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쿠라노소시
세이쇼나곤 지음, 정순분 옮김 / 갑인공방(갑인미디어) / 2004년 8월
평점 :
품절


작품에 앞서 책 자체에 대해 언급하련다. 시중에는 쓰잘때기 없는 책은 넘쳐나는 반면 정작 소중한 책은 쉽사리 품절 내지 절판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 책과 같이, 존재를 알았을 때는 이미 늦다. 출판사가 사라졌으니 더 이상 구할 방도가 없다.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중고를 구입하지 않을 바에는. 이 책의 메리트는 양장본의 깔끔한 본책 외에 헤이안 당대의 복식과 궁중 건물 배치도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별책부록이다.

 

세이쇼나곤은 <겐지이야기>를 쓴 무라사키시키부와 동시대 인물이다. 전자는 데이시 중궁을, 후자는 쇼시 중궁을 섬긴 차이가 스스로의 삶에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으니 세이쇼나곤은 데이시 중궁의 몰락과 죽음 이후에 잊히고 말았다. 오직 이 작품 하나만이 그녀의 까칠하면서도 지적인 면모를 후대에 남겨줄 뿐이다.

 

이 작품은 일본 문학사에서 고전 수필의 원류로 일컬어진다. 처음에는 지나친 찬사가 아닐까 싶었는데 막상 읽어보니 과찬 내지 허찬은 아니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 중궁을 모시던 중류귀족 출신의 한 뇨보는 궁중 생활과 자신의 개인적 상념을 두서없이 적어두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더라도 무척이나 흥미롭고 참신하다.

 

전체 302단으로 이루어졌는데 내용상, 형식상에서 네 가지로 구분된다. 우선은 ‘OO...’ 이라고 하면서 관련된 항목을 죽 나열한다. 10(산은), 11(장터는), 12(봉우리는), 13(들판은)부터 273(곶은), 274(집은)에 이르기까지 경치, 사물, 자연현상, 음악, 의복 등 다루는 범주도 다양하다. 재밌거나 이채로운 것, 작자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된 것 등 지적인 측면이 강하다. 각 단의 분량도 길어야 서너 줄 정도로 매우 짧다.

 

또 하나는 ‘OO하는 것이라고 하여 앞 유형과 유사하지만, 단순한 나열에만 그치지 않고 대체로 작자의 의견과 상념이 기술되어 있다. 22(흥 깨지는 것), 23(게을러지기 쉬운 것), 24(사람들한테 무시당하는 것)에서 289(보고 있으면 금방 따라하는 것), 290(마음이 안 놓이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사물보다는 작자의 심경과 판단이 두드러지며 분량도 한 줄에서 몇 쪽까지 편차가 심하다. 앞 유형보다는 좀 더 읽는 맛이 낫다.

 

기실 이 작품의 문학적, 역사적 가치를 드높이는 것은 세 번째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수필의 특성에 가깝다. 1(사계절의 멋), 2(한 해의 절기)부터 301(밀회), 302(노래 한 수)에 이르기까지 제재와 형식 모두 자유롭게 때로는 운문이 주가 되기도 하며 전해들은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기도 하다. 작자의 체취가 문장에서 물씬 풍긴다. 자신만의 독특한 미적 감성과 사고가 스스럼없이 솔직하고 담백하게 드러나 읽는 이가 새삼 작자를 반추하게 만든다.

 

봄은 동틀 무렵, 산 능선이 점점 하얗게 변하면서 조금씩 밝아지고, 그 위로 보랏빛 구름이 가늘게 떠 있는 풍경이 멋있다.” (1, 사계절의 멋)

 

“9월경 밤새 내린 비가 아침에 그치고 해가 반짝 얼굴을 내밀었을 때, 뜰에 핀 화초에 이슬이 굴러 떨어질 듯 소담스럽게 매달린 것은 매우 운치 있다. 그리고 사립 울타리나 초라한 지붕 처마의 거미줄에 빗방울이 떨어져 맺힌 것도 마치 진주가 맺힌 듯이 맑고 예쁘다.” (126, 구월의 아침)

 

작자 당대에 이렇게 주관적 미감과 감흥을 대놓고 당당하게 표현하는 이가 있었던가. 게다가 착상은 신선하고 표현도 생생하다. 그녀는 똑 부러지게 자신만의 멋과 운치를 놓치지 않는다. 글을 통해 보건대 세이쇼나곤은 가식 없는 솔직 담백한 인물이다. 물론 그녀의 솔직함이 지나쳐서 당사자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녀는 까딱하지 않는다. 아래 문장을 보자. 오히려 가식적이지 않고 인간적인 면모가 아닌가.

 

다른 사람이 자기를 험담한다고 화를 내는 사람은 정말 몰상식한 사람이다. 어떻게 남의 험담을 안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자기 일은 제쳐두고 남의 결점을 늘어놓으며 마구 비난하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다.” (255, 남 험담하는 즐거움)

 

밉살스러운 사람이 안 좋은 일을 당했을 때도, 천벌 받을지 모르지만 기쁜 마음을 억누르기 힘들다.” (261, 환희-기쁜 것)

 

작자는 중궁 데이시를 섬겼다. 중궁은 그녀를 각별히 총애했던 것으로 보인다. 글에서 나타나는 둘 간의 훈훈한 관계, 이심전심의 마음, 중궁에 대해 애정과 연민으로 일관하는 작자의 태도. 중궁 데이시의 몰락과 중궁 쇼시의 등장과 같은 역사적 사실을 작가는 일체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일개 뇨보의 신분으로써 정권 교체와 같은 사건에 무슨 언급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작자는 중궁 데이시와 부친, 오라버니를 둘러싼 화려하고 단란했던 전성기 시절의 가문 모습을 반추하고 있을 뿐이다. 공식적 역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헤이안 시대 후기의 천황과 상류 귀족사회의 영화가 개개의 일화를 통해 아련하게 서술되어 있다. 여기에 작자 자신의 일화도 일부 추가하여 이들과의 애틋한 관계를 회상하고 있다. 5(대진 나리마사네 집), 20(고킨슈 강독회)에서 263(샤쿠젠지 공양), 277(비 오는 날의 방문), 297(명왕의 잠)까지. 구체적인 이야기를 기술하다 보니 분량 상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하지만 그날 그렇게 훌륭하게만 느껴지던 중궁 일가의 영화도 지금 상황에 비추어 보면 너무도 허망하게 생각되어, 다 쓰지 않은 것도 많다.” (263, 샤큐젠지 공양)

 

작자는 자아에 대한 프라이드가 무척이나 강했던 듯 싶다. 21(전문직 여성)을 보면, 남편만을 의지하는 여성을 한심하다고 비난하며 뇨보로 입궐하여 사회생활을 하는 게 더 낫다고 주장한다. 설산이 녹을까봐 전전긍긍하고 사라지자 어찌할 줄 모르는 작자의 태도(83, 거지중 히타치노스케와 설산)도 지기 싫어하는 그녀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두견새 탐방을 가서 노래를 읊지 않은 걸 중궁이 한소리 하자 발끈해서 앞으로 일절 읊지 않겠다고 뻗대는 장면(95, 두견새 탐방)은 어떠한지. 그래서일까, 작자 자신을 칭찬하는 일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수록하며 글을 읽는 독자도 또한 아무렇지 않게 당연한 듯이 넘기게 된다.

 

당대의 혼인 관습의 특수성에 따른 남녀 관계의 애환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새벽녘 여자네 집에서 돌아가는 남자는 헤어지기 싫은 듯 마지못해 일어서며 이별을 아쉬워하는 말을 주고받으면 좋으련만 대개의 남자는 무심히 휙 일어서서 휑하니 가버린다고 꼬집는다(60, 새벽에 헤어지는 법). 남녀 간 입장차에 따른 심경의 대비가 눈에 보이는 듯 우스우면서도 당대 여성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안타깝기도 하다. 이 글을 포함해서 이따금씩 드러나는 문장과 남성에 대한 비난 글을 보면 단순한 전언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담에서 우러나온 글이 아닐까 싶다.

 

분명히 오리라고 생각하고 밤새도록 우두커니 앉아서 남자를 기다리다가 새벽녘에 잠깐 잠이 들었는데, 까마귀가 까악까악 울어서 하늘을 쳐다보니 어느새 한낮이 되었을 때는 정말이지 어이없다.” (93, 기막힘)

 

남자다는 동물은 처지가 딱한 여자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딴 여자에게 가는 냉혈 동물......정말 남자란 동물은 도저히 이해 안 된다.” (120, 불안 초조)

 

남자란 나 같은 여자 쪽에서 보면 참으로 기묘한 동물이다. 그 속을 전혀 알 수가 없다.” (253, 남자의 속마음)

 

물론 그녀도 철저히 계급의식에 사로잡힌 중류 귀족 출신이니만치 자신보다 낮은 계급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며 때로는 편견에 사로잡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어이없는 비난도 퍼붓는다. 작자의 시대적, 문화적 한계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볼품없는 우차에 볼품없는 치장을 하고 구경 나온 사람은 정말 마음에 안 든다......도대체 그런 작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그런 행색으로 구경을 나오는지 모르겠다.” (223, 구경 나오는 우차의 자격)

 

지체 높으신 분을 굉장히 자상하신 분이지요하고 하녀가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그 순간 그분의 가치가 뚝 떨어지는 것 같다. 그런 하찮은 것들에게는 오히려 험담을 듣는 편이 낫다.” (295, 칭찬)

 

헤이안 시대의 특정한 요소를 감안하면 읽는 내내 당대 인물의 사고, 느낌, 감각, 취향이 의외로 고리타분하고 구태의연하지 않음을 강하게 깨닫게 된다. 해설에 따르면 “<마쿠라노소시>는 어떤 사물에 대해 밝은 마음으로 찬미하고 지적인 흥취를 느끼는 오카시정서”(P.544)를 표현했다고 한다.

 

해설에 이 작품에 대한 적절한 평이 실려 있어 이를 인용하며 마치고자 한다.

 

자연의 정취나 인간사의 양태를 속속들이 파헤쳐 평론한 것으로, 주제를 파악하는 방법이 독특하고 착상은 신선하며, 관찰은 예리하고, 묘사는 매우 개성적이라 인상 깊다.” (P.547)

 

그나저나 세이쇼나곤은 65(노래집)에서 <만요슈><고킨슈>가 최고의 노래집이라고 평한다. 겉핥기에 지나지 않을지언정 아무래도 두 책을 읽어보지 않을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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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160
메리 셸리 지음,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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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체구의 흉포한 괴물. 인간을 닮았지만 자연이 아닌 인간이 만들어낸 불의한 존재. 그것이 지칭하는 명칭의 어감만으로도 공포감을 자아내는 괴물 인간, 프랑켄슈타인이다. 대중매체의 집중적인 관심으로 괴물 인간의 인지도는 비약적으로 상승하였지만, 문학사적으로는 여전히 B급 장르문학으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작품이다.

 

이 소설을 읽는 독자는 대체로 실망하기 마련이다. 프랑켄슈타인 괴물의 잔인한 살상행위와 이에 대항하는 인간의 결투 등을 기대했다면 실제적 살인과 대결 등의 묘사는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하나 프랑켄슈타인 괴물을 주인공으로 생각하고 괴물의 행동은 물론 내면까지도 심도 깊게 기술되어 전모를 확연히 알 수 있게 되리라고 생각했다면 주인공은 괴물이 아니라 괴물을 창조해 낸 젊은 과학자이고, 그의 이름이 프랑켄슈타인이며 괴물은 딱히 이름도 없다는 사실이다.

 

작품의 부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대의 프로메테우스. 프로메테우스는 신화에서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신으로 기억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진흙으로 인간을 빚어낸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작가는 인간이 신을 흉내 내어 유사 생명체를 창조해 내지만 그것이 얼마나 독신 적이며 반인간적 행위임을 신랄하게 파헤치고 있다.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과학적 지식을 향한 인간의 집착, 만들어 낸 존재에 대한 창조자로서의 무책임한 방치와 증오, 신체적으로 지적으로 우월한 피조물에 이끌려 다니며 무력하고 나약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양태 등. 괴물이 아닌 인간 프랑켄슈타인의 관점에서 작품을 읽어나가면 그의 오만과 좌절, 비겁과 나약, 분노와 증오가 파노라마처럼 작중에 펼쳐져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두 프랑켄슈타인의 미래가 전개되는 귀결에 목말라함을 느끼게 된다.

 

작자는 메리 셸리는 영국 낭만주의 시기 대표적 시인인 퍼시 셸리의 아내다. 진보적 철학자 아버지를 둔 가정환경에서 자라 지적으로 조숙한 그녀는 퍼시 셸리의 두 번째 아내가 되어 바이런의 스위스 별장에서 이 작품을 착안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그녀의 나이 불과 19. 소설을 읽다 보면 구성을 과도하게 비틀어놓으면서도 진행은 나이브하게 느껴지곤 하는데 여기에 연유한 탓이리라.

 

대중적 관심은 단연 괴물 프랑켄슈타인에게 집중되겠지만, 이 작품이 던지는 도덕적, 사회적 함의는 제법 묵직하다. 현대는 과학진보주의에 대한 낙관적 환상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지만, 줄기세포, 유전자 조작 등 발전을 거듭하는 생명공학 분야에서 한계와 기준 설정에 대한 공감대는 아직 형성되지 않은 상태다. 궁극적으로 인간 복제와 대체가 가능하다면, 결국 괴물 프랑켄슈타인을 만든 인간 프랑켄슈타인과 동일한 입장에 처하게 되는 셈이다.

 

! 그 얼굴이 안겨 주는 공포를 견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시 살아난 미라도 그것만큼 소름끼칠 수는 없었다. 일이 끝나기 전에도 그를 가만히 뜯어본 적이 많았다. 그때도 물론 보기 흉했지만 막상 근육과 관절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단테도 상상 못 할 그런 악마가 되고 말았다.” (P.83)

 

인간 프랑켄슈타인은 스스로의 손으로 창조한 괴물 프랑켄슈타인의 혐오스런 외모에 치를 떨면서 외면하고 방치해 버린다. 괴물은 창조자로부터 애정과 보살핌을 받고 떳떳한 하나의 생명체로서 인정받기를 원하지만 아무도 그를 원하지 않는다. 창조자마저 버린 괴물이니 어느 누가 그를 받아들이겠는가. 그 자신은 어린 시절에 애정 어린 양육과 교육을 받았으면서도 그것을 피조물에게 베풀지 못하였다.

 

인간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손으로 과학적 기적을 생산할 수 있다는 학문적 열망과 세속적 욕망에만 눈이 어두운 나머지 생산 이후의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인식과 자각도 하지 못하였다. 인간으로 눈을 돌려서 남녀가 서로의 사랑에만 매달려서 낳은 아이를 방치하고 유기한다면 중대한 반인륜적 범죄로서 지탄과 처벌을 받게 됨은 자명하다. 오늘날 생명공학 연구자들이 자신들의 연구에 대해 학문적, 상업적, 세속적 욕망 외에 도덕적 인식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지 여부는 사실 알 수 없다.

 

인간 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을 구조한 로버트 월턴의 과학진보주의에 대한 소신을 듣고 터뜨린 신음은 자신의 뼈저린 체험에서 비롯된 이러한 깨달음일 것이다.

 

불행한 사람! 당신도 나 같은 광기를 지닌 거요? 당신 역시 그 도취의 한 모금에 취한 거요?” (P.44)

 

나는 선한 의도로 삶을 시작했고, 그것을 실행에 옮겨 내가 인류에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되는 순간을 갈망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무너져 버렸다. 과거를 흐뭇하게 돌아보고 거기에서 새로운 희망의 약속을 끌어내는 양심의 평화는 사라지고, 후회와 죄의식이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지옥으로 나를 몰아댔다.” (P.125)

 

그래서 괴물 프랑켄슈타인의 항변은 섣불리 무시하기 어려운 도덕적 명분의 울림을 지닌다.

 

어떻게 생명을 가지고 그런 장난을 친단 말이오? 나에 대한 의무를 다하시오. 그러면 나도 당신을 물론 다른 인간들에 대해 내 의무를 다할 테니.” (P.136)

 

나는 당신의 정의를, 당신의 너그러움과 애정을 받아야 마땅하오. 나는 당신의 피조물이잖소. 나는 당신의 아담이어야 했건만 타락한 천사가 되었고, 아무 잘못도 없는 나를 기쁨에서 몰아내었소.” (P.137)

 

비록 당신에 대해서는 야속한 감정밖에 없었지만 내가 구원을 기대할 사람도 당신뿐이었으니까. 무정하고 냉혹한 창조자 같으니! 당신은 내게 인지력과 열정을 주어 놓고선 세상 밖으로 내팽개쳐 인간의 경멸과 공포를 사게 만들었소.” (P.184)

 

공상과학 문학이나 영화 등 장르에서 즐겨 다루는 소재 중 로봇이 있다. 괴물 프랑켄슈타인도 일종의 로봇이라고 부를 수 있다. 차페크의 희곡 <R.U.R.>이나 아시모프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아이 로봇>, 일본 애니메이션인 <은하철도 999>도 피조물 로봇이 인간 세상을 지배하려고 하는 대목은 공통이다. 다소 다르지만 <도롱뇽과의 전쟁>도 기본 접근은 유사하다. 인간을 닮은 고급 복제물(로봇 포함)일수록 자신이 인간에게 복종하고 지배당하는 현실을 계속 감수하지는 않을 것은 당연한 추론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인간을 지배하기를 원하게 된다. 괴물 프랑켄슈타인은 초보적 인식 단계에 머무르지만 궁극적 지향에 이르는 길은 멀지 않으리라.

 

넌 노예야. 그렇게 설득했건만 넌 내가 애써 겸손 떨 가치도 없음을 스스로 입증하고 말았어......넌 나를 만들었지만 네 주인은 나야. 어서 복종해!” (P.220)

 

발표 당시에는 대단한 찬사를 받았지만 곧 세인에게 잊히는 경우도 있지만, 처음에 그저 그런 정도로 여겨졌지만 시간이 경과할수록 의의와 평가가 점점 높아지는 예술 작품이 있다. 진정한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소설 <프랑켄슈타인>도 여기에 해당한다. 작자가 200년 후 현대의 과학적 진보를 예견하고 이 작품을 쓰지는 않았을 테지만, 인간과 과학과 도덕이 맞물리는 난해한 지점을 천재적 직감으로 선취한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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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누키노스케 일기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수필비평선집
사누키노스케 지음, 정순분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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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카와 천황은 일본의 제73대 천황이며, 그 아들이 제74대 도바 천황이다. 작자 사누키노스케는 호리카와 천황을 지근에서 모시던 여관이었다. 이 책은 자신이 모시던 호리카와 천황의 죽음과 추억에 대한 회상록이다. 2부 구성으로서 상권은 호리카와 천황의 사망 경과를 묘사하고 있으며, 하권은 호리카와 천황에 얽힌 추억을 기술하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호리카와 천황과 작자와의 관계다. 일기 내용과 해설에 따르면 작자는 왕을 측근에서 모시는 여관, 즉 조선시대의 상궁 같은 지위인 동시에, 후궁과도 같은 애첩 역할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일까 일기 내용에 따르면 천황을 언급할 때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등 공적 상하관계를 넘어서 개인적인 깊은 애정관계를 엿볼 수 있다.

 

그것을 본 다지마 여방이 마치 한집안 사람끼리 하는 행동처럼 격의가 없으시니 다른 사람은 아예 두 분 사이에 끼어들 수가 없사옵니다.“라며 재미있어했다. (하권 12)

 

이처럼 동갑내기로서 천황과 작자는 주위에서 시샘할 정도로 돈독한 정을 주고받는다. 와병 중에도 신하들의 시선에서 작자를 무릎으로 가려주는 행동 등 애정과 배려가 넘칠 정도다. 이런 작자였기에 천황에 대한 연모의 정은 남들과 다를 수밖에 없었고 천황의 죽음을 대하는 심경도 남달랐을 것이다. 작자는 심지어 다른 사람들처럼 소리내어 울 수도 없을 정도(상권 19)였다.

 

호리카와 천황의 죽음으로 작자는 궁중에서 물러나 자택에 은거하지만, 곧 명에 의해 아들인 도바 천황을 모시게 된다. 심신을 다해 섬긴 천황이 이승에 없지만 세상사는 언제 그러했다는 듯이 곧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럴수록 천황에 대한 사무치는 심경은 새록새록 하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는데도 나는 여전히 호리카와 천황님 계실 때 생각에 빠져 있었다.” (하권 12)

 

다른 사람들은 지난날의 추억으로 무엇을 떠올리곤 할까? 나는 오랫동안 모시고 있던 호리카와 천황님 생각뿐이다.” (하권 23)

 

샘물과 부채 뽑기 일화(하권 12)와 둘 간의 연인스런 티격태격 일화(하권 23)는 해제에서 언급했듯이 신분 고하 차이를 넘어선 개인적이고 진실한 인간관계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인들에게 있어 오랫동안 천황은 인간이 아닌 신적인 존재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천황은 외경과 존엄의 대상이었지 희로애락을 표출하는 인간다운 면모를 기록으로 만나보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천 년 전에 한 여관은 사랑과 존경과 충성을 바치고 모시던 천황의 일상과 죽음이라는 특이한 소재를 사적인 관점에서 가식 없이 솔직한 시각으로 기술하였다.

 

독자는 이 일기를 통해서 우선 천황의 인간적 면모를 알게 되어 흥미로우며, 죽음을 맞이하여 두려움 속에서도 의연함을 지키려는 천황의 심정과 태도에 다소간 놀라게 되며, 무엇보다도 한결같은 마음가짐으로 천황을 그리워하고 추억에 잠겨 호시절을 회상하는 작자의 기쁨과 슬픔에 공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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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시나 일기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수필비평선집
다카스에의 딸 지음, 정순분.김효숙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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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에 외롭고 쓸쓸한 처지에서 예전의 생을 회상할 때의 심경은 차라리 참혹하다. 자신의 삶 전체를 다루고 있는 점에서 <청령일기>와 비슷하나, 남편과의 관계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점에서 진정한 회상록이라고 할 수 있다.

 

작자는 모노가타리의 세계에 매료되어 현실적 삶의 인식을 갖지 못한 점을 못내 후회한다. 오늘날 드라마나 영화 속의 화려한 삶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일부 군상이 자연스레 오버랩된다.

 

히카루겐지님처럼 신분이 높고 멋진 분을 만나면 좋겠다.” (P.102)

 

이들의 공통점은 환상과 가공의 세계에 익숙하여 현실 세계에 불만스러워하고 외면하여 환상 속으로 도피하는 데 있다. 현실은 녹록치 않다.

 

히카루겐지님처럼 멋진 사람이 세상에 있겠는가 말이다.” (P.142)

 

처절하면서도 씁쓸한 깨달음이다. 세상에 신데렐라가 있을 수 있지만 누구나 신데렐라가 되지는 못한다. 이처럼 작자에게 모노가타리는 현실 인식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짙은 폐해를 드리웠다.

 

일기의 첫부분은 형식상 기행문, 즉 여행문학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의 도쿄 동부에 해당하는 가즈사 지방에서 당시 수도였던 오늘날의 교토인 헤인안쿄까지 수 개월간 육로와 수로를 거쳐 귀경하는 대목이다. 해설에서는 <도사 일기>와는 달리 풍경 기술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므로 본격적인 기행문학으로서 평하고 있다.

 

1부를 일종의 구도기행으로 바라보면 어떨까? 작자는 모노가타리에 대해 듣고 읽어보고 싶은 마음에 하루빨리 귀경하기만을 고대하며 신불에 기원할 정도다. 작자가 귀경길에 언급하고 품평한 명소들도 기실 와카라든지 문학에서 회자된 곳이다. 문학적 감성이 충만한 십대 초반 소녀의 입장에서 헤이안쿄로 가는 길은 모노가타리 독서에 가까워지는 길에 다름 아니다.

 

작자는 당시로서는 매우 늦은 나이인 33세에 결혼한다. 십대 후반이 결혼 적령기인 당대로서는 상당한 만혼이다. 비슷한 나이였던 때 세이쇼나곤은 스스로를 할망구라고 지칭하였다. 만혼의 사유로서는 가정적인 연유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작자의 현실 인식의 미흡성이다. 작자는 모노가타리를 탐독하고 파묻혀 지내는 나날을 보낸다. 남들처럼 혼인에 적극적이지 않고 참배나 근행도 무심하게 여겼다. 오죽했으면 스스로 예지몽을 꾸어도 아무 생각 없었다고 반복적으로 술회할 정도이다.

 

모노가타리의 삶은 현실에 부재하다는 각성은 쓰라린 자각과 체념을 불러일으켰다. 감았던 눈을 떠보니 나이든 자신의 모습과 남편의 존재가 인식되었다. 스케미치와 길고도 짧은 대화는 스러져가는 촛불의 마지막 일렁임이라고 해야 하리라. 꿈은 비록 잃었지만 노년의 심리적, 경제적 안정을 기대하였던 다카스에의 딸, 그에게 닥친 운명은 남편의 죽음이었다. 남은 것은 후회와 회한, 내세의 기원뿐.

 

이 작품의 의의는 다음과 같이 해설에 잘 요약되어 있다.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자기 성찰이 강하게 들어가 있다는 점에서 자전 문학으로서 가치 또한 높다......저자의 정신적 성장과 편력을 엿볼 수 있고 주제 구성을 위한 창작 요소가 내재해 있다는 점에서 회상록 혹은 자전 문학으로서 독자성이 인정된다.” (P.236)

 

이 책은 각 단마다 번역문, 각주, 해제의 순서로 충실하게 구성되어 있어 내용 이해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리고 해설 외에 유용한 부록을 여럿 담고 있다. ‘헤이안 여류 일기 문학의 흐름은 헤이인 시대 일기 문학의 개요를 조망할 수 있으며, ‘<사라시나 일기>의 귀경 여행은 작품 중에서 특히 귀경 여행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첨부된 귀경 여정 지도는 기행문에서 흔히 간과하기 쉬운 것으로서 글월만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여행의 전반적 여정과 지리적 위치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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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미시키부 일기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수필비평선집
이즈미시키부 지음, 노선숙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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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 초 일본 고대 헤이안시대의 여류 일기문학 작품이다. 앞선 <청령일기>에 비하면 연대적으로 수십 년 후에 해당한다. 타이틀은 일기로 되어 있으나 역시 내용상으로는 회상록에 가깝다. 자연스레 선대와 후대의 유사한 일기문학과 비교되는데, 여류작가라는 점에서는 <청령일기>와 친근성을, 생애 전반이 아닌 특정 시기와 사건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도사 일기>와 유사성을 지닌다. 이런 점에서 후대의 일기문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이 일기는 남녀 간의 따끈한 연애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여자는 작자인 이즈미시키부, 남자는 당대 천황의 아들인 아쓰미치 황자. 신분상 격차가 있는 남녀가 만나게 된 계기는 겉치레를 벗기고 보면 기실 불순하다. 여자는 남편이 있는 마당에 이미 황자의 형인 다메타카 황자와 내연의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황자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져 있다. 남편과는 사실상 이혼 상태. 남자는 여자에 대한 소문을 듣고 가볍게 심심풀이 삼아 한때 유희의 상대로 생각한다. 여자에 대한 세간의 평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다.

 

일기에서 다루는 시기는 서기 10034월에서 10041월까지에 해당한다. 남녀 사이의 연애 코스가 흔히 그러하듯 만남, 탐색, 밀고 당기기, 다툼과 소원, 진심의 발견, 영원한 결합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동일하다. 다만 시대적, 문화적 차이가 존재하는데, 연인의 마음을 상호간에 전달하고 확인하는 수단은 서신과 와카다. 이 점에서 우타 모노가타리로 장르 성격을 구분하기도 한다. 작자가 화자를 여자로 지칭하는 점, 후대에 회상 형식으로 쓰여져 다소간 작위적 요소가 존재한다는 점이 그러하다.

 

일기에는 매우 많은 와카가 등장한다. 해설에 따르면 145수로서 분량을 감안하면 일기문학 작품들 중에서는 가장 와카의 비중이 크다. 그녀는 와카의 뛰어난 명인이었던 듯하다. 와카 증답을 통해 그녀의 재주, 감정, 외로움 등을 알게 된 황자는 서서히 그녀에게 빠져들게 된다.

 

여자의 섬세한 감각을 보신 황자님께서는 운치를 이해하는 여자의 멋스러움에 새삼 감탄하셨다.” (P.154)

 

그리고 황자의 신분 상 자주 찾기가 어려워 종내에는 자신의 집으로 들어올 것을 강권하는 단계에 이른다. 두 사람의 와카 중 압권은 팔베개 소맷자락이라는 문구를 마지막 시구로 사용한 일련의 와카들(18장과 19)이다. 상기 문구는 두 사람 만의 사랑을 표시하는 비밀 암호라고 할 수 있으리라.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는 여자를 둘러싼 좋지 않은 풍문이다. 황자는 여자를 사랑하면서도 여자의 품행에 계속적으로 일말의 의혹을 품는다. 이 과정에서 교제와 소원이 반복된다.

 

여자에 관한 소문을 전하자 황자님께서는 그녀가 참으로 경박한 여자라는 생각에 오랫동안 편지도 쓰지 않으셨다.” (P.76)

 

일기의 마지막은 망설이던 작자가 황자의 저택으로 들어가게 되고, 이에 격분한 황자비가 친정으로 돌아가는 장면으로 끝맺는다. 순전히 두 사람의 관계만으로 보면 사랑이 결실을 거둔 것이지만, 확대된 주변 관계의 시각에서 보자면 황자의 가정에 형용할 수 없는 파문을 일으킨 셈이다. 어쨌든 두 사람은 수 년 후 황자가 사망할 때까지 행복한 시절을 보내었으니 사랑 자체는 순수했음을 알 수 있다.

 

일기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 연유는 분명하다. 더 이상 서신과 와카를 교환할 필요성이 사라졌다. 신분상 차이로 인해 작자는 황자의 궁인 자격으로 저택에 들어갔다. 애타게 그리워할 필요 없이 눈앞에서 서로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지만, 연인의 사랑은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왔다.

 

이즈미시키부, 그녀는 미색과 재주를 겸비한 재인이었음에 틀림없다. 비록 본인은 부인하고 있지만 그녀를 둘러싼 무수한 염문들. 두 황자와의 실제적 사건. 작중에서도 역설적으로 알 수 있듯이 남편에 대한 철저한 외면. 이것들로 미루어 보면 그녀는 자유분방한 인물이었을 것이며, 이 점에서 한숨과 탄식으로 점철한 미치쓰나의 어머니와는 가는 길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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