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입센 ㅣ Takeout Classic 12
알도 켈 지음, 김수연 옮김 / 생각의나무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헨릭 입센의 희곡 작품들을 쭉 읽는 도중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개별 작품을 통해 이해한 입센이 단편적이고 단선적인 인식에 불과하고 그나마도 몰이해 또는 오해의 결과일지 모른다. 입센의 삶과 작품세계를 전반적으로 조망한 책을 읽고 싶었다. 김미혜가 쓴 책도 있지만 분량 면에서 부담감을 주어 비교적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입센의 작품들은 인기작에 치중된 감은 있지만 어쨌든 다양한 작품들이 국내에 소개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초기작과 말기작이 소개되지 못한 점은 유감스럽기 그지없다. 이 책에서 이들 작품에 대한 개략적 이해를 구할 수 있었던 점도 유익하다.
입센 희곡의 혁명적 성격은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별달리 새로울 것이 없게 다가온다. 그것이 그가 작품 활동을 한 시기와 지금과 백년 이상의 시차가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그 사이에 세계 사회와 문화가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우리의 시각을 백여 년 전 노르웨이로 돌렸을 때 입센이 그의 사회극들을 쓰기 시작할 당대의 사회를 조감할 수 있도록 이 책은 정치, 사회적 배경에 대한 소개를 소상히 알려준다. 당시 노르웨이는 완전한 독립국가가 아니고 형식적으로 국가이지만 스웨덴 국왕의 지배를 받고 실질적으로 스웨덴의 자치령 정도에 불과한 수준이었다는 점. 수도인 오슬로, 당시의 명칭인 크리스티아니아를 제외하면 국민 대다수가 개발이 덜 된 시골지역에 살고 있었던 후진국 정도로 인식되었다는 점. 여성의 법적, 사회적 지위는 매우 낮아서 <인형의 집>이나 <유령> 등에서 알 수 있는 대로 기혼녀는 독자적인 법적 권리를 부여받지 못했다는 점 등을 이 책은 독자에게 알려준다.
1863년 법적으로 미혼의 여성은 성인임이 인정되었지만 기혼 여성들은 그 후 25년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P.87)
저자는 입센과 동시대의 문단과의 관계에도 관심을 쏟고 있다. 입센의 필생의 라이벌인 비에른손, 그와의 우정과 갈등. 그의 작품에 혹평을 퍼붓는 비평계에 대한 입센의 분개, 작가지원금의 거절로 상심한 입센이 가뭄에 콩 나듯 한 외에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조국에 정주하지 못한 점. 입센에 대한 브란데스, 가르보르 등의 평가와 함순의 입센 비난 등의 사실.
저자는 입센 희곡의 해독에 있어서도 의외의 관점을 보여주는데, 때로는 야멸찰 정도로 가차 없어 문득 저자의 이념적 좌표가 궁금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특히 <민중의 적>에서 스톡만 박사를 자아도취에 빠진 순진한 정의감의 소시민으로 기술한 점에서 그렇다.
이 절제되지 않은 진실의 전달자의 말을 통해 입센은 처음으로 사회비판적인 문학의 현저한 가치로서의 진실을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렸다. (P.138)
입센의 작품이 가족, 특히 부부 간의 관계 설정에 치중하다 보니 흔히 간과되기 쉬웠던 아이들에 주의를 환기한 점도 신선하다. 입센의 작품에서 어린아이들은 미래가 없다고 단언한다. 맞는 말이다. 되돌아보면 그의 희곡에서 아이들이 버림받거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문득 평생토록 외면 받았던 그의 첫아이가 떠오른다. 독자는 작품에만 만족하지 못하고 작가의 개인사마저도 궁금해 한다. 입센의 성격이 소극적이 내성적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청년 입센의 불장난과 아이의 불행한 운명에 동정을 품는다. 노년기의 입센이 젊은 여성들과 벌인 스캔들에 가까운 잇따른 교제들. 작가 입센이 아닌 인간 입센에 대한 실망과 아울러 인간적인 연민이라는 이중적 감정에 휩싸인다.
작가들은 더 이상 아름다움만을 추구하지 않았고, 대신 진실을 목적으로 삼았다. 입센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진실이 아름다움 그 자체라고 믿었다.” (P.32)
진실 없이는 관계의 변화가 없고, 진실 없이는 자유도 없는 것이다. 진실이냐 거짓이냐, 이것은 사회와 가족들에게 던지는 물음이었다. (P.76)
입센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스스로 언급했듯이 ‘진실의 추구’에 있다. 보편적인 것아 아닌 작가의 눈으로 거쳐 여과된 진실, 따라서 상대적, 주관적 진실이다. 그가 보기에 개인의 표현과 의사의 자유를 억압하고 방해하는 제도, 체제, 문화, 관습 등은 타파해야 할 대상이다. 스스로 사회정의를 추구한다고 표명한 정치인과 언론이 이해관계에 따라 표리부동 하는 광경을 목도하고는 그들의 부조리함을 지적하여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견해에 대해서도 회의를 품는다. 진실 구현을 절대시하는 게 과연 바람직하고 옳은 것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민중의 적>에서 불의한 다수와 일체 타협하지 않는 스톡만 박사와 달리 <들오리>의 그레거스는 거짓의 힘으로 그나마 근근이 버티던 한 가족을 파멸로 몰고 갔다. <로스메르 저택>의 로스메르와 레베카를 에워싼 진실은 그들을 죽음으로 이끌 따름이었다. <건축사 솔네스>는 어떠한가? 여기서 진실은 은폐된다. 솔네스와 아내, 솔네스와 힐데 간의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입센 문학의 장점은 사회 저변에 암암리에 공유되던 문제의식을 표면으로 끌어올려서 무대 위에 돌출시켜 세상을 향해 외치는 강인한 힘에 있다. 극적 결말을 위해 잘 짜여진 구성으로 긴장감과 호기심을 극대화시키고 예기치 못한 파격적 결말로 독자와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독자와 관객은 작가의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반추하게 된다.
주제들은 이미 존재해 있던 것이었지만 입센 이전의 그 어느 누구도 그 주제가 일상적인 대화에 파고들 정도로 진지하고 선동적으로 다루지는 못했다. (P.34)
입센의 문학은 부단한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초기 역사극의 시대를 거쳐 본격적 성공작이라 할 <페르 귄트>에서 그가 착안한 것은 노르웨이의 민간 설화였다. 노르웨이인의 민족성을 비판하기 위한 작품임에도 오히려 노르웨이인의 특성을 대표하는 것으로 상반된 평가를 받게 된 점이 이 작품의 특색이다. 페르 귄트는 온갖 결점과 잘못에도 불구하고 외면하기에는 너무 매력적이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진지하고 차분함이 존중되던 당대에 잃어버린 고대 바이킹의 정신을 되살려 오히려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인간성의 전형이 되었다. 거칠고 고대적인 자유로운 영혼의 페르 귄트의 정신은 <바다에서 온 부인>의 낯선 뱃사람을 통해 후대에 이어진다. 엘리다를 사로잡은 바다의 알 수 없는 힘은 무엇보다도 자유와 동경에 대한 소망이다.
중기 사회극에서 독자는 주인공의 대사와 행위에 주의를 집중하게 마련이다. 정의와 진실을 추구하는 주인공에 반대하는 소위 나쁜 인물들의 존재는 필요한 범위 내에서만 인지된다. <민중의 적>에서 스톡만 박사의 형인 시장은 악인으로 불려야 될 인물인가? 그는 <사회의 지주>의 베르니크와 여러모로 닮은꼴이다. 그들은 선과 악의 구별과 도덕률을 인식한다. (개인적 성공은 물론이고) 도시의 번영을 위해서 그들은 진실을 왜곡하고 은폐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도시와 주민의 이익이다. 제삼자의 시각이 아닌 당사자의 입장에서 불명확한 위험보다는 가시적인 이익을 우선시하는 그들의 선택과 행위가 결코 남의 일로 여겨질 수 없으리라. 이들에 비하면 입센은 표리부동한 좌파 언론인들과 기회주의적 자본가들에 대한 비판에 오히려 날을 세운다. 입센은 그들이야말로 ‘민중의 적’으로 간주하고 싶은 듯하다.
이 책은 <페르 귄트>부터 <존 가브리엘 보르크만>에 이르기까지 입센의 대표작 11편을 소개하고 분석한다. 부록으로 마지막 작품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를 소개하므로 그의 주요 작품은 대부분 거론하는 셈이다. 이 중에서 <사회의 지주>과 <존 가브리엘 보르크만>,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는 국내 미번역 작품들이다. 저자는 단순한 작품 분석에 그치지 않는다. 입센의 삶과 연관시켜 각 작품들의 개인적, 시대적 배경을 충분히 고찰하며 발표 이후 무대 상연 기록과 평단의 반응까지도 꼼꼼히 챙기고 있다. 따라서 독자들은 희곡 자체만으로는 알 수 없는 보다 종합적이고 전체적 관점에서 작품을 깊이 들여다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건축사 솔네스>와 <존 가브리엘 보르크만>에게서 느끼는 정서는 남다르다. 성공과 사랑을 맞바꾼 야심에 찬 남자들, 그 후 쇠락하거나 두려움에 떠는 연약하지만 강한 체하는 늙은 남자들. 그들에게서 입센의 자화상을 들여다볼뿐더러 우리 자신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스스로는 아직도 어깨에 힘을 주고 당당하게 세상에 맞설 수 있다고 외치지만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물결은 조만간 그들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만들 것이다. 그런 연유로 독자는 높은 탑에서 떨어지는 솔네스를 비웃을 수 없다. 과거의 영광을 반추하며 실현하지 못한 성공에의 꿈에 충만하여 스러져가는 보르크만에 애달픈 공감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에서 루벡은 예술가의 허울을 벗고 잊었던 여인 이레네와 함께 사랑의 죽음을 향해 떠난다.
입센 작품세계의 보다 차원높은 이해를 위해서, 일독하면 꽤 도움이 될 책이다. 다만 내용이 초심자에게 그리 친절한 편이 아니므로 입센의 작품을 읽기 위한 가이드북으로서 보다는 그의 작품을 어느 정도 읽은 후 정리와 심화를 위한 목적으로 삼으면 더욱 유용하다는 소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