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마쿠라노소시
세이쇼나곤 지음, 정순분 옮김 / 갑인공방(갑인미디어) / 2004년 8월
평점 :
품절
작품에 앞서 책 자체에 대해 언급하련다. 시중에는 쓰잘때기 없는 책은 넘쳐나는 반면 정작 소중한 책은 쉽사리 품절 내지 절판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 책과 같이, 존재를 알았을 때는 이미 늦다. 출판사가 사라졌으니 더 이상 구할 방도가 없다.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중고를 구입하지 않을 바에는. 이 책의 메리트는 양장본의 깔끔한 본책 외에 헤이안 당대의 복식과 궁중 건물 배치도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별책부록이다.
세이쇼나곤은 <겐지이야기>를 쓴 무라사키시키부와 동시대 인물이다. 전자는 데이시 중궁을, 후자는 쇼시 중궁을 섬긴 차이가 스스로의 삶에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으니 세이쇼나곤은 데이시 중궁의 몰락과 죽음 이후에 잊히고 말았다. 오직 이 작품 하나만이 그녀의 까칠하면서도 지적인 면모를 후대에 남겨줄 뿐이다.
이 작품은 일본 문학사에서 고전 수필의 원류로 일컬어진다. 처음에는 지나친 찬사가 아닐까 싶었는데 막상 읽어보니 과찬 내지 허찬은 아니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 중궁을 모시던 중류귀족 출신의 한 뇨보는 궁중 생활과 자신의 개인적 상념을 두서없이 적어두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더라도 무척이나 흥미롭고 참신하다.
전체 302단으로 이루어졌는데 내용상, 형식상에서 네 가지로 구분된다. 우선은 ‘OO은 ...’ 이라고 하면서 관련된 항목을 죽 나열한다. 10단(산은), 11단(장터는), 12단(봉우리는), 13단(들판은)부터 273단(곶은), 274단(집은)에 이르기까지 경치, 사물, 자연현상, 음악, 의복 등 다루는 범주도 다양하다. 재밌거나 이채로운 것, 작자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된 것 등 지적인 측면이 강하다. 각 단의 분량도 길어야 서너 줄 정도로 매우 짧다.
또 하나는 ‘OO하는 것’이라고 하여 앞 유형과 유사하지만, 단순한 나열에만 그치지 않고 대체로 작자의 의견과 상념이 기술되어 있다. 22단(흥 깨지는 것), 23단(게을러지기 쉬운 것), 24단(사람들한테 무시당하는 것)에서 289단(보고 있으면 금방 따라하는 것), 290단(마음이 안 놓이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사물보다는 작자의 심경과 판단이 두드러지며 분량도 한 줄에서 몇 쪽까지 편차가 심하다. 앞 유형보다는 좀 더 읽는 맛이 낫다.
기실 이 작품의 문학적, 역사적 가치를 드높이는 것은 세 번째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수필의 특성에 가깝다. 1단(사계절의 멋), 2단(한 해의 절기)부터 301단(밀회), 302단(노래 한 수)에 이르기까지 제재와 형식 모두 자유롭게 때로는 운문이 주가 되기도 하며 전해들은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기도 하다. 작자의 체취가 문장에서 물씬 풍긴다. 자신만의 독특한 미적 감성과 사고가 스스럼없이 솔직하고 담백하게 드러나 읽는 이가 새삼 작자를 반추하게 만든다.
“봄은 동틀 무렵, 산 능선이 점점 하얗게 변하면서 조금씩 밝아지고, 그 위로 보랏빛 구름이 가늘게 떠 있는 풍경이 멋있다.” (1단, 사계절의 멋)
“9월경 밤새 내린 비가 아침에 그치고 해가 반짝 얼굴을 내밀었을 때, 뜰에 핀 화초에 이슬이 굴러 떨어질 듯 소담스럽게 매달린 것은 매우 운치 있다. 그리고 사립 울타리나 초라한 지붕 처마의 거미줄에 빗방울이 떨어져 맺힌 것도 마치 진주가 맺힌 듯이 맑고 예쁘다.” (126단, 구월의 아침)
작자 당대에 이렇게 주관적 미감과 감흥을 대놓고 당당하게 표현하는 이가 있었던가. 게다가 착상은 신선하고 표현도 생생하다. 그녀는 똑 부러지게 자신만의 멋과 운치를 놓치지 않는다. 글을 통해 보건대 세이쇼나곤은 가식 없는 솔직 담백한 인물이다. 물론 그녀의 솔직함이 지나쳐서 당사자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녀는 까딱하지 않는다. 아래 문장을 보자. 오히려 가식적이지 않고 인간적인 면모가 아닌가.
“다른 사람이 자기를 험담한다고 화를 내는 사람은 정말 몰상식한 사람이다. 어떻게 남의 험담을 안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자기 일은 제쳐두고 남의 결점을 늘어놓으며 마구 비난하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다.” (255단, 남 험담하는 즐거움)
“밉살스러운 사람이 안 좋은 일을 당했을 때도, 천벌 받을지 모르지만 기쁜 마음을 억누르기 힘들다.” (261단, 환희-기쁜 것)
작자는 중궁 데이시를 섬겼다. 중궁은 그녀를 각별히 총애했던 것으로 보인다. 글에서 나타나는 둘 간의 훈훈한 관계, 이심전심의 마음, 중궁에 대해 애정과 연민으로 일관하는 작자의 태도. 중궁 데이시의 몰락과 중궁 쇼시의 등장과 같은 역사적 사실을 작가는 일체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일개 뇨보의 신분으로써 정권 교체와 같은 사건에 무슨 언급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작자는 중궁 데이시와 부친, 오라버니를 둘러싼 화려하고 단란했던 전성기 시절의 가문 모습을 반추하고 있을 뿐이다. 공식적 역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헤이안 시대 후기의 천황과 상류 귀족사회의 영화가 개개의 일화를 통해 아련하게 서술되어 있다. 여기에 작자 자신의 일화도 일부 추가하여 이들과의 애틋한 관계를 회상하고 있다. 5단(대진 나리마사네 집), 20단(고킨슈 강독회)에서 263단(샤쿠젠지 공양), 277단(비 오는 날의 방문), 297단(명왕의 잠)까지. 구체적인 이야기를 기술하다 보니 분량 상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하지만 그날 그렇게 훌륭하게만 느껴지던 중궁 일가의 영화도 지금 상황에 비추어 보면 너무도 허망하게 생각되어, 다 쓰지 않은 것도 많다.” (263단, 샤큐젠지 공양)
작자는 자아에 대한 프라이드가 무척이나 강했던 듯 싶다. 21단(전문직 여성)을 보면, 남편만을 의지하는 여성을 한심하다고 비난하며 뇨보로 입궐하여 사회생활을 하는 게 더 낫다고 주장한다. 설산이 녹을까봐 전전긍긍하고 사라지자 어찌할 줄 모르는 작자의 태도(83단, 거지중 히타치노스케와 설산)도 지기 싫어하는 그녀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두견새 탐방을 가서 노래를 읊지 않은 걸 중궁이 한소리 하자 발끈해서 앞으로 일절 읊지 않겠다고 뻗대는 장면(95단, 두견새 탐방)은 어떠한지. 그래서일까, 작자 자신을 칭찬하는 일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수록하며 글을 읽는 독자도 또한 아무렇지 않게 당연한 듯이 넘기게 된다.
당대의 혼인 관습의 특수성에 따른 남녀 관계의 애환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새벽녘 여자네 집에서 돌아가는 남자는 헤어지기 싫은 듯 마지못해 일어서며 이별을 아쉬워하는 말을 주고받으면 좋으련만 대개의 남자는 무심히 휙 일어서서 휑하니 가버린다고 꼬집는다(60단, 새벽에 헤어지는 법). 남녀 간 입장차에 따른 심경의 대비가 눈에 보이는 듯 우스우면서도 당대 여성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안타깝기도 하다. 이 글을 포함해서 이따금씩 드러나는 문장과 남성에 대한 비난 글을 보면 단순한 전언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담에서 우러나온 글이 아닐까 싶다.
“분명히 오리라고 생각하고 밤새도록 우두커니 앉아서 남자를 기다리다가 새벽녘에 잠깐 잠이 들었는데, 까마귀가 까악까악 울어서 하늘을 쳐다보니 어느새 한낮이 되었을 때는 정말이지 어이없다.” (93단, 기막힘)
“남자다는 동물은 처지가 딱한 여자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딴 여자에게 가는 냉혈 동물......정말 남자란 동물은 도저히 이해 안 된다.” (120단, 불안 초조)
“남자란 나 같은 여자 쪽에서 보면 참으로 기묘한 동물이다. 그 속을 전혀 알 수가 없다.” (253단, 남자의 속마음)
물론 그녀도 철저히 계급의식에 사로잡힌 중류 귀족 출신이니만치 자신보다 낮은 계급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며 때로는 편견에 사로잡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어이없는 비난도 퍼붓는다. 작자의 시대적, 문화적 한계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볼품없는 우차에 볼품없는 치장을 하고 구경 나온 사람은 정말 마음에 안 든다......도대체 그런 작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그런 행색으로 구경을 나오는지 모르겠다.” (223단, 구경 나오는 우차의 자격)
“지체 높으신 분을 “굉장히 자상하신 분이지요”하고 하녀가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그 순간 그분의 가치가 뚝 떨어지는 것 같다. 그런 하찮은 것들에게는 오히려 험담을 듣는 편이 낫다.” (295단, 칭찬)
헤이안 시대의 특정한 요소를 감안하면 읽는 내내 당대 인물의 사고, 느낌, 감각, 취향이 의외로 고리타분하고 구태의연하지 않음을 강하게 깨닫게 된다. 해설에 따르면 “<마쿠라노소시>는 어떤 사물에 대해 밝은 마음으로 찬미하고 지적인 흥취를 느끼는 ‘오카시’ 정서”(P.544)를 표현했다고 한다.
해설에 이 작품에 대한 적절한 평이 실려 있어 이를 인용하며 마치고자 한다.
“자연의 정취나 인간사의 양태를 속속들이 파헤쳐 평론한 것으로, 주제를 파악하는 방법이 독특하고 착상은 신선하며, 관찰은 예리하고, 묘사는 매우 개성적이라 인상 깊다.” (P.547)
그나저나 세이쇼나곤은 65단(노래집)에서 <만요슈>와 <고킨슈>가 최고의 노래집이라고 평한다. 겉핥기에 지나지 않을지언정 아무래도 두 책을 읽어보지 않을 수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