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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눈으로 본 현대 예술 - 삶을 어루만지는 예술 그리고 철학 이야기
최도빈 지음 / 아모르문디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사연이 있는 책이다. 에라스무스의 격언집에 대해 남긴 촌평을 보고 출판사 담당자가 인문학에 관심을 기울여줘 고맙다고 신간인 이 책을 보내주었다. 그때부터 이 책은 내게 계륵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선의와 감사의 표시로 받은 책이니 어떻게든 읽긴 읽어야 하겠는데...가뜩이나 골치아픈 ‘현대 예술’을 게다가 ‘철학’의 눈으로 본다고 하니...그리고 벌써 일년이 흘렀다.
저자는 미국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있는데, 소개에 따르면 미술과 건축을 좋아한다고 한다. 철학자가 무슨 예술 관련 서적을? 하고 의아하게 여길 수 있겠지만, 순수 철학이 아닌 미학을 전공하였으므로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설사 순수 철학 전공이라고 하더라도 예술을 논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 조항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 판형보다 가로가 1cm 정도 더 긴 개성적 판형이다. 예술 서적이란 특성상 지질도 고급용지를 사용하였고 미술관과 작품들의 컬러 도판이 듬뿍 들어가 있다. 요컨대 만듦새는 꽤 고급스럽고 그럴 듯하다.
전체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현대 미술(시각 예술)의 현재를 다루고 있으며, 2부에서는 미술(시각 예술)의 영역을 확장하는 현상을 소개한다. 각 장의 내용은 특정 미술관(주로 미국의 미술관 위주)에서 이루어지는 전시를 보며 작품전이 내세우는 작가 또는 주제를 통해 현대 미술의 실제와 핵심으로 직접 파고드는 방식을 취한다. 한편 3부에서는 미술(시각 예술)의 범위를 뛰어넘어 공연 예술의 현장을 살펴보고, 예술의 발전을 위한 고언과 자기반성으로 끝을 맺는다.
과연 철학도답게 단지 예술적 관점에서만 공간과 개인과 사물을 파악하지 않는다. 작품의 행간과, 예술가의 행위 배후를 고찰하며, 미술관의 설립 의의와 지향점을 철학적 무게감을 실어(주로 동서양의 고전적 철학자들의 사상 인용을 통해) 살펴보고 있다. 1부보다는 2부에서 책 표제에 부합하는 철학적 안내와 인용이 두드러진다. 각 장마다 본문 뒤에 ‘Reflections’라고 하여 보충적 설명 또는 저자의 소회를 수록한 점도 특색이다.
뉴욕 현대 미술관은 고전이 되지 않는 ‘현재’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다.
“예술이 기념비가 되는 순간 그 예술적 힘은 죽고 만다. 예술의 힘은 과거를 기념하는 데서 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은 현재를 고발하고, 미래를 향한 새로운 길을 제시할 수 있으며, 또한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래서 예술은 늘 파괴와 전복을 꿈꾼다.” (P.40)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예술은 정체되는 순간 화석이 되고 만다. 그 중에는 기념비가 되어 유명 미술관에 전시되는 영예를 누릴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의 존재 가치와 의의를 상실하게 되는 모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예술가는 결국 배불러서는 결국 안 되고 고난과 궁핍에 시달려야 한다는 말과 다를 게 없다. 예술을 위해서는 불가피하겠지만, 인간으로서의 예술가에게는 불행한 일이다.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에서는 유튜브 전시회를 보면서 진정한 보수주의를 논한다. 묵수적 수구를 보수와 혼동하는 우리네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보수는 무변화가 아니라 점진적인 변화를 뜻한다. 고인 물이 썩는 것은 자연현상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진정한 보수주의를 실현하기는 어렵다. 보수주의의 핵심인 내적 기준은 끊임없는 자기비판으로 벼려져야 하는데, 권력을 쥐게 되면 스스로에게 너무도 관대해지기 때문이다.” (P.52)
일반 감상자들에게 여전히 골치아픈 구상과 추상의 비교를 통한 미술의 본질에 대한 물음을 저자는 런던의 테이트 모던에서 제기한다. 버려진 발전소 건물을 그대로 활용하여 현대적 미술관으로 탈바꿈시킨 영국인들의 해법은 전통과 혁신의 공존과 균형을 찾는데 성공한 사례이다. 여기에는 오래된 건물은 무가치하다고 판단하여 무조건 철거하고 최신공법의 건물 신축만 일삼는 현실에 대한 일침이 숨겨 있기도 하다.
“리히터는 끊임없이 회화의 본질에 대해 물었다. 그 결과 대척점에 있는 듯한 현대 회화의 두 갈래-구상과 비구상-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자신의 작품 세계 속에서 보여 주었다. 대상의 모방이라는 회화의 ‘전통’과 자유분방함에서, 비결정성에서, 무목적성에서, 궁극적으로 그림 그리는 행위 자체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현대적 ‘혁신’을 동시에 담아내는 그의 ‘긍정적 양면성’은 50년 동안 보여 준 작품 활동 안에 오롯이 담겨 있다.” (P.64)
“테이트 모던과 리히터가 보여준 전통과 혁신의 긍정적 양면성이 부럽다면, 그 성과는 보다 나은 것, 보다 본질적인 것에 대한 끈질긴 질문과 사유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P.66)
사람들이 테마파크와 동물원을 찾는 이유는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다. 거기서는 일단 지루할 여가가 없다. 인파로 북적거리고 다이내믹한 체험 또는 언제 봐도 마냥 신기한 동물의 세계 등. 동물원 옆 미술관은 어떠한가? 진실로 미술에 관심과 흥미가 있어서 자발적으로 오는 수가 얼마나 될지 의심스럽다.
도쿄 롯폰기의 모리 미술관 편에서 저자가 찾아낸 미술관의 현대적 기능은 우리들 상식에서 벗어난 효용의 변용 가능성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더 이상 전시물을 보려고 미술관을 찾지 않는다고 한다.
“관객의 방문 목적이 더 이상 ‘어떤 가치 있는 대상을 보는 것’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관람’ 행위의 관심은 오히려 그 대상이 아닌 행위 자체에 쏠려 있다. 여가 시간은 ‘교양 있게’ 보냈다는 자족감을 들게 하는 데는, 전시물의 유의미성보다는 사람들이 몰리는 고품격 장소의 방문 경험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P.96)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농담을 주제로 한 전시회는 저자에게 표현의 자유와 풍자라는 상념을 일깨운다. 저자는 아직은 연령 면에서나 의식 면에서 기성세대에 분류되고 싶지 않은 의사가 역력하다. 진정한 예술 애호인이라면 응당 뼛속부터 반골기질이 당연하리라. 그는 이편에서 “그들이 줄기차게 폭로하고자 했던 권력자의 국가 사유화를 짚으면서 ‘표현의 자유’가 지닌 사상적 무게에 대한 우리의 몰이해를 돌아보고 싶었다.”(P.140)고 밝힌다. 더불어 표현의 자유에 있어 과도한 지 여부를 누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도 반문한다.
우리는 과거부터 배운 사실과 겪었던 경험 등을 토대로 하여 판단에 있어 불변의 준거점을 나름대로 설정하고 이에 근거하여 세상을 판단하고 평가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보수적이며, 변화에 저항적인 타성적 속성을 지닌다.
“관성은 인간의 개별적 믿음이나 사회적 통념에도 적용된다.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끊임없이 변화함에도, 자신의 믿음은 예전 상태로 유지하며 바꾸지 않으려 한다.” (P.230)
예술은 본질적으로 변화와 혁신을 지향한다. 당대인들의 냉대로 실의와 절망 속에 숨을 거둔 무수한 천재 예술인들의 이야기를 모두가 알고 있다.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고 과연 이것도 예술이라고 불릴 수 있을까 의아해할 정도로 예술의 영역을 나날이 새롭게 커지고 있음을 코닝 유리 박물관에서 우리는 깨닫게 된다.
3부에서 저자의 관심 영역은 시각을 벗어나 청각과 함께 한다. 먼저 버펄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이야기가 나온다. 마이너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지휘계에서 마이너인 여성 지휘자, 그리고 나치에 의해 역사에 파묻혀 마이너 작곡가로 잊혀진 티베르크. 그리고 마이너 음악으로 전락한 클래식 음악의 위상...하지만 마이너가 곧 하급 또는 저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미국 독립기념일의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연주회에서 저자는 애국의 본질을 반문한다. 국가에 대한 사랑과 헌신의 강조는 개인을 말살하고 전체주의에로 경도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합리적 비판을 하는 사람들은 비애국자이자 반역자, 나아가 매국노로까지 지탄받는다. 민주주의 국가에도 함정은 상존한다. 개인에게 내재한 심적 유약성과 미디어의 통제와 조작 가능성이 항상 유령처럼 따라붙어 우리는 항상 깨어있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국가의 간섭과 개인의 삶 사이의 바람직한 균형, 즉 개인과 집단 간의 예의’(P.302~303)가 중요성을 갖는다.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이 동등하다’는 것에서 그 이론적 기반을 찾는다. 그렇다면 그 운영 원리는 다수결이 될 수 없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동등한’ 사람들의 생각을 존중하는 것, 그것을 바탕으로 서로 끊임없이 소통하며 예의를 지키는 가운데 합의를 낳는 과정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P.305)
라스베이거스 태양의 서커스 쇼는 매우 예술적인 공연이라고 평가가 자자하단다. 저자는 예술적인 서커스 쇼가 진짜 예술이 되지 못하는 연유를 쇼를 보면서 깨닫는다.
“진정한 예술이라 어떠한 물음을 품지 않고는 존립할 수 없다......현실을 망각하고 환상을 반복적으로 공급하는 일는 ‘예술적’이라고 칭할 수는 있어도 그 자체로 ‘예술’이 되지는 못한다.” (P.326)
문제는 현대인들은 물음을 원치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괜히 골머리를 썩이고 싶지 않다. 유한한 인생에 가뜩이나 복잡한 현대사회를 헤쳐 나가느라 괴롭고 힘든 상태이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하하 호호 낄낄거리면 번민을 잠시나마 잊고 싶을 따름이다.
자본주의와 배금주의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는 단기간에 성과 내지 수익을 기대할 수 없다면 세인들의 관심과 주목을 끌기 어렵다. 이른바 인문학의 위기라는 반복되는 비명과 상업적 대중문화의 우월적 대두도 여기에 기인한다. 대학교에서 인문학 계열은 폐과와 정원 축소가 지속되는 반면 경영학 계열은 지원자와 후원금으로 넘쳐난다. 근시안적 안목을 탈피하고 긴 호흡으로 먼 장래까지를 아우를 수 있는 마인드를 저자는 댄스 고담과 플라톤의 철인왕을 연결하여 아쉬움을 토로한다.
보다 좋은 삶을 향해 나아가기 위하여 저자는 현상의 유지와 생존이라는 목표를 뛰어넘길 요구한다. 전체와 개인의 조화와 균형은 묵자와 양주 이래로 지난하고도 뿌리 깊은 과제이지만 여기에서 정면으로 도전하여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진보를 기대할 수 있다.
“한 사회가 ‘생존’을 넘어 ‘보다 좋은’ 상태로 발전하길 원한다면, ‘실용’을 넘어 인간의 창조성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침로를 잡아야 할 것이다.” (P.359)
불행히도 여기에서 소개된 수십 개의 미술관 중 단 하나도 가본 적이 없다. 따라서 무엇보다 내게는 미국의 미술관 투어 소개기로 인식되었다. 어디선가 들어보았음직한 아니면 난생 처음 듣는 이름의 미술관들을 지면을 통해서나마 만나는 것도 제법 흥미롭다. 뉴욕에 이렇게 쟁쟁한 미술관들이 여럿 있다는 사실도 비로소 알게 되었고, 공업도시 피츠버그가 앤디 워홀의 안식처라는 사실도 금시초문이었다.
미술에 관한 책은 몇 권 읽었지만 여전히 까막눈에 문외한이다. 인상파까지는 그런대로 고개를 끄덕일 준비가 되어 있지만, 추상화부터 시작해서 앤디 워홀 류의 예술과 상업의 경계가 불분명한 영역에 대해서는 여전히 심적 거부감이 드는 게 사실이다. 개인적 호오(好惡)와 상관없이 예술의 지평과 차원이 나날이 확대될 것은 부인하지 않지만.
무엇보다도 바로 미국 시각예술계의 현재와 지향을 일람할 수 있는 즐거움을 누렸으며, 저자의 시의적절한 묵직한 철학적 사유를 들여다 볼 수 있어 지적 충족감마저 채울 수 있었다. 예술과 철학은 그러고 보면 닮은 점이 제법 있다. 무엇보다도 현상에 안주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점이다. 예술은 변화와 변혁을 도모하며, 철학은 현상이 올바른지 반문한다. 양자의 시각으로 볼 때 현재의 우리 사회는 건강하고 발전을 기약할 수 있는 상태인지 궁금하다. 저자의 비판과 탄식을 볼 때 아닌 듯도 하지만, 이런 푸념이 존재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일말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듯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