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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영국 명시 낭만주의 시대 2
김천봉 엮음 / 이담북스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윌리엄 워즈워스와 새뮤얼 콜리지의 시 선집이다. 동시대의 두 사람은 개인적 친교 외에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공동시집 <서정 담시집>으로도 유명한 시인들이다.
먼저 워즈워스는 앞서 읽은 민음사판 시 선집을 통해 대략적인 윤곽을 파악하였다. 자연에 대한 관조적 예찬, 자연을 통해 바라본 인간 내면의 모습 등. ‘차분한 기쁨’이라는 표현이 그를 단적으로 상징한다. 이 책은 잘 알려진 <틴턴 사원>과 몇 편의 단시 외에 새로운 시들을 소개하고 있어 유익하다.
<사이먼 리>는 <루시 그레이>와 마찬가지로 발라드에 속한다. 늙은 사냥꾼의 과거 영광과 현재의 쇠락이 현저한 대조를 이루는 가운데, 화자가 베풀어 준 친절에 사이먼 리가 표하는 감사와 찬사에 대한 시인의 시니컬한 인식이 이채롭다. <우리는 일곱>에서는 화자와 시골 소녀 간 팽팽한 줄다리기가 압권이다. 자매형제의 수를 묻는 화자에게 소녀는 거리낌 없이 죽은 아이의 숫자도 포함시킨다. 죽은 아이를 포함시키는 소녀를 화자는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더불어 생생히 살아있는 아이를 숫자에서 제외시키는 화자를 소녀는 이해하지 못한다. 소녀의 형제자매는 과연 몇 명이라고 해야 올바를까?
<충고와 대답>과 <입장전환>은 쌍을 이루는 작품들인데, 시인과 친구 간의 대화 형식으로 씌어 있다. 전편에서는 자연을 바라보는 시인에게 친구가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책을 보라고 하자 시인은 오감을 통해 느끼는 진실이 더 가치 있다고 대답한다. 후편에서는 입장이 바뀌었다. 책에 파묻혀 있는 친구를 이번엔 시인이 책을 지루하고 끝없는 투쟁이라고 부르며 자연 속의 무수한 기쁨과 지혜에 눈뜨라고 권유한다.
자연이 이끄는 지식은 달콤하지.
우리네 참견하는 지성은
사물의 아름다운 형상을 일그러뜨려,
-우리는 해부하려고 살해하니까. (<입장전환>에서, P.39)
다시금 읽어보는 <틴턴 사원>은 여전히 심오하며 흥미롭다. 자연의 표피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관조와 사색을 통해 시인은 자연 속에 내재한 깊은 진리를 체득한다. 그것은 감각뿐만 아니라 정신과 영혼을 숭고한 기쁨으로 가득 채우는 고귀한 감정이다.
......세월이 흐른 후,
이 야생의 황홀한 경험들이 무르익어
차분한 기쁨이 될 때, 너의 마음이
온갖 사랑스런 형상을 담는 저택이 될 때,
너의 기억이 온갖 달콤한 소리와
화음들이 사는 장소가 되기를. (<틴턴 애비>에서, P.53)
<열매따기>에서 화자는 숲 속 깊이 아무도 손댄 흔적 없는 개암나무를 발견하곤 환희와 달콤한 기분에서 자연의 기쁨을 만끽한다. 이윽고 무자비한 열매 약탈을 감행한 후 문득 뒤돌아선 화자는 묘한 고통의 감정을 느낀다. 일상적인 제재, 유머러스한 표현이 전후의 극명한 대조와 어울려 자연의 신성을 더럽히는 인간을 나타낸다.
명성이 자자한 <불멸 송가>는 확실히 어렵다. 반복하여 읽어봐도 이해의 끄트머리라도 제대로 짚은 지 자신이 없을 지경이다. 작품 서두에 <무지개>의 후반부를 인용하고 있는데, 이 부분이 작품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아이가 어른이 아버지인 연유는 자연의 경이를 응시하며 자연의 경건에 복종하는 삶의 자세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시는 <무지개>를 장시화한 것이라고 섣불리 추정 가능하다.
1연에서 4연까지 시인은 오월의 화사한 봄을 노래하면서 경이로웠던 자연의 환영과 영광이 사라졌음을 애석해한다. 아이에서 청년을 거쳐 어른으로 자라나면서 영혼의 눈부신 빛을 일상의 빛으로 흐릿해진다고 탄식한다. 행복의 길을 스스로 외면하면서 생의 고뇌와 무게에 짓눌려 허우적대는 인간의 삶의 씁쓸한 장면이 이어서 8연까지 이어진다. 인간은 어차피 필멸의 운명을 타고난 존재일 때, 제아무리 발버둥쳐 봤자 본성을 거스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여기서 진리를 발견한다.
그 무엇도 빛나는 풀밭, 찬란한 꽃의
시간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 해도,
우리는 슬퍼하기보다는 차라리
뒤에 남아 있는 것들에서 힘을 찾으리. (<불멸 송가>에서, P.97)
9연과 10연의 자각 이후 자연은 시인에게 보다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특유의 즉각적이고 표면적 기쁨을 넘어서 이제는 자연의 내밀한 진리를 인식한 성숙한 아름다움과 기쁨으로. 이를 통해 우리는 워즈워스 시의 기본적 토대는 여일함을 깨닫게 된다.
콜리지의 시풍은 워즈워스와 확연히 다르다. 이는 그의 시 몇 줄만 읽어봐도 금세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워즈워스의 낭만주의는 자연, 평민, 어휘에서 전대와 차별성을 드러낸 반면 콜리지는 꿈과 환상, 괴기, 상징 등 이른바 초현실주의에 가까운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대표작 <노수부의 노래>를 본다. 장편 발라드인 이 작품은 노수부가 알바트로스를 쏘아 죽인 후 저주받아서 겪게 된 체험담을 친척 결혼식에 가는 청년을 붙잡고 들려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서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화자인 노수부의 쇳소리 나는 듯한 거친 어조다. 열대의 무풍 해역에서 타들어가는 배와 선원들, 그리고 노수부를 향한 비난과 저주의 눈초리. 유령선, 선원들의 죽음과 살아있는 시체들, 유령 선원들, 이에 대비되는 천사무리. 노수부의 이야기는 그대로 장편 환상소설로 쓰여도 족히 흥미로울 정도다. <아서 고픈 핌의 모험>이 문득 연상된다. 이 작품이 당대인들에게 주었을 충격과 반향을 생각해보면 어마어마하였으리라. 어둡고 음산한 분위기와 공포를 자아내는 사건들의 연속과 강렬하면서 생생한 묘사 등.
강한 바람이 배에 도달했지. 그게 포효하다
뚝 떨어졌네, 마치 돌처럼!
번개불빛과 달빛 아래서
죽은 사람들이 신음을 토했네.
신음하며 꿈틀대다, 다들 벌떡 일어났어,
아무 말도 없고, 눈도 움직이지 않았네.
그 죽은 자들이 일어나는 모습을
꿈에서 봤다고 해도 이상했을 게야. (<노수부의 노래>에서, P.149)
또 하나의 환상이 만들어 낸 작품이 바로 <쿠블라 칸>이다. 몽골 제국의 쿠빌라이 칸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것인데, 기실 시 자체보다 시에 얽힌 일화로 더 유명한 듯하다. <아이올로스의 풍금>은 시인의 아내를 등장시키고 있는데, 숲속 오두막을 둘러싼 자연 풍경의 아름다움과 신혼의 행복에 취한 시인은 수수한 류트를 신화 속 아이올로스의 풍금으로 상상한다. 만물 속에 깃든 정령들이 류트 소리에 맞추어 충만한 기쁨으로 활기를 머금고 춤추는 장면.
그러니 혹시 활기찬 자연의 만물이 그저
다양한 형체의 살아 있는 풍금이라면 어떨까.
동시에 각자의 영혼이자 모두의 신으로서,
형성력을 지닌 거대한, 한 지적 미풍이
그 풍금들을 휩쓸 때, 바들대며 사고로 변하면? (<아이올로스의 풍금>에서, P.201)
대화시 형식을 취하고 있는 <나이팅게일>은 새소리를 수용하는 태도의 차이에 대한 공방을 담고 있다. 새가 무슨 슬픔이 있길래 우울한 노래를 들려주겠는가마는 그럼에도 지저귐 속에 형언할 수 없는 감정적 요소가 있음을 시인은 주장한다. 한밤중 나이팅게일의 노랫소리에 매혹되는 한 처녀와 자다가 깨어 흐느끼는 자신의 아이에게 새소리를 들려줬더니 이내 고요히 눈물과 미소를 머금은 일화를 소개하면서.
워즈워스 못지않게 콜리지도 자연 애호가였던 듯하다. <지하 감옥>은 노골적으로 인간의 무자비함에 대한 실망과 혐오를 드러낸다. 인간과 반대로 자연은 부드럽고 따스하며 사랑과 아름다움을 통해 인간에게 조화의 길을 찾도록 함을 상찬하며. <이 라임나무 그늘 나의 감옥>은 부상으로 일행과 함께 산책을 나가지 못한 시인이 멋진 자연 속에서 산책을 즐기는 일행들을 상상하면서 쓴 작품이다. 찰스 램이 그의 절친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란다. 정원의 정자에서 부러움을 금치 못한 시인은 문득 라임나무 잎을 바라보면서 작고 드러나지 않은 곳에서도 자연의 솜씨를 찾아볼 수 있음에 경탄한다. 그렇듯 자연은 열린 가슴으로 다가서는 사람들에게 순수한 기쁨을 결코 저버리지 않음을.
자연의 경이의 절정은 아마도 자식, 특히나 갓난아기를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한밤의 서리>에서 시인은 모두가 잠든 한밤의 오두막에서 고요한 아름다움을 호젓이 즐긴다. 학창시절과 도회지에서 보낸 나날들을 회상하며 요람 속 아기가 자신과는 달리 자연의 온전한 품속에서 충만한 행복으로 영혼을 키울 수 있음을 기꺼워한다. 아비의 심정으로.
......그래서 넌 보고 들으리라
너의 신이 퍼뜨리는 저 영원한 언어의
사랑스런 형상들과 지적인 소리들을.
그분은 영원으로부터 만물에 깃든 그분 자신과
그분 속에 깃들어 있는 만물을 가르치는
위대한 우주의 스승! 그분이 너의 영혼을
형성시키고, 주시면서 스스로 묻게 하리라. (<한밤의 서리>에서, P.223)
워즈워스와 콜리지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확실히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콜리지의 작품들이 보다 흥미롭게 다가옴을 이해하게 된다. 공상과학 장르와 환상문학이 큰 힘을 발휘하는 시대, 당대를 선취한 콜리지의 환상적인 발라드는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소구한다. 반명 워즈워스의 경우 다소 상투적이고 진부한 일면이 없지는 않다. 그의 자연예찬론은 서양인의 시각에서는 참신하고 획기적이지만 우리네 동양의 전통적 시각과 유사한 면이 존재한다. 다만 그의 시가 단순한 자연 찬미가 아니고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기반성과 진실한 각성에 있다고 볼 때 여전히 유효성을 잃지 않는다고 하겠다.
워즈워스와 콜리지가 공동으로 발표한 <서정담시집>의 전모를 알고 싶다. 아울러 두 시인의 보다 많은 작품들을 수록한 시 선집이 시중에 나와 있다. 당분간 두 시인들의 세계에서 머물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