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과 지옥의 결혼 민음사 세계시인선 46
윌리엄 블레이크 지음, 김종철 옮김 / 민음사 / 199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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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나와 있는 블레이크 시선집 세 종 중 하나로서 가장 먼저 독자에게 소개된 책이다. 구성을 보면 <순수와 경험의 노래><천국과 지옥의 결혼>을 위주로 발췌하고 몇 편의 시를 추가하였으며, 여기에 단상과 작가의 서신 한 통을 덧붙였다. 블레이크 시세계의 입문서로 적당하지만 번역을 원문에 대조해 보면 충실성이 다소 부족하고 시기적으로 나온 지가 오래되어 어휘와 어조가 요즘 감각에 비하면 딱딱함을 풍긴다.

 

<순수의 노래>에 실린 시편들은 대체로 삶과 세상의 순수한 즐거움을 찬미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거친 계곡 아래로 피리를 불며>는 순수의 노래를 쓴 계기를 드러내며, 아이, , 기쁨, 기쁨의 노래 등 글자 그대로 순진무구한 기쁨을 노래한다.

 

풀밭 위에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

그들의 웃음이 언덕 위에서 들려올 때

내 가슴은 평온하고

그리고 모든 것은 평온하다 (<보모의 노래>에서)

 

위의 싯구와 같이 낙천적이고 밝고 긍정적이며 때 묻지 않은 정서라고 하겠다.

 

반면 <경험의 노래>는 그러하지 않다. 수년의 세월 동안 관찰하고 삶의 체험을 통해 삶과 세상의 어둠을 인식한다. 천국적 환희를 노래하기에 블레이크 당대의 사회 현실은 녹록치 않다.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의 부작용이 이미 표면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정치적 보수반동 체제는 미국 독립과 프랑스 대혁명으로 촉발된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억압하고 구체제를 옹호하기에 급급한 시점이었다.

 

기쁨을 위해 태어난 새가

새장 속에 갇혀 어떻게 노래를 할 것인가? (<학동>에서)

 

<학동>은 순수의 정서와 경험의 정서를 극적으로 대비시키고 있으며, <런던>은 한층 어둡다. 런던 거리와 템스 강마저 법제화되어 보편적 접근이 제한된 도시. 산업화, 도시화된 문명 속에서 허약하고 비탄에 잠긴 표정은 인간이 만들어 낸 굴레에 스스로 예속되는 참혹한 상태를 묘사하며, 굴뚝 청소에 시달린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 불운한 병사의 탄식, 젊디젊은 창부의 저주가 세계의 도시에 메아리친다.

 

블레이크의 시에 두드러진 특색 중 하나는 본질과 순수를 상실한 종교와 교회에 대한 강렬한 비판의식이라고 하겠다. 황금의 교회당은 교회의 타락과 순수한 영성의 변질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이 감히 들어가지 못하는 교회당 대신에 시인은 차라리 돼지 우리로 가서 돼지들 사이에눕는다.

 

그런데 나는 꽃들이 있어야 할 곳에

무덤과 묘비가 가득 차 있음을 보았다. (<사랑의 뜰>에서)

 

이제 순수의 세계는 상실되었다. 아이들이 활기차게 뛰놀던 푸른 풀밭은 사라지고 그곳엔 금지와 억압의 팻말과 교회당이 서 있다.

 

박제화된 교회에 대한 시인의 비판은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벌레는 가장 좋은 잎사귀에 알을 까고, 사제는 가장 좋은 기쁨에 저주를 내린다. (<지옥의 격언>에서)

 

예수께서는 덕 그 자체이며, 충동으로부터 행동하셨지, 법칙으로부터 행동하시지 않았다. (<악마와 천사>에서)

 

최후의 심판의 날에는, 선과 악 또는 지식의 나무에 관련한 질문으로 종교를 시끄럽게 만드는 자들이 내쫓기게 될 것이다. (<단상>에서)

 

<천국과 지옥의 결혼>에 이르러 지옥과 악마의 의미가 오히려 진실한 신앙과 관련되는 데까지 이르게 됨을 알게 된다. 교활한 뱀이 선량한 척하고, 의인은 거친 들판에서 노여워할 수밖에 없는 가치 전도된 왜곡된 현실. 그래서 시인은 위대한 시는 부도덕하며, 위대한 인물은 사악하며 악마적이라고 선언한다.

 

은폐되고 잠복한 가치관과 사회의 부조리를 선취한 시인의 노래는 자연 예언적 풍모를 띨 수밖에 없을 것이다. 블레이크 시의 특징으로 언급되는 신비적, 예언적 요소가 그러하다. 예언자는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는존재이므로.

 

블레이크는 편지에서 자신의 세계관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것은 틀에 박힌 차가운 이성과 기계적 획일과 적막이 아닌 상상력과 비전의 세계이다. 작품 해설에 따르면 블레이크는 도시화, 산업화 과정에서의 비인간화 현상에 주목하여 순수한 인간성 회복을 선도적으로 주창한 시인이었다고 한다. 그의 상상력은 표피적 선악의 범주를 초월한 심원한 생명력을 근간으로 하며, 신성한 비전으로 나아간다. 비록 이 시집에 수록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후기 시들이 독창적이지만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는 연유가 독자적인 상징체계와 비전에 근거한 데 기인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마치 예이츠의 <A Vision>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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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을 거꾸로 쏜 사자 라프카디오 생각하는 숲 4
셸 실버스타인 지음, 지혜연 옮김 / 시공주니어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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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권 읽은 셸 실버스타인의 작품 중 제일 분량이 많다. 책에는 쪽수가 표시되어 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알라딘 정보에 따르면 무려 200쪽이라고 하니! 작가 특유의 단색 펜의 단순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유머러스한 삽화는 여전한 볼거리를 제공하며, 그동안 말을 아꼈던 작가가 여기서는 제법 아낌없는 글밥을 제공하고 있다.

 

읽는 도중과 읽고 난 후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하면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먼저 인간의 비인간성 내지 비열성에 대한 비판적 태도. 사냥꾼을 처음 본 사자는 호기심에 차 있지만, 사냥꾼은 오로지 사자를 쏴 죽일 생각만을 갖고 있다. 사자의 항변도 소용없고, 항복 의사도, 기꺼이 산 채로 양탄자가 되겠다는 제안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어이없어 하는 사자에게 사냥꾼은 단지 자신의 맘이라고 할 뿐이다. 잠시 후 역전된 상황에서 이번엔 사냥꾼이 사자에게 자비를 구한다. 어린 사자에게 사냥꾼을 살려두어야 할 이유와 맘을 기대할 순 없을 것이다.

 

어린 사자가 서커스 단장과 함께 미국의 대도시에 와서 이발소, 식당, 양복점 등등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또한 별 차이가 없다. 으스대며 사자에겐 서비스가 제공 안 된다고 단언하다가도 으르렁 한 번에 태도가 일변하여 공손해진다.

 

사실 책의 중반부는 어린 사자의 인간화 과정 또는 사회화 과정이라고 불릴 수 있다. 야생 동물이 인간 사회에 와서 명사수 라프카디오로 거듭 나며, 단박에 유명 인사가 되어 전 세계를 돌아다니고 부자가 되어 휴양지에서 망중한을 즐긴다든지 양복을 간지 나게 입는 법, 미인들과의 댄스, 골프, 테니스 등의 스포츠와 취미 활동 등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행복과 부, 그리고 명성을 한 몸에 누리게 된 것 같았다. 어린 사자는 이제 멋진 라프카디오가 되었으므로.

 

라프카디오는 과연 행복할까? 마지막 두 장은 여기에 대한 대답이다. 권태를 잊기 위한 사냥 여행에서 마주친 아프리카의 사자들. 그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라프카디오. 사냥꾼과 사자 사이에서 우왕좌왕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라프카디오. 그는 어린 사자인가 아니면 명사수 라프카디오인가. 스스로 자문해도 자신이 사자인지 사람인지 판단할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냥꾼들이 사는 세상에 속한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사자들의 세계에 속한 것 같지도 않아요.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11)

 

라프카디오는 사자로 태어났지만 사자의 본분을 망각하고 다른 삶의 방식을 오로지 지향하였다. 이 우화가 주는 메시지는 확연하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 생각 못한다는 속담의 함의. 자신의 정체성을 망각하지 말라는 것. 자기 계발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어린 사자가 총 쏘는 기술을 향상시키기 위해 기울인 각고의 노력은 분명 훌륭하였다.

 

라프카디오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전현 알지 못했다. 다만 가다 보면 어디라도 이르게 되겠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런 입장이었으면 여러분도 떠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11)

 

라프카디오가 어디로 갔을지 우리도 알 수 없다. 어쩌면 바로 우리 이웃에, 주변에서 제2, 3의 라프카디오를 만날지도 모른다. 아니면 우리 자신이 또 다른 라프카디오가 아니라고 부인할 확신도 없다.

 

작품의 원제는 <Lafcadio, The Lion Who Shot Back>이다. 여기서 Shot Back 의 의미는 물구나무해서 총을 쏘거나 총을 거꾸로 잡고 쏘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상대방의 발포에 대하여 대응하여 발포한다, 즉 응사(대응사격)로 이해해야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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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징냐, 나의 쪽배
J.M 바스콘셀로스 지음, 이광윤 옮김, 김효진 그림 / 동녘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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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콘셀로스의 제제 3부작을 다 읽은 후 그의 최초의 성공작이라 할 만한 <호징냐>에 자연스레 눈길이 쏠렸다. 브라질의 아마존 지역을 배경으로 한 남자와 그의 쪽배 호징냐 간의 우정과 교감을 다룬 작품이라는 소개글을 보니 더할 수 없는 자연적 낭만주의의 맛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미지의 신비스런 존재인 브라질 내륙의 원시림과 강을 오르내리는 아름다운 이야기라니!

 

, 정녕코 이 소설이 이리 처절하며 충격적인 작품일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하였다. 아니, 제제 3부작만으로 작가의 경향이 사소설적 성장소설이라고 속단한 잘못도 크다. 문명 비판의 메시지가 강하게 반영된 이 작품은 전혀 의외였다.

 

작품은 1부와 2부로 구분되는데, 1부는 아라구아이 강을 떠돌아다니는 외로운 남자 제 오로꼬와 쪽배 호징냐의 여정과 대화를 기본 틀로 하여 그를 찾는 의사와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병렬 구조를 이루고 있다. 원주민이 아님에도 그들 사회에 정착하고 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제 오로꼬, 그의 존재는 원주민들에게는 외경을, 의사를 포함한 도시지역의 타지인들에게는 광기를 떠올리게 한다. 나무와 새들의 말을 알아듣고 쪽배와 대화를 주고받는 능력, 요즘이라면 대단한 재능으로 칭송받을 테지만 당대에는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 제 오로꼬는 분명 감당할 수 없는 충격과 슬픔으로 도시 지역을 떠나 외딴 변방의 마을에서 외롭게 생활하는 인물임에도 강물을 오가는 그와 쪽배의 모습에서 자취를 찾기 어렵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에게 감내하지 못할 슬픔이 찾아들었답니다. 그 이후 그는 누구와도 이야기하지도 않고 먹지도 않았어요. 마치 보지도 듣지도 않는 사람처럼 보였죠. (P.37)

 

1부의 압권은 3장에서 호징냐가 들려주는 어린 나무 니닝냐의 슬픈 운명 이야기다. 어린 씨앗이 강가에 태어나 간신히 숙녀로 자라 생애의 황금기를 보낼 찰나에 맞이하는 대홍수. 무엇보다도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뜻밖의 반전이 주는 결말의 묘미가 기막히다. 그럼에도 기억에 남는 것은 어린 니닝냐가 서서히 깨닫는 인생의 진리들.

 

아픔이 없는 인생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거란다. (P.57)

 

그것이 삶이었다. 삶은 그렇게 모든 풍요로움과 아름다움, 자애로움을 실현하였다. (P.79)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던 삶에서 다른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내주는 삶으로 바뀌었다. (P.91)

 

5장에서는 반대로 제 오로꼬가 호징냐에게 얘기를 들려준다. 2년 전 선상 여행에서 마주치게 된 한 몸 파는 여자를 둘러싼 승객들 간의 호기심과 배척. ‘예수 그리스도 강이라는 장의 표제가 궁금했는데 문제의 여인 쉬까 도이다의 말을 듣는 대목에서 연유를 알게 되었다.

 

제 오로꼬는 무심히 흐르는 강을 바라보았다. 난생처음으로 그 강물 속에서 예수님의 선한 모습을 본 것 같았다. (P.181)

 

이렇게 1부에서는 모든 장들이, 모든 인물들이 순수하고 자연스러우며 아름답고 정감을 자아낸다. 적어도 1부에 국한해서는 당초 예상했던 모든 즐거움과 만족을 누릴 수 있었다.

 

2부는 완전한 대조를 보인다. 광기를 고치러 의사를 따라 도시로 간 제 오로꼬는 정신병원에 갇히고,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비인간적 처우를 감내하게 되는 처지로 전락한다. 무자비한 폭력과 독방 생활, 자신은 미치지 않았다고 강변하는 그의 절규는 허공에 메아리칠 뿐이다. 그들이 제 오로꼬에게 세뇌를 강요하는 것은 바로 이 문장이다.

 

나무는 단지 나무일 뿐이고, 나무는 말을 하지 않는다. (P.250)

 

설사 그가 미쳤다고 하자. 그가 타인과 주변에 아무런 피해도 위해도 가하지 않고 나무와 말을 주고받는다고 정신병원에 감금하여 학대하는 게 정당화되지는 못한다. 도대체 그 의사는 무엇 때문에 일부러 오지로 찾아들어 굳이 제 오로꼬를 도시로 데려간 것인지 알 수 없다. 제 오로꼬가 자연과 더불어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사는 삶을 시기하고 질투한 소위 문명의 음모가 아닐는지.

 

2부에서는 제 오로꼬의 현실과 환상이 교차한다.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현실 속에서 그는 자연과 교감을 지녔던 변방 자연의 삶을 회상한다. 밀림에 사는 동물의 법왕 우루삐앙가, 식물의 왕 깔라만땅. 그들의 이야기는 인간과 문명에 파괴되고 위축되어 가는 자연의 실상을 상징적으로 함축한다. 우루삐앙가는 무조건 인간을 피해 달아나라고 조언한다. 깔라만땅이 들려주는 악어 이야기는 처연함과 엄숙함마저 자아낸다.

 

사람들이 그가 아무도 해치려 하지 않고 단지 평화의 사절로 그곳에 왔음을 모른다는 것을. 모닥불의 불빛, 빛나는 별이 가득한 아름다운 하늘이 담긴 눈을, 그렇게 젊은 나이에 죽어 가는 그의 커다란 두 눈을 아무도 보려 하지 않는 것 같았다. (P.319)

 

병원에서 퇴원하고 도시에서 살다가 독지가의 도움을 얻어 밀림으로 돌아온 제 오로꼬. 그는 더 이상 슬프지 않다. 아니, 슬픔을 포함한 일체의 인간적, 자연적 감정을 그는 상실하였다. 인간사회와 문명의 덕택에.

 

너무 늙어 삭아버린 쪽배 호징냐를 불태워 한줌의 재로 흩날린 후 제 오로꼬는 방랑의 길을 떠난다. 그는 도시는 물론 밀림 속 원주민 마을에서도 더 이상 정주할 수 없다. 어떤 인간적 존재도 그를 이해하지 못하며 존중하지 않는다. 차라리 밀림 속을, 자연 속을 헤매다가 유랑의 삶을 누리는 게 그에게는 더 나을 것이리라.

 

작가는 제 오로꼬가 언제까지나 외로움과 무감정에 지배당하게 놔두지 않는다. 반전을 좋아하는 장난스러운 작가는 여기서도 제2의 호징냐를 등장시켜서 제 오로꼬를 기쁘게 한다. 이제 그에게는 다시금 교감과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생긴 것이다.

 

제 오로꼬가 미친 사람일까 아니면 자연과의 소통을 이해 못하는 문명사회의 도시인들이 미친 사람일까? 작가는 호징냐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미쳤다고요? 단지 나무들과 말을 한다는 것 때문에? 무슨 어리석은 소리를! 미친 사람이란, 하느님의 섭리를 잊어버리고 자신을 이해하지 않으며 사는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이 미친 사람들이지요. (P.359)

 

그것은 이 작품을 읽는 모든 독자들의 동일한 소회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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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 - 세상에서 제일 큰 축복은 희망입니다 장영희의 영미시산책
장영희 지음, 김점선 그림 / 비채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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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에 이은 영미시 산책 두 번째 책이다. 저자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투병 중이다 보니 의식하지 않아도 희망을 주제로 한 시들을 많이 고르게 되었다고 한다. ‘세상에서 제일 큰 축복은 희망입니다.’라는 겉표지 중앙의 헤드카피가 인상적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걷잡을 수 없는 시련과 불행을 겪는 경우가 있다. 판도라의 상자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고난을 헤쳐 나가고 극복하기 위한 마음의 근저에는 희망이 존재한다. 희망은 용기와 의지, 힘을 부여한다. 그래서 저자는 희망이야말로 우리가 삶에서 공짜로 누리는 제일 멋진 축복이라고 단언한다. 그것이 한갓 무지개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희망은 한 마리 새

영혼 위에 걸터앉아

가사 없는 곡조를 노래하며

그칠 줄을 모른다. (희망은 한 마리 새, 에밀리 디킨슨, P.17)

 

희망이란 무엇일까? 미소 짓는 무지개 (쿠이 보노, 토머스 카알라일, P.57)

 

저자가 병마에 굴복하지 않고 투쟁하듯이 독자들도 온갖 시련에 굴하지 말고 분발하고 노력하여 강한 의지로써 극복하길 바라고 있다. 수록된 시 작품들의 상당수가 고난에 대한 의지적 저항을 담고 있는 연유이리라. 절망에 주저앉지 말고 희망을 품고 치열하게 행동하라고.

 

행동하라, 살아 있는 현재 속에서 행동하라!

그러니 이제 우리 일어나 무엇이든 하자......

언제나 성취하고 언제나 추구하며

일하고 기다리는 법을 배우자. (인생 찬가, 헨리 왜즈워스 롱펠로, P.29)

 

희미해져 가는 빛에 분노하고 또 분노하십시오. (딜런 M. 토머스, 순순히 저 휴식의 밤으로 들지 마십시오, P.37)

 

깃발을 꺼내라, 그리고 흔들어라......

모두 다 그 깃발을 보고

다시 힘내어 정진할 수 있도록. (깃발을 꺼내라, 에드거 A. 게스트, P.45)

 

나는 내 운명의 지배자요,

내 영혼의 선장인 것을. (굴하지 않는다, 윌리엄 어네스트 헨리, P.119)

 

내 인생은 수정으로 만든 계단이 아니었어......

얘야, 절대 돌아서지 말아라.

사는 게 좀 어렵다고

층계에 주저앉지 말아라.

여기서 넘어지지 말아라. (어머니가 아들에게, 랭스턴 휴스, P.179)

 

낮고 상처받은 이들은 세인의 무심한 한마디와 눈길 한번에도 마음에 상처를 입기 쉽다. 신체적 장애와 육체적 질병이 동시에 내리친 저자의 경우 이를 뼈저리게 느끼기 마련이다. 무시도 외면도 안 될 것이다. 섣부른 동정도 필요하지 않다. 힘들고 아픈 사람들에게 기운과 희망을 보태주는 것은 그저 감싸 안고 공감하는 마음일 뿐이다.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남이 될 수 있는 사람만이 남의 마음도 이해하는 동시에 참다운 자신도 알 수 있음을 저자는 소박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웅변한다. 그것이 진짜 시이기도 하다는 것을.

 

나 스스로 그 상처받은 사람이 된다. (나의 노래, 월트 휘트먼, P.49)

 

이제 나는

온기가 바로 시의 소재임을 안다. (템스 강 둑길, T.E., P.191)

 

삶은 행복과 즐거움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은 삶의 아픔을 더 많이 기억한다. 가난과 고통, 슬픔과 절망을 겪고 견뎌내면서, 그래도 삶이란 살아있음에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는다. 비록 세상을 뒤흔들 커다란 업적을 이루지 못하였고, 만인에게 추앙받고 기억될 위인이 되지도 못하였다. 평범하고 별 볼일 없이 때로는 비루하기 조차한 삶을 살고 있지만 그래도 삶은 무엇에 비견될 수 없이 자체로서 귀중하다. 세상사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고 성마르게 조급해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인생은 고속도로가 아니라고 하며. 그저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갈 뿐이다.

 

헤매는 자 다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금이라 해서 다 반짝이는 것은 아니다, J.R.R.톨킨, P.25)

 

생기 없는 슬픔의 술을 찬란한 금빛으로

바꾸는 법을. (연금술, 새러 티즈데일, P.61)

 

삶이 언제나 즐겁기만 하다면

우리 영혼은

차라리 슬픔의 고요한 품 속

허탈한 웃음에서 휴식을 찾을 겁니다. (하늘에 온통 햇빛만 가득하다면, 헨리 밴 다이크, P.83)

 

차라리 사는 게 낫다. (다시 시작하라, 도로시 파커, P.123)

 

삶이 소중하고 귀중한 만큼 죽음의 무게도 정비례한다.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없기에 다가오는 죽음을 회피할 수 없다. 피하지 못할 운명이라면 괜스레 움츠려서 눈물 뚝뚝 흘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죽음마저 일상사로 받아들이면 나를, 우리를 위협하는 죽음도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있다.

 

죽음이여 뽐내지 마라, 어떤 이들은 너를 일컬어

힘세고 무섭다지만, 넌 사실 그렇지 않다......

짧은 한잠 지나면 우리는 영원히 깨어나리니,

더 이상 죽음은 없다. 죽음이여, 네가 죽으리라. (죽음이여 뽐내지 마라, 존 던, P.215)

 

나는 그 누구와도 싸우지 않았노라.

싸울 만한 가치가 있는 상대가 없었기에.

자연을 사랑했고, 자연 다음으로는 예술을 사랑했다.

나는 삶의 모닥불 앞에서 두 손을 쬐었다.

이제 그 불길 가라앉으니 나 떠날 준비가 되었노라. (죽음을 앞둔 어느 노철학자의 말, 월터 새비지 랜더, P.157)

 

희망과 분발, 공감과 삶을 주제로 가슴에 두고두고 새길만한 시구와 시인들을 소개하고, 인간됨, 그리고 사랑을 놓지 않고 줄기차게 노래하지만 불현 듯 상기하는 자신의 처한 상황과 심경을 드러내는 작품들도 간혹 게재하고 있다. 이것들을 제아무리 순수한 견지에서 객관적으로 보고 싶어도 자꾸만 저자와 중첩되는 것은 피할 길이 없다.

 

지금 삶의 뒤안길에 서서 생각하면, 마음속에 가지 못한 길에 대한 회한이 가득합니다. 차라리 그때 그 길로 갔더라면....내가 선택한 길을 믿으며 오늘도 터벅터벅, 한 발자국이라도 더 앞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P.100, <가지 못한 길>)

 

그 시절을 다시 돌이킬 수 없다 해도,

우리 슬퍼하기보다, 차라리

뒤에 남은 것에서 힘을 찾으리. (초원의 빛, 윌리엄 워즈워스, P.139)

 

책의 구성 컨셉은 <생일>과 동일하다. 원문 발췌와 번역문, 그리고 간단한 소개글. 매 작품마다 들어있는 화가 김점선의 아름다운 삽화. 굳이 작심하고 완독을 하지 않더라도 이따금 펼쳐들고 한두 편 읽고 그림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만함을 누릴 수 있다.

 

마지막 시는 휘트먼의 <이별을 고하며>이다. 저자의 의도는 아니겠지만 내게는 자꾸만 저자의 사세구(辭世句)로 읽힘을 어쩔 수 없다.

 

나는 공기처럼 떠납니다......

나는 어딘가 멈추어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이별을 고하며, 월트 휘트먼,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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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의 초원 순난앵 마루벌의 새로운 동화 10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마리트 퇴른크비스트 그림, 김상열 옮김 / 마루벌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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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책 중에는 내용을 들여다보기도 전에 장정과 디자인만으로도 아름답다는 인상을 주는 책들이 자주 눈에 띈다. 이 책의 경우도 여기에 해당하는데, 연둣빛 초록의 시원하고 상쾌함이 앞뒤 겉표지를 온통 휘감고 있다. 안표지는 앞과 뒤가 전혀 분위기가 다른데 앞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에 잿빛 옷을 걸치고 몸을 한껏 웅크리며 걸어가는 어린 남매가 스산함을 안겨준다면, 뒤는 신록의 봄을 맞이하여 초록으로 옷을 갈아입은 숲속을 역시 눈에 확 띠는 가벼운 빨간 옷으로 갈아입은 남매가 손을 잡고 신나게 뛰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고아가 되어 의지할 곳이 없어진 어린 오누이, 이들의 노동력을 한껏 착취하고 인간다운 대우를 해주지 않은 이웃동네 농부. 동화에서 흔한 전형적인 구도라고 하겠다. 착한 어린이, 나쁜 어른. 대개 결말은 아이들은 행복하게 되고 어른은 벌을 받게 된다. , 이 작품은 좀 다르다. 농부는 아이들을 잃어버린 것 외에 별다른 손실이 없으니 말이다.

 

오누이의 고향 순난앵과 이웃 뮈라 마을은 전혀 상반되는 이미지의 고장으로 표현된다. 뮈라 마을 이야기를 할 때 삽화는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의 잿빛 톤으로 일관하고 있어 오누이의 고생담을 시각적으로 여실히 드러낸다. 그곳 사람들은 인상과 어투에서도 불친절과 비딱함을 보여준다. 반면 순난앵에서는 모든 것이 밝고 즐겁고 경쾌하다. 아이들은 구김살 없이 놀며 맛있는 음식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

 

누구나 고달프고 힘든 때면 장밋빛 미래를 꿈꾸고 공상한다. 현실이 가혹할수록 공상의 나래는 더한층 강렬한 행복을 안겨준다. 아이들에게 순난앵 마을은 어릴 적 부모와 같이 살던 행복했던 시절을 연상시킨다. 매일같이 한겨울에도 허름한 의복에 과로한 노동에 시달리며 겨우 허기만 면할 정도의 열악한 생활에서 오누이는 탈출을 꿈꾼다. “사람들이 가난 때문에 어렵게 살던 시절에 현실의 순난앵이 그렇게 천국과도 모습을 지닐 수는 없을 것이다.

 

<성냥팔이 소녀>의 마지막은 뭉클하면서도 처연하기 이를 데 없다. 소녀는 성냥불 속에서 환상을 통해 행복과 천국을 공상한다.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유혹이지만 소녀로서는 어차피 매일반이다. 매서운 한겨울, 춥고 배고프고 지친 오누이는 앞으로 순난앵에 갈 수 없게 되자 영원히 순난앵에 머물기로 결심한다. 그들에게 뮈라 마을의 삶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그들의 행복은 순난앵에서 찾을 수 있다.

 

오누이를 이끄는 빨간 새는 깃털이 불꽃이 활활 타오르듯이 새빨갛고, 맑은 노래를 부르며 노래를 부르면 나무 가지에 쌓여있던 눈송이들이 꽃잎처럼 흩날린다. 불우한 오누이를 위로하는 동시에 현실이 아닌 다른 곳, 피안의 세계로 이끄는 영혼의 전령이자 안내자일 것이다.

 

빨간 새의 안내에 따라 순난앵을 오고가던 오누이는 마침내 두 마을을 연결하는 한번 닫히면 영원히 열리지 않는 문을 살그머니 닫는다. 이제 그들에게 암울했던 시절은 한갓 추억으로만 남게 되리라. 다행이다, 그들이 그나마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어서... 그곳이 어디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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