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학교 1 창비아동문고 154
E.데 아미치스 글, 김환영 그림, 이현경 옮김 / 창비 / 199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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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에는 꽤나 유명한 작품으로 평가받았지만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엄마 찾아 삼만 리>의 원전으로만 기억되는 잊혀진, 그래서 어찌 보면 불운한 작품이라고 해야겠다. 무슨 연유인지는 책을 몇 장 넘기다 보면 절로 알게 된다. 의도된 목적성, 지나친 교훈성.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을 화자로 내세워 일기 형식으로 전개되지만, 작가는 여기에 부모와 교사로 대표되는 성인의 가치관, 당대 사회의 주도적 국가관을 강력하게 투입하고 있다.

 

깔라브리아에서 온 소년에서는 새로 전학 온 깔라브리아의 소년을 맞이하면서 선생님이 반 대표에게 새로 온 친구를 안아 주라고 지시한다. “삐에몬떼의 어린이가 깔라브리아의 어린이에게 하는 포옹이란다.” 자칫 오버하는 듯한 선생님의 의도는 다음 대목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너희는 서로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 우리 고장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친구를 모욕하는 사람은 이딸리아 국기가 지나갈 때 쳐다볼 자격도 없는 사람이다. (P.25)

 

이쯤해서 이탈리아의 역사를 반추해 보면, 수세기 동안 분열되었던 이탈리아가 통일을 달성한해가 1861년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아미치스가 이 작품을 발표한 해는 1886, 작가는 통일전쟁에 참전한 군인이었다. 신생 이탈리아는 통일 국가로서 기틀을 확립하기 위한 정치, 사회, 문화의 다방면에서 질서 확립과, 국민의식 고취, 애국심의 배양 등 사회 통합적 장치를 필요로 하였다. 이 작품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애국심의 강조가 여기에서 연유한다. 매월마다 선생님이 들려주는 형식을 빌린 이달의 이야기네 편 중 빠도바의 꼬마 애국자’, ‘롬바르디아의 소년 보초병’, ‘사르데냐의 북 치는 소년’, 이 세 편의 주제도 여일하다.

 

작품의 정치적 배경과 합목적적 교훈성을 배제하고 순수한 이야기로 이 책을 읽으면 나름대로 재미있는 일화들의 나날임을 알 수 있다. 화자인 꼬마 엔리꼬가 바라 본 학급과 급우들은 사회의 축소판이다. 우등생이자 모범생인 데롯씨, 용감하고 정의로운 가르로네 같이 누구에게나 존중받고 가까이하고 싶은 친우들이 있는 반면 프란띠처럼 도저히 구제불능이라고 할 만한 아이도 존재한다. 귀족의 아들, 석탄장수 아들, 꼬마 벽돌공, 가롯피 등 대다수의 학생들은 제각기 장단점을 지니지만 인간 본성에서는 착한 아이임이 밝혀진다.

 

학급의 선생님은 정의의 화신이자 투철한 가치관과 애국심의 사도라고 불릴 만하다. 그는 불의에 대해서는 불같이 분개하며, 아이들의 단합과 충성을 고취하는데 헌신한다.

 

너희는 너희를 괴롭히지도 않은 친구를 모욕하고, 불행한 친구를 조롱하고 자기를 방어할 힘도 없는 허약한 친구를 괴롭혔다. 인간으로서 가장 비열하고 가장 수치스러운 행동을 한 거야. 비겁한 녀석들! (P.32)

 

작품에서 교사와 함께 엔리꼬를 올바르게 훈육하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인물이 또 있는데, 그것은 엔리꼬의 부모이다. 그들은 엔리꼬의 일기를 읽고 이따금씩 메모를 덧붙이는데, 매우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아울러 군국적, 애국적 기조를 띠고 있다. 사실상 작가의 목소리라고 할 이 대목을 빼버렸더라면 딱딱함이 훨씬 덜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용기를 내라, 거대한 훈련장에 나가 있는 꼬마 군인아. 책은 너의 무기이고 교실을 부대이며 전세계가 전투의 현장이다. 그리고 그 승리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문명이란다. 비겁한 군인이 되지 않길 바란다, 엔리꼬. (P.42)

 

통일 국가와 사회에서 가장 긴요한 일은 분열적 요인을 극력 억제하는 것이다. 지방색의 배제와 함께 계급 갈등의 방지는 사회 안정에서 중요하다. 당대 이탈리아에서 사회주의 사상이 풍미하고 있었음을 작중에서 노동의 가치와 노동자의 존중 대목을 통해 알 수 있다.

 

노동은 더러운 게 아니야. 일터에서 돌아오는 노동자를 보고 더러워.’라고 말하면 안 된다. ‘옷에 노동한 흔적과 자취가 있구나.’라고 말해야지. 이 점을 잘 기억해라. 그리고 꼬마 벽돌공을 아껴 주어라. 무엇보다도 네 친구니까, 그리고 노동자의 아들이니까. (P.118)

 

초등학생들이니만치 여러 자잘한 사고와 사건도 끊이지 않는다. 밝고 즐겁고 행복한 순간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슬프고 우울하고 잘못하여 혼도 맞으면서 아이들은 관찰과 사고와 상상을 통해 학습한다. 그렇게 아이들은 커나가는 것이다. 이어지는 2권과 3권에서는 활기찬 아이들의 목소리를 더욱 많이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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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리지 시선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지음, 윤준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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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즈워스 시집을 읽었으니 콜리지 시선을 읽지 않고 어찌 넘어갈 수 있겠는가. 워즈워스보다 콜리지의 인기가 덜함은 시중에 나와 있는 시집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선택의 여지가 없이, 한편으론 옮긴이가 워즈워스 시선과 동일인에 기쁜 마음에 이 책을 꺼내든다. 콜리지의 주요 시작품들이 연대순으로 거의 수록되어 있어 한 권만 제대로 감상하면 그의 시세계를 제대로 조망할 수 있으리라. 다만 여전한 아쉬움은 영한 대역이 아니기에 전적으로 번역자의 능력에 의존해야 함에서 비롯된다.

 

<풍명금>, 이올리언 하프는 초기작임에도 자연의 전일성에 대한 편향이 두드러진다. 애니미즘에 가까운 그의 상념은 후반에 이르러 기독교 전통으로의 급격한 복귀와 대조되는데, 아무래도 초기작이므로 그의 시적 이념이 굳건하지 못함을 보여준다. <내 감옥, 이 라임나무 그늘>도 전작과 유사하게 자연 예찬이다. “전일한 생명이 자연 도처에 편재해 있다면 반드시 풍광이 수려한 명승지가 아니라 할지라도 자연이 존재하는 그곳에서 우리는 자연의 신비와 진리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노수부의 노래>는 특이하게도 라틴어 제사와 산문 방주를 수록하였는데 1817년 판본이라는 점에서 초판본 또는 2판본과의 차이가 있어 이 책만의 독특한 또 다른 재미를 드러낸다. 다만 몇 부분에서 기존의 번역본과는 두드러진 차별성이 존재하는데 원문과 대조해도 이해가 애매하다.

 

그녀의 입술은 붉고, 표정은 거리낌 없고,

머리칼은 황금처럼 누런색이었소.

살결은 문둥이처럼 하얗고,

그녀는 공포로 사람의 피를 얼어붙게 만드는

몽마(夢魔) 사중생(死中生)이었소. (P.29)

 

<쿠블라 칸>은 여전히 내게 시 자체보다 시작 배경에 대한 작가의 서문이 더 인상 깊다. 에피소드로 과대평가된 미완성 시편이라고 봐야 하리라. 같은 미완성이지만 <크리스타벨>은 훨씬 더 음미할 가치가 크다. 번역본으로는 유일하게 이 작품을 수록한 점이 이 책의 큰 장점이다.

 

독자는 제럴다인 양의 정체에 대한 암시를 곳곳에서 알 수 있다. 성문 문턱을 혼자 못 넘음, 성모 마리아 찬미의 회피, 마스티프 종 개의 신음 소리, 갑자기 날름거리는 불길 등. 중세 기사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마녀, 기사, , 음유시인, 수호 정령 등 온갖 탈현실적인 기이한 요소가 시 전편을 휘감는데, 무엇보다 관능과 순수(내지 순결) 간 팽팽한 대립이 현저하다. 작품명이자 작중 주인공인 크리스타벨은 간계나 죄 같은 건 전혀 모르는 처녀”(P.102)이다. 마녀는 그녀를 타락시키고 정복하기 위해 그녀의 수호 정령인 어머니의 영혼을 내쫓고 주문을 외워 마법을 발현시킨다. 독자는 알 수 있다. 마녀의 본색이 뱀이라는 점을. 마법에 걸린 크리스타벨은 슈웃 소리를 내거나 눈을 위로 쳐든 모습으로 뱀의 시늉을 하고 있다. 시인은 간밤 꿈에서 비둘기를 괴롭히는 뱀을 본다.

 

중세시대 기독교적 전통과 미덕이 강하게 지배하는 곳에서 여성에게 요구되는 가장 큰 미덕은 바로 순결이다. 마녀는 순결하고 무구한 크리스타벨에게 젖가슴의 이미지를 통해 관능을 심어준다. 크리스타벨은 마법에 압도되면서도 본능적으로 위험성을 절감하고 회피하려고 한다. 이 작품이 완성되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알 수 없지만 단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무척이나 흥미로워 <노수부의 노래> 못지않거나 이를 능가할 수 있으리라는 점이다.

 

이후 수록작들은 <한밤의 서리><나이팅게일>을 제외하면 거의 국내 초역이다. <프랑스-송가>는 자유를 주제로 하여 그의 사상적 이념을 드러내는 시인으로서는 드물게 보는 이념시라고 하겠다. 자유를 찬미하는 시인에게 있어 자유의 현실적 실현인 프랑스 대혁명은 자체로서 극진한 칭송의 대상이다. 자유 프랑스에 반대하는 반동적 국가야말로 오히려 지탄받아 마땅하다. 혁명 이후의 혼란마저도 불가피한 것으로 시인은 긍정한다. 이런 시인을 분노케 하는 것은 자유 프랑스가 자유 스위스를 침공한 사실이다.

 

나를 용서해 다오, 자유여! , 그 몽상들을 용서해 다오! (P.117)

 

땅과 바다와 하늘에 내 존재를 쏘며

더없이 열렬한 사랑으로 만물을 소유하는 동안,

, 자유여! 내 정신은 그곳에서 너를 느꼈노라. (P.119)

 

시인은 절망한다. 회한에 사로잡힌다. 현실에서 그의 이상은 사라졌다. 이제 시인은 자연 속에서 이상을 의탁하고 발견한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임을.

 

이후의 시들은 다소간 재미가 떨어진다. <낙심-송가>에서 시인은 자신의 생기와 상상력이 저하되고 쇠퇴하였음을 탄식한다. 시인에게 그것은 낙심천만한 치명적 위기이니 상상력과 아름다움을 만드는 환희를 상실한 까닭이다. <잠의 고통>은 아편의 부작용으로 인한 불면에 시달리는 시인의 처참한 공포와 고통이 뼈저리다. <관념적 대상을 향한 한결같은 마음><사랑의 기억>에 뒤이어 <희망 없는 일>에서도 이른 봄의 깨어나는 활력과 대비되는 자신의 쇠약함에 다시 한 번 낙담한다.

 

빛을 잃은 입술과 화관 없는 이마로 난 배회하고 있으니. (P.155)

 

<윌리엄 워즈워스에게>는 워즈워스의 <서곡> 낭송을 들은 후 감회를 술회하고 있다. 두 쪽에 걸쳐 <서곡>의 주제와 제재들을 열거한 후 친구 시인 워즈워스와 그 작품에 대한 예찬을 아끼지 않는다.

 

성스러운 두루마리인 그대의 작품은

진리의 이어진 노래, 심오한 진리의

연속된 감미로운 노래, 배운 것이 아니라

타고난 그 자체의 자연스러운 곡조를 들려준다오! (P.147)

 

작품을 듣던 순간의 행복한 회상과 상념으로 마무리하는 장면에서 독자는 두 시인 간의 오랜 친교와 함께 시적 창조력이 고갈되어 씁쓸해하는 시인의 친구에 대한 부러움과 찬미가 혼합된 감정을 느낄 수 있으리라. 시인으로서의 후년의 자괴감은 그의 <묘비명>에도 여전하다.

 

따뜻한 가슴으로 읽어 주요, 이 무덤 속에

한 시인이, 아니 한때 시인 같았던 이가 누워 있으니.- (P.156)

 

콜리지의 충실한 해설이 이 책의 다른 장점이다. 역자는 초기 시편에서 자유의 이상에의 헌신, 사악한 압제자들에 대한 분노와 순결하고 억압받는 이들에 대한 인간애, 인간 조건을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인다고 언급한다. 이어 대화시의 의미와 대화시와 풍경시의 관계, 그리고 대화시의 의의를 상세히 논평하고 있어 유익하다.

 

대화시가 다른 한편으로 17.18세기 풍경시의 전통 속에 자리해 있음을 시사한다. (......) 시적 상상력에 의해 주체와 대상, 정신과 자연 간에 뜻깊은 관계를 맺어 주는 상징적 지각의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18세기 풍경시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 (P.161)

 

대화시의 철학적 핵심은 바로 이 생명의 전일성에 대한 신념이다. (P.161)

 

개별 작품으로 들어가면 <노수부의 노래>에서 단순한 괴이한 항해담이 아니라 인간성에 내재한 악의 성격에 관한 진지한 탐색의 기록”(P.163)임을, 시인이 여기에 스스로의 고통, 두려움, 죄의식, 회한, 무력감 등의 감정을 투영했음을 밝히고 있다.

 

<크리스타벨>에서도 이 시의 매력은 표층적인 고딕 로맨스의 요소들보다는 여러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를 통해 선과 악, 사랑과 증오, 순수와 관능, 외관과 실재 간의 모호한 상호 관계 또는 양가성의 문제를 진지하게 탐구하려는 콜리지의 노력에서 비롯된다.”(P.165)고 하여 작품의 성격과 의의를 명쾌하게 정리한다.

 

요컨대 이 책은 원문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는 아쉬움만 제외한다면 주요 작품의 수록과 상세한 해설로 콜리지의 시세계를 전반적으로 조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꽤나 흥미로우면서도 유익한 책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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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 축복처럼 꽃비가 - 장영희가 남긴 문학의 향기
장영희 지음, 장지원 그림 / 샘터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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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장영희 선생의 유고집이다. 2010년 작고 1주년을 기념하여 출간되었다. 상업적 고려보다는 순수하게 선생을 추모하기 위한 갸륵한 뜻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죽어서도 이렇게 기리는 사람들이 있다니 선생은 행복한 사람이다. 책은 전형적인 선생의 책 스타일 그대로 나왔다. 예쁜 표지에, 꽃과 새를 그린 아름다운 그림들이 책장 곳곳에 숨어있다. 선생이 보았다면 좋아서 감탄하였을 듯하다.

 

전체 3개장으로 구성되었는데, 1장의 부제는 장영희가 사랑한 사람과 풍경으로 이미 출간된 두 권의 책 <내 생애 단 한 번>,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과 같이 에세이를 수록하고 있다. 앞서 나온 책들에 미처 담지 못한 신문 에세이와 칼럼에 실은 글들이다. 내용은 이미 충분히 어떠하리라고 짐작 가능하다. 선생의 글쓰기 소재는 본인 말마따나 제한적인 편이며, 글쓰기 방향도 사랑, 자기반성, 세태 유감, 장애 또는 수업 관련 일화 등이다.

 

자꾸 만 커지는 이 세상에 나의’, ‘우리를 다시 생각해본다. 우리 부모님, 우리 학생들, 우리 이웃들,...... (<나의 안토니아>에서, P.33)

 

그 위대한 순간은 우리가 모르는 새 왔다 가는지도 모른다. 남들이, 아니면 우리 스스로가 하찮게 생각하는 순간들 속에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무심히 건넨 한마디 말, 별 생각 없이 내민 손, 스치듯 지은 작은 미소 속에 보석처럼 숨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위대한 순간은 온다>에서, P.39)

 

물론 지금 당장 나의 편리, 나의 이해관계를 먼저 생각하는 건 인지상정이다. (.......) 단지 우리 학생들에게 내가 만약 저 사람이라면 얼마나 슬플까......’를 생각할 줄 아는 마음을 가르치는 것,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저 사람이라면>에서, P.90)

 

하면 된다라고 아무리 아우성쳐도, 안 되는 일은 안 된다. 둥근 새의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라고 생각하는 지혜가 새롭다. 때로는 포기도 미덕이기 때문이다. (<‘둥근 새동화가 일러준 포기의 지혜>에서, P.118)

 

살아온 길을 뒤돌아보면 너무나 쉽고 간단한데, 진정한 삶은 늘 해답이 뻔한데, 왜 우리는 그렇게 복잡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것일까? (<신문에 없는 말들>에서, P.141)

 

선생의 팬이라면 다시 한 번 작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반가울 것이며, 뜨내기 독자라면 비슷한 반복이군 하며 심드렁하게 반응할지 모른다. 아름답고 신선한 것도 익숙해지면 새로운 놀람의 빛을 잃어버리기 마련이듯이. 그럼에도 선생의 글을 읽는 것은 여전한 즐거움이다. 무시하고 외면하거나 이미 잊어버려서 기억 속에 아련히 남아있는 예쁘고 순수하며 마음 따스하고 뭉클한 여운을 안겨주는 감성과 상념들. 자신을 한없이 부족하고 결점 많은 항상 잡다한 현실에 허덕이며 후회하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우리 독자들은 안다. 선생만큼이나 투명한 영혼을 지닌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을. 개인적인 글을 제외하면 아울러 선생 자신이 번역하거나 주목한 문학작품에 대한 전반부의 글이 인상 깊다. 앤 타일러, 카슨 매컬러스, 윌라 캐더 등의 작가가 쓴 작품들을 불현 듯 읽고 싶은 충동이 인다.

 

2장은 장영희가 사랑한 영미문학이란 부제인데 일간지의 문학 칼럼에 게재하였던 글들이라서 글쓰기 형식이 고정화되어 있다. 유명한 소설 또는 시의 일부를 영한 대역으로 싣고 짤막한 해설 내지는 작자의 감상을 덧붙이고 있다. 주로 시 작품을 많이 소개하고 있는데 이전에 나온 문학 소개서와는 의외로 중첩되는 사례가 많지 않다. 세어보니 모두 30편이다. 이와 세어보는 김에 1장도 세었더니 여기는 29편이다. 유달리 기억에 남는 작자의 해석 이야기를 아래 언급한다.

 

혼돈의 시대, 영혼의 불모지에서도 꺼지지 않는 개츠비의 낭만적 이상주의를 피츠제럴드는 위대함으로 보았던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P.167)

 

시인이 글자와 글자 사이에 ‘ll’로 네트를 쳐놓은 것은 우리 사이에 네트가 너무 많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겠지요.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는 질시와 무관심과 불신의 네트 말입니다. (<40 Love>에서, P.223)

 

스스로를 크게 키운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한껏 마음이 커져야 한다는 말이겠지요. 생명에 감사할 줄 알고, 세상의 치졸함과 악을 뛰어넘을 줄 알고, 한 발자국 떨어져서 삶의 아름다움을 느낄 줄 알고, , 그리고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내 마음속의 위대함을 깨닫는 일이 아닐까요. (<새해 생각>에서, P.251)

 

마치 이 복잡다단하고 누추한 세상에서 떨어져나와 4차원의 세계로 옮겨간 듯, 나와 자연과의 완전한 합일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영혼을 물에 담가 깨끗이 씻듯 맑고 신성한 순간입니다. (<2월의 황혼>에서, P.263)

 

마지막 장은 선생에 대한 추모사들과 선생을 추억할 수 있도록 사진과 약력 등이 추가하여 글로만이 아닌 눈으로도 선생을 기억할 수 있도록 독자들을 배려한다. 이해인 시인의 추모시와 박완서 작가의 추모글을 통해 선생의 교우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의 목소리와 내심을 글을 통해 여럿 보았는데 이제 사진으로도 보게 되니 묘한 느낌이 든다. 오랜 펜팔 친구의 사진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이 책 이후에도 선생의 이러저러한 글들을 모아서 수권의 책이 더 출간되었지만 더 이상은 보지 않을 생각이다. 선생이 직접 세상에 영원히 드러내고 싶은 글들은 진작 책으로 나왔고 유고집도 나온 마당에 더한 것을 바라고 탐냄은 과욕일 것이다. 차라리 선생이 직접 번역한 문학작품들을 읽어보는 게 선생에 대한 예의이자 선생을 보다 잘 이해하고 가슴 가까이 추억하는 방법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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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의 손, 은화 한 닢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 책세상 / 199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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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꿈의 은화>이다. 1934년 처음 발표하였고, 1959년에 전면적으로 개작하였다. 따라서 초기작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원숙한 필치가 배어난다. 배경은 1930년대 이탈리아 로마. 실명은 거론하지 않지만 독재자 치하임을 밝히고 있어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집권 시기임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은화 한 닢을 매개로 은화를 건네주고 건네받는 관계 설정을 통해 다종다양한 인간 군상의 삶의 행태를 차분하게 묘사하고 있다. 작가는 인물들에 지나친 감상을 부여하지 않는데 딱하고 동정 받을 만한 인물에도 덤덤하며 비난받을 여지가 충분한 인물의 경우에도 그들의 입장과 시각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한 번 더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한다. 은화 한 닢의 구상은 작가에 따르면 상투적이지만 의도적이라는 측면에서 작위성이 강하다. 그것은 여러 인물들을 하나로 묶어주어 작품에 체계성을 부여하는 역할도 수행하는 동시에 그들의 삶이 비록 개별적이고 고립적인 삶이지만 세상과 완전히 동떨어진 삶은 아님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소설은 마르첼라에 의한 독재자 암살 기도와 실패를 줄기로 한다. 독재자와 암살 기도를 제재로 했다고 해서 파시스트 독재 고발을 목적으로 했다고 여기면 지나친 의미 부여가 될 것이다. 암살 시도는 오히려 작품의 계기가 되었음직하다.

 

인물들 간에 어지럽게 뒤섞인 인간관계를 따라가 보자. 파올로 화리나는 여배우 안졸라 피데스와 창녀 리나 키아리와 연결된다. 화장품상점 주인 줄리오 로비지는 딸 조반나를 통해 사위 카를로 스테바와 관련되고 상점 점원 영국 아가씨 존스 양과 연결된다. 창녀 리나 키아리는 파올로 화리나, 애인 마시모, 의사 알렉산드로 사르테와 이어진다. 사르테는 암살 미수의 마르첼라의 남편이자 극장에서 여배우 안졸라 피데스와 마주친다. 안졸라 피데스는 누구인가? 그녀는 안졸라 디 크레도로 언니는 로잘리아 디 크레도로서 성당에서 양초 파는 아가씨다. 사르테의 아내 마르첼라는 카를로 스테바와 마시모로, 마시모는 리나 키아리와 나중에 늙은 화가 클레망 루와 인연이 있다. 꽃 파는 디다 할멈을 빼놓을 수 없다. 인색한 노파인 그녀는 사위 오레스테 마리눈치, 성당 주임 신부인 치카 신부, 클레망 루 등과 작중에서 연계된다.

 

로잘리아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파올로 화리나를 나쁘게 보긴 어렵다. 그는 안졸라에 매혹되어 부푼 가슴을 안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었다. 아내의 가출 후 그녀에 대한 환상을 좇으며 그녀는 창녀 리나 키아리와 지속적 관계를 맺는다. 그의 안온한 꿈은 현실의 처참함으로 깨어지고 말았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자신을 파는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자신을 빌려주는 행위를 할 뿐이다. 그러나 꿈은 살 수 있기에 이 만져볼 수 없는 상품은 온갖 다양한 형태로 팔리고 있다. 파올로 화리나는 매주 리나에게 건네주는 적은 돈으로 자기 뜻대로 되는 환상, 아마도 이 세상에서 속이지 않는 유일한 것인 환상의 대가를 치렀다. (P.18)

 

줄리오 로비지는 어떠한가? 늙은 아내와 유형에 처해진 사위로 눈물짓는 딸 때문에 그는 노심초사다. 하나뿐인 손녀마저 병약하다. 로잘리아와 안졸라는 이질적인 자매다. 로잘리아는 시칠리아의 평온을 그리워하지만, 안졸라는 시칠리아를 지긋지긋하게 여겼다. 전통과 부친에 얽매여 자신의 삶을 하염없이 쭈그러뜨리는 언니와 달리 안졸라는 배우로 대중적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그녀의 실제적 삶도 성공적인가? 거리에서 꽃 파는 인색한 노파 역시 눈부신 젊은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는 마음에 안 드는 자식들과 자신의 돈에 눈독 들이는 주정뱅이 사위가 골칫거리다.

 

전체적 비중과 의의로 보건대 그래도 이 작품의 핵심 인물은 마르첼라와 남편 사르테라고 할 수 있다. 그녀와 남편은 여러 모로 대척점에 놓인 인물이다. 급진파 대 보수파. 이상주의자 대현실주의자. 불행한 가족력을 지닌 여인 대 당대에 성공한 의사. 두 사람은 상이한 가치관에도 서로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지니고 있다. 평범한 여인이었다면 나름대로 부족할 것 없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렸을 터이다. 그녀는 남편에게서 가면 속의 참 모습을 보았다.

 

의사 알렉산드로 사르테는 하나의 얼굴이라기보다는 일련의 가면들로 이루어진 무표정하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변하는 그런 얼굴을 가진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 끝으로 알렉사드로 사르테가 자기 혼자 있다고 여기거나 혹은 누군가 보고 있지 않다고 여기는 드문 순간들에는 그의 진정한 모습, 즉 냉혹하고 무자비하며 황량한 표정을 띤 얼굴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P.93~34)

 

그렇다고 사르테가 못된 유형의 인간은 아니다. 사실 모두가 가면을 쓰고 있으며 쓰지 않는 사람들은 극소수이며 대개 사회부적응자 내지 실패자들이다. 하지만 부모의 영향, 피억압인들에 대한 이상주의적 헌신으로 가득 차 있는 그녀에게 지극히 현실론자인 남편과의 생활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독재자 케사르를 저격하러 가는 마르첼라를 묘사하는 장면은 지극히 전사적인 그녀의 모습을 잘 드러낸다.

 

한바탕 폭풍이 몰아친 이후 독재자 케사르는 영혼의 평화를 얻으며, 줄리오와 알렉산드로는 잠들지 못한다. 돈 루제로, 리나 키아리, 클레망 루, 안졸라, 디다, 마시모 모두 나름대로 삶의 하루를 마치고 있다. 존스 양도 로마를 떠날 새벽 열차를 기다린다. 그리고 디다의 사위 오레스테는 술에 취해 죽은 사람처럼 행복한 채 쓰러진다.

 

인간의 삶은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과 실제 당사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실상은 판이하게 다를 수 있다. 이는 단지 관찰자의 시점 차이 이상의 것이다. 우리는 인물의 외관만으로 내면을 섣부르게 추론하고 시비를 예단하곤 한다. 우리가 제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노려봤자 그것은 지각의 껍데기만 바라볼 뿐 지구의 핵은커녕 맨틀조차도 언감생심이다.

 

삶을 평가하는 잣대는 여럿 있다. 좋은 삶, 멋진 삶, 성공한 삶 등등. 하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일률적 평가는 불가능하다. 인생은 교과서에 나오듯 도식적이지 않다. 작가는 여러 인물의 삶을 하나하나 독자에게 제시한다. 성급하게 재단하지 않는다. 독재자로부터 저항투사에까지, 시장에서 꽃 파는 노파에서 유명 여배우에까지, 삶의 스펙트럼을 그저 보여줄 뿐이다. 그네들의 현실의 삶의 외양과, 내면 독백을 통한 진실한 목소리를.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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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붓다, 그 위대한 삶과 사상
법륜스님 지음 / 정토출판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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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석가탄신일이 지나간다. 매년 다가왔다가는 떠나가는 날이지만 석가탄신일은 크리스마스와 함께 묘한 여운을 남긴다. 단지 달력에 빨간색이 칠해진 공휴일이어서는 아니다. 찰나지만 경건한 마음을 지니고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고나 할까.

 

근자에 석가모니의 전기를 읽었는데 그 내용이 또렷이 떠오른다. 예수의 지상에서의 삶의 이력이 신약의 주요 복음서들에 오롯이 담겨 있는 반면 석가모니의 경우는 그러하지 못하다. 학창시절에 배운 기억을 되살려도 이른바 사문유관을 계기로 왕자의 신분을 던지고 출가하여 깨우침을 얻었다는 정도만 있을 뿐이다. 깨우침 이후의 행적은 상대적으로 길고 평온한 생과 어우러져 그다지 언급되지 않는다. 그나마 대중적인 경전에도 부처의 말씀만 있을 뿐 부처 자체에 대한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면에서 부처의 전생과 탄생, 출가 전과 출가 후, 그리고 열반에 이르기까지 일목요연하게 부처의 삶을 정리한 이 책은 자못 의미가 깊다. 비록 신자가 아니라도 인류의 큰 영혼이 된 인물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책은 먼저 서장에서 부처가 태어난 인도의 사상과 역사를 개괄하고, 부처 활동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 대한 사전 지식을 알려주고 있어 이후 서술하는 내용을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무엇보다 아리아족과 드라비다족의 전쟁을 웅장한 서사시로 묘사한 인도의 정신적 유산인 베다를 종교적 지배의 의미로 해석한 점이 인상적이다.

 

구성은 여러 경전에서 발췌한 부처의 삶의 기록들을 연대순으로 배열하고 각각의 대목마다 풀이와 친절하고 상세한 해설을 덧붙이고 있다. 주로 인용되는 경전은 <본생경>, <불본행집경>, <과거현재인과경>, <방광대장엄경>, <불설보요경> 등 친숙하지 않은 편이다. 글쓴이는 역사적 연대기적 발자취와 아울러 그것의 종교적 함의와 현대의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를 제시하여 단순히 역사적, 종교적 인물의 삶을 기술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불교가 기독교, 이슬람교와 다른 점은 유일신 신앙이 아니라는 점이다. 불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부처인 석가모니불은 전생과 후생의 무수한 부처 중의 하나일 뿐이다. 전생담에서 수메다 행자가 발원하고 설산동자와 호명보살의 구도행으로 이어져 석가모니불로 현생에 탄생하게 되었다. 절대자의 존재를 사전에 설정하지 않고 구도자의 깨달음으로 절대자의 지위에 오를 수 있도록 한 점은 불교만의 특색이다. 글쓴이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 스스로 자신의 운명과 우주의 주인임을 밝히고 주체적인 의지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도록 하는 데 불교 사상의 참뜻이 있다 하겠습니다. (P.35)

 

화신불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은 석가모니 부처님만이 부처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생명, 즉 일체중생 모두가 화신불로 이 세상에 왔다는 것입니다. (P.49)

 

만약 싯다르타가 인간들의 고통과 참혹을 외면하고 사문유관을 겪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불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점에서 불교의 종교적 사명과 지향점은 명확하다. 고통 받는 중생의 구제. 불교의 역사는 고통받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강력한 서원으로부터 시작된 역사”(P.52)인 것이다.

 

인간 해방의 역사는 오로지 인간에 의해, 그것도 고통받는 인간을 구제하겠다는 인간의 발원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인간 해방의 역사는 인간을 구속하고 종속시켜 고통에 빠뜨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강력한 자기 발원이 실현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P.63)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탄생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질주한다. 죽음은 회피할 수 없는 절대적 명제로 다가오며 병들고 늙는 현상 역시 모면할 수 없다.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통으로 인식하고 고통 받는 중생에 동정과 연민을 느끼고 구제하겠다는 마음은 과연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이해 어렵기도 하다. 자연 현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 아닌가. 석가모니와 불교의 가치관은 염세주의에 기반 한 게 아닌가. 인생은 고()라는 명제처럼.

 

글쓴이는 사문유관의 참된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사문유관의 의미를 죽음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실존적 고통을 인식하게 된 계기로만 파악한다면, 자칫 부처님의 출가를 지극히 개인적이고 관념적이며 현실도피적인 행위로 전락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P.154)

 

싯다르타가 길거리에서 본 생로병사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닌, 가난한 이들과 노예들의 비참한 삶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싯다르타는 사문유관을 통해 천민들의 처절한 현실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P.160)

 

싯다르타는 부귀와 공명을 버리고 기득권을 포기하며 출가한다. 왕자의 지위를 떠나 수행의 길로 들어선 모습, 그리고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여러 스승을 찾아가고 다양한 방식의 오랜 수행을 감내하는 장면에서는 새삼 그의 길이 쉽지 않았을 것을 알게 된다. 보통은 싯다르타가 부처가 되는 것은 전생에서부터 기정사실화되어 있기에 특별한 존재이니만치 쉽사리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되어서다.

 

불교에서의 출가는 단지 주거지를 나온다는 형식적인 의미를 말하지 않습니다. 기존의 관습, 즉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과 안일한 삶의 태도로부터 탈출하는 것을 말합니다. 출가는 이제까지 갖고 있던 거짓된 가치관을 버리고 부처의 길을 향해 삶의 방향과 자세를 전환할 때 가능합니다. (P.195)

 

고타마는 삶의 방식에서 쾌락주의와 고행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출가수행자의 수행 방법으로서의 선정주의와 고행주의를 비판했습니다......극단을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P.276)

 

중도는 아무 방법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수행의 최고의 길을 바로 중도, 즉 정해진 길이 아니라 정함 있음이 없는 법인 것입니다. (P.291)

 

싯다르타의 깨달음이 정확히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진리의 절대성이 언어의 상대성에 어찌 수용될 수 있겠는가. 사성도와 팔정도 또한 깨달음을 얻기 위한 각성과 수행의 태도를 의미하지 절대적 진리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수행하는 개인의 몫이다. 하지만 부처의 깨달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는 있다.

 

부처님은 신 중심적이고 계급 중심적인 이데올로기와 가치를 벗어나 인간이 자기 삶과 이 세상의 주인임을 깨달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해탈이라고 합니다. 이는 부처님이 탄생게에서 보여주신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구체화된 것입니다. (P.432)

 

종교의 역할과 중요성에 대한 기대가 어느 때보다 높은 현대에, 종교의 비중과 인식은 오히려 나날이 저하되고 있다. 종교와 종교인을 바라보는 세인의 눈은 호의적이지 않다. 본연의 수행 보다는 분파와 이권 다툼의 만연은 냉소를 자아낼 뿐이다. 설익은 아전인수 격의 주장이 난무하고 있다. 글쓴이가 부처의 삶을 정리한 목적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근원으로 돌아가 현재를 비추어 보기. 더없는 기쁨과 뼈아픈 반성의 기회로 삼도록.

 

우리가 참된 불자라면 매일매일 부딪치는 삶의 문제를 해결할 때 가장 중요한 지표가 되는 것은 부처님의 삶이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럴 경우에 어떻게 결정하셨을까?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며, 이렇게 부처님의 삶을 따라 살고자 하는 것이 진정한 귀의불의 정신입니다. (P.355)

 

모든 승가의 대중은 마땅히 자기 스스로가 등불이 되고 자기 스스로가 의지처가 될 것이며, 부디 다른 사람을 의지처로 삼지 말아야 한다. 또한 진리의 법을 등불로 삼고 진리의 법을 의지처로 삼을 것이며, 부디 다른 것을 의지처로 삼지 말하야 한다. (P.490)

 

진리에 대한 판단 기준은 부처님의 말씀, 즉 진리의 법과 율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누가 말하든 누구의 권위를 빌어서 말하든 편견에 사로잡히지 말고 부처님의 전체적인 말씀 속에서 신중하게 판단하라는 것입니다.....부처님의 가르침이 진리임에는 분명하지만 어떤 하나의 가르침을 무차별적으로 모든 것에 적용해서는 그 진리의 참뜻을 살릴 수 없습니다. (P.502-503)

 

부처의 말씀을 근거로 삼으면서도 부처를 절대적 도그마로 삼지 말라고 한다. 길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는 말과 상통한다. 중요한 것은 슈라바스티 성의 가난한 여인의 작은 등불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출가와 발원의 근본 목적을 잊지 않는 것이다. 비록 작은 등불이지만 마음 착한 여인의 넓고 큰 서원과 정성으로 켜진 것이기에 영원히 꺼지지 않듯이.

 

나는 일체를 깨달은 사람이고, 일체를 능히 아는 자이다.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아 어떤 것으로부터도 오염되지 않아 망집과 욕망에서 벗어난 해탈자이다. 나는 모든 번뇌를 항복받고 사악한 세력과 싸워 이긴 승자이다. 모든 것을 스스로 깨쳤으니 누구를 스승으로 받들겠는가. 나에게는 스승도 없고 스승 될 사람도 없으며 인천계에 나와 비견될 사람이 없다. 나는 최고의 무상정등정각을 이루었으니 붓다라 이름 하노라. (P.362)

 

부처는 누구인가에 대한 부처 자신의 선언이다. 이렇게 뛰어나고 위대한 부처는 우리같이 범상하고 무난한 존재와 뿌리에서부터 차별되는 특출한 현상인가? 글쓴이는 아니라고 단언한다.

 

깨달음이란 기적과 같은 어떤 특별한 능력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장 평범한 삶의 모습과 생각 속에서 부정적인 모습을 극복하고 올바른 모습을 지향하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부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을 하신 분이 아니라, 우리 모두 할 수 있지만 누구도 하려 하지 않은 일을 하신 분입니다. (P.521)

 

참으로 오랜만에 많은 생각을 하고 촉촉하게 심금을 울리는 글을 읽었다. 육백 면에 가까운 두터운 책임에도 읽는데 그리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으며 오히려 미처 알지 못하던 부처의 삶과 사상에 대해 자세히 접근할 수 있는 좋은 계기였다. 이 시점에서 글쓴이에 관한 세부적 사항과 그가 이끄는 모임과 조계종의 관계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열반에 이르기까지 종단을 바른길로 이끌어가는 시대의 대덕이 되길 바라마지 않을 뿐.

 

마지막으로 생명의 절대적 존엄성을 일깨우는 수메다 행자와 매의 일화에서 글쓴이가 적시한 대목이다. 물질주의적 사고관에 깃든 현대에서는 생명의 존엄성도 상대적으로 가치가 부여되는데, 이에 대한 단호한 부인이 구구절절이 가슴에 와 닿는다.

 

모든 생명은 본성에서 살펴볼 때 영원하고 자유자재하며 상호 평등합니다......생명은 다른 것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가 될 수 없으며 그 자체 그대로 가치 실현의 목적입니다. 또한 생명은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므로 어떤 이유로든 죽임을 당하거나 차별받거나 억압받아서는 안 됩니다.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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