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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리피 할로의 전설 ㅣ 펭귄클래식 132
워싱턴 어빙 지음, 권민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수록 작품>
1. 아내
2. 립 밴 윙클
3. 실연
4. 책 만드는 기술
5. 과부와 아들
6. 문학의 가변성
7. 시골 장례식
8. 유령 신랑
9. 포카노켓의 필립
10. 마을의 자랑거리
11. 낚시꾼
12. 슬리피 할로의 전설
미국 문학의 본격적 출발을 알리는 워싱턴 어빙의 <스케치북>에 수록된 36편 중 대표적인 12편의 단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스케치북>은 견문담, 민담, 단편소설, 수필 등 다양한 성격의 작품이 혼재되어 있는 작품집으로서 작가가 고향 주변에서 보고들은 이야기 및 영국 여행의 체험이 깊이 반영되어 있다.
‘작가의 말’에서 어빙은 모험적 성향을 고백한다. 낯선 곳을 방문하고 특이한 인물이나 풍습을 관찰하는 일을 좋아한다고. 눈부시게 찬란하며 웅장하고 장엄한 풍경도 물론 운치 있지만, 미국에도 자연절경은 충분하다. 그는 신대륙에는 부족한 고대의 스러져가는 유적, 역사적이고 시적인 연상을 일으키는 유럽의 매력에 관심을 갖는다. 회고적 취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앞서 읽은 <알함브라>와 같이.
그의 글은 명확한 장르 구분이 어렵다. <립 밴 윙클>과 <슬리피 할로의 전설>을 허구성에 주목하여 단편소설로 분류할 수도 있지만, 허드슨 강 유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민담 성격을 강조하면 옛이야기의 재현이라고 간주할 수도 있다. 개중에는 신변잡기적 수필에 속하는 글이 명확한 경우도 있으며, 짤막한 전기문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여지의 글도 존재한다. 어빙이 <스케치북>이라고 명명한 것도 이런 연유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더욱이 필명마저 제프리 크레용이다.
작가의 최초 저작은 뉴욕에 정착한 네덜란드계 미국인들의 역사를 해학적으로 그린 작품(<뉴욕의 역사>)이라고 한다. <립 밴 윙클>의 주인공 인명도 지역적 배경도 역시 네덜란드계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게다가 <슬리피 할로의 전설>에서도 주인공의 적수인 통뼈 브롬 역시 네덜란드계다. 어빙은 <뉴욕의 역사>를 디트리히 니커보커라는 필명으로 발표하였다. 두 단편도 출전을 니커보커라고 명시하고 있다. 뉴욕의 역사를 보면 초기 개척자가 네덜란드인이었으며, 네덜란드령으로서 뉴암스테르담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어빙처럼 기이한 옛적 민담과 전설에 근거한 글쓰기를 하는 작가는 여기에 주목하였으리라.
워싱턴 어빙의 문체는 진지하고 무겁지 않다. 가볍지 않은 경묘한 필치로 유머를 담아서 독자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자아내게 만든다. 이 점에서는 후대 오 헨리의 단편을 연상시킨다. 다만 어빙은 만연한 세상의 풍조를 우회적으로 콕콕 찌르는 풍자가 있다. 풍자적이고 해학적이지만 빈정거림과 조소와는 거리가 멀다. 은근한 해학미라고 하겠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경박한 세태. 사람 사이의 관계가 오래된 미덕을 상실하고 부박해지며, 겸양과 인정보다 포장과 욕심에 치우치는 풍조. 당대 미국도 현대 못지않았던 듯하다.
예상보다 훨씬 흥미로웠던 독서였다. 솔직히 ‘립 밴 윙클’ 이야기는 뻔한 이야기가 아닌가. 게다가 문학가로서 어빙의 성명은 그다지 높지 않으므로 자칫 지루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지녔다. 그런데 웬걸, 그의 글이 이토록 잔잔한 재미와 유머를 가져다 줄 줄이야.
배경과 내용상으로 대략적으로 작품군을 구분한다면, 민담과 전설, 가족과 풍습, 세태 풍자 등으로 나눌 수 있다.
1. 작가는 부부, 연인, 가족 간의 진실한 사랑에 대해 경건한 상념을 품는다. 인정의 순수하고 고결한 면모와 아름다운 전통 및 관습이 희박해져 감을 안타까워한다.
<아내>. 아내의 참모습은 시련을 함께 겪어봐야 알 수 있음은 녹슬지 않는 진리다. 장식품으로 생각하거나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는 기특한 마음은 부부의 의미에 대한 몰이해에 기인한다. 여인은 약하지만 아내는 의외로 강하다.
<실연>. 남성과 여성의 사랑과 실연을 받아들이는 정도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아무래도 남성에 비해 여성은 사랑에 올인 하는 사례가 빈번한데, 행복한 결말로 끝나지 않는 경우 안타깝기 그지없다. 태생적 성향일지 아니면 사회적 역할 차이에 따른 후천적 차이일지 궁금하다.
<과부와 아들>은 모성애의 의미를 재음미해보는 기회. 노파의 가난하지만 진실하면서도 품위 있는 슬픔의 모습에서 숙연함을 느끼게 된다.
<시골 장례식>에서는 장례식에 꽃을 뿌리고 나무를 심는 좋은 풍습의 의미를 살펴보고 시골을 제외하고 사라지고 있는 것에 탄식한다.
<마을의 자랑거리>는 순수하고 이상적인 사랑의 상실에 애틋함을 느낀다.
2. 세태 풍자는 유머와 해학미가 넘치는 작품들이다.
<책 만드는 기술>. 책은 저자의 순수한 창의와 진지한 연구의 산물이었다. 베끼기, 짜깁기 등의 기법을 통해 당대에도 쓰레기 같은 책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던 듯. 대영도서관에서 백일몽의 형식을 빌려 매우 풍자적이며 해학적이다.
<문학의 가변성>. 대영도서관에 이어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다. 고서와의 대담 형식으로 순수하고 불변한 언어의 허상과 종이와 인쇄술로 문학이 과포화 되었음을 지적한다. 그러면서도 시인의 불변적 가치를 찬미하는데, 셰익스피어에 대한 작가와 고서 간 견해차가 흥미롭다.
3. <립 밴 윙클>, <슬리피 할로의 전설>, <유령 신랑>은 민담과 전설을 배경으로 한다.
<립 밴 윙클>. 보통 <스케치북>이라고 하면 이 ‘립 밴 윙클’을 떠올린다. 오래된 전설에 근거하여 캐츠킬 산맥 지역의 신비성을 결부시킨 한 잔 술을 먹고 수십 년을 잠든 사나이는 동양 고전에도 상응하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보편적이다. 미국 독립전쟁 전후, 바가지 긁던 아내의 죽음 등 기묘한 상황 설정으로 절로 유머를 자아낸다.
<슬리피 할로의 전설>도 목없는 기사의 민담을 기반으로 기묘하고 으스스한 공포가 일순간 반전하여 어처구니없는 허탈감마저 자아낸다. <유령 신랑>도 독일을 배경으로 마찬가지로 흥미로운 민담이다.
4. 기타
<낚시꾼>은 늙은 낚시꾼과의 만남을 다루고 있는데, 전형적인 신변잡기적 수필에 해당한다.
<포카노켓의 필립>은 전혀 의외다. 아메리칸 인디언 전사의 투쟁적 삶을 기술하는데, 비교적 긍정적이어서 당대의 인식과 다른 비주류적 견해를 발견하게 된다. 미국 백인들의 인디언에 대한 주류적 견지는 야만, 미개, 폭력 등과 같이 여전히 부정적이다. 자신들이 인디언들의 땅을 침략하고 빼앗았다는 인식은 갖고 있지 않다. 반면 어빙은 식민개척자들의 탐욕과 편협, 무자비에 대해 비판하면서 타고난 영웅, 천성적으로 고결한 투쟁으로 필립을 평가한다. 고고한 정신, 긍지 높은 가슴, 길들여지지 않는 열정 등 자유로운 인디언 전사를 기리는데 이보다 더 적합한 수식어가 있을까?
어빙의 인식에도 물론 한계는 존재한다. 필립 당시에 인디언들의 적은 영국이지만, 미국 독립 이후에도 그들의 적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대상이 바뀌었을 따름이다. 이것을 어빙이 놓친 것인지 아니면 부러 외면하는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점은 그의 가슴은 따뜻하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