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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랑 주떼 ㅣ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2
김혜나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제리>와 <정크> 같은 정크 소설을 세 편 연달아 쓰기는 힘들었던 탓일까? 이번 <그랑 주떼>는 분량이 중편으로 줄어들었고 작풍도 보다 온건해졌다. 전작들의 강렬하고 노골적이며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맛의 재현을 고대한 독자라면 실망감을 맛보았으리라. 작가는 전작들에서 과다 묘사와 과소 표현의 극단을 오간 반면 여기에서는 전적으로 과소 묘사로 전향하였다.
작가의 비주류 인생에 대한 천착은 여전하다. 작품은 무용원에서 아르바이트 강사를 하는 화자의 현재와 유년 시절이 교차하여 전개되고 있다. 유년 시절만큼이나 현재 화자의 처지도 별 볼일 없는 형편이다. 화자는 껑충한 키에 공부도 못하고 학교에서 왕따 취급을 받는 아이였다. 친구 따라 무용을 배웠으나 완벽한 기초 동작에도 불구하고 발레는 이른바 젬병이다.
화자는 유치원 아이들의 무용복 환복을 도와주다가 문득 유년 시절의 가슴 아픈, 그리고 도대체 이해되지 않는 사건을 떠올린다. 두 건의 성추행 경험, 낯선 남자와 사촌오빠. 어린 화자는 자신의 피해를 주변 어른에게, 고모에게 알렸으나 돌아온 건 침묵과 은폐에 대한 강요뿐이었다.
어린 시절의 충격과 당혹, 공포와 배신감 등으로 아이가 느꼈을 감정을 공감할 수는 없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해본다. 진실에 대한 흔들리는 가치관. 밝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무너지는 신뢰와 상실감.
달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동시에 매우 쓰고, 거칠고, 추악한 존재야......진실을, 대상을, 실상을 보지 않고 네 멋대로 네가 보고 싶은 것만 바라본 네가 아주 멍청했던 거야. 어리석었던 T야. (P.97)
진실은 거짓이 되어야 했고, 거짓은 거짓 아닌 진짜가 되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나는 살 수가 있었다. 너는 이 거짓말을 믿어야 해. 나는 이 거짓말을 믿어야 했다. (P.110)
화자는 세상과 마음의 문을 닫는다. 찰나적, 표피적 관계만 가능하다. 영혼의 단짝처럼 여겼던 리나와도 스스로 결별한다. 리나와 그는 가는 길이 다르다, 더 이상 타인에게서 상처받고 싶지 않다, 리나의 우정도 결국 진실하지 못하리라. 화자는 삶과 사회의 아웃사이더이자 루저인 자신을 철저히 인식한다.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스스로 비하시키는 것은 작가이지만 동시에 화자 자신일 것이다.
나는 춤을 전혀 추지 못하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었다......애초부터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병신이었기에, 나에게는 별다른 불만이나 원망이 자라날 수조차 없었다. (P.27)
나는 그 무엇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뭐라도 할 수 있는 힘이, 뭐라도 될 수 있는 힘이 아주 조금도 없는 병신 같은 인간이었다. (P.107)
유치원 아이들을 무용복으로 갈아입히고 화장실로 데려다 주고 수업이 끝난 후 원복으로 다시 갈아입히면서 화자는 홀연히 가슴 속에 뭔가가 쑥 빠져나감을 느낀다. 그리고 처음으로 발레를 출 수 있게 되었다. 그것도 높이 날아오르는 그랑 주떼를.
작가는 후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기나긴 방황의 청춘, 그 처절한 절망의 날들 속에서야 나는 오래도록 나를 괴롭혀 오던 대상과 내가 용서해야 할 대상이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P.130)
상처에 천착하고 마냥 싸안는다고 통증이 사라지거나 상흔이 지워지지 않는다. 상처와 아픔과 슬픔이 나를 휘감고 지배하지 못하도록 그것을 인정하고 줄일 수 있으면 만족할 필요가 있다. 화자가 어린 아이들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은 각자가 저마다의 홀연히 빛나는 빛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처를 통해 가려졌던 고유한 아름다운 빛의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 화자는 무대의 중앙으로 선뜻 나아갈 각오, 그랑 주떼를 뛸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처음 책을 읽고 난 후 언뜻 든 생각은 ‘이게 뭐지?’하는 의아스러움이었다. 이야기가 좀 더 나아있을 것 같은 아쉬움이 뒷맛으로 남았다. 어린 시절의 사건과 유치원 아이의 환복과 화자의 그랑 주떼의 연결점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위와 같은 연결고리가 떠올랐다. 상처, 단절, 화해.
작가의 청춘 3부작이 완결되었다. 마지막 중편을 통해서 작가는 전작과 확연히 달라진 작풍을 선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작가의 향후 작품에 대한 진전 방향을 알려주는 시금석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