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즈워스 시선
윌리엄 워즈워스 지음, 윤준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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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워즈워스다.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 나온 이 시선집은 워즈워스의 주요작품들을 대거 수록하는 미덕을 발휘하고 있다. 다만 단점은 영한대역본이 아니라는 점. 따라서 구입에 앞서 신중한 고민이 요구된다. 워즈워스 시를 처음 읽는 것이 아니므로 앞서 이미 관심 깊게 읽었던 시의 품평은 여기서 제외하고, 처음 접하는 작품 또는 덜 주목하였던 시들에 주의를 기울이련다.

 

워즈워스 시에서 특징적인 요소는 작중 주인공 내지 화자의 신분이 평범하거나 상대적으로 낮다는 점이다. 시골처녀, 초라한 노인네, 촌티 나는 어린 소녀, 평범한 시골 소녀 등 전시대의 왕족과 귀족 중심과는 확연한 대조를 보인다. <가엾은 수전의 몽상>은 돈 벌러 상경한 가난한 시골처녀가 문득 고향 자연을 몽상하고 있으며, <사이먼 리>에서는 사냥개 관리인으로 힘겹게 노년을 견디는 자그마한 노인의 삶의 영욕과 애환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우린 일곱이에요>의 촌티 나는 숲지대 오두막집 어린 소녀는 자못 이성적인 시인과의 대비가 두드러지는데 독자의 시각에서는 어린 소녀에게 심정적으로 이끌리게 된다.

 

작품 속 시인의 태도는 두 가지 측면을 보여준다. 먼저 평범한 인물과 시골과 자연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얻게 되는 친근성과 소박성이다. 독자는 시 속의 제재가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은 바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라는데 새삼 친근미를 느낀다. 더구나 그것들은 일부러 꾸미려 들지 않고 원래 그러한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어 소박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는데, 가감 없이 표현하는 삶의 희로애락을 오히려 자연스럽다.

 

<문득 북받치는 슬픔을 나는 느꼈네>를 포함한 다섯 편의 루시 시편들에서 루시는 외견상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골에서 쓸쓸한 생을 마쳤지만 자연 속 루시의 죽음이 갖는 의미는 쉽사리 예단할 수 없다. 이는 <4월의 두 아침>에서 땅속에 누운 매슈의 딸과 매슈가 만난 생기 넘치는 예쁜 소녀의 연상도 마찬가지다. 인생은 수많은 사연과 곡절로 점철되었지만 그것은 자연도 마찬가지다. 특히 자연미에 대한 워즈워스의 예찬은 각별하다. <누이에게>에서 시인은 아침 일과와 책을 놓아두고 산책을 재촉하고 있다. 자연 속의 가르침이 책보다 더 깊다고 하면서. 아울러 자연물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을 환기시키고 반추할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되는 점에서 한층 값어치가 크다. <뻐꾸기에게>에서 뻐꾸기의 노래는 꿈 많던 시절의 이야기를 떠올리도록 환기하는 지저귐으로서 시인에게 황금기의 회상을 가져온다.

 

시인은 자연을 노래하면서도 자연에 정주하며 일체가 되지는 못한다. 시인은 나그네다. 그는 부지런히 시골길과 숲 속, 호숫가를 걷는다. 노상에서 마주치는 인물과 풍경이 그의 마음에 들어왔다가는 스러져간다. 이 점에서 그는 진정한 자연시인은 아니다. <사이먼 리><우린 일곱이에요>에서 시인은 작중인물과 뚜렷이 구별되는 관찰자에 불과하다. <서쪽으로 걸어가다가>에서는 나그네 시인의 정체성이 분명하다. 외로운 나그네는 정겨운 목소리의 따뜻한 인사말에 위로와 격려를 느끼고 따스한 인정을 기억한다. <홀로 추수하는 처녀>에서는 타향에서의 이국적 정서가 주는 감흥이 두드러진다. 이것은 곧 여행자의 정서다.

 

나그네의 미래에는 두 갈래 길이 놓여있다. 역마살을 가슴에 품고 평생을 정처 없이 방황해야 하는 숙명에 처하든지 아니면 언젠가는 방랑을 접고 안정된 정주의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워즈워스가 택한 길은 후자다. 자의든 타의든 자신의 선택을 탄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에 평온과 안정을 느낀다. 또한 세상과의 타협이기도 하다.

 

우리는 환한 햇볕 속 시냇물처럼

반짝이며 흘러야만 하오. 그렇잖으면 우리는 불행한 신세.(<런던에서, 18029>에서)라고 외치고 <우리는 너무 속세에 물들어 버렸네>라고 탄식하던 시인은 이제 자연과 자연이 주는 무한한 자유에 지치고 말았다. 자연신에 가까운 가치관의 변화는 새삼 자유로운 영혼은 나약함에 방황하기 쉽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고요한 사색 속에서

나는 그대의 통제를 간청하노라.

이 무법한 자유에 나는 지쳤고,

불쑥불쑥 솟는 욕망의 중압감을 느끼노라. (<의무에 부치는 송가>에서)

 

그대의 이 작품을 나는 비난하지 않고 찬양하오,

이 노호하는 바다, 저 음울한 해변을.

 

하지만 의연한 자세, 꿋꿋한 쾌활함,

앞으로 견뎌야 할 숱한 광경들을 환영하라!

여기 내 앞에 있는 것 같은 광경이나 더 심한 광경들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우리는 견디며 애도하노라. (<비가: 조지 보몬트 경이 그린 폭풍우 속 필 성의 그림을 보고>에서)

 

여기서는 낙원처럼 고요하고 노고나 투쟁도 없는 영원한 안식을 긍정한다. 시인이 인식한 종래의 자연은 어리석은 환상으로 치부된다. 상실감, 하지만 깨달음, 그리고 평온한 마음. 어쩌면 시인은 종달새의 고뇌에서 자신의 입장을 공감한 듯하다. 눈부신 하늘과 시름겨운 지상 사이. 종달새는 차라리 지상의 둥지에 정주한 시인의 자화상이다.

 

날아오르지만 헤매는 법 없는 너는 현인의 표상,

진정 천국과 집을 맺어 주는구나! (<종달새에게>에서)

워즈워스 노년의 시에서 흥미로운 대목은 기계문명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다. <증기선, 고가교, 철교>와 같은 인공물을 인간의 기술로 생겨난 (자연의) 합법적 후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편 <제임스 혹의 부고를 접하고 쓴 즉흥시>에서는 가까운 이들의 잇따른 죽음과 작별을 회고하면서 자신의 임박한 운명에 대한 공감을 결부시키고 있다.

 

<송가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얻은 불멸성의 암시>는 앞서 읽은 대목에서 다소간 오독이 있다. 도식화된 상투적 결론을 사전에 설정했다고나 할까. 시인은 아이 즉 어린 시절은 꿈의 영광과 신선함을 걸친 듯한 시절인 반면, 어른 즉 현재는 지상에서 영광이 사라졌음을 자각한다.

 

그 환상의 미광을 어디로 날아갔는가?

지금 어디 있는가. 그 영광과 꿈은? (<송가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얻은 불멸성의 암시> 4연에서)

 

유년기 소년 청년 성인으로 갈수록 빛은 평범해진다. 어린이는 속세에 물들어버려 어린 시절의 영광을 잊어버린다. 그러다가 문득 어렴풋한 회상은 온 생애의 빛의 원천이 되어 한번 깨어나면 사멸하지 않는 불멸의 바다로 시인을 인도한다. 이제 광채, 영광의 시간이 사라지고 되찾을 길 없다고 해도 슬퍼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원초적 공감, 상념, 신앙, 세월 속에서 어린 시절의 빛을 회상하고 위대한 불멸성을 새삼 인식할 수 있다.

 

이 시선집은 워즈워스의 <서곡>의 발췌와 유명한 <서정담시집> 서문을 수록하고 있다. 전자는 시인의 평생에 걸친 자서전적 대작이며, 후자는 낭만주의 문학의 선언문으로 인정받고 있다. 방대한 <서곡> 중 일부만 실려 있어 온전한 이해와 감상은 어렵지만 한 단면이나마 맛볼 수 있다. 그리고 떠남과 자유, 자연에 대한 시인의 애호의 연원을 짐작케 한다. 말미의 해설에 따르면 “<서곡>은 시인의 감수성이 자연에 의해 형성되고 또 그렇게 형성된 창조적 감수성이 어떻게 자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변형시키는가에 관한 생생한 묘사”(P.210)라고 한다.

 

<서정담시집> 서문은 작자의 시론이기도 하다. 워즈워스의 초기 주요작품들을 면면히 관통하는 기본 정서와 시인의 태도를 명백히 알려준다. 영시에 대한 이해가 짧은 일개 독자로서는 이것이 표명하고 있는 깊은 함의를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인식의 전개가 이루어졌음은 분명히 짐작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사건과 상황들을 선택해,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언어를 골라 최대한 처음부터 끝까지 그 사건들과 상황들을 서술하거나 묘사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이 사건들과 상황들에 상상력의 채색을 가함으로써 평범한 사물들이 마음에 비범한 방식으로 제시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P.194)

 

모든 좋은 시는 힘찬 느낌들이 저절로 흘러넘치는 것이고......비범한 유기적 감수성을 갖고 오랫동안 깊이 생각한 사람에 의해서만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P.196)

 

시인들은 시인만을 위해 쓰지 않고 사람들을 위해 쓴다......시인은 이 높은 곳으로 여겨지는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고 (P.199)

 

옮긴이는 해설을 통해 보편적 질서가 아니라 개인의 주관적 내면을 중시하고, 자연을 생명을 지닌 자립적 존재로 인식하였다는 점에서 워즈워스를 포함한 일군의 낭만주의 시인들의 문학사적 의의를 적시하고 있다. 더욱이 워즈워스에게 있어 자연은 단지 경치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삶에 유익한 영적 영향을 미치는 힘으로서의 자연이었음을 언급하는데 매우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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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장영희 에세이
장영희 지음, 정일 그림 / 샘터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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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장영희 교수의 두 번째 에세이집이자 유작이다. 저자의 사망 뉴스와 함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화제의 책인 동시에 내가 장영희란 인물에 대해서 비로소 듣게 된 계기가 되었다. 솔직히 처음엔 무슨 대단한 사람이기에 제도권 언론에서 그렇게 부음을 떠들썩하게 전하나 의아해하기도 하였다. 그러했던 내가 이것을 포함하여 저자의 책을 다섯 권째 읽는 셈이다. 그것도 모두 구입(신간은 아니고 중고이지만)해서 말이다.

 

장영희 선생의 글의 미덕은 새삼 느끼지만 가독성이 높다. 독자가 글을 읽는데 하등의 어려움과 불편도 느끼지 않고 쉽고 술술 읽히도록 글을 쓴다. 쉬운 글쓰기의 의미가 자칫 글의 수준이 낮다는 오해를 사기 쉽지만 과시적이고 현학적이지 않게 독자의 관심과 주의를 집중시키는 글쓰기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게다가 선생의 글은 가식 없이 솔직하다. 명문대 대학교수이자 인지도 높은 칼럼니스트로 고상하고 도도한 척 굴려고 하면 한없이 올라갈 수 있으려만 선생은 자신의 몸을 한껏 낮춘다. 신체적 장애와 관련하여 굳이 숨기지 않고 자연스레 기술하며, 부모와 가족에 얽힌 사연들, 학생들과 수업과 관련된 이러저러한 일화들을 가감 없이 서술한다. 자신의 생활 태도와 습관, 성격 등 때로는 약점이라고 치부될 만한 것도 감추지 않는다. 정리정돈에 약하고, 대단한 방향치에 길치라는 점, 게으르고 나태한 성격 등. 이런 솔직함은 대학교수이자 영문학자라는 딱딱한 껍데기에 지레 겁먹고 접근하지 못하는 대중들에게 단단한 외피를 벗어던지고 인간 장영희 본연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스스럼없이 다가서게 만든다.

 

사랑을 버린 사람이든 사랑에 버림받은 사람이든, 다시 한 번 가슴 아프게 떠올리며 보석 같은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랑의 추억이 있다는 것은 이 가을에 한껏 누릴 수 있는 커다란 축복이다. (<사랑을 버린 죄>에서, P.47)

 

세상 사는 것이 만만치 않다고 느낄 때, 죽을 듯이 노력해도 내 맘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나는 내 마음속에서 작은 속삭임을 듣는다. 오래전 내 따뜻한 추억 속 골목길 안에서 들은 말. (<괜찮아>에서, P.132)

 

일반인들의 명사의 에세이를 통해 기대하는 것은 대단한 철학과 심오한 종교, 도덕적 가치의 함양 등이 아니다. 유명인들의 생활과 생각도 우리네 범상한 이들과 큰 차이가 없구나, 그들도 역시 우리랑 비슷한 족속이구나. 이와 같은 동질감 내지 공감이 아닐까. 그런 가운데 미처 환기하지 못했거나 간과했던 삶의 반짝거리는 깨우침과 지혜를 통해 그래도 조금 뛰어난 사람이군 하면서 거부감 없이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작자 스스로는 어떻게 바라볼지 몰라도 독자들은 확실히 안다. 인간 장영희의 가슴은 더할 나위 없이 맑고 순수하며 게다가 따뜻하다는 것을.

 

이러저러한 내용 중에서 몇 군데는 특히 나의 일상과 비교하여 뜨끔하게 만들거나 좀 더 이모저모 생각하게 만든다.

 

가끔 내 마음속에는 이렇게 평화를 싫어하고 오히려 분란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도깨비 같은 게 살고 있는 것 같다......어쩌면 누구든지 마음속에는 작든 크든 그런 도깨비가 살고 있는지 모른다. (<마음 속의 도깨비>에서, P.40)

 

내 마음속 도깨비도 되돌아보면 남들 것 못지않게 커다랗고 짓궂은 녀석이다. 이 녀석은 화끈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지 않으면서 삐딱한 언사로 툭툭 내뱉는다. 속마음은 안 그런데 괜히 친절하고 부드럽게 하는 것은 약한 모습을 보인다고 생각해서인지 딱딱하고 퉁명스러움을 대놓고 표시한다.

 

어린 그들이 최선을 다해 치열하게 뼈아픈 고통과 긴장을 겪는 시간에 나는 단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무위의 재능만을 아낌없이 발휘하고 있는 것이었다. (<무위의 재능>에서, P.109)

 

글쎄, ‘무위가 반드시 무가치한 악습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현대 사회는 과도한 유위를 계속하여 요구하고 있는데서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닐까. 내가 싫어하는 용어 중 하나가 시테크이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빽빽하고 정신없는 일과를 살아가고 쉴 새 없는 약속과 과업 사이에서 허덕여야 유능하고 앞서가는 인재로 비친다. 가던 길 멈추어 서서 주위를 둘러 볼 수 있는 물리적, 정신적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무위는 참으로 유익한 재능이다.

 

그래도 지금 내가 여기서 왼쪽으로 가야 할지 오른쪽으로 가야 할지 결정하는 건 순전히 내 자유의지야. 여차하면 차 버리고 택시 타고 가면 되지. 길에서 끝없이 헤매는 것이 인생에서 끝없이 헤매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새처럼 자유롭다>에서, P.204)

 

길에서는 잘 헤매지 않는 편이다. 애초 초행길의 경우는 사전에 포털 사이트의 지도서비스 등을 검색해서 대략적인 위치와 행로를 머릿속에 담아둔다. 반면 인생에서는 갈팡질팡 이다. 묵묵히 일관된 삶을 걸어간다고 남들은 알고 있지만, 실은 아무것도 선택하거나 결정하지 못하여 그냥 직진하는 인생이다. 그런 면에서 온갖 고초에도 도전을 포기하지 않아 꿈을 이루어낸 작자가 새삼 대단하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 못 한다는데 그깟 한 명 도와준다고 세상 달라질 것 있나 했던 생각은 무더기 환자가운데 한 사람으로 무더기 학생들을 가르치며 살아가는 데 익숙한 내가 한, 참으로 알량한 생각이었다. (<나의 불가사리>에서, P.229)

 

사랑의 리퀘스트류의 프로그램을 거의 보지 않는다. 물론 TV 자체를 썩 보지 않는 연유도 있지만, 간만에 보더라도 굳이 어렵고 불우한 사람들의 삶은 보면서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다.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거나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외면한다. 속마음으로 도와줄까 망설임도 있지만 그들이 진정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인지 아니면 그런 척하면서 세인의 선의를 이용하는 경우가 아닌지 의심한다. 작자의 각성은 내 속 좁은 방어막을 위태롭게 두들긴다. 익명의 집단성에서 개체의 고유성과 개별성을 발견하는 것, 그것은 필요하지만 어려운 과제다. 이것이 나만의 흠결은 아니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인간의 영원한 화두다. 정답은 무엇인지 과연 정답은 존재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각자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생의 중도에서 혹은 마지막 길목에서 걸어온 삶을 반추하면서 뼈저린 후회를 하곤 한다. 오십대에 다다른 작자에게도 삶의 의미는 남다르게 다가오는 모양이다. 일찍이 가늘고 길게 이승에서 오래 살고 싶다는 속내를 밝혔지만 그래도 깨끗한 모습으로 가고자 하는 바람을 품는다.

 

생각해 보면 나도 내 인생의 가을 문턱에 서 있다. 삶에 대한 애착이야 남겠지만 그래도 있는 날까지 있다가 내 시간이 오면 나무처럼 풀처럼 미련을 버리고 아름답게 떠나고 싶은 마음은 있다. (<내가 살아보니까>에서, P.118)

 

에필로그에서 선생은 자신의 투병을 다시금 밝힌다. 벌써 세 번째 암 투병, 질기고도 독한 녀석이다. 듣는 말에 따르면 항암 치료는 암세포를 죽이는 동시에 정상세포마저도 죽인다고 한다. 수년간의 투병에서 벗어나 겨우 몸을 추스르고 정상적인 삶의 궤도를 밟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는데, 다시 내려오라는 성화가 극성이다. 가망 없을 줄 짐작하고 있으련만 한조각 희망의 위대한 힘을 믿고 새봄을 기다린다는 선생의 결의가 오히려 처연하게 다가온다.

 

아름다운 빚을 지고 떠나기 전에 여러분께 마지막으로 고백합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아름다운 빚>에서, P.67)

 

두 번째 투병을 위해 칼럼 연재를 마치면서 선생이 독자에게 보내는 작별 인사다. 이것을 선생의 사세구(辭世句)로 받아들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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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영국 명시 낭만주의 시대 2
김천봉 엮음 / 이담북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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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워즈워스와 새뮤얼 콜리지의 시 선집이다. 동시대의 두 사람은 개인적 친교 외에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공동시집 <서정 담시집>으로도 유명한 시인들이다.

 

먼저 워즈워스는 앞서 읽은 민음사판 시 선집을 통해 대략적인 윤곽을 파악하였다. 자연에 대한 관조적 예찬, 자연을 통해 바라본 인간 내면의 모습 등. ‘차분한 기쁨이라는 표현이 그를 단적으로 상징한다. 이 책은 잘 알려진 <틴턴 사원>과 몇 편의 단시 외에 새로운 시들을 소개하고 있어 유익하다.

 

<사이먼 리><루시 그레이>와 마찬가지로 발라드에 속한다. 늙은 사냥꾼의 과거 영광과 현재의 쇠락이 현저한 대조를 이루는 가운데, 화자가 베풀어 준 친절에 사이먼 리가 표하는 감사와 찬사에 대한 시인의 시니컬한 인식이 이채롭다. <우리는 일곱>에서는 화자와 시골 소녀 간 팽팽한 줄다리기가 압권이다. 자매형제의 수를 묻는 화자에게 소녀는 거리낌 없이 죽은 아이의 숫자도 포함시킨다. 죽은 아이를 포함시키는 소녀를 화자는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더불어 생생히 살아있는 아이를 숫자에서 제외시키는 화자를 소녀는 이해하지 못한다. 소녀의 형제자매는 과연 몇 명이라고 해야 올바를까?

 

<충고와 대답><입장전환>은 쌍을 이루는 작품들인데, 시인과 친구 간의 대화 형식으로 씌어 있다. 전편에서는 자연을 바라보는 시인에게 친구가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책을 보라고 하자 시인은 오감을 통해 느끼는 진실이 더 가치 있다고 대답한다. 후편에서는 입장이 바뀌었다. 책에 파묻혀 있는 친구를 이번엔 시인이 책을 지루하고 끝없는 투쟁이라고 부르며 자연 속의 무수한 기쁨과 지혜에 눈뜨라고 권유한다.

 

자연이 이끄는 지식은 달콤하지.

우리네 참견하는 지성은

사물의 아름다운 형상을 일그러뜨려,

-우리는 해부하려고 살해하니까. (<입장전환>에서, P.39)

 

다시금 읽어보는 <틴턴 사원>은 여전히 심오하며 흥미롭다. 자연의 표피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관조와 사색을 통해 시인은 자연 속에 내재한 깊은 진리를 체득한다. 그것은 감각뿐만 아니라 정신과 영혼을 숭고한 기쁨으로 가득 채우는 고귀한 감정이다.

 

......세월이 흐른 후,

이 야생의 황홀한 경험들이 무르익어

차분한 기쁨이 될 때, 너의 마음이

온갖 사랑스런 형상을 담는 저택이 될 때,

너의 기억이 온갖 달콤한 소리와

화음들이 사는 장소가 되기를. (<틴턴 애비>에서, P.53)

 

<열매따기>에서 화자는 숲 속 깊이 아무도 손댄 흔적 없는 개암나무를 발견하곤 환희와 달콤한 기분에서 자연의 기쁨을 만끽한다. 이윽고 무자비한 열매 약탈을 감행한 후 문득 뒤돌아선 화자는 묘한 고통의 감정을 느낀다. 일상적인 제재, 유머러스한 표현이 전후의 극명한 대조와 어울려 자연의 신성을 더럽히는 인간을 나타낸다.

 

명성이 자자한 <불멸 송가>는 확실히 어렵다. 반복하여 읽어봐도 이해의 끄트머리라도 제대로 짚은 지 자신이 없을 지경이다. 작품 서두에 <무지개>의 후반부를 인용하고 있는데, 이 부분이 작품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아이가 어른이 아버지인 연유는 자연의 경이를 응시하며 자연의 경건에 복종하는 삶의 자세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시는 <무지개>를 장시화한 것이라고 섣불리 추정 가능하다.

 

1연에서 4연까지 시인은 오월의 화사한 봄을 노래하면서 경이로웠던 자연의 환영과 영광이 사라졌음을 애석해한다. 아이에서 청년을 거쳐 어른으로 자라나면서 영혼의 눈부신 빛을 일상의 빛으로 흐릿해진다고 탄식한다. 행복의 길을 스스로 외면하면서 생의 고뇌와 무게에 짓눌려 허우적대는 인간의 삶의 씁쓸한 장면이 이어서 8연까지 이어진다. 인간은 어차피 필멸의 운명을 타고난 존재일 때, 제아무리 발버둥쳐 봤자 본성을 거스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여기서 진리를 발견한다.

 

그 무엇도 빛나는 풀밭, 찬란한 꽃의

시간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 해도,

우리는 슬퍼하기보다는 차라리

뒤에 남아 있는 것들에서 힘을 찾으리. (<불멸 송가>에서, P.97)

 

9연과 10연의 자각 이후 자연은 시인에게 보다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특유의 즉각적이고 표면적 기쁨을 넘어서 이제는 자연의 내밀한 진리를 인식한 성숙한 아름다움과 기쁨으로. 이를 통해 우리는 워즈워스 시의 기본적 토대는 여일함을 깨닫게 된다.

 

콜리지의 시풍은 워즈워스와 확연히 다르다. 이는 그의 시 몇 줄만 읽어봐도 금세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워즈워스의 낭만주의는 자연, 평민, 어휘에서 전대와 차별성을 드러낸 반면 콜리지는 꿈과 환상, 괴기, 상징 등 이른바 초현실주의에 가까운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대표작 <노수부의 노래>를 본다. 장편 발라드인 이 작품은 노수부가 알바트로스를 쏘아 죽인 후 저주받아서 겪게 된 체험담을 친척 결혼식에 가는 청년을 붙잡고 들려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서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화자인 노수부의 쇳소리 나는 듯한 거친 어조다. 열대의 무풍 해역에서 타들어가는 배와 선원들, 그리고 노수부를 향한 비난과 저주의 눈초리. 유령선, 선원들의 죽음과 살아있는 시체들, 유령 선원들, 이에 대비되는 천사무리. 노수부의 이야기는 그대로 장편 환상소설로 쓰여도 족히 흥미로울 정도다. <아서 고픈 핌의 모험>이 문득 연상된다. 이 작품이 당대인들에게 주었을 충격과 반향을 생각해보면 어마어마하였으리라. 어둡고 음산한 분위기와 공포를 자아내는 사건들의 연속과 강렬하면서 생생한 묘사 등.

 

강한 바람이 배에 도달했지. 그게 포효하다

뚝 떨어졌네, 마치 돌처럼!

번개불빛과 달빛 아래서

죽은 사람들이 신음을 토했네.

 

신음하며 꿈틀대다, 다들 벌떡 일어났어,

아무 말도 없고, 눈도 움직이지 않았네.

그 죽은 자들이 일어나는 모습을

꿈에서 봤다고 해도 이상했을 게야. (<노수부의 노래>에서, P.149)

 

또 하나의 환상이 만들어 낸 작품이 바로 <쿠블라 칸>이다. 몽골 제국의 쿠빌라이 칸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것인데, 기실 시 자체보다 시에 얽힌 일화로 더 유명한 듯하다. <아이올로스의 풍금>은 시인의 아내를 등장시키고 있는데, 숲속 오두막을 둘러싼 자연 풍경의 아름다움과 신혼의 행복에 취한 시인은 수수한 류트를 신화 속 아이올로스의 풍금으로 상상한다. 만물 속에 깃든 정령들이 류트 소리에 맞추어 충만한 기쁨으로 활기를 머금고 춤추는 장면.

 

그러니 혹시 활기찬 자연의 만물이 그저

다양한 형체의 살아 있는 풍금이라면 어떨까.

동시에 각자의 영혼이자 모두의 신으로서,

형성력을 지닌 거대한, 한 지적 미풍이

그 풍금들을 휩쓸 때, 바들대며 사고로 변하면? (<아이올로스의 풍금>에서, P.201)

 

대화시 형식을 취하고 있는 <나이팅게일>은 새소리를 수용하는 태도의 차이에 대한 공방을 담고 있다. 새가 무슨 슬픔이 있길래 우울한 노래를 들려주겠는가마는 그럼에도 지저귐 속에 형언할 수 없는 감정적 요소가 있음을 시인은 주장한다. 한밤중 나이팅게일의 노랫소리에 매혹되는 한 처녀와 자다가 깨어 흐느끼는 자신의 아이에게 새소리를 들려줬더니 이내 고요히 눈물과 미소를 머금은 일화를 소개하면서.

 

워즈워스 못지않게 콜리지도 자연 애호가였던 듯하다. <지하 감옥>은 노골적으로 인간의 무자비함에 대한 실망과 혐오를 드러낸다. 인간과 반대로 자연은 부드럽고 따스하며 사랑과 아름다움을 통해 인간에게 조화의 길을 찾도록 함을 상찬하며. <이 라임나무 그늘 나의 감옥>은 부상으로 일행과 함께 산책을 나가지 못한 시인이 멋진 자연 속에서 산책을 즐기는 일행들을 상상하면서 쓴 작품이다. 찰스 램이 그의 절친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란다. 정원의 정자에서 부러움을 금치 못한 시인은 문득 라임나무 잎을 바라보면서 작고 드러나지 않은 곳에서도 자연의 솜씨를 찾아볼 수 있음에 경탄한다. 그렇듯 자연은 열린 가슴으로 다가서는 사람들에게 순수한 기쁨을 결코 저버리지 않음을.

 

자연의 경이의 절정은 아마도 자식, 특히나 갓난아기를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한밤의 서리>에서 시인은 모두가 잠든 한밤의 오두막에서 고요한 아름다움을 호젓이 즐긴다. 학창시절과 도회지에서 보낸 나날들을 회상하며 요람 속 아기가 자신과는 달리 자연의 온전한 품속에서 충만한 행복으로 영혼을 키울 수 있음을 기꺼워한다. 아비의 심정으로.

 

......그래서 넌 보고 들으리라

너의 신이 퍼뜨리는 저 영원한 언어의

사랑스런 형상들과 지적인 소리들을.

그분은 영원으로부터 만물에 깃든 그분 자신과

그분 속에 깃들어 있는 만물을 가르치는

위대한 우주의 스승! 그분이 너의 영혼을

형성시키고, 주시면서 스스로 묻게 하리라. (<한밤의 서리>에서, P.223)

 

워즈워스와 콜리지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확실히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콜리지의 작품들이 보다 흥미롭게 다가옴을 이해하게 된다. 공상과학 장르와 환상문학이 큰 힘을 발휘하는 시대, 당대를 선취한 콜리지의 환상적인 발라드는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소구한다. 반명 워즈워스의 경우 다소 상투적이고 진부한 일면이 없지는 않다. 그의 자연예찬론은 서양인의 시각에서는 참신하고 획기적이지만 우리네 동양의 전통적 시각과 유사한 면이 존재한다. 다만 그의 시가 단순한 자연 찬미가 아니고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기반성과 진실한 각성에 있다고 볼 때 여전히 유효성을 잃지 않는다고 하겠다.

 

워즈워스와 콜리지가 공동으로 발표한 <서정담시집>의 전모를 알고 싶다. 아울러 두 시인의 보다 많은 작품들을 수록한 시 선집이 시중에 나와 있다. 당분간 두 시인들의 세계에서 머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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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민음사 세계시인선 21
W.워즈워드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197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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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블레이크와 번즈에 뒤이어 자연스레 워즈워스와 콜리지가 다가온다. 영국 낭만주의의 문을 본격적으로 열어젖힌 두 시인 중 먼저 워즈워스다. 선배들에 비교할 때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자연에 있다. 단지 짤막한 배경이 아닌 시상의 중심에 들어와서 시인의 심상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자연. 그리고 자연을 바라보는 시인의 관조적인 태도. 블레이크의 강렬한 열정, 번즈의 진솔미와 해학과는 차별되는 워즈워스만의 독특한 미감이라고 할 만한다.

 

워즈워스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예찬한다. 무심히 넘기기 쉬운 영국의 범상한 산하가 그에게는 더할나위 없이 소중한 풍경으로 다가온다. 자연의 미덕에 대한 감성을 끊임없이 자각하는 능력의 소중함, 그것이 없다면 시인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단언한다.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 설레느니,

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

다 자란 오늘에도 매한가지,

쉰 예순에도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바라노니 나의 하루하루가

자연의 믿음에 매어지고자. (<무지개>에서, P.18)

 

자연은 시인에게 자체로 그치지 않는다. 자연의 풍경이 시인의 상념에 미친 감흥을 즉물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차분한 관조와 사색의 결과로 자연은 우리에게 의미를 드리우게 된다. 워즈워스의 자연은 모두 다 이러하다.

 

무연히 홀로 생각에 잠겨

내 자리에 누우면

고독의 축복인 속눈으로

홀연 번뜩이는 수선화.

그때 내 가슴은 기쁨에 차고

수선화와 더불어 춤추노니. (<수선화>에서, P.12)

 

그런 연유로 시인은 체험 후 시간의 경과 또는 간접 경험으로도 시상을 구현하는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듯하다. <가을걷이하는 처녀>에서 간접경험을 통한 시적 영감의 발휘를 볼 수 있는데, 시인에게 직접적 자연의 생생함 보다는 자연을 통한 정서의 고조와 사념의 감흥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 <노고지리에게><뻐꾸기에게 부쳐>에서도 자연물에 의탁하여 시인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너를 찾으려

숲속과 풀밭을

얼마나 헤매였던가

너는 여전히 내가 그리는

소망이요 사랑이었으나

끝내 보이지 않았다. (<뻐꾸기에게 부쳐>에서, P.44)

 

이러한 자연 사랑은 애국 정신으로 확장된다. 애호하는 자연과 돈독한 정을 쌓은 친우들이 있는 곳, 그곳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디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낯 모르는 사람 속을>, <웨스트민스터 다리 위에서>, <다시 고토에서>와 같은 시편에서 볼 수 있는 시인의 조국 예찬은 그러나 이념적, 추상적 조국이 아닌 구체적, 자연적 조국에 대해서다.

 

내 나라 영국이여!

얼마나 그대를 사랑하는가

그때 비로소 그것을 알았노라. (<낯 모르는 사람 속을>에서, P.22)

 

세상에 이보다 아름다운 것이 또 있을까.

이렇듯 뿌듯이 장엄한 정경을

그냥 지나치는 이는 바보이리.

런던은 지금 아침의 아름다움을

의상처럼 걸치고 있구나 (<웨스트민스터 다리 위에서>, P.62)

 

반면 사랑이 깊은 만큼 이상과 부합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실망감도 클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의 열기를 목도하고 돌아온 젊은 시인의 눈에 보수적, 복고적인 영국의 현실에 대한 실망감의 토로는 당연할 것이다.

 

영국은 썩은 물이 고인 웅덩이

제단도 칼도 붓도 노변도 웅장한 대청과 방도

내면의 행복이란 유서 깊은 유산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제 잇속만 차리는 무리 (<런던 1802>에서, P.74)

 

장시 중에서 우선 <루시 그레이>가 흥미롭다. 명백히 발라드로 분류될 수 있는데, 일련의 루시 시편들과의 연관성이 궁금하다. <결의와 독립>이라는 이지적인 표제의 시는 폭우가 그친 후의 생기 넘치고 화창한 자연으로 개시한다. 황야의 나그네인 시인, 그는 자연의 기운에 힘입어 잠시 즐거움에 사로잡히지만 이내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시인이 두려움에 빠지는 연유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불안정한 앞날에 대한 시인 자신의 심려가 반영된 것은 분명하다.

 

공포와 공상이 마구 육박해 왔다.

흐릿한 슬픔 아지도 못하였고

이름 붙일 수도 없는 마구잡이 망상이. (P.80)

 

그 전의 생각이 되돌아왔다.

섬뜩한 공포, 실현되기 어려운 희망,

추위, 고통, 노동, 모든 육체의 병,

그리고 비참하게 죽은 위대한 시인들. (P.94)

 

하지만 시인은 거머리잡이 노인을 보고 자성한다. 그리고 새로이 결의를 다진다.

 

그렇듯 노쇠한 노인에게 그처럼 강단 있는 정신이 있음을 보고

나는 자신을 비웃고 싶은 지경이었다. (P.98)

 

<틴터언 사원>은 워즈워스의 장시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일 것이다. <루시 그레이><결의와 독립>은 나름대로 가시적인 줄거리를 가지고 있어 시상의 흐름을 좇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이 작품은 5년만의 재회하는 경치의 아름다움을 되새기면서 세월의 추이가 시인에게 사상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경치의 외면적 아름다움만을 인식하던 과거에서 벗어나 이제는 좀 더 깊이 사물의 본질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음을 드러낸다. 시인이 마음의 풍경’(P.108)을 인식하는 내적 단계는 작품 속에서 경치 정감 평안 기쁨 숭고 정화 사랑 사물의 얼(P.104~106)로 연결된다.

 

일변 조화의 힘과

기쁨의 크나큰 힘으로

안온해진 속눈으로

우리는 사물의 얼을 본다. (P.106)

 

나는 배웠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큰 힘을 지닌

고요하고 슬픈 인간성의 음악에

귀기울이며

자연을 바라보는 법을

그리고 나는

숭고한 생각의 기쁨으로

내 마음을 출렁이게 하는

한 존재를 느끼게 되었다. (P.112)

 

이렇듯 자연은

우리의 마음을 도야해주고

고요와 아름다움으로 감동을 주고

드높은 생각의 먹이를 준다. (P.118)

 

이러한 야성의 환희가 무르익어

차분한 기쁨이 되고,

그대의 마음이 온갖 아름다운

형상의 대궐이 되고 (P.120)

 

워즈워스 시는 단번에 독자의 눈과 마음을 잡아채지 못한다. 처음 읽어서는 그 온건한 사상과 심심한 표현에 납득이 안 가고 지루함마저 느낄 수 있다. 두세 번 되풀이 읽고 곰곰이 마음 속으로 되씹어볼 때 아 이것이 그의 시의 묘미구나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문학사적으로 볼 때 워즈워스의 가치는 앞선 귀족 중심의 시대와 달리 일반 사람들이 실제로 쓰는 말로 시를 쓰겠다고 표명한데 있다고 한다. 계급적 차별의 타파와 시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정의, 이것은 청년 시절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적 영향임을 부인할 수 없다. 중년 이후의 그의 작품들이 비판의 대상마저 되지 못하는 범작에 그친 것은 스스로 삶의 테두리를 한계지어 넘쳐흘러야 할 강력한 감정이 고갈된 연유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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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단 한번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고 장영희 교수의 첫 번째 에세이집이다. 2000년에 1쇄를 출간한 지 불과 5년만에 28쇄를 펴냈으니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책이다. 일반적인 순서와는 달리 영미시 가이드, 문학작품 가이드에서 출발하여 결국 에세이로 이어지고 말았으니 만시지탄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늦게나마 저자의 존재를 알아차린 행운에 기뻐해야 할지.

 

당시 사십대 초중반의 저자는 서문에서 꿀벌의 무지라고 자칭한다. “머리 속에 있는 말보다는 마음속에 있는 말을 고르지도, 다듬지도 않고 생긴 그대로 투박한 글로 옮긴다. 그럼에도 이만한 필력을 과시하는 걸 보면 확실히 문재는 노력 못지않게 천부적인 듯하다. 허구의 문학 장르와는 달리 에세이는 본질상 작자 자신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밖에 없다. 한겹의 가면도 허용하지 않고, 독자 앞에 나신으로 서야 하는 용기를 감내하기는 쉽지 않다. 독자는 에세이를 읽으면서 작자를 인간적으로 친밀하게 여기게 된다. 이렇듯 에세이는 철저히 개인적이지만 신변잡기의 단순한 나열을 뛰어넘으려면 그 안에 아름다움을 담아야 한다. 최고의 아름다움은 진실이다. 그럴듯한 문학적 수사가 아니라 작자의 체험과 사고와 감정이 한데 결부될 때 독자의 공감을 얻게 된다.

 

사랑해요.’ ,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그러나 또 얼마나 하기 어려운 말인가. 날 사랑해 주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면서도 나는 이제껏 한 번도 그 누구에겐가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입 밖에 내 본 적이 없다. (<사랑합니다>에서, P.57)

 

나는 아직도 내가 버젓이 잘못해 놓고도 선뜻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잘하지 못한다. 아버지가 생전에 행동으로 가르쳐 주신 겸손함의 본보기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안합니다>에서, P.204)

 

개인 장영희의 삶은 스스로도 토로하듯이 단순하고 제한된 반경에 머물러 있다. 물론 범상한 삶은 아니지만. 영문학계의 원로를 아버지로 하고, 소아마비로 행동에 불편을 겪으면서 해외유학을 통해 국내 대학의 교수로 금의환향.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현재의 삶,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 등등. 따라서 독자는 역으로 이 책을 통해 인간 장영희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는 신체부자유로 인한 좌절감,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의 상존, 몸이 불편한 자식을 돌보고 키워내기 위한 부모님의 헌신과 희생 등과 같은 개인사와 관련된 일화와 상념이 다수를 차지한다. 그 기억이 결코 기쁘고 즐거울 리 없지만 과거를 돌아보는 작자의 심경은 부모를 회상하는 대목을 제외하면 의외로 담담한 편이다.

 

글쓰기의 또 다른 줄기는 작자의 현재의 삶과 관련된 부분이다. 즉 대학 교수로서 학생들과 수업 중에 발생하게 된 일화 또는 학생 개인과 시사에 관한 이러저러한 생각의 추이 등 직업과 생활에 연관되는 소재다. 여기서 작자는 솔직한 심경을 토로한다. 세상사가 뭐 대단하길래 그렇게 아웅다웅하며 서로 상처주고 미워하며 살아간다는 말인가. 사람으로 태어나서 서로를 사랑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에도 부족한 삶인데 말이다.

 

사람 사는 게 엎어치나 뒤치나 마찬가지고, ‘’ ‘’ ‘’ ‘도 따지고 보면 다 그저 받침 하나, 점 하나 차이일 뿐이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악착같이 사이에 깊은 골을 파 놓고 그렇게 힘겹게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나와 남>에서, P.73)

 

줄 이유를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는데도, 거의 조건 반사적으로 못 줄 이유를 찾은 것은 아마도 이제껏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다져 온 나의 마음가짐 탓일 것이다. (<못 줄 이유>에서, P.122)

 

그가 꿈꾸고 바라는 삶은 소박하다. 서로에게 따뜻한 마음을 주고받고 욕심부리지 않으며 안분지족을 하는 삶. 작자의 표현에 따르면 가늘고 긴 삶. 천국을 꿈꾸지 않고 현재에 만족하는 삶. 소박하지만 우리들에게 결코 쉬운 삶의 방식은 아니다.

 

하지만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하기 짝이 없는 나의 삶에 대해 썩 만족하고 있지는 않아도 그렇다고 그에 대해 심각하게 고뇌하지도 않는다. 그냥 하루하루 어영부영 살아갈 뿐이다. (<보통이 최고다>에서, P.162)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축복받은 시간이고, 천국은 다름아닌 바로 여기라고.... (<천국 유감>에서, P.49)

 

그렇기에 아래의 말은 학생의 발언이지만 작자 자신의 견해를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웃을 오로지 넘어뜨려야 할 경쟁자로 여기지 말고 더불어 살아가야 할 상호 의지해야 할 존재로 여기는 가치관.

 

그렇게 남을 돕고 함께 나눌 줄 모르는 나라라면, 그런데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눈먼 소년이 어떻게 돕는가?>에서, P.104)

 

그래서 <걔 바보지요?>에서 인간의 잔인함과 냉혹한 비열함에 진저리치는 작자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것은 마음의 성역을 완전히 무너뜨린 행위이므로. 그럼에도 기본적으로 작자는 너그럽다. <하느님의 필적>에서 분개마저도 포용하는 그의 너그러움은 아름다우면서도 역설적으로 비인간적인 느낌마저 자아낸다면 지나칠까?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어쩌면 하느님의 필적은 우리 육체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잉크로 씌어져서, 영혼의 아름다움을 찾는 이만 읽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하느님의 필적>에서, P.209)

 

이렇게 수록된 각 이야기들 중에서 제법 기억에 남았던 편들을 두서없이 몇 가지 되새겨 보았다. 때로는 어쭙잖은 글을 끄적거리기 보다는 인상깊은 대목을 발췌하여 구슬을 꿰듯 열거만 하더라도 적확한 감흥을 드러낼 수 있다고 본다.

 

오늘날의 독자라면 이후 작자의 삶의 행로를 대개 알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작자는 무심한데, 독자는 결코 허투루 문장 하나조차도 넘기지 못한다.

 

우리들 각자가 저자인 삶의 책에는 절망과 좌절, 고뇌로 가득 찬 페이지가 있지만 분명히 기쁨과 행복, 그리고 가슴 설레는 꿈이 담긴 페이지도 있을 것이다. (<어느 가작 인생의 봄>에서, P.143)

 

이 세상에서의 고통, 고뇌, 역경이 아무리 클지라도 모두 죽음과 함께 사라지지만, 사랑은 사라지지 않고 이 세상 사람들과 저 세상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 결국 이 세상과 저 세상은 사랑이라는 커다란 고리로 연결되어 있나 보다. (<그러나 사랑은 남는 것>에서,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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