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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박철 옮김 / 시공사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 돈키호테 1부를 읽은 후의 짤막한 상념들
먼저 이 촌평은 1월 14일에 쓴 것이다. 한동안 뭉그적거리다 마음을 다잡고 단숨에 초고를 어지럽게 적어놓았는데, 일단 생각난 바를 대강 쏟아놓은 후 차츰 틀을 잡아 정리를 해나갈 의도였다. 하지만 세상사가 어디 생각대로 되던가. 어찌어찌 하다가 차일피일 미루게 되고 보니 두 달쯤 시간이 경과하게 되었다. 다시 읽어보니 한심할 정도로 형편없게 느껴지지만 이제 독서에 대한 상념도 오락가락 하는 사정인지라 다시 가다듬는다는 게 터무니없을 것 같아 그냥 초고 그대로를 수록한다. 그래야 책상 한구석에 놓인 책도 치울 수 있을 것이며 내 마음도 찜찜함을 덜 수 있을 것이다.
1. 구입한 지 거의 십년이 다되어 읽다. 그리고 읽은 지 3개월가량 지나 겨우 촌평을 쓰다. 아니 이것은 촌평이 아니라 차라리 넋두리다. 백에 구십구 인이 좋다고 하는데 이에 공감하지 못하는 일인이 어디에 하소연할 데도 없어 속으로 끙끙거리다가 조심조심 토로한다. 임금님 귀의 진실을 숲에서 외치는 심정으로.
2. 중학교 때 헌책방에서 구한 삼성판 세계문학전집의 돈키호테를 읽었는데 너무 오래되어 머릿속에 아무런 기억도 남아있지 않다.
3. 굉장한 기대를 가지고 완독을 마친 소감은 흠, 글쎄, 뭔가 미진함. 솔직히 썩 만족스럽지 않다. 그 이유를 생각해본다.
4. 돈키호테를 제외한 국내 번역된 세르반테스의 주요 작품들은 거의 읽었다. 다른 작품들은 무척이나 흥미롭게 느껴졌다. 세르반테스의 어법에 친숙하지 않아서라는 비판은 적절치 않다.
5. 역으로 세르반테스를 여럿 읽은 게 돈키호테의 매력을 감소시킨 게 아니었을까? 아니다. 그렇다면 돈키호테는 세계문학사상 첫손 꼽히는 불후의 명작의 자격이 없다. 고전과 명작은 다른 작품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독자적인 아름다움과 가치를 지닌다.
6. 돈키호테의 뛰어남을 알아채지 못한 지적 수준이 낮은 독자에게는 책임이 없는가? 확실히 그럴 수도 있다. 문학 작품, 특히나 돈키호테처럼 해학적 재미를 전면에 내세우는 소설의 경우 분석보다는 자체의 감흥을 중시한다. 문학의 가치는 일차적으로 감동(감명 또는 재미도 포함해서)이다. 분석과 비평은 후순위다.
7. 혹시 망설이지만 번역 상의 문제는 없을까? 이 대목에서는 조심스러워진다. 번역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스페인어문학자이며 세르반테스 연구가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도 그가 번역한 세르반테스의 작품에서 불만을 느낀 적이 없다. 한 가지 걸리는 점은 있다. 이것은 그의 전적으로 단독 번역이 아니라 대학원생들과 합동 번역이라는 점이다.
다른 이야기지만, 삼국지연의 번역에 있어 많은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는 김구용 번역본을 선호하지 않는다. 한줄 한줄 원문에 최대한 가깝게 꼼꼼하게 번역한 점은 평가할 만하지만, 읽다 보면 내가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읽는 건지 아니면 한문 고전을 읽는지 헷갈린다. 삼국지연의는 대중들을 위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면에서 이 책에서도 번역 자체에는 흠잡을 만한 부분이 별로 없다. 다만 어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돈키호테는 출판 후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서 무수한 아류본을 양산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대중 친화적인 작품이라면 정통 고전 어투가 아니라 통속적이며 구어체적 요소가 강했을 것이라는 게 무리한 추론은 아니리라.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완전히 배치된다.
결국 이 사항은 다른 번역본을 읽어야만 비교가 가능하다. 민용태 번역본을 잠깐 훑어보았다. 단독 번역에 구어적 어투를 반영하고 있다. 차후 이 번역본을 읽고 나서도 별다른 반응이 일지 않는다면 전적으로 독자의 함량 미달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판단 불가 상황이다.
8. 내용상으로 볼 때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이 눈에 들어온다.
1) 마르셀라 이야기 (P.168~169)
“아름답기에 사랑받는 사람이 자신이 사랑받는다는 이유로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듭니다.”
“저는 자유롭게 태어났고, 또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해 초원에서의 고독을 선택한 것입니다.”
사랑을 거절당한 그리소스토모가 죽자 친구 암브로시오는 마르셀라를 비난한다. 이에 대한 마르셀라의 답변은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논리정연하다. 마르셀라의 외침은 여권주의의 구호를 수백 년 앞서 선구적이다.
2) 죄수들을 풀어준 이야기 (P.267)
“강제로라고? 아니 국왕 폐하께서 무슨 일을 강제로 시키는 게 가능하단 말이냐?”
“죄목이 어떻든지 간에 이 사람들이 가고 있는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강요라는 것 아니냐?”
돈키호테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최우선시하고 있다. 국왕일지라도 의지에 반하여 강제로 형벌을 부과할 수는 없다. 사회 정의를 무시하는 발언인 듯하지만, 여기에는 정당성을 갖지 못한 기득권층과 지배층의 강압에 대한 반발심이 내재된 것이다.
3) 둘시네아 공주의 숭배 이유와 돈키호테의 이성 (P.327)
“내가 둘시네아 델 토보소 공주님을 사랑하기에, 그분은 나에게 지상에서 가장 고귀하신 공주님인 것이다......나 역시 알 돈사 로렌소라는 훌륭한 아가씨를 아름답고 정숙하다고 생각하고 믿으면 그걸로 충분한 거야.....그저 내가 그녀를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공주님이라고 생각하면 될 뿐이다.”
돈키호테가 광기에 빠져서 농부 여인을 공주로 착각하여 숭배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에게는 누군가 공주로 여겨서 숭배할 대상이 필요했던 것뿐이다. 이를 광기로 치부하지 말자.
돈키호테의 말마따나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상대방을 실제 이상으로 뛰어나고 아름답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흔히들 콩깍지가 씌웠다고 하지 않는가. 주변에서 보기에는 어처구니없는 연인들도 부지기수다. 이들을 미쳤다고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자가 오히려 미친 사람이다.
4) 기사소설에 대한 작가의 견해 (P.438)
“기사소설에서 말하는 그 어떠한 기사들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소. 그 모든 것들은 한가로운데 창의력만 있는 사람들이 각색하고 꾸며낸 이야기이며, 일꾼들이 그 책들을 읽으면서 즐거워하는 것처럼 시간을 보내며 기분을 전환할 목적으로 만든 것이오. 내 정말 당신에게 장담하건대, 그러한 기사들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러한 무훈이나 터무니없는 사건들 역시 이 세상에서는 단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소.”
돈키호테의 표면적 집필이유는 유행하던 기사소설의 허구와 폐해를 알리기 위해서다. 이 부분은 이러한 집필이유가 명확히 드러난 대목이다. 15세기 스페인은 기사도 소설의 전성기였다. 이는 기울어가는 황금세기의 번영과 사치 아래 심화된 사회적 계급적 갈등을 짐짓 덮어두는 역할을 하였다. 이에 대한 반발이 피카레스크 소설이며, 돈키호테 역시 독자적인 방식으로 인간의 허위와 사회적 모순을 폭로하고 있다.
5) 종교 경찰과 돈키호테의 대치 (P.639)
“이리 오너라, 천박한 놈들아. 쇠사슬에 묶인 자들에게 자유를 주고, 붙잡힌 사람들을 풀어주고,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넘어진 사람들을 일으켜주고,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는 사람을 너희들은 노상강도라고 부르느냐? 아, 야비한 놈들 같으니라고......이리 와라. 종교 경찰이 아닌 도둑놈들 같으니라고. 종교 경찰의 면허를 갖고 있는 노상 강도놈들아, 말해봐라.”
광인이 아니면 당대 스페인에서 종교 경찰에게 감히 욕설을 퍼부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종교 절대주의가 지배하며 이단으로 선언되면 화형에 처해지는 사회. 여기에서 개인의 신체와 양심의 자유는 어불성설이다. 돈키호테가 당대인들에게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던 이유 중 하나는 이렇게 범인들은 내뱉을 수 없는 불만들을 대놓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었던 데 대한 일종의 대리만족이 아니었을까.
6) 산초 판사가 돈키호테를 따르는 이유와 그의 이성 (P.660)
“저는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바람들지 않았습니다. 왕이라 해도 바람을 넣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접니다......저는 섬을 원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더 나쁜 것들을 바랍니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일한 만큼 얻는 법입니다. 인간인 이상 누구나 교황도 될 수 있고, 섬의 영주도 될 수 있습니다.”
돈키호테와 마찬가지로 광기에 빠졌다는 말에 대해 산초 판사는 이렇게 반박한다. 누구나 불가능한 것을 꿈꿀 자유가 있고 때로는 그것이 삶의 목표와 활력이 되기도 한다. 매주 로또 복권을 구입하며 인생역전을 꿈꾸는 가난한 직장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산초 판사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다. 그런 그가 돈키호테를 따르는 것은 반복되는 현실에서 탈피하여 망상에 가까울 수 있지만 보다 큰 꿈을 꾸기 위해서다.
7) 당대 연극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인식 (P.668~671)
“연극이라는 것은 인간의 삶의 거울이며 관습의 표본이며 진실의 상이 되어야 하는데 지금 상연되고 있는 것들은 엉터리의 거울이고 우둔함의 표본이며 방탕함의 상입니다.”
“훌륭한 연극을 보면 관객은 속임수를 즐기고, 진실을 배우며, 사건에 감동하고, 이성을 통해 분별력을 갖고 심한 속임수를 알아차리고, 모범적인 일에 명민해지며, 악에 분개하고 미덕을 사랑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8) 광인 돈키호테를 바라보는 세인들의 인식 (P.703)
“그는 돈키호테의 얼굴에 비오듯 주먹질을 해댔고, 그 가련한 기사의 얼굴은 목동처럼 피투성이가 되었다. 교회법 연구원과 신부는 웃음을 터뜨렸고, 경찰들은 즐거워 들썩들썩하면서 싸우느라 얽혀 있는 개들을 부추기듯 두 사람의 싸움을 부추겼다. 산초 판사만이 절망에 빠졌는데, 주인을 돕지 못하게 괴롭히는 참사원의 조수를 내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서로 때리고 쥐어뜯으며 싸우는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환호와 축제의 분위기였다.”
이것이 소위 이성을 갖춘 정상적인 사람들의 작태다. 그들은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를 광인 취급하며 일말의 동정심을 품고 있지만 내면 한편에서는 기묘한 볼거리이자 놀림거리로 여기고 있다. 돈키호테의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신부와 이발사도 예외는 아니다. 여기서는 산초 판사가 오히려 이성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광인은 누구고 제정신은 누구란 말인가. 세상이 술에 취해 있는데 홀로 깨어난 사람은 미쳤는가 아닌가.
9) 작품해설
“작가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정상인이 아니라 광인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광인의 입을 빌어서 당시 교회와 성직자 귀족 등을 유머러스하게 풍자하고 조소함으로써 검열관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 (P.720)
“세르반테스의 문학에는 사회 구석구석에 살고 있는 인문들이 모두 등장한다. 이제 세르반테스 시대의 사회는 귀족이나 부유한 상류층들만이 아니라 하류계급의 건달, 매춘부, 깡패, 이교도 등의 세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세르반테스는 하류계층의 인간들도 우리의 이웃이며, 이 세계를 꾸려가는 중요한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이는 현대소설의 특징을 보여준다.” (P.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