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 시공주니어 문고 2단계 15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롤프 레티시 그림 / 시공주니어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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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초등학교 저학년인 큰아이한테 읽혀도 괜찮을지 막상 내가 읽고 나니 자신 없어진다. 어릴 적 TV를 통해 본 삐삐 이야기는 여전히 머릿속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유쾌하고 통쾌한 천하장사 말괄량이 삐삐. 아이들과 재미와 추억을 공유할 의도로 삼부작을 구입했건만. 부모의 입장에서는 소심해진다.

 

삐삐의 언행이 통쾌함을 안겨주는 이유는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는 사회적 상궤를 거부하고 도전하는 데 있다. 부모 없이 혼자 사는 아이, 학교도 가지 않고 괴상한 옷차림으로 다니는 아이를 자신의 아이가 친구로 여긴다면 대다수의 부모는 질겁할 것이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말을 따르지 않고 토를 다니는 아이, 어른들이 대화를 하는데 함부로 끼어들어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아이를 좋아할 어른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예의 없는 아이, 버릇없는 아이, 이것이 어른들이 보는 삐삐의 모습이다.

 

어른들이 정해준 틀과 규범의 한계에 갇혀 있기를 거부하는 아이. 엉뚱하면서 과감한 발상을 아무 일 아닌 듯 생각하고 행동으로 나타내주는 아이. 아이들 입장에서는 매순간 흥미와 모험심을 유발하는 친구이므로 당연히 열렬한 환호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커다란 어른들보다 훨씬 힘이 커서 경찰들도 도둑들도 차력사도 단번에 제압하는 아이. 재빠른 몸놀림과 초인적인 대담성과 균형감, 운동신경으로 서커스단을 능가하는 재주를 보이는 아이. 이런 삐삐에게 열광하지 않은 또래 아이들이 과연 있을까.

 

삐삐는 문명의 아웃사이더다. 어릴 때부터 아빠를 따라 배를 타고 바다와 세계를 방랑하였다. 배에서는 학교도 없고, 사회의 정교한 예절과 도덕과 관습도 신경 쓸 필요 없다. 그런 아이가 어쩔 수 없이 육지 생활, 사회생활을 겪게 되었으니 혼란과 충돌은 일정 부분 불가피하였으리라. 삐삐 자신도 자각하고 있다.

 

내가 아무리 잘 하려고 해도 다들 나더러 버릇이 없다고 해. 그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바다에서는 그런 건 문제도 아니었는데 말이야.” (P.165)

 

난 얌전해지기는 틀렸나 봐요. 아무리 애써도 안 되는 걸요. 앞으로도 절대 얌전해지지 못할 거예요. 그냥 바다에서 지낼 걸 그랬어요.” (P.180)

 

삐삐의 심성이 올바르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한 아이를 괴롭히는 여러 아이들을 혼내주거나, 도둑들을 상대로 밤새도록 폴카 춤을 춘 후 떳떳한 금화를 나눠주는 장면을 보자. 무엇보다 화재가 났을 때 아무도 손쓰지 못하는 건물에 갇힌 아이들을 구하는 대목을 보면 삐삐의 사려분별과 용기를 재평가하게 된다.

 

작가는 삐삐의 좌충우돌과 기행을 통해서 아이들의 눈을 붙잡아 맬 단순한 재미만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언뜻언뜻 내비치는 삐삐의 말에는 위선과 허식에 얽매인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과회에서 부인들이 자기네 가정부들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자 삐삐는 자기 할머니집의 가정부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일화들을 계속 들려준다.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할머니는 그를 훌륭한 가정부라고 인정했다는 전언을 들려주면서 말이다.

 

그래도 내 아이가 삐삐와 같은 언행을 따라하거나 그런 아이를 친구로 어울린다면 흔쾌히 허용할 수 있을까. 구구단을 몰라도 잘 살 수 있고, 수학 교육을 바보 같은 장난으로 일소에 부치고 술래잡기나 하며 놀겠다고 선언하며, 예쁜 분홍빛 버섯을 덥석 베어 문다거나 가루 설탕을 바닥에 뿌리고 걷는 재미를 시연해 보인다면 말이다. 머리는 그래야 한다면서 가슴으로는 그러지 못하는 소심한 부모의 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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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더스의 개 비룡소 클래식 12
위더 지음, 하이럼 반즈 외 그림, 노은정 옮김 / 비룡소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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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로와 파트라슈. 주인공 이름만 들어도 어린 시절 가슴 쨍하게 보았던 애니메이션의 이름이 떠오른다. <플랜더스의 개>. 우연히 얻게 된 아동용 책을 두 아이들이 열심히 읽는다. 특히 글밥이 조금만 많아도 질색하던 둘째 녀석이 웬일인지 반복해서 읽는 모습이 신기하다. 그래 이 참에 제대로 된 원작을 보게 해줘야지 하고 주문한 게 이 책. 절반의 성공이다. 원작을 알 수 있게 된 점이 성공이라면, 원작이 오히려 더 분량이 적다는 점에서 당황. <플랜더스의 개>는 채 백 쪽이 되지 않는다. 중편 이야기 정도쯤. 내용 전개도 비교적 간단한 편이라 뭔지 모를 허전함을 느끼게 하는데, 애니메이션과 이를 토대로 한 시중 동화책의 부풀리기와 덧칠의 영향 탓이다. 게다가 파트라슈는 흰 털북숭이 또는 갈색과 흰색이 뒤섞인 개가 아니었다는 사실도 충격적이다.

 

파트라슈는 넬로의 보조적 존재가 아니다. 작중 주인공은 사람과 동물이 대등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인생 경험은 넬로보다 파트라슈가 더 많기에 넬로의 소망과 희망의 부질없음에 그는 안타까워한다. 기본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가 갖는 잔인성과 이기심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그이므로.

 

새 주인은 술주정뱅이에다가 짐승 같은 사람이었어요. 파트라슈의 하루하루는 지옥이었습니다. 하느님의 피조물인 동물에게 고통을 나눠 주는 건, 이 땅의 기독교도들이 신앙심을 보여 주는 한 방법이었어요.” (P.15)

 

이 작품은 크리스마스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듯이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흔히 기대하듯이 훈훈하고 흐뭇한 웃음 대신 서늘함과 뿌연 눈물을 자아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세계의 명절 크리스마스라고 해서 모두가 행복하고 즐거운 법은 아니라는 자명함에도 간과하기 쉬운 사실을 깨닫게 하면서. 크리스마스에 더 중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점도. 비단 크리스마스뿐이랴.

 

파트라슈에게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습니다. 넬로를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이었죠. 사람이었다면 맛있는 음식, 원기를 되찾아줄 온기, 아늑한 잠자리를 위해 잠시 쉴 수도 있었겠지만 파트라슈의 우정은 그런 것과 달랐어요.” (P.88)

 

화자의 시각은 전지적 시점을 택하여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인물의 행위와 심경까지도 속속들이 들려준다. 어조는 담담하면서도 약간의 따스함과 동정심을 품고 넬로와 파트라슈를 바라본다. 자칫 값싼 감상에 빠지기 쉬울 텐데 휩쓸리지 않도록 꿋꿋하게 기조를 유지하는 작가의 인내심에 경탄한다. 반면 주변 인물에 대한 묘사는 시니컬하며 회의적이다. 작가는 기독교인들의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행위에 냉소한다. 루벤스의 명작을 보여주는 대가로 돈을 요구하는 성당, 넬로의 순수성을 믿으면서도 마을의 유일한 부잣집에 비위를 맞추기 급급한 주민들.

 

우리가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느끼는 감동은 복합적이다. 단순한 연민과 동정을 넘어 종을 뛰어넘는 사랑과 우정을 가슴을 찡하게 한다. 인간보다 더 나은. 그리고 부끄러움을 품게 만든다.

 

넬로와 파트라슈에게는 길고 구차한 삶보다 차라리 죽음이 더 자비로운 일이었지요. 죽음은 충직한 사랑을 품었던 한 생명과 순진무구한 믿음을 지녔던 또 다른 생명을 데려갔습니다. 사랑에 대한 보상도 없고 믿음 또한 실현되지 않는 세상으로부터 말이지요.” (P.97)

 

<뉘른베르크 스토브><플랜더스의 개>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어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분량 면에서는 전편보다 오히려 더 길다. 전자가 사람과 동물의 교감이라면, 후자는 사람과 사물의 교감을 제재로 한다. 스토브가 그 대상이다. 그렇다, 난로! 못생기고 천편일률적인 난방도구를 연상하지 말자. 사면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고 자체로서도 예술품으로서 뛰어나게 제작된 커다란 난로다. 공장에서 찍어낸 게 아니라 장인이 수작업으로 만든 공예품. 아우구스트의 집은 가난하다. 빚을 지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형편에 이러한 스토브는 일종의 사치다. 오래 전에 우연히 발견하여 대대로 내려온, 그래서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히르슈포겔. 히르슈포겔에 무한한 애정을 품는 아우구스트. 아버지는 감정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돈에 급급하여 스토브를 팔아넘긴다.

 

소년의 어린 시절은 이제 자신에게서 깡그리 사라져 버렸습니다. 명랑하고 구김살 없고 밝은 성격도 함께 사라져 버렸지요. 속으로 뜨거운 눈물을 삼키느라 소년의 말투는 퉁명스럽고 지쳐 있었어요. 자신에게는 이 일이 세상의 끝이나 다름없었으니까요.” (P.141)

 

이후 전개는 작품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우구스트와 히르슈포겔의 여행담으로 이어진다. 아홉 살 난 어린이가 과감하게 집을 뛰쳐나가 스토브와 함께 있고자 추위와 허기, 공포를 무릅쓰고 온갖 고생을 같이한다. 그것은 존재의 양식을 뛰어넘은 순수한 사랑 덕분이리라.

 

작품 속에는 어른과 아이의 행동 간 극명한 대조가 묘한 긴장을 제공한다. 소중한 스토브를 팔아치운 아버지를 원망하기는 쉽지만 불가피성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아버지를 비난하며 가출한 아들. 당대도 지금도 쉽사리 용서받거나 인정받기는 어려운 행위다. 물론 결과적으로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현실 세계는 동화와는 다르므로. 왕을 속여 넘긴 신뢰하던 신하의 사기적 행위. 터무니없는 중간마진을 챙긴 골동품상 등. 이들과 전적으로 순수함으로 가득 찬 아이 아우구스트와는 헤아릴 길 없는 간극이 놓여있다.

 

사람과 사물이 상호 교감을 나누기 위해서 공감과 사랑이 깃들어야 한다. 사물은 이를 받아들일 영혼을 갖추어야 한다. 작가는 오로지 모작이나 위조품이 아닌 진품만이 영혼을 지닐 수 있다고 한다. 진실한 존재 간의 따스한 교감을 꿈인지 환상일지 모를 장면에서 뉘른베르크산 스토브는 이렇게 회상한다.

 

그때 제 삶은, 속이 텅 빈 채 도시의 웅장한 방에 썰렁하게 서있는 것보다 훨씬 충만했습니다......진심으로 저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있던 그 초라한 집에서 나온 이상 외롭고 쓸쓸할 것입니다.”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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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 - 2010 제34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청춘 3부작
김혜나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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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이름을 처음으로 알게 된 계기는 정유정의 히말라야 여행기를 통해서이다. 선배 작가의 글 속에서 철저하게 보조적 역할 만을 묵묵히 수행하는 착한 후배 작가의 인상이 지배적이다. 여행을 좋아하고 요가를 수련하는. 문득 이 작가가 쓴 글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 스스로의 목소리로 자신의 문체로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들 말이다. 2010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이라는 화려한 타이틀이 붙어있다. ‘파괴적이고도 충격적이며 반도덕적인 소설이라는 뒤표지의 카피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도대체 어떻게 썼길래?

 

파격적인 작품이다. 예상보다도 더욱. 내용 자체는 간단하다. 앞날 어둡고 외롭고 소외된 불쌍한 청춘. 그들의 방황과 일탈, 좌충우돌. 차라리 진부하다. 이를 상쇄하는 게 제재와 문체와 묘사다. 먼저 포르노 못지않은 적나라한 성교 묘사. 근래 발표된 문학작품들에서 예전과 비교하면 충격적일 정도로 노골적인 성풍속과 성묘사가 빈번해지는 현상을 볼 수 있다. 김연수, 김이설 언뜻 떠오르는 면면이다. 그들도 이 대담한 작가에 비하면 약과다. 확실히 야설과 야동이 초등학생들한테도 일상적인 용어로 정착한 현 세태를 반영하는 듯하다.

 

작중 화자는 이십대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남성과의 교합 경험이 제법이다. 오로지 과격한 섹스만을 위해 만나는 남자친구, 나이트클럽에서 술에 취해 기억도 나지 않는 남성, 노래방 호스트로 일하는 제리 등. 여성전용 노래방에서 도우미를 불러 선택하고 노는 풍습은 남녀의 성만 바뀌었을 뿐 남자들의 놀이문화와 판박이다. 제리의 입을 통해 호스트들의 나날도 알게 되었다. 피어싱에 대한 상세한 소개도 인상적이었다.

 

자칫하면 통속 소설 내지 수준 높은 야설에 그칠 작품을 수렁에서 구해낸 것은 무엇보다도 문체에 있다. 성적 감흥을 촉발하고 고조하고자 일부러 자극적인 묘사와 표현을 남발하는 야설과 달리 작가는 무미건조한 문장을 구사한다. 매우 외설적이지만 일상적인 사소한 행위인 양 감정을 배제한 건조한 묘사는 독자로 하여금 작중 장면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보게 만든다. 나와는 현실과는 무관한 이야기 속, 영화 속 한 장면인 듯.

 

작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회의 비주류이자 마이너리거들이다. 사회적 지위는 별 볼일 없는 지방 야간대학생들. 졸업 이후에 대한 환상과 희망이 없다. 공간적 배경은 서울에서 벗어난 수도권 변두리의 대학가와 노래방 등이다. 화자의 집은 서울이지만 서울은 그의 무대가 아니다. 주로 들르는 상점도 지하상가. 시간적 배경을 살펴보자. 이들은 모두 밤의 인물들이다. 술 마시고 노래방에 가고 섹스를 하는 때는 항상 밤이다. 낮은 밤의 활동을 예비하는 휴식과 보조적 시간에 불과하다.

 

내가 어디에 있건, 무엇을 하건, 나는 늘 뭐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문제아였고 인간쓰레기였다.” (P.106)

 

나야말로 아무런 기술도 능력도 가지지 못하고, 집에서건 학교에서건 사회에서건 평생 소외만 받으며 살아갈, 그야말로 글러 먹은 인생이었던 것이다.” (P.107)

 

화자의 개인과 가정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구체적인 설명은 없다. 확실한 점은 가정사가 평탄치 않다는 점이다. 화자와 엄마 간에는 일절 대화가 없고, 서로 마주치는 것도 극히 꺼린다. 사생활에 관여하지 않는 단순한 동거인에 불과하다.

 

그게 다였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고......나 자신이나 가족, 친구, 앞으로의 일......삶의 모든 불안정한 일들 따위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P.155)

 

누군가는 말한다. 아프니깐 청춘이라고. 아니다. 청춘이라고 아픈 게 아니다. 누구든지 아픈 법이다. 청춘은 아직 고통에 대응하는 수단과 참을성이 부족하다. 같은 고통도 청춘에게는 유달리 심한 열병으로 다가온다. 그게 청춘이다. 화자를 포함한 작중 인물들은 모두 소외된 존재들이다. 모든 현대인들도 마찬가지다. 소외를 달래기 위해 그들은 술을 마시고 정신없이 몸을 흔들며 섹스를 하고 웃음을 판다.

 

그때 불현듯, 그의 손을 잡고 싶었다. 절대......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누구라도 좋으니 함께 있고 싶었다.” (P.54)

 

나는 그냥, 지금의 나만 좀 아니었으면, 누군가 내 옆에 좀 있었으면......하는 바람뿐이었다. 항상 사람들을 만나고 술을 마시고 잠을 자지만, 어느 누구와도 진정으로 함께였던 적이 없었다. 여럿이 술을 마시는 이 순간조차도 나는 혼자라는 소외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P.80)

 

화자가 제리에게 매달리는 연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리라. 웃음을 파는 가식에 불과하지만 똑바로 눈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존재. 지불할 돈만 있다면 일체의 관계 형성이 어려움 없이 손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존재. 서늘하고 건조한 가슴에 따스한 한줄기를 기대하고 싶은 존재. 그것이 화자만의 일방적 기대이자 부질없는 소망이지만.

 

나는, 네가 내 곁에 있을 때, 그것이 비록 찰나에 불과했을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제발 진심이었기를 바랐을 뿐이야.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나에게만큼은 제발, 진심으로 함께 있어 주었기를 바랐을 뿐이야.” (P.181)

 

부부 간에도, 가족 간에도, 사제 간에도 소통은 점차로 단절되고 있다. 우리는 점점 개체적 존재로 변모하고 있다. 세상은 현실은 단편화, 파편화되고 있음을 알고 여기에 익숙해지고 편안해하는 게 우리네들이다. 딱한 존재들이다, 우리 모두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섹스를 나누어도 내 본질을 결코 변하지 않았다. 나는 늘 혼자였고, 그런 내 곁에 어느 누구도 진정으로 머물러 주지 않았다.” (P.213)

 

문득 체온이 그리워진다. 따뜻한 마음 한구석을 몸서리치게 열망한다. 서로에게 손을 뻗치지 않으면서도 누가 자신의 손을 잡아주기를 고대한다. 영원한 불통과 단절. 아니면 대화와 소통. 작가는 마지막 장에서 선택을 암시하고 있다. 다음 작품에서 전개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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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 / 유령 / 민중의 적 / 들오리 동서문화사 월드북 203
헨릭 입센 지음, 소두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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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센의 대표작 5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과 다른 세 편이 실린 신원문화사판 <페르귄트> 이렇게 두 권만 있으면 입센의 중요작품은 거의 섭렵할 수 있다. 각설하고 5편 중에서 <인형의 집><유령>은 따로 단상을 정리하였으므로 두 작품을 제외한 나머지만 대상으로 삼는다.

 

1.민중의 적

 

곽복록 판과 함께 유이한 번역본이다. 앞선 두 작품들이 가정 내 결혼관계의 진실성을 주된 제재로 하였다면, 여기서 입센은 시각을 가정 밖으로 돌려 개인과 사회 간 관계를 집중적으로 추구한다. 가정을 억압하고 왜곡시키는 압력이 제도와 관습에서 비롯될 때, 사회에서도 올바르지 못한 현상이 촉발되리라는 예측은 당연하다.

 

사회대중과 민중을 위해 불의와 부조리를 고발하고 개선하기 위해 일어선 스토크만 박사. 기대와는 달리 그는 민중의 적이요, 사회의 반역자로 비난받고 철저히 고립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군은 그의 가족과 친구인 선장을 제외하면 부정적 전형들이다. 시장, 언론인, 기업인은 물론 대다수 주민들마저도.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인 사회라는 통상적 인식과 달리 개인이 도덕적이고 정의롭지 못할 때 소위 정의사회 구현은 공허한 구호에 그친다. 사익과 정의가 상충할 때 개인의 태도에서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 확연히 드러난다.

 

내부고발자 스토크만 박사는 자신의 정의와 용기가 주민들에게 열광적인 환영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행복해한다. 바보스러울 정도로 천진한 그에게 오히려 연민의 정마저 품게 되며, 언론과 권력을 빼앗긴 지식인의 자화상이 그대로 노정된다. 왜곡과 탄압으로 대중에게서 지탄받을 때 순수한 개인은 무력하고 나약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회유에 굴복하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더구나 자신의 순수성마저 불순으로 의심받게 만든 장인의 주식 매집. 그의 장인 모텐 히일은 기회주의적 자본주의자의 전형이라고 하겠다. 한편 표리부동한 선동적 진보 언론에 대한 날선 비판과 매도에서는 언론의 본질에 대한 의문 제기와 입센의 분노마저 느낄 수 있다. 정당을 고기 가는 기계에 비유한 대목은 씁쓸하지만 정곡을 찌르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스토크만: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다들 잘 들어둬. 우린 진리를 위해서 싸우는 거다. 그래서 외로운 거야. 하지만 외로움은 우리를 강하게 키워줄 거야. 우린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들이다......” (P.236)

 

결말은 비장하다. 성난 군중의 아우성과 물리적 위협의 점증. 정의롭지 못한 사회 속에서 정의로운 개인의 용기는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민중의 적을 제거할 것을 외치는 어리석은 민중. 민중의 적은 민중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선뜻 떠오른다.

 

스토크만: 인간의 겉모습을 지녔다고 해서 저절로 민중이 되지는 않더란 말입니다. 민중의 명예는 반드시 성취해서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 인간이라는 이름도 역시 쟁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P.216)  

 

2. 들오리

 

개인, 가정은 물론 사회 차원에서도 진실은 항상 중요하다. 진실의 토대에 근거하지 않는 한 모든 관계는 허상이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인간 권리의 지칠 줄 모르는 투쟁자인 입센은 불현 듯 발걸음을 돌린다. 밖을 향한 시선과 발언을 자신에게로 향한다. 진실의 정당성은 부인할 수 없지만, 진실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좋은 것인가? 부조리한 사회, 왜곡된 현실을 개선하거나 전복할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공언에 불과할 수도 있다. 더욱이 그 진실이란 게 당사자들에게는 상기하기도 싫을 정도로 무참하고 뼈아픈 내용이라면 굳이 진실을 파헤치는 게 올바른 것일까?

 

이 작품은 입센의 자기질문과 자기반성을 담고 있다. 몰락했지만 소시민으로서 안락한 가정의 행복과 평화를 누리고 있는 얄마르에게 친구 그레거스가 찾아오면서 은폐되었던 진실이 탄로 나고 갈등이 꿈틀거린다. 잔인한 진실은 안온한 삶을 위협하고 두 가지 삶의 방식이 대립된다. 냉엄한 진실을 받아들인다면 거짓을 뿌리치고 허위로 가득 찬 가정은 깨뜨려질 수밖에 없다. 반면 진실을 모른 체 살아가는 삶은 실상은 거짓된 것이었지만 행복하고 평화로운 것이었다.

 

그레거스: 얄마르는 마음을 푹 놓고, 기만의 한복판에 순진하게 정착해 있어요......‘가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실은 거짓과 위선 위에 세워진 줄은 꿈에도 모른 채.” (P.259)

 

얄마르: 지나, 고생스럽고 가난해도 좋지 않아? 이래도 우린 가족이니까. 난 이렇게 말하겠어. “이 집이라서 행복하다.”” (P.271)

 

그레거스는 순진한 이상주의자다. 진실만 있으면 세상이 바로잡히고 행복으로 뒤덮일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이상과 정의의 병의 대표자다. 그가 가정의 비밀을 얄마르에게 폭로하는 것도 진실의 토대에서 새로운 부부관계의 출발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의사 렐링은 대조적 관점을 갖는다. ‘인생의 거짓이 오히려 얄마르에 유익하다고 믿는다.

 

렐링: 인생의 거짓. 인생의 거짓이란 놈은 사람에게 기운을 주는 힘을 지니고 있거든......평범한 사람에게서 인생의 거짓을 빼앗는 건 그 사람에게서 행복을 빼앗는 것과 같은 거요.” (P.334~335)

 

얄마르는 분개하고 이성적으로는 그레거스에 동조하나, 그에게는 행동에 옮길 용기와 능력이 결여되었다. 가출을 선언하다가 주저하고 슬그머니 포기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희비극이다. 그레거스의 예상과는 달리 얄마르의 가정은 균열되고 풍비박산을 목전에 두게 되기까지 이른다. 딸 헤드비의 애꿎은 죽음은 방점을 찍게 되고.

 

들오리는 얄마르의 표상이다. 자꾸만 물속으로 숨어 파고들려고 하는. 들오리는 얄마르 집안의 거짓된 관계의 총체적 지칭이다. 헤드비가 들오리를 죽이려다 자신만 죽게 된 사실은 시사적이다. 얄마르의 가정은 파괴되는 반면, 베를레와 셀비 부인이 완전한 신뢰를 바탕으로 결혼 생활에 들어서게 된다는 전개도 역설적이다. 입센은 인간에 대해 회의적이고 비관적 견해를 품게 된 듯하다.  

 

3. 바다에서 온 여인

 

가정극이라는 면에서 <인형의 집>, <유령>과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전작들이 작품 활동의 중기에 해당하여 대체로 표현이 직설적인 반면 이 작품은 후기에 쓰여져 보다 상징적 요소가 풍부하다. 결론에 있어서도 전작들이 비극적 파국으로 치닫는 것과 달리 긍정적인 매조지를 보여주고 있어 입센의 시각과 작품 세계가 변모하였음을 알게 해준다.

 

남녀 간 결혼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작품의 주 테마다. 결혼관도 <인형의 집> 시기보다는 진전된 모습을 보인다. 결혼을 남녀 간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전적인 신뢰로 인식한다. 의사 봔겔과 아내 엘리다의 결혼은 겉보기와는 달리 올바르고 행복한 관계는 아니다. 아내는 전처의 아이들에 대해 무심하고 방관한다. 남편과 아이들은 죽은 전처의 생일을 위장하여 기념하고 있다.

 

엘리다: 어쨌든 우리는 진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어요. 그 진실이란 솔직히 말해서 당신이 그곳에 와서 나를 샀다는 거예요......그렇지만 문제는 내가 나 자신의 자유의지로 당신과 함께 살게 된 게 아니었다는 거예요.” (P.421)

 

엘리다는 바다에서 온 여인이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바다에 친화감을 느낀다. 바다에서 날마다 수영을 즐기며, 일상을 지탱하는 낙이다. 미국인 선원에 대한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그녀는 초조해 한다. 엘리다는 선원에 대해 두려움과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을 갖고 있다. 그 사람보다 현재의 남편이 더 훌륭함을 알면서도 내심 결혼이 떳떳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품고 있다. 즉 선원에 대해서는 충동에 이끌린 언약을 하였으며, 봔겔에 대해서는 경제적 관점이 우선했다는 스스로의 자책감이다. 이것은 참다운 결혼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

 

엘리다: 아무도 나의 선택을 막을 수 없어요. 당신도, 그 누구도 말이에요.” (P.429)

 

노라와 마찬가지로 엘리다도 가출을 결심한다. 남편에게는 아내를 강제할 법적 권리가 있다. 헬메르처럼 봔겔도 아내의 선택을 인정하지 않지만, 그는 깨인 인물이다. 아내의 자유의지를 인정하고 의사를 존중하는 게 올바름을 깨닫는다. 엘리다의 부인의 뒤바뀐 선택은 남편과의 관계에서 진정하고 진실한 사랑의 가능성을 발견해서다. 이제 그들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부인은 시골로 떠나지 않고 처음으로 아이들에 대한 관심을 표명한다. 해피엔딩?

 

입센은 섣부르게 긍정적이지 않다. 봔겔의 큰딸 볼레타로 하여금 엘리다의 전철을 따르게 한다. 볼레타가 중년의 안홀름으로부터의 청혼을 승낙한 사유는 역시 가정 탈출 욕구와 경제적 요인의 결합이다. 다시 말하자면 스스로의 자유의지의 명령에 따른 선택은 아니다. 그녀가 새엄마의 전철을 그대로 반복할지 여부는 미지수다. 다만 이를 통해서 엘리다와 볼레타의 선택이 단순히 일개인 차원이 아닌 사회 집단적 사안임을 입증하고 있다.

 

엘리다: (격렬하게) 나를 미지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이 유혹! 여기엔 바다와 같은 힘이 있어요!” (P.442)

 

이 작품에서 바다는 신비롭고 상징적인 존재다. 엘리다와 선원은 바다에 대한 친화감이라는 공통점을 지녔으며, 바다에 대한 거스를 수 없는 충동을 갖는다. 그녀에게 선원은 바다와, 봔겔에게 엘리다는 바다와 같게 느껴진다. 무섭고 두렵지만 매혹적인 존재로서.

 

엘리다가 바다에, 선원에 그토록 집착했던 것은 자유와 독립에 대한 열망의 반영이다.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갇힌 세계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지와 선택으로 꿈꾸고 개척하는 미래의 삶 말이다. 봔겔과 엘리다를 놓아주고, 엘리다가 다시 봔겔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둘 사이의 관계는 진실과 자유의지의 토대에서 더욱 굳건해진다. 해피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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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로봇 스누트의 모험
브라이언 게이지 지음, 캐서린 오토시 그림, 한강 옮김 / 더북컴퍼니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 로봇 도시를 배경으로 로봇을 소재로 한 동화다. 로봇간의 대결이란 면에서 <트랜스포머>를 연상시키지만, 스스로 사고하는 로봇의 저항이라는 점에서 <아이 로봇>과도 유사성을 지닌다. 다만 내용 전개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를 감안하면 동화라고 해도 고학년에 어울린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는 독재자 빅 브라더가 사람들의 의식과 감정을 통제한다. 그는 텔레스크린이라는 장치로 사람들을 감시한다. 이 책의 기본 토대는 로봇판 <1984>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돔 시의 로봇들은 광채 로봇, 경비 로봇, 일벌레 로봇의 계급으로 구분되며 도시를 이끄는 리더는 파더 스크린이다. 파더 스크린은 자체로 선전 도구이자 감시 기구이다. 모든 일벌레 로봇은 빛을 생산하는 작업에 매진해야 하며, 그들은 전설적 영웅 를 찬양하고 닮고자 애쓴다. 일하고 소비하고 잠자는 일상의 반복이지만 일벌레 로봇들은 행복하다.

 

어느 사회, 조직에서나 비주류, 불평불만자는 존재한다. 그들은 사회와 조직의 안녕을 깨뜨리는 저해 요인이다. 조직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신속히 제거되어야 마땅하다. 반면 그들은 외관상 평화로운 조직이나 사회에 실상은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고 경보를 알리는 역할을 수행하는 셈이다. 이 작품에서는 꼬마 로봇 스누트가 그러하다. 스누트는 호기심 가득하고 궁금증을 품고 있으며 항상 공상에 젖어 있다. 생산 능률 지상주의 사회에서는 가장 형편없는 로봇이다. 스누트는 가장 뛰어난 로봇이기도 하다. 대장장이 로봇 실로는 스누트를 뛰어난 지능을 지닌 로봇으로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만들었다.

 

돔 시의 로봇 사회는 철저한 독재 사회다. 파더 스크린, 즉 실로의 동생 시로가 지배하는 광채 로봇이 지배계급을 이룬 가운데 체제 위협적인 요소는 일체 통제되며 끊임없는 세뇌 공작으로 일벌레 로봇들은 자신들이 실상은 빛의 로봇이라는 사실마저 인식하지 못한 채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인간 사회에 적용시켜보면 과두 지배체제, 언론 왜곡, 교육 통제, 감시의 경찰국가, 우민화 정책, 조작된 영웅 등 독재 정권이 즐겨 사용하는 모든 기법들이 그대로 확인된다. 여기에 저항하는 개인은 국가와 민족의 반역자이자 매국노로 지탄된다. 사회에서 조직으로 범위를 축소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중이 싫으면 절을 떠나야 된다. 조직에 충성하던가 아니면 입을 다물라. 내부고발자(whistle blower)는 이론적으로 그럴듯하지만 실상은 곤란하다. 사적 이해관계에 얽매여 동기의 순수성을 의심받거나 조직과 조직 내 이웃들의 안녕을 뒤흔드는 불편한 존재로 치부되며 설사 정당하더라도 그는 조직에 머무르지 못한다. 조직과 평범한 성원들은 내부고발자를 미워하는 법이다.

 

너는 일벌레 로봇이 아니야, 친구. 너는 혁명가야!......그래, 나는 혁명가야.” (P.71)

 

스누트는 자의든 타의든 혁명가다. 그는 의문과 의심을 품고 현실에 안주하지 못한다. 정상적으로 보이지만 미묘하게 흠이 존재하는 돔 시의 체제, 그 작은 틈으로 인해 돔 시의 로봇 사회와 지배 체제는 붕괴되었다. 빛이 사라지자 스누트를 포함한 일벌레 로봇들은 물론, 광채 로봇과 경비 로봇들은 모두 멈춰버렸다.

 

동화는 속성 상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과장과 비약, 상상의 요소가 풍부하다. 이 작품의 경우 결말은 예측 가능하면서도 당혹스러움을 안겨주는데, 태양이 떠오르면서 빛의 로봇들이 모두 회생한다는 점이다. 나비로 탈바꿈한 페르난도는 자연의 위대함을 상징적으로 예증한다. 돔 시의 로봇들은 진실을 몰랐다 하더라도 실로가 이를 숨기고 있었던 점, 그리고 끝내 오브와 파편에만 주의를 환기시킨 점은 쉽사리 정리가 되지 않는다.

 

작가는 이 장편 동화 한 편에 너무나 많은 메시지를 담고자 했던 게 아니었을까. 작가 자신의 이념, 자유와 정의의 본질, 개체와 조직, 사회의 관계, 인공과 자연, SF적 요소와 극적 재미 등. 조금만 욕심을 덜 부리고 스토리라인을 압축하였다면 어떨까 생각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 책을 보게 된 것은 옮긴이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작가가 번역을 하는 경우는 간혹 있으므로 특이할 게 없지만 동화도 쓰는데다가 외국 동화도 번역을 하니 무슨 작품을 어떻게 번역하였을지 궁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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