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이유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제인 구달 지음, 박순영 옮김 / 궁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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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 모 방송사의 느낌표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적으로 알려진 책이다. 침팬지 연구가로서의 저자의 이력으로 기본적으로 침팬지 연구서로 추정하였다. 실제로는 제인 구달의 삶과 연구의 여정과 발견을 기술한 책으로서 저자가 침팬지 연구를 통해서 깨닫고 인간에게 제시하는 성찰과 통찰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저자는 영적인 자서전이라고 자술한다.

 

유명인들이 노년에 자신의 삶을 화려하게 치장하는 그저 그런 책이 아닐까 의구심이 떠올랐다. 더구나 제인의 침팬지 연구와 아프리카 행을 어릴 적부터의 운명으로 연결 짓는 대목에서 특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초의 미미한 연관을 침소봉대하여 운명론적으로 합리화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이러한 색안경은 책장을 넘김에 따라 자신의 삶과 침팬지 연구를 교차시키면서 담담하게 기술하는 문장에 서서히 젖어들면서 어느덧 사라져버렸다. 저자는 자신의 약점과 개인적 불행과 가족의 비극을 숨기거나 한치의 과장도 덧대거나 포장하지 않으면서 시종일관 스스로에 대해 겸손한 자세를 취한다.

 

제인이 침팬지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개방된 마음, 지식에 대한 열정, 동물에 대한 애정, 그리고 지극한 인내심을 가진 사람이었고 근면하고, 긴 시간을 문명 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져 지낼 수 있는 사람”(P.86)이었기 때문이다.

 

책의 내용을 통해 침팬지 생태에 대한 연구의 연원이 그리 오래지 않았음과 제인 구달이 거의 시초임을 여기서 알게 되었다. 더욱이 침팬지가 도구를 사용할 줄 안다는 점은 오늘날 코흘리개들도 아는 사실인데 당시에는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는 것이 오히려 흥미롭게 다가온다.

 

저자는 전통적 방법론에 따라 과학 공부를 하지 않았다. 게다가 일찍부터 종교와 신비주의, 명상, 영적인 체험에 상당한 관심과 무게중심을 두었으며 내내 변치 않는다. 이런 점에서 초월적 객관성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전통적 과학론에서 비판을 받지만 반대로 대상은 관찰자의 감정과 태도에서 자신을 온전히 드러낼지 아니면 감출지를 판단한다. 이것이 관찰 결과에서 커다란 차이를 좌우한다. 제인은 이렇게 기술한다.

 

이 지능적인 존재들에 대해 내가 이해가고 있는 것 대개는 감정 이입을 함으로써 비로소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P.114)

 

이러한 제인의 입장은 우리 눈에는 지극히 동양적 관점에 맞닿아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동질감과 친밀감마저 느끼게 된다. 생명의 존재 목적과 이유, 개체를 통한 전체의 이해와 책임의 각성. 이것은 인간을 타 생물과 구분되는 상위의 존재로 설정하고 군림과 지배를 당연시하는 관점이 아니다. 타 생명 역시 인간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지구 생태계의 소중한 일원이다. 인간은 전혀 자신을 오만하게 여겨야 할 근거가 없다.

 

물론 우리는 독특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온 것처럼 동물 세계의 다른 동물들과 그렇게 많이 다르지는 않다.” (P.278)

 

인간이 유인원에서 분화하여 별개의 종으로 진화한지 기껏 기백만 년에 불과하고 스스로를 우월하고 잘난 존재로 여기게 된 지 불과 수천 년 남짓하다.

 

제인은 아프리카 곰베에서의 생활에서 거의 완전한 만족과 행복을 누린 듯하다. 이런 평화는 항상 그러하듯이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는데, 유년 시절에 제2차 세계대전을 겪고 홀로코스트에 충격을 받은 제인은 탄자니아에서 침팬지 관찰을 하는 도중에 원치 않게 콩고와 부룬디, 르완다에서 발생한 종족 분규와 학살에 가까이 직면하게 된다.

 

인간이라는 종은 태생적으로 폭력성을 타고난 것인가? 이는 어떠한 수단으로도 결코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뿌리박힌 치명적인 결함인가? 침팬지를 지극히 사랑하는 제인이지만 침팬지 무리에 내재한 폭력성의 뿌리를 놓치지 않는다. 그녀에 따르면 고상한 유인원의 신화는 없다. 마음 아프지만 진실에 눈 감을 수는 없다. 폭력성은 모든 영장류의 피에 내재하는 숙명인가? 그녀는 끊임없이 자문한다.

 

인간은 본능을 뛰어넘어 두뇌를 악의적인 목적으로 의도하여 사용할 수 있다. 침팬지 같은 동물의 단순한 폭력적 본능과는 층위의 수준이 다르다. 인간의 폭력성과 동물의 그것과의 상이점이 여기에 있다.

 

책 중반부는 저자가 인간 사회의 폭력성의 원인 탐구와 이의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인간사회의 폭력성의 뿌리를 설명하는 기본 개념으로 의사종분화(pseudospeciation) 또는 문화적 종분화의 개념이 등장한다. 후자의 개념 정의가 쉬운 이해에 더 도움이 되었다.

 

의사종분화란......개별적으로 습득된 행위가 특정한 집단 내에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간이 지나면 이것은 그 집단의 집합적인 문화가 된다.” (P.171)

 

문화적 종분화가 극단적으로 되면, 외부 집단의 구성원들을 비인간화하고, 나아가서 그들을 거의 다른 종의 구성원으로 간주하게 할 수 있다. 이것은 집단 내에서 작동하는 금지와 사회적 제재로부터 구성원들을 자유롭게 하고, 집단 내에서 허용되지 않는 행동을 타자들에 대해서는 할 수 있도록 한다. 저울의 한편에는 노예제와 고문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비웃음과 사회적 매장이 있다.” (P.172)

 

불행하게도 문화적 종분화는 전세계에 걸쳐 인간 사회에서 고도로 발전되어 왔다. 선별된 내부 집단들을 만들어 민족적 배경, 사회 경제적 지위, 정치적 확신, 종교적 믿음 등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을 제외시키려는 경향은 전쟁이나 폭동, 갱 폭력, 그리고 다른 종류의 분쟁들을 야기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이다.” (P.174)

 

제인은 문화적 종분화가 인간의 도덕적 성장을 저해하고 사회적 평화를 방해하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지적한다. 이 개념으로 작금의 우리 사회를 한번 보자. 종교 대립과 지역 갈등, 학연과 혈연의 고착화, 우리와 그들의 구분. 학생들 사이의 왕따 현상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를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좌우 이데올로기의 충돌은 어떠한가? 문화적 소집단이 개인에게 제공하는 안전과 위안의 장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요는 동호회와 친목회가 배타적 이익집단으로 기능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집단구성원의 강한 결속력을 요구하면서 집단 경계 밖의 타자에게는 차별이 당연시하도록 인지를 왜곡시킨다. 나치의 유대인 차별과 홀로코스트가 전형적인 사례다.

 

하지만 제인은 인간에 대하여 긍정적인 시선을 포기하지 않는다.

 

절반은 죄인이고 절반은 성자인 우리 인간 영장류는 고대로부터 물려받은 두 가지 상반된 성향, 즉 폭력에 이끌리는 한편 동정심과 사랑을 느끼는 성향을 지니고 바로 여기에 서 있다.” (P.185)

 

우리가 공격적인 충동을 따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다행스런 일이다......나는 정교한 지성으로써 자신이 감당해야 할 당시의 대가뿐만 아니라 장래의 대가들을 다 알면서도 희생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인간뿐이라고 확신한다.” (P.188)

 

제인은 도덕적 진화라는 개념에서 희망의 끈을 찾는다. 인류는 생물학적 진화만 거듭해 온 것이 아니다. 도덕적인 면에서도 본능에서 고상한 수준으로 상승하고 있다. 다만 도덕적 진화는 진전이 느리기에 생물학적 진화와 불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분명 도덕적 진화는 짧은 기간에 큰 성취를 이룩했지만 현대 사회와 같이 문화적 종분화가 극심해지는 상황에서 절실한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더 높은 수준으로의 진화는 단기간 내에 실현을 기대하기 힘들다.

 

수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지구상에 서서히 생겨나고 생존해 온 우리 인류가, 이제 덜 공격적이고 덜 호전적이며 점차 배려하고 공감하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는 도덕적 자질들을 획득해가는 과정에 있다.” (P.239)

 

우리가 도덕적 진화를 가속화하고 인간의 운명에 조금이라도 빨리 도달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우리 모두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인간 존재로부터 성인으로 진화해야만 한다. 당신과 나 같이 범상한 사람들은 성인, 적어도 작은 성인이 되어야만 한다.” (P.251)

 

신을 믿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 즉 무신론자들은 어떠한가? 내 생각에는 다를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인간성에 봉사하고,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사랑과 존경으로 대하는 삶이야말로 성자와 같은 행동의 정수인 것이다.” (P.254)

 

나는 우리 인간들이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도덕적인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나도 잘 알고 있듯이,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래서 나는 단지 한 사람 한 사람이 조금씩이라도 더 성인다워지도록 노력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P.255)

 

제인은 인간이 작은 성인이 되어야 한다고 외친다. 개개인이 도덕적으로 뛰어난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할 때 도덕적 진화는 앞당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그녀의 어조는 차라리 종교적이다.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비관적 전망과 희망의 기대가 엇갈려 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실적인 차원에서 실행가능성이 높은 것은 차라리 동물 학대 금지와 존중이라는 인도적 방책의 추구라고 하겠다. 제인은 궁극적으로 동물 실험을 없앨 것을 주장하며, 채식까지는 나아가지 않더라도 비인도적 환경에서 양육되는 동물들의 처지를 개선하고자 애쓴다. 그것은 동물들뿐만 아니라 (불가피하게 육식을 해야만 하는) 인간 자신의 온전한 생존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그녀도 현실이 녹록치 않음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운명의 시간은 가속적으로 다가오고 있는데 우리들의 대응은 미적지근하기 그지없다. 자칫하면 인간이라는 종은 자신들만 그치지 않고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와 함께 동반자살을 감행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녀는 변화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여전히 품는다.

 

내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네 가지이다. 인간의 두뇌, 자연의 회복력, 전세계 젊은이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또 타오르게 할 수 있는 에너지와 열정, 그리고 마지막으로 불굴의 인간 정신이 그것이다.” (P.289)

 

바울이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기독교의 사도가 된 것처럼 제인 구달은 시카고 학술대회를 계기로 침팬지 연구가에서 동물보호론자, 나아가 환경보호론자 및 문명비판가로 변모하였다. 자신이 사랑하는 침팬지 종의 생존을 보호하는 길은 우리 인간과 사회, 문명의 전반적 반성과 개선이 없으면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점을 깨달았던 것이리라. 또한 우리 인간이 스스로 각성하지 않는다면 나아가 인류의 미래마저도 밝지 않으리라는 사실도 제인은 꿰뚫어보았다.

 

제인의 변모의 배경에는 생명에 대한 사랑이 기저에 자리잡고 있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남도 사랑할 수 있다.

 

우리가 사랑해야만 하는 자신은 우리의 자아도 아니고, 아무 생각도 없이 이기적으로, 그리고 때로는 불친절하게 행동하고 돌아다니는 일상인도 아니다. 우리 각각의 내면에 있는 창조주의 일부인 순수한 영혼의 불꽃, 즉 불교도들이 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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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 - 굳게 닫힌 연인의 마음을 여는 열쇠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4
제인 오스틴 지음, 조희수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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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제인 오스틴에게,

 

어느덧 당신을 만날 수 있는 마지막 때가 다가왔군요. 당신의 글을 통해서 심오한 사상의 무게와 현학적인 문구의 더께에 짓눌려 문학과 책읽기의 즐거움을 새삼 깨닫게 된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일상 속의 진리, 평범 속의 비범이라는 문구는 다소 상투적이지만 그래도 제 심경을 비교적 온전히 전달해주는 표현입니다.

 

이 소설은 당신의 완성된 작품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집필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40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만큼 초기작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를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확실히 그렇게 보입니다. 작가 자신의 모습이 짙게 투영된 작품이라고 하면 오독일까요? 주인공의 나이 설정에서 확연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작중 앤의 나이는 27세입니다. 이전 당신 작품 속 여주인공의 나이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을 벗어나지 않았지요. 그건 당시 여성들의 결혼 적령기를 반영하고 있어서입니다. 그래서 한 작품에서는 여성의 나이가 20대 초반에 이르자 여성의 엄마가 안절부절 못하는 장면도 나타나지요. 그렇다면 앤은 당대 기준으로는 노처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정도라면 30대 중반 정도? 한 평생 독신으로 지낸 당신으로서는 꽃다운 나이의 여성에게만 사랑과 결혼의 행복을 안겨주기에 싫증이 났던가요 아니면 불현 듯 자신의 체험을 통해 적령기를 벗어난 여성에게도 배려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앤은 첫사랑과 결혼에 실패하였습니다. 주변의 반대가 심한 까닭에 당시 어린 그녀는 이를 감내할 용기가 부족했지요. 덕분에 그녀의 전성기는 빠르게 지나가고 말아서 이제는 시들고 야위어 버린 상태가 되었습니다(P.13). 지금의 그녀라면 과거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만일 그 당시의 자기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젊은 사람으로부터 조언을 부탁 받는다면, 장래의 불확실한 행복을 위해 현재의 고통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P.44)

 

여기서 앤의 성품을 되짚어봅니다.

 

마음씨가 곱고 성격이 온화해서 진정으로 남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들로부터는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말이다.” (P.13)

 

남의 마음을 사로잡는 그녀 특유의 상냥함과 품위는 곧 효력을 발휘해서......” (P.137)

 

앞의 회한과 위의 성품을 통해 독자는 앤이 드물게 보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갖춘 여성임을 알게 됩니다. 그녀의 가족인 엘리엇 가문의 다른 구성원에게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자질이지요. 앤은 어릴 적 자신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습니다. 후에 웬트워스와 사랑을 재확인하고 결혼을 진행할 때 단호한 결정을 내린 것은 당연합니다.

 

앞선 작품들과 구분되는 특징의 또 하나는 소위 가문에 대한 집착의 경시와 행복한 가족의 요건에 대한 당신의 뚜렷한 주장입니다. <오만과 편견>에서 다아시의 주저와, <엠마>에서 엠마가 강조했던 신분과 가분에 대한 강한 의식은 여기서 희화화됩니다. 앤의 아버지인 월터 엘리엇 경이 준남작 명부만 꺼내 읽는 소설의 첫 대목이 이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내면에는 눈과 귀를 닫은 채 오로지 껍데기뿐인 작위와 가문만을 따지는 당대의 관행에 일침을 가하고 있지요. 앤이 그나마 긍정하는 것은 내실과 품위가 뒷받침되었을 경우의 가문일 따름입니다.

 

그녀는 신분이나 친족관계 문제에 대하여 대체로 하찮게 여기고 있지요(P.204). 오히려 그녀는 가족들이 한수 아래 낮추어보는 머스그로브 가족에게서 참된 가족의 모습을 찾고 있습니다. 앤은 자신의 집안에서 무관심과 냉대의 대상입니다. 가족 간에 애정이 없기 때문이죠.

 

집안에서 그녀의 말은 무시당했으며, 그녀의 편의는 언제나 맨 마지막으로 고려되었다. 그녀는 그저 앤에 불과했던 것이다.” (P.13)

 

그럼 앤은 여기 머물러 있는 편이 낫겠구나. 바스에서는 앤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을 것 같으니까.” (P.49)

 

이건 진심입니다. 앤은 부인과 비교할 때 저에게 아무것도 아니에요.” (P.199)

 

이런 그녀에게 있어 아웅다웅 하지만, 전적으로 애정과 신뢰에 기반을 둔 머스그로브 가족에게서 부러운 화목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하지만 앤은 갑자기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탐탁지 않고 불편하더라도 모든 일은 같이 알고 행해야 한다는 것, 그게 바로 머스그로브 가의 오래된 관습이었던 것이다.” (P.115)

 

앤과 웬트워스 간 관계의 회복과 진전에 대한 장밋빛 암시는 오랜만의 재회 및 상면 장면부터 등장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행복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웅크리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P.85)

 

두 연인이 사랑이 식어서 헤어진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외부적 여건에 의해 장기간 이별상태에 놓였다가 재회하게 됩니다. 두 사람 모두 아직 결혼하지 않은 채 그대로입니다. 이때 두 사람의 심경은 그새 애정이 식었든지 아니면 재 속의 불씨처럼 계기만 있으면 활활 타오르지 않겠습니까. 처음엔 어색하고 서먹서먹하겠지만 상대방의 마음이 여전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달라지겠죠. 웬트워스의 태도처럼 말입니다. 그의 가슴 속은 깊디깊은 회한으로 가득합니다.

 

저는 제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굳건하게 지키라는 겁니다.” (P.121)

 

그는 사랑을 두려워합니다. 친구인 벤윅 대령의 사랑에 빗대어 진실한 사랑의 절대성을 다음과 같이 옹호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깊고 지순한 사랑이 그리 쉽게 포기될 수 있는 거죠? 무언가 잘못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웬트워스가 듣게 된 앤의 진실한 사랑관은 웬트워스 자신의 것과 판박이와 같습니다. 다음의 말을 듣게 된 웬트워스가 앤의 진심을 알게 되고 사랑의 감정에 자신을 맡기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겠죠.

 

분명히 여자들은, 남자들이 여자를 잊어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남자를 잊어버리지 못합니다. 그것은 여자들의 미덕이라기보다 운명이에요.” (P.322)

 

남자들은 분명히 사랑하는 사람이 있거나 소중한 대상이 있을 때 자기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고 보호하고자 하겠지만, 여자들은 그 대상이 사라진 후에도 사뭇 오랫동안 잊지 못하고 가슴속에 간직해 둔다는 거죠.” (P.326)

 

이전 작품들에서 미스 제인 오스틴 당신은 다소간 우여곡절은 있지만 만남에서 결혼까지 멈춤 없는 사랑의 과정을 전개하였습니다. 읽는 이로서는 매우 흐뭇한 일이지만 사실 이상적인 연애와 결혼의 단계라고 하겠습니다. 실제 남녀 간의 사랑에는 굴곡이 존재합니다. 사소한 견해차가 나비효과를 발휘하여 이별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이 작품에서 당신은 단절된 사랑의 재결합을 다룹니다. 신분과 재산의 격차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 헤어졌음에도 잊지 못하고 결국 합치게 되는 사랑. 이것은 공상적이지만 오히려 더욱 현실적이기도 합니다. 사랑에는 기쁨보다는 더 많은 슬픔과 괴로움이 존재합니다. 그러기에 사랑을 노래한 많은 예술가들이 행복한 연인의 얼굴에 눈물을 그리는 게 아닐까요?

 

남성도 그러하지만, 여성에게 있어 사랑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습니다. 앞서 앤의 미모의 절정기는 금세 지나가서 쇠락한 모습으로 보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앤이 웬트워스를 의식하면서 아름다움을 되찾아 새벽이슬을 머금은 청초하면서도 눈부신 자태를 가진 여성으로 변모하였습니다.

 

아침바다의 상쾌한 바람 때문이었을까? 그녀의 눈에는 생기가 넘치고 얼굴에는 싱싱함이 가득 고여 있었다. 단정하면서도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은 마치 예전의 앤 엘리엇의 잔영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고 있었다.” (P.143)

 

남녀 간 애정사를 포함하여 사람 간의 진실한 관계는 외풍에도 흔들림 없는 단단한 사랑과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그것은 시작인 동시에 끝이기도 합니다. 당신의 <설득>에서 제가 발견한 삶의 미덕이랍니다.

 

이제 미스 제인 오스틴 당신과 헤어질 때가 되었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작품을 다룬 책을 읽어볼까 했지만 부질없는 것 같아서 그만두었습니다. 웬만해서는 재독을 하지 않는 성향으로 당신 소설들을 다시 읽을 가능성도 희박합니다. 즐겁고 아름다운 추억은 가슴 속에 묻어둘 때 더욱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저도 당신과 당신이 창조한 인물들의 기억과 상념을 품에 안은 채 여기서 작별 인사를 합니다.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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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박철 옮김 / 시공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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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키호테 1부를 읽은 후의 짤막한 상념들

 

먼저 이 촌평은 114일에 쓴 것이다. 한동안 뭉그적거리다 마음을 다잡고 단숨에 초고를 어지럽게 적어놓았는데, 일단 생각난 바를 대강 쏟아놓은 후 차츰 틀을 잡아 정리를 해나갈 의도였다. 하지만 세상사가 어디 생각대로 되던가. 어찌어찌 하다가 차일피일 미루게 되고 보니 두 달쯤 시간이 경과하게 되었다. 다시 읽어보니 한심할 정도로 형편없게 느껴지지만 이제 독서에 대한 상념도 오락가락 하는 사정인지라 다시 가다듬는다는 게 터무니없을 것 같아 그냥 초고 그대로를 수록한다. 그래야 책상 한구석에 놓인 책도 치울 수 있을 것이며 내 마음도 찜찜함을 덜 수 있을 것이다.

 

      

1. 구입한 지 거의 십년이 다되어 읽다. 그리고 읽은 지 3개월가량 지나 겨우 촌평을 쓰다. 아니 이것은 촌평이 아니라 차라리 넋두리다. 백에 구십구 인이 좋다고 하는데 이에 공감하지 못하는 일인이 어디에 하소연할 데도 없어 속으로 끙끙거리다가 조심조심 토로한다. 임금님 귀의 진실을 숲에서 외치는 심정으로.

 

2. 중학교 때 헌책방에서 구한 삼성판 세계문학전집의 돈키호테를 읽었는데 너무 오래되어 머릿속에 아무런 기억도 남아있지 않다.

 

3. 굉장한 기대를 가지고 완독을 마친 소감은 흠, 글쎄, 뭔가 미진함. 솔직히 썩 만족스럽지 않다. 그 이유를 생각해본다.

 

4. 돈키호테를 제외한 국내 번역된 세르반테스의 주요 작품들은 거의 읽었다. 다른 작품들은 무척이나 흥미롭게 느껴졌다. 세르반테스의 어법에 친숙하지 않아서라는 비판은 적절치 않다.

 

5. 역으로 세르반테스를 여럿 읽은 게 돈키호테의 매력을 감소시킨 게 아니었을까? 아니다. 그렇다면 돈키호테는 세계문학사상 첫손 꼽히는 불후의 명작의 자격이 없다. 고전과 명작은 다른 작품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독자적인 아름다움과 가치를 지닌다.

 

6. 돈키호테의 뛰어남을 알아채지 못한 지적 수준이 낮은 독자에게는 책임이 없는가? 확실히 그럴 수도 있다. 문학 작품, 특히나 돈키호테처럼 해학적 재미를 전면에 내세우는 소설의 경우 분석보다는 자체의 감흥을 중시한다. 문학의 가치는 일차적으로 감동(감명 또는 재미도 포함해서)이다. 분석과 비평은 후순위다.

 

7. 혹시 망설이지만 번역 상의 문제는 없을까? 이 대목에서는 조심스러워진다. 번역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스페인어문학자이며 세르반테스 연구가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도 그가 번역한 세르반테스의 작품에서 불만을 느낀 적이 없다. 한 가지 걸리는 점은 있다. 이것은 그의 전적으로 단독 번역이 아니라 대학원생들과 합동 번역이라는 점이다.

 

다른 이야기지만, 삼국지연의 번역에 있어 많은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는 김구용 번역본을 선호하지 않는다. 한줄 한줄 원문에 최대한 가깝게 꼼꼼하게 번역한 점은 평가할 만하지만, 읽다 보면 내가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읽는 건지 아니면 한문 고전을 읽는지 헷갈린다. 삼국지연의는 대중들을 위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면에서 이 책에서도 번역 자체에는 흠잡을 만한 부분이 별로 없다. 다만 어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돈키호테는 출판 후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서 무수한 아류본을 양산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대중 친화적인 작품이라면 정통 고전 어투가 아니라 통속적이며 구어체적 요소가 강했을 것이라는 게 무리한 추론은 아니리라.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완전히 배치된다.

 

결국 이 사항은 다른 번역본을 읽어야만 비교가 가능하다. 민용태 번역본을 잠깐 훑어보았다. 단독 번역에 구어적 어투를 반영하고 있다. 차후 이 번역본을 읽고 나서도 별다른 반응이 일지 않는다면 전적으로 독자의 함량 미달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판단 불가 상황이다.

 

8. 내용상으로 볼 때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이 눈에 들어온다.

 

1) 마르셀라 이야기 (P.168~169)

 

아름답기에 사랑받는 사람이 자신이 사랑받는다는 이유로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듭니다.”

저는 자유롭게 태어났고, 또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해 초원에서의 고독을 선택한 것입니다.”

 

사랑을 거절당한 그리소스토모가 죽자 친구 암브로시오는 마르셀라를 비난한다. 이에 대한 마르셀라의 답변은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논리정연하다. 마르셀라의 외침은 여권주의의 구호를 수백 년 앞서 선구적이다.

 

2) 죄수들을 풀어준 이야기 (P.267)

 

강제로라고? 아니 국왕 폐하께서 무슨 일을 강제로 시키는 게 가능하단 말이냐?”

죄목이 어떻든지 간에 이 사람들이 가고 있는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강요라는 것 아니냐?”

 

돈키호테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최우선시하고 있다. 국왕일지라도 의지에 반하여 강제로 형벌을 부과할 수는 없다. 사회 정의를 무시하는 발언인 듯하지만, 여기에는 정당성을 갖지 못한 기득권층과 지배층의 강압에 대한 반발심이 내재된 것이다.

 

3) 둘시네아 공주의 숭배 이유와 돈키호테의 이성 (P.327)

 

내가 둘시네아 델 토보소 공주님을 사랑하기에, 그분은 나에게 지상에서 가장 고귀하신 공주님인 것이다......나 역시 알 돈사 로렌소라는 훌륭한 아가씨를 아름답고 정숙하다고 생각하고 믿으면 그걸로 충분한 거야.....그저 내가 그녀를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공주님이라고 생각하면 될 뿐이다.”

 

돈키호테가 광기에 빠져서 농부 여인을 공주로 착각하여 숭배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에게는 누군가 공주로 여겨서 숭배할 대상이 필요했던 것뿐이다. 이를 광기로 치부하지 말자.

 

돈키호테의 말마따나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상대방을 실제 이상으로 뛰어나고 아름답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흔히들 콩깍지가 씌웠다고 하지 않는가. 주변에서 보기에는 어처구니없는 연인들도 부지기수다. 이들을 미쳤다고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자가 오히려 미친 사람이다.

 

4) 기사소설에 대한 작가의 견해 (P.438)

 

기사소설에서 말하는 그 어떠한 기사들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소. 그 모든 것들은 한가로운데 창의력만 있는 사람들이 각색하고 꾸며낸 이야기이며, 일꾼들이 그 책들을 읽으면서 즐거워하는 것처럼 시간을 보내며 기분을 전환할 목적으로 만든 것이오. 내 정말 당신에게 장담하건대, 그러한 기사들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러한 무훈이나 터무니없는 사건들 역시 이 세상에서는 단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소.”

 

돈키호테의 표면적 집필이유는 유행하던 기사소설의 허구와 폐해를 알리기 위해서다. 이 부분은 이러한 집필이유가 명확히 드러난 대목이다. 15세기 스페인은 기사도 소설의 전성기였다. 이는 기울어가는 황금세기의 번영과 사치 아래 심화된 사회적 계급적 갈등을 짐짓 덮어두는 역할을 하였다. 이에 대한 반발이 피카레스크 소설이며, 돈키호테 역시 독자적인 방식으로 인간의 허위와 사회적 모순을 폭로하고 있다.

 

5) 종교 경찰과 돈키호테의 대치 (P.639)

 

이리 오너라, 천박한 놈들아. 쇠사슬에 묶인 자들에게 자유를 주고, 붙잡힌 사람들을 풀어주고,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넘어진 사람들을 일으켜주고,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는 사람을 너희들은 노상강도라고 부르느냐? , 야비한 놈들 같으니라고......이리 와라. 종교 경찰이 아닌 도둑놈들 같으니라고. 종교 경찰의 면허를 갖고 있는 노상 강도놈들아, 말해봐라.”

 

광인이 아니면 당대 스페인에서 종교 경찰에게 감히 욕설을 퍼부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종교 절대주의가 지배하며 이단으로 선언되면 화형에 처해지는 사회. 여기에서 개인의 신체와 양심의 자유는 어불성설이다. 돈키호테가 당대인들에게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던 이유 중 하나는 이렇게 범인들은 내뱉을 수 없는 불만들을 대놓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었던 데 대한 일종의 대리만족이 아니었을까.

 

6) 산초 판사가 돈키호테를 따르는 이유와 그의 이성 (P.660)

 

저는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바람들지 않았습니다. 왕이라 해도 바람을 넣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접니다......저는 섬을 원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더 나쁜 것들을 바랍니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일한 만큼 얻는 법입니다. 인간인 이상 누구나 교황도 될 수 있고, 섬의 영주도 될 수 있습니다.”

 

돈키호테와 마찬가지로 광기에 빠졌다는 말에 대해 산초 판사는 이렇게 반박한다. 누구나 불가능한 것을 꿈꿀 자유가 있고 때로는 그것이 삶의 목표와 활력이 되기도 한다. 매주 로또 복권을 구입하며 인생역전을 꿈꾸는 가난한 직장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산초 판사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다. 그런 그가 돈키호테를 따르는 것은 반복되는 현실에서 탈피하여 망상에 가까울 수 있지만 보다 큰 꿈을 꾸기 위해서다.

 

7) 당대 연극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인식 (P.668~671)

 

연극이라는 것은 인간의 삶의 거울이며 관습의 표본이며 진실의 상이 되어야 하는데 지금 상연되고 있는 것들은 엉터리의 거울이고 우둔함의 표본이며 방탕함의 상입니다.”

훌륭한 연극을 보면 관객은 속임수를 즐기고, 진실을 배우며, 사건에 감동하고, 이성을 통해 분별력을 갖고 심한 속임수를 알아차리고, 모범적인 일에 명민해지며, 악에 분개하고 미덕을 사랑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8) 광인 돈키호테를 바라보는 세인들의 인식 (P.703)

 

그는 돈키호테의 얼굴에 비오듯 주먹질을 해댔고, 그 가련한 기사의 얼굴은 목동처럼 피투성이가 되었다. 교회법 연구원과 신부는 웃음을 터뜨렸고, 경찰들은 즐거워 들썩들썩하면서 싸우느라 얽혀 있는 개들을 부추기듯 두 사람의 싸움을 부추겼다. 산초 판사만이 절망에 빠졌는데, 주인을 돕지 못하게 괴롭히는 참사원의 조수를 내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서로 때리고 쥐어뜯으며 싸우는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환호와 축제의 분위기였다.”

 

이것이 소위 이성을 갖춘 정상적인 사람들의 작태다. 그들은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를 광인 취급하며 일말의 동정심을 품고 있지만 내면 한편에서는 기묘한 볼거리이자 놀림거리로 여기고 있다. 돈키호테의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신부와 이발사도 예외는 아니다. 여기서는 산초 판사가 오히려 이성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광인은 누구고 제정신은 누구란 말인가. 세상이 술에 취해 있는데 홀로 깨어난 사람은 미쳤는가 아닌가.

 

9) 작품해설

 

작가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정상인이 아니라 광인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광인의 입을 빌어서 당시 교회와 성직자 귀족 등을 유머러스하게 풍자하고 조소함으로써 검열관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 (P.720)

 

세르반테스의 문학에는 사회 구석구석에 살고 있는 인문들이 모두 등장한다. 이제 세르반테스 시대의 사회는 귀족이나 부유한 상류층들만이 아니라 하류계급의 건달, 매춘부, 깡패, 이교도 등의 세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세르반테스는 하류계층의 인간들도 우리의 이웃이며, 이 세계를 꾸려가는 중요한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이는 현대소설의 특징을 보여준다.” (P.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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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18
시마자키 도손 지음, 노영희 옮김 / 소화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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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한창이던 어느 날 문득 서릿발 같은 바람도 잠잠해지고 하늘도 맑게 갠데다 제법 햇볕도 온화한 기색이 깃들인다. 성미 급한 봄꽃들은 이제야 봄이 진군을 시작했나보다 서둘러 꽃망울을 터뜨리거나 부풀리기에 힘쓴다. 다음날 언제 그랬냐는 듯이 혹한이 휘몰아치고 칼날 같은 위세에 절로 옷깃을 여미기에 급급해진다. 여린 꽃잎들은 그대로 얼어서 바닥으로 떨어져버리고 봄을 머금은 망울은 속절없이 얼어붙은 채 겨우내 소망이 부질없어진다. ,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던가. 아직 진정한 봄은 이르지 않았건만 봄을 기대하는 어린 영혼들은 거리에 뛰쳐나가 꽃샘추위에 몸을 덜덜 떨고 만다. 시마자키 도손의 <>을 읽는 심정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세 가지의 봄을 다루겠다고 공언하였다. ‘이상의 봄예술의 봄인생의 봄. 작가의 말이 어느 정도나 실현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내가 보는 견지에서는 전혀 다루어지지 않았다. 아니, 이 소설은 봄 자체를 그린 소설이 아니다. 한겨울에 봄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하는 젊은 영혼들의 울분과 좌절을 기술한 소설이라는 게 보다 적합한 의견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전편을 면면히 흐르는 기조는 어둡고 차분하면서 가라앉은 분위기다. 멀리서 봄이 다가오고 있지만 아직은 전혀 알 수 없기에 희망도 빛도 보이지 않는 젊은이들. 기시모토의 방랑과 아오키의 발병으로 가시화된 겨울의 절정은 기시모토의 이루지 못한 죽을 결심과 아오키의 자결로 이어진다. 현실의 생기에 넘치는 봄과 인물들의 대비가 강렬하다.

 

방 밖에선 오후의 햇볕이 반짝이며 넘실거려서 왠지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먼지투성이가 된 거리의 수목들조차 지금은 새로운 잎으로 갈아입을 때로, 그 푸르고 밝은 색은 바라보기만 해도 눈부셨다. 모든 만물은 생기에 넘쳐 몸부림치고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견디기 어려운 계절이었다.” (P.229)

 

작품 전편의 주인공은 물론 기시모토 스데키치지만, 그의 비중은 전반부에서 그리 두드러지지 않는다. 전반부에서는 그의 문학적 친우들인 아오키, 스게, 이치카와의 신변과 사고가 보다 흥미롭게 그려져 있다. 특히 아오키의 굵고 짧으면서도 강렬한 삶은 인상적이다.

 

아오키를 비롯한 친우들의 소망은 근대화를 추구하는 19세기말 당대 일본이 문학과 예술을 포함한 문화 및 지성에서 보다 개화되고 계몽된 사회로 발전해 나가도록 자신들이 일조를 하고 그 성취를 목도하는데 있다. 하나 뿌리박힌 인습과 고루한 편견에 사로잡힌 세인들을 일거에 문화인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과업이었으면, 그들의 몰이해와 저속함에 고매한 이상과 깊은 감성을 지닌 젊은 영혼들의 좌절은 예견된 결과나 다름없었다. 세상은 그들이 자신들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도록 용인하지 않는다. 그렇게 아오키는 분투하다가 꺾였”(p.264)으며, 다른 친우들도 각자 나름의 행로를 밞아나가게 된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지를 생각해야만 된다. 10, 20년 뒤에도 보일지 어떨지 모르는 청년의 꿈을 지금 보려고 해 봤자 그렇게 세상이 허락하지 않는다.” (P.300)

 

함께 젊은 생명의 싹을 피우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같은 마음이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벌써 너는 너, 나는 나라는 식으로 각자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을 때는 왠지 슬펐다.” (P.306)

 

작중에서 기시모토의 방황은 분명한 사유를 드러내지 않는다. 은인의 집에서의 가출과 두 번에 걸친 방랑이 참을 수 없는 당대에 대한 반기의 의사표시 또는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처절한 위안의 발로라고도 이해하기 어렵다. 이 작품 <><파계>의 성공 이후 발표된 작품임에도 그의 중요 작품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단초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전편을 관통하는 기시모토의 애매한 행위의 모호한 동기. 반면 기시모토의 심경을 다르게 파악해 볼 수도 있다. 그는 작중에서 문학과 미술에 다소간 재능을 가졌으며 원체 다정다감하여 눈물을 곧잘 흘리며 연약한 의지력을 지닌 인물로 내성적이고 소심하며 말수가 적은 것으로 묘사된다.

 

전반부의 열의에 찬 청년들의 격정적이며 확고한 목소리와는 대조적으로 후반부에서는 무게중심이 기시모토의 진퇴양난의 처지와 우유부단한 내적인 고민으로 침잠한다. 맏형의 수감으로 졸지에 집안 생계를 떠맡게 된 기시모토의 분투와 괴로움. 사회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는 아직 미숙한 청년에 불과하며 삶의 최전선에 뛰어들고자 하는 의사도 취약하다. 그는 알고 있다. 자신마저 포기하면 가족들은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기시모토는 가쓰코의 죽음을 듣고 더욱 침울해졌다. 어느 때는 일할 마음도 없었다. 때로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머니가 있었다. 형수가 있었다. 불행한 형이 있었다. 아이코가 있었다. 그가 일하지 않으면 이 사람들은 먹는 것조차 곤란하다.” (P.294)

 

식구들은 구할 수가 있다면, 나는 어떻게 되어도 좋다.” (P.315)

 

반면 아오키의 분사에 자극받은 그의 정신은 포도청 같은 나날의 생계를 떠나서 확고한 방향을 정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이상과 영혼을 추구하는 길을 걸어가도록 요구한다. 가족에 대한 의무와 개인의 자아실현에 대한 갈망의 상충이 빚어내는 긴장과 갈등, 고뇌와 가쓰코의 사망에 따른 심적인 동요와 상실감은 기시모토를 점점 외지고 깊은 곳으로 가라앉게 만든다. 현실을 도피하고자 과거의 추억에서 위안을 얻으려고 하나 천진한 어린 시절의 허위성만을 깨달을 뿐이었다.

 

이케노하타라면 이전에는 날아서라도 가고 싶은 곳이었지만, 점차 기시모토의 발길이 뜸해졌다. 가도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이야기를 할 수 없었기에 재미가 없었다. 언제나 잠자코 물러앉아 있다 온다.” (P.298)

 

그는 많은 것들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P.316)

 

작품의 말미는 다소간 싱겁다. 그는 센다이의 학교 교사로 떠나갈 수 있게 되었고 그동안 가족의 생활비는 멀리 있는 둘째형도 도와주겠다고 하였다. 그는 이제 마음 놓고 자신의 길을 떠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개인의 독립과 발전을 도와주지 못하는 가족의 족쇄, 꽉 조여 오며 벗어날 길 없을 것처럼 단단한 수갑을 작가는 어이없을 정도로 손쉽게 벗겨낸다. 기시모토의 그동안의 처절한 고민과 심적 전투가 읽는 이로 하여금 무안할 지경으로.

 

, 나 같은 인간이라도 어떻게든지 살고 싶다.” (P.370)

 

끝 대목에서 차창 밖을 스치는 빗소리를 들으며 읊조리는 기시모토의 생각이다. 혹시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청년들이여, 아무리 절망과 좌절이 깊더라도 결코 자신을 버리거나 버리지 말라. 당장은 봄이 이르지 않더라도 어떻게라도 인내하고 버티어 살아가다 보면 가까운 시일에 봄이 성큼 다가옴을 깨닫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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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생거 사원 - 다른 세상으로 나 있는 창문을 보여주는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5
제인 오스틴 지음, 신미향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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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제인 오스틴에게,

 

겨우 마흔을 넘어 불귀의 객이 된 당신의 작품들 가운데 유작으로 출판된 작품이 <노생거 사원>과 <설득>이지요. 이 둘은 집필된 시기를 보면 사실 매우 커다란 간극을 보여주는데, 전자는 처녀작 또는 습작이라고 해도 무방한 반면, 후자는 거의 말년에 쓴 작품이니까요.

 

제가 예전에 쓴 당신의 소설들에 대한 촌평을 보면 알겠지만, 초기에는 당신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제한된 배경과, 반복되는 소재, 그리고 유사한 구성에 이르기까지, 물론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와 반짝이는 문체는 평가하지만요. 수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점차로 당신의 작품들에 빠져들게 되었답니다. 우리에게는 한 명의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만 필요합니다. 제2, 제3의 세르반테스는 달갑지 않습니다. 프루스트와 조이스도 마찬가지겠지요. 이런 면에서 미스 제인 오스틴, 당신도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할 만합니다. 상투적이라는 말은 곧 보편적임을 가리키지요. 상투적이지만 진부성을 느끼지 못하도록 만드는 솜씨는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든지 희노애락의 표현에 마음을 열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

 

이 소설을 당신의 후기 걸작들과 나란히 놓고 비평한다면 지나치게 가혹한 행위이겠지요. 당신의 정교한 개작의 손길을 얻을 기회를 갖지 못한 작품이니까요. <노생거 사원>은 사실 대가 제인 오스틴의 풋내기 시절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싱싱한 날것의 묘미를 느낄 수 있지요, 훗날의 프로페셔널 소설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어설프고 설익은 듯하지만 과감한 도전정신으로 충만하고, 소녀적 감성이 깃들어 있으며 확고한 자기주장도 펼 줄 아는 그런 당신의 윤곽이 작품 내에 어른거립니다.

 

작중 여주인공 캐서린은 나이에 비해 올바른 사리분별을 갖춘 모범적인 아가씨로 묘사됩니다. 이는 친구였던 이사벨라의 숨겨진 경박성과 두드러진 대조를 보이는 미덕이기도 합니다. 그런 캐서린의 유일한 약점은 고딕 기담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경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래드클리프 부인의 우돌포에 홀딱 정신이 빠져든 장면이 작중에 기술될 정도니까요. (이 장면을 통해 보면 당신 역시도 고딕 기담에 제법 관심이 없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캐서린이 노생거 사원에 머물게 되면서 증세는 더욱 심해집니다.

 

“상처 입은 불행한 영혼의 수녀에 대한 끔찍한 기록들과 오래된 전설을 살펴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한껏 부푼 가슴을 가라앉히기가 힘들었다.” (P.173)

 

자신이 머물게 된 방구석에 놓인 커다란 상자를 여는 대목, 역시 방에 놓여있던 아주 오래되고 커다란 옷장의 서랍에서 발견한 종이 뭉치 에피소드, 이렇게 그녀의 공상과 상상은 증폭되다가 종내에는 틸니 부인의 방에서 뭔가 끔찍한 범죄의 흔적을 찾으려는 모험으로 이어지지요. 그러다가 틸니 씨와 딱 마주치게 되지요.

 

“몰랜드 양,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겁니까?” (P.247)

 

위의 질타는 고딕 기담에 매혹되어 정신을 잃은 모든 독자를 향한 선승이 내려치는 죽비의 일타와도 같은 것입니다. 캐서린도 환한 대낮에는 간밤의 자신의 행동이 터무니없음을 깨닫지만 어찌할 수 없는 호기심에 이끌려 순간적으로 이성이 흐려지게 된 것입니다.

 

“어제 한 상상들은 그야말로 너무 어리석은 내용이었다. 이렇게 현대적으로 잘 꾸며 놓고 항상 사람이 드나드는 방에서 이상한 내용의 종이가 발견되지 않은 채로 있었다고 상상한 거나 누구라도 열 수 있도록 열쇠까지 마련되어 있는 옷장을 자신이 처음으로 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P.215)

 

“생각은 아직 그런 근거 없는 공포로 인해 느끼고 행동했던 일들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그 모든 생각이 자위적이었고 스스로 만들어 낸 공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건 너무도 자명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을 중요한 것으로 지레짐작해 받아들이고 사원에 도착하기 전부터 두려움이나 공포를 갈망하고 있었던 탓에 모든 일을 왜곡해서 받아들인 것이다.” (P.249)

 

그래도 캐서린 정도나 되니까 이쯤에서 올바른 각성을 했다고 봅니다. 당대에 고딕 소설에 푹빠져 헤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무척 많았으며 이들에 대한 경종의 의미도 당신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한편 바스에서 만난 소프 남매는 당시 최고의 행운으로 치부하였으나 훗날 되돌아보면 만나서는 안 될 사람들이었음이 드러나지요. 그들은 자신들만 아는 “인색하고 이기적인”(P.121) 사람들로서 자신들의 즐거움을 위해서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의 개념이 전혀 없음이 클리프턴 소풍을 캐서린에게 강요하는 대목에서 극적으로 노정됩니다. 이 대목에서 착잡한 심경이 드는 이유는 현대에도 이런 부류가 사회의 주류로 득세하고 있음에서입니다. 이들은 교묘한 언변과 흠잡을 데 없는 예의범절, 그리고 뛰어난 사교성으로 존경받을 사람인 것처럼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타인은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밟고 올라서거나 이용할 대상에 불과합니다. 만면에 미소를 짓고 부드러운 말솜씨와 세련된 태도로 상대하다가 한순간에 냉혹한 표정으로 찬바람 나게 등을 돌려버리고 마니까요.

 

절체절명의 순간에 캐서린의 과단성과 확고한 분별력이 빛을 발합니다.

 

“그래도 가야겠어요. 지금 어디에 있든 가서 만나야 해요.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제 판단으로 잘못된 일을 하도록 설득당하지 않아야 잘못된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거라고요.” (P.125)

 

이 대목은 그녀의 두드러진 미덕을 보여줌으로써 소설 주인공으로서 충분한 자격이 있음을 나타냄과 동시에 그녀와 소프 남매와는 더 이상 화해가 불가능한 관계의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음을 웅변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노생거 사원>은 이밖에도 흥미로운 특징을 더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당신의 의도인지 아니면 미숙성의 반영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다른 데서 찾기 어려운 색다른 재미라고 하겠습니다. 먼저 당신의 소설 옹호론을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습니다. 당대 비평가들의 근시안적인 졸렬한 비평과 독자들의 위선적인 이중적 태도를 함께 비판하고 있지요. 작가인 당신은 이렇게 항변합니다.

 

“우린 상처 입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내놓은 작품들이 세상 그 어떤 분야의 작품보다 열렬하고 진솔한 찬사를 받을 가치가 있지만, 지금까지 소설만큼 많은 비난을 받은 분야는 거의 없다.” (P.38)

 

또한 독자들은 이 소설에서 작가의 직접적 개입과 어조를 곳곳에서 접할 수 있습니다. 역시 다른 작품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특징입니다. 작가는 인물들이 전적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작가는 캐서린의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꾼 또는 변사의 역할을 자처합니다. 필요할 경우 흐름을 잠시 멈추고 자신의 의도와 판단을 독자에게 직접 밝힘으로써 작품 전개와 독자의 이해를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려는 것이 당신의 의도라고 이해됩니다만.

 

“다음 페이지부터 시작될 바스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과 모험으로 들어가기 전에, 독자들이 주인공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캐서린의 성격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 (P.12)

 

“그렇다, 소설! 필자는 자신들이 창작해낸 바로 그 작품을, 스스로 경멸을 섞어 비난하는 일부 소설가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인색하고 졸렬한 태도는 결코 취하지 않을 것이다.” (P.38)

 

“그렇지만 내 소설은 완전히 다르다. 나의 주인공은 혼자서 치욕스러운 모습으로 귀환하는 것이다. 도저히 행복한 분위기를 묘사할 수 없는 상황이다.” (P.292)

 

제인 오스틴 양, 이 소설은 이미 서두에서 밝혔듯이 후기 작품들에 비하면 분명히 어설픈 점이 존재합니다. 구성과 문체 면에서 보이는 약점을 굳이 옹호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그것이 이 작품의 매력을 반감시키지는 못합니다. 남성 주인공 틸니 씨의 개성이 분명하지 못한 가운데서도 독자는 나이어린 캐서린이야말로 뚜렷한 독자적 개성을 지닌 인물임을 발견할 수 있지요. 여기에 후기작들에서는 볼 수 없는 작가인 당신의 적극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도 하나의 흥밋거리를 제공해 줍니다.

 

당신은 때 이른 죽음으로 미처 초고를 손질하지 못했다고 저세상에서 아쉬워하거나 자책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체로서도 이미 충분히 아름다운 가작이니까요. 비제의 유일한 교향곡과 슈베르트의 초기 교향곡들이 후세인들에게는 베토벤과 브루크너, 말러의 대작 못지않은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작품들로 인정받고 있음을 상기하세요. 아, 멘델스존의 초기 현악 교향곡들도 마찬가지군요.

 

잠시 후면 마지막으로 <설득>을 만나러 가야 할 시간입니다. 조만간 다시 글을 띄우도록 하지요.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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