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센 Takeout Classic 12
알도 켈 지음, 김수연 옮김 / 생각의나무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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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릭 입센의 희곡 작품들을 쭉 읽는 도중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개별 작품을 통해 이해한 입센이 단편적이고 단선적인 인식에 불과하고 그나마도 몰이해 또는 오해의 결과일지 모른다. 입센의 삶과 작품세계를 전반적으로 조망한 책을 읽고 싶었다. 김미혜가 쓴 책도 있지만 분량 면에서 부담감을 주어 비교적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입센의 작품들은 인기작에 치중된 감은 있지만 어쨌든 다양한 작품들이 국내에 소개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초기작과 말기작이 소개되지 못한 점은 유감스럽기 그지없다. 이 책에서 이들 작품에 대한 개략적 이해를 구할 수 있었던 점도 유익하다.

 

입센 희곡의 혁명적 성격은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별달리 새로울 것이 없게 다가온다. 그것이 그가 작품 활동을 한 시기와 지금과 백년 이상의 시차가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그 사이에 세계 사회와 문화가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우리의 시각을 백여 년 전 노르웨이로 돌렸을 때 입센이 그의 사회극들을 쓰기 시작할 당대의 사회를 조감할 수 있도록 이 책은 정치, 사회적 배경에 대한 소개를 소상히 알려준다. 당시 노르웨이는 완전한 독립국가가 아니고 형식적으로 국가이지만 스웨덴 국왕의 지배를 받고 실질적으로 스웨덴의 자치령 정도에 불과한 수준이었다는 점. 수도인 오슬로, 당시의 명칭인 크리스티아니아를 제외하면 국민 대다수가 개발이 덜 된 시골지역에 살고 있었던 후진국 정도로 인식되었다는 점. 여성의 법적, 사회적 지위는 매우 낮아서 <인형의 집>이나 <유령> 등에서 알 수 있는 대로 기혼녀는 독자적인 법적 권리를 부여받지 못했다는 점 등을 이 책은 독자에게 알려준다.

 

1863년 법적으로 미혼의 여성은 성인임이 인정되었지만 기혼 여성들은 그 후 25년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P.87)

 

저자는 입센과 동시대의 문단과의 관계에도 관심을 쏟고 있다. 입센의 필생의 라이벌인 비에른손, 그와의 우정과 갈등. 그의 작품에 혹평을 퍼붓는 비평계에 대한 입센의 분개, 작가지원금의 거절로 상심한 입센이 가뭄에 콩 나듯 한 외에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조국에 정주하지 못한 점. 입센에 대한 브란데스, 가르보르 등의 평가와 함순의 입센 비난 등의 사실.

 

저자는 입센 희곡의 해독에 있어서도 의외의 관점을 보여주는데, 때로는 야멸찰 정도로 가차 없어 문득 저자의 이념적 좌표가 궁금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특히 <민중의 적>에서 스톡만 박사를 자아도취에 빠진 순진한 정의감의 소시민으로 기술한 점에서 그렇다.

 

이 절제되지 않은 진실의 전달자의 말을 통해 입센은 처음으로 사회비판적인 문학의 현저한 가치로서의 진실을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렸다. (P.138)

 

입센의 작품이 가족, 특히 부부 간의 관계 설정에 치중하다 보니 흔히 간과되기 쉬웠던 아이들에 주의를 환기한 점도 신선하다. 입센의 작품에서 어린아이들은 미래가 없다고 단언한다. 맞는 말이다. 되돌아보면 그의 희곡에서 아이들이 버림받거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문득 평생토록 외면 받았던 그의 첫아이가 떠오른다. 독자는 작품에만 만족하지 못하고 작가의 개인사마저도 궁금해 한다. 입센의 성격이 소극적이 내성적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청년 입센의 불장난과 아이의 불행한 운명에 동정을 품는다. 노년기의 입센이 젊은 여성들과 벌인 스캔들에 가까운 잇따른 교제들. 작가 입센이 아닌 인간 입센에 대한 실망과 아울러 인간적인 연민이라는 이중적 감정에 휩싸인다.

 

작가들은 더 이상 아름다움만을 추구하지 않았고, 대신 진실을 목적으로 삼았다. 입센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진실이 아름다움 그 자체라고 믿었다.” (P.32)

 

진실 없이는 관계의 변화가 없고, 진실 없이는 자유도 없는 것이다. 진실이냐 거짓이냐, 이것은 사회와 가족들에게 던지는 물음이었다. (P.76)

 

입센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스스로 언급했듯이 진실의 추구에 있다. 보편적인 것아 아닌 작가의 눈으로 거쳐 여과된 진실, 따라서 상대적, 주관적 진실이다. 그가 보기에 개인의 표현과 의사의 자유를 억압하고 방해하는 제도, 체제, 문화, 관습 등은 타파해야 할 대상이다. 스스로 사회정의를 추구한다고 표명한 정치인과 언론이 이해관계에 따라 표리부동 하는 광경을 목도하고는 그들의 부조리함을 지적하여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견해에 대해서도 회의를 품는다. 진실 구현을 절대시하는 게 과연 바람직하고 옳은 것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민중의 적>에서 불의한 다수와 일체 타협하지 않는 스톡만 박사와 달리 <들오리>의 그레거스는 거짓의 힘으로 그나마 근근이 버티던 한 가족을 파멸로 몰고 갔다. <로스메르 저택>의 로스메르와 레베카를 에워싼 진실은 그들을 죽음으로 이끌 따름이었다. <건축사 솔네스>는 어떠한가? 여기서 진실은 은폐된다. 솔네스와 아내, 솔네스와 힐데 간의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입센 문학의 장점은 사회 저변에 암암리에 공유되던 문제의식을 표면으로 끌어올려서 무대 위에 돌출시켜 세상을 향해 외치는 강인한 힘에 있다. 극적 결말을 위해 잘 짜여진 구성으로 긴장감과 호기심을 극대화시키고 예기치 못한 파격적 결말로 독자와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독자와 관객은 작가의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반추하게 된다.

 

주제들은 이미 존재해 있던 것이었지만 입센 이전의 그 어느 누구도 그 주제가 일상적인 대화에 파고들 정도로 진지하고 선동적으로 다루지는 못했다. (P.34)

 

입센의 문학은 부단한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초기 역사극의 시대를 거쳐 본격적 성공작이라 할 <페르 귄트>에서 그가 착안한 것은 노르웨이의 민간 설화였다. 노르웨이인의 민족성을 비판하기 위한 작품임에도 오히려 노르웨이인의 특성을 대표하는 것으로 상반된 평가를 받게 된 점이 이 작품의 특색이다. 페르 귄트는 온갖 결점과 잘못에도 불구하고 외면하기에는 너무 매력적이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진지하고 차분함이 존중되던 당대에 잃어버린 고대 바이킹의 정신을 되살려 오히려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인간성의 전형이 되었다. 거칠고 고대적인 자유로운 영혼의 페르 귄트의 정신은 <바다에서 온 부인>의 낯선 뱃사람을 통해 후대에 이어진다. 엘리다를 사로잡은 바다의 알 수 없는 힘은 무엇보다도 자유와 동경에 대한 소망이다.

 

중기 사회극에서 독자는 주인공의 대사와 행위에 주의를 집중하게 마련이다. 정의와 진실을 추구하는 주인공에 반대하는 소위 나쁜 인물들의 존재는 필요한 범위 내에서만 인지된다. <민중의 적>에서 스톡만 박사의 형인 시장은 악인으로 불려야 될 인물인가? 그는 <사회의 지주>의 베르니크와 여러모로 닮은꼴이다. 그들은 선과 악의 구별과 도덕률을 인식한다. (개인적 성공은 물론이고) 도시의 번영을 위해서 그들은 진실을 왜곡하고 은폐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도시와 주민의 이익이다. 제삼자의 시각이 아닌 당사자의 입장에서 불명확한 위험보다는 가시적인 이익을 우선시하는 그들의 선택과 행위가 결코 남의 일로 여겨질 수 없으리라. 이들에 비하면 입센은 표리부동한 좌파 언론인들과 기회주의적 자본가들에 대한 비판에 오히려 날을 세운다. 입센은 그들이야말로 민중의 적으로 간주하고 싶은 듯하다.

 

이 책은 <페르 귄트>부터 <존 가브리엘 보르크만>에 이르기까지 입센의 대표작 11편을 소개하고 분석한다. 부록으로 마지막 작품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를 소개하므로 그의 주요 작품은 대부분 거론하는 셈이다. 이 중에서 <사회의 지주><존 가브리엘 보르크만>,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는 국내 미번역 작품들이다. 저자는 단순한 작품 분석에 그치지 않는다. 입센의 삶과 연관시켜 각 작품들의 개인적, 시대적 배경을 충분히 고찰하며 발표 이후 무대 상연 기록과 평단의 반응까지도 꼼꼼히 챙기고 있다. 따라서 독자들은 희곡 자체만으로는 알 수 없는 보다 종합적이고 전체적 관점에서 작품을 깊이 들여다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건축사 솔네스><존 가브리엘 보르크만>에게서 느끼는 정서는 남다르다. 성공과 사랑을 맞바꾼 야심에 찬 남자들, 그 후 쇠락하거나 두려움에 떠는 연약하지만 강한 체하는 늙은 남자들. 그들에게서 입센의 자화상을 들여다볼뿐더러 우리 자신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스스로는 아직도 어깨에 힘을 주고 당당하게 세상에 맞설 수 있다고 외치지만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물결은 조만간 그들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만들 것이다. 그런 연유로 독자는 높은 탑에서 떨어지는 솔네스를 비웃을 수 없다. 과거의 영광을 반추하며 실현하지 못한 성공에의 꿈에 충만하여 스러져가는 보르크만에 애달픈 공감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에서 루벡은 예술가의 허울을 벗고 잊었던 여인 이레네와 함께 사랑의 죽음을 향해 떠난다.

 

입센 작품세계의 보다 차원높은 이해를 위해서, 일독하면 꽤 도움이 될 책이다. 다만 내용이 초심자에게 그리 친절한 편이 아니므로 입센의 작품을 읽기 위한 가이드북으로서 보다는 그의 작품을 어느 정도 읽은 후 정리와 심화를 위한 목적으로 삼으면 더욱 유용하다는 소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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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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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소중한 존재를 우리는 평상시에 잘 인식하지 못한다. 물과 공기처럼 그것이 부족하고 사라지고 결핍될 때 비로소 가치를 깨닫게 되고 다급하게 갈구하지만 대개는 버스 떠난 뒤에 손 흔드는 격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일생이 화살처럼 덧없이 순식간에 지나쳐가면 만시지탄 하리라. 우리가 놓치는 생의 가치를 희귀한 조로증에 걸린 한 소년의 눈을 통해 새삼 재음미하는 기회를 작가는 제공한다. 남보다 몇 배는 빠르게 세상을 사는 그에게 시간은 더없이 소중하며 남은 생은 안타까울 뿐이다.

 

노화, 즉 늙어감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작중 아름이처럼 머리가 하얗게 세고 몸이 약해지며 눈이 흐릿해지고 손에 힘이 없어 숟가락을 떨어뜨리게 될 때의 삼경 말이다. 더구나 깨닫지 못할 정도로 서서히 진행되는 게 아니고 급속하게 겪을 때의 그것. 작가는 노화의 일련의 과정을 극도로 생생하게 독자에게 보여준다.

 

소재와 설정만 놓고 보면 앞을 못 가릴 정도로 눈물을 쏙 빼놓을 만한 이야기 전개가 예상된다. 사실 그런 대목이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작가가 누구이던가. 어떤 순간에도 궁핍과 슬픔 속에 함몰되지 않고 미소와 기쁨을 능청스러움 속에 낚아 올리는 주특기를 보유하고 있는 작가.

 

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을까?’......‘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생을 다시 살고 싶어서’ (P.79)

나는 건강에 무지한 건강, 청춘에 무지한 청춘이 부러웠다. (P.97)

 

보통, 평범, 일상은 흔히 무시되고 간과되기 쉽다. 희소성의 법칙이 가치를 정하듯 귀중하지만 흔한 것은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다. 기실 소중한 것은 평범함 속에 깃들어 있는데 말이다. 병자는 일반인의 건강이 절실하게 다가오지만, 청춘이 자신의 눈부신 아름다움을 인식하지 못한다.

 

전반부는 아름이가 술회하는 어린 엄마 아빠의 이야기다. 확실히 열일곱의 나이에 부모가 된다는 것은 이를뿐더러 드문 사례다. 부모보다 신체적으로 늙은 아이는 정신적으로도 더 성숙하다. 세 가족의 역경을 통해서 우리들은 역설적으로 생의 신비와 경이를 새삼 정면으로 바라보게 된다.

 

딸랑이 소리 하나에 눈이 휘둥그레지는 아이. 그걸 보고 웃는 부모. 그 미소 속에는 사람에 대한 경이와 겸손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본인들로 의식하지 못했지만 정말 그랬다. (P.63)

 

아이들은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한 환상을 품는다. 어른만 되면 하고 싶었지만 금지당한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는다. ‘진짜 어른이 되는 것, 그것은 글자 그대로 독립을 의미한다. 거친 세상에 홀로 서서 헤치고 버티어 나가기.

 

아버지는 인생이 뭔지 몰랐다. 하지만 어른이란 단어에서 어쩐지 지독한 냄새가 난다는 건 알았다. 그건 단순히 피로나 권력, 또는 타락의 냄새가 아니었다......아버지가 어른이란 말 속에서 본능적으로 감지한 것, 그것은 다름아닌 외로움의 냄새였다. (P.67)

 

그러면 나이듦의 미덕은 무엇일까? 타인을 보다 많이 이해해 줄 수 있다는 게 아닐지. 아름이가 엄마의 가출을 용서하고 이해하듯이.

 

병원비 마련을 위한 방송 촬영 장면. 아름이 병을 처음 알게 된 날의 심정을 묻는 작가에게 언뜻 쓸데없어 보이는 답변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아빠. 이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억누를 수 없다. 요새 눈물이 너무 헤퍼져서 큰일이다.

 

후반부는 아름과 서하의 사랑의 교감으로 이어진다. 육체 연령 팔십대의 희귀병자라고 사랑의 감정을 갖지 못하란 법은 없다. 그의 나이 불과 열일곱 아닌가. 그에게는 또래 이성과의 교제가 또 하나의 절실한 필요와 욕구일 수 있음을 인정하자. 사랑의 긍정적 효과는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는 점이다.

 

모든 것이 의미있고, 중요해지는 날들이었다. 그애가 하는 얘기, 그애가 쓰는 단어, 그애가 보낸 노래, 그애가 가른 여백, 그런 것이 전부 암시가 됐다. 나는 이 세계의 주석가가 되고, 번역가가 되고, 해석자가 되어 있었다......내 짐작이 맞았다.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 탓에 이 세상도 덩달아 좋아져버렸다. (P.233)

 

아름과 서하의 이메일 스토리는 아름다우면서도 왠지 모를 불안감을 드리운다. 아름이가 말했듯이 하느님이 새삼 이제 와서 아름에게 관심을 쏟지는 않을 텐데 하는 직감, 언제나 그렇듯이 안 좋을 예감은 적중하는 법, 밝혀지는 진실.

 

우리는 아름의 슬픔과 실망과 허탈을 이해한다. 그가 큰 욕심을 부린 것도 아니었는데. 그저 세상을 떠나기 전 영원한 추억으로 남을 자그마한 기쁨을 누리고자 했을 뿐인데. 그의 자학적인 게임 탐닉을 착잡한 심정으로 공감한다.

 

내 안의 깊고 깊은 세계가 클리어된 동시에 문을 닫아버린 느낌. 모든 것이 해결되고 분명해졌는데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기분. 신음은 그 어두운 동굴에서 길 잃은 바람처럼 터져나왔다. (P.284)

 

이 작품은 조로의 영혼이 찬미하는 인생의 청춘과, 계절의 청춘 이야기다. 스스로 아름다워,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인 줄 모르는 소년(P.335)과 그 시절. 언제 살고 싶어지느냐는 서하의 물음에 대한 아름의 답변처럼 삶의 진실한 의미와 가치는 일상의 평범함 속에 있음의 재발견. 아름에게 보통사람들은 너무나 일상적이고 평범해서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사소한 순간들, 행위들(P.271~272)이 더할 나위 없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그리고 죽음과 새 생명이 교차하는 순간은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자연의 자연스러운 순리임을 덧붙여준다. 첫 장편 도전에 묵직한 소재와 주제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녹여낸 작가의 역량이 새삼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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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티치티 뱅뱅 - 하늘을 나는 자동차
이언 플레밍 지음, 존 버닝햄 그림, 김경미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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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릴 때 읽었던 책 중 세부적인 스토리는 기억 안 나지만 굉장히 흥미진진하여 제목이 유달리 각인되었던 동화책이 있었다. <치티치티 빵빵>이라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갑자기 그 책이 다시 보고 싶어졌다. 하여 열심히 검색해 보니 이것이 바로 그 책이란다.

 

솔직히 놀랐다. 명성이 자자한 007시리즈의 원작자가 이 작품의 작가라는 사실. 그것도 노년에 썼으니 자신의 원숙한 작가 역량을 단번에 발휘한 셈이다. 작가의 이력을 반영하듯 이 작품에도 첩보 소설과 같은 특성이 다수 반영되어 있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새삼 알아채게 된다. 특수기능이 장착된 차량, 범죄 집단, 주인공의 위기일발과 같은 흥미로운 극적 장치 말이다.

 

어른이 되면 한 가지 섭섭한 점은 어릴 적 읽었던 재밌는 동화책을 과거만큼 몰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순수성을 잃었고 작품의 내용에 끊임없는 비판과 감시의 눈초리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앞으로 쑥쑥 나아가기보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현재의 위치를 확인하는데 주력한다. 그럼에도 편린이나마 그때의 느낌을 되새겨줄 수 있다면 더없이 고마운 일이다. 이 작품처럼.

 

이 동화의 주인공은 유감스럽지만 포트 가족이 아니다. 멋진 자동차, 치티치티 뱅뱅이야말로 단연 주인공이다. 생각해보라, 1960년대에 인공지능을 갖춘 자동차라. 도로에서는 달리고, 공중에서는 하늘을 날고, 바다에서는 물위를 쏜살같이 미끄러져 가는 차. 상황을 스스로 감지하여 자신의 판단에 따라 운전자에게 선택하라고 지시하며, 빨리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주저 없이 바보라고 내뱉는 그런 차다. 외관은 어떠한가? 앞뒤 똑같은 검정색 딱정벌레와는 수준을 달리하는 초록색의 멋진 레이싱카.

 

포트 중령은 작가 자신의 분신이며, 첩보원 같은 지식과 판단력을 겸비한다. 괴짜라는 점도 유사성이 있지 않을까? 제러미와 제미마 쌍둥이 남매의 용기와 재치도 빠뜨릴 수 없다. 무엇보다도 어리숙한 악당 몬스터 조 일행이다. 전설적인 은행 강도인 그네들이 꼬마들의 속임에 넘어가서 제대로 실력발휘도 못해보고 잡혀버리니 쌍둥이들을 잡아놓고 의기양양하게 온갖 젠체하던 장면이 오히려 우스워질 뿐이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에서 초콜릿을 빼놓을 수 없다. 몬스터 조와 포트 가족, 치티치티 뱅뱅이 조우하여 사건이 해결되는 장소가 파리의 유명한 초콜릿 가게라는 점에서 작가의 의도가 드러난다. 게다가 봉봉 씨가 쌍둥이에게 안겨주는 어마어마한 사탕과 초콜릿 상자는 거의 어린이들의 로망이 아니겠는가!

 

여기서는 스토리 라인의 지나치게 단선적 구조, 우연성의 절묘한 결합 등 시시콜콜한 흠을 굳이 지적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작품에서는 언급하였지만 단지 작가의 사망으로 말미암아 멋진 자동차의 또 다른 모험이 이어지지 못했다는 점이 오로지 아쉬울 뿐이다. 그리고 이 책이 절판이라는 점도 마찬가지로 섭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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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잡아먹히지 않는 빨간 모자 이야기
마이크 아르텔 지음, 짐 해리스 그림, 한강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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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림 형제의 유명한 빨간 모자 이야기를 리메이크하였다. 원작에서는 늑대가 빨간 모자와 할머니를 잡아 먹지만, 사냥꾼이 이들을 구해내고 늑대는 물에 빠져 죽는 것으로 기억한다. 작가는 이렇게 생각한 듯하다. 주인공 빨간 모자는 너무 소극적이다. 사냥꾼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잡아먹히고 말았을 것이다. 명색이 주인공인데 잡아먹히면 쓰나, 죽지 않고 살아서 오히려 신나게 골탕먹여야지.

 

그래서 미국 루이지애나판 빨간 모자가 등장하였다. 미시시피강 유역이라는 지역적 특성답게 늪을 배경으로 하여, 늑대는 악어로 대체되었다. 빨간 모자는 흠, 오리로! 동화에서 우화로 변신 완료! 원작의 늑대와 마찬가지로 악어 클로드도 음흉하지만 다소간 멍청한 캐릭터다. 빨간 모자의 막대기 한 방에 무서워서 늪에서 후퇴를 한 것이나, 매운 소스가 발라진 소시지를 오리 고기로 착각하여 다시는 오리 고기는 가까이 하지 않게 된 것들이 말이다.

 

원작에는 없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빨간 모자를 돕는 똑똑한 고양이 티진. 갑작스레 장화신은 고양이 이야기가 떠오른다. 여기서 착안했는지 모르겠으나 빨간 모자가 위기를 탈출한 것은 전적으로 고양이 티진의 재치 덕택이다. , 그런데 실제로는 오리랑 고양이랑 사이좋게 공존할 수 있나 모르겠다, 고양이가 가만 있으려나?

 

삽화는 큼지막하면서도 세밀하게 동화 느낌을 잘 살릴 수 있도록 인물들을 유머스럽고 해학적으로 그리고 있다. 동화책보다는 그림책에 가깝다. 악어 클로드는 커다란 덩치에 흉악함과 우둔함을 겸비할 수 있게 사실적이며, 특히 할머니 집의 액자에서 모나리자를 패러디한 그림은 절로 웃음이 터져나오게 만든다.

 

삽화가의 유머 감각이 남다른 점은 이야기 중에 등장하지 않는 다섯 번째 캐릭터를 창안해낸 데 있다. 빨간 모자와 티진 일행과 모험을 함께 하는 생쥐를 눈여겨보자. 늪에서 고양이 꼬리에 매달려 목숨을 구한 장면은 오히려 약과다. 압권은 맨 뒤에 있다. 악어를 물리치고 빨간 모자와 할머니가 풍족한 만찬을 즐기는 식탁, 그 아래에 티진과 생쥐도 함께 만찬을 즐긴다. 커다란 치즈에 몸을 기대고 고양이와 마주 앉아 치즈를 음미하는 생쥐의 여유작작한 태도를 보라. 다음 모두가 오수를 누리는 시간. 생쥐는 친구를 불러와 남은 음식들을 접시째 날라간다. 한쪽 눈을 뜨고 의자 위에서 이들을 지켜보는 티진.

 

빨간 모자 이야기의 상투성에 싫증을 느끼거나 소극적 전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어쨌든 빨간 모자는 악어에게 잡아먹히지 않고 용기와 재치로 가뿐하게 물리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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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 꼬마 선녀 번개 꼬마 선녀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진태람 그림 / 문학동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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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과 번개를 무서워하는 아이들은 제법 많다. 크면서 점차 나아지지만 어릴 적에는 폭우가 퍼붓고 하늘에서 번쩍거리며 우르르 쾅 소리가 나면 자다가도 슬그머니 부모의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어디 아이들뿐이겠는가? 어른들 중에서도 더구나 여성들의 경우에는 노소를 가리지 않고 대체로 천둥 번개를 무서워하는 모습을 많이 봤다.

 

자연현상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게 되려면 빨라도 유치원 또는 초등학생 정도는 되어야 하니 일단 과학적 접근은 포기하자. 대신 여기 작가처럼 옛날이야기 형태로 꾸며서 천둥과 번개가 결코 무서워해야 할 존재가 아님을 아이들에게 각인시키는 방식은 어떨지. 이 정도라면 훗날 아이들이 커서 부모가 자신들을 속였다고 억울해하지는 않을 듯하다.

 

하늘나라에 선녀들이 살고 있다는 설정은 워낙 흔해서 평범하다. 반면 장난꾸러기 꼬마 선녀들과 옥황상제 대신 선녀 할머니의 존재는 신선하다. 선녀들의 역할은 열심히 구름을 만드는 일이다. 꼬마 선녀들이 날개옷이 거추장스럽다고 훌쩍 벗어던진 후 구름 위를 달려가면서 아래 세상 구경을 하는 대목은 일견 해학적이다. 아이들이 이야기에 쉽게 몰입하도록 동년배의 또래들을 일부러 설정한 게 효과를 발휘하는 듯하다. 세상 구경을 하는데 먹구름에서 비가 퍼붓는 바람에 심심해진 그들, 선녀 할머니가 준 은빛 창과 하늘빛 북의 우연한 효력에 열광할 수밖에. 한번 상상해본다. 정말 신나겠다. 한 명은 번개 창을 이리저리 집어던지며 다른 꼬마 선녀는 천둥 북을 쿵쾅쿵쾅 마음껏 두들겨댄다. 요즘 아이들이 사는 아파트와는 달리 구름 위에서는 제아무리 시끄럽게 천방지축 뛰어다녀도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으니.

 

다음부터는 비오고 천둥 번개 치는 날 하늘을 올려다보자. 사방을 제 맘대로 번쩍이고 쿵쾅거리는 현상을 꼬마 선녀들이 구름 위에서 신나서 춤추며 뛰어다니는 장면이라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어느새 두려움과 무서움은 씻은 듯 자취를 감추고 호기심이 생길 것이다. 뒤집어 쓴 이불을 박차고 유리창에 코를 박고 저 먼 위를 쳐다보며 말이다.

 

옛날이야기 풍의 느낌을 자아내도록 부드럽고 따뜻한 정감의 삽화가 분위기를 더욱 그럴듯하게 일조한다. 그림 속 꼬마 선녀들의 장난꾸러기다운 모습은 우리네 아이들과 흡사하여 친근감을 더해준다. 작가는 유명 소설가인 한강. 자신이 아이를 낳으면서 동화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고 밝힌다. 본격 작가에게 더 많은 동화쓰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작품이 현재로서는 그가 쓴 마지막 동화다. 아이가 동화를 볼 연령이 지난 듯하다, 나중에 훗날 손주가 태어난다면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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