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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즈레구사 ㅣ 일본명작총서 9
요시다 겐코 지음, 김충영.엄인경 옮김 / 문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방장기[호조키]>, <마쿠라노소시>와 함께 일본 3대 고전수필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14세기 초에 성립되어 17세기 에도 시대 이후부터 고전으로 본격적으로 향수되었다고 한다. 작자는 승려로서 당대 와카의 거장으로 손꼽힌 인물이다. 작중에 불교적 색채가 농후하고 와카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은 이런 배경이다. 총 243단 구성으로 분량만 보자면 앞선 <방장기>의 세 배 이상이다. 다만 각 단의 구분은 작자 본인이 아니라 후대에 성립되었다.
“딱히 할 일도 없어 무료하던 차에, 하루 온종일 벼루를 마주하여 마음속에 떠오르는 자질구레한 일들을 그저 붓 가는대로 적어 가노라니,......”라고 시작하는 서단의 작품의 표제와 성격을 대변해준다. ‘붓 가는대로 적는다’라는 것이 곧 수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작자가 보고, 듣고, 겪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체계 없이 서술한 조각글이다. 작가가 다루는 소재는 광범위하다. 요리, 처세, 세태, 수양, 화초, 의술, 음악, 와카, 불교, 관습, 기담, 우스개 등. 물론 견문담, 일화, 고사, 이적도 흥미롭지만 내심의 술회가 더 인상 깊다.
겐코의 가치관은 기본적으로 무상(無常)에 근거한다. 세상은, 인생은 덧없는 존재다. 자칫하면 염세적으로 흐르기 쉬운데, 이 점에서 <방장기>와 구별된다. 조메이가 주관적 시각에서 애상적, 회고적, 염세적 성향을 띠고 있는 반면, 겐코는 엄정하고, 담백하며, 다양한 관심을 객관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어 염세와는 거리가 있다.
작자는 세상사의 무상함, 즉 덧없음을 인정한다. 인심의 변화무쌍함에도 탄식한다[25단-27단]. 이러한 무상의 이치를 미혹된 자는 깨닫지 못하고 어리석은 자는 슬피 여긴다[74단]. 겐코에게 있어 염세와 둔세는 삶과 생명을 소홀히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참다운 삶과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추구하라는 것이다[93단].
세상은 덧없기에 정취 있고 소중하다[7단]. 작자는 ‘정취’를 중시한다. 계절의 추이에 따른 정취를 아낄 줄 안다[19단]. 하늘이 주었던 정취도 잊지 않는다[20단]. 시절에 맞게 존재하는 것이라면 무엇에서든지 흥취를 찾을 줄 안다[21단].
“한껏 무성해져 있는 가을 들녘처럼 풀로 우거진 뜰은 넘쳐흐를 만큼 잔뜩 맺힌 이슬로 뒤덮여 풀벌레 소리는 원망에 찬 듯하고, 뜰을 흐르는 도랑물 소리는 한가로운 정취를 자아내고 있었다.” [44단]
정취라면 남녀 관계의 정취도 놓칠 수 없다. 멋진 남자는 연애의 멋을 아는 남자라고 스님답지 않은 신선한 의견을 펼치며[3단], 연애결혼의 묘미도 설파한다[240단]. 다만 역시나 경계의 주문도 잊지 않는다. 즉 색욕에 탐닉하는 것은 경계하고 있다[8단, 9단]. 여자의 본질은 비뚤어져 있으므로 미혹에 마음을 뺏기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이다[107단]. 그런데 어찌하랴. 인력을 어쩔 수 없는 자연의 교묘한 장치인 것을. 한편 음주의 정취와 폐해를 논한 175단도 흥미롭다.
우리는 안다. 인생은 덧없고, 가야할 길은 머나먼 것을. 서둘러 속세를 등져야 한다[112단]. 사람의 마음은 외연에 이끌려 바뀌기 쉽다. 마음 속 도심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므로 조용한 환경에서 수행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바람직한 삶의 양식은 속세를 벗어난 둔세하는 것이다[58단]. 세상사를 떠나 마음가짐을 차분히 하는 정서는 <방장기>의 세계와 상당히 유사하다[75단].
생로병사, 특히 죽음은 순서가 없고 때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무상한 인생, 이왕 결심한 일이라면 망설이거나 미루어서는 안 된다[49단, 59단]. 이처럼 인생은 유한하고 불확실하므로 큰 일, 중요한 일을 서두르고 헛된 일, 사소한 일은 떨쳐버려야 한다[188단]. 그는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으면 죽은 사람이라고 단언한다. 잡념을 제거하고 잡사에 관여하지 않는 등의 노력에 시간을 써야 하므로[108단].
겐코는 의식주와 약을 넘어서면 사치라고 간주한다[123단]. 안분지족을 깨우치는 것이 곧 지혜다[131단]. 재물, 지위, 명성 등에 대해서는 가차 없다. 훌륭한 삶의 태도는 허유와 손신의 고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검소와 무소유에 있다[18단].
“상대적 세계에서의 모든 현상은 가상의 산물이다. 말할 가치도 없으며, 바랄 가치도 없다.” [38단]
작자는 잘난 체 하지 말고, 항상 신중하고 겸손할 것을 요구한다[79단]. 요즘과 같은 자기 PR의 시대적 요구와는 반대되는 정언이다. 잘난 척 생색내지 말 것을 거듭 강조하지만[233단], 말할 때는 솔직할 것을 요청한다[234단]. 억지로 꾸며서 흥미진진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러운 게 낫다는 지론이다[231단].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수양이 필요하다. 인품과 용모는 타고난 것이지만 학식, 교양을 비롯한 마음은 노력 여하에 따라 갈고 닦을 수 있는 요소다[1단]. 그래서 자기 자신을 알아야 만사의 이치를 아는 사람이라고 하여 스스로에 대한 인식의 필요성을 절감한다[134단]. 남보다 잘난 점은 오히려 결점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오만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며, 진정 뛰어난 사람은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식하는 인물이다. 소크라테스의 일갈은 서양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일체유심조가 해골 물을 마신 원효 대사의 전매특허는 아니잖은가? 길흉은 사람 마음에 따라 정해지며[91단],
겐코는 밤의 드러나지 않는 정취를 아는 이가 멋진 사람이라고 말한다[191단]. 벚꽃이 만개되기 전후와 만월이 되기 전후의 정취를 즐기는 정서도 마찬가지다. 만사는 시작될 때와 끝날 때가 오히려 좋다고 하며, 그래서 축제 후의 텅 빈 대로를 보는 것이 축제를 구경하는 것이나 진배없다고 보는 것이다[137단]. 만개한 꽃의 화려함은 찰나의 현상에 불과하며 삭풍이 불어 가지만 앙상한 고목이 사물의 본질에 가깝다.
희로애락에 흔들리지 않으며 자기도 남도 의지하지 않는 항상심과 부동심을 지니고 치우치지 않고 항상 관대하게 처신하는 사람[211단], 이 사람이 바로 마음의 주인이다[235단].
작자가 종종 회고적 성향을 드러내는 것은 옛날과 비교할 때 당대의 현실에 비관적 인식을 가져서이다. 단순한 회고 취미가 아니라 그가 보기에 당대의 것은 멋이 없고 천박하다[22단]. 와카를 보더라도 옛사람의 와카가 단순, 솔직, 산뜻, 정감이라는 면에서 더 뛰어나다고 말한다[14단]. 와카사천왕으로 불리던 겐코의 견해이니 허튼소리라고 폄하할 수는 없으리라. 29단에서 32단까지에 고인에 대한 그리움과 회상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러면 겐코는 당대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아래 문장에 함축되어 나타난다.
“어찌 되었든 거짓이 많은 세상이다.” [73단]
도깨비 소동이 벌어져 야단법석과 싸움까지 일어나는 어이없는 현상은 참과 거짓마저 분명하지 않은 당대의 어지러움을 드러내는 사건이다[50단]. 시가와 음악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성인들의 시대나 가능한 일이며, 실용성을 중시하는 당대에서는 어리석기 그지없다고 자탄한다[122단]. 위정자의 역할에 대한 비판 또한 따갑기 그지없다. 평범한 백성을 궁지에 몰아 범법자로 만들어 벌하는 세상[142단], 그것이 겐코의 당대 현실이며, 현재도 그다지 개선되지 않는 것 같다.
작자는 “가슴에 담고 있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배가 불룩해질 것 같은 심정이 들어 붓 가는대로 생각을 맡겨 적어”[19단]본다고 기술한다. 따라서 작품 전체를 하나의 통일된 체계로 이해할 필요는 없고 단별로 개별적 감상과 향수가 가능하다. 다만 옮긴이의 말처럼 그 속에 숨어있는 유기적 관계를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P.267). 그런 면에서 각 단의 제목을 붙인 점에 대해서는 일장일단이 존재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붙이지 않았으면 더 고마웠을 것이다. 내용상 정확하지 않기도 하고, 깊은 음미에 지장을 주는 선입견을 조장하기도 한다.
겐코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다. 한없는 욕망과 유한한 일생, 즉 무상(無常)의 세계로.
“환영과 같은 삶 속에서 무엇을 이루려 하는가? 모든 욕망은 진리와 등을 지는 망상이다.” [241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