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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 - 세상에서 제일 큰 축복은 희망입니다 ㅣ 장영희의 영미시산책
장영희 지음, 김점선 그림 / 비채 / 2006년 7월
평점 :
<생일>에 이은 영미시 산책 두 번째 책이다. 저자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투병 중이다 보니 의식하지 않아도 희망을 주제로 한 시들을 많이 고르게 되었다고 한다. ‘세상에서 제일 큰 축복은 희망입니다.’라는 겉표지 중앙의 헤드카피가 인상적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걷잡을 수 없는 시련과 불행을 겪는 경우가 있다. 판도라의 상자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고난을 헤쳐 나가고 극복하기 위한 마음의 근저에는 희망이 존재한다. 희망은 용기와 의지, 힘을 부여한다. 그래서 저자는 희망이야말로 우리가 삶에서 공짜로 누리는 제일 멋진 축복이라고 단언한다. 그것이 한갓 무지개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희망은 한 마리 새
영혼 위에 걸터앉아
가사 없는 곡조를 노래하며
그칠 줄을 모른다. (희망은 한 마리 새, 에밀리 디킨슨, P.17)
희망이란 무엇일까? 미소 짓는 무지개 (쿠이 보노, 토머스 카알라일, P.57)
저자가 병마에 굴복하지 않고 투쟁하듯이 독자들도 온갖 시련에 굴하지 말고 분발하고 노력하여 강한 의지로써 극복하길 바라고 있다. 수록된 시 작품들의 상당수가 고난에 대한 의지적 저항을 담고 있는 연유이리라. 절망에 주저앉지 말고 희망을 품고 치열하게 행동하라고.
행동하라, 살아 있는 현재 속에서 행동하라!
그러니 이제 우리 일어나 무엇이든 하자......
언제나 성취하고 언제나 추구하며
일하고 기다리는 법을 배우자. (인생 찬가, 헨리 왜즈워스 롱펠로, P.29)
희미해져 가는 빛에 분노하고 또 분노하십시오. (딜런 M. 토머스, 순순히 저 휴식의 밤으로 들지 마십시오, P.37)
깃발을 꺼내라, 그리고 흔들어라......
모두 다 그 깃발을 보고
다시 힘내어 정진할 수 있도록. (깃발을 꺼내라, 에드거 A. 게스트, P.45)
나는 내 운명의 지배자요,
내 영혼의 선장인 것을. (굴하지 않는다, 윌리엄 어네스트 헨리, P.119)
내 인생은 수정으로 만든 계단이 아니었어......
얘야, 절대 돌아서지 말아라.
사는 게 좀 어렵다고
층계에 주저앉지 말아라.
여기서 넘어지지 말아라. (어머니가 아들에게, 랭스턴 휴스, P.179)
낮고 상처받은 이들은 세인의 무심한 한마디와 눈길 한번에도 마음에 상처를 입기 쉽다. 신체적 장애와 육체적 질병이 동시에 내리친 저자의 경우 이를 뼈저리게 느끼기 마련이다. 무시도 외면도 안 될 것이다. 섣부른 동정도 필요하지 않다. 힘들고 아픈 사람들에게 기운과 희망을 보태주는 것은 그저 감싸 안고 공감하는 마음일 뿐이다.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남이 될 수 있는 사람만이 남의 마음도 이해하는 동시에 참다운 자신도 알 수 있음을 저자는 소박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웅변한다. 그것이 진짜 시이기도 하다는 것을.
나 스스로 그 상처받은 사람이 된다. (나의 노래, 월트 휘트먼, P.49)
이제 나는
온기가 바로 시의 소재임을 안다. (템스 강 둑길, T.E.흄, P.191)
삶은 행복과 즐거움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은 삶의 아픔을 더 많이 기억한다. 가난과 고통, 슬픔과 절망을 겪고 견뎌내면서, 그래도 삶이란 살아있음에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는다. 비록 세상을 뒤흔들 커다란 업적을 이루지 못하였고, 만인에게 추앙받고 기억될 위인이 되지도 못하였다. 평범하고 별 볼일 없이 때로는 비루하기 조차한 삶을 살고 있지만 그래도 삶은 무엇에 비견될 수 없이 자체로서 귀중하다. 세상사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고 성마르게 조급해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인생은 고속도로가 아니라고 하며. 그저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갈 뿐이다.
헤매는 자 다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금이라 해서 다 반짝이는 것은 아니다, J.R.R.톨킨, P.25)
생기 없는 슬픔의 술을 찬란한 금빛으로
바꾸는 법을. (연금술, 새러 티즈데일, P.61)
삶이 언제나 즐겁기만 하다면
우리 영혼은
차라리 슬픔의 고요한 품 속
허탈한 웃음에서 휴식을 찾을 겁니다. (하늘에 온통 햇빛만 가득하다면, 헨리 밴 다이크, P.83)
차라리 사는 게 낫다. (다시 시작하라, 도로시 파커, P.123)
삶이 소중하고 귀중한 만큼 죽음의 무게도 정비례한다.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없기에 다가오는 죽음을 회피할 수 없다. 피하지 못할 운명이라면 괜스레 움츠려서 눈물 뚝뚝 흘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죽음마저 일상사로 받아들이면 나를, 우리를 위협하는 죽음도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있다.
죽음이여 뽐내지 마라, 어떤 이들은 너를 일컬어
힘세고 무섭다지만, 넌 사실 그렇지 않다......
짧은 한잠 지나면 우리는 영원히 깨어나리니,
더 이상 죽음은 없다. 죽음이여, 네가 죽으리라. (죽음이여 뽐내지 마라, 존 던, P.215)
나는 그 누구와도 싸우지 않았노라.
싸울 만한 가치가 있는 상대가 없었기에.
자연을 사랑했고, 자연 다음으로는 예술을 사랑했다.
나는 삶의 모닥불 앞에서 두 손을 쬐었다.
이제 그 불길 가라앉으니 나 떠날 준비가 되었노라. (죽음을 앞둔 어느 노철학자의 말, 월터 새비지 랜더, P.157)
희망과 분발, 공감과 삶을 주제로 가슴에 두고두고 새길만한 시구와 시인들을 소개하고, 인간됨, 그리고 사랑을 놓지 않고 줄기차게 노래하지만 불현 듯 상기하는 자신의 처한 상황과 심경을 드러내는 작품들도 간혹 게재하고 있다. 이것들을 제아무리 순수한 견지에서 객관적으로 보고 싶어도 자꾸만 저자와 중첩되는 것은 피할 길이 없다.
지금 삶의 뒤안길에 서서 생각하면, 마음속에 가지 못한 길에 대한 회한이 가득합니다. 차라리 그때 그 길로 갔더라면....내가 선택한 길을 믿으며 오늘도 터벅터벅, 한 발자국이라도 더 앞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P.100, <가지 못한 길>)
그 시절을 다시 돌이킬 수 없다 해도,
우리 슬퍼하기보다, 차라리
뒤에 남은 것에서 힘을 찾으리. (초원의 빛, 윌리엄 워즈워스, P.139)
책의 구성 컨셉은 <생일>과 동일하다. 원문 발췌와 번역문, 그리고 간단한 소개글. 매 작품마다 들어있는 화가 김점선의 아름다운 삽화. 굳이 작심하고 완독을 하지 않더라도 이따금 펼쳐들고 한두 편 읽고 그림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만함을 누릴 수 있다.
마지막 시는 휘트먼의 <이별을 고하며>이다. 저자의 의도는 아니겠지만 내게는 자꾸만 저자의 사세구(辭世句)로 읽힘을 어쩔 수 없다.
나는 공기처럼 떠납니다......
나는 어딘가 멈추어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이별을 고하며, 월트 휘트먼, P.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