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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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전작의 서문에 스릴러 또는 모험담을 쓰고 싶은 소망을 피력했다. 이후 작가의 여정을 보면 소망을 충실히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소설은 화자인 이수명의 삶과 정신의 원점을 찾기 위한 과정, 그리고 류승민이 빼앗긴 삶의 의미를 되찾기 위한 분투를 통쾌하고 치열하게 그려나간다. 정신병원이라는 사회적으로 격리된 공간으로부터.

 

정신병원은 신체의 훼손을 치료하는 일반 병원과는 기원과 목적에서 차이를 보인다. 미셸 푸코가 지적하였듯이 언명된 목적은 정신병자들을 보호하고 치료하는 것이지만 그들을 사회로부터 격리하여 정상인의 안전을 확보하는 묵언적 목적도 중시한다. 사람들은 신체적 장애인에 대해서는 동정과 위로를 아끼지 않는 반면, 정신적 장애인에 대해서는 공포와 멸시의 감정을 품는다. 이른바 미쳤다는 의미로서의 광기는 정상과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누구나 광기적 요소는 지닌다. 사회적, 문화적 기준에서 한 곳에서는 정상으로 인정받는 경우가 다른 곳에서는 광기로 판정받기도 한다. 정상인이지만 다수가 광인이라고 지칭해버리면 졸지에 광인이 되어버린다. 정상인인 내가 광인이 아님을 주장하고 입증 받는 길은 요원하다. 갇혀서 서서히 미쳐가게 된다. 이런 점에서 정신병원이 자칫 악용되는 사례로 쓰일지 모른다는 우려는 전혀 근거 없는 게 아니다.

 

운명이 내 삶을 침몰시킬 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소설이 시작되었다고 작가는 밝히고 있다. 화자인 수명은 정신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를 실제로 죽인 것은 아버지였다고 굳게 믿는다. 어머니가 죽게 된 그날의 기억은 그에게 상기조차 해서되는 안 될 금단의 영역이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도망친다. 그의 내면에는 낯선 목소리가 공생한다. 승민은 재벌가의 숨겨진 사생아 신분이다. 억눌린 자아는 그에게 방화의 통쾌한 기분을 유혹한다. 부친의 사망과 귀국은 그의 여생의 방향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수리 희망병원에서 환자들은 절대적 을의 처지에 놓인다. 병원의 규칙과 치료에 순응하지 않으면 벌점과 무력제재, 독방이 기다린다. 최종적으로는 끔찍한 전기 요법이 대기하고 있다. 대개의 환자는 보호자의 도움을 구할 수 없다. 보호자는 병원의 치료라는 명목 하에 그들을 외면하고 안도한다. 순응과 자포자기의 반복 속에서 서서히 병원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진다. 그들이 사는 사회로의 복귀라는 무리한 꿈을 꾸지 않는다면. 그 꿈을 꾸는 환자는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그네들을 통해 우리는 병원에서조차 삶의 희로애락이 끊어지지 않음을 알게 된다.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인생이 별건가. 이래저래 살다 가는 거지. 경보 선수의 끝없는 경주도 그런 관점에서 이해했다. 견디고 잊어야 할 일이 나보다 더 많은 사람이라고.” (P.181)

 

목젖이 묵직해져 왔다. 서글픈 것을 본 탓이리라. 그가 책장과 함께 붙인 것, 다리미로 눌러 없앤 것. 그건 알코올 중독자이자 노숙자였던 한 남자의 희망과 절망이었다.” (P.167)

 

소설의 초반은 화자 수명 자신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이윽고 기묘한 동료인 승민의 모습과 행동을 관찰하는 단계로 이어지고, 승민의 눈빛을 보게 되는 순간 수명은 승민에게로 몰입하고 진짜로 짝꿍이 되고 만다. 성격 면에서 양자는 극단적 대조를 보인다. 수명이 순음(純陰)이라면, 승민은 순양(純陽)의 기운이라고 할 정도로. ‘어슬렁거리는 표범을 연상시킬 정도로 위험한 냄새를 풍기는 승민의 영향으로 인생의 유령이었던 수명은 서서히 변화하게 된다.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하고, 정신병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만큼 작품의 분위기와 전개가 어둡고 삭막하고 황량하기 그지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앞뒤 표지의 삽화를 보면 달리기를 하고 재주를 넘는 듯한 인물들의 동작이 코믹하다. 전작에서 유머와 해학적 요소의 의도적 사용을 빈번하게 구사함으로써 작품 전개상 과도한 진지함과 무게를 경감시키려고 노력했던 작가는 여기서도 마찬가지를 시도하고 있다. 비일상적인 인물들, 특히 환자들의 행동을 통한 희극적 성격과 화자인 수명의 입을 통한 언어적 해학과 유희가 그러하다. 다만 전작과는 달리 조금 더 절제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안 돼안 해사이의 괴리가 한 인간의 성미를 어떤 식으로 건드리는가에 대해 설명하라면, 열 시간짜리 강의도 할 수 있다. 그냥 한마디로 하라고? 열 받았다.” (P.165)

 

작품의 결말은 파격적일 정도로 대조적이다. 수명은 비로소 세상에 나설 각오를 다진다. 그는 그날의 기억을 분명히 떠올린다. 실은 무의식적 내면에 어머니의 죽음을 바라는 소망이 잠재되었음을, 그래서 어머니의 자살을 유발한 당사자는 바로 자신이었음을. 승민은 죽음은 선택한다. 시력을 상실하게 되는 그에게 마지막 비행은 삶인 동시에 죽음이다. 두 사람에게 삶과 죽음은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죽음과도 같은 삶, 삶에 이르는 죽음의 길.

 

작가의 최신작을 제외한 주요 장편 세 편을 모두 읽으면서 새삼 유사성과 차이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먼저 작가가 언급한 운명과 삶에 대한 질문은 이 작품에서 끝나지 않는다. 작가는 다시 후작에서 이를 더욱 처절하고 철저하게 파헤친다(‘운명이 난데없이 변화구를 던진 밤’). 아픈 속살을 고통스러울 정도로 헤집으면서. 삶과 운명의 치열한 맞짱이 심화되고 응축될수록 유머와 해학적 요소는 감소하고 있다. 이 작품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후작에서는 유머러스한 분위기는 눈을 씻어도 찾아보기 어렵다.

 

배경을 살펴보면, 작가의 이력과도 일정부분 관련된 사항인데 주요 등장인물은 정신 병력을 지니고 있다. 전작의 할아버지와 후작의 야구선수 출신 아버지가 그러하다. 이 작품은 말할 나위도 없고. 작가가 유독 정신병 환자를 중시하는 연유가 궁금하다.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엉뚱하고 난데없는 언행을 자연스럽게 끌어내기 위함일까? 인간 내면에 잠재되고 은폐된 비이성과 야성의 본능적 몸부림을 풀어헤치기 위한 치밀한 장치일까?

 

기후와 날씨의 작용도 만만치 않다.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는 때는 언제나 어둡고 천둥과 번개가 난무한다. 안개조차 자욱하여 한치 앞을 내다보기도 어려울 정도다. 스릴러와 공포 영화에서 분위기를 돋우기에는 최고의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광포한 일기는 흉악한 범죄를 은폐하며 원인모를 두려움과 공포를 독자와 인물들이 품도록 한다.

 

밤이 깊어지자 마침내 하늘이 포문을 열었다. 빗줄기가 억센 힘으로 유리창을 들이받기 시작했다. 흡사 물빛 뱀들이 날아와 부딪치는 것 같았다. 천둥 번개는 간단없이 번쩍이고 으르렁댔다. 바람이 숲을 울렸다. 방문과 창문이 엇박자로 뒤흔들렸다.” (P.201)

 

수명과 승민이 그렇게 기를 쓰고 병원을 탈출하려고 시도할 수밖에 없게 한 불가피성을 생각해 본다. 승민은 첫 단독 비행을 하게 되었을 때의 심경을 이렇게 표현한다.

 

너절하던 내 인생이 한순간에 눈부셔지더라.” (P.237)

 

우리는 누구나 눈부신 인생을 꿈꾼다. 스스로 한없이 비참해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 현실적 장애요인과 심리적 나약함과 주저는 우리를 대지에 가두어 놓는다. 나약하고 무기력한 현대인은 수명과 다를 바 없다.

 

가끔 궁금했어. 진짜 네가 누군지. 숨는 놈 말고, 견디는 놈 말고, 네 인생을 상대하는 놈. 있기는 하냐? (P.240)

 

세상에서 도망치는 병이야. 자기한테서도 도망치는 병이고. 그렇지?” (P.291)

 

승민이 수명에게 말하고 보여주는 행동은 체제와 현실에 나약하게 순응하고 온순하게 길들여져 참다운 본성과 삶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린 우리 자신들을 향한 외침이자 일침이다.

 

자신을 조준하고 있는 세상의 총구들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내 심장을 쏘라고. 그래야만 나를 가둘 수 있을 것이라고.” (P.264)

 

나는 팔을 벌렸다. 총구를 향해 가슴을 열었다. 그리고 언덕 아래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나야. 내 인생을 상대하러 나선 놈, 바로 나.” (P.338)

 

이것이 두 명의 정신병자가 독자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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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오케스트라 - 세계 음악계를 이끌어가는 30개 오케스트라의 탄생과 발자취
헤르베르트 하프너 지음, 홍은정 옮김 / 경당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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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의 거장들>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에게 있어 푸르트벵글러와 토스카니니는 신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발터와 클렘페러도 거의 동급의 대우를 받는다. 첼리비다케와 아들 클라이버는 어떤가? 반면 카라얀과 번스타인은 물론이고 아바도, 마젤, 메타, 바렌보임, 래틀에 대해서는 찬반을 넘어서 수준에 대해서 시비를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사람들은 위대한 지휘자들에게 열광적인 관심을 보인다.

 

지휘자는 홀로 존재하지 못한다. 물리적 악기를 직접 다루는 연주자와 달리 지휘자의 악기는 오케스트라다. 오케스트라는 무생물이 아니며, 수십 명에서 백여 명을 넘는 많은 사람들의 집합체다. 베를린 필과 빈 필 등 몇 군데를 제외하면 자체로 독자적 위상을 지닌 오케스트라는 거의 없는 지경이다. 오케스트라는 지휘자의 부속물이 아님에도 말이다.

 

이 책은 30개에 달하는 세계적 수준의 오케스트라들의 일대기다. 애호가들이 실연이나 음반을 통해서 익숙한 거의 대부분의 악단들이 소개되어 있다. 물론 개개인에 따라서는 애호하는 특정 악단이 누락되어 있는 것에 아쉬움을 느낄 수도 있으리라. 내 경우는 앙세르메와 떼어놓을 수 없는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 밤베르크 심포니, 바르샤바 필, 세인트루이스 심포니,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등이 누락되어 있는 게 아쉽기 그지없다. 어쨌든 지면이 한정되어 있고 숫자 제한이 있는 한 모든 이를 만족시키기란 어려운 일이다.

 

1장은 오케스트라의 역사에 대한 개관으로서 악단 명칭의 유래와 변천에 대하여 알게 해준다. 오케스트라의 원 의미는 카펠레와 마찬가지로 앙상블이 아닌 공간 개념이라는 사실, 오케스트라가 카펠레보다 새로운 용어라는 점이 신선하다.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는 악단 명을 통해 역사와 전통에 대한 자부심을 표출하는 셈이다. 2장은 오케스트라가 음악가 인간들의 단체라는 점, 3장은 오케스트라 명칭의 가명과 익명을 다룬다. 본격적인 오케스트라 소개는 4장부터 시작하며, 한 장을 한 오케스트라에 할당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오케스트라의 본질은 합주에 있다. 최고 비르투오조 독주자들을 한데 모아놓는다고 최고의 앙상블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구성원 모두가 다른 이들과 함께 연주하고 싶어 하고 다른 이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는 마음을 품고 있어야 교향악단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단원들이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긴장과 갈등이 생겨난 탓이죠.” (P.321)

 

비슈코프의 발언은 오케스트라의 본질을 갈파한다. 이는 또한 오케스트라에서 지휘자의 역할과 중요성을 나타낸다. 지휘자 없이도 악단이 연주는 할 수 있지만, 발전을 이루지는 못한다. 그래서 많은 악단들이 뛰어난 지휘자를 영입하려고 애쓰며, 실제로 지휘자가 악단을 탈바꿈시킨 사례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때로는 독재자라는 악평을 지닌 지휘자마저 감수하는 것은 대체 불가능한 탁월한 예술성 때문이다.   

 

과거의 거장 지휘자들에게는 독재가 용납되었다. 토스카니니, , 므라빈스키, 라이너, 로진스키 등은 전형적인 독재형 지휘자들이다. 그들 앞에서 단원들은 제대로 얼굴을 들거나 자신의 주장을 표현하기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제는 역사 속의 에피소드로 남았을 뿐이다. 지휘자는 자의든 타의든 민주형으로 이끌 수밖에 없다.

 

지휘자의 과제는 결코 만만치 않다. 지휘자로서의 예술적 요구와 대개는 겸임하기 마련인 예술감독 또는 음악감독으로서의 행정 업무는 양날의 칼이다. 레퍼토리에서도 절묘한 균형 감각이 요구된다. 고전과 낭만 작품에 치중하면 고루하다는 비난을 받게 되며, 현대음악을 자주 소개하면 청중들로부터 멀어지게 되어 입지가 좁아진다. 인간관계는 어떠한가? 단원들, 단장, 정부관료, 후원자 등등 지휘자의 관심과 지원을 필요로 하는 집단이 에워싸고 있다.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은 개개인이 예술가인 동시에, 또한 직업인이기도 하다. 오케스트라의 예술적 수준에 대한 요구는 오디션을 통한 과감한 단원 교체를 동반한다.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명성을 유지하는 명분에서 단원들의 헌신과 고통은 자칫 당연하게 인식된다. 이 지점에서 지휘자의 고충과, 오케스트라와의 갈등, 그리고 힘겨루기는 시작된다.

 

국내 사례를 보자. 지휘자 정명훈이 서울시향을 맡으면서 대대적 파업이 일어났다. 서울시향은 실력이 대폭 향상되고 도이치 그라마폰에서 음반도 출시하게 되었지만, 지금 서울시향의 단원 중에서 과거 단원의 비율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KBS 심포니는 국내 최고의 악단에서 수년 간 상임지휘자 부재로 앙상블이 많이 약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역사가 일천한 경기 필은 악단과 지휘자 간 갈등이 가장 추잡스러운 형태로 표출된 사례다. 부천 필은 지휘자의 뛰어난 역량과 헌신의 결과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그런 면에서 임헌정 퇴임 이후 악단의 행보가 궁금해진다.

 

오케스트라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악단들의 다양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애호가와 청중들의 숫자는 정체 내지 감소 추세다. 음반도 과포화상태다. 고전 레퍼토리만으로는 한계가 있지만, 현대 음악에 대한 애호가는 별로 늘지 않는다. 이 책에 소개될 정도의 전통과 역사를 지닌 오케스트라는 쉽사리 쓰러지지 않겠지만, 미국과 유럽의 중소 오케스트라들은 하나둘 씩 문을 닫는 추세다.

 

이 책에 소개된 오케스트라들에 대한 짤막한 인상기를 적은 메모로 끝을 맺는다.

 

1.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SKD):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악단. 장기적으로 악단을 이끌어주는 상임지휘자의 부재 역사가 안타깝다.

 

2.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LGO): 고풍스런 울림. 콘비츠니의 급서와 쿠르트 마주어, 샤이의 변신에 기대한다. 게반트하우스는 직물회관이란 뜻이다!

 

3. 베를린 필(BPO): 두말하면 무엇 하랴. 푸르트벵글러, 카라얀, 그리고 아바도! 음악 정치학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4. 뮌헨 필(MPO): 전후 프리츠 리거 대신 오이겐 요훔을 선택했더라면 첼리비다케에 앞서 최정상급으로 성장할 수 있지 않았을까.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을 보라. 절대적 공헌자는 물론 첼리.

 

5. 베를린 도이치 심포니: 악단명의 잦은 변경은 자체로 정치적 격변을 대변한다. 프리차이의 때 이른 사망은 악단에게나 애호가에게 모두 안타깝다.

 

6. 바이에른 라디오 심포니(BRSO): 요훔과 쿠벨릭 같은 좋은 지휘자와 좋은 악단이 만나 시너지 효과를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

 

7. 빈 필(VPO): 역시 별다른 설명이 필요없을 자존심. 나치에 적극적인 찬동을 한 흔적은 씻을 수 없는 원죄다. 베를린 필보다 과다한 연유가 궁금하다.

 

8. 빈 심포니(VSO): 만년 2인자. 귀족적 빈 필에 비해 음악의 대중화에 기여한 공로는 높은 평가가 필요하다.

 

9. 취리히 톤할레: 톤할레는 연주회장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궁금증 해결. 솔직히 데이비드 진먼의 최근 노력이 아니었으면 이 책에 수록되기 힘들었으리라.

 

10. 로열 콘서트헤보(RCO): 콘서트헤보 또는 콘세르트허바우도 공연장 이름이었군. 각종 오케스트라 평가에서 최고로 꼽히는 전통의 명문이 아닌가.

 

11. 파리: 드라마틱한 출범 이후 솔직히 두드러지는 존재는 아니다. 프랑스는 앙상블에서 확실히 취약한 듯.

 

12. 할레: 경애하는 바비롤리와 이룬 성공. 마크 엘더의 재기를 기대한다.

 

13. 런던 심포니(LSO): 런던 Big 5의 대표격. 험난한 시절을 겪었음에 놀라다.

 

14. BBC 심포니: 친숙하지 않은 악단. 아드리언 볼트가 키웠음을 알다. 앤드류 데이비스 역시 악단과 함께 은둔의 실력자로 하겠다.

 

15. 런던 필(LPO): 설립자 토머스 비첨. 하이팅크의 선도와 특히 텐슈테트의 휴먼 드라마가 눈물겹다.

 

16. 필하모니아(PO): 월터 레그와 오토 클렘페러. 오케스트라가 독자 생존하기는 참으로 힘들다.

 

17. 로열 필(RPO): 또다시 설립자 토머스 비첨. 지나친 대중성 이미지. Big 5에 포함되기는 부족하지 않는가.

 

18. 체코 필: 탈리히, 안체를, 노이만 그리고 누구?

 

19. 상트페테르부르크 필: 애호가는 레닌그라드 필이 더 친숙하다. 므라빈스키의 사망과 정치 체제의 변화는 악단에 치명타로 작용한다.

 

20. 모스크바 라디오: 로제스트벤스키와 페도세예프. 전자의 차이코프스키와 시벨리우스는 충격적이다.

 

21. 러시아 국립 아카데미 심포니: 스베틀라노프 이후는 어떻게 될 것인가?

 

22. 이스라엘 필: 시오니즘의 산물. 예술이 지닌 화해와 연대의 책무를 생각해본다.

 

23. 뉴욕 필(NYP): 번스타인의 성공, 메타의 성공과 실패. 그리고 악단의 침체

 

24. 보스턴 심포니(BSO): 유럽 전통. 쿠셰비츠키와 뮌쉬의 전성기. 오자와와 오케스트라의 동병상련.

 

25. 시카고 심포니(CSO): 프리츠 라이너와 Living Stereo 시리즈의 아우라. 솔티가 키운 기능성 극대화의 전통은 오래 지속된다. 미국 Big 5의 현재 선두주자.

 

26. 필라델피아(PDO): , 사라져버린 필라델피아 사운드여!

 

27. 클리블랜드: 독재자 조지 셀. 명성은 계속된다.

 

28. 로스앤젤레스 필(LAPO): 젊은 메타, 다시금 젊은 두다멜. 전설은 재현되려나.

 

29&30. NBC 심포니 & 콜럼비아 심포니: 단 한 명의 지휘자를 위해 태어나고 스러져간 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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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2
정유정 지음 / 비룡소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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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작가 정유정 인생의 일대 전환점이 분명하다. 작가의 말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작가는 3년 동안 필력을 쏟아 부으면서 어떻게가 아닌 무엇에 집중하였다. 그 결과는 굳이 1회 세계청소년문학상 수상작이라는 수식이 따라붙지 않더라도 매우 흥미진진한 소설로 이렇게 우리 앞에 나왔다.

 

심사평 중 사건의 개연성이나 리얼리티에 대한 의문은 잠시 제쳐두자. 작가가 리얼리즘에 입각해서 글을 쓰겠다는 선서를 하지는 않았으니. 그의 후작 중 <7년의 밤>은 한층 처절한 리얼리즘적 허구를 구현하였으니 오히려 정유정의 작품 세계의 중요한 특성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관념이 아닌 사건과 행동에 무게중심을 놓고 여지를 주지 않고 파상적으로 몰아붙이는 저돌적 전개.

 

이 작품은 로드 소설이다. 열다섯 살 소년과 소녀가 낯선 할아버지와 개 한 마리와 함께 수원 옆 Y읍에서 광주를 거쳐 임자도 옆 안개섬까지 이르는 여정과 도중에 발생한 사건이 핵심적 스토리라인이다. 5명의 사람과 동물은 제각각 다른 동기와 목적을 숨기고 그룹을 이루고 있으며 더구나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야 하니 여행길이 순탄할 리 없다.

 

이 작품은 성장 소설이다. 승주와 준호, 정아는 모두 부모와의 관계에서 갈등과 상처를 입은 청소년들이다. 아빠를 잃은 준호, 아빠를 잃는 편이 차라리 더 나았을 정아는 외면적으로 상처가 드러나지만, 부모가 막강한 재력의 소유자인 승주는 극성스러운 엄마로 인해 오히려 드러나지 않는 갈등을 지닌다. 여행과 고생을 함께 겪으며 아웅다웅하던 그들은 서서히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고 배려의 염을 품게 된다. 담금질이 쇠를 강하게 하듯 험한 여로는 아이들을 내면적으로 단단하게 단련시키는 것이다.

 

상처 입은 사람 또 한 명을 빼놓을 수 없으니 할아버지다. 걸쭉한 남도 방언을 뱉어내는 정체불명의 할아버지는 이들의 남도행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결정적 역할을 하면서도 한 점 의혹을 남긴다. 후반에 드러나는 참혹한 개인사는 개인적 수준의 아픔을 넘어서 시대적, 제도적 차원의 비극으로까지 이어진다.

 

여기에 1980년대의 짙은 시대적 그림자를 작품 전반에 드리우고 있으니 준호의 남도행도, 아빠의 실종도, 할아버지가 딸을 잃게 되는 계기도, 일행이 광주를 비롯한 행로에서 계속적으로 맞닥뜨리는 위험도 광주 항쟁의 연장선상이다. 청소년 소설치고는 너무 무겁고 어두운 제재와 배경을 도입한 것은 아닌가 우려되면서도 한편으로 주요 인물들이 청소년이라고 해서 굳이 청소년 소설이라고 치부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작가는 이 점을 의식해서인지 의도적으로 작품에 경쾌하고 해학적인 요소를 반영하여 분위기를 좀 더 밝고 가볍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준호와 승주의 다툼, 할아버지의 걸쭉한 입담과 행동, 루스벨트와 준호 사이의 어처구니없는 일화 등등. 투철한 목적의식과 사명감을 지니며 제법 머리회전도 빠른 준호가 루스벨트를 포함한 일행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면서 겪는 고초와 되씹는 자조는 그래서 독자에게 소량의 동정심과 다량의 웃음을 제공한다.

 

루스벨트는 발성 연습을 하듯 목을 길게 빼고 짖었다. 선물이야. 나는 또 한 번 심한 상처를 받았다. , 내가 이걸 기쁘게 주워 먹을 거라 믿는단 말이지? 그것은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개뼈다귀 같은 선물이었다.” (P.159)

 

루스벨트는 신나게 구령을 붙였다. , , ! 개 소리를 듣자 타령이 절로 나왔다. 중대 임무를 부여받고 길을 떠난 거물 김준호가 개 소리에 발맞춰 뛰며 수레나 밀야 하다니. 무슨 이런 개소리 같은 일이 다 있는가 말이다.” (P.287)

 

처음으로 돌아가서 작가가 어떤 심경과 자세로 이 작품을 썼을까 상상해 본다. 그것은 처절한 자기부정과 각성에서 비롯하였다. “폼 나게 쓰고 싶다는 어떻게에 대한 집착은 나를 궁지로 몰고 갔다......머릿속의 무엇들은 죄 사라져 버렸다.”(P.388).

 

작가는 펜이 이끄는 대로 조금씩 전진해간다. 자칫 진지하거나 무거워질만한 요소는 철저히 다듬는다. 이야기는 최대한 흥미진진하면서도 극적으로 터무니없을 것 같은 모험적 사건들-철교 횡단과 따이한 농원 등-도 삽입한다. 또래 청소년들이라면 공감할 성적 요소들 살짝 터치한다. 독자 못지않게 작가도 쓰는 내내 왠지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것 같다.

 

최근 들어서 소설의 이야기적 재미에 물씬 빠져든 경우가 과연 있었던가. 제아무리 소설이 다양한 가면과 치장을 하더라도 허구이며 이야기라는 본원적 태생을 외면할 수는 없으리라. 이 점을 간혹 작가들이 놓치고 새롭고 현학적인 기법과 언설에 몰두하는 우를 범한다. 그런 스타일에 적합한 작가들도 물론 있지만 자기 스타일을 잃고 유행에 휩쓸리는 것은 바람직하다. 이 점에서 작가 정유정은 현명하다. 그의 성공적인 후작들이 여실히 입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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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오래된 미래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원작자, 박희은 지은이, 원유미 그림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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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를 읽은 후 같은 저자의 어린이용 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느낀 감정의 울림과 파장을 아이도 같이 느끼기를 바랬다. 한편으로 궁금과 우려가 교차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저작을 어린이용으로 변용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 일단 노르베리 호지가 직접 어린이용으로 쓴 책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원작과는 체제와 구성, 형식 등에서 상당한 차이점이 보였다. 출판사 측에서 원작의 이름을 빌려 어린이용으로 책을 내고 저자에게 인정받은 게 아닐까 싶다. 즉 저자의 직접적인 손길과 호흡을 원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반쯤은 실망한 채로 펼쳐든 책은 첫 부분에서 당혹의 연속이다. 노르베리 호지의 라다크 체험기는 아동용 소설 형식으로 탈바꿈하였다. 주인공의 이름은 헬레나, 나이는 열두 살. 헬레나는 아빠와 이혼하고 라다크에 푹 빠져버린 엄마 제니를 만나 따지려고 스웨덴에서 라다크 행을 감행한다. 헬레나는 소남과 데스키트 가족과 함께 생활하면서 동갑내기인 돌마와 친구가 된다...잠깐만, 내가 고대했던 원작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아이들에게 원작의 폭넓으면서도 깊이 있는 지식과 사고를 모두 이해시키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저자가 주장하는 핵심적 내용만이라도 깨닫고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다면 대성공이다. 중요한 것은 절대 따분하고 지루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주인공으로 독자들과 비슷한 또래를 설정하고 재밌는 이야기 형식을 채택하여 나 또는 우리와 멀리 떨어진 현실이 아니라는 점을 각인시킬 필요도 있다. 앞선 실망은 원작을 읽어본 소위 성인의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래된 미래>가 무슨 책인지, 저자가 누군지 전혀 알지 못하는 어린이들로서는 원작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법이다. 오직 자신이 읽는 책이 어떤 내용인지 충분히 알며, 재밌게 가슴에 다가올 수 있다면 그것으로 대성공이리라.

 

이런 관점에서 내용을 찬찬히 훑어가면 제법 충실하게 원작의 사상과 주장을 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가축의 똥을 말려서 땔감으로 쓰고, 가장 심한 욕이 숀 찬’(화를 잘 내는 사람)이라는 것 하며, 무엇보다 사람들 상호간의 배려와 양보의 미덕이 그러하다. 이웃의 보리밭에 들어가서 보리를 망친 쪼를 이웃사람이 다치게 한 경우의 고바의 판결, 방을 추가로 빌리기 위해서는 원래 묵고 있던 집인 데스키트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점 등.

 

우린, 모두 함께 살잖아. 그게 다야. 서로 조금만 양보하면 다 행복할 수 있으니까.” (P.63)

 

라다크 사람들에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거든.” (P.66)

 

전통 점성가인 온포가 헬레나와 돌마를 보고 라다크 하늘의 두 개의 별이라고 알려주는 대목은 유치하지 않고 오히려 가슴 찡하게 다가온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소남네 가족은 라다크의 중심지인 레로 이사를 간다. 소남은 가족을 위하여 많은 돈을 벌고 싶어 한다. 그의 소망은 가족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 있다. 시골인 헤미스 마을에서는 돈을 벌 기회가 거의 없다. 경제개발 초기에 수많은 농어촌 사람들이 서울로, 서울로 몰려들던 현상을 복기하면 충분하다. 그네들은 어떻게든 서울로 상경하여 서울특별시민으로 편입하고 싶어 하였다. 무수한 판잣집과 달동네가 그렇게 하여 만들어졌던 것이다. 레의 뒷골목처럼, 열악하고 꾀죄죄한 처지를 무릅쓰고. 레의 학교에서는 전통을 부정하고 서구식 문물에 절대적 우위를 둔다. 그것이 뒤쳐진 라다크를 개발시키기 위한 비법으로 알고 있다. 농약은 아무런 위험과 사용주의 안내도 없이 무작위로 남용하여 사람과 경작지를 오염시키며, 생활의 주체성을 빼앗긴 여성들은 소극적이고 무능력한 존재로 퇴락하게 된다. 이 모든 게 소녀 헬레나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뿐이다. 라다크 사람들이 닮고 싶어 하는 서구 문명과 문화는 완벽하지 않으며 무수한 사회적, 심리적 문제점을 양산하고 있다. 라다크 사람들이 자기들의 고유의 미덕과 문화를 존중하고 유지하면 기쁘겠다.

 

라다크 프로젝트는 에끄니끄 박사의 마법 쇼를 통해 데스키트와 소남을 변모시키고 신축 호텔을 라다크 전통식으로 짓기로 한다. 호텔 이름이 헬로 라다크에서 줄레 라다크로 바뀌는 점도 시사적이다. 라다크 사람들은 서서히 자신들의 장점과 미덕을 깨닫게 된다. 많은 서구인들이 라다크를 여행하고 부러워하는 이유는 자신들에게 없는 것이 그들에게 있음을 알고 있음에서이다.

 

라다크 사람들은 마음 깊은 곳에 행복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P.199)

 

그것은 돌마가 말한 대로이다. 야크 털신 대신 운동화를 부러워하고, 할머니가 구워주시는 빵보다 레의 빵집에서 파는 빵이 더 맛있다고 여기지 않게 된다면, 라다크 전통 옷을 입고 라다크 노래를 부르는 것을 창피하게 여기지 않게 된다면 라다크는 더욱 건강하고 행복해질 것이다.

 

우리는 라다크보다 훨씬 멀리 지나쳤다. 서구식 주택과 아파트가 익숙해졌고 한복은 평생 특별한 날에만 어쩌다 입는 의상으로 전락하고 청바지와 운동화, 양복과 구두가 옷장과 신발장에 가득하다. 안락과 편리를 무한정 추구하다 보니 정작 귀하고 소중한 것이 거의 소멸되어 버렸다. 무엇보다 무서운 점은 소멸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인식 못하는 데 있다. 그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이런 점에서 라다크는 오히려 운이 좋은 사례이다.

 

선입견을 담은 실망에서 출발하였지만, 어린이들에게 매우 좋은 책임을 인정해야겠다. 흥미를 잃지 않도록 노력하면서도 핵심적 주장을 빼놓지 않고 담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비단 어린이뿐만 아니라 원작을 읽어보지 못했거나 재미를 느끼지 못한 성인 독자들에게도 충분히 권할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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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암 창비아동문고 19
정채봉 지음, 이현미 그림 / 창비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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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작가 정채봉의 작품집이다. 표제작 오세암은 영화로도 제작되어 유명세를 탔지만 그 외에도 수록된 23편의 단편동화들 모두가 음미할 가치가 있는 작품들이다. 4부 구성인데, ‘오세암은 제4부에 해당된다.

 

1부의 동화들은 흰구름을 화자로 삼고 있다. 경계 없이 이리저리 정처 없이 떠도는 구름은 예부터 사연이나 소식의 전달자 역할을 하였다. <메가두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특히나 흰구름은 먹구름과 달리 맑고 경쾌하며 깨끗하고 선하며 아름다운 이미지를 지닌다. 이는 작가의 모토라고 할 수 있는 맑은 이야기, 보기에 좋은 것”(P.3)의 구현이다. 평화와 기쁨, 행복을 여기에서 얻을 수 있다.

 

작중에서 흰구름의 말은 곧 작가가 독자에게 들려주고 동감해주기를 바라는 강한 바람이 깃들어있다.

 

나는......수많은 일들 가운데서 맑은 것만 가려서 보고 있어.” (‘강나루 아이들’)

넓은 하늘을 온통 내 흰구름으로 가득 덮고 싶은 날이었어.” (‘강나루 아이들’)

나는 이 아름다움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높은 산 위로 올라갔어.” (‘꽃그늘 환한 물’)

기쁨으로 가득 찬 내 가슴이 뭉게뭉게 부풀어오르는 한낮이었어.” (‘풀꽃 꽃다발’)

내 가슴은 평화로 가득 출렁거리곤 하지.” (‘하늘나라 우체부’)

교통 순경도 그리고 그의 윗사람도 함께 너털웃음을 웃었지. 나도 기분이 좋아 뭉클뭉클 웃었고.” (‘신호등 속의 제비집’)

 

1부의 7편 외에도 제2부의 천사의 눈’, ‘모래성’, 3부의 진주와 제4부의 오세암에도 흰구름의 이미지는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정채봉의 동화들은 종교적 소재와 배경을 삼는 이야기가 제법 있다. 먼저 불교의 소재. 1부의 꽃그늘 환한 물’, 2부의 바다 종소리’, 그리고 제3부의 오세암이 여기에 해당한다. 기독교의 소재는 더 빈번하다. 1부의 풀꽃 꽃다발’, ‘저 들 밖에서’, 2부의 ’, ‘성모님의 유치원’, ‘천사의 눈’, 3부의 진주’, ‘별이 된 가시나무’.

 

작가의 종교적 요소의 도입은 특정 종교에 대한 관심과 신봉의 차원은 아니다. 종교 일반이 지향하는 생명 사랑과 존중,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심, 선에 대한 추구 등의 가치관은 사람들의 삶을 보다 바르고 따뜻하고 풍성하게 하는 면에서 근원적 동질성을 지닌다. ‘꽃그늘 환한 물오세암’, ‘풀꽃 꽃다발성모님의 유치원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작가의 동화들을 읽으면 무척 기분이 좋아지고 흐뭇해진다. 여기에는 등장인물의 성격과 행동에도 일체 악한 구석이 없는 연유도 있다. 장편이라면 평면적으로 흐를 수 있지만 단편이기에 흠이라고 할 수 없다. 게다가 작가도 스스로의 작품 성향을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은가.

 

꽃그늘 환한 물의 스님의 언행의 아름다움, ‘풀꽃 꽃다발의 아름답고 고귀한 꽃다발은 물론, ‘위문 온 매미의 김 일병을 본다. 독자마저 절로 행복해진다.

 

크지는 않지만 깊은 산속에서 피는 풀꽃 같은 눈빛이랄까, 아무튼 병영에서는 보기 드문 고요한 눈이었어.”

날아오르는 매미, 팔랑거리는 나뭇잎 그리고 휘파람을 부는 김 일병. 이들보다 행복한 이들이 어디 있을까.”

 

씽씽 칼바람이 부는 광장 모퉁이의 장님 부부와 이를 돕는 신사와 부인 간의 대화(‘저 들 밖에서의 거들어 드릴까요? - 환한 얼굴 크리스마스 인사 감사합니다)는 각박하고 냉엄한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요인을 새삼 되새기게 한다. 가난한 자, 소외된 이웃에 대한 관심은 성모님의 유치원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하느님은 저 이름없는 꽃일지도 모른다.” (‘성모님의 유치원’)

 

그렇다면 풀꽃 꽃다발거울 나라의 풀꽃은 무명과 소외의 은유를 넘어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순수와 자연의 상징이 아닐는지.

 

하늘처럼 새처럼 실제의 문도 마음의 문도 활짝 열어놓으면 병이 안 생길 것이라는 이야기(‘’)와 바깥 세상은 껍데기에 불과하고 진짜 세상은 마음 세상이라는 의견(‘거울 나라’)까지 작가가 작중에서 함축하는 메시지의 스펙트럼은 폭넓기 그지없다. 2부의 모래성에서 내가 눈물을 끝내 글썽이는 이유는 슬퍼서가 아니라 참된 아름다움에 마음이 정화되어서이다. 참된 사랑이란 무엇이겠는가? 은하처럼 자기를 잊고 헌신하는 것이리라.

 

3부는 동물과 사물의 시선으로 바라 본 인간의 모습이다. 우화라고 해도 무방하다.

 

은하수의 노래에서 엿보이는 인형의 운명은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를 떠오르게 한다. 피 토하는 청년과 로사 언니의 모습은 전란 직후 대조적 사회 현실을 살짝 건드린다. 로사 언니와 재회를 기다리다 죽음을 맞이한 할아버지와 아버님의 은혜를 뒤늦게 깨달은 로사 언니 중에 행복한 이는 누구일까?

 

돌아오는 길은 성 나자로 마을의 옹달샘에서 착상을 하였을 성싶다. 교만한 성수는 외관상 보기 좋은 길, 넓은 길보다는 바위 많은 비탈길과 좁은 길이야말로 겸허히 하늘의 뜻을 따르는 길임을 깨닫게 된다. 어찌 성수만 해당되겠는가.

 

진주에서 백합은 아름다운 육신을 상징한다. 백합이 내면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되면서 죽게 될지도 모를 고난을 겪게 되지만 대신 진주조개가 될 가능성도 지니게 되었다. 마음속의 진주는 희망이다.

 

행복한 눈물은 비장한 우화다. 문득 작품이 쓰인 당대 사회현실을 상기하게 되자 앵무새의 절규는 천근의 울림을 지닌 다짐이자 경고로 이해된다.

 

헛보고, 헛살지 말고 바로 보고 바로 살아야겠다.”

갇혀서 살수록 당당해져야 돼......비굴하게 아부해서 살찌고 사느니보다는 적게 먹더라도 진실되게 떳떳이 사는 삶이 더 소중한 것 아니겠어?”

 

선배 앵무새는 부조리한 현실에 순응한 아리스티포스라면, 이 앵무새는 시조새와 같이 양심을 지킨 디오게네스이다. 비록 현실의 문제의 새는 맞아서 죽더라도 시조새의 말처럼 진실의 횃불이 밝히는 날, 우리 함께 부활하여 저 푸른 하늘을 훨훨 날자꾸나.”

 

다른 동화들이 분량상 장편(掌篇)에 가깝다면 오세암은 전형적인 단편으로 분류될 수 있다. 그만큼 이 동화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함을 알 수 있다. 부처가 되는 다섯 살 길손이는 세속의 눈으로 보면 장난꾸러기 철부지에 불과하다. 길손이는 타고난 천성에 따뜻한 마음씨를 갖추었고 순수한 마음을 더해 마침내 성불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길손이의 성품은 가을아침 물빛처럼 시린 눈총”(P.166)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더욱이 길손이의 생과 사에 동행하는 친구가 흰구름이라는 점, 작가에게서 흰구름의 막중한 상징성을 염두에 두면 좋을 것이다.

 

무엇보다 여늬 사람들과는 다른 길손이의 마음씀씀이다. 2부의 바다 종소리에서 아이가 바라보는 부처님은 피곤해 보인다. 빚쟁이마냥 사람들은 부처님에게 복과 명과 높은 자리를 끝없이 간구한다. ‘오세암에서의 부처님도 마찬가지다.

 

부처님도 참 성가시겠다. 그지, 누나? 사람들이 자꾸자꾸 조르기만 하니까. 나 같으면 부처님을 좀 즐겁게 해드리겠는데......에이......” (P.171)

 

그림 속 보살님을 소리 내어 웃게 하고 싶어 방귀를 뀌고 시치미를 떼는 길손이, 마음을 다해 부르면 보살님, 즉 엄마가 꼭 오신다고 믿는 길손이. 관세음보살은 이렇게 길손이를 평한다.

 

이 어린아이는 곧 하늘의 모습이다. 티끌 하나만큼도 더 얹히지 않았고 덜하지도 않았다. 오직 변하지 않는 그대로 나를 불렀으며 나뉘지 않은 마음으로 나를 찾았다.” (P.196)

 

작가의 어휘는 섬세하게 조탁되고 정제되어 있다. 마치 시어마냥 미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예민한 문장은 맑고 깨끗한 감성을 담고 있다. 통상의 동화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지극히 순도 높은 예술적 분투노력의 산물임을 알게 한다. 독자는 이야기 한 편 한 편을 읽어 나가며 절로 마음이 순수해지며 정화되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어른을 위한 동화로 볼 수도 있는 게 이 깊고도 투명한 떨림을 아이들이 깨우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드는데 기인한다. 되풀이하여 읽어도 물리지 않는 옹달샘의 약수를 마시는 청량감이 충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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