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징냐, 나의 쪽배
J.M 바스콘셀로스 지음, 이광윤 옮김, 김효진 그림 / 동녘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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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콘셀로스의 제제 3부작을 다 읽은 후 그의 최초의 성공작이라 할 만한 <호징냐>에 자연스레 눈길이 쏠렸다. 브라질의 아마존 지역을 배경으로 한 남자와 그의 쪽배 호징냐 간의 우정과 교감을 다룬 작품이라는 소개글을 보니 더할 수 없는 자연적 낭만주의의 맛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미지의 신비스런 존재인 브라질 내륙의 원시림과 강을 오르내리는 아름다운 이야기라니!

 

, 정녕코 이 소설이 이리 처절하며 충격적인 작품일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하였다. 아니, 제제 3부작만으로 작가의 경향이 사소설적 성장소설이라고 속단한 잘못도 크다. 문명 비판의 메시지가 강하게 반영된 이 작품은 전혀 의외였다.

 

작품은 1부와 2부로 구분되는데, 1부는 아라구아이 강을 떠돌아다니는 외로운 남자 제 오로꼬와 쪽배 호징냐의 여정과 대화를 기본 틀로 하여 그를 찾는 의사와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병렬 구조를 이루고 있다. 원주민이 아님에도 그들 사회에 정착하고 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제 오로꼬, 그의 존재는 원주민들에게는 외경을, 의사를 포함한 도시지역의 타지인들에게는 광기를 떠올리게 한다. 나무와 새들의 말을 알아듣고 쪽배와 대화를 주고받는 능력, 요즘이라면 대단한 재능으로 칭송받을 테지만 당대에는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 제 오로꼬는 분명 감당할 수 없는 충격과 슬픔으로 도시 지역을 떠나 외딴 변방의 마을에서 외롭게 생활하는 인물임에도 강물을 오가는 그와 쪽배의 모습에서 자취를 찾기 어렵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에게 감내하지 못할 슬픔이 찾아들었답니다. 그 이후 그는 누구와도 이야기하지도 않고 먹지도 않았어요. 마치 보지도 듣지도 않는 사람처럼 보였죠. (P.37)

 

1부의 압권은 3장에서 호징냐가 들려주는 어린 나무 니닝냐의 슬픈 운명 이야기다. 어린 씨앗이 강가에 태어나 간신히 숙녀로 자라 생애의 황금기를 보낼 찰나에 맞이하는 대홍수. 무엇보다도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뜻밖의 반전이 주는 결말의 묘미가 기막히다. 그럼에도 기억에 남는 것은 어린 니닝냐가 서서히 깨닫는 인생의 진리들.

 

아픔이 없는 인생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거란다. (P.57)

 

그것이 삶이었다. 삶은 그렇게 모든 풍요로움과 아름다움, 자애로움을 실현하였다. (P.79)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던 삶에서 다른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내주는 삶으로 바뀌었다. (P.91)

 

5장에서는 반대로 제 오로꼬가 호징냐에게 얘기를 들려준다. 2년 전 선상 여행에서 마주치게 된 한 몸 파는 여자를 둘러싼 승객들 간의 호기심과 배척. ‘예수 그리스도 강이라는 장의 표제가 궁금했는데 문제의 여인 쉬까 도이다의 말을 듣는 대목에서 연유를 알게 되었다.

 

제 오로꼬는 무심히 흐르는 강을 바라보았다. 난생처음으로 그 강물 속에서 예수님의 선한 모습을 본 것 같았다. (P.181)

 

이렇게 1부에서는 모든 장들이, 모든 인물들이 순수하고 자연스러우며 아름답고 정감을 자아낸다. 적어도 1부에 국한해서는 당초 예상했던 모든 즐거움과 만족을 누릴 수 있었다.

 

2부는 완전한 대조를 보인다. 광기를 고치러 의사를 따라 도시로 간 제 오로꼬는 정신병원에 갇히고,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비인간적 처우를 감내하게 되는 처지로 전락한다. 무자비한 폭력과 독방 생활, 자신은 미치지 않았다고 강변하는 그의 절규는 허공에 메아리칠 뿐이다. 그들이 제 오로꼬에게 세뇌를 강요하는 것은 바로 이 문장이다.

 

나무는 단지 나무일 뿐이고, 나무는 말을 하지 않는다. (P.250)

 

설사 그가 미쳤다고 하자. 그가 타인과 주변에 아무런 피해도 위해도 가하지 않고 나무와 말을 주고받는다고 정신병원에 감금하여 학대하는 게 정당화되지는 못한다. 도대체 그 의사는 무엇 때문에 일부러 오지로 찾아들어 굳이 제 오로꼬를 도시로 데려간 것인지 알 수 없다. 제 오로꼬가 자연과 더불어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사는 삶을 시기하고 질투한 소위 문명의 음모가 아닐는지.

 

2부에서는 제 오로꼬의 현실과 환상이 교차한다.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현실 속에서 그는 자연과 교감을 지녔던 변방 자연의 삶을 회상한다. 밀림에 사는 동물의 법왕 우루삐앙가, 식물의 왕 깔라만땅. 그들의 이야기는 인간과 문명에 파괴되고 위축되어 가는 자연의 실상을 상징적으로 함축한다. 우루삐앙가는 무조건 인간을 피해 달아나라고 조언한다. 깔라만땅이 들려주는 악어 이야기는 처연함과 엄숙함마저 자아낸다.

 

사람들이 그가 아무도 해치려 하지 않고 단지 평화의 사절로 그곳에 왔음을 모른다는 것을. 모닥불의 불빛, 빛나는 별이 가득한 아름다운 하늘이 담긴 눈을, 그렇게 젊은 나이에 죽어 가는 그의 커다란 두 눈을 아무도 보려 하지 않는 것 같았다. (P.319)

 

병원에서 퇴원하고 도시에서 살다가 독지가의 도움을 얻어 밀림으로 돌아온 제 오로꼬. 그는 더 이상 슬프지 않다. 아니, 슬픔을 포함한 일체의 인간적, 자연적 감정을 그는 상실하였다. 인간사회와 문명의 덕택에.

 

너무 늙어 삭아버린 쪽배 호징냐를 불태워 한줌의 재로 흩날린 후 제 오로꼬는 방랑의 길을 떠난다. 그는 도시는 물론 밀림 속 원주민 마을에서도 더 이상 정주할 수 없다. 어떤 인간적 존재도 그를 이해하지 못하며 존중하지 않는다. 차라리 밀림 속을, 자연 속을 헤매다가 유랑의 삶을 누리는 게 그에게는 더 나을 것이리라.

 

작가는 제 오로꼬가 언제까지나 외로움과 무감정에 지배당하게 놔두지 않는다. 반전을 좋아하는 장난스러운 작가는 여기서도 제2의 호징냐를 등장시켜서 제 오로꼬를 기쁘게 한다. 이제 그에게는 다시금 교감과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생긴 것이다.

 

제 오로꼬가 미친 사람일까 아니면 자연과의 소통을 이해 못하는 문명사회의 도시인들이 미친 사람일까? 작가는 호징냐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미쳤다고요? 단지 나무들과 말을 한다는 것 때문에? 무슨 어리석은 소리를! 미친 사람이란, 하느님의 섭리를 잊어버리고 자신을 이해하지 않으며 사는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이 미친 사람들이지요. (P.359)

 

그것은 이 작품을 읽는 모든 독자들의 동일한 소회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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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 - 세상에서 제일 큰 축복은 희망입니다 장영희의 영미시산책
장영희 지음, 김점선 그림 / 비채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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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에 이은 영미시 산책 두 번째 책이다. 저자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투병 중이다 보니 의식하지 않아도 희망을 주제로 한 시들을 많이 고르게 되었다고 한다. ‘세상에서 제일 큰 축복은 희망입니다.’라는 겉표지 중앙의 헤드카피가 인상적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걷잡을 수 없는 시련과 불행을 겪는 경우가 있다. 판도라의 상자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고난을 헤쳐 나가고 극복하기 위한 마음의 근저에는 희망이 존재한다. 희망은 용기와 의지, 힘을 부여한다. 그래서 저자는 희망이야말로 우리가 삶에서 공짜로 누리는 제일 멋진 축복이라고 단언한다. 그것이 한갓 무지개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희망은 한 마리 새

영혼 위에 걸터앉아

가사 없는 곡조를 노래하며

그칠 줄을 모른다. (희망은 한 마리 새, 에밀리 디킨슨, P.17)

 

희망이란 무엇일까? 미소 짓는 무지개 (쿠이 보노, 토머스 카알라일, P.57)

 

저자가 병마에 굴복하지 않고 투쟁하듯이 독자들도 온갖 시련에 굴하지 말고 분발하고 노력하여 강한 의지로써 극복하길 바라고 있다. 수록된 시 작품들의 상당수가 고난에 대한 의지적 저항을 담고 있는 연유이리라. 절망에 주저앉지 말고 희망을 품고 치열하게 행동하라고.

 

행동하라, 살아 있는 현재 속에서 행동하라!

그러니 이제 우리 일어나 무엇이든 하자......

언제나 성취하고 언제나 추구하며

일하고 기다리는 법을 배우자. (인생 찬가, 헨리 왜즈워스 롱펠로, P.29)

 

희미해져 가는 빛에 분노하고 또 분노하십시오. (딜런 M. 토머스, 순순히 저 휴식의 밤으로 들지 마십시오, P.37)

 

깃발을 꺼내라, 그리고 흔들어라......

모두 다 그 깃발을 보고

다시 힘내어 정진할 수 있도록. (깃발을 꺼내라, 에드거 A. 게스트, P.45)

 

나는 내 운명의 지배자요,

내 영혼의 선장인 것을. (굴하지 않는다, 윌리엄 어네스트 헨리, P.119)

 

내 인생은 수정으로 만든 계단이 아니었어......

얘야, 절대 돌아서지 말아라.

사는 게 좀 어렵다고

층계에 주저앉지 말아라.

여기서 넘어지지 말아라. (어머니가 아들에게, 랭스턴 휴스, P.179)

 

낮고 상처받은 이들은 세인의 무심한 한마디와 눈길 한번에도 마음에 상처를 입기 쉽다. 신체적 장애와 육체적 질병이 동시에 내리친 저자의 경우 이를 뼈저리게 느끼기 마련이다. 무시도 외면도 안 될 것이다. 섣부른 동정도 필요하지 않다. 힘들고 아픈 사람들에게 기운과 희망을 보태주는 것은 그저 감싸 안고 공감하는 마음일 뿐이다.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남이 될 수 있는 사람만이 남의 마음도 이해하는 동시에 참다운 자신도 알 수 있음을 저자는 소박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웅변한다. 그것이 진짜 시이기도 하다는 것을.

 

나 스스로 그 상처받은 사람이 된다. (나의 노래, 월트 휘트먼, P.49)

 

이제 나는

온기가 바로 시의 소재임을 안다. (템스 강 둑길, T.E., P.191)

 

삶은 행복과 즐거움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은 삶의 아픔을 더 많이 기억한다. 가난과 고통, 슬픔과 절망을 겪고 견뎌내면서, 그래도 삶이란 살아있음에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는다. 비록 세상을 뒤흔들 커다란 업적을 이루지 못하였고, 만인에게 추앙받고 기억될 위인이 되지도 못하였다. 평범하고 별 볼일 없이 때로는 비루하기 조차한 삶을 살고 있지만 그래도 삶은 무엇에 비견될 수 없이 자체로서 귀중하다. 세상사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고 성마르게 조급해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인생은 고속도로가 아니라고 하며. 그저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갈 뿐이다.

 

헤매는 자 다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금이라 해서 다 반짝이는 것은 아니다, J.R.R.톨킨, P.25)

 

생기 없는 슬픔의 술을 찬란한 금빛으로

바꾸는 법을. (연금술, 새러 티즈데일, P.61)

 

삶이 언제나 즐겁기만 하다면

우리 영혼은

차라리 슬픔의 고요한 품 속

허탈한 웃음에서 휴식을 찾을 겁니다. (하늘에 온통 햇빛만 가득하다면, 헨리 밴 다이크, P.83)

 

차라리 사는 게 낫다. (다시 시작하라, 도로시 파커, P.123)

 

삶이 소중하고 귀중한 만큼 죽음의 무게도 정비례한다.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없기에 다가오는 죽음을 회피할 수 없다. 피하지 못할 운명이라면 괜스레 움츠려서 눈물 뚝뚝 흘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죽음마저 일상사로 받아들이면 나를, 우리를 위협하는 죽음도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있다.

 

죽음이여 뽐내지 마라, 어떤 이들은 너를 일컬어

힘세고 무섭다지만, 넌 사실 그렇지 않다......

짧은 한잠 지나면 우리는 영원히 깨어나리니,

더 이상 죽음은 없다. 죽음이여, 네가 죽으리라. (죽음이여 뽐내지 마라, 존 던, P.215)

 

나는 그 누구와도 싸우지 않았노라.

싸울 만한 가치가 있는 상대가 없었기에.

자연을 사랑했고, 자연 다음으로는 예술을 사랑했다.

나는 삶의 모닥불 앞에서 두 손을 쬐었다.

이제 그 불길 가라앉으니 나 떠날 준비가 되었노라. (죽음을 앞둔 어느 노철학자의 말, 월터 새비지 랜더, P.157)

 

희망과 분발, 공감과 삶을 주제로 가슴에 두고두고 새길만한 시구와 시인들을 소개하고, 인간됨, 그리고 사랑을 놓지 않고 줄기차게 노래하지만 불현 듯 상기하는 자신의 처한 상황과 심경을 드러내는 작품들도 간혹 게재하고 있다. 이것들을 제아무리 순수한 견지에서 객관적으로 보고 싶어도 자꾸만 저자와 중첩되는 것은 피할 길이 없다.

 

지금 삶의 뒤안길에 서서 생각하면, 마음속에 가지 못한 길에 대한 회한이 가득합니다. 차라리 그때 그 길로 갔더라면....내가 선택한 길을 믿으며 오늘도 터벅터벅, 한 발자국이라도 더 앞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P.100, <가지 못한 길>)

 

그 시절을 다시 돌이킬 수 없다 해도,

우리 슬퍼하기보다, 차라리

뒤에 남은 것에서 힘을 찾으리. (초원의 빛, 윌리엄 워즈워스, P.139)

 

책의 구성 컨셉은 <생일>과 동일하다. 원문 발췌와 번역문, 그리고 간단한 소개글. 매 작품마다 들어있는 화가 김점선의 아름다운 삽화. 굳이 작심하고 완독을 하지 않더라도 이따금 펼쳐들고 한두 편 읽고 그림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만함을 누릴 수 있다.

 

마지막 시는 휘트먼의 <이별을 고하며>이다. 저자의 의도는 아니겠지만 내게는 자꾸만 저자의 사세구(辭世句)로 읽힘을 어쩔 수 없다.

 

나는 공기처럼 떠납니다......

나는 어딘가 멈추어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이별을 고하며, 월트 휘트먼,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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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의 초원 순난앵 마루벌의 새로운 동화 10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마리트 퇴른크비스트 그림, 김상열 옮김 / 마루벌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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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이들 책 중에는 내용을 들여다보기도 전에 장정과 디자인만으로도 아름답다는 인상을 주는 책들이 자주 눈에 띈다. 이 책의 경우도 여기에 해당하는데, 연둣빛 초록의 시원하고 상쾌함이 앞뒤 겉표지를 온통 휘감고 있다. 안표지는 앞과 뒤가 전혀 분위기가 다른데 앞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에 잿빛 옷을 걸치고 몸을 한껏 웅크리며 걸어가는 어린 남매가 스산함을 안겨준다면, 뒤는 신록의 봄을 맞이하여 초록으로 옷을 갈아입은 숲속을 역시 눈에 확 띠는 가벼운 빨간 옷으로 갈아입은 남매가 손을 잡고 신나게 뛰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고아가 되어 의지할 곳이 없어진 어린 오누이, 이들의 노동력을 한껏 착취하고 인간다운 대우를 해주지 않은 이웃동네 농부. 동화에서 흔한 전형적인 구도라고 하겠다. 착한 어린이, 나쁜 어른. 대개 결말은 아이들은 행복하게 되고 어른은 벌을 받게 된다. , 이 작품은 좀 다르다. 농부는 아이들을 잃어버린 것 외에 별다른 손실이 없으니 말이다.

 

오누이의 고향 순난앵과 이웃 뮈라 마을은 전혀 상반되는 이미지의 고장으로 표현된다. 뮈라 마을 이야기를 할 때 삽화는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의 잿빛 톤으로 일관하고 있어 오누이의 고생담을 시각적으로 여실히 드러낸다. 그곳 사람들은 인상과 어투에서도 불친절과 비딱함을 보여준다. 반면 순난앵에서는 모든 것이 밝고 즐겁고 경쾌하다. 아이들은 구김살 없이 놀며 맛있는 음식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

 

누구나 고달프고 힘든 때면 장밋빛 미래를 꿈꾸고 공상한다. 현실이 가혹할수록 공상의 나래는 더한층 강렬한 행복을 안겨준다. 아이들에게 순난앵 마을은 어릴 적 부모와 같이 살던 행복했던 시절을 연상시킨다. 매일같이 한겨울에도 허름한 의복에 과로한 노동에 시달리며 겨우 허기만 면할 정도의 열악한 생활에서 오누이는 탈출을 꿈꾼다. “사람들이 가난 때문에 어렵게 살던 시절에 현실의 순난앵이 그렇게 천국과도 모습을 지닐 수는 없을 것이다.

 

<성냥팔이 소녀>의 마지막은 뭉클하면서도 처연하기 이를 데 없다. 소녀는 성냥불 속에서 환상을 통해 행복과 천국을 공상한다.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유혹이지만 소녀로서는 어차피 매일반이다. 매서운 한겨울, 춥고 배고프고 지친 오누이는 앞으로 순난앵에 갈 수 없게 되자 영원히 순난앵에 머물기로 결심한다. 그들에게 뮈라 마을의 삶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그들의 행복은 순난앵에서 찾을 수 있다.

 

오누이를 이끄는 빨간 새는 깃털이 불꽃이 활활 타오르듯이 새빨갛고, 맑은 노래를 부르며 노래를 부르면 나무 가지에 쌓여있던 눈송이들이 꽃잎처럼 흩날린다. 불우한 오누이를 위로하는 동시에 현실이 아닌 다른 곳, 피안의 세계로 이끄는 영혼의 전령이자 안내자일 것이다.

 

빨간 새의 안내에 따라 순난앵을 오고가던 오누이는 마침내 두 마을을 연결하는 한번 닫히면 영원히 열리지 않는 문을 살그머니 닫는다. 이제 그들에게 암울했던 시절은 한갓 추억으로만 남게 되리라. 다행이다, 그들이 그나마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어서... 그곳이 어디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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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지가 뚫어 준 울타리 구멍 작은책마을 20
손춘익 지음, 이은천 외 그림 / 웅진주니어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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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1. 심술꾸러기 상어와 이상한 안경

2. 송아지가 뚫어 준 울타리 구멍

3. 꽃씨와 봄

4. 멍멍이의 자장가

5. 바닷속 장난감 풍금

6. 나룻배의 첫 손님

7. 민들레와 나비

8. 시골로 간 예쁜이

9. 까치와 야옹이

 

우리가 생각하는 전통적 의미에서 동화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일단 배경은 시골이나 자연이 되어야 하리라. 각박한 도시에서의 삶은 왠지 전통 동화랑 어울리지 않는 성 싶다. 다음에 등장 인물들도 순박한 시골 아이 또는 동물과 식물 등의 자연물이 적당해 보인다. 때로는 우화에 가깝다 해도 본질상 동화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심술꾸러기 상어와 이상한 안경><바닷속 장난감 풍금>은 바다를 배경으로 하여 물고기들에게 벌어지는 장난기 섞인 일화를 가벼우면서도 우습게 잘 그려내고 있다.

 

<멍멍이의 자장가><까치와 야옹이>는 각각 강아지와 고양이라는 대표적 동물을 내세웠다. 아기의 낮잠을 다른 동물들이 방해하지 않도록 동분서주하는 강아지의 노력이 가상하다. 반면 까치를 잡아먹으려고 무리하다가 진퇴양난에 빠진 고양이 또한 밉상스럽기보다 우스꽝스럽다. 강아지와 고양이에 대한 우리들의 전래상의 심상은 변함이 없다.

 

<꽃씨와 봄><민들레와 나비>는 꽃을 소재로 삼았다. 전편은 외딴 곳에 떨어진 꽃씨 하나가 매서운 겨울의 시련을 견뎌내고 예쁜 꽃으로 피어나는데 성공하였다는 어쩌면 진부하기조차 한 제재인데 관건은 식상함을 잊게 만드는 글 솜씨와 표현에 달려 있을 것이다. 후편은 보다 우화에 가깝다. 민들레와 일편단심을 약속한 나비가 다른 꽃들의 화려함과 유혹에 빠져 민들레를 잊어버리는 점, 시들어버리는 민들레와 찬바람이 불어 쇠락한 나비가 민들레를 찾아 헤매는 장면. 이런 점들이 인간들의 세상과 마음속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시골로 간 예쁜이>는 상대적으로 독특한데, 도시에서 시골로 보내지는 장난감들의 슬픔과 애환, 그리고 두려움이 강하게 드러난다. 영화 <토이 스토리>를 통해 알 수 있듯 아이들에게 장난감은 한때의 즐거움이자 추억이지만, 장난감들에게는 자신의 전 생애라고 하겠다. 그네들이 시골 아이들에게서나마 행복한 시절을 보내기를 바란다. 다만 언제 적에 쓰인 글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시 대 시골이 부유 대 가난으로 도식화된 점이 눈에 거슬린다.

 

<송아지가 뚫어 준 울타리 구멍><나룻배의 첫 손님>은 시골을 무대로 삼은 작품이다. 전편에서 비로소 사람이 제대로 등장하지만, 역시 주인공은 송아지다. 이웃하여 의좋게 지내던 친구 두 명이 어미 소가 송아지를 낳기 시작하며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한다. 단지 며칠 상간으로 어차피 태어날 송아지임에도 남보다 더 먼저 가지고자 하는 욕망은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어찌 보면 사소하지만 원래 사람 사이는 사소한 걸로 틀어진다. 한번 벌어지면 쉽게 아물지 못하는 게 또 인간관계이기도 하고. 그것은 자존심 내지 쑥스러움 등 다양한 요소가 복합되어 있다. 사람들의 허점을 무심히 아우르는 송아지들을 보며 급소를 한방 맞은 듯 멋쩍음을 느끼게 된다.

 

후편에서 나룻배를 타고 장으로 팔려 나가는 송아지의 심정은 이와 다르다. 송아지를 팔지 않으면 안 되는 가난한 농부와 팔릴 운명에 처한 송아지, 그네들의 삶도 표정도 신산하기 그지없다. 강물을 오고가는 나룻배는 손님들을 강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네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연도 강물에 드리운다. 긴 겨울을 마치고 이른 봄에 맞이하는 첫 손님, 나룻배의 마음도 분명 새롭게 들떠 있다. 매해 노랑나비가 첫 손님으로 나타나기만을 바랄 뿐.

 

동화의 본질은 작가의 말처럼 동심을 위한 문학이다. 동심을 그리고, 동심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문학. 그것이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이 읽어도 가슴 가득한 흐뭇함과 뭉클함을 느낄 수 있는 연유이기도 하다. 이런 기준에서 볼 때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은 전형적인 전통적 동화라고 불릴 만하다.

 

도시 아이들의 눈으로 볼 때 수록된 많은 글들의 내용이 이제 머릿속으로 상상하기도 어려운 먼 옛적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시골과 자연의 정감을 듬뿍 담은 글과 그림을 보면서 아이들이 어떤 인상과 느낌을 갖게 될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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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는 어른이 되기 싫어 시공주니어 문고 2단계 17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롤프 레티시 그림 / 시공주니어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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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 시리즈는 오래 지속되기 어려운 태생적 한계를 지닌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삐삐라는 주인공의 캐릭터가 너무나 개성적이다. 빨간 머리, 주근깨투성이 얼굴, 짝짝이 긴 양말, 기다란 신발로 대표되는 외모는 물론 터무니없는 힘과 대담한 용기를 지닌 인물은 비현실적이다. 모든 동화의 궁극적 목적은 아이들의 사회화에 있다. 건전한 가치관을 지니고 가족, 사회, 국가에 적합한 인격의 형성.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삐삐는 완전 낙제점이다. 부모 없이 홀로 사며, 학교에도 가지 않고 매일 같이 놀기만 하며 돈의 가치를 잘 알지 못하면서 펑펑 쓰기도 한다.

 

삐삐와 같은 비사회적 인물의 독특한 행위와 소위 정상 사회와 충돌하여 일으키는 충격과 불협화음은 당장의 흥미와 통쾌감을 독자에게 안겨줄 수 있으나, 갈등과 놀라움은 곧 식상해지기 마련이다. 이 위기를 벗어나는 방법 중 하나가 배경을 옮기는 것이다. 작가는 스웨덴의 작은 항구 마을에서 남태평양에 있는 삐삐의 아빠가 다스리는 식인종의 섬으로 삐삐와 친구들을 이동시킨다. 이 책의 후반부가 삐삐 일행이 섬으로 가는 여정과 섬에서 즐겁게 노는 장면들, 그리고 악당과의 대결 등으로 구성된 연유도 그렇게 이해된다. 게다가 미지의 낯선 곳으로의 여행, 천국과도 같은 행복한 시간 보내기, 가슴 졸이는 신나는 모험 등은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도 가슴 설레게 하는 공통의 소재가 아니던가.

 

삐삐를 통해 작가가 보여주는 것은 어른들의 가식과 위선이다. 그럴듯한 외형을 한 꺼풀 벗겨보면 허위의 가면 속에 숨겨놓은 탐욕과 일그러진 영혼이 소위 어른이란 미명 하에 언행을 통해 아이들의 순수성에 상처를 주고 있다. 이것이 감추고 싶은 사회의 참된 현실이다. 여기에 반발하고 도전하고 거부하면 착하고 귀염 받는 아니가 아닌 나쁜 아이가 되고 만다. 그런 면에서 삐삐는 문제아다.

 

삐삐와 친구들의 남태평양 행은 현실도피의 성격을 띠고 있다. 사회적 굴레와 규범의 제약을 받지 않고 마냥 지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들은 다시 사회로 복귀해야 한다. 토미와 아니카는 삐삐와의 즐거웠던 시절을 한때의 추억으로 삼고 어른이 되기 위한 정상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나가게 될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재미없고 지루하며 되돌릴 수 없는 행복의 상실을 의미한다.

 

그들은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 그들은 어른이 되지 않게 해주는 약을 먹고 내일을 기약하며 헤어진다. 그러나 삐삐는 알고 있다. 그런 약은 가능하지 않음을. 자신이 토미와 아니카, 아니 독자들의 곁을 떠나야 할 때가 도래했음을. 어른의 세계를 거부하는 다른 문학 작품들의 주인공들처럼 자신이 비현실적 존재임을.

 

삐삐는 머리에 손을 얹고 눈앞에 깜빡거리는 촛불의 작은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하지만 삐삐는 꿈꾸는 듯한 얼굴로 앞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촛불을 훅 껐다.” (P.180~182)

 

화려했던 크리스마스 파티가 끝나듯이 즐겁고 행복했던 한바탕 꿈도 이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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