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란자 -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3
J.M 바스콘셀로스 지음, 이광윤 옮김, 김효진 그림 / 동녘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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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의 제제는 외로운 아이였다. 가족 속에 있으면서도 그들의 이해와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이의 슬픔, 그 옆에 라임 오렌지나무와 뽀르뚜가가 있다. <햇빛사냥>의 제제는 입양되었다. 새 가족 속에서 제제는 여전히 외로운 소년이었다. 그를 위로하고 격려해주는 존재는 아담, 모리스 그리고 파이올리 수사다. 그리고 제제는 어느덧 청년으로 자랐다. 그의 곁에는 더 이상 아무도 없다, 친구 따르씨지우를 빼고는. 제제는 아직도 고독하다. 이따금 그는 세상을 향한 격렬한 슬픔과 분개를 표출한다. 동일한 행동과 반응이지만 어린 제제와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그의 내면이 새삼 낯설고 궁금하다.

 

, 맙소사! 죽어 버리겠어. 죽어 버릴 거야. 없어져 버릴 테야! 이 불행하고, 고통스럽고, 보잘것없는 삶을 끝내 버리고 싶어! 아아......! (P.53)

 

스무 살을 맞이하게 될 제제의 사고와 행동에 대해 여러 추측이 가능하다. 나는 이를 독립 본능의 발현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이전의 제제가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눈물을 흘렸다면 건장한 제제는 세상에 도전하기를 열망한다. 거친 무대에 뛰어들어 열정을 불태우고 싶고, 뜨거운 사랑도 해보고 싶은 젊은이. 그는 우리에 갇힌 야생동물처럼 불안하게 서성인다. 가끔씩 포효한다.

 

그 집에서 뛰쳐나가 방랑자처럼 이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애정을 찾고, 사랑을 구하며, 나만의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다. 넓디넓은 이 세상에서 미지의 세계를 찾아 여행하는 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일까? (P.47)

 

국내의 경우 병역 의무와 보편화된 대학 및 대학원 진학, 취업 곤란 등의 사유로 인해 남성들의 사회 진출이 매우 늦어져 보통 이십대 후반 내지 삼십에 다다라서야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늦은 취업과 주택 마련 비용의 상승 등으로 경제적 독립과 결혼은 더더욱 지연되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반면 서구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대학 진학을 하든 아니면 취업을 하든지 간에 자식이 독립을 하는 문화가 보편적이라고 한다.

 

나는 턱을 괴고는 아버지를 향해 가만히 웃기만 했다. , 사랑하는 아버지! 어쩌면 저렇게 멋있을 수 있을까? 그러니 어찌 내가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P.78)

 

제제에게 돌아가 본다. 입양된 처지에서 가족들은 그에게 온전히 친밀한 존재는 아니다. 비록 과거보다는 위의 인용과 같이 아버지와의 관계가 많이 좋아졌지만 부자가 상호 일정 양보와 타협을 한 결과일 뿐이다. 여기에는 아버지의 와병도 한몫을 거들었다. 그는 학교를 졸업했지만 장래에 대한 방향 설정을 아직 못하고 있다. 그가 살고 있는 나딸이라는 도시는 별로 큰 도시가 아니므로 여기에서 제대로 정착을 하기는 기대하기 어렵다. 대학을 중퇴한 그는 자연스레 빈둥거릴 수밖에 없는 여건에 처해진 셈이다. 이 작품에서 제제의 일과 중 상당한 분량이 수영에 할애되고 있는 연유가 그러하다. 무엇인가를 하고 싶은데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고 그나마 할 수 있는 것도 제한적인 사정, 게다가 가족과의 삶은 그렇게 편치만은 않다. 그의 마음은 밖으로 시종 떠나있는 것은 당연하다.

 

마치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 방황하고 있었다. 이제 머지않아 스무 살이 되는데도 할 일이 아무것도 없으니...... (P.39)

 

그의 아버지는 제제의 심중을 다소간 이해한다. 제제의 장래 설계에 대해 특정하게 유도하거나 강요하지 않고 인내심을 보여준다. 그토록 바라던 참다운 아버지의 태도, 즉 자식을 애정으로 토닥거리고 진실한 공감으로 이해해주는 모습을 제제는 조금씩 발견하게 된다. 다만 제제의 첫사랑에 대해서는 제외하고. 우리는 제제의 아버지가 씰비아와의 교제 중단을 요구하는 구체적 이유를 알지 못한다. 아직 연애를 하기엔 어리다고 보는 건지, 아니면 제제 누나의 말대로 그녀가 품행이 단정하지 못한 더럽고 구역질나는 계집일지도 모른다.

 

젊은이가 성인으로 자리 잡는 계기는 사랑과 결혼이다. 제제는 아버지의 수술을 앞두고 연애를 끊겠다는 약속을 한다. 사랑의 중단, 말은 쉽지만 결코 쉬운 과정은 아니다. 잃어버렸을 때 가슴이 찢어질 듯한 아픔을 겪어야 진정한 감정이다. 제제 자신도 아버지도 제제의 감정의 깊이와 진정성을 과소평가한 셈이다. 오랜 시간 외로움에 몸부림치던 제제가 비로소 사랑을 주고받을 대상을 만났는데 강제로 이별을 해야만 했다. 그의 삶에는 더 이상의 기쁨도 의미도 없고 오직 절망뿐이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조금씩 나를 파멸시키고 있었다. 그 모든 것 때문에 내 안에서는 더 살고 싶은 의욕이 도무지 일어나지 않았다. (P.138)

 

헤어짐의 고통을 절절히 깨달은 제제가 씰비아와 재회한다.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의 비난에도 굴하지 않는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두려워할 것이 없다. 작별할 때가 다가온 것이다. 가족들하고. 자신만의 작은 세상도, 유년기 시절도 이제 이별이다. 그것은 한번 떠나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이다. 예부터 수많은 청년들이 제제처럼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났다.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건 쓰디쓴 실패의 나락을 겪어든 어차피 떠나야 할 길이다. 제제의 앞날에 축복을!

 

아버지는 나에게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문을 활짝 열어 주었던 것이다. 갑자기 겁이 났다. 이 세상은 너무나도 넓고, 많은 비밀이 있어서 우리 인간들이 그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불쌍한 존재 하나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공이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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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녘지기 2015-02-10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도서출판 동녘의 마케터입니다.

저희 책을 읽고 또 리뷰까지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리뷰도 해주시고 저희 출판사의 책을 읽어 주셨는데 동녘에서 진행하는 SNS 이벤트 소식을 못 받으시는 것 같아 동녘의 페이스북 주소를 알려드려요.

www.facebook.com/dongnyokpub

페이스북 페이지 좋아요를 누르시면 계속 해서 소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올해부터 자체적으로 여러 이벤트를 많이 진행할 예정이니 기대해 주시고, 행운까지 거머쥐셨으면 좋겠습니다.

혹시라도 이 글이 불편하셨다면 정말 죄송하구요. 절대 독자님을 귀찮게 하거나 클릭을 유도하는 것이 아니니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그럼 음력 새해에도 늘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라며 앞으로도 좋은 독서 하세요. 고맙습니다. ^^
 
생일 - 사랑이 내게 온 날 나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장영희의 영미시산책
장영희 지음, 김점선 그림 / 비채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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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어본 지 꽤 오래됐다. 예이츠를 집중적으로 읽을 때 그의 시집을 여러 편 본 게 마지막이었으니. 그때 영한대역판 또는 번역판으로 읽으면서 시도 나름대로 재미를 느낄 수가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일종의 선입견이겠지만 시는 원어로 읽어야 제 맛을 음미할 수 있다는 지론이다. 산문에 비해 운문의 경우 번역을 통해서는 도저히 원작의 향기를 느낄 수 없다는. 그렇다면 우리 시는 읽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므로 결국 시를 안 읽는 핑계에 대한 일종의 자기 정당화랄 수밖에. 그것이 예이츠를 읽으며 번역시도 어쨌든 시인의 감성과 이미지를 부분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제법 소득이다. 이 책에서도 예이츠의 시 두 편이 소개된다.

 

시인은 모두 삶에 대한 사랑을 노래”(P.6)하는 이들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더 예민한 감각과 감성을 통해 자기의 심장으로 우리를 대변해주는 사람”(P.6)들이라고. 여러 사랑 중에서 시인의 감수성을 가장 잡아당기는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이다. 그래서 이 책의 표제도 사랑에 눈떠 영혼이 다시 태어나는 날이야말로 진정한 생명을 부여받는 생일”(P.7)을 뜻한다고.

 

이제야 내 삶이 시작되었으니까요.

내게 사랑이 찾아왔으니까요. (생일, 크리스티나 로제티, P.17)

 

사랑은......아주 작은 방이라도 하나의 우주로 만드니까요......

우리는 하나의 세계. 각자가 하나이고 함께 하나이니. (새 아침, 존 던, P.41)

 

당신이 날 사랑해야 한다면 다른 아무것도 아닌 오직

사랑만을 위해 사랑해주세요......

영원함으로 당신이 언제까지나 사랑할 수 있도록. (당신이 날 사랑해야 한다면, 엘리자베스 배릿 브라우닝, P.49)

 

우리는 함께여야 합니다. 그대와 나 (그대와 나, 헨리 앨포드, P.103)

 

활짝 편 손에 담긴 사랑, 그것밖에 없습니다. (활짝 편 손으로 사랑을, 에드너 St. 빈센트 밀레이, P.107)

 

사랑은 조용히 오는 것......

사랑은 천천히 오는 것 (사랑은 조용히 오는 것, 글로리아 밴더빌트, P.181)

 

이성 간의 애잔하고 절절한 사랑은 새봄의 꽃잎처럼 화사하게 피어나는 듯 하다가 시샘하는 바람과 추위로 시련을 겪기도 한다. 사랑의 기쁨은 항상 슬픔과 동행한다. 절기가 언제나 봄철일 수 없듯이 눈부시게 찬란할 정도로 아름다운 사랑도 변하게 마련이다. 나이가 들어서 옛 모습을 잃거나 영원한 이별이라는 운명의 타격을 마주하기도 한다.

 

......사랑이란 바람 한 번 불면

떨어지고 마는 활짝 핀 꽃뿐이란 걸......

가슴을 늦게야 배운다는 것, 그것만 가여워하세요. (가여워 마세요. 에드너 St. 빈센트 밀레이, P.45)

 

그녀에게도 8월이 지나갔네......

그녀도 중년이 될 테니. (찻집, 에즈라 파운드, P.123)

 

사랑은 영원히 계속될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소용이 없으니까요. (슬픈 장례식, W. H. 오든, P.87)

 

가버린 나날들을 생각하네. (눈물이, 덧없는 눈물이, 앨프레드 테니슨, P.99)

 

워낙 영미시에 문외한인지라 소개된 작품을 물론 시인들로 이름만이라도 들어본 이가 있으면 다행일 정도다. 처음 듣는 시인들이 부지기수다. 저자는 이 책을 딱딱하게 만들 의도가 전혀 없다. 순전히 시 소개와 시의 이해를 위한 저자의 감상을 수록하였을 뿐 시인 소개와 해설은 매우 간소에 그친다. 중요한 것은 시를 읽는 독자의 가슴이리라. 이른바 심금에 다가오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명시라고 해도 그에게는 아무런 울림도 지니지 않는다. 화가 김점선의 삽화라고 쉽게 칭하기에는 비중과 노력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그림들도 책의 분위기에 크게 일조한다.

 

어쨌거나 사랑을 한번이라도 해본 사람들은 행복하다. 사랑의 추억은 그의 가슴속에 영원한 따뜻함을 남겨줄 것이므로. 그것이 숨겨놓은 사랑이든, 설익은 풋사랑일지라도 기쁨보다 슬픔이 더 많은 사랑이었다 할지라도, 그는 결코 자신의 사랑을 후회하지 않는다. 사랑을 함으로써 그의 인생은 더없이 풍요로워졌으니.

 

......나를 경멸하다가도......

그대의 사랑을 생각하면 곧 부귀에 넘쳐

내 운명, 제왕과도 바꾸지 아니하노라. (소네트 29, 윌리엄 셰익스피어, P.61)

 

내 열정은 깨어나 격렬하게 싸우지만

당신은 여전히 평화롭기만 하군요. (그 누구에게, 조지 고든 바이런, P.143)

 

......사랑을 좇다가 삶을 마친다. 그것뿐이다. (사랑에 살다, 로버트 브라우닝, P.153)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세요

나는 거기 없고, 잠들지 않았습니다......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세요

나는 거기 없습니다, 죽지 않았으니까요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세요, 매리 프라이, P.165)

 

어디 사랑뿐이겠는가- 일상과 생존의 늪에 빠져서, 성공의 빛에 눈이 멀어서, 우리는 삶을 힘겹게 영위하는데 급급해할 뿐이다. 저 앞에 둥실 떠있는 무지개의 허상을 좇아서 우리는 쉴 틈도 없이 옆을 살피거나 뒤돌아 볼 여유도 없이 허겁지겁 달음박질에 매진한다. 그것이 만길 낭떠러지로 이어지는 가파른 한줄기 내리막길임을 알지 못한 채. 당사자에게는 진지하고 절박한 생존의 몸부림이 시인의 눈에는 어이없게 비친다. 그들에게 사람들은 하멜른의 피리 소리에 영혼이 홀린 생쥐와 아이들 마냥 보일 뿐이다.

 

과학이여! (과학에게, 에드거 앨런 포, P.127)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다.

하지만 난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잠들기 전에 갈 길이 멀다,

잠들기 전에 갈 길이 멀다. (눈 오는 저녁 숲가에 서서, 로버트 프로스트, P.173)

 

무슨 인생이 그럴까, 근심에 찌들어

가던 길 멈춰 서 바라볼 시간 없다면 (여유, W. H. 데이비스, P.119)

 

나는 숲속으로 가리라

눈같이 활짝 핀 벚나무 보러. (나무 중 제일 예쁜 나무, 벚나무, A. E. 하우스먼, P.195)

 

이 책에 수록된 시들도 아름다운 작품들로 엄선되었지만, 책과 시를 더욱 빛나게 만든 것은 저자 장영희의 맛깔스런 감상이다. 그의 문체는 은근하고 겸손하면서 다가서기 어렵게 고고한 척 젠체하지 않는다. 밝고 친근한 어조로 우리들에게 좋을 것을 권하고 행여나 우리들이 그것을 외면하고 진가를 알아채지 못할 까 노심초사 전전긍긍하는 소녀 적 이미지를 간직한 이웃 누님 같은 분위기를 전해준다. 오직 영혼이 맑은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성품이 문장에 배어있어 글을 읽는 자체만으로도 상쾌함과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암으로 투병하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그를 보면서 훗날의 일을 아는 우리는 괜스레 가슴 한켠이 찌릿하다. 그렇기에 아래의 시구들은 저자 자신을 노래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삶은 아주 멋진 것들을 팝니다......

전 재산을 털어 아름다움을 사세요.

사고 나서는 값을 따지지 마세요. (물물교환, 새러 티즈데일, P.33)

 

나 죽어갈 때 말해주소서......

모든 아름다운 걸 사랑했노라고......

삶을 삶 자체로 사랑하며......

아이들처럼 노래했노라고. (기도, 새러 티즈데일,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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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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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민주화 운동은 분명히 나와 동시대에 벌어진 사건이지만 낯설고도 먼 존재다. 광주 폭동, 광주 사태, 광주 민중 항쟁, 광주 민주화 운동 등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달라지는 호칭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사건을 바라보는 인식에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이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나는 작가만큼이나 어렸고 서울에 있었다.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서는 정권의 일방적인 정보만 쏟아졌다. 그 후로도 한동안 암암리에 떠도는 풍문을 통해 뭔가가 있었음을 짐작할 뿐 성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광주 출신인 작가에게 이 사건의 의미와 파장을 남다를 것이다. 자신이 살던 지역과 사람들, 폭력과 유혈이 낭자한 처참한 현실. 멀리서 바라만 볼 수밖에 없던 자신에 대한 근거 없는 자괴감 등. 삼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고, 이른바 명예회복도 되었지만 그네들이 겪었을 공포와 고통, 살아남은 자들의 신체적, 정신적 외상은 쉽사리 지워지지 못한다. 게다가 그들의 가해자는 엄연히 활개를 치며 세상을 활보하고 있는 판국이니.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P.135)

 

작가는 1980년 광주에서 벌어진 상황을 살아있는 시각에서 재현하기 위하여 고심한다. 다큐나 역사소설이 아니므로 사건 전개의 상세하고 구체적 사실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되, 당시의 참혹한 정경과 분위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작가는 특별히 시점, 인물과 시간의 구성을 통해 새롭게 당대를 조명한다. 작가는 특이하게도 이인칭 시점을 사용한다. 1인칭의 고백체는 사태를 협소한 시각에서 주관적으로만 전달하게 되어 보편적 공감을 얻지 못할 수 있다. 3인칭은 객관적의 장점이 자칫 사태와 거리감을 두어 감정적 공유를 자아내기 어려울 수 있다.

 

작품 전개를 특정 인물에만 의존하게 되면 사태의 광범하고 다채로운 층위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게 될까 봐 작가는 여러 명의 인물을 등장시켜 그들의 행동과 발언을 교차하여 제시한다. 작가가 특히 신경 쓴 부분은 사건 당시 주요 인물의 연령대가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들이라는 점이다. 군부 세력의 날조된 유언처럼 그들을 빨갱이, 폭력배, 국가전복 세력으로 매도하기에는 그네들의 아직 어리거나 젊고 순수하다. 오히려 그들에게 최소한의 인간적 연민조차 보여주지 않고 냉혹하기 이를 데 없는 폭력 행위를 자행한 세력과 주어진 총마저 쏠 줄 모르는 그네들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광주의 사건을 발생 몇 일 또는 몇 달이라는 단기간으로 파악하면 올바른 진상 이해를 할 수 없게 된다. 광주는 누적되고 억압된 갈등이 일시에 폭발한 현장이다. 뿌리는 신군부의 등장과 군인 대통령의 서거를 거슬러 올라가 군부 독재의 모순을 지나서 종내에는 4·19의거와 이승만 독재, 친일세력의 제거 실패라는 건국 초기의 실패에까지 이른다. 광주의 여파는 누구나 알 듯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딱지 진 상처를 드러내고 있다. 작가는 선주를 청계피복노조와 관련시킴으로써 과거와의 연계를 분명히 하며, 19805월 이후 삼십여 년의 세월 동안 참가자와 그 가족들이 겪은 고통과 현재까지 이어지는 상처를 섣불리 치료하지 않는다. 은숙, 선주, 진수와 이름이 밝히지 않은 진수보다 연상의 남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은 동호의 엄마...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녀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 (P.95)

 

이 작품을 통해 작가가 반복하여 던지는 중심적인 화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근원적 의구심이다. 인간이 차마 어찌 이리 잔인할 수 있는가-

 

대다수의 평범한 시민들인 우리는 인간 본성의 순수성과 선함을 믿거나 믿으려고 애쓴다. 자고로 순자의 성악설과 고자의 성무선악설에 비해서 맹자의 선악설이 선호되는 연유도 인간 본성에 대한 세인들의 기대를 반영한 것이리라. 이런 기대가 헛되었음을 드러내는 현상들이 평시(사이코패스를 보라!)는 물론 전시사변이나 비상사태가 발발하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대두됨을 우리는 보게 된다. 군인과 일반인, 남녀와 노소 구분 없이 무차별적으로 잔인한 가혹행위와 대량학살 등. 그들은 별종의 전혀 다른 사람들이 아니다. 누군가의 선량한 아들이고 오빠이며 형이며 동생이자 애정에 넘치는 남편이며, 우정 깊은 친구이다. 방아쇠를 당긴 손으로 뺨을 후려친 손으로 자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아내와 연인의 뺨을 어루만진다.

 

힘겨운 광주의 5월을 보낸 그네들도 평범함이라는 면에서는 마찬가지다. 그네들이 처음부터 작심하고 도청에 집결하고 농성을 하는 영웅적인 민주화 투사들이 아님은 작중 인물들의 면면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회피하지 않고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하는 마음의 행로를 좇다 보니 역사 속의 인물이 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도 있으며, 죽지 못해 치욕적인 삶을 저주하고 감내하며 지금도 여전히 버티는 이들도 분명 있다. 죽은 자와 산 자 모두 아픔을 반복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으리라. 하지만 만약에 다시 유사한 상황이 전개되어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많은 이들이 동일한 행보를 하지 않을까. 그것은 인간에 대한 한 가닥 신뢰가 여전히 마음속에 잔존해 있는 탓이다.

 

스스로가 용감하지도, 강하지도 않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당신은 안다. 그해 봄과 같은 순간이 다시 닥쳐온다면 비슷한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P.175)

 

일각에서는 광주 이야기라면 넌더리를 내는 경우도 보았다. 다 지난 과거지사인데, 그걸 자꾸 파헤쳐서 무엇을 하겠냐고, 그걸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게 아니냐며.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내가 겪은 일들을 이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P.120)

 

그렇다, 이해하기 위해서다. 어떻게든 당시에 벌어졌던 일들을, 그네들이 겪었던 일들을, 어쩌면 우리들이 겪었을 수도 있는 일들을 이해하고 싶기 때문이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다. 영문도 모른 채 지나갔으니 위안 삼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2의 광주가 생길 가능성을 예방하고 그럴 경우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이해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P.207)

 

작가 한강은 <희랍어 시간>에서부터 묘사와 서술을 줄이고 시어의 비중을 높이고 있다. 원체부터 문장 자체가 정제되고 시적인 뉘앙스를 풍기던 그였지만, 정갈하다 못해 투명하게까지 느껴지는 문체는 이른바 시설(詩說)을 연상시킨다. 이 소설에서도 작가 특유의 성향은 여일하다. 더구나 이인칭 시점의 화자는 인물의 내면으로 다가서다가도 어느덧 훌쩍 몇 발짝 떨어져 주변을 둘러보는 등 대상과 인물의 이동이 자유로우면서도 나직하고 침잠하는 어조로 자칫 격동에 빠지기 쉬운 제재에 균형추의 역할을 하고 있다.

 

작가가 특별히 에필로그를 덧붙인 까닭은 작품을 벗어나 소설 속에서 말하지 못한 부분을 밝히고 싶어서이리라. 그것은 광주와 작가의 개인적 인연을, 그 사건의 현재적 연속성과 유효성을 확인시켜준다. 작가는 섣부른 동정도, 긍정도 드러내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다.

 

기도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묵념하지도 않았다......반투명한 날개처럼 파닥이는 불꽃의 가장자리를 나는 묵묵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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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시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구판) 1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지음, 남수인 옮김 / 열림원 / 199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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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면에서 이채로운 소설이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남성 동성애를 작품의 제재로 선택하였다. 다음으로 이십대 중반의 여성 작가가 동년배 남성의 심리를 예리하게 포착하였다. 더욱이 인생의 깊은 의미를 통찰하고 있어 새삼 작가의 나이를 잊게 만든다.

 

이 중편소설은 남성 주인공 알렉시가 아내 모니크에 보내는 장문의 서신 형식을 취하고 있다. 자신이 아내 곁을 떠나야 하고 떠날 수밖에 없음을 어릴 적부터 거슬러 올라가 차분하고 담담하게 독백 형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차분하고 담담히!

 

민감한 제재를 다루고 있지만 말초적 관능을 자극하거나 거부감을 일으킬만한 묘사나 표현은 일체 배제하고 있다. 작가가 주목하는 것은 동성애 묘사가 아니라 한 평범한 남성이 동성애에 이끌리게 된 과정이며, 끊임없이 죄의식에 시달리다가 스스로의 길을 선택하는 내면 묘사에 있다. 따라서 작가가 언급하고 있듯이 이 소설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화자의 목소리다. 그 깊고 내성적인 울림은 독자의 심중을 파고들어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1인칭으로 쓰여진 이야기가 다 그러하듯, <알렉시>는 목소리의 초상이다. 이 목소리에다 고유의 음역을, 고유의 음색을 남겨놓는 것이 필요했다. (P.11)

 

예나 지금이나 동성애는 민감한 이슈다. 물론 과거보다 많이 개방되어 일부 유럽과 미국에서는 동성애자 간 결혼까지도 법적으로 인정하는 지역도 있다. 국내에서도 일부 연예인들이 커밍아웃을 선언하고, 소수인권 보호 차원에서 권리를 주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실제적 인정과 보호는 요원해 보인다.

 

개인적으로 동성애에 부정적이다. 인간은 단성생식이 아닌 양성생식을 하는 생명체이며, 자웅동체가 아니므로 이성 간의 결합에 매력을 느끼고 추구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본성이라고 믿는다. 동성애의 존재 자체를 외면할 생각은 없다. 자연에는 다양한 현상들이 공존하므로 소수의 예외적 현상도 언제나 존속해 왔다. 동성애 사안이 현대에 와서 갑자기 발생한 게 아님을 누구나 알고 있다. 묵인은 하지만 공인하지는 않는 게 여태껏 인류의 대응 방침이며 향후에도 유효할 것으로 믿는다.

 

어떻게 한 학술 용어가 한 인생을 설명하겠소. 용어란 하나의 실상도 설명해내지 못하고, 단지 지칭할 뿐이오. 한 사람의 인생에서도 그렇지만, 각기 다른 사람들의 인생에서는 똑같은 두 가지 일이 없는데 말이오. (P.35)

 

현상으로서 동성애는 쉽게 발언할 수 있지만 개별적 체험으로서의 동성애는 어렵고도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으리라. 남성이 여성에게, 여성이 남성에게 매혹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며 드러내고 싶은 반면 남성이 남성에게, 여성이 여성에게 이끌리면 감추고 최대한 공개되지 않도록 전전긍긍한다. 그 사이 당사자에 닥치는 인간적 고통은 섣불리 예단할 수 없다.

 

우리의 영혼, 우리의 정신, 우리의 육체는 자주 상호 상반되는 요구를 가졌고,......나는 내 행위들을, 내 소극성만으로도 충분한 원인이 되는데, 형이상학적 설명으로 미화시키고 싶지는 않소. (P.76)

 

아내에게 자신의 은밀한 욕망의 내력을 토로하는 심경은 곤혹스럽다.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부끄러움, 혹시라도 충격과 혐오를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공인받지 못하는 불순한 욕망에 대해 나름대로 해명하고자 하는 의도, 이것이 구차한 자기변명으로 비쳐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등등. 그래서 화자는 직접적으로 털어놓지 못하고 아주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서 자신의 반생을 회고한다. 그럼으로써 인간적 연민을 불러일으키면서 화자 말대로 시간을 벌려고 한다.

 

내가 체험했었던 것은 사랑과는 무관했소. 열정도 아니었소......나는 그 실수를, 이를테면 나 자신과 분리시켜서, 하나의 우발적인 일로만 간주했던 것이오. (P.62)

 

알렉시의 욕망과 행위를 사랑으로 간주할 수는 없으리라. 그는 동성의 파트너에게 애정을 느끼지 않았다. 때때로 발현하여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 때 일시적 성욕의 충족이면 충분하였다. 그는 순수한 동성애적 사랑을 갈구한 게 아니라 육체적 동성애 욕망을 갈구하였을 뿐이다. 아내를 포함한 여성에게도, 그리고 남성에게도 지속적 사랑의 교감을 느끼지 못하므로 그는 외로운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그는 말한다. 아내와 결혼 당시 자신 없이 행복했다고, 곧이어 행복하지 않았다고.

 

그는 욕망을 끊을 수 없는 육체를 혐오하고 지긋지긋해 하지만 떨구어 낼 수 없다. 죄의식에 고뇌하던 그는 철저한 금욕을 통해 죄의 감행을 억제하려고 한다. 순결한 정신의 지배를 거부하고 제멋대로 돌출하는 육체를 징벌한다. 그는 차분함과 평온함을 겪으며 자신이 성공했다고 믿기도 한다. 우리는 안다. 육체의 욕망은 생명의 자발적인 분출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반영하고 있을 뿐임을. 생식의 본능의 지시에 따르는 현상은 이성에 선행하는 생명의 본원적 현상임을. 육체에 대한 비난과 경멸과 가혹한 징벌은 그래서 부당함을.

 

이쯤에서 알렉시에게 묻고 싶어질 것이다. 차라리 독신으로 살 것이지 모니크와 결혼하여 어찌하여 그녀에게 부당한 슬픔과 불행을 안겨준 것인지? 이것은 우문에 가깝다. 절박함에서 몸부림치는 그에게 모니크의 존재는 마지막 구원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결혼을 통해서 그는 자신이 범죄 행위라고 일컬었던 일탈에서 평범한 정상의 삶으로 복귀할 한 가닥 기대를 품었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따뜻한 그녀의 체온을 통해 인간적 위안을 얻고 싶었던 것인지도.

 

알렉시의 토로처럼 천성을 바꾸지 않는 한 그의 평온은 위태롭기 그지없다. 오랫동안 멀리했던 피아노의 건반을 불현 듯 건드리는 순간 모든 거짓의 성이 무너진다. 그는 깨닫는다, 절대적인 도덕적 견지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음을. 그의 행위가 다수의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점, 그것만이 명확할 뿐이다.

 

내 유일한 잘못은 모든 사람보다 가장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점이라고 자부하기에 이르렀소......결국 나는 어쩌면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나 자신을 괴롭혀왔던 셈이오. (P.122)

 

그는 고백을 통해 자신의 성적 취향이 남과 다르게 된 사실이 불가피했음을 정당화시킨다. 자신은 능동적 선택으로 동성애를 선호하게 된 것이 아니다. 자신의 타고난 천성과 자라온 환경이 자신을 그런 방향으로 이끌었다라고. 그는 커밍아웃과 떠남이라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주변에 둘러친 거짓의 울타리를 과감히 허물고자 한다. 작가의 말처럼 철저한 성적 자유를 찾아 떠나려고 한다. 알렉시의 말처럼 앞날은 여전히 행복스럽지 않겠지만 최소한 가식과 허위로부터 벗어난 자유와 평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삶이 나를 이런 사람으로 만든 것이오,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나 이제 체념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본능의 포로로 만든 것이오. 그리고 이 순응이 내게 행복은 아닐지라도 마음의 평온을 가져다주리라. (P.135)

 

이 작품에서 알렉시의 삶과 고뇌의 여정을 되새겨본다. 동성애라는 성적 취향의 사안을 배제시켜 놓고 보면 그의 고백과 갈등은 보다 보편화될 수 있다. 그것은 올바른 삶, 진정한 사랑, 진실과 자유와 행복에 대한 자기 성찰의 아포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 이십대 중반의 젊은 여성에게서 묵직하면서도 잿빛으로 그슬린 듯한 인생론을 발견할 수 있는 점이 이색적이기에 오히려 인상 깊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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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사냥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2
J.M.바스콘셀로스 지음, 박원복 옮김, 김효진 그림 / 동녘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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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르뚜가의 죽음 앞에서 오열하던 나이어린 제제의 영상이 도저히 잊히지 않는데, 어느덧 제제는 열두 살의 소년이 되었다. 중산층의 의사 가족에게 입양되어 더 이상 가난에 고통 받지도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제제는 여전히 행복하지 않다. 전작의 기본 구도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밍기뉴와 뽀르뚜가는 꾸루루 두꺼비 아담과 모리스 아저씨로 대치되었으며, 언제나 너그럽게 제제를 포용하는 파이올리 수사도 있다.

 

제제가 맞닥뜨린 현실은 과거와는 또 다른 것이다. 낯선 가정, 학교, 도시, 세상은 냉혹하며 자비를 보이지 않는다. 혼자서 감당하기엔 너무 벅차다고 생각되었던지 아담과 모리스 아저씨가 제제의 우군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제제가 열다섯 살이 되어 홀로서기가 가능할 때까지 그를 지켜주고 돌봐준다. 이 점에서 제제는 행복한 인물이다. 세상의 많은 아이들이 고통과 역경에 힘들어 할 때 그들을 위로하고 힘을 보태 줄 누군가를 찾는 것은 대개 요원하다. 제제는 학교에서도 파이올리 수사를 비롯한 그에게 동정적인 수사들이 여럿 있지 않은가.

 

제제는 딱한 아이라고 할 수 있다. 남달리 예민한 감수성과 뛰어난 지능, 분방한 상상력을 타고난 그는 환경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는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는 가족 중에서 자신을 이해하여 줄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의 어릴 적 심한 장난이 뽀르뚜가를 만나면서 줄어들기 시작하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특히 아빠의 부재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내내 지속적으로 그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는 전작의 말미에서 자신의 생부를 부인하였다. 이 작품에서도 그가 아빠와 화해하고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소위 그가 철들고 난 시기 이후이다. 그동안 제제는 뽀르뚜가에게서, 그리고 모리스 아저씨와 파이올리 수사에게서 아버지상의 대역을 구하고 있다. 제제가 바라는 아버지상은 별게 아니다. 너무나 소박하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반적인 아빠의 모습, 자신에게 진실한 감정과 애정을 품고 쓰다듬어 주는 그런 존재. 현실의 아빠들은 그렇지 못한 반면, 그들은 제제를 몽쁘띠니 슈쉬 같은 애칭으로 부르고 있어 대조적이다.

 

아빠란 이런 분이야. 내 몸이 안정을 되찾았다고 느낄 때까지 내가 잠든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 (P.182)

 

아빠라는 거 바로 그런 거야. 일을 많이 해서 피곤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내가 하루를 어떻게 보냈나 알아보고 잘 자라고 말씀하시는 거. 그게 바로 아빠야. (P.204)

 

이 작품에 이르러 작가는 성장소설의 성격을 분명히 한다. 아담과 모리스는 자신들의 역할과 체재 기간을 사전에 밝히고 있다. 아담은 제제가 더 이상 슬퍼하지 않도록 외롭지 않도록 그를 돕고 보호해 줄 것이며, 제제가 씩씩하고 용감하게 자라나면 떠날 것이다. 모리스 아저씨는 제제의 온갖 사건과 푸념들을 지겨워하지 않고 따뜻한 눈과 귀로 들어줄 것이며 토닥여 줄 것이다. 제제가 혼자서도 처신을 할 줄 아는 어른이 되고, 사랑을 알게 될 때까지.

 

제제의 말과 행동에 무조건적 공감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전작의 여섯 살 꼬마 제제와의 차이다. 제제의 악동 본능은 뽀르뚜가 이후 잠시 주춤했다가 여기서 다시 활짝 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자신 속에 악마가 들어있다고 스스로 말하였듯이 그의 장난과 돌출 행동은 강화된 측면이 다분하다. 심한 장난에 따른 처벌에서는 스스로 피해자이고 약자인 듯 행동한다. 그래서 우리는 소년 제제가 꼬마 제제와 동일한 행동과 불평을 반복하는 장면에서 오히려 의아함을 느낀다. 제제는 수년의 시간 동안 전혀 변하지 않았던 것인가 하고.

 

, ......차라리 죽고 싶어요. 차라리 화학 실험실의 진열장 유리를 부수고 그 안에 있는 독약을 먹고 죽고 싶어요. 그러면 어느 누구도 저를 더는 괴롭히지 못하겠죠. (P.92)

 

다시 태어나면 단추가 되고 싶어요. 아무 단추나요. 팬티의 단추라도 상관없어요. 인간이 되어 이렇게 고통받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나을 거예요...... (P.267)

    

제제의 일탈이 상당 부분 성장기의 불안과 온건한 가족 역할 모델의 부재로 인하다고 볼 수도 있다. 애정 부족과 정서 불만이 과잉 행동으로 표출된다고. 그렇더라도 전작의 어린 제제에 비해 공감도는 훨씬 감소한다. 제제는 외적 요인에 책임을 돌리지만 결국 핵심은 제제 자신이다. 제제의 어린 가슴에 남겨진 어릴 적 트라우마가 계속 작용을 하여 마누엘 마샤두 숲의 낯선 소리를 불러내는 것이다. 아담과 모리스 아저씨의 존재는 제제의 순수한 마음이 자기 방어를 위해 만들어낸 환상이라고 해석 가능하다.

 

모든 사람의 가슴에서 솟아오르는 태양 말이야. 우리들의 희망의 태양. 우리의 꿈을 뜨겁게 달구기 위해 우리가 가슴속에서 달구고 있는 태양 말이야. (P.102)

 

그들은 외롭고 심약하며 비뚤어지기 쉬운 어린 소년의 마음속에 아름다운 태양을 뜨겁게 달구고자 출현한 것이다. 지금 제제의 태양은 아담이 말했듯이 눈물로 가려진 태양, 조금 피곤하고 나약한 타약한 태양이다. 삶의 아름다움을 깨달아야 태양도 뜨거워질 텐데.

 

아이들은 어른에 대한 환상을 지닌다. 훨씬 키가 크고 힘도 세며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 그네들의 눈에 세상은 불공평하다. 어른들은 원하는 물건을 자유로이 살 수도 있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안 해도 되는데 왜 자신들만 억지로 해야 하고 좋아하는 것은 항상 제지를 당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어른이 되면 무한한 낙원이 펼쳐질 것으로 기대한다.

 

어른. 그 말은 나에게 무척 멋있는 말이었다. 아담에게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P.168)

 

제제 또한 그러하다. 그전에 그는 오로지 자신의 관점에서만 세상사를, 양부모의 행동을 재단하고 불평하였다. 이 점을 앙브로지우 수사는 격동하는 심정으로 제제에게 일깨운다. 그가 양부를 이해하고 좋아하기 시작하게 된 것은 수년이 경과하여 보다 성숙해 진 후였다.

 

그분들은 아주 좋은 분들이에요. 너무 좋으세요. (P.396)

 

제제의 양부모가 나름대로 주의하고 신경 쓰며 양육에 노력하였고 그들에게 큰 잘못이 없음을 독자는 부인하지 못한다. 제제의 하소연은 과장된 측면도 없지 않다. 작가는 오히려 변화해야 할 것은 제제의 내면임을 에둘러 말하는 건지도 모른다. 의지가 굳고 두려움이 없는 소년으로 성장해야 함을. 인생이란 알고 보면 그럭저럭 살만 하며, 사랑을 알게 돼야 인생의 가장 아름다움을 느끼게 될 것임을. 그것은 스스로의 노력과 시간의 경과가 결부되어야 함을. 그때가 되면 아담과 모리스 아저씨의 환상 기제는 더 이상 효과가 없게 된다는 것도.

 

모리스! 모리스! 당신 말이 옳았어요. 사랑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예요. (P.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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