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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 귄트 ㅣ 밀레니엄 북스 66
헨릭 입센 지음, 곽복록 옮김 / 신원문화사 / 2006년 2월
평점 :
입센의 전기와 중기, 후기의 작품시기별로 한 작품씩 수록한 모음집이다. 선곡이 절묘하다. 이 책과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책, 이렇게 두 권만 있으면 어지간한 입센의 주요 희곡은 모두 포괄한다.
1. 페르 귄트
오랜만에 <페르 귄트>를 다시 읽는다. 중학생 시절에 헌책방에서 구해 읽은 삼성출판사 문학전집에 들어 있던 희곡집.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기억은 종잡을 수 없는 신비하고도 웅대한 스케일의 대작이었다는 점 하나뿐이다. 여전히 이 희곡은 섣부른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다만 내 삶의 세월은 작품에 대한 안계(眼界)를 넓히는 데 도움은 된 듯하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작가와 인물들이 작중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조금이나마 체감할 수 있다. <페르 귄트>는 역설이지만 국내에서 비인기 작이다. 번역본도 달랑 이 책 한 편이다. 그의 이후 사회극들의 조명에 비춘다면. 반면 그리그의 덕택에 음악계에서는 인기목록에 들어가는 편이다. 입센의 여타 극작품 중에서 음악적으로 성공한 사례가 또 있는지 모르겠다.
주인공인 페르 귄트의 사고와 행위를 어떻게 판단하고 받아들여야 할지가 이 작품의 핵심이다. 외부적으로 표상되는 그는 응당 나쁜 인물이다. 그럼에도 독자는 그가 과연 사악한 인물일까 의구심을 갖게 된다. 그는 북구적인 인물이다. 커다란 체구에 거칠면서도 현실보다 상상과 모험에 치중한다. 좌충우돌하지만 의외로 과단성은 부족(2막 1장에서 군대 징집을 피하기 위해 손가락을 자르는 젊은이를 숨어서 지켜보는 페르를 보라!)하다. 세속의 도덕적 허울은 가볍게 무시하지만 위기의 순간에는 모성과 신성에 호소하는 아이 같은 면모를 보인다. 생의 기쁨과 젊음의 활력을 사랑하고 갈구하는 페르(4막 8장). 반면 쉽게 속임을 당하는 어수룩함 역시 천진함과 아이 같음에 근접한다.
이 작품은 현실과 설화가 위화감 없이 혼재되어 있다. 페르가 지어낸 수사슴을 타고 절벽에서 떨어지는 허풍(1막 1장)도, 도브레 왕에서 벌어진 트롤 소동(1막 6장)도 론데 산을 중심으로 하는 스칸디나비아의 북구적 전승과 연결되어 있다. 트롤은 해리 포터,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 등장하는 등 현대의 가장 인기 있는 판타지의 출연진이 아닌가.
특색 중 하나인 장대한 스케일은 주로 페르가 해외에서 떠돌이를 하는 과정을 알려준다. 영국에서의 노예무역, 모로코에서 배를 털리고 뜻하지 않게 예언자 행세를 하다가 아니트라에게 남은 보석마저 털려버린 페르. 이집트에서 정신병자들에 둘러싸여 곤욕을 치르는 귄트. 마지막에 나이든 페르 귄트는 귀향선이 난파하여 겨우 목숨을 구한다.
솔베이지는 페르에게 스쳐지나가는 여인이지만, 그녀의 도덕적인 청순미는 페르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페르는 그녀와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지만 이전에 저지른 죄악은 불가능하게 만든다. 마지막 장면에 늙은 페르와 솔베이지의 상면과 페르의 죽음은 앞서서 페르와 단추공 간의 실갱이 대목과 맞물려 종교적 참회와 반성을 유도한다. 단추공의 어원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여기서는 저승사자의 역할을 맡고 있다.
페르 같은 인물이라면 악마라도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다. 귀향선에서, 그리고 난파선에서 악마는 선객을 가장하여 그에게 제안을 던진다. 페르는 비종교적 인물로 비치지만 의외로 그는 참종교적이다. 그는 당대에 진실한 신앙과 기독교가 퇴락했음을 탄식(5막 1장)한다. 그리고 장례식 장면에서 참신앙의 존재를 찾고 자기의 길을 걷기로 결심(5막 3장)한다. 그리고 페르는 악마를 골탕 먹이기조차 한다(5막 10장).
단추공이 페르와 독자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명백하다. 페르는 인생을 잘못 살았다. 그는 항상 페르였지만 진정한 자기 자신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5막 7장). 도브레 왕은 1막 이후 페르의 삶이 인간이 아닌 충실한 트롤의 삶이었음을 선언한다(5막 8장). 페르를 구제한 것은 솔베이지의 신앙과 사랑의 힘 덕택이었으니 어머니, 아내의 모성과 순결성이 그를 지켜준 것이다(5막 10장).
입센은 이 작품을 운문으로 창작하였다. 즉 작품에 시적인 정서를 불어넣으려고 하여 여기서 후대의 사회극과 같은 현실적, 사회적 요소의 직접적 표출을 삼갔다. 작가가 묘사하고자 한 노르웨이인의 부정적 속성은 자취를 감추고 오히려 전형적인 긍정적 성격이 찬양받게 되었다. 작가의 오단인가 아니면 작품 자체의 고유한 생명력이 현대에 맞게 변용한 것인지 궁금하다.
2. 헤다 가블레르
입센 작품의 주된 무대는 가정과 가족이다. 가정은 자아가 타아와 마주치는 접점인 동시에 사회관계로 이어지는 출발점이다. 입센이 무엇보다 중시한 진실성의 문제는 도처에 편재하지만 개인과 가정에서 진실성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사회에서야 논의할 필요가 없으리라. 이른바 중기의 사회극은 기본적으로 가정 내에서의 진실성을 추구하는 노력이며, 이 작품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가정의 출발은 낯선 남녀 간의 사랑과 결혼으로 성립한다. 결혼의 의미가 육체적, 물리적 결합을 넘어선 정신적 교감으로 이루어져야 함은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이러한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입센 당대는 물론 현대도 마찬가지지만 결혼은 도피처이며, 사회와 관습의 많은 제약을 감내해야 하는 (사랑과는 별도의) 관계 형성이다.
주인공 헤다 가블레르는 방금 전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테스만의 아내다. 독자는 그녀가 장군의 딸이자 과거 사교계의 총아로서 대단한 미모의 소유자임을 알게 된다. 자기중심적이고 화려함을 좋아하는 성격, 불안한 예감대로 그녀와 남편의 대화는 엇박자를 보인다.
(헤다) 무엇보다도 참을 수 없었던 것은.....단 한 사람과 그것도 늘 같은 사람과 영원히 함께 있다는 사실이에요.
(헤다) 전 그 당시 완전히 지쳐 있었던 거예요. 제 시대는 이미 끝났었죠. (P.378~379)
그녀는 애정 없이 결혼 하였고, 결혼생활은 따분하기 그지없다. 남편이 자기의 명예를 빛내줄 것을 기대했으나 예상보다 지연되어 실망감마저 증폭되고 있다. 자신의 내심을 직설적으로 토로하는 것이 그녀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블랙) 당신은 행복하지 않아요.
(헤다) 따분하다고 했잖아요.
(헤다) 죽도록 따분한 것, 아시겠어요?
(헤다) 애정? 웃기는 소리 하지 마세요! (P.384~400)
헤다의 남편에 대한 태도는 경멸과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작가는 이를 대화에 앞선 지문으로 표현한다. 대화가 싫증난 듯이, 경멸하듯이, 싸늘한 눈초리로, 흥미 없다는 듯이 등등. 우리라는 표현에서 자기를 빼달라는 대사나 남편 가족의 일은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대사를 통해 독자는 헤다의 성격과 사랑 부재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헤다와 로브보르크는 과거에 한때 연인이었다. 그와 테스만은 둘 다 문화사학자라는 공통점을 지니지만, 테스만은 중세 가내수공업 연구라는 과거지향적인 반면 로브보르크는 미래학에 가까운 미래지향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어 그들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헤다의 내면은 로브보르크를 향해 있어 자신의 임신을 혐오하는 동시에 그와 엘브스테트 부인 간의 아이(잃어버린 원고)를 불태워버린다.
(로브보르크) 자식을 죽이는 것은 아비로서 최대의 죄악은 아니야......그만 어린애를 잃어버리고 말았어.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단 말이야. (P.439)
(헤다) 자아, 테아, 당신의 아이를 태워줄게요. 당신의 아이, 그리고 에일레르트 로브보르크의 아이. 불태워 줄게요. (P.441)
헤다는 이십대 초반인 만큼 아직 세상의 간교와 술책에 미숙하다. 그녀의 닭장 속 단 한 마리의 수컷인 블랙에게 위협을 받자 견딜 수 없다. 애정 부재의 결혼, 인내하기 어려운 평범한 남편과 뱃속의 아기,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그리고 타의에 의해 강요받게 되는 불륜 등.
(헤다) 어쨌든 당신 손아귀에 있는 건 사실이잖아요. 당신 뜻대로 해야 한다면 그건 마치 노예와 같은 거죠. 정말이에요. (참을 수 없다는 듯 벌떡 일어나며) 싫어요. 그건 도저히 참을 수 없어요. 싫어요. (P.465)
유례가 드문 단호한 결단으로 막이 내리지만, 여운은 씁쓸하다. 입센의 전작에서는 불행의 원인을 귀인하기가 용이하였다. 반면 이 작품에서는 남편 테스만에게 비난할 점을 찾기 어렵다. 정직하고 범상한 성격의 연구에 매진하는 학자. 아내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나름 노력하는 소심한 남편. 종래의 독단적이고 권위적 남편상과도 다르다.
헤다는 나쁜 여성으로 키워졌다. 부모 없이 재산마저 없고 생계가 막막한 혼기가 다가온 젊은 여성. 화려했던 과거 시절은 한때의 꿈으로 간직해야 한다. 차라리 독신이 그녀에게 어울리지만 경제적 능력이 없는 여성에게는 현대에서도 가능하지 않다.
작중에 헤다와 로브보르크 간에 수차에 걸쳐 반복적으로 형상화되는 “머리에 포도잎사귀를 장식하고”라는 구절의 의미를 살펴본다. 그것은 디오니스소 또는 바커스 신의 모습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두 사람 관계의 실체인 “삶에 대한 열정”(P.404)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헤다의 표현에 따르면 열정과 광기의 질탕한 축제에서 자신을 방기하지 않고 당당히 돌아오는 장면으로 해석하는 게 더 적합하다. 이 경우 보다 성숙한 자아를 발현시킬 수 있지만, 로브보르크는 돌아오지 못하였다.
(헤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거예요. 이제부터 평생 동안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거예요. (P.413)
(헤다) 그 사람한테는 인생의 향연에서 벗어나려는 힘과 의지가 있었어요. (P.458)
3. 아기 에욜프
극중에서 아기 에욜프는 1막에서 잠시 등장한다. 그리고 이내 물에 빠져 익사한다. 극의 실제 주인공은 아기 에욜프의 엄마인 리타이다. 아기 에욜프는 불쌍한 에욜프이기도 하다. 어릴 적 테이블에서 떨어져 절름발이가 되면서부터. 아기 에욜프 외에 또 다른 작은 에욜프가 있는데 고모인 애스터의 어릴 적 애칭이다. 오빠인 앨마스가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이쯤에서 에욜프의 의미가 궁금해진다. 여동생의 애칭을 자신의 어린 아들의 이름으로 명명한 이유도.
작품 속 미스터리는 하나 더 있다. 난데없이 등장한 쥐 할머니와 에욜프의 죽음 사이의 연관성. 피리부는 사나이와 마찬가지로 쥐 할머니는 쥐들을 유인하여 물에 빠뜨려 죽인다. 두 인물 사이에 어떤 설화적 유사성이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쥐 할머니가 에욜프의 죽음을 초래한 이유도 확연하지 않다.
리타는 피가 뜨거운 여성으로 남편에 대한 열정적 애정을 품고 있다. 그녀는 남편을 독점할 수 없는 것이 불만이다. 오로지 자신만이 남편의 관심과 사랑을 차지하고 싶어 하며, 남편이 여동생 애스터, 아기 에욜프 그리고 저술활동에 주의를 분산하는 걸 못견뎌한다. 한마디로 남편 욕심이 많다. 그래서 남편이 자신에게 열렬하지 않으면 밖으로 눈을 돌릴지도 모른다고 엄포를 놓는다.
(리타) 저는 저 자신으로 살아가고 싶어요. 당신과 함께, 당신 한 사람과만. 저는 에욜프의 엄마만으론 살아갈 수가 없어요.......저는 완전히 당신 것이고 싶은 거예요. 당신 한 사람만의 것이요, 알프레드! (P.252)
에욜프의 죽음으로 리타와 앨마스, 앨마스와 에스터의 관계는 변화의 법칙에 지배를 받게 된다. 리타와 앨마스는 부부 관계를 비탄과 비판의 시각에서 되돌아보며 자성하고 자책감에 사로잡혀 서로를 비난한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한다.
(앨마스) (물끄러미 아내의 얼굴을 보며) 이제부터 우리 두 사람 사이엔 벽이 존재하게 될 거야. (P.290)
앨마스와 애스터의 관계도 전환점에 처한다. 앨마스는 리타와 헤어지고 애스터에게로 돌아가려 한다. 순수하고 신성한 혈연의 평화롭고 행복했던 시절로. 그에게 있어 이때가 아름다운 시절로 결혼 생활은 오히려 타락한 시절일 뿐이다.
(앨마스) 애스터, 내가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곳은 바로 너한테야.
(앨마스) 좋아, 그렇다면 나는 네게로 돌아갈 거야. 그리운 내 동생에게로. 너에게로 돌아가서 결혼 생활의 때를 씻고 나 자신을 정화시키지 않으면 안 돼... (P.295)
앨마스의 순수하고 신성한 남매 간 사랑에 대하여 애스터는 새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그들이 혈연적 남매 간이 아니라는 것, 따라서 그들의 사랑은 이제 더 이상 순수하고 신성할 수 없다는 점을. 앨마스의 긍정적 부인에 대하여 그녀는 변화의 법칙을 언급한다. 그들 사이를 막아주었던 혈연의 방패가 사라진 지금, 애스터는 근친상간적 두려움에 휩싸인다. 그들의 사랑이 깊고 컸던 만큼 두려움 또한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아기 에욜프를 대신해서 작은 에욜프가 돼 달라는 리타와 앨마스의 요청을 거부하고 그녀가 도망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앨마스) (긴장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왜 그러는 거냐, 애스터. 마치 도망치는 것 같구나.
(애스터) (고뇌를 억누르며) 그래요, 알프레드! 도망치는 거예요.
(앨마스) 도망치는 거라고? 나한테서?
(애스터) (속삭이는 목소리로) 당신과 나 자신한테서.
(앨마스) (뒤로 주춤 물러서며) 아아! (P.313)
아기 에욜프는 죽고, 작은 에욜프는 떠났다. 앨마스마저 떠나려고 한다. 리타는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을 앞두고 그토록 거부하던 변화의 법칙에 순응하기로 한다. 이기적이며 독점적인 사랑을 갈구하던 리타는 욕심 부리지 않고 책임 의식과 (에욜프와) 화해를 위하여 자선 사업을 할 결심을 품는다.
(앨마스) 당신이 그만한 일을 할 수만 있다면 우리 에욜프가 태어난 것도 무의미한 일만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겠군.
(리타) 그 아이의 죽음 역시 무의미한 일만은 아닐 거예요. (P.325)
앨마스는 아내의 진심을 이해하고, 떠나기를 그만두고 리타를 돕기로 한다. 입센은 평범한 가정 비극을 인류애로 승화시킨다. 리타의 이타적 변모를 통해서. 앨마스의 고통스런 자각을 통해서. 이기적 사랑과 욕망은 사라지고 인류에 대한 사랑과 책임이 남는다. 두 에욜프의 떠남을 계기로. 작품의 끝대목은 무척이나 아름답다.
(리타) 우린 어디에 눈을 두어야 할까요?
(앨마스) (그윽한 눈빛으로 아내를 바라보며) 물론 위쪽이지. 산꼭대기, 별이 있는 쪽. 그리고 깊은 침묵이 흐르는 쪽.
(리타) (손을 내밀며) 고마워요! (P.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