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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 / 유령 / 민중의 적 / 들오리 ㅣ 동서문화사 월드북 203
헨릭 입센 지음, 소두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3년 1월
평점 :
입센의 대표작 5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과 다른 세 편이 실린 신원문화사판 <페르귄트> 이렇게 두 권만 있으면 입센의 중요작품은 거의 섭렵할 수 있다. 각설하고 5편 중에서 <인형의 집>과 <유령>은 따로 단상을 정리하였으므로 두 작품을 제외한 나머지만 대상으로 삼는다.
1.민중의 적
곽복록 판과 함께 유이한 번역본이다. 앞선 두 작품들이 가정 내 결혼관계의 진실성을 주된 제재로 하였다면, 여기서 입센은 시각을 가정 밖으로 돌려 개인과 사회 간 관계를 집중적으로 추구한다. 가정을 억압하고 왜곡시키는 압력이 제도와 관습에서 비롯될 때, 사회에서도 올바르지 못한 현상이 촉발되리라는 예측은 당연하다.
사회대중과 민중을 위해 불의와 부조리를 고발하고 개선하기 위해 일어선 스토크만 박사. 기대와는 달리 그는 ‘민중의 적이요, 사회의 반역자’로 비난받고 철저히 고립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군은 그의 가족과 친구인 선장을 제외하면 부정적 전형들이다. 시장, 언론인, 기업인은 물론 대다수 주민들마저도.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인 사회라는 통상적 인식과 달리 개인이 도덕적이고 정의롭지 못할 때 소위 정의사회 구현은 공허한 구호에 그친다. 사익과 정의가 상충할 때 개인의 태도에서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 확연히 드러난다.
내부고발자 스토크만 박사는 자신의 정의와 용기가 주민들에게 열광적인 환영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행복해한다. 바보스러울 정도로 천진한 그에게 오히려 연민의 정마저 품게 되며, 언론과 권력을 빼앗긴 지식인의 자화상이 그대로 노정된다. 왜곡과 탄압으로 대중에게서 지탄받을 때 순수한 개인은 무력하고 나약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회유에 굴복하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더구나 자신의 순수성마저 불순으로 의심받게 만든 장인의 주식 매집. 그의 장인 모텐 히일은 기회주의적 자본주의자의 전형이라고 하겠다. 한편 표리부동한 선동적 진보 언론에 대한 날선 비판과 매도에서는 언론의 본질에 대한 의문 제기와 입센의 분노마저 느낄 수 있다. 정당을 고기 가는 기계에 비유한 대목은 씁쓸하지만 정곡을 찌르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스토크만: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다들 잘 들어둬. 우린 진리를 위해서 싸우는 거다. 그래서 외로운 거야. 하지만 외로움은 우리를 강하게 키워줄 거야. 우린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들이다......” (P.236)
결말은 비장하다. 성난 군중의 아우성과 물리적 위협의 점증. 정의롭지 못한 사회 속에서 정의로운 개인의 용기는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민중의 적’을 제거할 것을 외치는 어리석은 민중. 민중의 적은 민중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선뜻 떠오른다.
“스토크만: 인간의 겉모습을 지녔다고 해서 저절로 민중이 되지는 않더란 말입니다. 민중의 명예는 반드시 성취해서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 인간이라는 이름도 역시 쟁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P.216)
2. 들오리
개인, 가정은 물론 사회 차원에서도 진실은 항상 중요하다. 진실의 토대에 근거하지 않는 한 모든 관계는 허상이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인간 권리의 지칠 줄 모르는 투쟁자인 입센은 불현 듯 발걸음을 돌린다. 밖을 향한 시선과 발언을 자신에게로 향한다. 진실의 정당성은 부인할 수 없지만, 진실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좋은 것인가? 부조리한 사회, 왜곡된 현실을 개선하거나 전복할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공언에 불과할 수도 있다. 더욱이 그 진실이란 게 당사자들에게는 상기하기도 싫을 정도로 무참하고 뼈아픈 내용이라면 굳이 진실을 파헤치는 게 올바른 것일까?
이 작품은 입센의 자기질문과 자기반성을 담고 있다. 몰락했지만 소시민으로서 안락한 가정의 행복과 평화를 누리고 있는 얄마르에게 친구 그레거스가 찾아오면서 은폐되었던 진실이 탄로 나고 갈등이 꿈틀거린다. 잔인한 진실은 안온한 삶을 위협하고 두 가지 삶의 방식이 대립된다. 냉엄한 진실을 받아들인다면 거짓을 뿌리치고 허위로 가득 찬 가정은 깨뜨려질 수밖에 없다. 반면 진실을 모른 체 살아가는 삶은 실상은 거짓된 것이었지만 행복하고 평화로운 것이었다.
“그레거스: 얄마르는 마음을 푹 놓고, 기만의 한복판에 순진하게 정착해 있어요......‘가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실은 거짓과 위선 위에 세워진 줄은 꿈에도 모른 채.” (P.259)
“얄마르: 지나, 고생스럽고 가난해도 좋지 않아? 이래도 우린 가족이니까. 난 이렇게 말하겠어. “이 집이라서 행복하다.”” (P.271)
그레거스는 순진한 이상주의자다. 진실만 있으면 세상이 바로잡히고 행복으로 뒤덮일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이상과 정의의 병’의 대표자다. 그가 가정의 비밀을 얄마르에게 폭로하는 것도 진실의 토대에서 새로운 부부관계의 출발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의사 렐링은 대조적 관점을 갖는다. ‘인생의 거짓’이 오히려 얄마르에 유익하다고 믿는다.
“렐링: 인생의 거짓. 인생의 거짓이란 놈은 사람에게 기운을 주는 힘을 지니고 있거든......평범한 사람에게서 인생의 거짓을 빼앗는 건 그 사람에게서 행복을 빼앗는 것과 같은 거요.” (P.334~335)
얄마르는 분개하고 이성적으로는 그레거스에 동조하나, 그에게는 행동에 옮길 용기와 능력이 결여되었다. 가출을 선언하다가 주저하고 슬그머니 포기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희비극이다. 그레거스의 예상과는 달리 얄마르의 가정은 균열되고 풍비박산을 목전에 두게 되기까지 이른다. 딸 헤드비의 애꿎은 죽음은 방점을 찍게 되고.
들오리는 얄마르의 표상이다. 자꾸만 물속으로 숨어 파고들려고 하는. 들오리는 얄마르 집안의 거짓된 관계의 총체적 지칭이다. 헤드비가 들오리를 죽이려다 자신만 죽게 된 사실은 시사적이다. 얄마르의 가정은 파괴되는 반면, 베를레와 셀비 부인이 완전한 신뢰를 바탕으로 결혼 생활에 들어서게 된다는 전개도 역설적이다. 입센은 인간에 대해 회의적이고 비관적 견해를 품게 된 듯하다.
3. 바다에서 온 여인
가정극이라는 면에서 <인형의 집>, <유령>과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전작들이 작품 활동의 중기에 해당하여 대체로 표현이 직설적인 반면 이 작품은 후기에 쓰여져 보다 상징적 요소가 풍부하다. 결론에 있어서도 전작들이 비극적 파국으로 치닫는 것과 달리 긍정적인 매조지를 보여주고 있어 입센의 시각과 작품 세계가 변모하였음을 알게 해준다.
남녀 간 결혼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작품의 주 테마다. 결혼관도 <인형의 집> 시기보다는 진전된 모습을 보인다. 결혼을 남녀 간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전적인 신뢰로 인식한다. 의사 봔겔과 아내 엘리다의 결혼은 겉보기와는 달리 올바르고 행복한 관계는 아니다. 아내는 전처의 아이들에 대해 무심하고 방관한다. 남편과 아이들은 죽은 전처의 생일을 위장하여 기념하고 있다.
“엘리다: 어쨌든 우리는 진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어요. 그 진실이란 솔직히 말해서 당신이 그곳에 와서 나를 샀다는 거예요......그렇지만 문제는 내가 나 자신의 자유의지로 당신과 함께 살게 된 게 아니었다는 거예요.” (P.421)
엘리다는 ‘바다에서 온 여인’이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바다에 친화감을 느낀다. 바다에서 날마다 수영을 즐기며, 일상을 지탱하는 낙이다. 미국인 선원에 대한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그녀는 초조해 한다. 엘리다는 선원에 대해 두려움과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을 갖고 있다. 그 사람보다 현재의 남편이 더 훌륭함을 알면서도 내심 결혼이 떳떳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품고 있다. 즉 선원에 대해서는 충동에 이끌린 언약을 하였으며, 봔겔에 대해서는 경제적 관점이 우선했다는 스스로의 자책감이다. 이것은 참다운 결혼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
“엘리다: 아무도 나의 선택을 막을 수 없어요. 당신도, 그 누구도 말이에요.” (P.429)
노라와 마찬가지로 엘리다도 가출을 결심한다. 남편에게는 아내를 강제할 법적 권리가 있다. 헬메르처럼 봔겔도 아내의 선택을 인정하지 않지만, 그는 깨인 인물이다. 아내의 자유의지를 인정하고 의사를 존중하는 게 올바름을 깨닫는다. 엘리다의 부인의 뒤바뀐 선택은 남편과의 관계에서 진정하고 진실한 사랑의 가능성을 발견해서다. 이제 그들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부인은 시골로 떠나지 않고 처음으로 아이들에 대한 관심을 표명한다. 해피엔딩?
입센은 섣부르게 긍정적이지 않다. 봔겔의 큰딸 볼레타로 하여금 엘리다의 전철을 따르게 한다. 볼레타가 중년의 안홀름으로부터의 청혼을 승낙한 사유는 역시 가정 탈출 욕구와 경제적 요인의 결합이다. 다시 말하자면 스스로의 자유의지의 명령에 따른 선택은 아니다. 그녀가 새엄마의 전철을 그대로 반복할지 여부는 미지수다. 다만 이를 통해서 엘리다와 볼레타의 선택이 단순히 일개인 차원이 아닌 사회 집단적 사안임을 입증하고 있다.
“엘리다: (격렬하게) 나를 미지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이 유혹! 여기엔 바다와 같은 힘이 있어요!” (P.442)
이 작품에서 바다는 신비롭고 상징적인 존재다. 엘리다와 선원은 바다에 대한 친화감이라는 공통점을 지녔으며, 바다에 대한 거스를 수 없는 충동을 갖는다. 그녀에게 선원은 바다와, 봔겔에게 엘리다는 바다와 같게 느껴진다. 무섭고 두렵지만 매혹적인 존재로서.
엘리다가 바다에, 선원에 그토록 집착했던 것은 자유와 독립에 대한 열망의 반영이다.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갇힌 세계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지와 선택으로 꿈꾸고 개척하는 미래의 삶 말이다. 봔겔과 엘리다를 놓아주고, 엘리다가 다시 봔겔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둘 사이의 관계는 진실과 자유의지의 토대에서 더욱 굳건해진다. 해피엔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