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 학고재 산문선 16
최순우 지음 / 학고재 / 200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로 생전에 누리지 못한 압도적인 대중적 인기를 사후에나마 누리는 혜곡 최순우 선생은 진정 행복한 분이다. 그의 성북동 옛집은 시민문화유산 1호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한국미의 아름다움을 지속적으로 설파한 공이 보답을 받는 셈이고 우리 것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매우 성장하였음을 보여준다.

 

이 책의 의의와 성격을 출판사에서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에서 활짝 피어난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엿본 독자라면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에서 드디어 우리 것을 아름답게 꽃피우게 한 마음씨를 알게 될 것이다.” (책머리에서)

 

이 책은 앞선 책과 짝을 이루면서 미진하였던 저자 자신의 체취를 좀 더 짙게 드러낸다. 앞선 책에서 한국미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절치부심하며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독자에 따라서는 분량이나 소개되는 유적과 유품의 양에 힘겨워하기도 하고 글쓰기의 초점이 사물지향에 가까웠다는 인상을 받았다. 여기서는 어깨에 힘을 빼고 다소 느긋한 마음가짐과 잔잔한 어조로 우리 옛것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자신의 개인적 심경을 토로하거나 신변잡기적 일화도 소개하여 인간지향에 근접한다.

 

예전보다는 외견상 상황은 약간 나아졌지만 여전히 우리 것에 대한 진지한 모색과, 특히 실생활에서의 반영은 요원한 분위기다. 우리의 의식주 문화는 이미 전통보다는 서구에 친연성을 느낀다. 우리말을 갈고 닦으려는 노력보다는 순수한 우리말이 외래어에 의해 멸실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해야 할 판이다. 옛것은 동물원과 박물관에서 보는 신기하고 기이한 존재일 뿐 그것이 오늘의 나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을 가질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그들 자신 속에 도사리고 앉은 마음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전통을 들고 나오는 작가들이나 전통을 외면하는 작가 또는 전통에 반발하는 작가 등등이 있지만, 과연 한국미의 전통이나 동양미의 전통을 깊이 체험하고 전통을 평가한 사람이 그 중에 얼마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앞서는 것이다.” (P.27)

 

옛것의 미학을 고답적으로 간주하는 견해는 과거와 단절시키는 위험성을 지닌다. 우리의 도자기 문화를 보면 대개는 고려 시대의 비색 청자와 상감 청자의 고고한 품격을 극상으로 치고 이후로는 쇠퇴하는 흐름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분청사기는 고려청자의 퇴화된 유물이며, 조선 백자는 평민 수준으로 하향화된 것으로. 기술적 관점에서는 이런 시각도 분명 가능하지만, 고려자기와 조선자기는 향수 계급(귀족과 백성)과 용도(감상과 실용) 등에서 분명한 차이점을 지닌다. (고려자기와 달리) 건강하고 소박한 아름다움, 현대에도 통용될 만한 미적 의의라는 점에서 조선 자기는 상대적으로 우월하다. 저자도 이렇게 상찬한다.

 

조선 시대 백자 항아리들에 표현된 원의 어진 맛은 그 흰 바탕색과 아울러 너무나 욕심이 없고 너무나 순정적이어서 마치 인간이 지닌 가식 없는 어진 마음의 본바탕을 보는 듯 한 느낌이 있다.” (P.157)

 

이 분청사기에서 가끔 볼 수 있는, 가슴 밑창부터 후련해지는 멋과 아름다움은 우리 도자사뿐만 아니라 동양 도자사에서도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색다른 아름다움으로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세계인들의 시각에 새로운 안복을 누리게 해 주고 있다.” (P.161)

 

우리 옛것을 백날 쳐다본다고 해서 새삼 숨은 아름다움이 홀연히 드러나지는 않을 것이다. 교육과 언론의 감화를 통해 관념적으로 한국미의 특성에 대해 줄줄 외울 수는 있겠지만 진실로 마음의 감흥이 촉발된 경우는 고백하면 거의 없다.

 

실상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이해하는 길은 도자기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에 있으며 도자기의 마음이란 그릇에 나타난 아름다움의 의지를 말한다. 이러한 의지는 바라보고 또 만져보고 조용히 대좌하고 있으면 자기들 스스로가 그 아름다운 비밀의 문을 조금씩 열어 준다.” (P.51)

 

위 대목은 비록 도자기를 대상으로 쓴 글이지만, 건축과 회화 등 예술과 문화 전반을 아울러 통용될 수 있다. 애정과 관심을 기울여 마음을 이해하고자 애쓴다면 사물뿐만 아니라 사람의 진정마저 깨닫게 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옛것에서 찾을 수 있는 아름다움의 연원은 삶과 자연을 대하는 선인들의 마음가짐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삶의 희노와 애락은 인간이라면 뿌리칠 수 없는 요소이므로 자연스럽고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대자연에 비추어 보면 인간은 미미하고 찰나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어찌 겸손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선인들은 전통미에서 철저한 정밀성과 공교로운 세밀함을 추구하지 않았다. 바싹 다가서서 감상하기 보다는 몇 발짝 떨어져서 전체적인 조화 속에서 풍겨 나오는 아름다움을 높이 평가하였다는 것이다. 동양의 산수화에 대해서도 저자는 자연과 어울린 인간의 가치를 설명해주고 있다.

 

동양의 풍경화란 서양 풍경화에서처럼 화가가 바라본 자연의 일각을 묘사한 그림, 즉 바라보는 풍경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자기가 들어가서 생각하고 느끼고 또 두루두루 돌아보며 즐기는 입장을 택한다는 말이 된다.” (P.197)

 

많은 내용이 앞선 책과 밀접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유산에 대한 작품 분석보다는 거기에서 찾을 수 있고 느꼈을 때 갖게 되는 아름다움 자체에 방점을 두고 있다. 더구나 저자가 생전에 마주치고 헤어졌던 고인(김환기, 장욱진, 전형필)에 대한 추억담, 한국전쟁과 이후의 어렵고 궁핍했던 시절에 얽힌 일화들(특히, 바둑이 이야기)은 회고와 애상의 정취를 드리우고 있어 전통미의 옹호자로서가 아닌 인간 최순우 선생을 보다 가깝게 이해하도록 해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은 후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보았다면 안목의 지평이 보다 넓어지고 심안도 깊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분량 면에서나 옛것의 아름다움을 대하는 마음의 태도를 갖추게 될 수 있는 점 등에서 더욱 그러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렐 차페크 평전
김규진 지음 / 행복한책읽기 / 201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카렐 차페크 평전이 나왔다는 소식을 뒤늦게 알고 부랴부랴 책을 펼쳐든다. 여전히 편향되고 척박한 출판계 풍토에 동구권의 그다지 인기 있는 작가도 아닌 카렐 차페크에 관한 책이라니! 차페크에 대한 책을 기대했다면 다소간 실망할 수 있겠다. 엄밀히 말하면 이 책은 평전이 아니다. 전체 12개의 장 가운데 그의 삶과 문학 전반을 소개한 것은 제1장 하나뿐이며 분량 상으로도 1/10에 불과하다. 그러면 나머지 장은 무슨 내용이냐고? 차페크의 주요 작품에 대한 작품론을 담고 있다. 고로 정확히 하자면 카렐 차페크 연구또는 카렐 차페크의 문학정도가 적합하다는 개인적 의견이다.

 

2장부터 제12장까지의 작품론은 각각의 연구 논문을 다듬어 수록한 것으로 보여 차페크의 작품을 읽지 않은 초심자가 접근하기는 다소 어려운 편이다. 이 책을 통해 차페크의 세계에 다가가려는 독자보다는 그의 개별 작품을 읽은 독자가 종합적이고 전반적인 작품세계를 조망하기에 오히려 도움이 될 듯 하다. 다행하게도 소개된 작품들 가운데 국내에 번역 출간되지 않은 작품은 위경 이야기들어머니’, 단 두 편뿐이다.

 

카렐 차페크가 얼마나 탁월한 작가인지 의심하는 시각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와 동시대의 작가로서 카프카와는 달리 당대에서부터 전 유럽에서 각광을 받았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노벨문학상 후보로 언급되었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나치독일과의 정치적 역학관계 때문에 수상을 하지 못하였다고 하며, 히틀러의 체코 침공 직전에 눈을 감았다고 하니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겠다. 수용소에서 세상을 떠난 형 요세프의 운명에 비한다면 말이다. 국내 출판계에서 산발적이지만 그의 작품들이 제법 여러 편 소개된 점은 정말로 다행이다. 야로슬라프 하셰크의 유명한 병사 슈베이크 이야기는 삼십년 전에 번역된 이후 감감무소식이다.

 

차페크 문학의 양대 축은 소설과 희곡이다.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고자 할 경우 희곡을 통해 발표하였으며, 내적인 성찰과 모색에 중점을 두는 경우 소설 형식을 사용하였다. 양대 축의 접점이 바로 소설 <도롱뇽과의 전쟁>이다. 저자도 수차 지적하였듯이 차페크 문학의 테마는 인간성의 탐구와 옹호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그의 소위 철학소설 삼부작으로 결실을 맺었으며 후자는 일련의 희곡들과 도롱뇽을 제재로 한 소설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차페크는 상대주의적 인간관을 지녔다고 한다. 나와 남을 상이한 존재이므로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서로 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절대적 인간유형을 우상시하고 강요한다면 참다운 인간성은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인간성을 위협하는 요소는 도처에 편재하지만 차페크 당대에 그는 과학기술의 전례 없는 급속한 발전과,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전 세계를 휘감는 자본주의의 심화, 나치독일을 필두로 한 전체주의 체제의 팽창에 커다란 경계심을 지녔다. <RUR><도롱뇽과의 전쟁>에서 과학기술과 자본주의를 주로 삼고 전체주의를 부로 삼았다면, <하얀 역병><어머니>는 전체주의 위협에 대한 각성을 주로 삼고 있음이 확연히 드러난다. <마크로풀로스의 비밀> 또한 영생의 묘약이라는 기술적 요소에서 전자와 이어진다고 하겠고, <곤충 극장>은 포괄적 인식을 개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인간과 인간의 생명 그리고 운명은 자연스럽고 주어진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초월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을 훼손시킨다.” (P.211)

 

차페크는 일관되게 인간 본성의 발견과 회복을 주창한다. 그가 주목한 인간성은 거창하고 추상적인 특별한 철학적 의미가 아니다. 가장 평범하고 소박한 삶에 진실한 본성이 자리 잡고 있다. 작가가 살던 당시는 유럽 세계에서 전대미문의 혼란기였다.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체코는 독립 국가를 이루었지만 정세는 여전히 어수선하고 세인들의 가치관도 붕괴되었다.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전체주의 세력이 사회적 혼란을 틈타 급속도로 세력을 팽창하고 있었다. 작가의 감각은 더 큰 인간성 말살이 도래할지 모르는 위험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는 듯하다.

 

그의 작품 중 순문학적 관점에서 재삼 음미할 가치가 있는 것은 역시 <호르두발>, <별똥별>, <평범한 인생>으로 구성된 철학소설 삼부작이다. 각각은 자체로서도 매우 문학적 형상화가 탁월하지만 삼부작을 종합적으로 반추해보면 그의 뛰어남이 배가됨을 알게 된다. 호르두발은 철저하게 고독하고 소외된 인물이다. 미국에서도 그러하지만 귀향 후 가족과 이웃에게도 마찬가지다. 독자는 호르두발의 심경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는 자신의 속내를 쉽사리 용납하지 않는다. 죽은 이후에도 그의 진정한 사인을 알 수 없는 것처럼. 호르두발, 당신은 어떠한 사람인가?

 

<별똥별>에서 호르두발에 상응하는 인물은 비행기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환자 X. 그의 정체와 삶의 이력에 대해서 병원에 있는 사람들은 궁금해 하고 제각기 자신만의 방식을 통해 환자 X의 진실을 추론한다. 간호사 수녀는 꿈을 통해, 환자 천리안은 인식의 동화를 통해, 그리고 시인은 이야기의 창조를 통해. 여러 사람이 재구성한 그의 삶은 놀라울 정도로 유사성을 지닌다. 일말의 진실을 내포하지만 온전한 참은 아니며 진실과 진실이 아닌 수준과 경계를 아무도 알지 못한다. 환자 X, 당신의 진정한 모습은 무엇인가?

 

<평범한 인생>은 가장 심오하다. 화자는 자서전을 통해 스스로의 삶을 회상할 때 지극히 평범한 인생이었음을 고백한다. 돌연 후반부에서 소설을 소용돌이친다. 또 다른 내면의 목소리는 화자에 대립한다. 그에 따르면 화자의 삶은 전혀 평범하고 평탄하지 않았으며 무수한 갈등과 억압과 타협이 깃든 끔찍한 삶이었다는 것이다. 개인의 인생은 단일한 자아의 삶이 아니라 다수의 상이하고 가능한 삶들의 집합으로서 외관상 평범한 인생일지라도 기실은 총체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차페크는 삶에 있어 진실은 무엇인가하고 질문을 던지고, 개인의 진정한 정체성의 존재와 발견 가능성을 탐문한다. 작가는 개인의 삶이, 표면적으로 평범하고 단순한 인생일지라도 자아의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구현한 실체임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자신은 물론 타인의 진정한 실체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편린이나마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데 즉자와 타자를 연결하는 대자(對自)의 개념에 근접한다.

 

진테제라고 하는 <평범한 인생>에 나타나는 인간 성격에는 단일성과 복합성이 존재한다. 그 진테제는 복합성 속의 단일성이며 우리들 안에 있는 그 인간의 복합성이 바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P.115)

 

차페크의 작품에는 미스터리가 많이 반영되어 있으며, 특히 범죄의 수사와 재판에 관련된 소재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호르두발>은 전형적이지만, 나머지 두 작품도 유사성이 깊고, <마크로풀로스 사건>도 재판과 관련된다. 그의 단편 모음집인 두 호주머니 이야기에 수록된 작품들도 이후 그의 작품 경향을 짐작케 할만한 요소들이 그득하다. 어떤 범죄적 사건이 발생할 때 수사와 재판과정에서 국외자는 표면화된 외양과 결과만을 가지고 사건을 판단한다. 객관적 증거는 내면적 심리관계를 간과하기 쉽다. 우리는 호르두발의 진심, 그의 아내와 하인 슈테판의 내면을 결코 알지 못한다. 진실은 어디에 있고 정의는 무엇인지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1차 세계대전의 혼란기를 겪은 후 미국에서는 소위 길잃은 세대혹은 잃어버린 세대가 득세하였다. 혼란이라면 미국보다도 격심한 체험을 한 게 당대 유럽이다. 더욱이 그들에게 혼란은 완료형이 아니라 여전히 확대진행형이다. 기존의 가치관이 전복되고, 신뢰하였던 물질적, 정신적 토대가 뿌리째 흔들리면서 인간성 말살의 극단적 체제가 임박해 오는 현실에서 남달리 예민한 작가가 체득하고 지향한 글쓰기의 과제와 목표는 차페크에게서 뚜렷이 실현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산호섬 파랑새 클래식 이삭줍기주니어 6
로버트 밸런타인 지음, 박정호 그림, 이원주 옮김 / 주니어파랑새(파랑새어린이)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로빈슨 크루소의 청소년 버전이라면 금방 이해가 될 것이다. 십대 뱃사람 세 명이 무인도에 난파하여 겪는 체험과 모험을 담고 있는 이야기책이다. 시기적으로도 디포와 스티븐슨, 베른을 잇는 중간 무렵이다.

 

전반부에서 배가 폭풍우에 난파하여 겨우 세 명의 어린 뱃사공만이 남태평양의 이름 모를 산호섬에 떠밀려온다. 제일 연장자이고 경험 많은 잭을 중심으로 해서 무인도에서 그들만의 생존을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인다. 무인도 생활은 예상보다 비교적 안락하고 즐겁기조차 한 것이었으니 낯익은 문명세계로의 복귀라는 염원만 아니었다면 그들은 그곳에 정주하는데 불만이 없을 정도이다. 산호섬을 샅샅이 탐험하고, 해저 동굴도 발견하며, 앞바다의 펭귄섬까지 항해하는 모험도 감내한다. 앞선 로빈슨과 마찬가지로 열대의 무인도는 풍요롭다. 그들은 별 수고를 하지 않아도 해산물과 빵나무 열매, 그리고 야생 돼지고기를 구할 수 있다. 기후와 일기도 쾌적하여 지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소박하나마 상상 속의 이상향이라고 불릴 만하다.

 

소설이 이렇게 내내 전개된다면 주인공들은 행복할지 모르지만 독자들은 금방 지루해하기 마련이다. 후반부에서는 파란만장한 모험담이 벌어진다. 우선 주인공들이 섬에서 원주민 간 전투에 개입하여 몰살당할 뻔했던 한 부족을 구해준다. 이어 주인공 랄프가 해적선에 잡혀가 온갖 고생을 겪는다. 이 장면에서 <보물선>이 연상된다. 우여곡절 끝에 산호섬을 돌아온 그들이 망고 섬의 원주민들과 격렬한 대립을 빚다가 갑작스런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것으로 끝. 여기서는 원주민들의 식인 풍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당대 원주민 대상 무역과 기독교 전파에 따른 종교적 갈등의 현장이 생생하게 제시된다.

 

구성 상 다소간 억지스러운 면이 명확하고 인위적 설정이 자연스러운 몰입을 방해하지만, 눈높이를 청소년 수준에 맞춘다면 그럴듯한 재미를 안겨준 모험소설로 인정할 만하다. 게다가 주인공들이 십대 중후반의 동년배들이라면 마치 자신들이 주인공인 된 마냥 이입 효과가 더해질 테니. 아무리 그렇더라도 후반부에서 거대한 해적선을 한 명 또는 세 명의 어린 뱃사람들이 몰고 가는 장면은 사실성 부여에서 한계가 있다. 더구나 달랑 세 명이서 망고 섬의 원주민들과 맞서 전투를 벌이고 기독교 종교를 가진 원주민 여인을 구하려고 목숨을 거는 대목은 기사도 정신을 강조하는 목적성 설정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무역 회사에 근무했을 뿐 한 번도 해양 모험을 해보지 않은 작자가 이런 소설들을 발표한 것은 당대에 상당한 수요가 존재하였음을 가리킨다. 때는 19세기 중반, 대영제국의 최전성기를 향해 나아가던 시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건설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무역과 해군력은 절체절명의 필수 사항이었다. 이국의 기이한 관습과 풍경에 대한 세인들의 호기심을 충족하고, 아울러 사람들의 흥미와 도전 정신을 고취하고 관심을 해외로 돌리고자 하는 이해관계가 상호 맞아떨어졌다. 식인 야만인들에게 기독교 문명의 세례로 정화한다는 종교적 사명감도 대외적 팽창과 정복을 정당화시켜 주었다. 그렇다고 만사를 부정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당대의 시각에서는 그것은 분명 옳고도 정당한 사고이자 행동이었으므로.

 

이 작품을 청소년들이 읽도록 굳이 안내할 가치가 있을까? 분명 재미와 교훈적 측면에서라면 동종의 전후 작품들에 비하여 두드러진 장점은 없다. 문화적, 종교적 편향성도 분명히 드러난다. 구성과 전개의 비현실적 요소도 언급한 바 있다. 일단 이러한 한계를 인식한다면 그래도 성인들이 아닌 청소년들이 주인공이 되어 주체적인 판단과 결정으로 자신들의 앞날을 선택하는 장면, 고난과 역경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나름의 즐거움을 발견하는 대목, 그리고 무엇보다도 읽는 이의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대양에서의 모험과 무인도에서의 삶 등이 주는 흥미는 일독해도 괜찮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 MBC 느낌표 선정도서, 보급판, 최순우의 한국미 산책, 학고재신서 1
최순우 지음 / 학고재 / 200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작고한 지 30년이 지난 비교적 오래된 분의 글임에도 여전히 세인들의 사랑과 선택을 받는 이유는 방송의 힘과 아울러 후학들의 노력 덕택이다. 물론 저자의 글 자체가 스스로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간직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대놓고 말하자면 한국의 미, 즉 한국미를 발견하고 예찬하는 유형의 글은 여럿 있다. 교과서에서도 읽은 기억이 나며 일본의 야나기 무네요시란 인명도 기억에 떠오른다. 당장 온라인 서점에서 한국의 미라는 주제어로 검색해 보면 리스트가 죽 나타날 것이다. 그럼에도 내게 있어 파편화된 정보와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감성적 측면에서 한국미는 여전히 가슴에 확 다가오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저자가 부러운 동시에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우리 것의 사소한 단초에서도 진실한 미를 발견하는 일을 놓치지 않는다. 그가 본 무량수전과 내가 본 것은 똑같은 것이련만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P.78)을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사실 이 책은 읽기 그리 만만하거나 쉬운 책은 아니다. 한국미 전반에 대한 총론과 아울러 유형별 분류에 따른 개별 예술품에 대한 세세한 감상까지 이 책은 우리 전통예술에 대한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다루고 있다. 제대로 읽으려면 한 편 한 편 소개된 유물과 유적을 실제로 접하면서 음미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저자의 글만 읽으면 반쪽(이것도 후하다!)짜리 이해에 불과하다. 한편 그가 쓰는 문체와 용어는 모두 1980년대 이전이라서 지금과는 달리 다소간 생소함이 존재하며, 수록된 도판도 죄다 흑백이라 저자가 공들여 찬미하는 아름다움의 실체를 확인하기에 어렵기도 하다.

 

한국미에 대한 기존의 평가는 대체로 이렇다. 무기교의 기교, 고졸(古拙)의 미, 가냘픈 선의 아름다움. 욕심을 부리지 않는 담박한 아름다움 등. 저자의 견해도 여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어찌 보면 그가 주로 활동했던 1960년대와 70년대가 한국미의 재발견을 집중 조명하였던 때였으니 그 또한 이러한 인식에 기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저자가 이 책에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이미 진부하고 상투적인 케케묵은 것의 반복에 불과하단 말인가? 그가 순전히 총론적인 미학만을 반복했다면 그러하였을지 모른다. 그는 미에 대한 추상적, 형이상학적 전개를 꺼린다. 그는 구체적인 예술품에 근거하여 거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칫 간과되기 쉬운) 사실적 아름다움을 세인들에게 알리고자 애쓴다. 전혀 무관한 미지의 대상이지만, 일단 알게 되면 관심을 갖게 되고 좋아하고 사랑하게 된다. 신라 토우 편에서 그는 이런 특성들이 한국미가 지니는 체질의 원천적 역할”(P.210)이라고 하는데 물끄러미 토우를 들여다보면 그럴 듯도 하다.

 

저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 것의 아름다움에 눈뜨고 사랑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경제 기적의 시대, 사람들은 오로지 서양의 것, 최신의 것만을 최고의 가치인 줄 추구한다. 조상의 오래된 지혜, 대대로 이어진 전통의 아름다움은 헌신짝처럼 버려진다. 비원의 연경당을 바라보면서 저자가 품은 탄식과 바램은 오늘날 아파트 공화국으로 변모한 도시의 풍광에 비추어 보면 오히려 소박하기조차 하다.

 

문화와 예술은 토양과 민족의 토대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신라의 석조보살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얼굴상과 온화한 미소는 정녕 한국 사람의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움 자태”(P.122)를 무의식중에 반영한 것이다. 화엄사의 유명한 사자석탑이 언급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저자는 범인들이 흘려보기 쉬운 탑 앞에 마주보고 있는 공양상을 주목한다.

 

이 한 토막의 정경에서 우리는 한국의 아름다움과 한국인의 아름다움을 한자리에서 보는 느낌이며 민족적인 아름다움이란 어디서나 그 자연과 인문 그리고 그 족속의 감정이 멋지게 해화를 이루었을 때 비로소 격조가 생기는 것이라는 표본을 여기에서 보는 듯도 싶다.” (P.152)

 

도자기에 대한 과거의 논의를 보면 고려의 비색 청자와 상감 청자를 제일로 평하고, 분청사기는 청자의 퇴화로 간주하던 시기가 있었다. 저자의 글에서도 간혹 분청사기를 퇴화, 타락, 변질 등으로 표현하는 문구가 발견된다. 백자의 경우도 지금이야 건강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이 평가받지 한때는 한갓 자기에 불과하던 시절이 있었음을 저자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하긴 조선의 막사발의 가치를 일본에서 먼저 인식하지 않았던가. 저자는 분청사기와 백자에 대해서 아름답다는 자구 외에 잘 생겼다는 말로서 찬미를 하는데, 그 소박하고 무심스러우며 순진한 아름다움을 지칭하는 적절한 어휘로 사용하고 있다. 분청사기철회초문대접의 순진미, 백자철회포도무늬 항아리의 잘 생긴 아름다움 등이 인상적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아름다움을 평가하고 식별하는 절대적 기준은 없다. 세인들의 문화와 기호의 변천에 따라 미의 기준은 상대적 차이를 보인다. 청자는 청자대로, 분청사기와 백자는 그것들대로 당대의 사람들과 문화의 시대적 요구를 충실히 반영한 것뿐이다. 그것을 만든 도공들은 후대의 평가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이를 확장하면 우리와 중국, 일본의 문화 예술에 대한 인식과 평가의 비교에도 적용할 수 있다. 모든 예술이 고유의 토양과 문화를 반영한 것이라면 중국의 예술에는 중국 사람들의, 일본의 것에는 일본 사람들의 정서와 미학이 깃들여 있음은 당연하다. 이를 다른 나라의 시각에서 거대하고 과시적이라느니, 인공적이고 장식적이라느니 비판적으로 봐서는 안 될 것이다. 그네들과 우리의 것과는 응당 차이가 존재하므로 우리 것을 잘 인식하기 위한 도구로서 비교한다면 모를까 그네들의 예술품을 평가하기 위한 잣대로 삼아서는 옳지 않다고 본다. 한국미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예찬하다보면 모르는 사이 우물 안 개구리 또는 국수주의적 함정에 빠지기 쉽다. 저자의 글에서 이따금 이런 분위기가 감지되는 것(예컨대 청화백자선도연적)이 나만의 착각이라면 다행이다.

 

청자와 백자의 대비가 회화에서는 수묵화와 풍속화로 이어진다. 오직 먹빛의 농담 하나만으로 화려한 채색이 넘보지 못할 심원한 경지를 구축한 화인들의 옛 그림을 물끄러미 보노라면 모노크롬의 흑백 영화에서 또는 모노럴 사운드의 SP 음반을 통해 접하게 되는 아려하면서도 예스러운 격조와 기품을 떠올리게 된다. 수묵화의 수준은 화인 자신의 천품과 비례한다는 말은 단순한 재주와 기법의 현현을 뛰어넘은 정신적 경지를 뜻한다. 이것은 문인화에 그치지 않고 산수화에도 적용할 수 있다. 정선의 통천문암도와 조옹도가 유독 심경에 다가온다.

 

단원과 혜원은 물론 긍재 김득신의 대장간 그림에서 볼 수 있는 풍속화는 인간 중심의, 대중 사회가 도래하였음을 여실히 입증한다. 세상은 신선과 도인들이 아니라 서민들의 적나라한 희노애락을 문화와 예술에서도 반영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전 세대의 초월적 미는 부족할지 모르지만 당대의 사실적 미는 특유의 해학미와 어우러져 보기 드문 감흥을 안겨준다.

 

이 책을 덮고 나서도 한국미는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는다. 우리네 고유의 예술을 창조한 이들과 그들이 살아간 당대라는 개체적, 시대적 한계를 극복해야 할 것이며 예술품이 지니는 독자적 미의 발현을 체득해야 한다. 아마도 한국미를 느낄 수 있게 되기를 영원히 갈구만 하다 마칠지도 모른다. 그래도 간단없이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네 조상들이 남긴 자취이자 바로 우리들의 것이기 때문이리라.

 

이 책은 2002년도에 발간되었는데, 2008년도에 체제를 바꾸고 컬러도판을 사용한 개정판이 나왔다. 이 단상에서 제기한 이해와 접근성의 문제점을 상당부분 해소하는 데 유익할 것으로 생각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이너리티 클래식 - 클래식 음악의 낯선 거장 49인
이영진 지음 / 현암사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클래식 음악계의 49명의 음악가를 작곡가, 지휘자, 피아니스트, 현악 연주가로 분류하여 소개한다. 이들은 어지간한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에게는 매우 낯선 인물들이다. 다행이 익히 아는 인물도 음반을 가지고 있는 음악가들도 있지만 이름만 들어보았거나 처음 듣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들만이 어찌 클래식 음악계의 마이너리거겠는가. 그 외에도 무수한 실력 있는 작곡가나 연주가들이 제대로 된 인정과 평가도 받지 못한 채 역사 속에 스러져 간다. 요는 대가의 것이 아닌 생소한 곡이나 연주이므로 외면할 것인가 아니면 고정관념과 편견을 넘어서 열린 마음으로 음악과 음악가를 대할 것인가라고 하겠다. 메이저리거 음악가들에 못지않게 음악적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들도 기뻐하겠지만 개인적으로도 크나큰 혜택일 것이다.

 

애초에 소개된 음악가들에 대해 간단한 코멘트를 덧붙일 생각이었으나 얼마 쓰지 않은 촌평도 박박 지우고 말았다. 몇 줄씩만 언급해도 도대체 몇 장 분량이나 될 것인가. 최소 대여섯 장을 넘어갈 텐데 내가 무슨 전문 리뷰어나 평론가도 아니고.

 

저자가 마이너리거 음악가를 발굴하여 대중 앞에 소개한 진의를 곱씹어본다. 그들의 삶은 대개 고통과 비극으로 점철되었으며 죽음조차도 평온하게 맞이하지 못한 사례가 대다수다. 전쟁, 인종, 이념, 성격, 정치, 파벌, 가난, 질병, 사고, 매니지먼트 등 사유는 제각각 다르지만, 한 가지 그들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음악의 본질을 찾아서 매진하였다. 음악 앞에 한없이 겸손하였으며, 음악 자체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일생을 헌신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저자가 이들 마이너리거들을 새삼 기억의 늪에서 꺼내올려서 독자들에게 상세한 삶과 디스코그래피를 제시하여 준 연유다. 겉멋과 허영에 물든 현대 음악계에 대한 비판의식도 잠재해 있다.

 

저자는 독자들이 그네들의 슬픈 생애에만 천착하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을 음악가로 기억나게 하는 이유는 그들의 예술 자체에 있다. 모진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그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예술을 구현하기 위해 온 삶을 불살랐던 것이다. 그들의 예술성이 부족해서 청자에게 잊혔다면 할 말이 없지만, 단순히 대중적이지 않아서 미처 알지 못하여서 그네들의 음악을 접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예술을 통해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면 마이너리거들에게나 독자와 청자들에게나 모두에게 비극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들도 메이저리거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함이 공평하지 않은가.

 

그런 측면에서 소개글을 읽으면서 짧게나마 그들의 작품과 연주를 일부러라도 찾아서 듣게 된 것은 커다란 소득이다. 요하임 라프의 교향곡 5<레노레>를 들어보니 슈만과 차이코프스키의 건전한 중도풍의 인상이다. 강렬하거나 격렬하지 않고 강주에서도 온건미와 건강미가 자리 잡고 있다. 진작부터 관심 있지만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그의 음악을 듣고 싶다. 한스 로트는 어떠한가. 브루크너와 말러를 제외하면 이리 장대한 교향곡이 당대에 있을까. 1악장의 낭랑하며 유장한 개시부가 가슴을 울리며, 2악장에서는 말러에게서 익숙했던 선율이 명료하게 드러난다. 마지막 악장 역시 브루크너와 말러의 느낌이 물씬하다.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해서 브람스를 원망하고 싶지는 않다. 자신의 음악관에 어긋나는 로트를 인정하지 않음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터이므로. 로트의 단명은 차라리 숙명이다. 흑인 작곡가 윌리엄 그랜트 스틸의 교향곡에서는 재즈풍의 악상이 귓가에 확 다가온다. 프란츠 슈미트, 루에드 랑고르, 하르트만, 알란 페테르손의 음악도 하나하나 다 듣고 싶다.

 

지휘자와 연주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지휘자들의 경우는 대부분 연주를 들어본 생소하지 않은 인물들이어서 다행이다. 폴 파레와 마뉴엘 로장탈, 유진 구센스의 유명한 사건, 명성만이 자자한 미트로풀로스와 비극적인 헤르베르트 케겔, 열광적인 카를로스 파이타, 에두아르도 마타 등등. 오스카 프리트는 연대가 오래되어 유감스럽게도 남겨진 음반의 품질이 열악하다. 바흐 음악에서 경탄하는 카를 리슈텐파르트가 소개되어 반갑고, 너무 늦게 되어서야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게오르그 틴트너의 브루크너 교향곡 음반을 전집으로 소유하고 있어서 기쁘다. 근래 들어 깊은 관심을 지니게 된 카렐 안체를도 찬사를 보내고 싶다.

 

피아니스트 중에서는 마르셀 메이에르의 라모 연주를 일찍이 듣고 그녀의 음반을 구해 가지고 있다. 마리아 유디나의 바흐와 베토벤 변주곡을 꼭 듣고 싶다. 마리아 그린베르크의 베토벤 소나타 전집도. 콘라드 한젠과 한스 리히터 하저, 윌리엄 카펠 등은 여전히 감당하기엔 내공이 부족하다. 발레리 아파나시에프와 유리 에고로프, 알렉시스 바이젠베르크는 숱한 연주자 중의 하나로 치부하였는데 편견은 금물이다. 루돌프 피르쿠슈니는 레퍼토리 상 아직 가까이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디노 치아니가 기쁘다. 예전에 그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에로이카 변주곡을 듣고 감탄하였으며 동곡에 관한 한 나의 여전한 레퍼런스다.

 

현악 연주가들은 대체로 친숙하지 않은 편이다. 요한나 마르치는 제외하고. 크리스티앙 페라스와 마이클 래빈은 단명한 천재 연주자로서 성숙한 예술성에 대한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다. 다닐 샤프란의 진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엔리코 마이나르디와 첼리스트 안토니오 야니그로, 윌리엄 프림로즈도 마찬가지다. 시몬 골드베르크와 롤라 보베스코는 괜찮은 인상이지만 좀 더 겪어봐야 할 듯. 이온 보이쿠, 반다 빌코미르스카, 콘스탄티 안제이 쿨카 같은 겨우 귓가를 스친 기억이 있는 연주자들이 새롭다. 갑작스레 비에냐프스키와 시마노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에 흥미가 당긴다.

 

이런 유형의 책은 단숨에 읽고서 던져 버릴 게 아니라 곁에 두고 가이드로서 챙겨봐야 할 부류다. 그래서 저자는 각 음악가들의 주요 작품과 음반, 연주를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비인기 예술가들이므로 상당수는 국내에서 구하기 힘들다는 한계는 있지만. 여기에 소개된 음악가들과 친숙하게 되면 더 이상의 마이너리티 클래식은 존재하지 않을까? 천만에 말씀. 당장에라도 저자가 2편을 쓰게 되면 꼭 상세한 소개를 요청하고 싶은 음악가들이 한 둘이 아니다. 작곡가 아테르베리, 페르디난드 리스, 아놀드 백스, 딜리어스 등. 지휘자의 경우 한스 로스바우트, 야샤 호렌슈타인, 블라디미르 골쉬만, 콘스탄틴 실베스트리, 최초의 흑인 지휘자인 딘 딕슨도 언급해주었으면 한다. 연주자로서는 피아니스트 사무일 페인베르크, 니키타 마갈로프, 이반 모라베츠, 귀요마르 노바에스, 야코프 플리에르는 어떨지. , 이본느 르페부르도 있구나. 현악에는 미하일 바이만, 가스파르 카사도, 브로니슬라프 짐펠이 우선 떠오른다. 원래 MLB를 봐도 메이저리거보다 마이너리거의 숫자가 훨씬 많음을 여기서도 새삼 발견한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의 입장에서는 매우 가치 있는 책이다.

 

연대 표기에서 제법 오류가 많다. 보다 꼼꼼한 교정이 필요할 듯.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