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블레이크 시선 ㅣ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윌리엄 블레이크 지음, 서강목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6월
평점 :
국내에 나와 있는 블레이크 시집 중에서 양적으로 가장 많은 시를 수록하고 있는 선집이다. <순수와 경험의 노래> 전편과 <천국과 지옥의 결혼>은 물론 <텔의 서>와 <올비언의 딸들의 비전>, 게다가 소론 몇 편까지 포함하고 있으니 그의 전기 시세계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하다.
이렇게 짤막짤막한 발췌본이 아닌 완역의 장점은 뭐니 뭐니 해도 비록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시인의 시상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으며 시인의 구상을 전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 작품은 자체로서 독자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독자에게 소구할 수 있지만, 성숙하고 진화하는 시인의 삶과 사상과 영감 속에서 더불어 살펴볼 때 간과하기 쉬운 유기적 면모를 발견할게 된다.
<순수와 경험의 노래> 역시 그러하다. ‘인간 영혼의 상반된 두 상태를 보임’이라고 적시한 부제는 ‘순수의 노래’와 ‘경험의 노래’에서 나타나는 사상적 대칭 구조를 통해 비로소 확연히 드러난다. ‘성목요일’, ‘굴뚝닦이’, ‘보모의 노래’는 동명의 작품이 양편에 존재하며, ‘신성한 형상’과 ‘한 신성한 형상’도 동명이라고 지칭해도 무리가 없다. 상호 간에 관련성을 지니는 시들도 여러 편이다. 전편의 ‘길 잃은 어린 소년’, ‘되찾은 어린 소년’은 후편의 ‘잃어버린 소녀’, ‘되찾은 어린 소녀’와 대응되며, 역시 후편의 ‘길 잃은 어린 소년’, ‘길 잃은 어린 소녀’와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음을 눈대중만으로도 알 수 있다. ‘갓난 기쁨’과 ‘갓난 슬픔’도 마찬가지다.
티없이 맑고 기쁨에 넘친 때 (<함박웃음 노래>에서)
그래 그것이 기쁨이야.
우리 모두 소년 소녀였을 때
우리 어린 시절에도
메아리치는 들판에서 뛰놀았지. (<메아리치는 들판>에서)
전편에서 시인은 글자 그대로 순수한 세계를 재현한다. 밝음과 기쁨과 행복이 항상 충만한 세상. 그곳에서 우리는 아이들처럼 푸른 초원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근심 걱정 없이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간혹 그림자가 생기더라도 개선과 극복에 대한 시인의 믿음은 확고하다. 우리가 선한 마음을 놓지 않고 굳건히 품고 있으면 언젠간 기쁨을 되찾을 것이라고.
톰에게 천사가 말하길 착한 아이 되면
하느님을 아버지로 가지고, 기쁨이 모자라지 않을 거야. (<굴뚝닦이>에서)
생각하면 안 되지, 그대가 한숨짓는데
그대 창조주 곁에 없으리라고.
생각하면 안 되지, 그대가 눈물 흘리는데
그대 창조주 근처에 없으리라고. (<남의 슬픔에 대해>에서)
후편에서는 낙관적 전망은 스러지고 더 이상 없다. 시인은 당대의 현실에 비관하고 절망한다. 경험은 그에게 뼈아픈 진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다중은 비탄과 고통 속에 허덕거리는 반면 극소수는 특권을 누리며 거들먹거리는 세상(<런던>에서 ‘면허받은’ 템스 강과 거리의 의미를 되새겨보자), 부모 자식 간의 관계마저 왜곡과 단절로 이끄는 비뚤어진 윤리와 종교.
그들의 태양은 어디에도 빛나지 않는다.
그들의 들판은 황량하고 척박하다.
그들의 길은 가시로 뒤덮였다.
그곳은 영원한 겨울이다. (<성목요일>에서)
아빠 엄마는 어디 있니? 말해 보렴.
둘 다 기도하러 교회에 갔지요.
......
그리고 신과 그 사제와 왕을 찬양하러 갔어요,
우리의 비참함으로 천국을 짓는 치들을. (<굴뚝닦이>에서)
젊은 창녀의 저주 소리는 갓난아기를 선천성 맹아로 만들며, 인간의 거짓과 위선은 두뇌와 마음속에 독 나무를 키우고 먹음직스런 속임수의 사과를 맺게 한다. 그리고 우리는 기뻐한다, 원수와 적의 죽음에. 이것이 블레이크가 절실하게 발견한 당대의 런던이자 현실의 모습이다.
이 책의 미덕은 양뿐만이 아니다. 블레이크 시선집 중에서 번역문이 가장 유려하여 자연스럽게 읽혀나간다. 원시의 각운은 우리말로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하는 옮긴이의 정성과 노력이 엿보인다. 반면 내게 있어 크나큰 단점은 영한 대역이 아니고 우리말 번역문만 실려 있다는 점이다. 산문도 아닌 운문에 있어 전적으로 번역문에 의지해야 한다는 점은 주저하게 만든다. 참으로 아쉽다.
처음에 실린 <모든 종교는 하나다>와 <자연종교는 없다>는 짤막한 소론으로 작가의 사상이 간명하게 드러나 있어 시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모든 종교의 원천은 진정한 인간인데, 시정신(Poetic Genius)이 진정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시정신은 곧 예언의 정신으로서 이러한 성향이 아니면 인간의 사고와 관념은 창의 없는 이성으로 제한되어 영원한 반복을 거듭할 뿐이라고 한다.
이 단계에서 <천국과 지옥의 결혼>으로 나아간다. ‘논지’의 말미에 논지의 핵심이 잘 요약되어 있다.
선이란 이성에 복종하는 수동적인 것. 악은 활력으로부터 나오는 능동적인 것.
선은 천국. 악은 지옥. (<논지>에서)
자신의 영혼으로부터 분리된 육신은 인간은 가지고 있지 않다.
활력이 유일한 생명이며 육신으로부터 나오고, 이성은 활력의 경계 혹은 외부 경계다. (<악마의 목소리>에서)
시인이 제기하는 천국과 지옥의 관념은 통상적인 의미와 전혀 다르다. 이성과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은 외관상 선이며 천국이지만 참된 의미에서는 정반대다. 시인에게 있어 지옥, 악, 악마는 인간과 세계에서 박해당하고 있는 진실한 의미에서의 천국, 선, 천사다. 그래서 시인은 기꺼이 악마가 된 천사와 절친한 친구가 되고, 악마적 의미로 성경을 읽는다.
이 작품이 <논지>와 <지옥의 목소리>에 이어 <지옥의 잠언>과 수편의 <기억할 만한 상상>으로 구성으로 이루어진 것은 지옥의 진면모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시인의 치밀한 의도를 반영하고 있다.
<텔의 서>에서 천사의 막내딸인 텔은 자신의 유한성과 필멸성에 절망한다. 그는 삶의 덧없음에 공허감을 느끼고 차라리 죽음에 대한 동경을 품는다.
죽음의 잠 편히 잘 수 있다면, 저녁 무렵 동산을 걸었던 이의
그 목소리 편안히 들을 수 있다면. (P.9)
텔은 골짜기의 백합, 작은 구름, 백합 위의 벌레와 만나고 흙덩이의 도움으로 땅속 세계를 가보게 된다. 마침내 자신의 무덤 자리에 이르러 구덩이에서 새어 나오는 비탄의 목소리를 듣고는 황급히 현실 세상으로 돌아온다.
처녀는 있던 자리로부터 비명 지르며 달아났다.
방해받지 않은 채 하(Har)의 골짜기로 되돌아갔다. (P.17)
텔은 더 이상 삶을 권태하지 않을 것이며, 죽음을 소망하지 않을 것이다. 백합, 구름, 벌레들이 누리는 삶의 안분지족과 소박한 기쁨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깨닫기를 바랄 뿐이다.
반면, <올비언의 딸들의 비전>은 다소 난해한 시편이다. <논지>와 <비전들>로 구성되었는데, 대략적인 플롯을 보면 오손은 세오토먼을 사랑하는데, 브로미언이 그녀를 겁탈하고 오손과 세오토먼을 동굴에 가둬놓는다.
올비언은 영국의 옛날 이름이라고 한다. 첫 행의 “노예 상태로”는 굵은 글꼴로 강조하고 있다. 옮긴이의 각주를 통해 주인공의 이름의 의미를 헤아려보면 아마 이런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오손은 생의 가치를 중시하고 삶의 기쁨과 즐거움을 찬양하는 존재다. 그는 노예 상태에서 흐느끼는 영국 여성들에게 위안을 주려고 애쓴다.
오손은 자신의 가치관이 신의 정의, 즉 신앙과 일치한다고 믿으며, 그래서 세오토먼을 사랑한다. 브로미언의 강압적 폭력에 유린당했지만, 종교적 동굴에서 세오토먼과 믿음으로써 난관을 헤쳐 나가고 극복할 수 있음을.
세오토먼이 사랑스러운 눈길을 내게 돌리기만 한다면
온밤을 조용히 맴돌고, 온종일 침묵할 수도 있다.
내가 어찌 더럽혀질 수 있으리오, 그대의 모습을 깨끗하게 비출 수 있는데?
......
나는 희고 깨끗해 세오토먼의 가슴 주위를 맴돈다오. (P.145~146)
그런데, 세오토먼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나약과 비탄과 절망과 수동에서 허우적대며 거짓 도덕과 위선의 함정에 빠져 오손을 배척한다.
나의 세오토먼도 이 위선적인 정숙함을 추구하는가?
이 교활하고 간교하며, 비밀스럽고, 두려움 많아 벌벌 떠는 위선자를?
그렇다면 오손은 진실로 창녀다! 삶의 모든 깨끗한 희열이
창녀다. 세오토먼은 병자의 꿈일 뿐이고,
오손은 이기적인 신성함의 간교함에 붙잡힌 노예다. (P.152)
그렇게 매일아침 오손은 탄식한다. 그러나 세오토먼은
끔찍한 그림자와 대화하며, 대양의 가장자리에 앉아있다. (P.155)
브로미언은 폭력과 편견과 악의적 전통의 체현자이며 욕망의 대변자다.
너의 부드러운 아메리카 평원들도 내 것이고, 그 북쪽도 남쪽도 내 것.
태양에 탄 거무스레한 아이들은 내 낙인이 찍혀 있고,
반항하지 않고 순종하며, 채찍질에 복종한다.
그 딸들은 공포를 경배하고, 폭력에 복종한다. (P.142)
블레이크는 <경험의 노래> 중 <길 잃은 어린 소녀>에서 자연적 사랑의 도덕적 단죄에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오손은 세속적, 도덕적 잣대를 거부하는 순수한 사랑과 기쁨의 구현자다. 그것은 이성, 종교의 편협한 가치판단을 초월하여 시인이 항상 주장한대로 삶의 활력, 즉 에너지에 연원하는 심원한 원천인 것이다.
세오토먼과 사랑의 결합으로 지복 또 지복을 맛보는 모습을.
장밋빛 아침처럼 붉고, 처음 솟은 햇살처럼 기운찬,
그의 귀한 희열을 오손은 보리라, 관대한 사랑의 하늘에 (P.154)
일어나라, 그대 번쩍이는 작은 날개들이여, 그대의 갓난 기쁨을 노래하라.
일어나 그대 지복을 마시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신성하기에! (P.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