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카쿠가 남긴 선물 - 사이카쿠의 마지막 작품
이하라 사이카쿠 지음, 김임숙 옮김 / 제이앤씨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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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세의 대표적인 우키요조시(浮世草紙) 작가인 이하라 사이카쿠의 유작으로 <호색일대남>과 같은 유의 호색물이다.

 

일본 근세는 독특한 시대적 문화를 낳았다. 상업의 발달로 경제적 부를 축적한 상인 계급이지만 정치적으로는 피지배층에 속하여 자신들의 점증하는 활력을 분출할 여지를 갖지 못하였다. 정치적으로 평온한 시기에 그들은 사회적으로 공인되고 암암리에 장려된 유곽 문화에 빠져들고 이것은 당대의 특징적인 문화로 자리 잡았으니 유곽 출입은 더 이상 숨기고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유곽에서 호탕하고 질펀하게 놀면서 돈을 방탕하게 흩뿌리는 사람을 다이진(大尽)이라고 부르며 스이(), 즉 풍류를 아는 멋쟁이로 칭송받을 정도였다. 어디 여색뿐이겠는가 당대는 남색도 보편화되다시피 한 사회였으니.

 

서문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의 거짓이 한데 모여 스이라는 아름다운 놀이가 되었다.” (P.8)

 

스이는 거짓이다. 화류계에서는 손님이나 유녀나 아게야의 사람들 모두가 거짓을 말하고 행동한다. 모두가 거짓임을 알면서 모르는 체, 진심인 체 행동하는 게 유곽의 특징이다. 스이는 아름답다. 도덕적 가치를 배제한 채 다이진은 유녀의 미색과 자태를 탐한다. 색욕이 즐겁고 아름답지 않다면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탐닉하고 헤어 나오지 않는 일이 생기겠는가. 스이는 놀이다. 놀이의 즐거움은 길게 이어지지 않는다. 영원할 것 같은 쾌락과 행복의 꿈은 가진 재화가 바닥나는 순간 차디찬 현실로 내동댕이쳐진다.

 

사이카쿠는 총 515편의 짤막한 이야기를 통해 유녀놀음에 빠져서 자제할 줄 모르고 끝내 신세를 망쳐버린 사람들의 신상을 보여준다. 대개의 이야기는 비슷한 패턴을 반복한다. 부유한 신세였던 다이진이 다유같은 최상위의 유녀에게 빠져 흥청망청 돈을 뿌려대고 한껏 기분을 내며 꿈같은 시절을 보낸다. 빈털터리가 된 다이진에게는 두 개의 운명이 갈림길에서 기다리고 있다. 날품팔이 처지에도 여전히 미몽을 잊지 못하고 옛날의 화려한 시절을 되새긴다. 또는 거금을 주고 기적에서 빼준 다유와 함께 궁핍한 삶을 꾸려나간다.

 

여하튼 일상화된 유곽 출입은 사회와 가족 질서 유지 차원에서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가산을 탕진하기 일쑤며, 자식이 또는 아비가 다이진이 되면 신분과 가족 질서도 혼란스럽게 된다. 엄정한 도덕률의 차원에서 보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응당 교훈적이고 씁쓸한 뒷맛을 남겨야 하지만 의외로 각 이야기는 흥겹고 산뜻하다. 다이진들의 영락한 말년을 들려주면서 작가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래, 이들은 지금 몰락해서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어. 하지만 그들은 아름다움에 탐닉했던 유쾌했던 호시절을 후회하지 않지. 다시 기회만 주어진다면 그들은 다시금 에도와 나라, 교토의 유곽들을 신나게 순례할 것이야.

 

그런 탓일까? 내게는 역자의 설명과는 달리 인간 욕망의 파멸적 결과에 대한 주의를 담은 메시지로 이해되지 않는다. 이왕 경고하려면 좀 더 따끔하게 신랄하게 해야 옷깃을 여미고 자신을 돌아보지 않겠는가. 사이카쿠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예전의 멋있고 감탄스러웠던 스이가 당대에서는 퇴색하고 변질되어 더 이상 멋을 찾기 어렵다는 탄식을 하고 있다. 때에 따라서는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듯한 뉘앙스마저 글에서 묻어나온다. 그렇다면 사이카쿠의 이 작품은 지금은 사라져버린 스이의 아름다움을 기리는 송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유녀는 세련된 마음을 가지고는 있으나 품위가 없지요.”

 

요사이 노는 방법을 보면 한심한 손님이 많다......차야온나와도 놀 수 없을 것 같은 남자가 한껏 멋을 부리고 덴진을 사러 온다.” (P.142)

 

여하튼 지금은 진짜 다이진을 찾아볼 수 없다......호탕했던 예전의 유녀놀음이 그립기만 하다.” (P.146)

 

유난히 기억에 남는 다이진과 유녀 이야기가 있다. 4-2섣달 그믐밤의 이세신궁 참배, 와라야의 금이 그것이다. 나가사키의 시카라는 다이진은 시마바라의 다유 요시노를 기적에서 빼낸 후 초가집에서 오붓한 생활을 즐긴다. 비록 넉넉한 삶은 아니지만 물욕을 버리고 자연을 벗 삼아 느긋하게 풍류를 즐기며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삶을 누리고 있다(P.135).

 

사이카쿠의 작품은 지극히 사실적이며 고상한 체하지 않는다. 스스로 대중작가임을 인정하고 호색과 관련된 인물들의 언행과 사건을 경쾌하고 치밀하게 묘사하여 일본 근세의 사회상을 살아있는 듯 독자에게 보여준다. <호색일대남>과 이 작품을 통해서 당대의 유곽 문화와 용어, 화폐 단위 및 기타 풍습 및 유흥 문화 등에 대해 고고한 역사서를 통해 알 수 없는 서민층의 생활 습속을 상세히 알 수 있게 된 점이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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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할아버지와 버섯 마을 - 생각하는 지혜동화 02
김태광 지음, 시내 그림 / 꿈소담이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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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지혜 동화라는 타이틀의 시리즈로 나왔는데, 10편의 교훈적 이야기를 독립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버섯 마을이라는 지역적 배경에, 나무 할아버지가 등장하여 들려주는 형식을 통해 전체적 연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나무 할아버지는 마을에서 가장 지혜로운 인물로서 주민들의 어렵고 힘든 사정을 들어주고 적절한 이야기를 들려주어 스스로 깨닫게 함으로써 해결해 준다. 여기에 소개된 각각의 이야기가 들려주는 지혜와 교훈은 명쾌하다. 이 책을 읽는 초등학생 저학년이 이해하고 생각할 수 있는 수준에 맞추기 위해서다.

 

욕심쟁이 영감에서는 지나친 욕심을 경계한다. 욕심의 노예가 되지 말자는 것.

 

아름다운 도전은 브라운대학 총장이 된 루스 시몬스라는 흑인 여성을 통해 꿈과 목표, 열정의 소중함을 강조한다.

 

조개와 진주는 자신과 타인을 소중히 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보여준다. 소년의 괴로움은 남을 잘 이해할 수 따뜻한 마음(진주)을 품고 있어서라는 나무 할아버지의 말이 와 닿는다.

 

의심 많은 물고기를 통해 타인의 진심을 믿는데서 인간관계가 출발함을 알게 해준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약은 긍정적 마인드와 자기 확신의 효과를 보여준다. 소심하고 자신감 없는 영진이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다.

 

억울한 황새의 황새는 억울해할 필요가 없다. 옛말에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고 하였다. 바르고 옳지 않은 일과 사람은 처음부터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자기 탓이다.

 

가장 아름다운 일은 작가 카프카의 어린 시절 일화를 알게 해준다. 선한 마음과 행동은 사람을 즐겁고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다.

 

우리 몸에 입은 한 개이지만 귀는 두 개라는 사실을 자주 잊곤 한다. 혀는 모든 불행의 근원이라는 말도 잊지 않은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가족과 친구에게 커다란 상처를 준 경우는 부지기수다.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이 주는 교훈이 이에 해당한다. 언행은 신중해야 한다.

 

우리는 흔히 사람의 한 단면을 통해 그 사람을 지레짐작한다. ‘똑똑한 바보는 그 잘못과 위험성을 경계한다. 특히 어린이들은 겉으로 드러난 친구들의 외모와 행동을 보고 놀려대며 무시하기 일쑤다. 누가 참다운 바보일까?

 

버섯마을 사람들은 나무 할아버지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감사장을 전달한다. 모든 이들은 참으로 흐뭇한 마음이다. 나무 할아버지는 링컨 대통령의 일화를 들려준다. 링컨이 훌륭한 인물인 점은 업적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배려하는 아름다운 마음 때문일 것이다.

 

나오는 이야기가 커다란 흥미를 자아내거나 극적인 소재가 아니고 구성 자체가 평면적이어서 아이들이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책을 다 읽기에는 지루해할 수도 있겠다. 아니면 작가와 출판사의 기획 의도는 한 번에 한 편씩 차근차근 읽고 꼼꼼히 되새겨 이야기에 함축된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것일 수도 있겠다.

 

책 디자인과 편집, 만듦새는 매우 뛰어나다. 삽화도 이야기의 내용과 인물의 성격을 적절히 반영하는 범위에서 깔끔하게 그려져 있어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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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 캔자스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토마스 프랭크 지음, 김병순 옮김 / 갈라파고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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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입장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극우 보수 세력을 시종일관 보수 반동 세력이라고 지칭한다. 저자의 어조는 신랄하고 직설적이다. 공화당의 사기와 조작 행태에 대해 분노마저 느껴진다. 이들에 대한 숨기지 않는 혐오감의 표출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진보 성향을 강하게 드러낸다. 이 책의 옮긴이도 옮긴이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마찬가지 정치적 성향을 지닌다. 게다가 독자로서의 본인은 아직까지는 심정적으로 진보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책의 분석 내용과 주장은 물론 촌평 또한 중도적이지 않고 일방에 편향되어 있음을 유념하기 바란다. 그것이 마뜩치 않다면 이 책은 당신의 성향에 맞지 않는다.]

 

선거는 정치적 지배체제의 변동을 촉발하는 역할을 한다. 야당은 현 정권의 부패와 무능을 비판하고 여당은 이를 방어하기에 급급하다. 이것이 과거 선거의 모습이다. 오늘날 선거 풍토는 그렇지 않다. 선거는 정권을 잡은 세력이 체제의 굳건한 안정을 담보하는 도구가 되고 있다. 이것은 정치에서 선거와 투표의 논리가 과거와는 달라졌음을 뜻한다. 저자는 캔자스 주를 분석 대상으로 미국인들의 정치와 선거의 성향이 바뀌게 된 과정과 현실을 통해서 간과되어 온 변화의 무시무시한 기저를 파헤친다.

 

왜 하필 캔자스 주이며, 일개 주의 분석 결과를 미국 전체로 확장해도 무리는 없을까? 우리의 의구심 해소를 위해 저자는 캔자스 주의 속성과 역사를 들려준다. 캔자스 사람들은 가장 평균적인 특성을 지닌 보통사람들로서 모든 미국인을 대표할 만한 전형성을 지닌 것으로 예부터 회자되었다. 더욱이 캔자스 주의 역사 또한 상징적이다. 캔자스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신화적 정체성을 뿌리깊이 간직하고 있다. 캔자스 주를 처음에 세운 사람들은 노예제가 서부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조금이라도 노력했던 북부 사람들이었다. 존 브라운라는 인물과 공립학교에서 인종차별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이끌어내었던 소송도 캔자스의 신화에 기여한다.

 

미국은 대표적인 양당제 국가로 구분된다. 일반적 인식에 따르면 공화당은 보수 성향으로 중산층과 부유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며, 민주당은 진보 성향으로 서민과 소수 인종을 대변한다. 캔자스 주는 당연히 오랫동안 민주당의 확고한 지지기반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 역학이 지난 세기 후반에 들어오면서 서서히 약화되더니 1990년대를 기점으로 극우 보수 세력이 압도적으로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으로 바뀌고 말았다.

 

캔자스 주에서 생긴 정치적 격변의 원인은 민주당의 정체성 포기와 공화당의 문화 이데올로기 전략이 교묘하게 맞물린 결과라고 저자는 갈파한다. 양당의 성격을 구분하던 경제적 계급의 이해관계는 한쪽의 자만과 방심과, 다른 한쪽의 교묘한 왜곡으로 더 이상 중대성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오히려 민주당이 중상류층의 이해를 대변하고 공화당이 가난한 자들의 대변자로 인식이 전도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오늘날 캔자스는 노동자계급이 사장들보다 훨씬 더 열렬한 공화당원인 주라는 이상한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P.138)

 

공화당 내 보수 반동 세력은 대중의 눈과 귀를 교묘히 가려서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문화 이데올로기로 관심을 돌린다. 클린턴은 경제가 문제라고 질타했지만 미국 대중들에게는 진화론 반대, 낙태 반대, 동성애 반대, 유전자 복제 반대 등과 같은 사회적, 문화적 이슈가 절실히 다가온다. 사회를 좀 먹고 있는 불순한 세력과 이를 지지하는 민주당, 그들이 좌지우지하는 편향된 언론 그리고 무소불위의 괴물이 된 정부를 뒤집어엎는 게 중요하다. 경제 문제는 자연히 좋은 방향으로 해결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거에서 정의로운 공화당을 지지해야 한다는 논리다. 공화당이야말로 미국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애국 정당이다!

 

기독교 우파들의 이념적 주장들, 즉 낙태 반대, 유전자 복제 반대, 동성애 반대, 진화론 반대 등은 캔자스 주민의 대다수 삶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었다. 분노에 불을 붙이고 냄비를 계속해서 부글부글 끓게 하는 구호들에 불과하다.” (P.132)

 

보수 반동 세력의 정치적 논리는 단순하지만 효과적이다. 어느 사회와 문화에서든 불건전하거나 소수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퇴폐적 요소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기성세대의 눈에 새로운 세대의 행동과 가치관은 못마땅하기 일쑤다. 사람들은 실질 보다는 이데올로기에 민감하다. 더구나 종교와 결합된 사안은 폭발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적 경험에서 질릴 정도로 많이 알고 있지 않는가. 그들은 사회의 온갖 불만의 원인을 자유주의자들에게 귀인 시킨다.

 

빨간색 주에 사는 사람들[공화당]은 스스로를 이렇게 평가한다(1). 겸손하다, 경건하다, 예의바르고 친절하며 유쾌하다, 애국자다, 언제나 정직하게 일하는 소박한 노동자다. 즉 평범하고 소박한 전형적인 미국인이다.

 

당신은 세상의 소금이며, 미국의 생동하는 심장이다......그러나 당신은 부당하고 무자비하게 박해를 당하고 있다.” (P.199)

 

평범한 보통사람들의 적, 선하고 오래된 빨간색 미국의 적은 지식인들이다. 그들은 미국 중서부를 억압적으로 지배하는 오만한 자유주의 엘리트들이다.” (P.241)

 

이제 문제는 더 이상 경제가 아니다. 도덕과 이데올로기, 문화가 유권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슈로 자리 잡는다. 그러면 이러한 결과로 캔자스 주는 경제적으로 발전을 거듭하는 지역이 되었는가? 아니면 도덕적 문화적으로 향상된 성과를 이루었는가? 여전히 캔자스 주는 미국 내에서 경제력이 서서히 쇠퇴하는 가난한 지역 중 하나일 뿐이다.

 

도덕과 문화 변화는 기십 년 만에 성과를 기대할 수 없는 사안이다. 경제를 외면하고 문화에 주력하는 보수 반동 세력의 위와 같은 전략은 따라서 향후 지속적으로 반복하여 써먹을 수 있는 좋은 구호가 되는 셈이다.

 

보수 반동 세력이 백주에 암약할 수 있도록 방치한 민주당의 역할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의 오만과 방심과 욕심이 화를 자초한 셈이다.

 

(민주당은) 오랫동안 블루칼라 유권자들은 잊고 대신에 사회 문제들에 대해서 자유주의 성향을 띤 부유한 화이트칼라 전문가들을 끌어들이는 데 당의 역량을 집중했다......민주당이 그렇게 하더라도 최근까지 민주당의 강력한지지 기반이었던 노동계급 유권자들이 달리 갈 곳이 없다고 생각한다.” (P.290)

 

다만 여기서 공화당과 민주당의 역사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공화당은 애초 북부를 지지기반으로 하여 노예제 폐지를 주장한 반면, 민주당은 남부를 거점으로 노예제 유지를 옹호한 과거사를 지니고 있다. 즉 공화당과 민주당의 이데올로기와 주의 전도는 미국인들에게 있어 근대와 현대 역사와 맞물려 전혀 의외라거나 생경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민주당이 중도화에 매진하지 않고 경제적 관점에서 보수 세력을 철저히 견제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저자의 주장과는 달리 민중들의 절대적 행동기준을 경제적 이해관계로 단정 지을 수 없다. 그들은 때로 경제적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경제 구조나 계급적 이해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이는 인정할 수 없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한편 저자가 지적한 대로 가난한 자들이 보수 반동 세력에게 투표한다고 해서 그네들이 부유층의 이익에 위배되지만 가난한 자들을 위한 정책을 펼치는 일은 결코 없다. 그들은 선거철에만 필요한 장기판의 졸에 불과하다. 그들의 실망과 배신감은 오래가지 못하며, 새롭지만 구태의연한 다른 이슈를 제기하면 결과는 다를 바 없다. 대다수 유권자들은 유감스럽지만 기억력이 썩 훌륭한 편이 못 된다.

 

이 정도에서 미국에서 우리네 현실로 시선을 돌리면 흥미롭다. 우리네 사회도 두 개의 미국 못지않게 분열되어 있다. 뿌리 깊은 지역 간 갈등에 계급적 이해관계의 대립, 이것이 남과 북이 대치하는 이데올로기적 특수성에 혼재되어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급격한 사회 변동에 따른 세대 갈등도 점차 두드러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사회는 근년에 들어 급격한 보수화와 우경화의 경향을 띠고 있다. 국내 보수 세력의 의도적 전략이 일부 숨어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보수 우파가 지배하는 주류 언론의 성향, 선거철마다 터지는 남북 간 관계를 경색시키는 사건, 진보 세력과 소위 빨갱이에 대한 동일시 등.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수년 전 표주박에서 뛰쳐나온 망아지처럼 하루아침에 불쑥 최고통치자의 자리에 오른 이의 불행한 운명을 목격했다. 성공한 기업인 출신의 후보자를 뽑으면 국민을 잘 살게 해주겠지 하는 소박한 견해, 독재는 했지만 경제발전의 공로자에 대한 지역적, 세대적 향수의 결과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적어도 갈등과 대립의 격렬함에 있어서 우리나라의 경우가 미국보다는 몇 수 위에 있음은 확실하다.

 

게다가 소위 진보 세력의 행보도 탐탁스럽지 않다. 그들은 매사에 따지기 좋아하고 무례한 먹물만 가득 찬 족속들이다. 그들은 자기들만 정의롭고 잘난 줄 안다. 대선토론회에서 소수파 후보자의 시종여일한 논박은 지지자들에게 후련한 통쾌감을 안겨주었지만, 보수 세력과 대다수의 중도파 부동층에게는 피로감과 불쾌감을 가중시켰다. 게다가 국회에 진출이라도 하게 되면 기존에 비판하던 집권층과 차별성을 상실하고 똑같은 놈들로 변질되고 타락하는 모습을 물리도록 목도하였다.

 

마지막으로 덧붙이면 우리나라에서 대통령 후보자들은 일단 당선되고 나면 일개 당을 초월하여 온 국민의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자신의 지지층의 이해와 염원에 어긋나는 경우라도 말이다. 그렇게 해서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던 세력이 마음을 돌려서 전폭적으로 지지할 것으로 생각한다면 지나치게 순진하다. 차라리 충실한 지지층을 더욱 결집하는 게 바른 방향이다. 제대로 된 진보가 정권을 잡은 유일한 국내 사례인 노무현 대통령의 실패는 지지자의 대통령이 아닌 국민의 대통령이 되고자 한데서 비롯된 비극적 사례다. 제아무리 중도와 온건과 보수를 표방해도 반대파는 꿈쩍도 하지 않을 뿐이며 지지층의 실망과 배신감만 유발할 뿐이다. 차라리 지지층의 기대에 부응하여 자신만의 정책 노선을 추구했더라면(한미 FTA 반대 등) 그는 후인들에게 아픔과 슬픔을 남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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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우다, 공식 한국어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양희승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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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이름을 접한 지는 꽤 오래 전이다. 서구인의 시각으로 본 동양 전통사회의 미덕에 대한 찬사라는 개인적으로는 진부한 소재라고 생각해서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제와 책을 읽으면서 섣부른 예단이 매우 편협하였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라다크 지역의 전통사회로부터 현대인, 특히 서구인들이 깨달아야 할 여러 장점을 소개하지만 이것이 이 책의 핵심은 아니다. 저자는 온 세계를 휩쓸고 있는 획일적 세계화의 폐해를 지적하고 이를 막기 위한 부단한 방책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본서가 여전히 현대의 고전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다.

 

이 책의 핵심적 주장은 장문의 서문에 모두 드러나 있다. 글로벌 경제화는 본질상 획일성을 요구하고 지역의 문화 및 생물학적 다양성 요구에 무감각하다. 세계화가 공언하는 장밋빛 미래는 오히려 잿빛 미래를 지역 사람들과 사회, 그리고 생태계에 가져다주고 있다. 글로벌 경제화는 인류에게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으며, 오히려 공동체를 파괴하고 건강한 정체성의 근본을 재생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시킨다. 통일된 지구촌이라는 환상을 포기하고 세계화 경제의 대안인 지역중심경제로 근본적인 방향전환을 확산해야 한다.

 

서문만 읽고서도 완독한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저자가 이런 주장을 품게 된 배경과 경위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말만 앞서는 단순한 주의 주장은 이미 신물이 날 정도다. 내용만 보면 인류학자로 생각되지만 저자는 언어학자로서 라다크에 갔고 그네들과 함께 생활하며 언어를 익히게 됨으로써 가치관과 인생관에 있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개발로 인해 무너져가는 라다크 사회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라다크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방안을 모색하는 길에서 현대화의 그늘과 비정함을 깨닫게 되고 반개발을 주창하고 나서게 된 것이다. 후반부의 이론적 배경이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것이 저자 주장에 설득력을 높이고 공감을 심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1부는 저자가 바라 본 라다크 사회의 특징과 서구사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장점들을 경이의 눈으로 안내한다. 인도와 파키스탄 간 대규모 분쟁을 야기했던 카쉬미르 지방의 라다크 지역은 인접한 티베트 지역과 종교와 문화 및 생활양식 측면에서 유사하다. 물질자원이 부족하고 기후가 척박한 환경과 티베트불교가 주도하는 그곳 사회에서 사람들은 풍요롭지는 않지만 부족함 없이 행복한 삶을 오랜 시간 영위해 왔다. 책의 절반 가까이 되는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내게는 별달리 신기한 사항이 아니다. 많이 소멸되었지만 우리네 전통사회의 특징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상당한 문화적 동질감을 느낄 수 있다.

 

2부에서 개발에 따라 라다크 사회가 고유의 미덕을 잃고 변질되는 과정은 우리 사회가 지난 반세기 동안 겪어온 급격한 변화의 축소판에 다름 아니다. 물질적 측면을 제외한 여타 방면에서 우리네 삶은 개선되고 과거보다 행복해졌는지 자문해 본다.

 

현대화와 세계화는 그 자체로 절대악은 아니다. 봉건적인 인습에 고통 받고 절대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보다 인간다운 생활이 가능하도록 계몽하고 개발할 필요성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이 획일적 서구화와 동의어로 받아들여지는데 문제가 생긴다. 지구촌 사람들이 모두 서양식 주택에서 살고 서양식 복장을 하고 서양식 사고와 언어를 사용하는 제2의 바벨탑이 이루어지는 게 인류에게 행복은 아니다.

 

획일적 개발과 현대화는 도시화를 양산한다. 현대화는 인간적 가치보다 경제적 효율성을 중시하는데 사람들을 최대한 밀집시키는 것이 효율성 면에서 매우 유리하다. 급격한 도시화는 달동네와 판자촌, 슬럼을 초래한다. 아파트 공화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공동주택의 비중이 높아지고 이사가 빈번해지며, 이방인들이 대거 진입하는 도시에서는 사람들 사이에 교류를 기대하기 어렵다. 서로가 타인이 되며 인간적 관계는 단절된다. 현대사회를 삭막하다고 표현하는데 불가피한 현상이다. 인간적 감정이 깃들기에는 너무나 크고 고립되어 있다.

 

저자가 3부에서 제시하는 것은 잘못 설정된 개발과 세계화를 자연친화적이고 지속가능하며 생태보전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바로잡고자 하는 노력이다.

 

사회의 가치를 판단하는 여러 기준들 가운데 어떤 것이 더 중요한 것인가를 생각해본다면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구성원들의 행복이 그 척도가 되어야 하고 환경적인 측면에서는 유지가능성이 그 척도가 되어야 한다.” (P.251)

 

이러한 기준에 의거하여 저자는 반개발을 주장한다.

 

반개발의 우선적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적절하고 충분한 정보를 확보한 상태에서 스스로의 미래에 자율적인 결정을 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일이다......그 목표는 궁극적으로 사람들의 자긍심과 자급구조를 더욱 장려함으로써 생명체 유지의 다양성을 지키는 한편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진정한 의미의 지속적 개발을 창출하는 것이다.” (P.286~287)

 

한마디로 요약하면, 탈 중심화-문화적 다양성-와 소규모 공동체로의 회귀라고 하겠다.

 

생물 종의 다양성이 자연과 지구를 건강하게 하듯이 문화적 다양성은 인류를 위해 유지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대화는 다양성을 증가시킬 것처럼 예상되지만 기실은 다양성을 심각하게 파괴하고 있다. 잘못된 개발은 물질적 탐욕을 조장하여 채울 수 없는 인위적인 결핍감을 조장하고 구성원 사이의 끝없는 경쟁의식을 부추긴다.

 

깊이 있고 오래도록 지속되는 타인과의 유대관계를 통해 안정감과 자기 정체성을 유지해오던 라다크 사람들은 그것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 결과 자신들이 누군지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P.232)

 

작은 규모일수록 보다 인간적인 형태의 사회정의를 기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큰 규모의 공동체에서는 일상적으로 나타나는 갈등 요인들을 방지할 수도 있다.” (P.118)

 

경제적 척도만이 중요성을 가지는 요즘, 우리들은 전통사회가 지닌 마음의 평화나 가정과 공동체의 가치(P.188)를 모르며, 정서적, 사회적, 정신적 풍요로움(P.188)을 보지 못한다. 1인당 GNP2만 달러를 넘는다며 환호작약하는 무리들에게 부탄 국민들은 그저 불쌍한 최빈국의 사람들일 뿐이다. 저자의 말마따나 화폐경제 사회가 아닌 비화폐 경제체제나 자급경제체제에 속하는 곳에서 1인당 GNP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우리나라와 달리 부탄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세계 최고라는 조사 결과가 뜻하는 바는 의미심장하다.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행복의 향유에 있다. 경제력은 행복의 한 척도에 불과하다. 뉴욕 거리의 노숙자들과 부탄이나 라다크의 농부들을 똑같이 취급하는 오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이쯤에서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반추해 본다.

 

라다크의 문화를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 나는 집을 떠난다는 것은 개인의 성장에 있어 그 일부가 되는 것이며 성인이 되기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대가족제도와 작은 규모의 공동체 생활이 성숙하고 균형 있는 인격이 만들어지는 데 있어 더욱 훌륭한 기초를 형성한다고 믿고 있다.” (P.175~176)

 

가족 제도와 자녀의 독립성에 대한 오늘날의 주류 견해와는 전혀 반대되는 입장이다.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점들이 가족제도의 불완전성과 동요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 못한다. 핵가족 제도와 맞벌이 부모의 증가는 자녀들을 정서적으로 고립시킨다. 아이들은 어린이집에서 유치원에서 학교와 학원에서 온종일을 보내며 가족과 교류는 극히 제한적으로 편향적으로 이루어진다. 부모는 자녀에 대한 미안감을 물질과 교육에의 몰입으로 대신하려고 한다. 부모의 모든 자원은 자식의 성공을 위해 소진되며, 아이들은 학교와 사회에서 끊임없는 경쟁과 승리를 위해 내몰린다. 자칫 한눈팔면 그대로 사회의 낙오자가 될 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 속에 만능인을 키우고자 하는 부모와 아이들의 스트레스는 가정과 사회를 항상 긴장과 피로 속에 몰아넣는다. 이게 우리 시대의 현실이다.

 

서구중심의 교육제도는 필연적으로 피교육자에게 자기 자신과 자신들의 고유문화에 대한 열등감(P.216)을 유발한다. 가르치는 이와 가르치는 내용 자체가 서구의 우월성을 명시적으로 묵시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자존감과 고유한 전통을 상실한 이들에게 어떤 미래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우리 문화의 뿌리 깊은 백인 편향적 사고는 현대화와 함께 시작되었다. 건국을 도와주고 초콜릿에 감읍하며 서구식 교육의 수혜를 받은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사회 체제. 자신에게 내재한 속물적 근성을 인정 못하는가. 서양인들에게 왠지 주눅 들면서 뒤돌아 흑인이나 아시아의 갈색 인종을 백안시하는 행태는 남의 사회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들은 그네들을 경시하지만 우리에게 서구적인 요소를 제외하고 나면 남는 것은 속빈 뼈대밖에 존재하지 않음을 스스로 알지 못한다.

 

현대화와 사회개발은 대단위 자본과 자원이 투입되는 일사불란한 공장식 시스템이다. 오래된 것은 가치를 불문하고 모두 엎어버리며 도로와 빌딩, 학교, 공장, 아파트 등 대량생산품으로 대체되는 토목공사 형식이다. 전통과 고유성에 대한 배려와 고민은 눈곱만큼도 없다. 현대화란 지역의 다양성과 독립성을 하나의 단일 문화와 경제체제로 대체하는 과정을 의미한다고 저자는 밝힌다. 멀리 라다크를 내다볼 것도 없이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충분하다. 숱한 신도시 건설과 도심 재개발은 불도저로 대변되는 백지 개발의 전형이다. 개발에 반대하는 소수는 공권력의 힘으로 억압되기 일쑤였다. 도시에는 공지(空地)의 존재를 허용해서는 안 되는 강박관념이 풍미하고 있다. 수년 전 서울 성북동의 재개발을 둘러싸고 외로운 싸움을 벌인 외국인에게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지 않았는가.

 

개발의 목적 자체의 정당성에도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빈곤을 개선하기 위해 개발이 시도되고 정당화된다. 저자는 현대사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점이 빈곤과 인구과잉이며, 문제의 원인이 인습적인 경제개발에 있다고 지적한다. 경제개발이 추진하는 도시화와 산업화는 농경 및 지역경제를 무시하는 한편 전례가 없었던 대규모의 빈곤을 초래한다고 주장한다. (P.272)

 

저자는 “(관습화된) 개발이란 많은 경우 착취나 신식민주의의 완곡한 표현이라고 단언한다. 비화폐경제권에 속해 있던 제3세계의 전통 사회를 강제로 화폐경제에 편입시키고 자유시장주의라는 주류적 경제기준으로 잣대를 매기면 졸지에 화폐경제권의 최하위권에 위치할 수밖에 없다. 일단 편입되면 화폐경제 시스템에서 헛되이 바위를 굴려 올리는 시지포스처럼 선진국들의 뒤꽁무니를 영원히 뒤따르게 된다. 선진국의 정부와 파워엘리트, 다국적 기업들은 자신들의 우세한 지위를 결코 양보할 생각이 없으므로.

 

WTOFTA로 대변되는 자유시장 경제는 경제 집중화 현상을 가속화하고, 국가의 권력을 (다국적) 기업에 양도하고 있다. 농수산업 종사자는 피해를 입지만 반도체와 자동차 기업은 혜택을 보는 구조. 수학적 단순 합이 양의 결과가 나오면 국익에 이롭다는 눈 가리고 아웅식 주장은 옳지 않다. 이익을 보는 집단과 피해를 받는 계층은 동일하지 않다는 현실 자체가 문제점을 유발한다. 사회적 이익을 위해서 특정인에게만 파산을 요구하고 그 대상이 당신이라면 받아들이겠는가? 게다가 기업은 속성상 이익을 추구하는데 혈안이 되기 마련이며, 돈은 도덕을 요구하지 않는다. 맹목적인 다국적 기업의 종횡무진은 결국 국가와 국민을 기업 이윤의 노예로 만들게끔 한다. 그들의 눈에 인간은 보이지 않는다.

 

이 책이 발간된 지 20여년이 경과되었음에도 여전히 신선하고 설득력이 높다는 점에서 기쁘기도 하지만 씁쓸함을 억누를 길이 없다. 저자가 지적한 관습화된 개발과 현대화 및 세계가 당대는 물론 현재도 현재진행중이다. 파워엘리트들은 자의든 타의든 여전히 토건지향적 경제관에 사로잡혀 있고, 세계 도처에서 수많은 라다크는 여전히 소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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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랜포드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44
엘리자베스 개스켈 지음, 심은경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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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시대의 제인 오스틴이라 불리는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다. 확실히 오스틴 풍이 느껴지는데 개인적 그리고 시대적 차이가 미묘하며 색다른 풍미를 자아낸다. 제인 오스틴의 스타일을 은근한 유머로 표현한다면 개스켈은 직설적인 개그에 보다 가깝다. 독자의 웃음과 재미를 끌어내는 방식이 문체와 표현에서 보다 노골적이다. 자 이런 재밌는 대목이 있는데 한 번 웃어주지 않겠어요? 라고.

 

독자는 <크랜포드>에서 19세기 중반의 대영제국 시절, 시골의 하층 귀족과 중류층들이 살아가는 전형적인 모습을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다. 제인 오스틴의 글쓰기 소재가 가정과 연애 등 너무 미시적인 게 아닌가하는 비판가라면 개스켈을 앞두고는 아예 넌더리를 낼지도 모르겠다. 반복되는 일상사의 자잘한 행위들이 지칠 줄 모르고 작가의 손에서 독자에게로 전달된다. 과연 이 정도까지 당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세세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더구나 영국인도 유럽인도 아닌 일개 동양인이 말이다.

 

작품의 구성은 화자인 메리 스미스 양의 시각을 통해 본 크랜포드 마을의 인물군상들의 삶과 사건들이 열여섯 개의 장으로 배치되어 있다. 화자는 크랜포드 주민은 아니지만 가장 중심인물이라 할 수 있는 매티 양의 손아래 친척이자 친밀한 관계로 자주 방문하여 머무를 수 있는 인물이다. 관찰자로서는 적격자라고 하겠다.

 

크랜포드 마을은 여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며, 최고 지위는 귀족인 제미슨 부인이 누리고 있지만 사실상의 지도자는 매티 양의 언니인 젠킨스 양이다. 잠시 캡틴 브라운이 등장하여 호각세를 이루지만 그와 젠킨스 양이 잇달아 세상을 뜬 후 사건의 중심은 곧바로 매티 양으로 넘어간다. 사실 여기서 OOO 양하면, 결혼을 하지 않은 미스(Miss)의 개념인데 언뜻 생각되는 것과 같은 젊은 아가씨들이 아니다. 가장 젊은 축에 드는 화자마저도 대략 중년으로 추정되며 대부분 오,육십대의 어찌 보면 할머니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매티 양은 작품 내내 일관된 캐릭터로 등장하는데, 똑똑하고 과단성 있는 언니에 비해 소심하고 내성적이며 말수도 적고 세상사에 대해 경험도 부족하다. 사소한 일에도 결정을 못 내려 갈팡질팡하기 일쑤며 아랫사람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여 쩔쩔매기도 한다. 이루어지지 못한 결혼의 기억을 망각하지 못하고 상처와 추억에 전전긍긍하는 딱한 인물이기도 하다. 즉 순진무구하고 착하기만 초로의 할머니라고 하는 게 딱 어울린다.

 

매티 양과 함께 마을의 사교 클럽을 구성하는 인물들이 폴 양과 포레스터 부인, 후반에 등장하여 파격과 재미를 마을에 안겨주는 레이디 그렌마이어(의사인 평민 호긴스와 재혼하여 호긴스 부인으로 신분 하락을 스스로 선택한다) 등이 있는데, 이들의 일상생활은 지금 관점에서 보면 고리타분하지만 나름 진지하고 심각하며 고상한 예의범절과 관습의 거미줄로 세세하게 얽매여있다. 그네들에게는 정해진 예법의 틀을 무시하고 깨뜨리는 인물이야말로 몰상식하고 지위가 낮은 사람들의 행동으로 인식되므로.

 

특별히 해야 할 일도 없고 반복되는 평온한 일상을 누리는 그들에게 주된 관심은 생계와 생활이 아니다. 비록 넉넉하지 못한 형편일지라도 겉으로는 절대 내색하지 않으며 알더라도 모르는 척 외면해주는 게 그네들의 미덕이다. 그래서 모임에 나갈 때 입을 옷과 모자의 패션을 고르는 일이 중대 관심사가 되며, 사교모임과 파티에서 불러야 하는 호칭과 현관에서의 영접 예절, 음식서빙 방식이 간과할 수 없는 화제가 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내내 계속된다면 그다지 별 볼일 없는 작품이 아니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당대의 (특정한 한 유형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지만 크게 와 닿지 않는 평범한 대중 소설로 말이다. 그렇다면 제인 오스틴을 빗댄 평가는 잘못된 허명(虛名)이란 말인가?

 

후반부에서 주인공 매티 양은 전 재산을 투자한 은행의 파산으로 경제적으로 영락하게 된다. 중산층에서 하류층으로 말이다. 이때 친구들이 몰래 기부형식으로 그녀를 돕기 위하여 여유롭지 않은 형편에서 나름 최선을 다하는 대목은 감동적이다. 게다가 어릴 적 헤어졌던 동생 피터 씨가 귀국하게 되어 그야말로 새옹지마의 인생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모든 게 해피엔딩으로 매조지하는 것 또한 제인 오스틴의 주특기가 아니던가!

 

제인 오스틴은 젊은 남녀 간의 사랑과 결혼을 소재로 하여 당대인의 삶의 단면을 반짝반짝 넘치는 재치로 우리에게 보여준다. 시간이 경과한 현대의 관점에서 볼 때 비록 생활양식은 달라졌지만 오스틴이 제기한 인물들의 행동과 가치관이 빚어내는 고민과 삶의 모습은 여전히 유효하다.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작품 성향과 세계를 이 한 편의 소설로 재단할 수는 없지만 그녀는 남녀 간의 관계보다도 좀 더 시야를 넓혀서 마을 사람들 개개인에 동등한 관심을 쏟고 있다. 그네들의 다양하며 아기자기한 삶들이 부딪쳐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뿌려주는 가운데 슬픔과 기쁨이 어울려 삶의 각 단면을 구성한다. 그러면서 삶은 굴러가는 것 아니겠는가. 제인 오스틴과 마찬가지로 개스켈 또한 사람이 선하고 바르며 따뜻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으면 행복을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작가는 매티 양을 끝내 저버리지 않는 신의를 지킨다.

 

작가가 살던 시대에 이러한 삶의 장면은 보편적인 동시에 서서히 스러지는 옛 영화의 자취이기도 할 것이다. 이미 산업혁명의 파고는 도시화와 기계화를 가속화하고 있으며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어 빈민층들의 참혹한 삶에 대한 인식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작가가 찰스 디킨스와 친분이 깊었음을 상기해보라!) 좋았던 옛 시절 (belle epoch)의 아름다운 미덕들, 그것은 이미 도시에서는 찾기 힘들게 되었고 크랜포드 같은 시골에나 겨우 숨 쉬고 있을 정도이다. 작가는 사라져가는 선인들의 여유롭고 따뜻하며 예의가 갖추어진 인정과 문화를 동시대인과 후대인들의 기억 속에 오롯이 남기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문명화의 거스를 수 없는 대세를 반대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한번 망실되면 회복하기 어려운 소중한 무언가를 간단히 버리면 안 된다고 하면서.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산업화와 도시화가 극적으로 구현된 현대사회의 우리 또한 무관한 남의 나라 옛이야기를 보듯 무심하게 여기기 어려울 것이다. 크랜포드 작은 마을의 잔잔하며 소소한 이야기가 더더욱 마음을 울리는 연유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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