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의 손, 은화 한 닢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 책세상 / 199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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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원제는 <꿈의 은화>이다. 1934년 처음 발표하였고, 1959년에 전면적으로 개작하였다. 따라서 초기작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원숙한 필치가 배어난다. 배경은 1930년대 이탈리아 로마. 실명은 거론하지 않지만 독재자 치하임을 밝히고 있어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집권 시기임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은화 한 닢을 매개로 은화를 건네주고 건네받는 관계 설정을 통해 다종다양한 인간 군상의 삶의 행태를 차분하게 묘사하고 있다. 작가는 인물들에 지나친 감상을 부여하지 않는데 딱하고 동정 받을 만한 인물에도 덤덤하며 비난받을 여지가 충분한 인물의 경우에도 그들의 입장과 시각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한 번 더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한다. 은화 한 닢의 구상은 작가에 따르면 상투적이지만 의도적이라는 측면에서 작위성이 강하다. 그것은 여러 인물들을 하나로 묶어주어 작품에 체계성을 부여하는 역할도 수행하는 동시에 그들의 삶이 비록 개별적이고 고립적인 삶이지만 세상과 완전히 동떨어진 삶은 아님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소설은 마르첼라에 의한 독재자 암살 기도와 실패를 줄기로 한다. 독재자와 암살 기도를 제재로 했다고 해서 파시스트 독재 고발을 목적으로 했다고 여기면 지나친 의미 부여가 될 것이다. 암살 시도는 오히려 작품의 계기가 되었음직하다.

 

인물들 간에 어지럽게 뒤섞인 인간관계를 따라가 보자. 파올로 화리나는 여배우 안졸라 피데스와 창녀 리나 키아리와 연결된다. 화장품상점 주인 줄리오 로비지는 딸 조반나를 통해 사위 카를로 스테바와 관련되고 상점 점원 영국 아가씨 존스 양과 연결된다. 창녀 리나 키아리는 파올로 화리나, 애인 마시모, 의사 알렉산드로 사르테와 이어진다. 사르테는 암살 미수의 마르첼라의 남편이자 극장에서 여배우 안졸라 피데스와 마주친다. 안졸라 피데스는 누구인가? 그녀는 안졸라 디 크레도로 언니는 로잘리아 디 크레도로서 성당에서 양초 파는 아가씨다. 사르테의 아내 마르첼라는 카를로 스테바와 마시모로, 마시모는 리나 키아리와 나중에 늙은 화가 클레망 루와 인연이 있다. 꽃 파는 디다 할멈을 빼놓을 수 없다. 인색한 노파인 그녀는 사위 오레스테 마리눈치, 성당 주임 신부인 치카 신부, 클레망 루 등과 작중에서 연계된다.

 

로잘리아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파올로 화리나를 나쁘게 보긴 어렵다. 그는 안졸라에 매혹되어 부푼 가슴을 안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었다. 아내의 가출 후 그녀에 대한 환상을 좇으며 그녀는 창녀 리나 키아리와 지속적 관계를 맺는다. 그의 안온한 꿈은 현실의 처참함으로 깨어지고 말았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자신을 파는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자신을 빌려주는 행위를 할 뿐이다. 그러나 꿈은 살 수 있기에 이 만져볼 수 없는 상품은 온갖 다양한 형태로 팔리고 있다. 파올로 화리나는 매주 리나에게 건네주는 적은 돈으로 자기 뜻대로 되는 환상, 아마도 이 세상에서 속이지 않는 유일한 것인 환상의 대가를 치렀다. (P.18)

 

줄리오 로비지는 어떠한가? 늙은 아내와 유형에 처해진 사위로 눈물짓는 딸 때문에 그는 노심초사다. 하나뿐인 손녀마저 병약하다. 로잘리아와 안졸라는 이질적인 자매다. 로잘리아는 시칠리아의 평온을 그리워하지만, 안졸라는 시칠리아를 지긋지긋하게 여겼다. 전통과 부친에 얽매여 자신의 삶을 하염없이 쭈그러뜨리는 언니와 달리 안졸라는 배우로 대중적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그녀의 실제적 삶도 성공적인가? 거리에서 꽃 파는 인색한 노파 역시 눈부신 젊은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는 마음에 안 드는 자식들과 자신의 돈에 눈독 들이는 주정뱅이 사위가 골칫거리다.

 

전체적 비중과 의의로 보건대 그래도 이 작품의 핵심 인물은 마르첼라와 남편 사르테라고 할 수 있다. 그녀와 남편은 여러 모로 대척점에 놓인 인물이다. 급진파 대 보수파. 이상주의자 대현실주의자. 불행한 가족력을 지닌 여인 대 당대에 성공한 의사. 두 사람은 상이한 가치관에도 서로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지니고 있다. 평범한 여인이었다면 나름대로 부족할 것 없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렸을 터이다. 그녀는 남편에게서 가면 속의 참 모습을 보았다.

 

의사 알렉산드로 사르테는 하나의 얼굴이라기보다는 일련의 가면들로 이루어진 무표정하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변하는 그런 얼굴을 가진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 끝으로 알렉사드로 사르테가 자기 혼자 있다고 여기거나 혹은 누군가 보고 있지 않다고 여기는 드문 순간들에는 그의 진정한 모습, 즉 냉혹하고 무자비하며 황량한 표정을 띤 얼굴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P.93~34)

 

그렇다고 사르테가 못된 유형의 인간은 아니다. 사실 모두가 가면을 쓰고 있으며 쓰지 않는 사람들은 극소수이며 대개 사회부적응자 내지 실패자들이다. 하지만 부모의 영향, 피억압인들에 대한 이상주의적 헌신으로 가득 차 있는 그녀에게 지극히 현실론자인 남편과의 생활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독재자 케사르를 저격하러 가는 마르첼라를 묘사하는 장면은 지극히 전사적인 그녀의 모습을 잘 드러낸다.

 

한바탕 폭풍이 몰아친 이후 독재자 케사르는 영혼의 평화를 얻으며, 줄리오와 알렉산드로는 잠들지 못한다. 돈 루제로, 리나 키아리, 클레망 루, 안졸라, 디다, 마시모 모두 나름대로 삶의 하루를 마치고 있다. 존스 양도 로마를 떠날 새벽 열차를 기다린다. 그리고 디다의 사위 오레스테는 술에 취해 죽은 사람처럼 행복한 채 쓰러진다.

 

인간의 삶은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과 실제 당사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실상은 판이하게 다를 수 있다. 이는 단지 관찰자의 시점 차이 이상의 것이다. 우리는 인물의 외관만으로 내면을 섣부르게 추론하고 시비를 예단하곤 한다. 우리가 제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노려봤자 그것은 지각의 껍데기만 바라볼 뿐 지구의 핵은커녕 맨틀조차도 언감생심이다.

 

삶을 평가하는 잣대는 여럿 있다. 좋은 삶, 멋진 삶, 성공한 삶 등등. 하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일률적 평가는 불가능하다. 인생은 교과서에 나오듯 도식적이지 않다. 작가는 여러 인물의 삶을 하나하나 독자에게 제시한다. 성급하게 재단하지 않는다. 독재자로부터 저항투사에까지, 시장에서 꽃 파는 노파에서 유명 여배우에까지, 삶의 스펙트럼을 그저 보여줄 뿐이다. 그네들의 현실의 삶의 외양과, 내면 독백을 통한 진실한 목소리를.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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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붓다, 그 위대한 삶과 사상
법륜스님 지음 / 정토출판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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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석가탄신일이 지나간다. 매년 다가왔다가는 떠나가는 날이지만 석가탄신일은 크리스마스와 함께 묘한 여운을 남긴다. 단지 달력에 빨간색이 칠해진 공휴일이어서는 아니다. 찰나지만 경건한 마음을 지니고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고나 할까.

 

근자에 석가모니의 전기를 읽었는데 그 내용이 또렷이 떠오른다. 예수의 지상에서의 삶의 이력이 신약의 주요 복음서들에 오롯이 담겨 있는 반면 석가모니의 경우는 그러하지 못하다. 학창시절에 배운 기억을 되살려도 이른바 사문유관을 계기로 왕자의 신분을 던지고 출가하여 깨우침을 얻었다는 정도만 있을 뿐이다. 깨우침 이후의 행적은 상대적으로 길고 평온한 생과 어우러져 그다지 언급되지 않는다. 그나마 대중적인 경전에도 부처의 말씀만 있을 뿐 부처 자체에 대한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면에서 부처의 전생과 탄생, 출가 전과 출가 후, 그리고 열반에 이르기까지 일목요연하게 부처의 삶을 정리한 이 책은 자못 의미가 깊다. 비록 신자가 아니라도 인류의 큰 영혼이 된 인물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책은 먼저 서장에서 부처가 태어난 인도의 사상과 역사를 개괄하고, 부처 활동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 대한 사전 지식을 알려주고 있어 이후 서술하는 내용을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무엇보다 아리아족과 드라비다족의 전쟁을 웅장한 서사시로 묘사한 인도의 정신적 유산인 베다를 종교적 지배의 의미로 해석한 점이 인상적이다.

 

구성은 여러 경전에서 발췌한 부처의 삶의 기록들을 연대순으로 배열하고 각각의 대목마다 풀이와 친절하고 상세한 해설을 덧붙이고 있다. 주로 인용되는 경전은 <본생경>, <불본행집경>, <과거현재인과경>, <방광대장엄경>, <불설보요경> 등 친숙하지 않은 편이다. 글쓴이는 역사적 연대기적 발자취와 아울러 그것의 종교적 함의와 현대의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를 제시하여 단순히 역사적, 종교적 인물의 삶을 기술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불교가 기독교, 이슬람교와 다른 점은 유일신 신앙이 아니라는 점이다. 불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부처인 석가모니불은 전생과 후생의 무수한 부처 중의 하나일 뿐이다. 전생담에서 수메다 행자가 발원하고 설산동자와 호명보살의 구도행으로 이어져 석가모니불로 현생에 탄생하게 되었다. 절대자의 존재를 사전에 설정하지 않고 구도자의 깨달음으로 절대자의 지위에 오를 수 있도록 한 점은 불교만의 특색이다. 글쓴이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 스스로 자신의 운명과 우주의 주인임을 밝히고 주체적인 의지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도록 하는 데 불교 사상의 참뜻이 있다 하겠습니다. (P.35)

 

화신불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은 석가모니 부처님만이 부처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생명, 즉 일체중생 모두가 화신불로 이 세상에 왔다는 것입니다. (P.49)

 

만약 싯다르타가 인간들의 고통과 참혹을 외면하고 사문유관을 겪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불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점에서 불교의 종교적 사명과 지향점은 명확하다. 고통 받는 중생의 구제. 불교의 역사는 고통받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강력한 서원으로부터 시작된 역사”(P.52)인 것이다.

 

인간 해방의 역사는 오로지 인간에 의해, 그것도 고통받는 인간을 구제하겠다는 인간의 발원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인간 해방의 역사는 인간을 구속하고 종속시켜 고통에 빠뜨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강력한 자기 발원이 실현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P.63)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탄생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질주한다. 죽음은 회피할 수 없는 절대적 명제로 다가오며 병들고 늙는 현상 역시 모면할 수 없다.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통으로 인식하고 고통 받는 중생에 동정과 연민을 느끼고 구제하겠다는 마음은 과연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이해 어렵기도 하다. 자연 현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 아닌가. 석가모니와 불교의 가치관은 염세주의에 기반 한 게 아닌가. 인생은 고()라는 명제처럼.

 

글쓴이는 사문유관의 참된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사문유관의 의미를 죽음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실존적 고통을 인식하게 된 계기로만 파악한다면, 자칫 부처님의 출가를 지극히 개인적이고 관념적이며 현실도피적인 행위로 전락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P.154)

 

싯다르타가 길거리에서 본 생로병사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닌, 가난한 이들과 노예들의 비참한 삶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싯다르타는 사문유관을 통해 천민들의 처절한 현실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P.160)

 

싯다르타는 부귀와 공명을 버리고 기득권을 포기하며 출가한다. 왕자의 지위를 떠나 수행의 길로 들어선 모습, 그리고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여러 스승을 찾아가고 다양한 방식의 오랜 수행을 감내하는 장면에서는 새삼 그의 길이 쉽지 않았을 것을 알게 된다. 보통은 싯다르타가 부처가 되는 것은 전생에서부터 기정사실화되어 있기에 특별한 존재이니만치 쉽사리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되어서다.

 

불교에서의 출가는 단지 주거지를 나온다는 형식적인 의미를 말하지 않습니다. 기존의 관습, 즉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과 안일한 삶의 태도로부터 탈출하는 것을 말합니다. 출가는 이제까지 갖고 있던 거짓된 가치관을 버리고 부처의 길을 향해 삶의 방향과 자세를 전환할 때 가능합니다. (P.195)

 

고타마는 삶의 방식에서 쾌락주의와 고행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출가수행자의 수행 방법으로서의 선정주의와 고행주의를 비판했습니다......극단을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P.276)

 

중도는 아무 방법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수행의 최고의 길을 바로 중도, 즉 정해진 길이 아니라 정함 있음이 없는 법인 것입니다. (P.291)

 

싯다르타의 깨달음이 정확히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진리의 절대성이 언어의 상대성에 어찌 수용될 수 있겠는가. 사성도와 팔정도 또한 깨달음을 얻기 위한 각성과 수행의 태도를 의미하지 절대적 진리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수행하는 개인의 몫이다. 하지만 부처의 깨달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는 있다.

 

부처님은 신 중심적이고 계급 중심적인 이데올로기와 가치를 벗어나 인간이 자기 삶과 이 세상의 주인임을 깨달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해탈이라고 합니다. 이는 부처님이 탄생게에서 보여주신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구체화된 것입니다. (P.432)

 

종교의 역할과 중요성에 대한 기대가 어느 때보다 높은 현대에, 종교의 비중과 인식은 오히려 나날이 저하되고 있다. 종교와 종교인을 바라보는 세인의 눈은 호의적이지 않다. 본연의 수행 보다는 분파와 이권 다툼의 만연은 냉소를 자아낼 뿐이다. 설익은 아전인수 격의 주장이 난무하고 있다. 글쓴이가 부처의 삶을 정리한 목적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근원으로 돌아가 현재를 비추어 보기. 더없는 기쁨과 뼈아픈 반성의 기회로 삼도록.

 

우리가 참된 불자라면 매일매일 부딪치는 삶의 문제를 해결할 때 가장 중요한 지표가 되는 것은 부처님의 삶이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럴 경우에 어떻게 결정하셨을까?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며, 이렇게 부처님의 삶을 따라 살고자 하는 것이 진정한 귀의불의 정신입니다. (P.355)

 

모든 승가의 대중은 마땅히 자기 스스로가 등불이 되고 자기 스스로가 의지처가 될 것이며, 부디 다른 사람을 의지처로 삼지 말아야 한다. 또한 진리의 법을 등불로 삼고 진리의 법을 의지처로 삼을 것이며, 부디 다른 것을 의지처로 삼지 말하야 한다. (P.490)

 

진리에 대한 판단 기준은 부처님의 말씀, 즉 진리의 법과 율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누가 말하든 누구의 권위를 빌어서 말하든 편견에 사로잡히지 말고 부처님의 전체적인 말씀 속에서 신중하게 판단하라는 것입니다.....부처님의 가르침이 진리임에는 분명하지만 어떤 하나의 가르침을 무차별적으로 모든 것에 적용해서는 그 진리의 참뜻을 살릴 수 없습니다. (P.502-503)

 

부처의 말씀을 근거로 삼으면서도 부처를 절대적 도그마로 삼지 말라고 한다. 길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는 말과 상통한다. 중요한 것은 슈라바스티 성의 가난한 여인의 작은 등불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출가와 발원의 근본 목적을 잊지 않는 것이다. 비록 작은 등불이지만 마음 착한 여인의 넓고 큰 서원과 정성으로 켜진 것이기에 영원히 꺼지지 않듯이.

 

나는 일체를 깨달은 사람이고, 일체를 능히 아는 자이다.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아 어떤 것으로부터도 오염되지 않아 망집과 욕망에서 벗어난 해탈자이다. 나는 모든 번뇌를 항복받고 사악한 세력과 싸워 이긴 승자이다. 모든 것을 스스로 깨쳤으니 누구를 스승으로 받들겠는가. 나에게는 스승도 없고 스승 될 사람도 없으며 인천계에 나와 비견될 사람이 없다. 나는 최고의 무상정등정각을 이루었으니 붓다라 이름 하노라. (P.362)

 

부처는 누구인가에 대한 부처 자신의 선언이다. 이렇게 뛰어나고 위대한 부처는 우리같이 범상하고 무난한 존재와 뿌리에서부터 차별되는 특출한 현상인가? 글쓴이는 아니라고 단언한다.

 

깨달음이란 기적과 같은 어떤 특별한 능력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장 평범한 삶의 모습과 생각 속에서 부정적인 모습을 극복하고 올바른 모습을 지향하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부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을 하신 분이 아니라, 우리 모두 할 수 있지만 누구도 하려 하지 않은 일을 하신 분입니다. (P.521)

 

참으로 오랜만에 많은 생각을 하고 촉촉하게 심금을 울리는 글을 읽었다. 육백 면에 가까운 두터운 책임에도 읽는데 그리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으며 오히려 미처 알지 못하던 부처의 삶과 사상에 대해 자세히 접근할 수 있는 좋은 계기였다. 이 시점에서 글쓴이에 관한 세부적 사항과 그가 이끄는 모임과 조계종의 관계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열반에 이르기까지 종단을 바른길로 이끌어가는 시대의 대덕이 되길 바라마지 않을 뿐.

 

마지막으로 생명의 절대적 존엄성을 일깨우는 수메다 행자와 매의 일화에서 글쓴이가 적시한 대목이다. 물질주의적 사고관에 깃든 현대에서는 생명의 존엄성도 상대적으로 가치가 부여되는데, 이에 대한 단호한 부인이 구구절절이 가슴에 와 닿는다.

 

모든 생명은 본성에서 살펴볼 때 영원하고 자유자재하며 상호 평등합니다......생명은 다른 것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가 될 수 없으며 그 자체 그대로 가치 실현의 목적입니다. 또한 생명은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므로 어떤 이유로든 죽임을 당하거나 차별받거나 억압받아서는 안 됩니다.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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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즈워스 시선
윌리엄 워즈워스 지음, 윤준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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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워즈워스다.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 나온 이 시선집은 워즈워스의 주요작품들을 대거 수록하는 미덕을 발휘하고 있다. 다만 단점은 영한대역본이 아니라는 점. 따라서 구입에 앞서 신중한 고민이 요구된다. 워즈워스 시를 처음 읽는 것이 아니므로 앞서 이미 관심 깊게 읽었던 시의 품평은 여기서 제외하고, 처음 접하는 작품 또는 덜 주목하였던 시들에 주의를 기울이련다.

 

워즈워스 시에서 특징적인 요소는 작중 주인공 내지 화자의 신분이 평범하거나 상대적으로 낮다는 점이다. 시골처녀, 초라한 노인네, 촌티 나는 어린 소녀, 평범한 시골 소녀 등 전시대의 왕족과 귀족 중심과는 확연한 대조를 보인다. <가엾은 수전의 몽상>은 돈 벌러 상경한 가난한 시골처녀가 문득 고향 자연을 몽상하고 있으며, <사이먼 리>에서는 사냥개 관리인으로 힘겹게 노년을 견디는 자그마한 노인의 삶의 영욕과 애환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우린 일곱이에요>의 촌티 나는 숲지대 오두막집 어린 소녀는 자못 이성적인 시인과의 대비가 두드러지는데 독자의 시각에서는 어린 소녀에게 심정적으로 이끌리게 된다.

 

작품 속 시인의 태도는 두 가지 측면을 보여준다. 먼저 평범한 인물과 시골과 자연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얻게 되는 친근성과 소박성이다. 독자는 시 속의 제재가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은 바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라는데 새삼 친근미를 느낀다. 더구나 그것들은 일부러 꾸미려 들지 않고 원래 그러한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어 소박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는데, 가감 없이 표현하는 삶의 희로애락을 오히려 자연스럽다.

 

<문득 북받치는 슬픔을 나는 느꼈네>를 포함한 다섯 편의 루시 시편들에서 루시는 외견상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골에서 쓸쓸한 생을 마쳤지만 자연 속 루시의 죽음이 갖는 의미는 쉽사리 예단할 수 없다. 이는 <4월의 두 아침>에서 땅속에 누운 매슈의 딸과 매슈가 만난 생기 넘치는 예쁜 소녀의 연상도 마찬가지다. 인생은 수많은 사연과 곡절로 점철되었지만 그것은 자연도 마찬가지다. 특히 자연미에 대한 워즈워스의 예찬은 각별하다. <누이에게>에서 시인은 아침 일과와 책을 놓아두고 산책을 재촉하고 있다. 자연 속의 가르침이 책보다 더 깊다고 하면서. 아울러 자연물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을 환기시키고 반추할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되는 점에서 한층 값어치가 크다. <뻐꾸기에게>에서 뻐꾸기의 노래는 꿈 많던 시절의 이야기를 떠올리도록 환기하는 지저귐으로서 시인에게 황금기의 회상을 가져온다.

 

시인은 자연을 노래하면서도 자연에 정주하며 일체가 되지는 못한다. 시인은 나그네다. 그는 부지런히 시골길과 숲 속, 호숫가를 걷는다. 노상에서 마주치는 인물과 풍경이 그의 마음에 들어왔다가는 스러져간다. 이 점에서 그는 진정한 자연시인은 아니다. <사이먼 리><우린 일곱이에요>에서 시인은 작중인물과 뚜렷이 구별되는 관찰자에 불과하다. <서쪽으로 걸어가다가>에서는 나그네 시인의 정체성이 분명하다. 외로운 나그네는 정겨운 목소리의 따뜻한 인사말에 위로와 격려를 느끼고 따스한 인정을 기억한다. <홀로 추수하는 처녀>에서는 타향에서의 이국적 정서가 주는 감흥이 두드러진다. 이것은 곧 여행자의 정서다.

 

나그네의 미래에는 두 갈래 길이 놓여있다. 역마살을 가슴에 품고 평생을 정처 없이 방황해야 하는 숙명에 처하든지 아니면 언젠가는 방랑을 접고 안정된 정주의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워즈워스가 택한 길은 후자다. 자의든 타의든 자신의 선택을 탄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에 평온과 안정을 느낀다. 또한 세상과의 타협이기도 하다.

 

우리는 환한 햇볕 속 시냇물처럼

반짝이며 흘러야만 하오. 그렇잖으면 우리는 불행한 신세.(<런던에서, 18029>에서)라고 외치고 <우리는 너무 속세에 물들어 버렸네>라고 탄식하던 시인은 이제 자연과 자연이 주는 무한한 자유에 지치고 말았다. 자연신에 가까운 가치관의 변화는 새삼 자유로운 영혼은 나약함에 방황하기 쉽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고요한 사색 속에서

나는 그대의 통제를 간청하노라.

이 무법한 자유에 나는 지쳤고,

불쑥불쑥 솟는 욕망의 중압감을 느끼노라. (<의무에 부치는 송가>에서)

 

그대의 이 작품을 나는 비난하지 않고 찬양하오,

이 노호하는 바다, 저 음울한 해변을.

 

하지만 의연한 자세, 꿋꿋한 쾌활함,

앞으로 견뎌야 할 숱한 광경들을 환영하라!

여기 내 앞에 있는 것 같은 광경이나 더 심한 광경들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우리는 견디며 애도하노라. (<비가: 조지 보몬트 경이 그린 폭풍우 속 필 성의 그림을 보고>에서)

 

여기서는 낙원처럼 고요하고 노고나 투쟁도 없는 영원한 안식을 긍정한다. 시인이 인식한 종래의 자연은 어리석은 환상으로 치부된다. 상실감, 하지만 깨달음, 그리고 평온한 마음. 어쩌면 시인은 종달새의 고뇌에서 자신의 입장을 공감한 듯하다. 눈부신 하늘과 시름겨운 지상 사이. 종달새는 차라리 지상의 둥지에 정주한 시인의 자화상이다.

 

날아오르지만 헤매는 법 없는 너는 현인의 표상,

진정 천국과 집을 맺어 주는구나! (<종달새에게>에서)

워즈워스 노년의 시에서 흥미로운 대목은 기계문명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다. <증기선, 고가교, 철교>와 같은 인공물을 인간의 기술로 생겨난 (자연의) 합법적 후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편 <제임스 혹의 부고를 접하고 쓴 즉흥시>에서는 가까운 이들의 잇따른 죽음과 작별을 회고하면서 자신의 임박한 운명에 대한 공감을 결부시키고 있다.

 

<송가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얻은 불멸성의 암시>는 앞서 읽은 대목에서 다소간 오독이 있다. 도식화된 상투적 결론을 사전에 설정했다고나 할까. 시인은 아이 즉 어린 시절은 꿈의 영광과 신선함을 걸친 듯한 시절인 반면, 어른 즉 현재는 지상에서 영광이 사라졌음을 자각한다.

 

그 환상의 미광을 어디로 날아갔는가?

지금 어디 있는가. 그 영광과 꿈은? (<송가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얻은 불멸성의 암시> 4연에서)

 

유년기 소년 청년 성인으로 갈수록 빛은 평범해진다. 어린이는 속세에 물들어버려 어린 시절의 영광을 잊어버린다. 그러다가 문득 어렴풋한 회상은 온 생애의 빛의 원천이 되어 한번 깨어나면 사멸하지 않는 불멸의 바다로 시인을 인도한다. 이제 광채, 영광의 시간이 사라지고 되찾을 길 없다고 해도 슬퍼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원초적 공감, 상념, 신앙, 세월 속에서 어린 시절의 빛을 회상하고 위대한 불멸성을 새삼 인식할 수 있다.

 

이 시선집은 워즈워스의 <서곡>의 발췌와 유명한 <서정담시집> 서문을 수록하고 있다. 전자는 시인의 평생에 걸친 자서전적 대작이며, 후자는 낭만주의 문학의 선언문으로 인정받고 있다. 방대한 <서곡> 중 일부만 실려 있어 온전한 이해와 감상은 어렵지만 한 단면이나마 맛볼 수 있다. 그리고 떠남과 자유, 자연에 대한 시인의 애호의 연원을 짐작케 한다. 말미의 해설에 따르면 “<서곡>은 시인의 감수성이 자연에 의해 형성되고 또 그렇게 형성된 창조적 감수성이 어떻게 자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변형시키는가에 관한 생생한 묘사”(P.210)라고 한다.

 

<서정담시집> 서문은 작자의 시론이기도 하다. 워즈워스의 초기 주요작품들을 면면히 관통하는 기본 정서와 시인의 태도를 명백히 알려준다. 영시에 대한 이해가 짧은 일개 독자로서는 이것이 표명하고 있는 깊은 함의를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인식의 전개가 이루어졌음은 분명히 짐작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사건과 상황들을 선택해,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언어를 골라 최대한 처음부터 끝까지 그 사건들과 상황들을 서술하거나 묘사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이 사건들과 상황들에 상상력의 채색을 가함으로써 평범한 사물들이 마음에 비범한 방식으로 제시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P.194)

 

모든 좋은 시는 힘찬 느낌들이 저절로 흘러넘치는 것이고......비범한 유기적 감수성을 갖고 오랫동안 깊이 생각한 사람에 의해서만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P.196)

 

시인들은 시인만을 위해 쓰지 않고 사람들을 위해 쓴다......시인은 이 높은 곳으로 여겨지는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고 (P.199)

 

옮긴이는 해설을 통해 보편적 질서가 아니라 개인의 주관적 내면을 중시하고, 자연을 생명을 지닌 자립적 존재로 인식하였다는 점에서 워즈워스를 포함한 일군의 낭만주의 시인들의 문학사적 의의를 적시하고 있다. 더욱이 워즈워스에게 있어 자연은 단지 경치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삶에 유익한 영적 영향을 미치는 힘으로서의 자연이었음을 언급하는데 매우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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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장영희 에세이
장영희 지음, 정일 그림 / 샘터사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고 장영희 교수의 두 번째 에세이집이자 유작이다. 저자의 사망 뉴스와 함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화제의 책인 동시에 내가 장영희란 인물에 대해서 비로소 듣게 된 계기가 되었다. 솔직히 처음엔 무슨 대단한 사람이기에 제도권 언론에서 그렇게 부음을 떠들썩하게 전하나 의아해하기도 하였다. 그러했던 내가 이것을 포함하여 저자의 책을 다섯 권째 읽는 셈이다. 그것도 모두 구입(신간은 아니고 중고이지만)해서 말이다.

 

장영희 선생의 글의 미덕은 새삼 느끼지만 가독성이 높다. 독자가 글을 읽는데 하등의 어려움과 불편도 느끼지 않고 쉽고 술술 읽히도록 글을 쓴다. 쉬운 글쓰기의 의미가 자칫 글의 수준이 낮다는 오해를 사기 쉽지만 과시적이고 현학적이지 않게 독자의 관심과 주의를 집중시키는 글쓰기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게다가 선생의 글은 가식 없이 솔직하다. 명문대 대학교수이자 인지도 높은 칼럼니스트로 고상하고 도도한 척 굴려고 하면 한없이 올라갈 수 있으려만 선생은 자신의 몸을 한껏 낮춘다. 신체적 장애와 관련하여 굳이 숨기지 않고 자연스레 기술하며, 부모와 가족에 얽힌 사연들, 학생들과 수업과 관련된 이러저러한 일화들을 가감 없이 서술한다. 자신의 생활 태도와 습관, 성격 등 때로는 약점이라고 치부될 만한 것도 감추지 않는다. 정리정돈에 약하고, 대단한 방향치에 길치라는 점, 게으르고 나태한 성격 등. 이런 솔직함은 대학교수이자 영문학자라는 딱딱한 껍데기에 지레 겁먹고 접근하지 못하는 대중들에게 단단한 외피를 벗어던지고 인간 장영희 본연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스스럼없이 다가서게 만든다.

 

사랑을 버린 사람이든 사랑에 버림받은 사람이든, 다시 한 번 가슴 아프게 떠올리며 보석 같은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랑의 추억이 있다는 것은 이 가을에 한껏 누릴 수 있는 커다란 축복이다. (<사랑을 버린 죄>에서, P.47)

 

세상 사는 것이 만만치 않다고 느낄 때, 죽을 듯이 노력해도 내 맘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나는 내 마음속에서 작은 속삭임을 듣는다. 오래전 내 따뜻한 추억 속 골목길 안에서 들은 말. (<괜찮아>에서, P.132)

 

일반인들의 명사의 에세이를 통해 기대하는 것은 대단한 철학과 심오한 종교, 도덕적 가치의 함양 등이 아니다. 유명인들의 생활과 생각도 우리네 범상한 이들과 큰 차이가 없구나, 그들도 역시 우리랑 비슷한 족속이구나. 이와 같은 동질감 내지 공감이 아닐까. 그런 가운데 미처 환기하지 못했거나 간과했던 삶의 반짝거리는 깨우침과 지혜를 통해 그래도 조금 뛰어난 사람이군 하면서 거부감 없이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작자 스스로는 어떻게 바라볼지 몰라도 독자들은 확실히 안다. 인간 장영희의 가슴은 더할 나위 없이 맑고 순수하며 게다가 따뜻하다는 것을.

 

이러저러한 내용 중에서 몇 군데는 특히 나의 일상과 비교하여 뜨끔하게 만들거나 좀 더 이모저모 생각하게 만든다.

 

가끔 내 마음속에는 이렇게 평화를 싫어하고 오히려 분란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도깨비 같은 게 살고 있는 것 같다......어쩌면 누구든지 마음속에는 작든 크든 그런 도깨비가 살고 있는지 모른다. (<마음 속의 도깨비>에서, P.40)

 

내 마음속 도깨비도 되돌아보면 남들 것 못지않게 커다랗고 짓궂은 녀석이다. 이 녀석은 화끈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지 않으면서 삐딱한 언사로 툭툭 내뱉는다. 속마음은 안 그런데 괜히 친절하고 부드럽게 하는 것은 약한 모습을 보인다고 생각해서인지 딱딱하고 퉁명스러움을 대놓고 표시한다.

 

어린 그들이 최선을 다해 치열하게 뼈아픈 고통과 긴장을 겪는 시간에 나는 단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무위의 재능만을 아낌없이 발휘하고 있는 것이었다. (<무위의 재능>에서, P.109)

 

글쎄, ‘무위가 반드시 무가치한 악습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현대 사회는 과도한 유위를 계속하여 요구하고 있는데서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닐까. 내가 싫어하는 용어 중 하나가 시테크이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빽빽하고 정신없는 일과를 살아가고 쉴 새 없는 약속과 과업 사이에서 허덕여야 유능하고 앞서가는 인재로 비친다. 가던 길 멈추어 서서 주위를 둘러 볼 수 있는 물리적, 정신적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무위는 참으로 유익한 재능이다.

 

그래도 지금 내가 여기서 왼쪽으로 가야 할지 오른쪽으로 가야 할지 결정하는 건 순전히 내 자유의지야. 여차하면 차 버리고 택시 타고 가면 되지. 길에서 끝없이 헤매는 것이 인생에서 끝없이 헤매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새처럼 자유롭다>에서, P.204)

 

길에서는 잘 헤매지 않는 편이다. 애초 초행길의 경우는 사전에 포털 사이트의 지도서비스 등을 검색해서 대략적인 위치와 행로를 머릿속에 담아둔다. 반면 인생에서는 갈팡질팡 이다. 묵묵히 일관된 삶을 걸어간다고 남들은 알고 있지만, 실은 아무것도 선택하거나 결정하지 못하여 그냥 직진하는 인생이다. 그런 면에서 온갖 고초에도 도전을 포기하지 않아 꿈을 이루어낸 작자가 새삼 대단하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 못 한다는데 그깟 한 명 도와준다고 세상 달라질 것 있나 했던 생각은 무더기 환자가운데 한 사람으로 무더기 학생들을 가르치며 살아가는 데 익숙한 내가 한, 참으로 알량한 생각이었다. (<나의 불가사리>에서, P.229)

 

사랑의 리퀘스트류의 프로그램을 거의 보지 않는다. 물론 TV 자체를 썩 보지 않는 연유도 있지만, 간만에 보더라도 굳이 어렵고 불우한 사람들의 삶은 보면서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다.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거나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외면한다. 속마음으로 도와줄까 망설임도 있지만 그들이 진정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인지 아니면 그런 척하면서 세인의 선의를 이용하는 경우가 아닌지 의심한다. 작자의 각성은 내 속 좁은 방어막을 위태롭게 두들긴다. 익명의 집단성에서 개체의 고유성과 개별성을 발견하는 것, 그것은 필요하지만 어려운 과제다. 이것이 나만의 흠결은 아니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인간의 영원한 화두다. 정답은 무엇인지 과연 정답은 존재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각자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생의 중도에서 혹은 마지막 길목에서 걸어온 삶을 반추하면서 뼈저린 후회를 하곤 한다. 오십대에 다다른 작자에게도 삶의 의미는 남다르게 다가오는 모양이다. 일찍이 가늘고 길게 이승에서 오래 살고 싶다는 속내를 밝혔지만 그래도 깨끗한 모습으로 가고자 하는 바람을 품는다.

 

생각해 보면 나도 내 인생의 가을 문턱에 서 있다. 삶에 대한 애착이야 남겠지만 그래도 있는 날까지 있다가 내 시간이 오면 나무처럼 풀처럼 미련을 버리고 아름답게 떠나고 싶은 마음은 있다. (<내가 살아보니까>에서, P.118)

 

에필로그에서 선생은 자신의 투병을 다시금 밝힌다. 벌써 세 번째 암 투병, 질기고도 독한 녀석이다. 듣는 말에 따르면 항암 치료는 암세포를 죽이는 동시에 정상세포마저도 죽인다고 한다. 수년간의 투병에서 벗어나 겨우 몸을 추스르고 정상적인 삶의 궤도를 밟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는데, 다시 내려오라는 성화가 극성이다. 가망 없을 줄 짐작하고 있으련만 한조각 희망의 위대한 힘을 믿고 새봄을 기다린다는 선생의 결의가 오히려 처연하게 다가온다.

 

아름다운 빚을 지고 떠나기 전에 여러분께 마지막으로 고백합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아름다운 빚>에서, P.67)

 

두 번째 투병을 위해 칼럼 연재를 마치면서 선생이 독자에게 보내는 작별 인사다. 이것을 선생의 사세구(辭世句)로 받아들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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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영국 명시 낭만주의 시대 2
김천봉 엮음 / 이담북스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윌리엄 워즈워스와 새뮤얼 콜리지의 시 선집이다. 동시대의 두 사람은 개인적 친교 외에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공동시집 <서정 담시집>으로도 유명한 시인들이다.

 

먼저 워즈워스는 앞서 읽은 민음사판 시 선집을 통해 대략적인 윤곽을 파악하였다. 자연에 대한 관조적 예찬, 자연을 통해 바라본 인간 내면의 모습 등. ‘차분한 기쁨이라는 표현이 그를 단적으로 상징한다. 이 책은 잘 알려진 <틴턴 사원>과 몇 편의 단시 외에 새로운 시들을 소개하고 있어 유익하다.

 

<사이먼 리><루시 그레이>와 마찬가지로 발라드에 속한다. 늙은 사냥꾼의 과거 영광과 현재의 쇠락이 현저한 대조를 이루는 가운데, 화자가 베풀어 준 친절에 사이먼 리가 표하는 감사와 찬사에 대한 시인의 시니컬한 인식이 이채롭다. <우리는 일곱>에서는 화자와 시골 소녀 간 팽팽한 줄다리기가 압권이다. 자매형제의 수를 묻는 화자에게 소녀는 거리낌 없이 죽은 아이의 숫자도 포함시킨다. 죽은 아이를 포함시키는 소녀를 화자는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더불어 생생히 살아있는 아이를 숫자에서 제외시키는 화자를 소녀는 이해하지 못한다. 소녀의 형제자매는 과연 몇 명이라고 해야 올바를까?

 

<충고와 대답><입장전환>은 쌍을 이루는 작품들인데, 시인과 친구 간의 대화 형식으로 씌어 있다. 전편에서는 자연을 바라보는 시인에게 친구가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책을 보라고 하자 시인은 오감을 통해 느끼는 진실이 더 가치 있다고 대답한다. 후편에서는 입장이 바뀌었다. 책에 파묻혀 있는 친구를 이번엔 시인이 책을 지루하고 끝없는 투쟁이라고 부르며 자연 속의 무수한 기쁨과 지혜에 눈뜨라고 권유한다.

 

자연이 이끄는 지식은 달콤하지.

우리네 참견하는 지성은

사물의 아름다운 형상을 일그러뜨려,

-우리는 해부하려고 살해하니까. (<입장전환>에서, P.39)

 

다시금 읽어보는 <틴턴 사원>은 여전히 심오하며 흥미롭다. 자연의 표피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관조와 사색을 통해 시인은 자연 속에 내재한 깊은 진리를 체득한다. 그것은 감각뿐만 아니라 정신과 영혼을 숭고한 기쁨으로 가득 채우는 고귀한 감정이다.

 

......세월이 흐른 후,

이 야생의 황홀한 경험들이 무르익어

차분한 기쁨이 될 때, 너의 마음이

온갖 사랑스런 형상을 담는 저택이 될 때,

너의 기억이 온갖 달콤한 소리와

화음들이 사는 장소가 되기를. (<틴턴 애비>에서, P.53)

 

<열매따기>에서 화자는 숲 속 깊이 아무도 손댄 흔적 없는 개암나무를 발견하곤 환희와 달콤한 기분에서 자연의 기쁨을 만끽한다. 이윽고 무자비한 열매 약탈을 감행한 후 문득 뒤돌아선 화자는 묘한 고통의 감정을 느낀다. 일상적인 제재, 유머러스한 표현이 전후의 극명한 대조와 어울려 자연의 신성을 더럽히는 인간을 나타낸다.

 

명성이 자자한 <불멸 송가>는 확실히 어렵다. 반복하여 읽어봐도 이해의 끄트머리라도 제대로 짚은 지 자신이 없을 지경이다. 작품 서두에 <무지개>의 후반부를 인용하고 있는데, 이 부분이 작품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아이가 어른이 아버지인 연유는 자연의 경이를 응시하며 자연의 경건에 복종하는 삶의 자세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시는 <무지개>를 장시화한 것이라고 섣불리 추정 가능하다.

 

1연에서 4연까지 시인은 오월의 화사한 봄을 노래하면서 경이로웠던 자연의 환영과 영광이 사라졌음을 애석해한다. 아이에서 청년을 거쳐 어른으로 자라나면서 영혼의 눈부신 빛을 일상의 빛으로 흐릿해진다고 탄식한다. 행복의 길을 스스로 외면하면서 생의 고뇌와 무게에 짓눌려 허우적대는 인간의 삶의 씁쓸한 장면이 이어서 8연까지 이어진다. 인간은 어차피 필멸의 운명을 타고난 존재일 때, 제아무리 발버둥쳐 봤자 본성을 거스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여기서 진리를 발견한다.

 

그 무엇도 빛나는 풀밭, 찬란한 꽃의

시간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 해도,

우리는 슬퍼하기보다는 차라리

뒤에 남아 있는 것들에서 힘을 찾으리. (<불멸 송가>에서, P.97)

 

9연과 10연의 자각 이후 자연은 시인에게 보다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특유의 즉각적이고 표면적 기쁨을 넘어서 이제는 자연의 내밀한 진리를 인식한 성숙한 아름다움과 기쁨으로. 이를 통해 우리는 워즈워스 시의 기본적 토대는 여일함을 깨닫게 된다.

 

콜리지의 시풍은 워즈워스와 확연히 다르다. 이는 그의 시 몇 줄만 읽어봐도 금세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워즈워스의 낭만주의는 자연, 평민, 어휘에서 전대와 차별성을 드러낸 반면 콜리지는 꿈과 환상, 괴기, 상징 등 이른바 초현실주의에 가까운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대표작 <노수부의 노래>를 본다. 장편 발라드인 이 작품은 노수부가 알바트로스를 쏘아 죽인 후 저주받아서 겪게 된 체험담을 친척 결혼식에 가는 청년을 붙잡고 들려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서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화자인 노수부의 쇳소리 나는 듯한 거친 어조다. 열대의 무풍 해역에서 타들어가는 배와 선원들, 그리고 노수부를 향한 비난과 저주의 눈초리. 유령선, 선원들의 죽음과 살아있는 시체들, 유령 선원들, 이에 대비되는 천사무리. 노수부의 이야기는 그대로 장편 환상소설로 쓰여도 족히 흥미로울 정도다. <아서 고픈 핌의 모험>이 문득 연상된다. 이 작품이 당대인들에게 주었을 충격과 반향을 생각해보면 어마어마하였으리라. 어둡고 음산한 분위기와 공포를 자아내는 사건들의 연속과 강렬하면서 생생한 묘사 등.

 

강한 바람이 배에 도달했지. 그게 포효하다

뚝 떨어졌네, 마치 돌처럼!

번개불빛과 달빛 아래서

죽은 사람들이 신음을 토했네.

 

신음하며 꿈틀대다, 다들 벌떡 일어났어,

아무 말도 없고, 눈도 움직이지 않았네.

그 죽은 자들이 일어나는 모습을

꿈에서 봤다고 해도 이상했을 게야. (<노수부의 노래>에서, P.149)

 

또 하나의 환상이 만들어 낸 작품이 바로 <쿠블라 칸>이다. 몽골 제국의 쿠빌라이 칸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것인데, 기실 시 자체보다 시에 얽힌 일화로 더 유명한 듯하다. <아이올로스의 풍금>은 시인의 아내를 등장시키고 있는데, 숲속 오두막을 둘러싼 자연 풍경의 아름다움과 신혼의 행복에 취한 시인은 수수한 류트를 신화 속 아이올로스의 풍금으로 상상한다. 만물 속에 깃든 정령들이 류트 소리에 맞추어 충만한 기쁨으로 활기를 머금고 춤추는 장면.

 

그러니 혹시 활기찬 자연의 만물이 그저

다양한 형체의 살아 있는 풍금이라면 어떨까.

동시에 각자의 영혼이자 모두의 신으로서,

형성력을 지닌 거대한, 한 지적 미풍이

그 풍금들을 휩쓸 때, 바들대며 사고로 변하면? (<아이올로스의 풍금>에서, P.201)

 

대화시 형식을 취하고 있는 <나이팅게일>은 새소리를 수용하는 태도의 차이에 대한 공방을 담고 있다. 새가 무슨 슬픔이 있길래 우울한 노래를 들려주겠는가마는 그럼에도 지저귐 속에 형언할 수 없는 감정적 요소가 있음을 시인은 주장한다. 한밤중 나이팅게일의 노랫소리에 매혹되는 한 처녀와 자다가 깨어 흐느끼는 자신의 아이에게 새소리를 들려줬더니 이내 고요히 눈물과 미소를 머금은 일화를 소개하면서.

 

워즈워스 못지않게 콜리지도 자연 애호가였던 듯하다. <지하 감옥>은 노골적으로 인간의 무자비함에 대한 실망과 혐오를 드러낸다. 인간과 반대로 자연은 부드럽고 따스하며 사랑과 아름다움을 통해 인간에게 조화의 길을 찾도록 함을 상찬하며. <이 라임나무 그늘 나의 감옥>은 부상으로 일행과 함께 산책을 나가지 못한 시인이 멋진 자연 속에서 산책을 즐기는 일행들을 상상하면서 쓴 작품이다. 찰스 램이 그의 절친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란다. 정원의 정자에서 부러움을 금치 못한 시인은 문득 라임나무 잎을 바라보면서 작고 드러나지 않은 곳에서도 자연의 솜씨를 찾아볼 수 있음에 경탄한다. 그렇듯 자연은 열린 가슴으로 다가서는 사람들에게 순수한 기쁨을 결코 저버리지 않음을.

 

자연의 경이의 절정은 아마도 자식, 특히나 갓난아기를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한밤의 서리>에서 시인은 모두가 잠든 한밤의 오두막에서 고요한 아름다움을 호젓이 즐긴다. 학창시절과 도회지에서 보낸 나날들을 회상하며 요람 속 아기가 자신과는 달리 자연의 온전한 품속에서 충만한 행복으로 영혼을 키울 수 있음을 기꺼워한다. 아비의 심정으로.

 

......그래서 넌 보고 들으리라

너의 신이 퍼뜨리는 저 영원한 언어의

사랑스런 형상들과 지적인 소리들을.

그분은 영원으로부터 만물에 깃든 그분 자신과

그분 속에 깃들어 있는 만물을 가르치는

위대한 우주의 스승! 그분이 너의 영혼을

형성시키고, 주시면서 스스로 묻게 하리라. (<한밤의 서리>에서, P.223)

 

워즈워스와 콜리지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확실히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콜리지의 작품들이 보다 흥미롭게 다가옴을 이해하게 된다. 공상과학 장르와 환상문학이 큰 힘을 발휘하는 시대, 당대를 선취한 콜리지의 환상적인 발라드는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소구한다. 반명 워즈워스의 경우 다소 상투적이고 진부한 일면이 없지는 않다. 그의 자연예찬론은 서양인의 시각에서는 참신하고 획기적이지만 우리네 동양의 전통적 시각과 유사한 면이 존재한다. 다만 그의 시가 단순한 자연 찬미가 아니고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기반성과 진실한 각성에 있다고 볼 때 여전히 유효성을 잃지 않는다고 하겠다.

 

워즈워스와 콜리지가 공동으로 발표한 <서정담시집>의 전모를 알고 싶다. 아울러 두 시인의 보다 많은 작품들을 수록한 시 선집이 시중에 나와 있다. 당분간 두 시인들의 세계에서 머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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