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물고기
다니엘 월러스 지음, 장영희 옮김 / 동아시아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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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의 아버지는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P.7)

 

미소 짓는, 신비로운, 신화와 같은, 그리고 알 수 없는 나의 아버지. (P.200)

 

신화는 역사 이전, 인간이 아닌 신들의 이야기다. 신화로서의 아버지는 시간적, 물리적 거리감과 비일상성의 의미를 함축한다. 다름 아닌 아버지를 우리 자신에게서 구분 짓고 분리한다.

 

아버지의 권위 상실과 존재감 박탈은 근대를 거쳐 현대로 오면서 유독 두드러진 현상이다. 이는 아버지의 역할 변화와도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아버지는 더 이상 존경하고 본받을 롤 모델이 아니다. 단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주 수입원에 불과하다.

 

그가 집에 없을 때는 매혹적이고 신비로운 존재였지만 일단 집에 오면 그저 평범한 존재가 되어야 했다. (P.30)

 

작가는 신화가 된 아버지의 삶을 탐구하며 신화를 인간화한다. 에드워드 블룸의 경이로운 탄생, 동물과 이야기를 나누는 비상한 능력, 탁월한 박식함 등. 믿거나말거나 아이들의 성장 과정에서 사소한 일화라도 부모에게는 하나의 신화인 법이다. 거인 카알 길들이기와 거대한 메기에 끌려 호수 밑 세상을 구경하는 대목은 신화와 환상의 절묘한 결합이다. 물론 아이에게 부모는 신과 같은 절대적 존재이며, 부모에게 아이 역시 무한한 전능성을 가졌다는 의미에서 신과 마찬가지다.

 

나는 그것이 내 운명이라고 생각했어. 큰 연못에서 노는 큰 물고기, 그게 바로 내가 원했던 거란다. 처음부터 그랬어. (P.37)

 

어린 시절 장래의 꿈과 희망에 대하여 질문 받을 때 평범한 인생을 갈구하는 아이들은 없다. 누구나 위대한 사람을 꿈꾼다. 반면 아버지에게도 청춘이 있었을까? 그도 한때 청운의 꿈으로 가슴 부푼 시절이 있었을까? 우리는 의심하고 가능성을 일축한다. 우리에게 아버지는 가족 아닌 가족의 구성원, 엉거주춤하게 상석을 점유한 가정 내 이방인인 경우가 잦다.

 

윌리엄이 아버지 에드워드의 삶을 정면으로 인식한 계기는 역설적으로 죽음을 앞둔 아버지를 대면하면서였다. 전에는 그저 타인에 불과하였던 존재, 이제는 바로 옆에서 일상과 어머니를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 그럼에도 무관심할 수 없고 삶의 여정과 가치를 궁금하게 만드는 인물. 그렇기에 작품의 구조는 반복되는 아버지의 죽음 장면을 축으로 아버지의 개인사가 번갈아 현실로 불려온다.

 

이 작품은 에드워드와 아들 윌리엄의 대화와 관계 설정을 통해 일종의 성장소설을 지향한다. 특히 에드워드가 고향 애쉴랜드를 떠나는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꿈을 실현하려고 큰 물고기가 되기 위하여 길을 나서나 모두 제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꿈의 찌꺼기만을 남긴 채.

 

고향을 떠나 새로운 도시에 정착하고, 우여곡절 끝에 아내를 얻고 아이를 낳고 직업 생활을 꾸리며 아버지는 살아간다. 힘겹지만 사랑하는 이들과 이따금 누리는 행복을 위안 삼으며. 여기에 아들이 추억하는 아버지와의 단편적 일화들이 삽입된다. 하지만 생활에 매진할수록 아버지는 행복스럽지 않다. 가정이 낯설게 느껴지며 사랑과 애정이 의무와 부담, 그리고 속박으로 다가온다. 에드워드가 작은 마을 스펙터를 통째로 사들이며 즐거움을 느끼는 장면은 꽤 긴 분량을 차지하는데, 일종의 현실도피이자 안타까운 몸부림이라 할만하다.

 

아버지의 대단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행복한 것 같지는 않았다. 엄마도 나도 그리고 분명히 아버지도 행복하지 않았다. 가족이 가족답지 않다는 생각에 차라리 아예 따로 살까 하는 말도 있었다. (P.216)

 

문득 궁금해진다. 모든 이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받고 부귀와 명예를 한 몸에 지닌 한 사람, 임종 무렵 가족으로부터 좋은 남편, 훌륭한 아버지로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의 삶은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반대로 그저 그런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사회적으로도 별달리 두드러진 존재감이 없는 남자가 임종 무렵 가족으로부터 진실로 훌륭한 남편, 좋은 아버지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어떨지를.

 

나는 좋은 아버지였어.” ......

그래요,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예요.” ......

고맙다.” (P.117~118)

 

아들과 아버지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영원히 소원하며 대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일까? 작가는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려고 애쓴다. 진지한 주제를 놓고 아버지와 못다 한 대화를 하고자 노력하는 아들, 반면 아버지는 농담만을 일삼는다. 아버지의 농담은 도피 아니면 거부인가, 또는 삶의 진지함을 정면으로 주시하는 다른 차원의 대응일까? 공고한 신화적 틀을 깨뜨리고 신비의 구름에서 일상의 대지로 하강할 때 아버지와 아들의 바람직한 관계가 이루어질 것임을 우리는 안다, 이성의 도움 없이 직관적으로.

 

나는 내가 아버지를 좀더 잘 알았더라면, 삶을 좀더 함께 보냈더라면, 그리고 그가 내게 그렇게 빌어먹을 완벽한 신비덩어리가 아니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P.261)

 

이 작품은 열린 결말로 끝맺는다. 죽음의 순간 물고기로 변신하는 아버지의 의미는 읽는 이의 자유로운 해석을 요구한다. 물고기를 되찾은 꿈으로 또는 죽음에 대비되는 생명으로 읽을 수 있다. 의무와 속박을 벗어난 자유의 표상으로 이해도 가능하다. 아니면 농담 아버지와 진지 아들 간 화해 불가능의 상징이라고 간주해도 좋다. 실제로 물고기가 되었다고 믿지만 않는다면 별 상관없다. 아니, 어차피 신화라면 물고기가 되었다고 한들 어떠하겠는가.

 

이제까지 나의 아버지는 물고기가 되고 있었다.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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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클린 자서전 - 세기를 넘는 젊은이들의 인생 교과서
벤자민 프랭클린 지음, 강미경 옮김 / 느낌이있는책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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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벤자민 프랭클린이 어떤 인물인지 웬만한 사람들은 대개 알고 있다. 아이들의 위인전 전집에도 등장하며, 그의 이름을 딴 유명한 다이어리도 팔리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에 관한 기록물을 남겼다. 그것도 매우 뛰어난 수준으로.

 

아마 내가 그의 자서전을 처음 읽은 것도 중학생 때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범우 사루비아문고라는 청소년 문학시리즈의 한 권인데 제법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난다. 물론 대단한 사람이라는 흐릿한 인상에 남았을 뿐이지만. 제대로 된 프랭클린 자서전을 읽어보고 싶다. 그래서 프랭클린이란 인물이 진정 얼마나 위인인지 진면목을 이제 성숙한 시각에서 알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 책을 펼쳐든다.

 

무엇보다 그의 솔직성이 두드러진다. 그는 자신의 공과를 가감 없이 적는다. 공적은 자랑하지 않고 과오는 숨기지 않고 자기비판한다. 젊은 시절 한때의 방탕과 친구의 아내에 대한 성적 집적거림 등을 보면 그 역시 평범한 젊은이였을 따름이다.

 

이것이야말로 내 인생의 가장 큰 실수였다. 다시 한 번 삶이 주어진다면 절대로 그런 방탕한 생활은 하지 않을 것이다. (P.106)

 

하지만 이건 정말이지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인생에 있어서 또 커다란 잘못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P.111)

 

프랭클린의 훌륭한 인품과 태도는 대부분 후천적이다. 스스로 지켜야 할 덕목들을 선정해서 계획표에 따라 주간, 월간, 연간으로 실행 여부를 관리하는 방식은 훗날 자기계발 유형의 원조 격에 해당할 정도로 효과적이며 선구적이다. 그가 제시한 13가지 덕목들을 언급하는 것은 오늘날도 유효하다. 절제, 침묵, 질서, 결단, 절약, 근면, 진실, 정의, 중용, 청결, 침착, 순결, 겸손. 이 덕목들을 지키고 체화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했으니 그가 후년에 고매한 인품과 덕의 상징으로 추앙받았음은 놀랄 일이 아니다.

 

번개가 전기임을 증명한 과학자로서 유명하지만, 인쇄업자로 출발한 그는 신문발행인이자 당대의 저명한 정치가요 독립운동가인 동시에 사회개혁가이기도 하였다. 현재의 필라델피아 도서관을 설립하고, 소방대와 병원, 대학 설립 등 새롭게 인식한 주요 업적 등은 그의 전인적 풍모를 알게끔 한다.

 

여기서 프랭클린의 생을 뒤쫓으며 시시콜콜 그의 업적을 찬양할 필요는 없으리라. 프랭클린 자신도 그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자랑의 목적으로 자서전을 썼다면 이 책은 당대에 조용히 사멸할 운명에 처해졌을 것이므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변변찮은 교육도 받지 못하고 어릴 때부터 생업 현장에 뛰어든 인물이 훗날 수많은 미국인과 세계인들이 흠모하는 인물이 되었다는 점은 범상하지 않다. 그 과정 속의 근면과 절제, 치열한 분투 등은 당연할 것이며, 보다 완벽한 인격 수양을 위한 노력도 간과할 수 없다.

 

난 건전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언제까지나 간직하겠다고 결심했었다. (P.142)

 

정통적, 보수적인 기독교 교리에 반감을 지니고 있던 그가 타락의 길에 빠져들지 않았던 사유 중 하나는 바로 사고의 건전성에 있었다. 특정 종교에 무관하게 훌륭한 인간으로서의 공통적 자질을 쌓고 지키려고 노력한 건전함 말이다.

 

그는 행운과 요행을 고대하지 않고 자신의 발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성취를 중시하였다. 관념의 허상에서 허우적거리지 않고 일상과 현실의 사회를 개선시키기 위해 고민했다. 건전한 실용주의라 할만하다.

 

인간의 행복이란 어쩌다 생기는 횡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발견하는 소소한 일에 있는 것이다. (P.297)

 

뛰어난 가문 출신 또는 하늘이 내린 천재와 같은 인물들은 비록 외경하고 감탄할망정 존경의 념이 들지 않는다. 좌우를 둘러볼 때 우리와 비슷한 처지인 사람이 각고의 노력(물론 정직하다는 전제로)을 기울여 세상에 큰 족적을 남겼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들을 숭배하고 존경한다. 그것이 얼마나 지난한 여정이었음을 본능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바로 그런 유형의 위인이다. 많은 후대인들이 여전히 실패하면서도 본받으려고 계속 애쓰는 연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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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아이 여자아이 - 유치원생에서 고등학생까지
레너드 삭스 지음, 이소영 옮김 / 아침이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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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아이를 둘씩이나 키우는 처지이고 보니 육아가 힘겹게 여겨지는 사례가 자주 있다. 게다가 요즘은 초등학교 4학년인 큰아이와 애엄마가 날카롭게 대립하는 빈도가 증가하여 어찌 처신해야 할지 곤혹스럽기 그지없다. 아내의 의견과 입장을 십분 인정하지만 한창 혈기왕성하고 자유분방한 녀석을 책상머리에 잡아놓고 애엄마가 원하는 학습 수준을 강요하는 장면도 썩 보기 좋지는 않다. 가끔씩 오버랩 되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상기하면 때로는 입맛이 씁쓸하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하다 이 책을 펼쳐든다.

 

저자가 주장하는 요지는 간결 명료하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는 생물학적인 성차가 존재하므로 육아 및 교육 과정에서 이 점을 고려하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일견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새삼 주장하는 게 아닌가 생각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우리네 교육방식과 프로그램이 성적으로 무차별적이고 획일적임을 깨닫게 된다.

 

유치원과 초등학교는 남녀합반이 당연하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도 대세는 남녀공학으로 바뀌는 추세가 교육적으로 올바른 것인가. 상대방 성에 대한 자연스런 인식과 존중을 가져오며 선의의 경쟁을 유발할 것이라는 막연한 판단은 과학적 근거를 지니고 있지 않다고 저자는 말한다. 오히려 일정 시기까지는 동성들로만 이루어진 교육체계가 교육적으로 바람직하다고 하면서. 시대의 추이에 역행하는 발언이라고 하겠다.

 

임상의학자인 저자는 현재의 남녀공학 교육방식은 남녀평등론자들의 정치적 주장이 반영된 결과일 뿐 교육학적인 진지한 고민이 결여되어 있음을 밝힌다. 수많은 상담사례와 연구결과를 통해 이것이 남녀의 자연스런 성장 상의 차이를 반영하지 못하고 성별 차이에 대한 왜곡된 견해를 부각하고 강화한다는 것이다.

 

어린 남자아이는 손의 미세근육이 아직 발달되지 못하여서 여자아이에 비해서 예쁜 글쓰기에 불리하다. 이를 다그치면 오히려 글쓰기에 저항감을 갖게 된다. 또한 상대적으로 청력이 약하다. 대부분의 여자선생님들이 하듯이 조근 조근한 어투는 주로 뒷자리에 앉은 남자아이들에게 무슨 말인지 들리지 않으니 주의가 산만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언어능력도 늦게 형성되니 영락없이 부진아 또는 부적응아로 비치기 딱 좋다. 놀랍지 않은가!

 

남녀의 성 차이는 호르몬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유전적으로 결정된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여자의 뇌 조직과 남자의 뇌 조직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P.29)

 

단순히 발달과정 상의 늦고 빠름이 아니라 뇌 구조가 자체가 다르다고 한다. 아이나 어른을 불문하고 남자들은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하는데 서투르다. 여자아이가 수학이나 물리에 서투르고 공간 지각 면에서 취약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는 뇌 기능의 차이에 연원하니 무조건 상대방 성을 놀리고 비웃을 것은 아니다. 자연은 남녀의 성역할에 따른 구조와 기능의 차이를 태생적으로 부여한 것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많은 남자아이들이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현실이다. 학교의 규율은 활동적이고 모험적이며 공격 성향을 지닌 남자아이들의 욕구를 억제할 뿐 자연스럽게 발산하지 못하게 한다. 학습능력의 상대적 차이는 성적과 평가의 우등생과 열등생의 구조를 고착화시키며 상대방 성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커녕 질시와 갈등을 확산시킨다. 더구나 나이를 먹음에 따라 이성을 의식하면서 남녀의 전형적인 성역할이 오히려 강화된다고 한다. 여기서 여자아이는 외모에 대한 관심과 집착이 바람직스럽지 못할 정도로 중시된다.

 

모든 아이들은 각자의 개성이 있다. 그러나 각 아이가 독특하고 복잡하다는 사실 때문에 성별이 아동발달에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원칙 중 하나(다른 한 가지 원칙은 나이이다.)라는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P.52)

 

이 책에서 소개하는 많은 놀라운 사실들과 인상적인 사례들을 계속 나열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흥미롭지만 효과적이지는 못하다. 중요한 점은 평등이라는 관념에 무의식적으로 사로잡혀 실질상의 차이를 간과하는 것이야말로 그릇된 평등이라는 사실이다. 저자의 주장이 비록 부분적으로 과장되고 침소봉대하는 것일지라도 일정 부분 진실에 가깝다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소중한 우리 아이들을 올바르게 키우는데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학교의 첫 번째 목표는 교육이다. 사회공학은 두 번째이다. (P.156)

 

후반부의 성 문제, 약물중독, 동성애에 관한 사안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네 사회와는 거리가 있을 것으로 치부하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광범위한 학교 흡연, 청소년 산모의 증가 등은 더 이상 남의 문제가 아니다.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게이와 호모라는 단어는 이미 친숙한 용어다.

 

이쯤에서 우리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저자의 견해는 사실 새로운 게 없다. 연령별, 남녀별로 각각의 조언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일반론적일 뿐 절대적 해결방안이 되지 못함을 스스로 인정한다. 다만 남녀의 성차를 제대로 인식하고 인정하며 이를 긍정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가지라고 한다. 때로는 부모의 권위도 올바로 행사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인다. 현대사회로 오면서 가정과 사회가 아이 중심적이 되면서 부모의 권위가 상실되었다고 하며 아이들을 양육하는데 있어 가정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한다. 제아무리 학교에서 제대로 교육하려고 노력하더라도 가정에서 어긋나면 바로잡기 어려운 법이다.

 

부모가 자기 자녀를 훈련시키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그 일을 대신 해주지 않을 것이다. (P.263)

 

육아 관련 많은 책들은 주로 육아의 테크닉을 다룬다. 기존에 읽었던 여러 책들도 마찬가지다. 일단 목표는 동일하다. 우리 아이를 남보다 공부 잘하고 똑똑하게 키우기 위해 어떻게 노력해야 할까.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기본원칙을 재발견하게 하고 있어 참신하다. 우리가 간과하고 있던 육아와 학교교육의 숨은 병폐를 제대로 짚어낸다. 잘난 아이로 키우기는커녕 시름시름 병들어가게 방치하고 있지나 않는지.

 

이 책을 읽고 난 후 육아 방식에 어떤 영향이 있을지 속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명약관화한 일부 사실은 뼈저리게 다가오며 그동안 내가 그것을 무시하거나 간과하였음을 자인할 수밖에 없다. 저자의 일부 견해는 다소 과격하고 급진적으로 보이지만 전체적 맥락에서 볼 때 저자의 주장이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정녕 육아는 어려운 과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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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자본론 - 모든 사람이 디자이너가 되는 미래
마스다 무네아키 지음, 이정환 옮김 / 민음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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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자부하는 츠타야 서점은 기실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서점 내에 음반점, 문구점, 때로는 커피점도 입점해 있는 구조는 일본과 우리네가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나머지는 모두 다르다. 도서의 분류 및 배치 방식, 전문적 능력을 갖춘 접객원(concierge)의 존재, 그리고 고객을 배려하는 디자인 등. 더욱이 도서관은 비교할 여지가 전혀 없음을 인정한다.

 

이 책에서 전개되는 저자의 논리 구조는 두 가지 방향이다. 먼저 비즈니스 환경변화에 대한 인식이다. 단순히 플랫폼만 제공하는 단계를 넘어서 소위 서드 스테이지라고 해서 고객의 라이프 스타일을 제안하는 단계라고 본다. 따라서 디자인이 매우 중시된다. 또 하나는 비즈니스의 지향점이다. 저자는 고객가치의 제고를 최우선시 한다. 판매자, 관리자의 시각이 아니라 고객의 가치와 행복을 늘리는 고객의 관점. 다이칸야마 츠타야 서점과 다케오 시립도서관이 획기적이면서도 생경하지 않은 점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게다가 편안함을 자아내는 휴먼 스케일도.

 

기획은 이 두 가지를 결합시키는 행위다. 즉 고객 가치를 제고하는 제안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기획이며 기획의 가치가 여기에 있다. 기획가는 곧 디자이너다. 따라서 기획은 고객이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에서 수립되어야 하며, 현장과 유리된 기획은 어불성설이다.

 

디자인은 가시화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디자인은 결국 제안과 같은 말이다. (P.50)

 

모든 사람이 디자이너가 되는 미래가 이 책의 부제다. 모든 사람이 디자이너가 된다고? 왠지 거부감이 드는 문구다. 모든 사람이 기획과 디자인 능력을 갖춘다면 좋은 일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디자이너가 아니라면, 기획 능력이 부족하다면 시대의 추세에 낙오되는 열등한 부류의 인간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책표지를 찬찬히 살펴보니, 원래의 부제는 조금 다르다. ‘모든 기업이 디자이너집단이 되는 미래’. 비슷하지만 뉘앙스가 다르다. 무엇보다도 주체가 다르다. 개인이 아닌 기업. 비즈니스를 영위하는 기업이라면 당연히 디자이너기업이 될 필요가 있다. 저자의 말마따나 지적 자본의 축적 여부가 기업의 사활을 좌우할 것이므로.

 

따라서 기업은 모두 디자이너 집단이 되어야 한다. 그러지 못한 기업은 앞으로의 비즈니스에서 성공을 거둘 순 없다. (P.41)

 

각설하고 CCC의 주력사업인 도서, 음반, 영상물 및 전자제품 등 유통은 오프라인이 쇠퇴하는 산업분야다. 제아무리 디자인과 고객가치를 외쳐본들 한물간 꽁무니를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차라리 대세인 온라인에 매진하는 게 보다 현명하며 수익성에서도 유리하지 않겠는가. 저자는 이렇게 밝힌다. 현실세계와 가상공간은 각기 장단점이 있으며, 현실세계는 즉시성과 직접성이라는 측면에서 우위에 있다는 점, 사람을 배려하는 편안함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온라인도 병행하지만 결코 오프라인의 미덕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이런 유형의 책은 저자의 성공담과 철학을 소개하는 외에 대개 독자를 향한 메시지도 던지는데, 저자의 당부는 자유 개념에서 두드러진다. 저자는 자유를 독특하게 개념 짓는다. 자유란 마음대로로 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으로 이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본다. 본능과 충동의 굴레에서 벗어나 이성과 목표에 충실한 삶의 태도.

 

어쩌면 다케오 시립도서관의 방문객 수, 츠타야 서점의 매장 수, T-포인트 회원 수 같은 계량화된 지표는 별 의미가 없다. 우리들이 마스다 무네아키의 경영철학과 CCC의 성공신화에 반드시 주목할 필요도 없다. 책장을 덮고 훌쩍 다이칸야마로, 하코다테로 아니면 다케오시로 떠나서 우리 자신의 눈과 몸과 마음으로 둘러보면 충분할 것이다. 고객가치라는 거창한 표현도 불필요하다. 이용객들로 활기찬 구내, 깨닫지 못한 라이프 스타일의 신선한 제안, 심신을 편안하게 만드는 디자인 등을 목도하면 모든 것을 알아차리지 않겠는가. 불현 듯 그곳에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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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석 목양신 - 또는 몬테 베니 이야기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273
너다니엘 호손 지음, 김용수 옮김 / 나남출판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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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는 <몬테 베니 이야기>인데, 몬테 베니는 작중 주요 인물 네 명-미리엄, 힐다, 케년, 그리고 도나텔로-가운데 도나텔로를 지칭한다. 도나텔로의 집안이 토스카나 지방의 유서 깊은 몬테 베니 백작 가문이다. 이 작품 역시 작가에 따르면 로맨스. 호손은 자신의 주요 소설들을 로맨스로 굳이 구분한다. 신생 미국에서 로맨스를 쓰는 어려움을 토로한 호손이기에 유럽, 그것도 로마라면 풍부한 로맨스의 소재가 넘쳐났을 것이다. 로맨스는 중세에 연원한 형식이므로.

 

호손의 작품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방대-<주홍글자>에 비하면 거의 두 배 분량이다-한 이 소설을 읽다 보면 독자는 전형적인 호손의 특성과 함께 생경하고 당혹스러운 의문감이 끊이지 않고 내심에서 분출하게 된다. 방대함의 적절성에 대한 의구심이다.

 

주요 인물들 간의 대화와 사건의 얽히고설킨 전개는 그렇다 하자. 또 도나텔로를 제외한 그들의 직업이 예술가, 즉 두 명은 화가, 한 명은 조각가이므로 회화, 조각, 건축 등에 대한 비평과 작품 소개 및 감상이 일정 부분 등장하는 것도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 그럼에도 로마의 유적과 유물에 대한 과도할 정도로 상세한 소개와 묘사는 불필요하게 작품의 방대화에 기여한다는 인상이다. 이 부분을 대폭 축소하였다면 최소한 <일곱 박공의 집> 정도에 가깝게 독자에게 부담 없이 다가갈 수 있었을 텐데.

 

문득 소설이 아닌 기행문의 시각으로 바라보자 모든 의문이 해소되었다. 약 이백년 전 미국인들 가운데 유럽 여행을 해본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네들의 문화적, 정신적 뿌리가 유럽이므로 많은 호기심이 있었음에도 시간적, 경제적 형편상 극소수만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로마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서 작가는 로마의 유서 깊은 문명의 자취에 대한 당대인의 지적 호기심과 갈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을 반영한 게 아니었을까. 나중에 작품해설에서 옮긴이는 많은 당대인들이 이 작품을 로마 여행서로 받아들였다고 언급하여 이 추측을 입증한다.

 

작품을 이끌어가는 동력은 미리엄과 그녀를 둘러싼 전혀 대조적인 두 인물 간의 과거와 갈등, 그리고 대립이다. 도나텔로와 대리석 목양신 조각상의 놀랄만한 유사성은 작품 첫머리에서 인물들 간에 화제거리가 되지만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반복적인 농담을 통해 복선을 구축한다. 외면에서 내면으로. 게다가 빼어난 미모의 미리엄의 주위를 배회하는 정체모를 인물 모델의 음험하고 사악하기 조차한 이미지. 이 둘은 빛과 그늘, 지상과 지하, 낮과 밤, 순진과 죄 등 완전히 상반되는 유형의 인물이다.

 

여기에 미리엄의 모호함과 비밀이 곁들여져서 작품을 다소 어둡고 모호하며 신비스럽게 이끌어간다. 그녀는 뭔가를 숨기고 있다. 어둠과 죄악에 대한 거역할 수 없는 속박을 암시하는 미리엄의 대사는 절실함과 동시에 숙명적 체념을 담고 있기도 하다.

 

당신 자신을 위해서 날, 떠나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운명이 지워진, 다른 세상에서 온 여자인 나와 함께 이 숲에서 헤매는 것은 당신이 상상하는 것만큼 그리 행복한 일이 아니야. (P.103)

 

당신은 날 떠나야 해!......당신의 시간은 지났고, 그의 시간이 왔어! (P.112)

 

성경에 따르면 인간은 원죄를 지니고 태어난다. 순수하고 무구한 사람은 없다. 이 점에서 미리엄은 지극히 인간적이며 사실적이다. 반면 도나텔로와 힐다는 비현실적이다. 그들은 순진과 순수를 상징한다. 느리고 단조롭게 흘러가던 시간은 운명적인 사건 이후 급변한다. 그들 넷은 뿔뿔이 흩어지고 단편적으로 재회하지만 결코 과거를 회복할 수 없다.

 

신화 속 목양신처럼 자연과 환력, 순진의 화신이었던 도나텔로는 미리엄을 사랑하게 되면서 서서히 변모하며, 운명적 사건 이후 전혀 다름 사람이 되었다. 풍부하고 즐거우며 건강한 삶, 단순하고 흠 없는 기쁨으로 가득했던 도나텔로는 에덴동산을 떠나게 된 아담이 되었다. 그 사건이 미리엄에게 미친 파장보다 도나텔로에 심대한 영향을 준 것은 이런 연유다.

 

조각가는......얼마나 철저하게 그 멋지고 신선한 야수적 기운의 광채가 그의 얼굴에서 떠나버렸는지를 목격하고는 깜짝 놀라고 경각심이 일었다......모든 그의 젊은이다운 쾌활함과, 그와 함께 단순한 매너가, 완전히 없어지진 않았어도 그림자로 가려졌다. (P.216)

 

이따금, 불쌍한 도나텔로는 마치 비명을 들은 듯 깜짝 놀랐고, 가끔은, 마치 보기에도 두려운 어떤 얼굴이 자신의 얼굴에 가까이 들이밀어진 듯, 뒤로 움츠렸다. 이 음침한 분위기 속에서, 죄와 슬픔에 대한 신기함으로 당황하여, 유사함 때문에 그리고 장난삼아서 그의 세 친구들이 환상적으로 그를 바로 그 <프락시텔레스의 목양신>으로 인식했던 그 기이한 유사함이 그에겐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P.238)

 

죄를 저지른 미리엄과 도나텔로와 달리 힐다는 순수 그 자체이다. 옛 대가들의 영혼과 일체화된 공감을 지니고, 성모의 성소를 지키며 비둘기들이 힐다를 따르는 설정에서 독자는 작가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우연히 목도하게 된 죄의 현장, 그리고 범죄와 윤리, 우정 사이에서 그녀는 미리엄을 이해하고 용서하길 거부한다. 그녀는 자신의 순수함을 유지하고자 애쓰나 고뇌는 날로 깊어진다.

 

힐다의 상황은 모든 자신의 고민을 자신의 의식 안에 가둘 필요성으로 인해 무한히 더 비참해졌다. 미리엄의 범죄에 대한 인식을 자신의 연하고 섬세한 영혼 안에 간직한 이 순수한 소녀에게는, 그 효과는 마치 자신이 그 범죄에 참여했던 것과 거의 같았다. (P.376)

 

죄로 얼룩진 비참한 자들보다 어느 누가 순수한 자의 부드러운 구원을 더 필요로 하겠는가! 그리고, 우리 자신의 옷이 얼룩이지지 않도록 이기적으로 조심하는 것으로 인해 우리가 그 죄지은 자들을 우리의 심장에 가까이 껴안지 못해야 한다면, 우리가 순수하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어디에 그들의 가장 안전한 더 이상의 악으로부터의 도피처가 있는가! (P.439)

 

조각가 케년은 이해자이자 중계자이다. 그는 도나텔로의 변화를 통해 죄의 윤곽을 알아차리면서도 도나텔로를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미리엄에 대한 힐다의 완고함을 책망하면서 세상이 선과 악의 단순한 이분법적 구조가 아님을 지적하는 그는 건전한 이성과 감성의 소유자라고 하겠다. 그는 도나텔로와 미리엄의 재회와 화해를 유도하면서 그들에게 참회와 속죄의 삶을 살아가도록 권고할 수 있었다. 물론 그의 정신적, 예술적 감성은 아폴론적이라는 근원적 한계를 지녔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 힐다, 당신은......악한 것들에 어떠한 선의 혼합물이 있을지, 그리고 아무리 엄청난 범죄인이라도 그의 행위를 그 자신의 견지에서, 아니면 어떤 측면 지점에서라도 바라보면 결국은 그렇게 논의의 여지없이 유죄로 보이지는 않을지 모른다는 것을 모르오. (P.437)

 

세속적 희열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질고 고통스러운 삶을 향한 상호간의 높임과 격려를 위해서, 당신들은 서로의 손을 잡으시오. 그리고 만일, 옳은 일들을 향한 수고, 희생, 기도, 회개, 그리고 진지한 노력에서 결국은 음울하고 사려 깊은 행복이 나오거든, 그걸 맛보고 하늘에 감사하시오! (P.369)

 

호손의 전작들을 관통하는 공통 주제어는 죄와 죄의식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다. 이 작품에서도 그것이 명확히 드러난다. 천방지축이던 도나텔로는 죄를 통해 변모하였다. 어떤 점에서 보다 성숙해졌다고 하는 게 마땅하다. 죄를 통해 도나텔로는 양심을 자각하게 되었으며, 내면에의 성찰과 도덕적 기준에 대한 인식,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재고하게 되었다. 섣부르게 단언하면 죄와 죄의식은 인간의 성숙에 있어 필요악적인 역할을 담당한다고도 하겠다. 그렇다고 볼 때 에덴동산에서의 원죄는 결국 인간이 자연 세계에서 벗어나 진정한 인간 세계로 진입하게 되었음을 상징하는 셈이다.

 

그것은 그를 불붙여 어른으로 만들었었고, 그의 내부에 우리가 여태껏 알아왔던 도나텔로의 어떠한 원래의 성격도 아닌 어떤 지성을 생성시켰었다. 그러나 저 단순하고 기쁨이 넘치는 인물은 영원히 떠나갔다. (P.206)

 

그 어조는 또한 변화되고 깊어진 성품을 말해 주었다. 그것은 슬픔과 양심의 가책을 통해 왔었던 생생해진 지성과 정신적인 가르침에 대해 말해줬다. 그래서 제멋대로인 소년, 장난기 어리고 동물적인 성격의 존재, 숲의 목양신대신에, 여기 이제 감성과 지성을 지닌 남자가 있었다. (P.366)

 

케년의 추론은 오래된 교회당의 스테인드글라스에서와 같이 예술과 종교로의 확장을 넘어 인간과 종교의 근원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아담과 에덴동산까지 이르는 근본적 문제제기에서 케년과 작가는 한 발짝 물러난다. 케년은 힐다의 사랑을 얻고 놓치지 않기 위해서 불가피하였다. 반면 작가는 이 작품이 가져올 종교적 논란의 불씨를 확대하고 싶지 않았서였을 것이다. 작가는 예술가이지 사회변혁가는 아니며, 호손 자신도 노예해방 사안에서는 미온적 내지 온건한 입장이었다고 한다.

 

이 작품을 로마 유적과 유물과 연관하여 읽어나가면 무척 흥미로울 듯하다. 대리석 조각상과 케년의 클레오파트라 조각상, 힐다가 모작한 르네상스기의 거장들 회화, 보르게세 장원의 즐거움과 카타콤브의 음울함, 트레비 분수와 콜로세움 등등. 하나 작가가 이를 사건과 주제를 드러내기 위한 소재와 배경으로 삼았음은 명백하다.

 

작품해설에 따르면,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실패한 낭만주의 작품이라고 지적한다. 느슨하고 흐트러진 구성, 모호하고 난해한 신화적 상징성으로의 편향 등을 제기하면서. 근대적 소설이 아닌 로맨스의 관점에서 볼 때 모호함과 신화적 상징성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조성하였으니 전혀 단점이 될 수 없다. 구성 역시 <보카치오><캔터베리 이야기>, 아니면 <돈키호테>만 떠올려 봐도 전혀 느슨하지 않으며 오히려 현대성을 지니고 있어 작품 성격에 부합하는 의도된 선택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게다가 작가는 이 작품에서 상징적 알레고리를 과거와 현재가 공존과 대립을 병행하는 로마라는 역사적 도시의 풍요로운 유산에 힘입고 있다.

 

케년과 힐다는 현실에 복귀하고 안주하는 길을 따른다. 도나텔로와 미리엄은 현실에서 추방됨에도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현실을 한 단계 초월하는 길을 택한다. 두 사람이 지향하는 길은 작중에서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하지만 인습과 전통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보다 진실 된 인간 자신을 발견하는 길임은 확실하다.

 

모든 인간들이 존재의 표면과 환각적 즐거움들 밑의 어느 것이든 알려면 그 동굴 속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나올 때, 비록 첫 번째 대낮의 눈부신 빛에 눈이 부시고 앞이 캄캄해지지만, 그들은 그 이후 영원히 더 진실 되고 더 슬픈 삶에 대한 견해를 취한다.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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