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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붓다, 그 위대한 삶과 사상
법륜스님 지음 / 정토출판 / 2010년 3월
평점 :
다시 석가탄신일이 지나간다. 매년 다가왔다가는 떠나가는 날이지만 석가탄신일은 크리스마스와 함께 묘한 여운을 남긴다. 단지 달력에 빨간색이 칠해진 공휴일이어서는 아니다. 찰나지만 경건한 마음을 지니고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고나 할까.
근자에 석가모니의 전기를 읽었는데 그 내용이 또렷이 떠오른다. 예수의 지상에서의 삶의 이력이 신약의 주요 복음서들에 오롯이 담겨 있는 반면 석가모니의 경우는 그러하지 못하다. 학창시절에 배운 기억을 되살려도 이른바 사문유관을 계기로 왕자의 신분을 던지고 출가하여 깨우침을 얻었다는 정도만 있을 뿐이다. 깨우침 이후의 행적은 상대적으로 길고 평온한 생과 어우러져 그다지 언급되지 않는다. 그나마 대중적인 경전에도 부처의 말씀만 있을 뿐 부처 자체에 대한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면에서 부처의 전생과 탄생, 출가 전과 출가 후, 그리고 열반에 이르기까지 일목요연하게 부처의 삶을 정리한 이 책은 자못 의미가 깊다. 비록 신자가 아니라도 인류의 큰 영혼이 된 인물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책은 먼저 서장에서 부처가 태어난 인도의 사상과 역사를 개괄하고, 부처 활동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 대한 사전 지식을 알려주고 있어 이후 서술하는 내용을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무엇보다 아리아족과 드라비다족의 전쟁을 웅장한 서사시로 묘사한 인도의 정신적 유산인 베다를 종교적 지배의 의미로 해석한 점이 인상적이다.
구성은 여러 경전에서 발췌한 부처의 삶의 기록들을 연대순으로 배열하고 각각의 대목마다 풀이와 친절하고 상세한 해설을 덧붙이고 있다. 주로 인용되는 경전은 <본생경>, <불본행집경>, <과거현재인과경>, <방광대장엄경>, <불설보요경> 등 친숙하지 않은 편이다. 글쓴이는 역사적 연대기적 발자취와 아울러 그것의 종교적 함의와 현대의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를 제시하여 단순히 역사적, 종교적 인물의 삶을 기술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불교가 기독교, 이슬람교와 다른 점은 유일신 신앙이 아니라는 점이다. 불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부처인 석가모니불은 전생과 후생의 무수한 부처 중의 하나일 뿐이다. 전생담에서 수메다 행자가 발원하고 설산동자와 호명보살의 구도행으로 이어져 석가모니불로 현생에 탄생하게 되었다. 절대자의 존재를 사전에 설정하지 않고 구도자의 깨달음으로 절대자의 지위에 오를 수 있도록 한 점은 불교만의 특색이다. 글쓴이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 스스로 자신의 운명과 우주의 주인임을 밝히고 주체적인 의지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도록 하는 데 불교 사상의 참뜻이 있다 하겠습니다. (P.35)
화신불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은 석가모니 부처님만이 부처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생명, 즉 일체중생 모두가 화신불로 이 세상에 왔다는 것입니다. (P.49)
만약 싯다르타가 인간들의 고통과 참혹을 외면하고 사문유관을 겪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불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점에서 불교의 종교적 사명과 지향점은 명확하다. 고통 받는 중생의 구제. 즉 “불교의 역사는 고통받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강력한 서원으로부터 시작된 역사”(P.52)인 것이다.
인간 해방의 역사는 오로지 인간에 의해, 그것도 고통받는 인간을 구제하겠다는 인간의 발원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인간 해방의 역사는 인간을 구속하고 종속시켜 고통에 빠뜨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강력한 자기 발원이 실현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P.63)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탄생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질주한다. 죽음은 회피할 수 없는 절대적 명제로 다가오며 병들고 늙는 현상 역시 모면할 수 없다.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통으로 인식하고 고통 받는 중생에 동정과 연민을 느끼고 구제하겠다는 마음은 과연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이해 어렵기도 하다. 자연 현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 아닌가. 석가모니와 불교의 가치관은 염세주의에 기반 한 게 아닌가. 인생은 고(苦)라는 명제처럼.
글쓴이는 사문유관의 참된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사문유관의 의미를 죽음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실존적 고통을 인식하게 된 계기로만 파악한다면, 자칫 부처님의 출가를 지극히 개인적이고 관념적이며 현실도피적인 행위로 전락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P.154)
싯다르타가 길거리에서 본 생로병사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닌, 가난한 이들과 노예들의 비참한 삶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싯다르타는 사문유관을 통해 천민들의 처절한 현실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P.160)
싯다르타는 부귀와 공명을 버리고 기득권을 포기하며 출가한다. 왕자의 지위를 떠나 수행의 길로 들어선 모습, 그리고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여러 스승을 찾아가고 다양한 방식의 오랜 수행을 감내하는 장면에서는 새삼 그의 길이 쉽지 않았을 것을 알게 된다. 보통은 싯다르타가 부처가 되는 것은 전생에서부터 기정사실화되어 있기에 특별한 존재이니만치 쉽사리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되어서다.
불교에서의 ‘출가’는 단지 주거지를 나온다는 형식적인 의미를 말하지 않습니다. 기존의 관습, 즉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과 안일한 삶의 태도로부터 탈출하는 것을 말합니다. 출가는 이제까지 갖고 있던 거짓된 가치관을 버리고 부처의 길을 향해 삶의 방향과 자세를 전환할 때 가능합니다. (P.195)
고타마는 삶의 방식에서 쾌락주의와 고행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출가수행자의 수행 방법으로서의 선정주의와 고행주의를 비판했습니다......극단을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P.276)
중도는 아무 방법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수행의 최고의 길을 바로 중도, 즉 정해진 길이 아니라 ‘정함 있음이 없는 법’인 것입니다. (P.291)
싯다르타의 깨달음이 정확히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진리의 절대성이 언어의 상대성에 어찌 수용될 수 있겠는가. 사성도와 팔정도 또한 깨달음을 얻기 위한 각성과 수행의 태도를 의미하지 절대적 진리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수행하는 개인의 몫이다. 하지만 부처의 깨달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는 있다.
부처님은 신 중심적이고 계급 중심적인 이데올로기와 가치를 벗어나 인간이 자기 삶과 이 세상의 주인임을 깨달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해탈이라고 합니다. 이는 부처님이 탄생게에서 보여주신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구체화된 것입니다. (P.432)
종교의 역할과 중요성에 대한 기대가 어느 때보다 높은 현대에, 종교의 비중과 인식은 오히려 나날이 저하되고 있다. 종교와 종교인을 바라보는 세인의 눈은 호의적이지 않다. 본연의 수행 보다는 분파와 이권 다툼의 만연은 냉소를 자아낼 뿐이다. 설익은 아전인수 격의 주장이 난무하고 있다. 글쓴이가 부처의 삶을 정리한 목적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근원으로 돌아가 현재를 비추어 보기. 더없는 기쁨과 뼈아픈 반성의 기회로 삼도록.
우리가 참된 불자라면 매일매일 부딪치는 삶의 문제를 해결할 때 가장 중요한 지표가 되는 것은 부처님의 삶이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럴 경우에 어떻게 결정하셨을까?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며, 이렇게 부처님의 삶을 따라 살고자 하는 것이 진정한 ‘귀의불’의 정신입니다. (P.355)
모든 승가의 대중은 마땅히 자기 스스로가 등불이 되고 자기 스스로가 의지처가 될 것이며, 부디 다른 사람을 의지처로 삼지 말아야 한다. 또한 진리의 법을 등불로 삼고 진리의 법을 의지처로 삼을 것이며, 부디 다른 것을 의지처로 삼지 말하야 한다. (P.490)
진리에 대한 판단 기준은 부처님의 말씀, 즉 진리의 법과 율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누가 말하든 누구의 권위를 빌어서 말하든 편견에 사로잡히지 말고 부처님의 전체적인 말씀 속에서 신중하게 판단하라는 것입니다.....부처님의 가르침이 진리임에는 분명하지만 어떤 하나의 가르침을 무차별적으로 모든 것에 적용해서는 그 진리의 참뜻을 살릴 수 없습니다. (P.502-503)
부처의 말씀을 근거로 삼으면서도 부처를 절대적 도그마로 삼지 말라고 한다. 길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는 말과 상통한다. 중요한 것은 슈라바스티 성의 가난한 여인의 작은 등불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출가와 발원의 근본 목적을 잊지 않는 것이다. 비록 작은 등불이지만 마음 착한 여인의 넓고 큰 서원과 정성으로 켜진 것이기에 영원히 꺼지지 않듯이.
나는 일체를 깨달은 사람이고, 일체를 능히 아는 자이다.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아 어떤 것으로부터도 오염되지 않아 망집과 욕망에서 벗어난 해탈자이다. 나는 모든 번뇌를 항복받고 사악한 세력과 싸워 이긴 승자이다. 모든 것을 스스로 깨쳤으니 누구를 스승으로 받들겠는가. 나에게는 스승도 없고 스승 될 사람도 없으며 인천계에 나와 비견될 사람이 없다. 나는 최고의 무상정등정각을 이루었으니 붓다라 이름 하노라. (P.362)
부처는 누구인가에 대한 부처 자신의 선언이다. 이렇게 뛰어나고 위대한 부처는 우리같이 범상하고 무난한 존재와 뿌리에서부터 차별되는 특출한 현상인가? 글쓴이는 아니라고 단언한다.
깨달음이란 기적과 같은 어떤 특별한 능력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장 평범한 삶의 모습과 생각 속에서 부정적인 모습을 극복하고 올바른 모습을 지향하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부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을 하신 분이 아니라, 우리 모두 할 수 있지만 누구도 하려 하지 않은 일을 하신 분입니다. (P.521)
참으로 오랜만에 많은 생각을 하고 촉촉하게 심금을 울리는 글을 읽었다. 육백 면에 가까운 두터운 책임에도 읽는데 그리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으며 오히려 미처 알지 못하던 부처의 삶과 사상에 대해 자세히 접근할 수 있는 좋은 계기였다. 이 시점에서 글쓴이에 관한 세부적 사항과 그가 이끄는 모임과 조계종의 관계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열반에 이르기까지 종단을 바른길로 이끌어가는 시대의 대덕이 되길 바라마지 않을 뿐.
마지막으로 생명의 절대적 존엄성을 일깨우는 수메다 행자와 매의 일화에서 글쓴이가 적시한 대목이다. 물질주의적 사고관에 깃든 현대에서는 생명의 존엄성도 상대적으로 가치가 부여되는데, 이에 대한 단호한 부인이 구구절절이 가슴에 와 닿는다.
모든 생명은 본성에서 살펴볼 때 영원하고 자유자재하며 상호 평등합니다......생명은 다른 것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가 될 수 없으며 그 자체 그대로 가치 실현의 목적입니다. 또한 생명은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므로 어떤 이유로든 죽임을 당하거나 차별받거나 억압받아서는 안 됩니다. (P.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