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꽃 이야기 - 時設: 시적인 이야기
한강 지음, 우승우 그림 / 열림원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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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어머니가 부처를 믿으시기에 초파일에 몇 번 절집에 가본 적이 있다. 경내를 온통 둘러싼 연등 무리와 본전 내 천장에도 그득하게 널려 있는 무수한 연등. 한켠에서는 아기 부처를 목욕시킨다고 열심히 물을 끼얹는 사람들의 줄이 늘어서 있다. 나는 알지 못한다, 연등이 점화되었을 때의 휘황한 정경이 어떠한 감상과 소회를 가져오는지. 절집 방문은 낮 동안에 잠시 한정될 뿐이므로.

 

작가 한강이 불교 소재의 글을 쓰다니 약간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나 다시 생각해보니 문학상을 수상한 중편도 불교 소설이다. 이 작품은 불교적 소재를 다루었으되 본격 구도 소설은 아니다. 차라리 일종의 성장소설로 이해하고 싶다. 백여 쪽 남짓한 얄팍한 분량의 작품이지만 이 소설이 담고 있는 생의 빛과 그늘의 폭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어른이 되어 회상하는 빛나는 유년시절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진실로 생의 굴곡과 애락을 겪지 않고 기쁨의 집에 사는 특혜를 누린 이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고달픈 가계, 형제자매 간의 갈등과 다툼. 무엇보다도 가까운 존재와의 영원한 작별이 주는 심리적 외상.

 

이승에서의 삶이 천국과도 같은 기쁨과 즐거움만으로 가득 차 있다면 종교가 발붙일 여지는 없으리라. 종교는 인간이 스스로 견디거나 제어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서 발현한다. 인간은 누구든지 종교적 성향을 일정부분 지니게 된다. 자신을 무신론자 내지 무교주의자라고 지칭하는 이들조차도 마음속에 믿음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종교적 인간이 곧 종교인이 되지는 않는다. 세속과 풍진의 삶을 버리고 탈속과 피안을 추구하는 일은 심대한 결단이 필요하다. 속계의 인연을 끊는 일은 그만큼 지난하기에 우리는 승려와 사제를 존중하고 예우하는 게 아니겠는가.

 

시설(詩說)은 시적인 이야기다. 책표지에 따르면 시처럼 깊고 산뜻한 그림소설이란다. 일반적 소설의 절박한 다그침이 안보여 읽는데 편안하다. 선이의 생은 조용히 흘러간다. 흐르는 물결 속에 윤이의 죽음, 앞집 할머니와 어머니의 노쇠, 작은오빠의 투병, 그리고 자신의 입산이 스며든다. 큰오빠의 결혼과 임박한 출산도. 절집에서는 노스님의 입적과 다비식, 상행자의 환속과 자신의 수계가 이어진다. 선이를 불가로 이끈 것은 어릴 적 동생과의 일화였다. 흰 꽃과 붉은 꽃이 어우러진 연등. 동생 윤이가 가장 예쁘다고 가리킨 흰 꽃 영가등. 사미니가 인도하는 커다란 붉은 꽃에 홀린 선이. 이때 이미 생과 사의 인연 나뉨이 시작된 것이다. 그가 작은오빠의 물감으로 그린 붉은 꽃, 화선지에 붉은 물감으로 그린 꽃, 학교를 떠날 때 뜨거운 아랫배에서 붉게 젖은 속옷, 그리고 산문 입구의 자목련 나무.

 

인생이란 마주침과 헤어짐의 인연이 겹겹이 쌓여 이루어진다. 다가오는 인연을 꺼리거나 피하지 않고 담담히 감내할 때, 빚어지는 상처와 치유로 우리는 성숙해진다. 그리고는 불현 듯 알게 된다. 지등 속의 불꽃이야말로 붉은 꽃의 실체이며, “어두우나 밝으나 오롯이 거기 있었던, 늘 거기 있었던 마음 한 자리”(P.100)이라는 사실을.

 

불빛은 제가 불빛인 줄을 알았을까. 붉은 꽃 속에서 제가 밝혀져 있었던 것을 알았을까.”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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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상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어른을 위한 동화 18
한강 지음, 봄로야 그림 / 문학동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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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평균 수명이 남성보다 긴 현상을 설명하는 사유 중에 여성이 남성에 비해 눈물을 자주 흘린다는 의견이 있다. 극심한 육체적, 정신적 충격을 눈물로 완화시켜 신체에 부담을 덜 준다는 것이다. 이 의견의 진위는 알 수 없으나 일견 그럴듯해 보인다. 학창시절에 배운 기억을 되살려보면 비극의 효과는 카타르시스에 있는데, 곧 슬픔의 표출을 통한 감정의 배출이다. 비극을 보면서 관객은 심적인 정화를 얻게 된다.

 

눈물을 흘리는 원인은 다양하다. 눈물은 감정의 모든 국면에 대응한다. 슬프거나 아플 때는 물론, 기쁘고 반가울 경우 화날 때도 사람은 눈물을 흘린다. 눈물 앞에서 무심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눈물의 양도 중요하다. 눈물이 메마른 사람은 남에게서 비난을 받기 마련이다. 비인간적이라고. 눈물이 헤픈 사람도 좋은 평판은 얻지 못한다. 울보라고. 눈물은 연약함에 결부되기 쉽다. 그럼에도 꼭 맞는 상황에서 적절하게 흘리는 눈물은 고래로 칭송을 받는다. 이슬, 진주 등 고귀한 존재로 형용된다. 동양에서는 옥루(玉淚)란 표현도 사용된다.

 

겉으로 드러나는 눈물만이 전부는 아니다. 속으로 흘리는 눈물이 더 뜨겁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거나 눈앞이 뿌옇게 되는 경험을 누구나 하게 되는데, 작가는 이를 그림자눈물이라고 일컫는다. 사람과 그림자가 함께 흘리는 눈물이 참다운 눈물이다. 그림자는 울지 않는데 사람이 흘리는 눈물은 거짓이며,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사람은 그림자눈물샘이 얼어붙어 있다. 작중의 할아버지는 눈물상자 아저씨와 눈물단지 아이의 덕택으로 잃어버린 눈물과 삶을 회복하였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눈물상자 아저씨는 여전히 울지 못하므로.

 

자기가 울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면서 흘리는...... 특별한 이유가 없지만, 또한 이 세상의 모든 이유들로 인해 흘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물이란다.” (P.17)

 

가장 순수한 눈물은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무색의 눈물이 아니라 희로애락과 존비와 청탁 등 모든 것이 혼융되어 정화된 투명한 눈물을 뜻한다. 눈물단지 아이의 눈물은 깨끗하지만 순수한 눈물은 아니다. 그는 자라고 인생을 겪어야 한다. 세상의 오탁에 물들 우려도 있으나 자신을 연마하고 단련할 수 있어야 한다. 눈물을 잘 흘리지 못할 우려도 있지만 헤픈 것은 모자란 것만 같지 못한 법. 눈물단지 아이가 울음을 참는 것도 이 점을 깨달았음이리라.

 

아이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눈물을 참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처음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오는구나. 숨겨진 눈물을 그 가슴 가운데에서 점점 진해지고, 단단해지는구나.” (P.66)

 

어른을 위한 동화 시리즈. 관심 있는 작가에 좋아하는 장르니 망설일 필요가 없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적당한 분량. 은근하면서도 차분한 정조가 무엇보다 가슴에 와 닿는다. 자신을 되돌아본다. 순수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려본 게 언제였던가, 흘린 적은 과연 있었는지. 남자는 일생에 세 번만 운다는 가정과 사회의 암묵적 억압이 여전히 수많은 남성을 옭아매고 있다. 눈물과 삶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 되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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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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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작부터 주요 장편을 세 권 읽었음에도 토로하자면 정유정은 내 취향에 썩 부합하는 작가는 아니다. 극단적인 설정과 처절한 전개는 스토리텔러로서의 작가의 역량을 십분 인정함에도 자연스러운 맛이 부족하다. 그래서일까. 최신작인 <28>을 굳이 펼쳐볼 마음이 들지 않는다. 출판사의 책소개를 보면 작가의 성향이 한층 심화된 듯싶다. 이 책을 서가에서 무심히 꺼내든 것은 항상 흥미를 잃지 않는 여행기라는 점과 더구나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레킹이 기여한 바가 크다.

 

작가만의 미덕은 여기서도 여전하다. 술술 잘 읽히는 문장. 허세와 허식을 사양하는 솔직하며 털털한 문체. 예상치 못하게 불현 듯 끼어드는 해학 코드 등. 게다가 에세이라는 특성상 소설에서 볼 수 있는 인공적 부자연스러움도 찾아볼 수 없다. 여행기를 읽는 주된 목적이 독자가 겪어보지 못한 낯선 풍토와 풍물에 대한 대리체험이라고 할 때, 이 책은 그야말로 제격이다. 독자 자신이 트레킹을 하는 듯할 정도로 실감나는 상황 묘사와 심리 기술이 일자별로 매우 친절하고 세세하다. 도대체 이 작가는 트레킹을 하러 히말라야에 간 건지 아니면 여행기를 쓰기 위해 트레킹이라는 활동에 도전한 건지 때로는 의아스러울 정도다.

 

누구나 길을 떠나면 철학자가 되고 시인이 된다는 떠도는 말이 있다. 그만큼 여행(관광이 아닌)은 자신을 내면과 회상에 연결시키는 좋은 기회가 된다. 일상에서 탈피한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히 필요한 이유다. 작가 또한 마찬가지다. 평생 해외라고는 나가본 적 없는 작가가 불현 듯 무모하게도 히말라야에 덤벼든 것도 쉴 새 없이 몰아붙였던 삶의 에너지가 순간 고갈되었음을 깨달아서이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였다. 슬럼프와는 증세 자체가 달랐다. 암반에 갇힌 불길이 아니라 불씨까지 타버린 잿더미였다. 욕망이라는 엔진이 꺼져버린 것이었다.” (P.16)

 

작가가 안나푸르나에서 기대한 것은 대다수의 여행자들과 동일하다. 재충전. 또 다시 세상과 한판 치열한 싸움을 벌여볼 수 있도록 잃어버린 싸움꾼의 투지를 되살리는 것. 여정 도중 회상하는 그녀의 과거사는 자신이 투사가 될 수밖에 없음을 설명함과 동시에 작가가 아닌 인간 정유정의 진솔한 면모를 드러낸다. 이런 점에서 에세이를 통해 독자는 작가에게 인간미와 친근미를 갖게 된다. 더구나 여정 초반에 그녀가 내내 힘들어하는 음식과 용변 문제는 누구나 공감할 만한 흥미로운 소재가 아닌가.

 

이 책을 통해 안나푸르나 트레킹은 유람 코스가 아님을 비로소 알게 된다. 그것은 절대 극한의 한계상황에 다다르는 자신을 요구한다. 가벼운 고산병을 넘어 피로와 악천후에 따른 죽음마저도 감내할 정도로. 국외자는 이렇게 말하리라. 그 길을 굳이 왜 가려고 하는가?

 

답할 수가 없었다. 그저 두려웠다. 어둠 속에 고꾸라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까 봐.” (P.172)

 

이 힘든 길을 왜 가고 있는지 스스로 물으면, 머릿속 목소리는 입 닥치라고 대꾸했다. 어차피 가야 할 길이며 가지 않으면 끝낼 길이 없다고.” (P.174)

 

사람은 자신의 본성을 쉽사리 변화시킬 수 없다. 정유정은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싸움꾼이다.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다. 왜냐면 그게 정유정임을 구성하는 본질적 속성이므로. 작가는 항상 가드를 올리고 주먹을 내뻗을 자세를 갖춘 채 링 위에 서 있다.

 

안나푸르나에 오면서, 링이 아닌 놀이터에 나를 부려놓으리라. 결심했다. 죽기 살기로 몰아붙이는 습성을 버리고 가겠노라, 마음먹었다......본래 목적은 잊어버린 채 안나푸르나를 상대로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P.133)

 

그래서 그녀는 환상종주를 마치고 포카라와 카트만두에서 보내는 휴식과 회복의 시간을 못 견뎌하는 것이다. 무위와 방기는 정유정에 어울리지 않는 용어다.

 

휴식이 주는 건 편안함이 아니라 불안이었다. 해괴한 죄책감이었다. 이렇게 놀아도 되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진짜 괜찮은 건가?” (P.286)

 

내가 견딜 수 없는 건, 따분함이 아니라 목적 없는 시간이었다.” (P.287)

 

그래서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수첩의 두서없는 메모를 끄적거리기 시작한 게 이 여행기로 이어졌다고 하니 인간적으로는 딱하지만 독자 입장으로서는 다행이라고 하겠다. 그나저나 작가는 히말라야에서 해답을 얻었을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환상종주를 마친 후 다시 훌쩍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났다고 하니 말이다. 확실한 건 그녀도 여행의 묘미를 알아차렸다는 것, 그리고 자칫 역마살에 빠질지도 모르는 위험한 단계에 입문했다는 점이다.

 

안나푸르나의 대답은 결국 내 본성의 대답이었다. 죽을 때까지, 죽도록 덤벼들겠다는 다짐이었다. 결론적으로 떠나온 나와 돌아갈 나는 다르지 않았다.” (P.288)

 

작가답게 여러 작가와 작품들을 곳곳에 소개하거나 인용하고 있다. 특히 나의 신으로 일컫는 스티븐 킹과 소설가 조용호의 작품이 인상적이다. 끝대목에 언급된 <럼두들 등반기>도 한번 읽어보고 싶다. 무엇보다도 정유정의 환상방황을 가능케 하였던 후배 작가 김혜나의 글을. 정유정의 눈에 프리즘 되지 않은 온전히 스스로의 글을 통해서.

 

십여 년 전에 지인과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가보려던 꿈을 품은 적이 있다. 지금도 서가 한켠에는 네팔 가이드북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자리하고 있다. 여차저차한 사정으로 꿈으로만 그치고 말았지만. 일상에 이리저리 치이는 범인으로서는 작가의 용기가 무진장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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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 열린책들 세계문학 118
헨릭 입센 지음, 김창화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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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은 민음사 번역본 후 다시 한 번 읽는다. <유령> 역시 이 책과 이후 동서문화사 번역본을 연달아 읽었다. 재독은 작품에 대한 친숙한 느낌과 동시에 생경한 대목도 찾아 볼 수 있는데, 첫 읽기와 다른 이해, 첫 읽기에서 간과한 장면을 새삼 음미할 수 있다. 한편 완벽한 번역본은 없다는 씁쓸한 진실도 발견한다. <인형의 집>은 이미 단상을 남겼으므로 여기서는 <유령>만을 다룬다.

 

이 작품은 여러모로 전작과 대비된다. 전작의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구성과 성격 면에서 한층 복잡하게 엮여있다. 이 작품을 통해 전작을 거슬러 살펴보면 여러 면에서 다소 나이브하였음을 알게 된다. 후반부의 주제를 향한 박진감 넘치는 돌진도 새삼스럽다.

 

<유령>의 주제의식은 다음 장면에서 노골적으로 제시된다.

 

우리 모두가 유령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들이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기질뿐 아니라 모든 낡은 이론, 낡은 신념, 낡은 사물들이 우릴 따라다녀요. 살아 있는 건 아니지만, 떠나지 않고 우리 몸에 박혀 있지요......이 나라 전체에 유령들이 사는 것 같아요. 너무 많아서 바닷가의 모래처럼 깔려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 모두는 불쌍하게도 빛을 싫어하죠.” (P.188)

 

유령오래된 관습내지 널리 퍼져 있는 하나의 생각”(P.233)을 지칭하는 용어다. 입센이 보기에 당대 노르웨이인들은 모두가 유령에 사로잡혀 있다. 자유롭고 눈부신 새로운 시대와 세상을 향해 힘차게 전진하는 것을 막는 고리타분하고 구태의연한 인습 같은 장애요인.

 

입센은 구시대와 신시대를 날씨를 통해 선명하게 대조하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세상을 체험하고 돌아온 오스왈드의 절망을 통해 형상화된다.

 

하루 종일 햇빛이라고는 안 줌도 없는데?” (P.201)

햇빛은 한 번도 볼 수 없어! 내 기억에 여기서 햇빛을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 (P.208)

 

유령은 햇빛을 싫어한다. 유령에 사로잡힌 이들은 삶의 기쁨과 행복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삶은 그저 감내해야만 할 의무일 따름이다. 만데르스 목사는 이러한 사고방식의 현현이다.

 

삶의 기쁨에 관해서 얘기했죠. 여긴 그 기쁨이 별로 없어요. 난 여기서 그걸 느끼지 못했어요.” (P.214)

언제나 끝없이 이 기쁨을 그렸어요. 바깥세상에는 빛이 있고, 햇살이 있어요.” (P.215)

 

오스왈드의 최후 장면에서 그가 반복하여 햇빛을 갈구하는 것은 입센의 절박감과 초조함을 그대로 반영한다.

 

햇빛.....햇빛을.” (P.241)

 

<유령>의 등장인물들은 제각기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 그것이 인간의 다면성을 보여주는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오히려 위선적인 면을 강조하는 부정적인 효과를 더해주고 있다.

 

만데르스 목사는 전통적이며 보수적인 관습에 젖어 있는 인물의 전형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의지보다 세인의 반응에 예민하다.

 

부인, 살다 보면 다른 사람의 판단에 의지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게 다 세상 사는 방법이고, 그렇게 사는 것이 가장 좋죠. 그렇지 않다면 이 사회가 어떻게 되겠어요?” (P.151)

 

사람들에게 오해를 심어 줘서도 안 되고, 세상 사람들의 빈축을 살 일을 해서도 안 되죠.” (P.155)

 

고아원 건물의 보험 가입에 대한 그의 주저는 후일 화재의 참극을 예고한다. 게다가 알빙 부인의 결혼 관계에 대한 인식은 어떠하며, 개인의 행복을 희생해서라도 가족의 울타리는 지켜야 한다는 가치관도 그의 고루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언제나 인생에서 행복만을 찾으려는 건 터무니없는 생각일 뿐이에요. 어떤 권리로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죠? 없어요. 우린 오직 우리의 의무를 다할 뿐입니다. 부인의 의무는 부인이 선택한 남편 곁에 있는 것입니다. 성스러운 인연으로 묶인 바로 그 사람과 함께.” (P.167)

 

만데르스: 아이들은 자신의 부모를 사랑하고 존경해야 합니다!......어머니로서 아들의 이상을 깨뜨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셨나요?

알빙 부인: 진실은 어쩌고요?

만데르스: 이상은 어쩌고요?“” (P.185)

 

알빙 부인은 끝내 가정을 깨뜨리지 못한 노라다. 그녀는 남편에 대한 증오와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지닌 비교적 깨인 인물이면서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끝내 비극을 감수하는 처지를 자초한다.

 

타락한 남편을 보여주기 싫어서 어린 아들을 일찌감치 외국에 보내지만, 그것이 오히려 자신과 아들을 속이는 행동이었음을 그녀는 알지 못한다. 아들의 눈에는 알빙 부인 또한 유령의 일원으로 보인다.

 

엥스트란드의 간교하기 이를 데 없는 허위와 위선은 말할 것 없고, 레지네의 태도 반전은 극적이다.

 

나도 인생의 기쁨을 찾고 싶어요, 부인......아무려면 어때요. 될 대로 되라죠.” (P.231)

 

착하고 얌전한 듯 보이는 레지네는 실상 삶의 열정과 기쁨을 향유하려는 욕망으로 펄펄 끓는 젊은 아가씨였다.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게 되는 순간 알빙 부인 자택을 박차고 뛰쳐나가는 그녀의 태도는 당당하면서도 일말의 불안을 내포하고 있는데, 그녀가 만약 엥스트란드에게로 향할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여기서 작품 전개의 일대 전환점이 되는 고아원 화재의 원인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극중에서는 만데르스 목사의 실수로 화재가 발생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만데르스 목사가 실화자인지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엥스트란드: 하지만 난 분명히 봤습니다, 목사님. 등불을 받아 손으로 심지를 끊어서 등불을 끄시고, 그 꺼진 심지를 대팻밥이 쌓여 있는 곳에 버리셨어요.” (P.221)

 

만데르스: 끔찍하군! 부인, 이건 죄악으로 가득 찬 이 집에 대한 심판입니다.” (P.218)

 

엥스트란드의 증언에 더하여 목사 자신의 발언은 나아가 방화의 의도마저 풍긴다. 만약 방화로 확인된다면, 목사에 대한 저간의 평가는 재논의가 필요하리라.

 

한편, 엥스트란드도 용의선 상에서 배제할 수 없다. 그는 만데르스 목사의 실화에 대한 유일한 목격자이며, 이를 기화로 목사를 자신의 목적에 동의하도록 은근히 유도하고 있다. 우리는 앞서 공사장에서 화재가 생길 뻔했고 엥스트란드에게 혐의가 있었음을 알고 있다.

 

사람들 말로는 가끔씩 그가 성냥불을 아무데나 버린다더군요.” (P.156)

 

이를 확대 적용해 보면 엥스트란드는 실수든 고의든 고아원 화재의 원인자인데 이를 목사에게 뒤집어씌운 셈이다.

 

마지막으로 고아원과 선원의 집의 명칭에 담긴 역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알빙 부인이 세운 고아원의 명칭은 알빙 대위 기념관이다. 겸손한 미덕 속에 감추어진 허위를 인식하자. 반면 엥스트란드는 선원들의 집을 알빙 대위의 집으로 명명한다. 그런데 이것은 명백한 오역으로 보인다. 타 번역본에서는 의전[시종] 장관 알빙의 집으로 번역한다. 영문판으로는 Chamberlain Alving's Home으로 표기되어 있다. 의전 장관 알빙은 타락한 인물이다. 진실을 담고 있지만 그것은 타락한 진실이다.

 

작품해설은 이 작품의 주제의식을 다시 한 번 명확하게 요약하고 있다.

 

개인의 자유로운 의지가 사회적 관습에 의해 어떻게 파괴되어 가는지, 그리고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과거와 현재의 <관념적 유령>에 희생되고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P.251)”

 

<인형의 집>의 노라는 유령을 뿌리치는 데 성공한 반면, <유령>의 알빙 부인은 유령을 극복하는데 실패한다. 그것이 이 작품이 비극으로 자리매김하는 연유다. 하지만 <유령>을 단선적으로만 파악하기 보다는 주제 구현을 위한 갖가지 상징과 복선 장치, 인물들의 다면적 성격의 충돌과 대립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보다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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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8
헨릭 입센 지음, 안미란 옮김 / 민음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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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가 주목할 만한 대목은 책장 끝을 살짝 접는데, 해설과 연보를 포함하여 140면이 채 되지 않는 얄팍한 책에 접힌 곳이 십여 군데에 달한다. 그나마도 나름 특히 인상 깊은 경우로 한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고전은 역시 고전임을 새삼 알게 된다. 특히 마지막 대목에서 노라의 통렬한 웅변은 가슴 깊은 곳을 절절히 울린다.

 

여성해방 운동의 문학적 정전과도 작품. 페미니즘에 관심 없는 내 입장에서는 굳이 읽을 만한 동기부여를 갖지 못한다. 보봐르의 <2의 성>과 마찬가지로. 섣부른 선입관은 그래서 무섭고 어리석은 법. 이 책에서 여성만을 주목하는 독자는 편협한 독서를 한 셈이다. 물론 여성해방도 무게 있는 주제다. 하지만 입센은 여기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제기하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노라와 헬메르는 당대 노르웨이의 전형적인 부부상을 대표한다. 주체적이고 독립적이지 못하며 성숙한 일개 인격체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제2의 성으로서의 여성. 노라는 내심 불만을 품고 있지만 그것은 표면화되지 못한 상태에 놓여 있다. 소소한 불만은 개인과 가정과 아이들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서 꾹꾹 눌러 가라앉힌다. 대다수의 결혼한 여성들은 그러하다. 남성들도 그러하다. 결혼 생활에서 완전한 화합과 행복은 이념형에 불과하다.

 

독자적인 사회적, 법적 지위도 인정받지 못하고 언제나 남성(아버지와 남편)에게 의지하며, 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인형처럼, 종달새와 다람쥐처럼 재롱을 피워야 하는 존재, 그러면서 이러한 현실과 처지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안주하는 여성들. 그것이 노라가 맞닥뜨린 사건을 통해 각성한 사회와 가정에서의 여성의 현실이다. 그녀는 자신이 행복하다고 믿지만 진실은 사랑과 행복을 세뇌시키려는 무의식적인 노력이었을 뿐이다. 노라에게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그녀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분명 가정을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위장된 행복은 감소하고 억눌린 자아에 대한 불만은 갈수록 팽배하였을 것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당신들은 나를 사랑한 적이 없어요. 당신들은 나에 대해 애정을 갖는 게 즐겁다고 생각했을 뿐이죠.” (P.115)

 

아니요. 행복한 적은 없었어요. 행복한 줄 알았죠. 하지만 한 번도 행복한 적은 없었어요......

우리 집은 그저 놀이방에 지나지 않았어요. 나는 당신의 인형 아내였어요. 친정에서 아버지의 인형 아기였던 것이나 마찬가지로요. 그리고 아이들은 다시 내 인형들이었죠. 나는 당신이 나를 데리고 노는 게 즐겁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놀면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요. 토르발, 그게 우리의 결혼이었어요.” (P.116)

 

노라의 남편 헬메르의 입장에서는 청천벽력이었으리라. 기껏 있을 수 없는 사고를 친 아내를 아무 일도 없듯이 용서해주겠다고 했는데 가정을 떠나겠다고 선포하고 있으니. 당대적 관점에서 그는 지극히 평범한 타입의 남편에 해당한다. 오히려 모범적이라고 해야 할까. 아내를 더없이 사랑하고, 도덕적으로 올바르도록 애쓰며 사회적 지위와 명예에 높은 가치를 두고 있는. 다소간의 권위적 태도와 형식적인 친절, 지나칠 정도의 결벽이 인정되지만 이 정도를 가지고 인간성을 탓할 수는 없다. 그의 커다란 흠결이라면 결정의 순간 아내 대신에 사회를 선택했다는 점인데, 그로서는 아내의 사고와 행동은 상대적으로 가치가 덜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 외견상 아무 일도 없는 양 보여주기 위한 위선적 태도를 보인다.

 

당신에 관한 일은, 우선 우리 사이는 전과 똑같은 것처럼 보여야 해. 물론 세상의 눈에만 그렇다는 거지. 당신은 계속 이 집에 있어야 해. 당연히 그렇지. 하지만 당신에게 아이들을 키울 권리를 줄 수는 없어. 당신에게 그건 맡기지 못하겠어.” (P.110)

 

자기 아내를 전심으로, 거짓 없이 용서했다는 것 말이야. 그럼으로써 여자는 두 배로 그의 소유물이 되니까. 그는 아내를 이 세상에 다시 낳아 준 거야. 아내는 어떻게 보면 그의 아내이면서 그의 아이이기도 하지. 힘없고 무력한 존재인 당신은 앞으로 나에게 그런 존재가 될 거야. 나에게 마음을 열기만 하면 나는 당신의 의지와 양심이 되겠소.” (P.113)

 

당대 노르웨이 사회에서는 여성은 남성의 부속물로 대우받았다고 하며 당연히 법적 권리도 지극히 제한된 것이었다. 아이와 남성 어른의 중간적 존재 정도. 이러한 제도와 관습 속에서 수많은 노라와 헬메르는 교육받고 세뇌 당한다. 그것이 그들에게 당연히 준수되어야 할 성 역할이자 의무로서 말이다. 이런 점에서 노라와 헬메르 부부는 모두가 피해자다. 미약한 한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법률과 도덕과 종교 등의 거대한 체제의 위력. 입센은 노라로 하여금 계란을 던지도록 하였다. 노라는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또 다른 노라가 줄줄이 뒤를 잇는다면 가능하리라. 그리고 그것은 사실로 판명되었다. 이 작품이 가정극으로 분류되지 않고 사회극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노라에게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책임은 소중하지만 그녀는 더 거룩한 의무가 있다. 그것은 주체적 자아로서 개인을 인식하는 일이다.

 

나 자신에 대한 책임이에요......나는 내가 우선적으로 당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라고 믿어요. 최소한, 그러게 되려고 노력할 거예요.” (P.118)

 

입센은 상대적 소수자로서 여성의 입장에서 반론을 펴고 있지만, 헬메르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헬메르에게도 사회적 속박과 구속에서 온전한 자신을 재발견할 필요성은 절실하다, 남편과 아버지라는 책임과 의무를 초월한.

 

입센은 인물 간 대화와 지문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무대 배경을 이용해서 작중 분위기와 사건 전개를 암시하고 있어 연극적 장치를 잘 활용하고 있다. 1막의 무대는 아늑하게 잘 꾸몄지만 수수한 거실”(P.9)이지만, 갈등이 심화된 2막의 무대에서는 더 이상 안온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피아노가 있는 구석에 크리스마스트리가 서 있다. 크리스마스트리는 이미 장식을 빼앗겼고, 초도 다 타버렸다.” (P.54)

 

노라와 헬메르는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것일까? 작자는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진정한 결혼”(P.124)이 가능하다면. 작품에서는 기적에 대한 한 줌의 희망을 피력하고 있지만, 부부 간에 진정한 결혼이 가능할 것인가?

 

 

 

1막 중간에 도저히 요령부득인 대목(P.34)이 있다.

 

(노라) , 이제 정말 아주아주 행복해요. 이제 세상에서 간절한 소원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랑크) 그래요? 그게 뭔데요?

(노라) 토르발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하나 있어요.

(랑크) 그럼 왜 말을 안 하죠?

(노라) 용기가 안 나요. 나쁜 얘기니까요.

(린데 부인) 나쁜 얘기라고?

(랑크) , 그럼 이야기하지 않는 게 좋지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할 수 있잖아요? 토르발에게 그렇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뭔가요?

(노라) 죽어 버리라고 너무너무 말하고 싶어요.

(랑크) 제정신이 아니군요!

(린데 부인) , 저런, 노라!

 

헬메르에 대한 노라의 숨겨진 감정이 표출되는 장면으로 이해되는데, 노라는 남편이 죽어버리기를 욕망하고 있었단 말인지 혼돈스럽다. 그래서 다른 번역본들을 찾아보았더니 제각기 개성적인 해석을 보여주고 있다.

 

난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모두 지옥으로 꺼져 버려!>” (김창화 옮김, 열린책들)

나는 말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요. “이 개자식아!”하고 말예요.” (김진욱 옮김, 범우사)

, 말하고 싶어서 근질근질해 죽겠어요. ‘뭐야, 빌어먹을하고.” (곽복록 옮김, 신원문화사)

, 말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어요. ‘뭐야, 빌어먹을!’ 하고.” (이경석 옮김, 홍신문화사)

난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지옥으로 꺼져 버려!”” (소두영 옮김, 동서문화동판)

 

내친 김에 영문판에서는 어떤 표현을 사용했는지 알아보았다.

 

“I should just love to say Well, I’m damned!”

 

입센에 대한 본격 연구서인 <헨리크 입센> (김미혜 저)에서 해당 작품론을 확인해본다.

 

남편이 자신의 이가 나빠질까봐 마카롱을 금지한다는 말을 한 후 노라는 꼭 남편 앞에서 빌어먹을이라고 말하고 싶다고 한다. 꼭 남편 앞에서 말하고 싶다는 이 한 단어는 모든 것을 남편의 기준에 맞춰 사는 것에서 행복을 느낀다는 노라가 자신의 내적 감정을 스스로 속이고 있는 것인데도 그 속임 자체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비로소 머릿속이 명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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