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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오케스트라 - 세계 음악계를 이끌어가는 30개 오케스트라의 탄생과 발자취
헤르베르트 하프너 지음, 홍은정 옮김 / 경당 / 2011년 12월
평점 :
<지휘의 거장들>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에게 있어 푸르트벵글러와 토스카니니는 신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발터와 클렘페러도 거의 동급의 대우를 받는다. 첼리비다케와 아들 클라이버는 어떤가? 반면 카라얀과 번스타인은 물론이고 아바도, 마젤, 메타, 바렌보임, 래틀에 대해서는 찬반을 넘어서 수준에 대해서 시비를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사람들은 위대한 지휘자들에게 열광적인 관심을 보인다.
지휘자는 홀로 존재하지 못한다. 물리적 악기를 직접 다루는 연주자와 달리 지휘자의 악기는 오케스트라다. 오케스트라는 무생물이 아니며, 수십 명에서 백여 명을 넘는 많은 사람들의 집합체다. 베를린 필과 빈 필 등 몇 군데를 제외하면 자체로 독자적 위상을 지닌 오케스트라는 거의 없는 지경이다. 오케스트라는 지휘자의 부속물이 아님에도 말이다.
이 책은 30개에 달하는 세계적 수준의 오케스트라들의 일대기다. 애호가들이 실연이나 음반을 통해서 익숙한 거의 대부분의 악단들이 소개되어 있다. 물론 개개인에 따라서는 애호하는 특정 악단이 누락되어 있는 것에 아쉬움을 느낄 수도 있으리라. 내 경우는 앙세르메와 떼어놓을 수 없는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 밤베르크 심포니, 바르샤바 필, 세인트루이스 심포니,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등이 누락되어 있는 게 아쉽기 그지없다. 어쨌든 지면이 한정되어 있고 숫자 제한이 있는 한 모든 이를 만족시키기란 어려운 일이다.
1장은 오케스트라의 역사에 대한 개관으로서 악단 명칭의 유래와 변천에 대하여 알게 해준다. 오케스트라의 원 의미는 카펠레와 마찬가지로 앙상블이 아닌 공간 개념이라는 사실, 오케스트라가 카펠레보다 새로운 용어라는 점이 신선하다.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는 악단 명을 통해 역사와 전통에 대한 자부심을 표출하는 셈이다. 2장은 오케스트라가 음악가 인간들의 단체라는 점, 3장은 오케스트라 명칭의 가명과 익명을 다룬다. 본격적인 오케스트라 소개는 4장부터 시작하며, 한 장을 한 오케스트라에 할당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오케스트라의 본질은 합주에 있다. 최고 비르투오조 독주자들을 한데 모아놓는다고 최고의 앙상블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구성원 모두가 다른 이들과 함께 연주하고 싶어 하고 다른 이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는 마음을 품고 있어야 교향악단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단원들이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긴장과 갈등이 생겨난 탓이죠.” (P.321)
비슈코프의 발언은 오케스트라의 본질을 갈파한다. 이는 또한 오케스트라에서 지휘자의 역할과 중요성을 나타낸다. 지휘자 없이도 악단이 연주는 할 수 있지만, 발전을 이루지는 못한다. 그래서 많은 악단들이 뛰어난 지휘자를 영입하려고 애쓰며, 실제로 지휘자가 악단을 탈바꿈시킨 사례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때로는 독재자라는 악평을 지닌 지휘자마저 감수하는 것은 대체 불가능한 탁월한 예술성 때문이다.
과거의 거장 지휘자들에게는 독재가 용납되었다. 토스카니니, 셀, 므라빈스키, 라이너, 로진스키 등은 전형적인 독재형 지휘자들이다. 그들 앞에서 단원들은 제대로 얼굴을 들거나 자신의 주장을 표현하기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제는 역사 속의 에피소드로 남았을 뿐이다. 지휘자는 자의든 타의든 민주형으로 이끌 수밖에 없다.
지휘자의 과제는 결코 만만치 않다. 지휘자로서의 예술적 요구와 대개는 겸임하기 마련인 예술감독 또는 음악감독으로서의 행정 업무는 양날의 칼이다. 레퍼토리에서도 절묘한 균형 감각이 요구된다. 고전과 낭만 작품에 치중하면 고루하다는 비난을 받게 되며, 현대음악을 자주 소개하면 청중들로부터 멀어지게 되어 입지가 좁아진다. 인간관계는 어떠한가? 단원들, 단장, 정부관료, 후원자 등등 지휘자의 관심과 지원을 필요로 하는 집단이 에워싸고 있다.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은 개개인이 예술가인 동시에, 또한 직업인이기도 하다. 오케스트라의 예술적 수준에 대한 요구는 오디션을 통한 과감한 단원 교체를 동반한다.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명성을 유지하는 명분에서 단원들의 헌신과 고통은 자칫 당연하게 인식된다. 이 지점에서 지휘자의 고충과, 오케스트라와의 갈등, 그리고 힘겨루기는 시작된다.
국내 사례를 보자. 지휘자 정명훈이 서울시향을 맡으면서 대대적 파업이 일어났다. 서울시향은 실력이 대폭 향상되고 도이치 그라마폰에서 음반도 출시하게 되었지만, 지금 서울시향의 단원 중에서 과거 단원의 비율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KBS 심포니는 국내 최고의 악단에서 수년 간 상임지휘자 부재로 앙상블이 많이 약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역사가 일천한 경기 필은 악단과 지휘자 간 갈등이 가장 추잡스러운 형태로 표출된 사례다. 부천 필은 지휘자의 뛰어난 역량과 헌신의 결과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그런 면에서 임헌정 퇴임 이후 악단의 행보가 궁금해진다.
오케스트라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악단들의 다양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애호가와 청중들의 숫자는 정체 내지 감소 추세다. 음반도 과포화상태다. 고전 레퍼토리만으로는 한계가 있지만, 현대 음악에 대한 애호가는 별로 늘지 않는다. 이 책에 소개될 정도의 전통과 역사를 지닌 오케스트라는 쉽사리 쓰러지지 않겠지만, 미국과 유럽의 중소 오케스트라들은 하나둘 씩 문을 닫는 추세다.
이 책에 소개된 오케스트라들에 대한 짤막한 인상기를 적은 메모로 끝을 맺는다.
1.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SKD):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악단. 장기적으로 악단을 이끌어주는 상임지휘자의 부재 역사가 안타깝다.
2.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LGO): 고풍스런 울림. 콘비츠니의 급서와 쿠르트 마주어, 샤이의 변신에 기대한다. 게반트하우스는 직물회관이란 뜻이다!
3. 베를린 필(BPO): 두말하면 무엇 하랴. 푸르트벵글러, 카라얀, 그리고 아바도! 음악 정치학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4. 뮌헨 필(MPO): 전후 프리츠 리거 대신 오이겐 요훔을 선택했더라면 첼리비다케에 앞서 최정상급으로 성장할 수 있지 않았을까.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을 보라. 절대적 공헌자는 물론 첼리.
5. 베를린 도이치 심포니: 악단명의 잦은 변경은 자체로 정치적 격변을 대변한다. 프리차이의 때 이른 사망은 악단에게나 애호가에게 모두 안타깝다.
6. 바이에른 라디오 심포니(BRSO): 요훔과 쿠벨릭 같은 좋은 지휘자와 좋은 악단이 만나 시너지 효과를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
7. 빈 필(VPO): 역시 별다른 설명이 필요없을 자존심. 나치에 적극적인 찬동을 한 흔적은 씻을 수 없는 원죄다. 베를린 필보다 과다한 연유가 궁금하다.
8. 빈 심포니(VSO): 만년 2인자. 귀족적 빈 필에 비해 음악의 대중화에 기여한 공로는 높은 평가가 필요하다.
9. 취리히 톤할레: 톤할레는 연주회장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궁금증 해결. 솔직히 데이비드 진먼의 최근 노력이 아니었으면 이 책에 수록되기 힘들었으리라.
10. 로열 콘서트헤보(RCO): 콘서트헤보 또는 콘세르트허바우도 공연장 이름이었군. 각종 오케스트라 평가에서 최고로 꼽히는 전통의 명문이 아닌가.
11. 파리: 드라마틱한 출범 이후 솔직히 두드러지는 존재는 아니다. 프랑스는 앙상블에서 확실히 취약한 듯.
12. 할레: 경애하는 바비롤리와 이룬 성공. 마크 엘더의 재기를 기대한다.
13. 런던 심포니(LSO): 런던 Big 5의 대표격. 험난한 시절을 겪었음에 놀라다.
14. BBC 심포니: 친숙하지 않은 악단. 아드리언 볼트가 키웠음을 알다. 앤드류 데이비스 역시 악단과 함께 은둔의 실력자로 하겠다.
15. 런던 필(LPO): 설립자 토머스 비첨. 하이팅크의 선도와 특히 텐슈테트의 휴먼 드라마가 눈물겹다.
16. 필하모니아(PO): 월터 레그와 오토 클렘페러. 오케스트라가 독자 생존하기는 참으로 힘들다.
17. 로열 필(RPO): 또다시 설립자 토머스 비첨. 지나친 대중성 이미지. Big 5에 포함되기는 부족하지 않는가.
18. 체코 필: 탈리히, 안체를, 노이만 그리고 누구?
19. 상트페테르부르크 필: 애호가는 레닌그라드 필이 더 친숙하다. 므라빈스키의 사망과 정치 체제의 변화는 악단에 치명타로 작용한다.
20. 모스크바 라디오: 로제스트벤스키와 페도세예프. 전자의 차이코프스키와 시벨리우스는 충격적이다.
21. 러시아 국립 아카데미 심포니: 스베틀라노프 이후는 어떻게 될 것인가?
22. 이스라엘 필: 시오니즘의 산물. 예술이 지닌 화해와 연대의 책무를 생각해본다.
23. 뉴욕 필(NYP): 번스타인의 성공, 메타의 성공과 실패. 그리고 악단의 침체
24. 보스턴 심포니(BSO): 유럽 전통. 쿠셰비츠키와 뮌쉬의 전성기. 오자와와 오케스트라의 동병상련.
25. 시카고 심포니(CSO): 프리츠 라이너와 Living Stereo 시리즈의 아우라. 솔티가 키운 기능성 극대화의 전통은 오래 지속된다. 미국 Big 5의 현재 선두주자.
26. 필라델피아(PDO): 아, 사라져버린 필라델피아 사운드여!
27. 클리블랜드: 독재자 조지 셀. 명성은 계속된다.
28. 로스앤젤레스 필(LAPO): 젊은 메타, 다시금 젊은 두다멜. 전설은 재현되려나.
29&30. NBC 심포니 & 콜럼비아 심포니: 단 한 명의 지휘자를 위해 태어나고 스러져간 악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