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의 여인 록새너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다니엘 디포 지음, 김성균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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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군가 자신의 맘에 들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라고 칭한다. 선악(善惡)은 쉽사리 호오(好惡)로 치환되기 일쑤다. 디포의 여주인공 록새너는 분명 나쁜 여인이다. 그녀의 캐릭터에 대한 좋고 싫음은 논외로 치고 말이다. 몰 플랜더스라는 디포의 또 다른 나쁜 여인이 있지만, 록새너에 비하면 그나마 착한 편이다.

 

디포는 탁월한 이야기꾼이자 인물창조자이다. 로빈슨 크루소와 잭 대령, 록새너와 몰 플랜더스처럼 사이부동(似而不同)한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들을 비슷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집필하였다. 각각의 인물과 작품들은 저마다의 재미와 매력을 뽐내고 있으니 천부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록새너가 기아를 면하기 위해 자식을 버린 것은 안타깝지만 이해 불가능하지 않다. 호구지책이 없어 보석상의 첩이 된 것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부자의 첩이 되어 프랑스에서 호사스럽게 생활하고 보석상의 사고사 후 다시 모 귀족의 첩이 된 것은 어차피 들어선 인생길이 그럴 수도 있다. 최소한 이때까지 록새너는 성적으로 순결했다. 한 남자에게만 충실하였다는 점에서. 외관상 화려와 사치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록새너의 검소함과 재화에 대한 관심은 당연하다. 수년 전 뼈저린 체험이 의식에 잠재되어 있었을 테니.

 

이제 나는 악마의 대리인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나만큼 악하게 만드는 일이 나의 임무였다. (P.80)

 

그러나 나는 이미 여성의 미덕을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에 악마는 나의 내부로 침입할 수 있는 약점을 발견하고 쉽게 나를 제압했다. (P.111)

 

록새너는 자신을 비하하고 사악함을 자탄하지만, 실질적 악녀성은 이후 부도덕과 범죄행각에서 드러난다. 커다란 재산과 탁월한 재테크로 그녀는 거부가 되지만, 여러 남자들에게 계속 자신의 몸을 파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화대 수입뿐만 아니라 행위 자체의 쾌락에 깊이 빠져든 것이다. 또한 영국에서 유럽에서 낳고 방치한 아이들에 대해서는 일절의 관심도 갖지 않으며 스스로 모성애의 약점을 인정한다.

 

록새너의 하녀 에이미는 또 하나의 주인공에 가깝다. 그녀는 록새너와 영욕을 같이하며 록새너를 위한 무조건적 충성을 바치는 인물이다. 에이미는 록새너의 수족이자 친구이며 자매와도 같다. 독립하여 가정을 꾸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록새너를 떠나지 않는데 록새너의 분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에이미는 록새너의 심중을 샅샅이 헤아리고 있기에 록새너의 불안의 근원을 꿰뚫고 있다. 자신의 가면과 허위가 탄로나 일순간에 세인의 지탄을 받고 몰락하며, 영국에서 재회하여 마침내 부부가 된 더치 사업가와의 관계도 끝장날 것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 그 뿌리는 록새너의 정체를 의심하고 서서히 접근하여 신분을 확인하려는 버려진 딸이다.

 

그 딸의 심경과 진의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누군지 모른 채 적당한 경제적 원조를 받아 남들처럼, 남들보다 오히려 더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면 감사하고 만족하면 안 되었을까. 수십 년을 버리고 방치해 둔 생모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그토록 깊은 것인지. 아니면 록새너의 막대한 부를 노린 것은 아니었을까. 록새너의 실체가 별 볼일 없는 평범한 부인네였다면 그 딸은 여전히 생모의 정체에 집착했을까 등등.

 

록새너의 극적인 삶의 여정과 화려한 탕녀의 묘사에 눈을 떼지 못한 독자가 어느덧 지위와 부와 남편을 갖게 된 록새너에 싫증이 났을 즈음부터 디포는 작품의 줄기를 확 틀어버린다. 록새너가 생모라는 사실을 추적하는 딸과 필사적으로 외면하고 도피하는 록새너의 치열한 대결 구도. 해결사로 개입하는 에이미.

 

록새너는 에이미를 저주하고 내쫓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록새너의 잠재된 내심을. 록새너는 일시적으로 에이미를 원망하지만 가슴 한켠에는 해방감과 안도감이 자리 잡고 있다. 에이미와 화해는 불가피하다. 딸은 없어져도 상관없지만 에이미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므로.

 

록새너를 집필한 디포의 생각이 문득 궁금해진다. 몰 플랜더스의 말을 빌린다면 같은 악행에 빠지지 않도록 악행을 충실히 기술함으로써 잘못된 삶을 반면교사로 삼기를 바란다. 몰과 록새너 모두 노경에 이르러 잘못을 회개하고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물론 록새너는 성공적이지 못하였지만.

 

악녀의 매력과 악행의 재미에 몰입하여 본질을 놓칠까 우려한 작가는 잊지 않고 이따금씩 주인공의 입을 빌어 스스로를 원망하고 저주하는 말을 늘어놓게 한다. 여자를 유혹하고 망치는 지배계층의 타락상도 제법 날카롭게 지적한다. 모두가 독자들에 대한 주의환기이자 검열관을 위한 자기변론일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이 이야기를 자세히 했는데 그것은 지체높은 남자들이 곤경에 처한 여자를 망치는 수법이 어떤지를 보이기 위해서였다. 빈곤과 궁핍은 가난한 여자를 망치는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지만, 허영과 화려한 생활에 대한 꿈도 마찬가지다. (P.110)

 

나는 살아 있는 표본이 되어 사탄과 같은 오만과 어리석음이 일으키는 광기와 정신착락은 어떠하며, 과욕이 인간을 어떤 존재로 만드는지, 그리고 우리가 그릇된 야심의 충동대로 행동하면 얼마나 엄청난 화를 당하는지를 보여 줄 것이다. (P.279)

 

이상하게도 내 모든 부정한 행위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거대한 재산도 모았지만 어떤 독자도 내가 행복했다거나 마음 편안했다고 속단하지 않기 바란다. 절대로,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 양심의 화살은 나의 폐부를 깊이 찔렀다. 겉으로는 우리의 기쁨이 최고도에 달했을 때에도 내 가슴속은 항상 남모르는 지옥이었다. (P.455)

 

옮긴이는 50면에 달하는 작품해설과 작가해제를 통해 디포가 단순한 문필가가 아님을 소개한다. 그는 일생에 걸쳐 끊임없이 사회개선과 부조리를 지적한 저널리스트였다. 이쯤에서 우리 자신에게 되묻고 싶다. 이 작품의 피카레스크 요소에 주목한다면 작가는 타락의 길에 빠져서 부도덕과 환락의 세계에 헤어나지 못하는 한 여인의 삶을 통해 당대의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서술하고 있는 게 아닌지를.

 

록새너는 프랑스에서 더치 사업가의 도움을 받아 재산을 갖고 영국으로 돌아온다. 이때 더치 사업가와 동거하면서 그의 구혼을 받지만 그녀는 거절한다. 거절의 변은 장황하지만 재산을 빼앗길 우려와 속박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렇더라도 당대로서는 파격적인 견해를 서슴지 않고 토로할 수 있는 것은 역시 록새너답다.

 

또 결혼 계약이라는 것은 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한마디로 여자의 자유와 재산과 인권 등 모든 것을 남자에게 바친다는 약속이며 여자는 결혼을 하면 그저 한낱 여자 즉 노예일 뿐이라고 했다. (P.255)

 

여자가 독신으로 살면 모든 사회적 권익을 보장받고, 자기 소유의 재산은 완전히 자의로 쓸 수 있고, 무슨 일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에 남자가 자신의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듯이 여자도 독자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했다. (P.256)

 

더치 사업가의 파격적 양보와 배려에도 록새너는 그와 헤어지고 마는데 이후 그녀의 삶에서 잠재된 그녀의 욕망을 알 수 있다. 성적으로 신분 면에서 경제적으로 자유로운 삶. 정식 부인이 됨으로써 얻게 될 안정과 사회적 인정은 그녀에게 덜 중요한 가치였다.

 

작가는 딱딱한 논설에 의존하지 않고 대중성과 흥미성을 절묘하게 섞어 실로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악녀 록새너의 캐릭터를 창조하였다. 그의 다른 작품과 당대를 비교하더라도 이만큼이나 적극적이며 자기주도적인 여성은 찾기 어렵다. 그것이 읽는 내내 주인공을 향한 독자의 애증이 교차하는 심리적 갈등을 유발하는 연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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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망이 깎던 노인 - 5판 범우문고 104
윤오영 지음 / 범우사 / 197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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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망이 깎던 노인’ 그리고 ‘마고자’, 학창시절 교과서로 친숙한 수필들이다. 명작도 손때가 묻으면 진부하고 식상해질 위험성을 내포한다. 이 글들은 시대에 뒤처진 고리타분한 옛 시절 이야기와 감상으로 치부될 수도 있다. 방망이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많지도 않을뿐더러 방망이에 뒤이어 죽기와 약재로 이어지는 작가의 소회에 동감하기엔 너무 낯설어진 풍경이다. 한복 자체를 입는 풍속도 소멸되는 판국에 하물며 마고자이겠는가. 작위적 교훈성은 은근한 거부감마저 야기한다.

 

생경한 한문투의 어휘와 인용문, 1960~70년대 발표된 탓에 수십 년의 시간적 간극이 지닌 문화적 생소함은 신기함과 동시에 불편함이 사실이다. 이 얄팍한 문고판에 실린 25편의 짤막한 글들에서 풍기는 지은이의 감수성은 반면 오늘에도 유의미한 정서를 나타낸다. 가식 없는 가운데 고상한 기품이 배어나오는 글들은 따뜻한 정감마저 드리운다. ‘측상락(廁上樂)’의 소탈과 분방함은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울 정도다.

 

하정소화(夏情小話)’ 서두에서 더위를 기쁨으로 참는다는 글쓴이의 엉뚱함은 야트막한 동산에서 월하미인과 조우하며 찌는 듯한 무더운 여름밤이 훈훈한 추억으로 자리 잡는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달밤의 정서도 여기서 멀지 않다.

 

찰밥말미의 문장은 중년이 된 일개 소시민이라면 가슴 한켠이 저릿할 것이다. 작가는 이처럼 솔직하다.

 

어머니! 야망에 찼던 어머니의 아들은 이제 찰밥을 안고 흰 터럭을 바람에 날리며, 손등으로 굵은 눈물을 닦습니다.” (P.40)

 

우리네 고유문화에 대한 애정과 사라져 가는 아쉬움을 제재로 하는 글들이 제법 분량을 차지한다. 앞선 대중적 수필 두 편 외에 촌가의 사랑방’, ‘오동나무 연상’, 무엇보다 수록작 중 최장인 한국적 유머와 멋이 여기에 속한다. 그는 멋을 인생의 맛으로 파악하고, 우리네 멋은 슬픔과 결부되어 있다고 밝힌다. ‘생활과 행복에서 미적 균형과 조화를 잃고 있는 현대 생활에 대한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평범한 생활 속에서 향기를 거두고 품()을 쌓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수필이란 거기서 우러난 다향(茶香)이다. 평범한 생활 속에서 진실을 깨치고, 그것을 아끼고 또 음미하고 기뻐하고, 눈물과 사랑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 즐길 수 있는 글이다. (P.65)

 

수필은 재()로 쓰는 것이 아니고 정()으로 쓰는 것이다. (P.120)

 

엽차와 인생과 수필’, 글쓴이의 수필관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와병수감(臥病隨感)’에서도 한 대목 적고 있다. ‘오동나무 연상에서는 나아가 문장관마저 드러낸다.

 

글을 사랑하는 사람은 문정(文情)과 문사(文思)에서 잠시도 떠나지 아니함으로써 속기(俗氣)를 떨치고 문아(文雅)한 품성(品性)을 기른다. (P.111)

 

최만년의 글이라고 짐작되는 와병수감은 보다 인간적 면모가 약여하다. 인생의 외로움과 고독 속의 한줄기 정, 그리고 행복. 피천득과의 돈독한 우정이 여기서 언급된다. 짤막짤막한 단편들이 두서없이 나열되어 정서한 시간마저 갖지 못한 연민마저 느낀다. 이 글들은 자신과 자신을 알던 이들에게, 나아가 세상을 향한 유언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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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145
윌라 캐더 지음, 윤명옥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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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라 캐더의 글쓰기 특징은 비교적 확연하다. 인물 내면과 주변에만 집착하지 않고 그들이 자리한 문화적, 자연적 배경을 폭넓게 드러내면서 역사화 내지 풍경화를 보는 듯한 착시마저 들게 한다. 읽는 이는 대개 주된 인물의 내면에 동참하여 함께 호흡하고 감정을 공유하기 마련인데 캐더의 작품에서는 그러하지 않다. 과도한 몰입과 숨 가쁜 질주는 여기서 찾아보기 어렵다. 마치 한 지방의 민담 혹은 전설을 듣는 듯한 차분하고 느긋한 진행과 개개의 미세한 묘사를 뛰어넘은 대범하고 관조적인 기술이 두드러진다.

 

캐더의 작품에서 배경을 삭제한다면 얼마나 삭막해질 것인가를 우리는 알고 있다. 전작의 네브라스카는 물론 이 작품의 뉴멕시코 지역은 단순한 배경을 떠나 인물의 성격과 작품의 전개, 그리고 주제의식과도 치밀하게 연계되어 있어 작품의 특징적 매력에 깊게 관여하고 있다.

 

하늘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구름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 밑에 있는 사막은 단조롭고도 여전히 똑같아 보였다. 광대한 하늘은 바다보다 더 넓고 세상 그 어느 곳보다도 더 컸다. 평원이 그곳에, 사람의 발치 아래 있었지만 주변을 살펴보면 보이는 것은 찌르는 듯한 눈부신 파란 하늘과 움직이는 구름뿐이었다. 산들마저도 하늘 아래에서는 단지 개미 언덕으로 보였다. 다른 곳에서는 하늘이 세상의 지붕이었지만 이곳에서는 땅이 하늘의 바닥이었다. 누군가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을 때 그리워하는 풍경은 모든 것들 중에 단 하나, 사실 그 안에서 살고 있는 하나의 세상인 하늘, 하늘이었다! (P.259)

 

이번 소설에서 작가는 두 가톨릭 사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하고 있다지만 아마도 단순 모티브 역할 정도일 뿐 작품 내 라투르 주교와 바일랑 신부는 전적으로 작가의 펜끝에서 생명을 얻었을 것이다.

 

광활한 뉴멕시코 지역의 관구 관리와 포교를 위해 파견된 신부들 이야기. 소설이든 영화이든 선교사들을 다룬 작품은 제법 많다. 대개는 현지인의 냉대와 부정한 지방정권의 탄압에 굴하지 않는 인간적, 종교적 감동을 선사하기 위함이다. 개인적으로 현지 문화를 배척하고 획일적인 서구 중심적 가치관을 강요하는 선교 사업에 썩 동의하는 편이 아니기에 이 책을 읽을까말까 망설이기도 했다는 점을 언급한다.

 

두 사제는 이미 여러 곳에서 선교활동을 같이 하였으며 학창시절부터의 친구이므로 상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라투르 주교는 차분하고 지적이며 온화한 반면 바일랑 신부는 감정과 행동의 진폭이 크다. 두 사람이 정반대 성향이라는 점은 선교활동에서 득으로 작용하는데, 바일랑 신부는 남다른 친화력으로 현지인들 사이에 쉽사리 융화되어 개척 사업에 커다란 성과를 보인다. 라투르 주교는 가톨릭 본부와의 관계 및 현지 가톨릭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정착될 수 있도록 관리하는데 주력한다.

 

두 인물의 사고와 행동방식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는 올리바레스 부인, 즉 도나 이사벨라 재판 건이다. 죽은 남편의 유산은 합법적으로 물려받기 위해 본인의 나이를 밝혀야 하는 입장에 처한 부인. 하지만 그녀는 유산을 포기할지언정 나이를 밝히기를 거듭 거부한다. 딱한 그녀를 돕고자 하는 심정을 동일하지만 바일랑 신부는 유산을 놓쳤을 때의 암담한 현실을 강조하며 그녀를 윽박지른다. 라투르 주교는 다르다.

 

라투르 신부가 엄격하게 주교 대리를 흘낏 보았다. 그만 두세요.그가 재빨리 말했다. 그는 요셉 신부가 놓아준 부인의 작은 손을 잡고 몸을 숙여 정중하게 손에 입을 맞추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더 이상 강요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이 문제는 올리바레스 부인과 그분 자신의 양심에 맡겨 두도록 합시다.(P.215)

 

이렇게 말하다보면 꽤나 지루할 것 같지만 읽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 것은 우선 이 둘을 그려내는 작가의 필치가 상당하다. 이국적인 뉴멕시코 지역의 자연환경과 인디언들, 멕시코인들의 문화와 관습이 주는 흥미로움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며, 작가가 이따금씩 삽입하는 현지인들의 전래담도 양념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전혀 이질적이지 않고 작품 본래의 전개에 이바지한다면 과장일까.

 

바일랑 신부의 은근슬쩍 술수에 넘어가 졸지에 노새 두 마리를 사제들에게 바치게 된 루혼 씨는 현지인들의 순진한 신앙과 인성의 한 본보기다. 노새를 잃게 된 걱정과 슬픔은 품지만 그것이 사제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이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의 공여로 사제들이 선교활동을 더 잘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자긍심을 품는 대목은 눈물겹기조차 하다.

 

발타차 신부에 대한 전설은 초기 가톨릭 사제들의 선교와 그네들이 현지인들에 대해 품은 종교적 인종적 우월감과 지배욕을 잘 보여준다. 가톨릭이 서구 유일의 지위에서 몰락하여 종교개혁의 된서리를 맞은 것은 결국 종교인들의 타락과 부패가 원인이었던 것처럼. 역사를 돌이켜보아도 신앙 자체가 문제시 된 경우는 별로 없다. 라투르 주교가 폐허가 된 수도원 자취에서 품었던 감상도 여기서 멀지는 않았으리라.

 

그는 초목 하나 없는 사막의 바위산 위에서 석기 시대에 있던 그 자신과 같은 종족, 그 자신의 시대에 대한 향수, 유럽인에 대한 그의 영광스러운 욕망과 꿈의 역사에 대한 향수를 느끼고 있었다. 세계 속에 존재하는 그 자신의 일부가 동틀 무렵의 하늘처럼 변화하는 모든 세기 동안 내내 그러고 있는 것 같았다...... (P.119-120)

 

성선설에 따르면 인간은 선하게 태어났지만 환경에 물들어 점차 악하게 된다. 성경의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도 비슷한 입장이다. 세상사가 대개 그러하다. 의도와 취지의 순수성에 힘입어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어느 순간 이해가 개입하고 갈등이 발생하여 본래 진로에서 벗어나 엉뚱한 곳을 향해 달려가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마티네즈 신부의 경우도 그러하다. 그는 가톨릭 사제이지만 로마 가톨릭을 거부하고 독자적 세력화를 추구한다.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도 있다. 새로운 종교 내지 분파는 이렇게 생기는 법이니까. 다만 마티네즈 신부는 종교적 변질과 함께 개인적 탐욕과 타락으로 이어졌기에 라투르 주교가 고민하였던 것이다.

 

조국과 수만 리 떨어진 낯선 이방의 외딴 곳. 주위에 유럽인이라고 눈을 씻고 찾아봐도 달랑 요셉 신부 하나뿐인데, 그나마도 근자엔 이웃 교구에서 선교활동을 벌이느라 얼굴을 못 본 지가 수개월도 넘었다. 겸허하면서 의연한 소신을 갖고 교구 관리에 헌신하지만 주교도 인간인 이상 고뇌와 번민에 무관하지 못하다. 그 점이 오히려 더욱 인간적이다.

 

그의 영혼은 불모지가 되어 있었다. 그는 그의 교구 사제들과 교구민들에게 마음으로부터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하는 일은 피상적인 것처럼 보여서 모래 위에 짓는 집 같았다. 그의 거대한 대주교는 아직도 이교도의 지방이었다. 인디언들은 공포와 어둠의 옛길을 여행하며 악의 징조와 옛날 미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었다. 멕시코인들은 종교를 갖고 장난을 치는 아이들이었다. (P.236-237)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 그는 오랜 친구가 조금도 주저 없이 자기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약간 마음이 아팠다. 그에게는 이것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그들의 삶이 여기서 헤어지고 말지도 모른다는, 그들이 결코 다시는 함께 일을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마치 계시처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 집에서 그런 준비를 하느라 야단법석을 떠는 것이 그에게는 고통스러웠다. 그는 밖으로 나가 교구들을 돌아다니는 게 차라리 더 나았다. (P.281)

 

젊은 주교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늙은 대주교가 되어 은퇴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여생도 오래 남지 않았음을 스스로 의식한다. 선교사가 된 이후 고국보다는 타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추억을 지닌 그가 뉴멕시코로 귀향을 선택함은 자못 당연하다. 그곳은 친구도 추억도 있는 진정한 고향이므로.

 

그곳에는 부드러우면서도 야생적이고 자유로운 어떤 것이 있었다. 베개 위에서 귀에 대고 살며시 속삭이며 마음을 가벼이 해주고 슬그머니 열쇠를 돌려 빗장을 빼내고 감금된 정신을 바람 속으로, 파란색의 금빛 대기 속으로, 아침 속으로, 아침 속으로 풀어 놓아 주는 그 어떤 것이! (P.307)

 

반평생을 뉴멕시코 사제로 바친 라투르 대주교의 삶은 시종일관 올곧다. 삶은 감동적일지언정 소설적 형상화로서는 단조롭고 지루할 수도 있는 우려가 있지만, 작가의 다양한 노력에 힘입어 대단히 다채롭고 풍성한 문학적 향유를 누릴 수 있다. 가톨릭 사제의 사고와 삶, 원주민들의 기이하고 이채로운 토속적 신앙과 문화상이 대비를 이루는 가운데 이미 언급했다시피 뉴멕시코 지방의 독특한 자연환경과 결부되어 폭과 깊이가 한층 심화되었다.

 

무엇보다 두 사제의 문화적 다원성에 대한 관용이 인상적이다. 유럽 선교사들이 세계 각지에서 문화적 갈등과 충돌을 일으키는 주된 원인은 문화적 오만성과 배타주의라는 것을 감안하면 특히 주교의 문화상대주의적 사고는 한층 두드러진다. 참다운 신앙과 순수한 자연의 원리는 같은 곳을 지향하는 게 아닐까.

 

표제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만을 놓고 볼 때 언뜻 죽음과는 무관하게 영생과 부귀를 누릴 줄 알았던 대주교도 죽게 된다는 식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오기 마련인데 굳이 대주교로 한정지을 필요가 없을 테니 말이다. 한 사람의 일생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올바로 평가받는다. 면할 수 없는 죽음이지만 기꺼이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삶과 세속에 미련이 남아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삶. 대주교는 분명 전자의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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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2-14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읽고 싶다고 생각해오던 책이었는데
리뷰로나마 만나게 되어 반갑네요.

멋진 리뷰 잘 읽고 갑니다.
 
구스코 부도리의 전기 (양장) 사계절 1318 문고 37
이경옥 옮김, 이광익 그림 / 사계절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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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수록된 두 편의 작품은 여러모로 대비된다. 전자는 창작시기 최만년의 작품인 반면 후자는 가장 초기 작품이다. 전자와 후자는 유사한 구성과 플롯을 지닌 쌍둥이 같은 작품인 점에서도 흥미롭다. 주인공의 이름도 매우 특이하다. 후자는 요괴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처음엔 후자는 단순한 습작이며 후일 전자를 창작하기 위한 기초에 지나지 않을까 생각하였다. 물론 이러한 성격도 다분히 지니고 있지만 그보다는 좀 더 심화 발전시켜 작가의 주제의식을 치밀하게 반영하기 위한 의도적 변용에 가깝다.

 

미야자와 겐지는 단순한 글쟁이가 아니었다. 그의 삶을 돌이켜보면 가난한 농민들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비록 제한적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관심을 갖고 전념하였다. 작가가 굳이 ‘OOO의 전기라는 표제의 작품을 썼던 것은 자신이 지향하는 삶과 지양해야 할 삶을 문학의 형식을 빌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구스코 부도리와 펜넨넨넨넨 네네무는 둘 다 어린 시절에 부모를 잃고 동생과도 헤어진 후 힘겨운 삶을 보낸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둘 모두는 공부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품는다. 다만 양자의 목적은 다르다. 부도리는 농부들이 재해를 입지 않고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화산국에서 일하며 마지막에는 자신의 희생도 감내한다. 네네무는 자신의 입신출세와 안온한 삶에 만족한다. 그가 명재판관으로 명성을 날리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결과일 뿐이다. 네네무의 몰락은 그래서 오히려 허무하다. 부도리가 화산국 기사라는 점에서 직업적 대비도 드러난다.

 

부도리와 네네무의 구성상 큰 차이는 부도리의 경우 숲을 빠져나온 후 붉은 수염 주인과 수렁논에서 수년 간 같이 농사를 지었다는 삽화가 제법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다. 수렁논 주인은 풍작을 거두려고 온갖 궁리를 다하는 성실한 농부이지만 결국은 반복되는 냉해와 가뭄에 파산하게 된다. 하지만 주인의 노력 분투는 부도리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그의 삶의 목표를 설정하는 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칼보나드 섬의 화산을 분화시켜 부도리가 잃은 것은 자신의 삶이었지만 얻은 것은 작품의 마지막 단락에 잘 드러나 있다. 그것이 부도리의 생의 의의다.

 

많은 부도리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많은 부도리와 네리와 함께 그 겨울을 따뜻한 음식과 밝은 장작불로 즐겁게 살 수 있었습니다. (P.79)

 

부도리가 화산국 기사가 되는 반면 네네무는 단번에 요괴세계 재판장으로 벼락출세를 한다. 수하에 서른 명의 부하도 거느리게 되어 위세도 당당하다. 네네무는 명판결로 명성을 떨치고 특히 성냥팔이를 다단계로 착취하는 서른 명의 요괴를 훈도하여 갱생의 길로 인도한다. 작품 중에서 네네무가 나쁜 짓을 하거나 인격적으로 흠잡힐 만한 일은 저지르지 않는다. 단 하나 인간세계에 실수로 출현하게 된 것밖에는.

 

작가는 각 장의 제목을 이렇게 짓는다. 네네무의 독립, 출세, 시찰, 안심, 출현. 네네무는 출세를 하고 무수한 명예도 쌓으며 점차 스스로의 삶에 안심을 하고 젖어들다가 종국에 득의와 방심을 하여 파멸로 이어지게 된다. 네네무의 출현이 이루어지는 배경이 산무토리 화산이라는 점은 역시 부도리와의 유사성을 떠올리게 한다.

 

지금 나는 훈장이 천이백 개

짚 오믈렛도 이젠 질렸어

내 결정에는 땅도 복종해

산무토리조차 수박처럼 갈라진다네 (P.149)

 

작가가 네네무에 유달리 가혹한 연유는 부도리와의 비교를 통해 명확해진다. 양자는 유사한 배경을 지니고 어려운 시절을 겪는다. 둘 다 분명 출세를 하지만 그 성격은 대조적이다. 부도리는 자신의 부귀와 안위보다는 세상의 평안과 행복을 더 중시한다. 반면 네네무는 순전히 개인주의적이다. 그의 소명의식은 자신의 출세와 연관된 한계 이내에서만 유효하다. 그는 자만에 빠져 절제를 잃었고 그 순간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작가는 부도리와 네네무의 비슷하나 상반된 인물을 통해 자신이 생각한 바람직한 인간상을 제시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이색적이지만 터무니없지 않은 독특한 유형의 작품으로 일독할 가치가 있다.

 

이 책은 단순히 작품 수록에 그치지 않고 삼십 쪽에 가까운 세밀한 작품해설을 통해 심화된 작품이해에 도움을 주고 있다. 주마간산에 지나지 않던 많은 의미들을 발견하고 반추할 수 있어 미야자와 겐지라는 작가 이해에도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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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마타사부로 / 은하철도의 밤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미야자와 겐지 지음, 심종숙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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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의 원작으로서 성가가 높은 <은하철도의 밤>이다. 일전에 <주문이 많은 요리점>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동일한 작가임을 이제 알게 되었다. 애니메이션을 감명 깊게 시청하여 원작에서 많은 것을 기대한다면 실망을 안고 돌아가게 될 것이다. 어디까지나 원작에서 모티브를 따갔을 뿐 양자는 독자적인 예술장르다.

 

금세 현저하게 드러나는 특징은 주인공 이름이 이탈리아인이라는 점이다. 무슨 연유인지는 알 수 없다. 해설에서처럼 <태양의 나라>를 쓴 캄파넬라와의 연관성을 따져볼 수도 있겠고, 어쨌든 작가는 이 작품의 배경이 일본이라는 점을 굳이 피하고 싶은 모양이다.

 

우주와 천문에 대한 관심도 두드러진다. 은하수에 관한 과학수업으로 시작하며, 조반니는 은하철도에 승차하여 은하계를 종단한다. 각 정거장은 은하수의 주요 별자리를 상징한다. 이 점이 훗날 공상과학 장르와 결부시키기에 유리한 점이다.

 

조반니는 고독하다. 아빠는 부재 상태, 엄마는 아프다. 형편이 넉넉지 못해 방과 후에 일을 해야 하는 지경이다. 친구들과 놀지 못하고 거리감이 생긴다. 우울하고 슬프다.

 

조반니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쓸쓸해져서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P.89)

 

조반니의 눈에는 또 눈물이 가득 고여 은하도 마치 먼 곳으로 가버린 듯이 아득히 뿌옇게 보일 뿐이었습니다. (P.133)

 

이런 고요하고 좋은 곳에서 난 왜 더 유쾌해질 수는 없을까? 왜 이렇게 홀로 쓸쓸할까? (P.135)

 

은하철도는 저승행 열차다. 빙산에 부딪쳐 조난당한 배의 탑승자를 비롯한 여러 승객들은 남십자성에서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 기도한다. ‘끝까지 같이 가자는 조반니의 애원에도 캄파넬라는 홀연 듯 사라진다. 오직 조반니만이 내리지 않아도 되는 존재다.

 

조반니의 은하철도는 한바탕 남가일몽이다. 무익한 시간 때우기가 아니라 일생을 걸친 체험을 단시간 내에 압축하여 삶의 진실을 깨닫게 하는 정교한 장치다. 꿈속 여행을 통해 조반니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고 매진하기 위한 용기를 찾는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성장소설이다.

 

저 꼭 잘 살아갈게요. 반드시 진정한 행복을 찾겠습니다.” 조반니는 힘차게 말했습니다. (P.154)

 

기독교적 요소와 천문학적 지식이 결부되고, 글자그대로 환상이 결부된 이 작품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기이하며 신비롭다. 무엇보다 독특함의 여운이 길게 남는다.


애니메이션은 원작에서 모티브만 가져왔을 뿐 전혀 다른 주제의식과 접근방식을 지닌다. 환상을 모티브로 또다른 환상을 촉발했으니 단순한 모방과 재현이 아닌 발전이라고 볼 수 있겠다.

 

<바람의 마타사부로>는 비슷한 분위기를 지니면서도 일본의 민속적 요소와 자연 배경을 한껏 드러낸다. 불과 열흘 남짓 함께 보낸 후 홀연히 다시 전학 가버린 사부로. 그는 아이들이 지칭하는 대로 바람의 마타사부로일지도 모른다.

 

그때 바람이 휭 하고 불어와서 교실의 유리창은 모두 덜컹덜컹 울리고, 학교 뒤쪽 산에 있는 억새나 밤나무는 모두 이상하게 창백하게 되어 흔들리고, 교실 안의 아이는 무언가 때문에 웃고는 조금 움직인 듯했습니다. 그러자 가스케가 즉시 소리쳤습니다.

 

아 웃었다, 저 녀석은 바람의 마타사부로야.” (P.6~7)

 

이 작품을 지배하는 것은 인물 자체보다도 오히려 자연풍광이라고 하겠다. 산골마을에 쉴 새 없이 휘몰아치는 바람. 첫머리부터 작중을 압도하는 바람의 존재는 작품 말미에 이르기까지 변함없다.

 

바람은 아직 그치지 않고, 창유리는 빗방울 때문에 흐려지면서 아직도 덜컹덜컹 울렸습니다. (P.71)

 

아이들은 사부로와 금방 친구가 되어 포도를 따러 가고, 강에서 헤엄치며 논다. 아이들은 사부로를 바람신과 연관 짓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이것은 외부로부터의 미지의 힘이 무의식중에 아이들에게 작용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가스케는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 마타사부로가 유리 망토를 입고 하늘로 번쩍 날아올라가는 환상을 경험한다. 바람이 유달리 세차게 부는 날 이치로는 마타사부로가 날아갔을지 모른다며 서둘러 학교로 달려간다. 예감대로 마타사부로는 떠나갔다. 가스케와 이치로는 날아서 갔을 것으로 확신한다.

 

이 작품에서 마타사부로의 정체는 어른의 시각에서 명백하다. 아이들의 눈에는 전혀 다르다. 작가는 여기서 일본 동북지방을 배경으로 현실과 환상, 아이와 아이, 어른과 아이 간에 빚어지는 차이와 대립의 잠재요소를 너그럽게 포용한다. 사부로는 마타사부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둘 다라고 해도 좋다. 그는 차량으로 떠났을 수도 날아서 갔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모든 것을 풀어놓지 않는다. 뭔가 긴하고 중한 것을 잠시 엿보이게 한 후 슬쩍 덮어버린다. <주문이 많은 요리점>이 기억에 오래 남았던 연유도 마찬가지며, <은하철도의 밤>도 동일하다. 작가는 빈 여백을 독자가 주도적으로 채우길 바랐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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