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리피 할로의 전설 펭귄클래식 132
워싱턴 어빙 지음, 권민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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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 작품>

1. 아내

2. 립 밴 윙클

3. 실연

4. 책 만드는 기술

5. 과부와 아들

6. 문학의 가변성

7. 시골 장례식

8. 유령 신랑

9. 포카노켓의 필립

10. 마을의 자랑거리

11. 낚시꾼

12. 슬리피 할로의 전설

 

미국 문학의 본격적 출발을 알리는 워싱턴 어빙의 <스케치북>에 수록된 36편 중 대표적인 12편의 단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스케치북>은 견문담, 민담, 단편소설, 수필 등 다양한 성격의 작품이 혼재되어 있는 작품집으로서 작가가 고향 주변에서 보고들은 이야기 및 영국 여행의 체험이 깊이 반영되어 있다.

 

작가의 말에서 어빙은 모험적 성향을 고백한다. 낯선 곳을 방문하고 특이한 인물이나 풍습을 관찰하는 일을 좋아한다고. 눈부시게 찬란하며 웅장하고 장엄한 풍경도 물론 운치 있지만, 미국에도 자연절경은 충분하다. 그는 신대륙에는 부족한 고대의 스러져가는 유적, 역사적이고 시적인 연상을 일으키는 유럽의 매력에 관심을 갖는다. 회고적 취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앞서 읽은 <알함브라>와 같이.

 

그의 글은 명확한 장르 구분이 어렵다. <립 밴 윙클><슬리피 할로의 전설>을 허구성에 주목하여 단편소설로 분류할 수도 있지만, 허드슨 강 유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민담 성격을 강조하면 옛이야기의 재현이라고 간주할 수도 있다. 개중에는 신변잡기적 수필에 속하는 글이 명확한 경우도 있으며, 짤막한 전기문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여지의 글도 존재한다. 어빙이 <스케치북>이라고 명명한 것도 이런 연유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더욱이 필명마저 제프리 크레용이다.

 

작가의 최초 저작은 뉴욕에 정착한 네덜란드계 미국인들의 역사를 해학적으로 그린 작품(<뉴욕의 역사>)이라고 한다. <립 밴 윙클>의 주인공 인명도 지역적 배경도 역시 네덜란드계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게다가 <슬리피 할로의 전설>에서도 주인공의 적수인 통뼈 브롬 역시 네덜란드계다. 어빙은 <뉴욕의 역사>를 디트리히 니커보커라는 필명으로 발표하였다. 두 단편도 출전을 니커보커라고 명시하고 있다. 뉴욕의 역사를 보면 초기 개척자가 네덜란드인이었으며, 네덜란드령으로서 뉴암스테르담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어빙처럼 기이한 옛적 민담과 전설에 근거한 글쓰기를 하는 작가는 여기에 주목하였으리라.

 

워싱턴 어빙의 문체는 진지하고 무겁지 않다. 가볍지 않은 경묘한 필치로 유머를 담아서 독자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자아내게 만든다. 이 점에서는 후대 오 헨리의 단편을 연상시킨다. 다만 어빙은 만연한 세상의 풍조를 우회적으로 콕콕 찌르는 풍자가 있다. 풍자적이고 해학적이지만 빈정거림과 조소와는 거리가 멀다. 은근한 해학미라고 하겠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경박한 세태. 사람 사이의 관계가 오래된 미덕을 상실하고 부박해지며, 겸양과 인정보다 포장과 욕심에 치우치는 풍조. 당대 미국도 현대 못지않았던 듯하다.

 

예상보다 훨씬 흥미로웠던 독서였다. 솔직히 립 밴 윙클이야기는 뻔한 이야기가 아닌가. 게다가 문학가로서 어빙의 성명은 그다지 높지 않으므로 자칫 지루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지녔다. 그런데 웬걸, 그의 글이 이토록 잔잔한 재미와 유머를 가져다 줄 줄이야.

 

배경과 내용상으로 대략적으로 작품군을 구분한다면, 민담과 전설, 가족과 풍습, 세태 풍자 등으로 나눌 수 있다.

 

1. 작가는 부부, 연인, 가족 간의 진실한 사랑에 대해 경건한 상념을 품는다. 인정의 순수하고 고결한 면모와 아름다운 전통 및 관습이 희박해져 감을 안타까워한다.

 

<아내>. 아내의 참모습은 시련을 함께 겪어봐야 알 수 있음은 녹슬지 않는 진리다. 장식품으로 생각하거나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는 기특한 마음은 부부의 의미에 대한 몰이해에 기인한다. 여인은 약하지만 아내는 의외로 강하다.

 

<실연>. 남성과 여성의 사랑과 실연을 받아들이는 정도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아무래도 남성에 비해 여성은 사랑에 올인 하는 사례가 빈번한데, 행복한 결말로 끝나지 않는 경우 안타깝기 그지없다. 태생적 성향일지 아니면 사회적 역할 차이에 따른 후천적 차이일지 궁금하다.

 

<과부와 아들>은 모성애의 의미를 재음미해보는 기회. 노파의 가난하지만 진실하면서도 품위 있는 슬픔의 모습에서 숙연함을 느끼게 된다.

 

<시골 장례식>에서는 장례식에 꽃을 뿌리고 나무를 심는 좋은 풍습의 의미를 살펴보고 시골을 제외하고 사라지고 있는 것에 탄식한다.

 

<마을의 자랑거리>는 순수하고 이상적인 사랑의 상실에 애틋함을 느낀다.

 

2. 세태 풍자는 유머와 해학미가 넘치는 작품들이다.

 

<책 만드는 기술>. 책은 저자의 순수한 창의와 진지한 연구의 산물이었다. 베끼기, 짜깁기 등의 기법을 통해 당대에도 쓰레기 같은 책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던 듯. 대영도서관에서 백일몽의 형식을 빌려 매우 풍자적이며 해학적이다.

 

<문학의 가변성>. 대영도서관에 이어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다. 고서와의 대담 형식으로 순수하고 불변한 언어의 허상과 종이와 인쇄술로 문학이 과포화 되었음을 지적한다. 그러면서도 시인의 불변적 가치를 찬미하는데, 셰익스피어에 대한 작가와 고서 간 견해차가 흥미롭다.

 

3. <립 밴 윙클>, <슬리피 할로의 전설>, <유령 신랑>은 민담과 전설을 배경으로 한다.

 

<립 밴 윙클>. 보통 <스케치북>이라고 하면 이 립 밴 윙클을 떠올린다. 오래된 전설에 근거하여 캐츠킬 산맥 지역의 신비성을 결부시킨 한 잔 술을 먹고 수십 년을 잠든 사나이는 동양 고전에도 상응하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보편적이다. 미국 독립전쟁 전후, 바가지 긁던 아내의 죽음 등 기묘한 상황 설정으로 절로 유머를 자아낸다.

 

<슬리피 할로의 전설>도 목없는 기사의 민담을 기반으로 기묘하고 으스스한 공포가 일순간 반전하여 어처구니없는 허탈감마저 자아낸다. <유령 신랑>도 독일을 배경으로 마찬가지로 흥미로운 민담이다.

 

4. 기타

 

<낚시꾼>은 늙은 낚시꾼과의 만남을 다루고 있는데, 전형적인 신변잡기적 수필에 해당한다.

 

<포카노켓의 필립>은 전혀 의외다. 아메리칸 인디언 전사의 투쟁적 삶을 기술하는데, 비교적 긍정적이어서 당대의 인식과 다른 비주류적 견해를 발견하게 된다. 미국 백인들의 인디언에 대한 주류적 견지는 야만, 미개, 폭력 등과 같이 여전히 부정적이다. 자신들이 인디언들의 땅을 침략하고 빼앗았다는 인식은 갖고 있지 않다. 반면 어빙은 식민개척자들의 탐욕과 편협, 무자비에 대해 비판하면서 타고난 영웅, 천성적으로 고결한 투쟁으로 필립을 평가한다. 고고한 정신, 긍지 높은 가슴, 길들여지지 않는 열정 등 자유로운 인디언 전사를 기리는데 이보다 더 적합한 수식어가 있을까?

 

어빙의 인식에도 물론 한계는 존재한다. 필립 당시에 인디언들의 적은 영국이지만, 미국 독립 이후에도 그들의 적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대상이 바뀌었을 따름이다. 이것을 어빙이 놓친 것인지 아니면 부러 외면하는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점은 그의 가슴은 따뜻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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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함브라 2 기담문학 고딕총서 6
워싱턴 어빙 지음, 정지인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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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함브라에서 마주친 인물들(백작가족, 퇴역군인)에 얽힌 일화를 삽입하는 외에 어빙은 1권에 이어 이국적인 민담과 설화를 계속한다.

 

- 사랑의 순례자 아흐메드 알 카멜 왕자: 헤네랄리페 성

- 무어인의 유산에 관한 전설: 칠층탑

- ‘알함브라의 장미와 시동의 사랑: 왕녀들의 탑

- 태수와 잘난 척쟁이 공증인

- 외팔이 태수와 아라비아 준마를 타고 온 병사: 베르밀리온 탑

- 신중한 두 동상의 전설: 린다락사 정원

 

작가가 이렇게 옛이야기를 여러 편 소개하는 연유는 그것이야말로 알함브라의 매력을 온전히 전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서이리라. 낡고 쇠락한 옛 유적의 외형에서 사람들은 영화로웠던 과거의 흔적을 발견할 뿐이며, 더불어 시간의 속절없음과 무상감을 절감할 따름이다. 알함브라와 결부된 이야기는 굳어 있는 유적에 온기를 불어넣고 역사와 민담 속 인물들에게 생명을 부여하여 흥미진진한 사건과 애절한 사랑, 기이한 전설 등 현재에도 스러지지 않는 신비로움이 알함브라 자체의 이국적 정경과 이슬람 문화와 어우러져 마법적 인상을 세인들에게 깊이 드리운다.

 

이야기마다 등장하는 강력한 마법은 스페인 사람들이 무어인들의 문화에 대해 품은 생경한 신비감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며, 어마어마한 보물은 재정복 이후 여전히 가난한 후인들의 부에 대한 기대와 소망과 환상이 단편적 사실에 근거하여 터무니없이 증폭된 현상이라고 여겨진다.

 

알함브라는 스페인 무슬림인들의 최전성기에 조성된 것이 아니다. 알함브라 궁전은 13세기에서 14세기에 걸쳐 건립되었다. 이때는 11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된 기독교 세력들의 대대적 이슬람 축출 활동의 와중이었다. 작가가 들려주는 알함브라의 창건자, 아부 알라흐마르와 완성자, 유세프 아불 하기그의 장은 한 줄기 장엄한 낙조를 바라보는 심정이다. 이슬람 세력의 쇠퇴는 이미 확연해지고, 왕조의 연명을 위해 봉신을 자청하고 동족을 공격해야 하는 처지. 알함브라의 슬픈 운명은 창건과 동시에 예정되어 있었다.

 

어빙은 알함브라를 진정으로 좋아했던 듯하다. 마지못해 그라나다를 떠나는 자신을 보압딜과 비교하여 치코 2라고 지칭할 정도로. 그의 덕분으로 알함브라는 세인의 관심을 얻게 되어방치와 폐허 상태를 벗어나게 되었고, 이후 스페인 정부는 알함브라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인식하여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관리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을 보면 워싱턴 어빙과 알함브라는 서로에게 운명적인 인연이었다.

 

각 권마다 알함브라 궁전을 그린 장면들이 십여 개 정도 삽화로 들어가 있다. 폴 귀스타브 도레와 존 프레데릭 루이스 등 저명한 화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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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함브라 1 기담문학 고딕총서 5
워싱턴 어빙 지음, 정지인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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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적 지명과 기담문학 고딕총서성격으로 미루어 미스터리와 에로티시즘이 결합된 작품을 기대하며 책을 펼친다. 헛된 기대는 바로 저버림을 당하였지만 이야기는 흥미롭게 이어진다. 이 작품은 작가 워싱턴 어빙의 스페인 알함브라 체류기다. 잠시 머무르다 떠나는 주마간산의 여행기가 아니며, 낯설고 신기한 풍경과 인물, 문화를 소개하는 기행문과도 다르다.

 

작가가 알함브라에 관심을 가지게 된 연유는 스페인 주재 외교관이 된 계기가 크지만, 무엇보다도 작가 자신의 방랑벽 내지 모험벽이 주된 원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서두에 어빙은 알함브라를 방문하여 자리를 잡는 과정을 기술하고, 알함브라 궁전과 역사에 대한 개략적 소개와 인상을 적고 있다. 여기까지가 통상적 여행기에 부합하는 전부다. 이후로 어빙은 궁전에 머물고 주위를 산책하면서 만나는 에스파냐 사람들과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흠뻑 빠져든다. 그리고 알함브라의 진기한 매력을 독자들도 공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

 

기타 연주로도 널리 알려진 알함브라는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이슬람 근거지인 그라나다 왕국의 왕궁이다. 15세기 말 기독교 세력의 수복 이후 잠시 궁전으로 사용되다가 어느덧 방치되어 쇠락한 상황이었던 듯하다. 오늘날 수많은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명소와는 전혀 다른 처지다. 어빙은 관리인의 배려로 궁전 안의 호젓한 홀에서 수 개월간 머물게 되는데, 이 점만 보더라도 당대에 유적에 대한 관심 및 관리가 매우 부실함을 짐작할 수 있다.

 

코마레스 탑, 린다락사 정원과 사자의 정원을 거닐면서 작가의 상념은 알함브라의 마지막 임금인 보압딜에게로 향한다. 그라나다 왕국의 마지막 임금, 이베리아를 영구히 기독교 세력에게 넘겨준 인물, 그에 대한 세인들의 평판은 왜곡과 악의가 증오와 결합하여 그를 희대의 폭군으로 간주하였다. 작자는 그것이 정당한 근거가 없음을 밝히고 있다. 보압딜은 쇠퇴하는 왕국을 지켜낼 영웅적 기개를 지니지 못한 평범한 인물이었을 따름이다.

 

이슬람 세력이 스페인을 점령한 지 거의 8백년, 그들은 이베리아를 알라 신이 지배하는 강토로 만들었고 무수한 세대를 거치면서 곳곳에 이슬람의 자취를 아로새겼다. 애초에 무어인들이 아프리카로 쫓겨났을 때 그것이 영원한 철수로 믿었던 이들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잠시 사세 부득하여 후퇴한 것일 뿐 다시 힘을 회복하면 되찾으리라고 믿었다. 이베리아는 기독교인들에게도 무어인들에게도 모두 자신의 땅인 동시에 고향이었다.

 

- 아벤 하부즈 왕과 아라비아 점성술사의 전설: 풍향계의 집과 정의의 문

- 아름다운 세 공주의 전설: 왕녀들의 탑

 

작가는 알함브라에 얽힌 전설에 주목한다. 사랑을 가로막는 종교, 사랑에 눈먼 이성, 사랑과 가족 간 갈등. 구구절절한 사연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동질적이다. 오랜 이교적 문화의 존재, 상당 기간 영토를 마주하고 대치하였던 역사, 정복이 완수된 지 3백년 남짓 경과한 시점, 해독할 수 없는 낯선 상징과 문자, 가난한 당대 서민들. 이런 요소들이 뒤섞여 알함브라는 마법에 걸린 채 모든 장소와 유적은 한층 신비스러운 전설과 설화를 품게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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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중문예의 시원, 에도희작과 짓펜샤 잇쿠
강지현 지음 / 소명출판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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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문학사는 17세기 이후를 근세로 분류하는데, 근세 전기는 오사카와 교토 중심의 상방문학으로, 18세기 이후는 근세 후기로 에도 중심으로 구분된다. 근세 문학은 문예의 중심이 무사에서 상인계층으로 이동하여 죠닌문학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정치적 안정에 따른 상공업의 발달, 막부와 영주 간 통치체제를 뒷받침하기 위한 인프라의 구축, 사회계층 간 신분이동의 곤란 등이 주된 배경이다.

 

저자는 18세기 이후 에도 문학의 중심인 희작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희작은 상품으로서의 문학을 뚜렷이 인식하고 (교훈이 아닌) 우스움을 유일한 미의식으로 표방하는 소위 희작정신을 지닌다. 보편적, 통속적인 대중의 도덕과 인정세태를 묘사하고 다양한 언어유희를 동반하여 극도의 재미를 추구한다.

 

먼저 제1장에서는 골계본의 대표작 <동해도 도보여행기>를 통해 이 작품이 당대와 후대의 대중 문학과 타 장르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변용되었는지를 연구하고 있다. <동해도 도보여행기>는 풍경 묘사를 생략하고 특산품과 풍속을 골계적으로 묘사하며, 여관여인들과의 유희와 장난, 억지 빗대기와 농담이 두드러지는 교카 등 당대 서민들의 기호에 철저히 충실하고 있다.

 

저자는 일대 베스트셀러인 <동해도 도보여행기>가 이후 우키요에와 주사위판 그림으로 확장되면서 장르 간 결합 현상을 보이는데 주목한다. 주사위판 그림을 통해 역으로 에도시대 풍속을 엿보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표상문화론에 입각한 통합적 사고에 의한 접근”(P.46)으로 분석한다. 이하에서는 주사위판 그림을 통해 <동해도 도보여행기>를 읽고 있는데 상당 분량(170여 쪽)을 차지하여 이 책의 주 콘텐츠라고 할 만하다. 5편의 주사위판 그림과 원작 소설의 삽화를 통해 원작 내용의 반영과 변용을 비교 분석하고 있다. 전문적이고 기계적인 기술이 많아서 비전공자로서는 재미없는 대목인데, 그래도 번역된 2편 이외의 원작 내용을 감상하는 묘미가 있다. 주사위판 그림은 원작 내용과 달리 사건 순서의 변경과 차용, 발화자의 역전 등 수법을 구사함이 특징이다.

 

이후 생산되는 만화, 영화 및 TV 드라마 등의 경우 원작을 토대로 하지만 원작의 틀에 그다지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각색의 모습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비판적으로 보자면 원작의 이름만 빌린 것이라고 하겠지만, 당대 관객층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긍정적인 평가도 가능하다.

 

2장에서는 그림소설[쿠사조시]에 대한 분석으로 황표지와 합권을 다루고 있다. 황표지와 합권은 표절과 모방을 주요 기법으로 재창작 방식을 도입하는 사례가 많으며, 특히 작가 자신을 희화화시켜 등장시키는 수법도 사용하고 있다. 이는 친근미와 해학성의 이중적 효과를 의도하는 것으로 나체 취향과 다복녀, 즉 추녀 취향도 해학미 부여라는 동일한 목적에 기여한다. 그리고 황표지와 합권은 그림소설답게 삽화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데 독자에게 즉각적인 흥미와 아울러 웃음 유발을 의도하고 있어서이다.

 

여기서는 <짓펜샤 잇쿠 작품 선집>에서 소개된 <잇쿠, 겨우 창작하다><미남 대할인 판매>외에 다양한 작품들이 등장한다. <귀명정례 기묘한 자식받침대의 지팡이>, <돋보기 들판의 어린 풀>, <적본의 쥐 흑본의 여우 두 이야기 혼인 기담>, <다케모토 기다유가락 무사>, <여행 중 수치를 써서 버린 한 통>, <여행 중 수치를 써서 버린 한 통>, <어설픈 귀동냥> 등은 짓펜샤 잇쿠의 작품이고, <교덴 덧없는 세상 술에서 깨다>(시키테 삼바), <손수 담근 아코젓갈>(혼젠테 즈보히라) . 제목만으로도 무척 흥미진진할 것 같아서 읽고 싶지만 아쉽게도 불가능하다.

 

오늘날 일본의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세계적 경쟁력을 갖추고 있고 아동뿐만 아니라 성인 대상으로도 확고한 전통을 차지하고 있다. 저자는 이것이 에도희작의 골계본과 그림소설 등에서 연원하는 것으로 주장한다. 기발한 착상, 황당무계한 스토리, 그로테스크한 묘사 등은 현대에 들어와 무에서 생성된 특성이 아니다. 이것은 이 책에 소개된 작품들에 대한 일람만으로도 충분히 공감과 동의가 가능하다.

 

전문적이고 학술적 성격의 저작이지만 중간의 기술적 부분을 건너뛴다면 흥미를 잃지 않고 읽어나갈 수 있는 책이다. 더구나 잇쿠의 작품집을 읽었다면 저자의 분석 도중에 작품 내용을 쉽사리 떠올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한 소개되지 않은 다른 에도희작들에 대한 지적 호기심도 충족할 수 있어 유익하다.

 

저자는 부록으로 자신의 에도희작 연구논문 요약본과 짓펜샤 잇쿠 연보를 수록하고 있으며, 일본문학의 흐름도 간단히 정리하고 있어 독자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저자가 번역한 <짓펜샤 잇쿠 작품 선집>을 읽고 나서 부족한 해설에 미흡함을 느껴서이다. 작가 및 작품세계, 나아가 에도희작에 대하여 더 자세히 알고 싶었는데, 마침 옮긴이가 집필한 저서가 몇 권 있는 걸 알게 되어 살펴보고 이 책을 읽기로 하였다. 2009년의 <근세일본의 대중문학>은 용어 자체가 통일되어 있지 않은 게 큰 난점이다. 작품명과 인명을 한자 독음 그대로 표기(동해도중슬률모, 굴신일구저, 색남대안매 등)하여 이해에 혼란을 가져올 우려가 있다. 2013년의 <일본근세문예의 웃음, 도보여행기물과 충신장물>도 마찬가지며 한자가 직접 노출되어 있어 문외한은 섣불리 다가가기조차 어렵다. 즉 상기 두 책은 아마추어가 아닌 모두 관련 전공자의 연구를 위한 것이다. 참고로 이 저작은 2012년에 출판되었으며 학술원 우수도서로 선정되어 한층 신뢰감을 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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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인의 사무라이 - 완역 가나데혼 주신구라 일본명작총서 1
다케다 이즈모.미요시 쇼라쿠.나미키 센류 지음, 최관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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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초에 발생하였던 실제 사건을 모델로 일본의 대표적인 명작 조루리로 일컬어지는 작품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사무라이의 본 모습, 즉 충성과 복수, 할복이라는 극적 요소가 여기에서 모두 드러난다. 발표 당시부터 현재까지 지속적인 인기를 놓지 않고 소설, 영화, 드라마 등으로 각색될 정도로 일본의 국민연극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배경이 된 실제 사건인 아코 사건에 대해서는 책 후반부의 해설에 자세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당대의 사건을 실명 그대로 쓸 수가 없는 무대극의 제약 상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 무로마치 막부 시절을 배경으로 한 군기 모노가타리인 <다이헤이키>를 차용하고 있다. 작중 인물과 실제 인물이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묘사되어 있어 혹자에 따라서는 다소간 혼동의 여지가 있다.

 

일본인들이 이 작품에 그토록 열광한 연유는 작품이 내세우는 지향점이 대중들의 가치관과 일치하였기 때문이다. 베네딕트가 일본을 상징하는 사물로 국화와 칼을 내세웠을 정도로 사무라이 정신, 즉 무사도는 오랜 전란의 시기를 겪어온 그들에게 인생관과 세계관의 핵심적인 기준이 되어 왔다. 그것은 외적으로는 절대적인 주군관계, 내적으로는 맹목적인 명예심을 근간으로 한다. 충성과 명예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체제를 지탱하는 기본 가치다. 이를 지키기 위해 무사는 스스로와 가족의 희생을 기꺼이 무릅쓴다. 개인적 감정과 애상을 드러내는 것은 무사의 수치이자 무사로서의 자격에 미달된 자임을 자인하는 꼴이다. 47인의 사무라이는 주군의 복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 그리고 복수에 성공하였으며, 당당한 자세로 할복을 받아들였다.

 

또 하나, 무도한 지배층에 대한 반감과 약자에 대한 동정. 엔야 한간을 모욕한 고노 모로나오와 그를 비호한 막부는 신분과 세력 면에서 절대 지배층이다. 비행과 부정의를 자행하는 지배계급을 상대적 약자들이 통렬히 비판하는 행위를 감행할 때 대중들은 통쾌감과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작중에는 복수까지만 나타나고 할복과 관련한 내용은 생략되어 있지만 실제 사건에서 막부가 이들의 처리에 고심했던 연유가 여기에 있다.

 

작가는 단선적으로 흘러가기 쉬운 작품 구조에 다양성과 입체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몇 가지 날줄을 덧붙이고 있다. 하야노 간페이의 충성과 비극적 죽음은 장렬한 여운을 남겨주며, 리키야와 고나미의 우여곡절의 결합은 슬픈 결말을 목전에 두고 있어 비극미를 고조시킨다. 여기에 별도의 단을 할애하여 상인 기헤이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꿋꿋한 의리를 보여주어 무사가 아닌 서민계층에도 의리의 귀감이 존재함을 알려준다. 반면 오노 구다야 부자와 사기사카 반나이는 인물 간 갈등과 긴장을 끌어올리고 사건을 악화시키는 악역을 담당하도록 하고 있다.

 

오보시 유라노스케와 무사들이 온갖 고난을 감내하면서까지 복수에 매달릴 정도로 그들의 주군 엔야 한간이 훌륭한 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 오히려 그에 대한 작중 인물평은 얕은 심기라든지 급한 성격처럼 다소 부정적인데 가깝다. 당시 엔야 한간의 주위에 오보시가 있었더라면 모모노이 와카사노스케를 가신 가코가와 혼조가 구했듯이 어떻게든 원만하게 처리하였을 것이다. 오보시와 동료들이 자신들을 희생한 이유는 오로지 엔야 한간이 자신들의 주군이었다는 점, 그에게 생계를 의지하였다는 점이다. 그것만으로 충성의 이유는 충분하다.

 

장한 일이로다. 누구라도 주군을 모시는 자의 마음은 당연히 이렇게 되어야 하는 법이다. 무언가 힘이 필요하다면 사양 말고 말하시오.” (P.215)

 

큰 공이다. 큰 공을 세웠다라고 모두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후세 후대까지 전해지는 이 의사들의 이야기. 이것이야말로 실로 천황의 치세가 계속되는 것처럼 길이 남을 것이다.” (P.221)

 

그들의 맹목적 충성은 이렇게 대다수에게 찬양받는다. 그것의 바람직성 여부에 대한 가치 판단과는 별도로 당대 및 후대 일본인들의 가치관이자 근원적인 정서임은 인정해야 한다. 앞서 읽은 <소네자키 숲의 정사>가 인정(人情)의 경계에 도달하였다면, 이 작품은 일본인들의 정서의 다른 측면, 즉 의리(義理)의 극한을 보여준다.

 

정서와 문화 깊숙이 내재한 고유한 코드를 건드린 작품이 오래도록 회자되는 고전으로 정착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상이한 문화적 시각에서 볼 때 공감과 납득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최소한 이해는 할 수 있다. 비판적 관점은 유지하더라도 일본 및 일본인들을 이해하기 위한 창문으로서 접근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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