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민음사 세계시인선 21
W.워즈워드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197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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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크와 번즈에 뒤이어 자연스레 워즈워스와 콜리지가 다가온다. 영국 낭만주의의 문을 본격적으로 열어젖힌 두 시인 중 먼저 워즈워스다. 선배들에 비교할 때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자연에 있다. 단지 짤막한 배경이 아닌 시상의 중심에 들어와서 시인의 심상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자연. 그리고 자연을 바라보는 시인의 관조적인 태도. 블레이크의 강렬한 열정, 번즈의 진솔미와 해학과는 차별되는 워즈워스만의 독특한 미감이라고 할 만한다.

 

워즈워스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예찬한다. 무심히 넘기기 쉬운 영국의 범상한 산하가 그에게는 더할나위 없이 소중한 풍경으로 다가온다. 자연의 미덕에 대한 감성을 끊임없이 자각하는 능력의 소중함, 그것이 없다면 시인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단언한다.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 설레느니,

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

다 자란 오늘에도 매한가지,

쉰 예순에도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바라노니 나의 하루하루가

자연의 믿음에 매어지고자. (<무지개>에서, P.18)

 

자연은 시인에게 자체로 그치지 않는다. 자연의 풍경이 시인의 상념에 미친 감흥을 즉물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차분한 관조와 사색의 결과로 자연은 우리에게 의미를 드리우게 된다. 워즈워스의 자연은 모두 다 이러하다.

 

무연히 홀로 생각에 잠겨

내 자리에 누우면

고독의 축복인 속눈으로

홀연 번뜩이는 수선화.

그때 내 가슴은 기쁨에 차고

수선화와 더불어 춤추노니. (<수선화>에서, P.12)

 

그런 연유로 시인은 체험 후 시간의 경과 또는 간접 경험으로도 시상을 구현하는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듯하다. <가을걷이하는 처녀>에서 간접경험을 통한 시적 영감의 발휘를 볼 수 있는데, 시인에게 직접적 자연의 생생함 보다는 자연을 통한 정서의 고조와 사념의 감흥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 <노고지리에게><뻐꾸기에게 부쳐>에서도 자연물에 의탁하여 시인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너를 찾으려

숲속과 풀밭을

얼마나 헤매였던가

너는 여전히 내가 그리는

소망이요 사랑이었으나

끝내 보이지 않았다. (<뻐꾸기에게 부쳐>에서, P.44)

 

이러한 자연 사랑은 애국 정신으로 확장된다. 애호하는 자연과 돈독한 정을 쌓은 친우들이 있는 곳, 그곳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디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낯 모르는 사람 속을>, <웨스트민스터 다리 위에서>, <다시 고토에서>와 같은 시편에서 볼 수 있는 시인의 조국 예찬은 그러나 이념적, 추상적 조국이 아닌 구체적, 자연적 조국에 대해서다.

 

내 나라 영국이여!

얼마나 그대를 사랑하는가

그때 비로소 그것을 알았노라. (<낯 모르는 사람 속을>에서, P.22)

 

세상에 이보다 아름다운 것이 또 있을까.

이렇듯 뿌듯이 장엄한 정경을

그냥 지나치는 이는 바보이리.

런던은 지금 아침의 아름다움을

의상처럼 걸치고 있구나 (<웨스트민스터 다리 위에서>, P.62)

 

반면 사랑이 깊은 만큼 이상과 부합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실망감도 클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의 열기를 목도하고 돌아온 젊은 시인의 눈에 보수적, 복고적인 영국의 현실에 대한 실망감의 토로는 당연할 것이다.

 

영국은 썩은 물이 고인 웅덩이

제단도 칼도 붓도 노변도 웅장한 대청과 방도

내면의 행복이란 유서 깊은 유산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제 잇속만 차리는 무리 (<런던 1802>에서, P.74)

 

장시 중에서 우선 <루시 그레이>가 흥미롭다. 명백히 발라드로 분류될 수 있는데, 일련의 루시 시편들과의 연관성이 궁금하다. <결의와 독립>이라는 이지적인 표제의 시는 폭우가 그친 후의 생기 넘치고 화창한 자연으로 개시한다. 황야의 나그네인 시인, 그는 자연의 기운에 힘입어 잠시 즐거움에 사로잡히지만 이내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시인이 두려움에 빠지는 연유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불안정한 앞날에 대한 시인 자신의 심려가 반영된 것은 분명하다.

 

공포와 공상이 마구 육박해 왔다.

흐릿한 슬픔 아지도 못하였고

이름 붙일 수도 없는 마구잡이 망상이. (P.80)

 

그 전의 생각이 되돌아왔다.

섬뜩한 공포, 실현되기 어려운 희망,

추위, 고통, 노동, 모든 육체의 병,

그리고 비참하게 죽은 위대한 시인들. (P.94)

 

하지만 시인은 거머리잡이 노인을 보고 자성한다. 그리고 새로이 결의를 다진다.

 

그렇듯 노쇠한 노인에게 그처럼 강단 있는 정신이 있음을 보고

나는 자신을 비웃고 싶은 지경이었다. (P.98)

 

<틴터언 사원>은 워즈워스의 장시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일 것이다. <루시 그레이><결의와 독립>은 나름대로 가시적인 줄거리를 가지고 있어 시상의 흐름을 좇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이 작품은 5년만의 재회하는 경치의 아름다움을 되새기면서 세월의 추이가 시인에게 사상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경치의 외면적 아름다움만을 인식하던 과거에서 벗어나 이제는 좀 더 깊이 사물의 본질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음을 드러낸다. 시인이 마음의 풍경’(P.108)을 인식하는 내적 단계는 작품 속에서 경치 정감 평안 기쁨 숭고 정화 사랑 사물의 얼(P.104~106)로 연결된다.

 

일변 조화의 힘과

기쁨의 크나큰 힘으로

안온해진 속눈으로

우리는 사물의 얼을 본다. (P.106)

 

나는 배웠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큰 힘을 지닌

고요하고 슬픈 인간성의 음악에

귀기울이며

자연을 바라보는 법을

그리고 나는

숭고한 생각의 기쁨으로

내 마음을 출렁이게 하는

한 존재를 느끼게 되었다. (P.112)

 

이렇듯 자연은

우리의 마음을 도야해주고

고요와 아름다움으로 감동을 주고

드높은 생각의 먹이를 준다. (P.118)

 

이러한 야성의 환희가 무르익어

차분한 기쁨이 되고,

그대의 마음이 온갖 아름다운

형상의 대궐이 되고 (P.120)

 

워즈워스 시는 단번에 독자의 눈과 마음을 잡아채지 못한다. 처음 읽어서는 그 온건한 사상과 심심한 표현에 납득이 안 가고 지루함마저 느낄 수 있다. 두세 번 되풀이 읽고 곰곰이 마음 속으로 되씹어볼 때 아 이것이 그의 시의 묘미구나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문학사적으로 볼 때 워즈워스의 가치는 앞선 귀족 중심의 시대와 달리 일반 사람들이 실제로 쓰는 말로 시를 쓰겠다고 표명한데 있다고 한다. 계급적 차별의 타파와 시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정의, 이것은 청년 시절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적 영향임을 부인할 수 없다. 중년 이후의 그의 작품들이 비판의 대상마저 되지 못하는 범작에 그친 것은 스스로 삶의 테두리를 한계지어 넘쳐흘러야 할 강력한 감정이 고갈된 연유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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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단 한번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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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장영희 교수의 첫 번째 에세이집이다. 2000년에 1쇄를 출간한 지 불과 5년만에 28쇄를 펴냈으니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책이다. 일반적인 순서와는 달리 영미시 가이드, 문학작품 가이드에서 출발하여 결국 에세이로 이어지고 말았으니 만시지탄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늦게나마 저자의 존재를 알아차린 행운에 기뻐해야 할지.

 

당시 사십대 초중반의 저자는 서문에서 꿀벌의 무지라고 자칭한다. “머리 속에 있는 말보다는 마음속에 있는 말을 고르지도, 다듬지도 않고 생긴 그대로 투박한 글로 옮긴다. 그럼에도 이만한 필력을 과시하는 걸 보면 확실히 문재는 노력 못지않게 천부적인 듯하다. 허구의 문학 장르와는 달리 에세이는 본질상 작자 자신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밖에 없다. 한겹의 가면도 허용하지 않고, 독자 앞에 나신으로 서야 하는 용기를 감내하기는 쉽지 않다. 독자는 에세이를 읽으면서 작자를 인간적으로 친밀하게 여기게 된다. 이렇듯 에세이는 철저히 개인적이지만 신변잡기의 단순한 나열을 뛰어넘으려면 그 안에 아름다움을 담아야 한다. 최고의 아름다움은 진실이다. 그럴듯한 문학적 수사가 아니라 작자의 체험과 사고와 감정이 한데 결부될 때 독자의 공감을 얻게 된다.

 

사랑해요.’ ,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그러나 또 얼마나 하기 어려운 말인가. 날 사랑해 주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면서도 나는 이제껏 한 번도 그 누구에겐가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입 밖에 내 본 적이 없다. (<사랑합니다>에서, P.57)

 

나는 아직도 내가 버젓이 잘못해 놓고도 선뜻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잘하지 못한다. 아버지가 생전에 행동으로 가르쳐 주신 겸손함의 본보기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안합니다>에서, P.204)

 

개인 장영희의 삶은 스스로도 토로하듯이 단순하고 제한된 반경에 머물러 있다. 물론 범상한 삶은 아니지만. 영문학계의 원로를 아버지로 하고, 소아마비로 행동에 불편을 겪으면서 해외유학을 통해 국내 대학의 교수로 금의환향.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현재의 삶,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 등등. 따라서 독자는 역으로 이 책을 통해 인간 장영희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는 신체부자유로 인한 좌절감,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의 상존, 몸이 불편한 자식을 돌보고 키워내기 위한 부모님의 헌신과 희생 등과 같은 개인사와 관련된 일화와 상념이 다수를 차지한다. 그 기억이 결코 기쁘고 즐거울 리 없지만 과거를 돌아보는 작자의 심경은 부모를 회상하는 대목을 제외하면 의외로 담담한 편이다.

 

글쓰기의 또 다른 줄기는 작자의 현재의 삶과 관련된 부분이다. 즉 대학 교수로서 학생들과 수업 중에 발생하게 된 일화 또는 학생 개인과 시사에 관한 이러저러한 생각의 추이 등 직업과 생활에 연관되는 소재다. 여기서 작자는 솔직한 심경을 토로한다. 세상사가 뭐 대단하길래 그렇게 아웅다웅하며 서로 상처주고 미워하며 살아간다는 말인가. 사람으로 태어나서 서로를 사랑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에도 부족한 삶인데 말이다.

 

사람 사는 게 엎어치나 뒤치나 마찬가지고, ‘’ ‘’ ‘’ ‘도 따지고 보면 다 그저 받침 하나, 점 하나 차이일 뿐이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악착같이 사이에 깊은 골을 파 놓고 그렇게 힘겹게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나와 남>에서, P.73)

 

줄 이유를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는데도, 거의 조건 반사적으로 못 줄 이유를 찾은 것은 아마도 이제껏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다져 온 나의 마음가짐 탓일 것이다. (<못 줄 이유>에서, P.122)

 

그가 꿈꾸고 바라는 삶은 소박하다. 서로에게 따뜻한 마음을 주고받고 욕심부리지 않으며 안분지족을 하는 삶. 작자의 표현에 따르면 가늘고 긴 삶. 천국을 꿈꾸지 않고 현재에 만족하는 삶. 소박하지만 우리들에게 결코 쉬운 삶의 방식은 아니다.

 

하지만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하기 짝이 없는 나의 삶에 대해 썩 만족하고 있지는 않아도 그렇다고 그에 대해 심각하게 고뇌하지도 않는다. 그냥 하루하루 어영부영 살아갈 뿐이다. (<보통이 최고다>에서, P.162)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축복받은 시간이고, 천국은 다름아닌 바로 여기라고.... (<천국 유감>에서, P.49)

 

그렇기에 아래의 말은 학생의 발언이지만 작자 자신의 견해를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웃을 오로지 넘어뜨려야 할 경쟁자로 여기지 말고 더불어 살아가야 할 상호 의지해야 할 존재로 여기는 가치관.

 

그렇게 남을 돕고 함께 나눌 줄 모르는 나라라면, 그런데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눈먼 소년이 어떻게 돕는가?>에서, P.104)

 

그래서 <걔 바보지요?>에서 인간의 잔인함과 냉혹한 비열함에 진저리치는 작자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것은 마음의 성역을 완전히 무너뜨린 행위이므로. 그럼에도 기본적으로 작자는 너그럽다. <하느님의 필적>에서 분개마저도 포용하는 그의 너그러움은 아름다우면서도 역설적으로 비인간적인 느낌마저 자아낸다면 지나칠까?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어쩌면 하느님의 필적은 우리 육체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잉크로 씌어져서, 영혼의 아름다움을 찾는 이만 읽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하느님의 필적>에서, P.209)

 

이렇게 수록된 각 이야기들 중에서 제법 기억에 남았던 편들을 두서없이 몇 가지 되새겨 보았다. 때로는 어쭙잖은 글을 끄적거리기 보다는 인상깊은 대목을 발췌하여 구슬을 꿰듯 열거만 하더라도 적확한 감흥을 드러낼 수 있다고 본다.

 

오늘날의 독자라면 이후 작자의 삶의 행로를 대개 알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작자는 무심한데, 독자는 결코 허투루 문장 하나조차도 넘기지 못한다.

 

우리들 각자가 저자인 삶의 책에는 절망과 좌절, 고뇌로 가득 찬 페이지가 있지만 분명히 기쁨과 행복, 그리고 가슴 설레는 꿈이 담긴 페이지도 있을 것이다. (<어느 가작 인생의 봄>에서, P.143)

 

이 세상에서의 고통, 고뇌, 역경이 아무리 클지라도 모두 죽음과 함께 사라지지만, 사랑은 사라지지 않고 이 세상 사람들과 저 세상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 결국 이 세상과 저 세상은 사랑이라는 커다란 고리로 연결되어 있나 보다. (<그러나 사랑은 남는 것>에서,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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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내사랑 - 한권의시 63
ROBERT BURNS / 태학당 / 199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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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앞서 로버트 번즈의 시 몇 편을 읽었는데, 이대로 떠나기에는 아쉬운 생각이 들어 그의 시 선집을 다시 찾아 읽는다. 이십 년 전에 초판이 인쇄되었고 진작 절판되어 시중에서 구하기는 용이하지 않다. 모두 25편의 주요 시작들이 영한 대역으로 실려 있어 그의 시세계를 조감하기에 적당하다.

 

번즈 시의 특징을 몇 가지로 추려보게 된다. 우선 주제 면에서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라면 당연히 사랑을 노래하는 게 아닌가하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정형화되고 관념화된 사랑이 아닌 개인적이고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사랑이 그에게 존재한다. 게다가 동시대의 블레이크와 워즈워스 등을 비교해 보면 그의 사랑이 갖는 의미가 보다 명료해진다. 그에게 블레이크 류의 고고한 이념과 거대담론은 관심 밖이다. 오직 피와 땀이 흐르는 구체적이며 개별적인 생명이 관심사다. 남녀 간의 사랑은 주로 남성의 애원하는 어조를 통해, 때로는 여성 화자의 호소를 통해 독자에게 절절히 다가온다.

 

바다가 모두 다 마를 때까지

바위가 햇빛에 녹을 때까지

내 몸에 목숨이 남아 있는 한

그대를 언제나 사랑하리라 (<오 내 사랑>에서, P.21)

 

또한 그의 시는 자연스레 노래로 연결된다. 두드러지는 반복구의 사용은 시에 리듬감을 부여하고 음악적 연상을 일으킨다. 유명한 <올드 랭 사인>이 대표적인 민요로 인식되지만 다른 작품들도 낭송해 보면 노래로 불리기에 용이한 구성으로 되어 있다. <찬 바람이 그대에게 불어온다면>, <, 문을 열어주세요>, <던컨 그레이> 등의 여러 시가 그러하다.

 

던컨 그레이가 사랑을 구하러 이곳에 왔었네,

하하, 그 구애라니 가관이었지.

모두 취해 흥겨웠던 성탄절 밤이었지.

하하, 그 구애라니 가관이었지.

매기는 콧대를 한껏 높이 쳐들고

곁눈으로 비껴보며 갖은 오만 다 떨면서

불쌍한 던컨을 물러서게 하였지,

하하, 그 구애라니 가관이었지. (<던컨 그레이>에서, P.104)

 

번즈의 시에서 향토색을 제외한다면 앙꼬 없는 찐빵 격이 되리라. 그가 최초에 명성을 얻은 시집이 스코틀랜드 방언을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시 곳곳에서 드러나는 스코틀랜드의 지명과 정서 등은 그를 스코틀랜드의 국민시인으로 평가받게 하고 있다. 다만 이 점이 오히려 오늘날에는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는데, 일단 방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시의 묘미를 올바로 감상하기 어렵게 되어 스코틀랜드 이외의 영국인이나 타국인의 경우 접근이 녹녹치 않다. 이른바 영미시가 대중에게 비교적 친숙한 이유는 그래도 원시를 이해하기 쉽다는 장점인데 어휘를 읽기도 난감하고 뜻도 생경하면 아무래도 가까이하기 어렵다. 근년에 들어 번즈가 상대적으로 잊히는 연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번즈는 평민 내지 민중 지향적 시인이다. 그의 시에서 비속어가 심심치 않게 사용되는 것은 방언을 사용하는 당대 민중의 정서를 가감 없이 드러내려는 시인의 의도라 하겠다.

 

앙화가 있을지어다, 잔인한 영주여

당신과 가족을 해한 일이 없는

수 많은 가슴을 아프게 만든

당신은 진정 가혹한 사람이오 (<인베네스의 사랑스러운 아가씨>에서, P.15)

 

비단 이 작품뿐만이 아니다. <경건한 윌리의 기도><윌리가 보리술 한 통 담갔다>의 거리낌 없이 솔직하며 해학적인 윌리의 어조, <귀리 이랑>에서 귀리 이랑에서 여인과 함께 했던 사랑의 추억을 회상하는 화자, 재물을 추구하는 이들이야말로 속된 사람들이라며 아가씨들을 사랑하며 함께 지낸 때가 최고임을 당당히 표현하는 <갈대는 푸르게 자라네>의 화자 등 사회적 지위, 명예와 재화에 무관하고 초연한 민중들의 사고가 짙게 배어있다. 이는 곧바로 해학미를 가져오기도 하는데, 윌리를 다룬 두 편의 시가 대표적이며, <던컨 그레이>와 앞서 읽은 <이에게> 또한 마찬가지다.

 

또 하나의 특색은 여성 화자의 등장이다. 아직 여성이 제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18세기 말, 시인은 대부분 남성들이었고 그들의 어조는 남성 또는 남자 어린이가 주류인데 반해 번즈는 이색적으로 몇 편의 시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이는 그가 개인적이고 민중적인 솔직함을 보여주는 증표이기도 하다.

 

오 휘파람을 불어요, 그럼 내가 나올께요;

오 휘파람을 불어요, 그럼 내가 나올께요;

아빠랑 엄마랑 모두 펄펄 뛰어도,

오 휘파람을 불어요, 그럼 내 나올께요. (<휘파람을 불어요>에서, P.27)

 

이제 겨우 영시 몇 편 읽은데 지나지 않지만, 이제껏 읽은 시인들 중에서 로버트 번즈의 작품이 가장 자연스럽고 솔직하게 감정에 와 닿는다. 그는 젠 척하지 않고 형이상학적 난해함으로 독자를 골치 아프게 하지도 않으며, 일상에 무언가 심오한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이런 그의 시가 좀 더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

 

다만, 이 책에 한해서라면 산재한 오타와 편집오류, 그리고 명백한 오역 등으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예를 들어 유명한 <올드 랭 사인>의 경우 원시는 여섯 개의 연인데, 역문은 일곱 개의 연으로 번역하였다. 이상해서 보니 원시의 세 번째 연과 네 번째 연을 짜깁기해서 별도의 연으로 추가 번역하였으니 이는 창작이라고 불릴 경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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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크 시선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윌리엄 블레이크 지음, 서강목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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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나와 있는 블레이크 시집 중에서 양적으로 가장 많은 시를 수록하고 있는 선집이다. <순수와 경험의 노래> 전편과 <천국과 지옥의 결혼>은 물론 <텔의 서><올비언의 딸들의 비전>, 게다가 소론 몇 편까지 포함하고 있으니 그의 전기 시세계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하다.

 

이렇게 짤막짤막한 발췌본이 아닌 완역의 장점은 뭐니 뭐니 해도 비록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시인의 시상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으며 시인의 구상을 전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 작품은 자체로서 독자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독자에게 소구할 수 있지만, 성숙하고 진화하는 시인의 삶과 사상과 영감 속에서 더불어 살펴볼 때 간과하기 쉬운 유기적 면모를 발견할게 된다.

 

<순수와 경험의 노래> 역시 그러하다. ‘인간 영혼의 상반된 두 상태를 보임이라고 적시한 부제는 순수의 노래경험의 노래에서 나타나는 사상적 대칭 구조를 통해 비로소 확연히 드러난다. ‘성목요일’, ‘굴뚝닦이’, ‘보모의 노래는 동명의 작품이 양편에 존재하며, ‘신성한 형상한 신성한 형상도 동명이라고 지칭해도 무리가 없다. 상호 간에 관련성을 지니는 시들도 여러 편이다. 전편의 길 잃은 어린 소년’, ‘되찾은 어린 소년은 후편의 잃어버린 소녀’, ‘되찾은 어린 소녀와 대응되며, 역시 후편의 길 잃은 어린 소년’, ‘길 잃은 어린 소녀와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음을 눈대중만으로도 알 수 있다. ‘갓난 기쁨갓난 슬픔도 마찬가지다.

 

티없이 맑고 기쁨에 넘친 때 (<함박웃음 노래>에서)

 

그래 그것이 기쁨이야.

우리 모두 소년 소녀였을 때

우리 어린 시절에도

메아리치는 들판에서 뛰놀았지. (<메아리치는 들판>에서)

 

전편에서 시인은 글자 그대로 순수한 세계를 재현한다. 밝음과 기쁨과 행복이 항상 충만한 세상. 그곳에서 우리는 아이들처럼 푸른 초원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근심 걱정 없이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간혹 그림자가 생기더라도 개선과 극복에 대한 시인의 믿음은 확고하다. 우리가 선한 마음을 놓지 않고 굳건히 품고 있으면 언젠간 기쁨을 되찾을 것이라고.

 

톰에게 천사가 말하길 착한 아이 되면

하느님을 아버지로 가지고, 기쁨이 모자라지 않을 거야. (<굴뚝닦이>에서)

 

생각하면 안 되지, 그대가 한숨짓는데

그대 창조주 곁에 없으리라고.

생각하면 안 되지, 그대가 눈물 흘리는데

그대 창조주 근처에 없으리라고. (<남의 슬픔에 대해>에서)

 

후편에서는 낙관적 전망은 스러지고 더 이상 없다. 시인은 당대의 현실에 비관하고 절망한다. 경험은 그에게 뼈아픈 진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다중은 비탄과 고통 속에 허덕거리는 반면 극소수는 특권을 누리며 거들먹거리는 세상(<런던>에서 면허받은템스 강과 거리의 의미를 되새겨보자), 부모 자식 간의 관계마저 왜곡과 단절로 이끄는 비뚤어진 윤리와 종교.

 

그들의 태양은 어디에도 빛나지 않는다.

그들의 들판은 황량하고 척박하다.

그들의 길은 가시로 뒤덮였다.

그곳은 영원한 겨울이다. (<성목요일>에서)

 

아빠 엄마는 어디 있니? 말해 보렴.

둘 다 기도하러 교회에 갔지요.

......

그리고 신과 그 사제와 왕을 찬양하러 갔어요,

우리의 비참함으로 천국을 짓는 치들을. (<굴뚝닦이>에서)

 

젊은 창녀의 저주 소리는 갓난아기를 선천성 맹아로 만들며, 인간의 거짓과 위선은 두뇌와 마음속에 독 나무를 키우고 먹음직스런 속임수의 사과를 맺게 한다. 그리고 우리는 기뻐한다, 원수와 적의 죽음에. 이것이 블레이크가 절실하게 발견한 당대의 런던이자 현실의 모습이다.

 

이 책의 미덕은 양뿐만이 아니다. 블레이크 시선집 중에서 번역문이 가장 유려하여 자연스럽게 읽혀나간다. 원시의 각운은 우리말로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하는 옮긴이의 정성과 노력이 엿보인다. 반면 내게 있어 크나큰 단점은 영한 대역이 아니고 우리말 번역문만 실려 있다는 점이다. 산문도 아닌 운문에 있어 전적으로 번역문에 의지해야 한다는 점은 주저하게 만든다. 참으로 아쉽다.

 

처음에 실린 <모든 종교는 하나다><자연종교는 없다>는 짤막한 소론으로 작가의 사상이 간명하게 드러나 있어 시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모든 종교의 원천은 진정한 인간인데, 시정신(Poetic Genius)이 진정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시정신은 곧 예언의 정신으로서 이러한 성향이 아니면 인간의 사고와 관념은 창의 없는 이성으로 제한되어 영원한 반복을 거듭할 뿐이라고 한다.

 

이 단계에서 <천국과 지옥의 결혼>으로 나아간다. ‘논지의 말미에 논지의 핵심이 잘 요약되어 있다.

 

선이란 이성에 복종하는 수동적인 것. 악은 활력으로부터 나오는 능동적인 것.

선은 천국. 악은 지옥. (<논지>에서)

 

자신의 영혼으로부터 분리된 육신은 인간은 가지고 있지 않다.

활력이 유일한 생명이며 육신으로부터 나오고, 이성은 활력의 경계 혹은 외부 경계다. (<악마의 목소리>에서)

 

시인이 제기하는 천국과 지옥의 관념은 통상적인 의미와 전혀 다르다. 이성과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은 외관상 선이며 천국이지만 참된 의미에서는 정반대다. 시인에게 있어 지옥, , 악마는 인간과 세계에서 박해당하고 있는 진실한 의미에서의 천국, , 천사다. 그래서 시인은 기꺼이 악마가 된 천사와 절친한 친구가 되고, 악마적 의미로 성경을 읽는다.

 

이 작품이 <논지><지옥의 목소리>에 이어 <지옥의 잠언>과 수편의 <기억할 만한 상상>으로 구성으로 이루어진 것은 지옥의 진면모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시인의 치밀한 의도를 반영하고 있다.

 

<텔의 서>에서 천사의 막내딸인 텔은 자신의 유한성과 필멸성에 절망한다. 그는 삶의 덧없음에 공허감을 느끼고 차라리 죽음에 대한 동경을 품는다.

 

죽음의 잠 편히 잘 수 있다면, 저녁 무렵 동산을 걸었던 이의

그 목소리 편안히 들을 수 있다면. (P.9)

 

텔은 골짜기의 백합, 작은 구름, 백합 위의 벌레와 만나고 흙덩이의 도움으로 땅속 세계를 가보게 된다. 마침내 자신의 무덤 자리에 이르러 구덩이에서 새어 나오는 비탄의 목소리를 듣고는 황급히 현실 세상으로 돌아온다.

 

처녀는 있던 자리로부터 비명 지르며 달아났다.

방해받지 않은 채 하(Har)의 골짜기로 되돌아갔다. (P.17)

 

텔은 더 이상 삶을 권태하지 않을 것이며, 죽음을 소망하지 않을 것이다. 백합, 구름, 벌레들이 누리는 삶의 안분지족과 소박한 기쁨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깨닫기를 바랄 뿐이다.

 

반면, <올비언의 딸들의 비전>은 다소 난해한 시편이다. <논지><비전들>로 구성되었는데, 대략적인 플롯을 보면 오손은 세오토먼을 사랑하는데, 브로미언이 그녀를 겁탈하고 오손과 세오토먼을 동굴에 가둬놓는다.

 

올비언은 영국의 옛날 이름이라고 한다. 첫 행의 노예 상태로는 굵은 글꼴로 강조하고 있다. 옮긴이의 각주를 통해 주인공의 이름의 의미를 헤아려보면 아마 이런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오손은 생의 가치를 중시하고 삶의 기쁨과 즐거움을 찬양하는 존재다. 그는 노예 상태에서 흐느끼는 영국 여성들에게 위안을 주려고 애쓴다.

 

오손은 자신의 가치관이 신의 정의, 즉 신앙과 일치한다고 믿으며, 그래서 세오토먼을 사랑한다. 브로미언의 강압적 폭력에 유린당했지만, 종교적 동굴에서 세오토먼과 믿음으로써 난관을 헤쳐 나가고 극복할 수 있음을.

 

세오토먼이 사랑스러운 눈길을 내게 돌리기만 한다면

온밤을 조용히 맴돌고, 온종일 침묵할 수도 있다.

내가 어찌 더럽혀질 수 있으리오, 그대의 모습을 깨끗하게 비출 수 있는데?

......

나는 희고 깨끗해 세오토먼의 가슴 주위를 맴돈다오. (P.145~146)

 

그런데, 세오토먼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나약과 비탄과 절망과 수동에서 허우적대며 거짓 도덕과 위선의 함정에 빠져 오손을 배척한다.

 

나의 세오토먼도 이 위선적인 정숙함을 추구하는가?

이 교활하고 간교하며, 비밀스럽고, 두려움 많아 벌벌 떠는 위선자를?

그렇다면 오손은 진실로 창녀다! 삶의 모든 깨끗한 희열이

창녀다. 세오토먼은 병자의 꿈일 뿐이고,

오손은 이기적인 신성함의 간교함에 붙잡힌 노예다. (P.152)

 

그렇게 매일아침 오손은 탄식한다. 그러나 세오토먼은

끔찍한 그림자와 대화하며, 대양의 가장자리에 앉아있다. (P.155)

 

브로미언은 폭력과 편견과 악의적 전통의 체현자이며 욕망의 대변자다.

 

너의 부드러운 아메리카 평원들도 내 것이고, 그 북쪽도 남쪽도 내 것.

태양에 탄 거무스레한 아이들은 내 낙인이 찍혀 있고,

반항하지 않고 순종하며, 채찍질에 복종한다.

그 딸들은 공포를 경배하고, 폭력에 복종한다. (P.142)

 

블레이크는 <경험의 노래> <길 잃은 어린 소녀>에서 자연적 사랑의 도덕적 단죄에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오손은 세속적, 도덕적 잣대를 거부하는 순수한 사랑과 기쁨의 구현자다. 그것은 이성, 종교의 편협한 가치판단을 초월하여 시인이 항상 주장한대로 삶의 활력, 즉 에너지에 연원하는 심원한 원천인 것이다.

 

세오토먼과 사랑의 결합으로 지복 또 지복을 맛보는 모습을.

장밋빛 아침처럼 붉고, 처음 솟은 햇살처럼 기운찬,

그의 귀한 희열을 오손은 보리라, 관대한 사랑의 하늘에 (P.154)

 

일어나라, 그대 번쩍이는 작은 날개들이여, 그대의 갓난 기쁨을 노래하라.

일어나 그대 지복을 마시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신성하기에!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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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영국 명시 낭만주의 시대 1
김천봉 엮음 / 이담북스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장영희 교수의 영미시 소개글을 읽고 난 후 그동안 방치했던 영미시에 관심을 기울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덥석 골라든 책이 이것이었는데, 블레이크와 번즈를 둘 다 소개하고 있는 점이 크나큰 미덕이다. 하지만 블레이크의 시들을 일독한 후 잠시 덮어두었는데 무슨 내용인지 눈과 귀로는 보고 들리지만 머리에 와 닿지 않아서이다. 하릴없이 다시 민음사 번역본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민음사 책과 이 책, 이어서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 나온 번역본을 연달아 읽다 보니 그래도 블레이크의 시세계에 대한 어렴풋한 이해의 느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순수의 노래>의 첫 편, <서시>에서 시인은 행복한 노래들’(happy songs)을 적었다고 밝힌다. 과연 이 시편들을 관통하는 정서는 행복과 기쁨, 즐거움이다. <메아리치는 녹색 들판>에서 노인들은 아이들이 녹색 들판에서 뛰노는 모습을 보며 자신들도 어린 시절에 저런 기쁨들 있었다고 술회한다.

 

내가 까만 구름, 그가 흰 구름에서 벗어나

신의 텐트 에우고 양처럼 함께 기뻐하는 날, (<꼬마 흑인소년>에서)

 

순수의 세계에서는 피부색에 따른 인종차별도 사라진다. 18세기 말이라는 연대를 상기해 보면 블레이크의 선구적 휴머니즘에 놀라게 된다. 그의 인도주의적 사고는 소년 노동에 대한 날선 비판을 통해 확연히 드러난다. 즐겁고 행복해야 할 아이들의 이상과 그렇지 못한 현실의 대비. 부모가 팔아버린 어린 아이, 까만 관 속에 갇혀 있는 수천의 굴뚝청소부 아이들. 그들의 현실은 비록 암울하지만 꿈속에서나마 천사들의 열쇠로 녹색 들판을 깔깔대며 뛰어다닐 것이다(<굴뚝청소부>). 그곳은 사자의 붉은 눈/이내 금빛 눈물 흘러넘치고”(<>) 갈등과 대립이 소멸되는 영원한 기쁨의 세상이다.

 

<성 목요일>이라는 동명의 작품이 <순수의 노래><경험의 노래>에 각각 실려 있다. 이 두 작품의 정서를 통해 시인의 인식이 변모하는 모습을 알 수 있다. 전자에서는 자선학교 아이들의 시가행진과 성당 장면을 밝고 씩씩하게 묘사하고, 아이들에게 지속적인 동정심을 간직하도로 후원자들에게 당부하는 어조다. 반면 후자에서는 이곳이 가난의 땅임을 외치며 가시투성이 길, 영원한 겨울만이 존재하는 황폐한 곳이라고 선언한다. 시인이 바라본 런던은 수년 사이에 극도로 절망적인 곳으로 타락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시인 자신의 경험과 체험을 통해 깨닫게 된 진정한 현실이라고 하겠다. 순수한 행복과 녹색 들판, 평화로움은 더 이상 현실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은 어둠과 왜곡과 타락, 한탄과 저주가 난무하는 참혹한 고통의 땅이다. 사랑조차도 검고 은밀한 사랑”(<병든 장미>)으로 변질되었다. 순수한 감정의 교환은 사라지고 미소와 모호한 거짓 간계로 독 사과를 키우고 적을 속여 쓰러뜨릴 때 기뻐하는 게 자신인 동시에 런던이며, 교회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책의 장점은 <천국과 지옥의 결혼>을 온전히 실었다는 데 있다. 민음사 판에는 부분적으로만 수록하여 전반적 면모를 조감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개별적으로도 흥미롭지만 역시 전체적으로 이해할 때 더더욱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된다. 다만 그다지 쉽지 않은 시작들인데다가 번역문이 썩 매끄러운 편이 아니라서 이해가 쉽지는 않다. 솔직히 말해 지식을만드는지식 판이 훨씬 자연스럽고 이해가 용이하다.

 

서시 격인 <요지>는 악마에 의해 의인이 불모의 땅으로 추방되었음을 알려주는데, 민음사 판에는 생략된 끝의 산문 부분이 이후 작품 이해를 도와준다.

 

선은 이성에 복종하는 수동적인 것들이다. 악은 에너지에서 솟구치는 능동적인 것들이다.

선은 천국. 악은 지옥 (<요지>에서)

 

인간의 육체와 영혼은 구분되지 않으며, 에너지는 유일한 생명이자 영원한 기쁨이라는 <악마의 목소리>는 기실 시인의 은밀한 신념일 것이다. 이어지는 <지옥의 격언들>은 자체로서도 흥미진진하지만 마지막 산문 대목이 역시 인상적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모든 신이 인간의 가슴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기에 이르렀다. (<지옥의 격언들>에서)

 

이어지는 네 편의 <기억할 만한 환상>은 시인의 시적 환상이 종교적 영감과 만나 이룩한 극적인 대목이다. 첫 번째 편은 예언자 이사야의 입을 빌려서 시인의 환상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반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상상력의 시대에는 확고한 신념이 산을 움직였다고 하면서.

 

<자유의 노래>에 이어 <합창>으로 끝을 맺고 있는데, <요지>에서 <합창>까지 흐름이 언뜻 산만하고 무질서하게 보이지만 시인의 어조와 주장을 살펴보면 긴밀한 내적 흐름이 팽팽하게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천국과 지옥의 결혼>은 이처럼 전체적 감상을 통해 진면목을 더 잘 알게 된다.

 

윌리엄 블레이크와 달리 로버트 번즈는 개인적 범주와, 서정적 정취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간간이 엿보이는 해학적 기질은 슬며시 웃음마저 드리우게 한다. 번즈의 특징인 스코틀랜드 방언은 여기에 토속성과 향토미를 더해준다. 다만 우리 같은 타국 독자들은 발음조차 어려운 방언 어휘들이 오히려 낭독에 지장을 줄 따름이니 안타까울 뿐이다.

 

<생쥐에게><이에게>를 보듯이 번즈의 시세계는 시골 평민들의 일상을 주 무대로 삼고 있으며 어휘도 가식 없이 소박하다. 전자에서 시인은 생쥐의 보금자리를 갈아엎은 미안함과 동정심을 실컷 드러낸 후 일변하여 그나마 생쥐의 삶이 낫다고 하며 앞으로도 뒤로도 막막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처지를 절망한다. 후자의 경우 예쁜 숙녀의 모자에 달라붙은 뻔뻔한 이를 온갖 표현으로 욕한 후 슬며시 우리 자신에게도 교만이 묻어 있지는 않는지 자성한다.

 

그래도 넌 축복받았지, 나에 비하면!

너를 괴롭히는 것은 현재뿐이니:

허나 아아! 나는 뒤로 눈 돌려도

황량한 전망!

앞으로도, 보이는 건 없고

막연한 두려움뿐! (<생쥐에게>에서)

 

부디 신께서 남들이 우리를 보듯

우리 자신을 살피는 재능을 내려주시길!

그래서 많은 실수 어리석은 생각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시기를:

우리네 옷차림과 걸음걸이, 신앙심에도

교만이 묻어 있기 십상이니! (<이에게>에서)

 

<경건한 윌리의 기도>는 더욱 가관이다. 신에게 바치는 기도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신의 경건함과 순수함을 강조하면서 그럼에도 육욕에 괴로워하는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오만해질까봐 의도하신 형벌이라면 기꺼이 달게 감내하겠다며... 그리고 자신에게 피해를 끼친 인물들에 대해서는 용서하지 말고 심판을 내려달라고 경건하게 마무리한다. 기도치고는 어처구니없지만 재기와 해학이 넘치는 말재주엔 흠뻑 빠지게 된다.

 

혹시 당신께서 이 육신의 고통으로

당신의 종을 저녁아침으로 괴롭히는 건

제가 너무 많은 선물을 받은 나머지

교만하고 오만해질까 봐 그러시는지요

그렇다면 당신이 든 손 거두실 때까지

달게 벌을 받겠나이다. (<경건한 윌리의 기도>에서)

 

<고운 애프턴><이별의 키스>, <다정한 입맞춤>, <휘파람을 부세요>의 순수한 애정과 서정, <내게 문을 열어주오, ><붉고, 붉은 장미>의 열렬한 사랑도 인상적이다. 번즈의 시는 블레이크와는 뚜렷이 구분되는 독자적인 시세계를 지니고 있음을 몇 편을 통해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후기 블레이크와 같은 난해하고 심오하며 착란과도 같은 환상은 없지만, 보통 사람들의 정서에 공감하는 솔직함과 순수함이 요절한 시인답게 그에게 자연스레 깃들어 있다.

 

내 손을 잡게, 나의 충실한 동무,

그리고 자네 손 나에게 주게.

우리 같이 벌컥벌컥 들이키세,

옛날을 위하여. (<옛날>에서)

 

유명한 <올드 랭 사인>이 번즈의 시이며 그 뜻도 옛날이라는 것도 모두 처음 알게 되었다. 익숙한 음악은 애달프게 들리지만, 시 자체는 애상미보다는 중년에 이른 남성들이 모여서 옛 친구와 추억을 반추하며 호탕하게 웃어제끼고 우정의 잔을 연달아 들이키는 음주가라고 하겠다. 다 같이 합창을 부르며 벌컥벌컥 마시는 그 맛은 비할 바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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