데, 그럼에도 로렌조와는 외견상 화해를 하는 등 철저히 의도를 숨긴다.

 

그의 죽음에 복수하는 것은 나의 의무였다. 그렇다면 히에로니모 너 자신의 생명을 위태롭게 해서는 안 된다. (3막 제2, P.63)

 

복수를 위해서는 차분히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그들의 악행을 알고 있는 것을 보이지 않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그들에게 방심케 하는 거다. (3막 제13, P.94)

 

양새끼처럼 온화하게 있어라...” (3막 제14, P.105)

 

작품해설에 따르면 이 작품의 구성, 특히 히에로니모의 복수지연 동기의 미약함에 대한 비판이 있다고 하지만 나로서는 이해부득이다. 복수 지연에 대하여 아내가 자살하고 벨 임페리아는 비난한다. 왕을 향한 청원 시도가 잇따라 실패하자 히에로니모는 정신적 혼란을 겪기도 하는 등 그가 노력을 등한시 한 게 아니다. 상대방은 스페인 왕의 조카이며, 막강한 실력자를 아버지로 둔 인물이다. 섣불리 시도하다가는 자칫하면 역공을 받아 복수는커녕 오히려 멸문당할 판국이다.

 

어쨌든 복수의 유혈과 광풍이 지나간 후 안드레아의 망령이 등장하여 마무리를 짓는데, 사건 결과를 요약하고 선인은 구원을 받으며, 악인을 지옥에 빠지길 기원한다. 망령은 소망이 달성되었다고 기뻐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 크다.

 

번역본에서 호칭의 혼란이 두드러져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포르투갈의 지배자는 총독이라고 불리는데 아들 발사자는 왕자로 호칭된다. 발사자와 로렌조, 그리고 히에로니모 간에는 경칭과 하칭이 혼재한다. 히에로니모도 궁정귀족으로서 아무리 봐도 로렌조가 함부로 하칭을 쓸 신분은 아니다. 더구나 포로 신분인 발사자가 로렌조에게 하대를 하다니. 혼란의 극치는 로렌조와 벨 임페리아 간에 벌어진다. 3막 제10장에서 둘의 대화를 듣노라면 누나와 남동생의 관계인지 아니면 오빠와 여동생의 관계인지 도대체 판별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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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범우문고 51
이희승 지음 / 범우사 / 199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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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학자 이희승은 19세기말에 태어났으니 오래되었지만 생소한 인물은 아니다. 20세기말에 사망하였고 학자로서 그의 자취는 민중서림판 <국어대사전>에 오롯이 전한다. 생전에 몇 권의 수필집을 출간하였는데, 193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긴 기간 동안 쓴 글로서 주로 1950,60년대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소재를 기준으로 개인적 소재, 전통적 소재, 시사적 소재 및 기타 소재를 택한 것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중 시사적 소재의 경우는 시대적으로 정치가 혼란하고 사회가 안정되지 못한 시기였으니 계몽적인 내용이 은근히 많다.

 

민중의 지팡이가 되려면 믿음의 지팡이가 되라고 갈파하고, 나라와 민족이 발전하기 위한 즉효약은 인격 교육에 있다고 주창한다. 그만큼 당대에 모던 양반과 난화지맹(難化之氓)2류의 인간이 사회를 좀먹고 있기 때문인데 이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우리는 갖은 방법을 다하고 총력을 기울여, 사람의 마음속에 지조의 씨를 심자. 그리하여 이것을 잘 가꾸어서 성장시키자. 활로는 오직 여기에 있다. (P.109, <지조>)

 

<지조>는 수록작 중 가장 긴 글로서 사회의 부조리를 바로잡기 위해서 지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지조를 품은 사람은 부정과 불의를 행하지 않고 부질없는 명리를 탐내지 않으며 태도를 표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매우 진지한 글로서 논설에 가깝다.

 

전통적 소재로 한 글쓰기는 숫자는 많지 않지만 가슴 속에 생각할 거리를 남겨준다. <유머 철학>은 유머에 대해 고찰한 후 우리 민족의 유머를 탐구하는데 언급된 예시가 흥미롭다. 책의 표제작이기도 한 <딸깍발이>는 옛날 남산골 샌님과 약아빠진 현대인을 비교한다. 전반부만 봐서는 딸깍발이의 고루함을 통렬히 비판하는 듯하지만 기실 그네들의 정신을 배우자는 게 요지다.

 

우리 현대인은 딸깍발이의 정신을 좀 배우자.

첫째 그 의기를 배울 것이요, 둘째 그 강직을 배우자. 그 지나치게 청렴한 미덕은 오히려 분간하여 가며 배워야 할 것이다. (P.24, <딸깍발이>)

 

<지조>, <유머 철학>과 함께 기타 소재 글 중 <독서와 인생>은 분량과 글쓰기 태도 면에서 진지한 유형에 속한다. 독서의 효용과 가치를 차근차근 밟아가면서 독서를 권장하는데 최근에 읽은 <서재의 열쇠>란 책과 자연스레 연결된다.

 

수필가로서 이희승의 진가는 사실 개인적 소재를 택한 글들에서 두드러진다. 아무래도 자신을 대상으로 삼는 게 마음 편한 듯 대놓고 해학적이지 않지만 슬며시 웃음을 자아낼 풍성한 유머를 품고 있다.

 

유달리 키가 작은 자신에 얽힌 사연을 희화시킨 <오척 단구>, 일석(一石)이라는 호에 얽힌 사연을 소개한 <호변(號辯)>은 물론 <벙어리 냉가슴>, 요절한 외우를 회상한 <월파(月坡)의 인상> 등이 무척 흥미롭다. 아마도 일석의 성격은 꼬장꼬장 했던 듯싶다. 둥글둥글한 산을 대비하여 자신의 성격이 탐탁치 못함을 언급하면서도 사람으로서는 차라리 이게 낫다고 위안 삼는다. <지조>의 연장선상일 것이다.

 

둥글둥글한 산, 둥글둥글한 사람, 어느 것이나 경중이 있을 바 아니다. 그러나 나는 전자를 더 좋아한다. 사람이 둥글둥글한 것은 암만 해도 둥글둥글한 산만 못해 보인다. (P.129, <둥구재>)

 

일석 이희승은 서서히 잊혀 가고 있다. 그는 예술로서, 문학으로서 수필을 쓴 인물이 아니었다. 그의 글쓰기에 정서적 공감을 지닌 것은 동시대인이거나 그라는 인물을 기억하는 세대에 국한될 것이다. 당시 사회상에 더불어 공분하고, 그와 같은 대단한 학자가 내뱉는 희극적 어조에 슬며시 미소 짓는 독자도 많지 않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받아들여야 현실이다.

 

* 내가 읽은 책은 현재 시중에 판매되는 것의 구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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