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지리학 시론 및 열대지역의 자연도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자연과학선집
알렉산더 폰 훔볼트 지음, 정암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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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소싯적부터 여행기와 탐험기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김찬삼의 해외 여행기를 비롯하여 리빙스턴, 슈바이처, 헤딘, 아문센 등의 탐험담을 넋을 놓고 읽기도 하였다. 우연히 서점가에서 훔볼트에 대한 신간을 보는 순간 옛 열정이 되살아났다고 할까.

 

이 책 자체는 탐험기가 아니다. 훔볼트 자신도 단순한 모험가가 아니다. 그는 박물학, 자연학 등에 대한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탐험을 진행한다. 훔볼트가 18세기 초 수년에 걸쳐 남미대륙을 답사한 후 보고서를 정리하기 전 일종의 요약본 형식으로 발표한 저작이다. 전자는 이론적, 후자는 사실적 성격이 두드러진다.

 

<식물지리학 시론>은 식물지리학의 이론적 개념 정립을 목적으로 한다. 종래의 식물학을 기술식물학으로 부르며, 식물지리학은 지금으로서는 명칭만 존재하는 학문이지만, 실제로는 일반자연학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하는 학문 분야”(P.3)라고 제기한다. 생소한 분야니만치 식물지리학의 의의에 대한 소개를 더 하고 있다.

 

식물지리학은 다양한 기후 환경 아래서 식물을 그 장소와 연관시켜 고찰한다.” (P.3)

 

식물지리학은 매우 다양한 식물 형태의 배후에 어떤 원초적 형태가 있는지, 나아가서는 종의 다양성을 진화 또는 퇴화의 과정으로 볼 수 있는지 같은 문제에 관해서도 검토할 수 있다.” (P.11)

 

저자는 아메리카와 유럽의 기후, 위도, 고도별 식생의 차이를 언급하면서 식물지리학이 지질학과 정치사나 문화사에 결부시켜 고찰 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해의 심화와 확대를 꾀한다. 특히 식생의 양상에 대한 고찰을 통해 민족의 취향이나 독창성에 미치는 영향까지 지적하고 있다.

 

각각의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자연의 성격이라는 것은 확실히 이것들의 형태가 자아내는 아름다움 속에, 그리고 그것들이 짝이 되어 자아내는 조화와 대조 속에 존재한다.” (P.25)

 

훔볼트는 다년간의 탐사 결과를 한 장의 커다란 지도로 압축, 요약, 분류하여 글자 그대로 일목요연하게 나타내려고 하였다. <열대 지역의 자연도>는 이 지도를 읽기 위한 해설문이다.

 

필자는 열대지역이 나타내는 자연 현상의 총체를 태평양 해면에서부터 안데스 산맥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이르기까지 한 장의 지도에 요약하기를 시도했다.” (P.35)

 

그것은 또 필자가 준비하고 있는 일련의 보고서 내용을 요약한 것이기도 하다” (P.36)

 

저자는 일반자연학의 진보는 개별적인 연구와 함께 지표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나 사상들 모두를 결부시킴으로써 비로소 가능”(P.36)하다고 하여 종합적, 융합적 과학 이해를 제시하며,

자연도의 이해를 통해 상상력과 기쁨을 정신에 나누어 주는 것이 가능하다고 인식한다.

 

이어서 자연도의 구체적 내용에 대한 소개가 이어지는데, 지도의 축척비율이 왜곡될 수밖에 없는 이유, 최고봉 침보라소 산의 해발고도 측정치에 대한 설명을 한 후 단면도의 윤곽을 통해 지질 현상을 논하고 지도 안쪽에서는 적도 주변 지역의 식생 지리를 상세히 표현하기 위해 고도대별 식물의 형태에 대응해서 식생도에도 식물군생별 영역을 설정하여 세부적으로 논하고 있다. 특히 기나나무(cinchona)의 분포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흥미롭다.

 

훔볼트의 탐사와 관찰이 이루어진 시기는 19세기 초, 우리는 각종 자연다큐를 통해 열대지방 고산, 특히 킬리만자로의 고도별 식생이 다채로움을 인지하고 있지만 당대의 시대적 인식을 염두에 두며 매우 획기적일 수 있다. 더구나 그는 식생뿐만 아니라 기온, 습도 등 폭넓은 지구과학적 현상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적도 주변지역의 자연도의 목적은 식물지리학상의 고찰에 공헌하는 것만이 아니다. 자연도는 동시에 해발고도에 따라 변화하는 현상 모두를 종합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시도이기도 했다.” (P.78)

 

저자는 이하에서 식물지리학 외 일반자연학의 각 분야에서 행해져 온 연구 성과를 14개 항목으로 정리하면서 이 책에서는 간단하게 개요만 언급하고 있다. 해당 항목은 다음과 같다. 기온, 기압, 습도 전기, 하늘의 청도, 빛의 감쇠, 수평굴절률, 대기의 화학조성, 중력의 감소, 비등수 온도, 지질, 설선(雪線), 해상에서 산을 바라볼 수 있는 거리, 서식지의 고도로부터 본 동물의 다양성.

 

대기의 화학조성에서 이미 상식이 된 대기 내 질소 대 산소 비율에 대한 논의가 신기하고, 안데스 산맥의 명칭을 남미에 국한하지 않고 오늘날의 로키 산맥까지도 포괄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어 이채롭다. 특히 인디언이 몽골계 인종이고, 아시아에서의 이동설에 대해 당대는 아직 가설단계에 있음을 알려준다.

 

해설 포함 150여 면에 불과한 소책자에서 포괄적이고 세부적인 전문적 내용을 기대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더구나 인문 사회학에 비하여 학문적 발전이 빨리 이루어지는 자연과학에 있어서랴. 그럼에도 지리학과 지구과학의 학문적 초창기 단계에 지대한 공헌을 한 훔볼트의 생생한 육성을 당대적 인식 틀과 함께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 중간에 낯선 식물종의 이름이 여과 없이 라틴어 학명 그대로 융단 폭격 수준으로 노출되고 있어 이 방면에 문외한인 독자로서는 곤혹스럽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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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즈레구사 일본명작총서 9
요시다 겐코 지음, 김충영.엄인경 옮김 / 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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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장기[호조키]>, <마쿠라노소시>와 함께 일본 3대 고전수필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14세기 초에 성립되어 17세기 에도 시대 이후부터 고전으로 본격적으로 향수되었다고 한다. 작자는 승려로서 당대 와카의 거장으로 손꼽힌 인물이다. 작중에 불교적 색채가 농후하고 와카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은 이런 배경이다. 243단 구성으로 분량만 보자면 앞선 <방장기>의 세 배 이상이다. 다만 각 단의 구분은 작자 본인이 아니라 후대에 성립되었다.

 

딱히 할 일도 없어 무료하던 차에, 하루 온종일 벼루를 마주하여 마음속에 떠오르는 자질구레한 일들을 그저 붓 가는대로 적어 가노라니,......”라고 시작하는 서단의 작품의 표제와 성격을 대변해준다. ‘붓 가는대로 적는다라는 것이 곧 수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작자가 보고, 듣고, 겪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체계 없이 서술한 조각글이다. 작가가 다루는 소재는 광범위하다. 요리, 처세, 세태, 수양, 화초, 의술, 음악, 와카, 불교, 관습, 기담, 우스개 등. 물론 견문담, 일화, 고사, 이적도 흥미롭지만 내심의 술회가 더 인상 깊다.

 

겐코의 가치관은 기본적으로 무상(無常)에 근거한다. 세상은, 인생은 덧없는 존재다. 자칫하면 염세적으로 흐르기 쉬운데, 이 점에서 <방장기>와 구별된다. 조메이가 주관적 시각에서 애상적, 회고적, 염세적 성향을 띠고 있는 반면, 겐코는 엄정하고, 담백하며, 다양한 관심을 객관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어 염세와는 거리가 있다.

 

작자는 세상사의 무상함, 즉 덧없음을 인정한다. 인심의 변화무쌍함에도 탄식한다[25-27]. 이러한 무상의 이치를 미혹된 자는 깨닫지 못하고 어리석은 자는 슬피 여긴다[74]. 겐코에게 있어 염세와 둔세는 삶과 생명을 소홀히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참다운 삶과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추구하라는 것이다[93].

 

세상은 덧없기에 정취 있고 소중하다[7]. 작자는 정취를 중시한다. 계절의 추이에 따른 정취를 아낄 줄 안다[19]. 하늘이 주었던 정취도 잊지 않는다[20]. 시절에 맞게 존재하는 것이라면 무엇에서든지 흥취를 찾을 줄 안다[21].

 

한껏 무성해져 있는 가을 들녘처럼 풀로 우거진 뜰은 넘쳐흐를 만큼 잔뜩 맺힌 이슬로 뒤덮여 풀벌레 소리는 원망에 찬 듯하고, 뜰을 흐르는 도랑물 소리는 한가로운 정취를 자아내고 있었다.” [44]

 

정취라면 남녀 관계의 정취도 놓칠 수 없다. 멋진 남자는 연애의 멋을 아는 남자라고 스님답지 않은 신선한 의견을 펼치며[3], 연애결혼의 묘미도 설파한다[240]. 다만 역시나 경계의 주문도 잊지 않는다. 즉 색욕에 탐닉하는 것은 경계하고 있다[8, 9]. 여자의 본질은 비뚤어져 있으므로 미혹에 마음을 뺏기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이다[107]. 그런데 어찌하랴. 인력을 어쩔 수 없는 자연의 교묘한 장치인 것을. 한편 음주의 정취와 폐해를 논한 175단도 흥미롭다.

 

우리는 안다. 인생은 덧없고, 가야할 길은 머나먼 것을. 서둘러 속세를 등져야 한다[112]. 사람의 마음은 외연에 이끌려 바뀌기 쉽다. 마음 속 도심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므로 조용한 환경에서 수행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바람직한 삶의 양식은 속세를 벗어난 둔세하는 것이다[58]. 세상사를 떠나 마음가짐을 차분히 하는 정서는 <방장기>의 세계와 상당히 유사하다[75].

 

생로병사, 특히 죽음은 순서가 없고 때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무상한 인생, 이왕 결심한 일이라면 망설이거나 미루어서는 안 된다[49, 59]. 이처럼 인생은 유한하고 불확실하므로 큰 일, 중요한 일을 서두르고 헛된 일, 사소한 일은 떨쳐버려야 한다[188]. 그는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으면 죽은 사람이라고 단언한다. 잡념을 제거하고 잡사에 관여하지 않는 등의 노력에 시간을 써야 하므로[108].

 

겐코는 의식주와 약을 넘어서면 사치라고 간주한다[123]. 안분지족을 깨우치는 것이 곧 지혜다[131]. 재물, 지위, 명성 등에 대해서는 가차 없다. 훌륭한 삶의 태도는 허유와 손신의 고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검소와 무소유에 있다[18].

 

상대적 세계에서의 모든 현상은 가상의 산물이다. 말할 가치도 없으며, 바랄 가치도 없다.” [38]

 

작자는 잘난 체 하지 말고, 항상 신중하고 겸손할 것을 요구한다[79]. 요즘과 같은 자기 PR의 시대적 요구와는 반대되는 정언이다. 잘난 척 생색내지 말 것을 거듭 강조하지만[233], 말할 때는 솔직할 것을 요청한다[234]. 억지로 꾸며서 흥미진진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러운 게 낫다는 지론이다[231].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수양이 필요하다. 인품과 용모는 타고난 것이지만 학식, 교양을 비롯한 마음은 노력 여하에 따라 갈고 닦을 수 있는 요소다[1]. 그래서 자기 자신을 알아야 만사의 이치를 아는 사람이라고 하여 스스로에 대한 인식의 필요성을 절감한다[134]. 남보다 잘난 점은 오히려 결점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오만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며, 진정 뛰어난 사람은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식하는 인물이다. 소크라테스의 일갈은 서양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일체유심조가 해골 물을 마신 원효 대사의 전매특허는 아니잖은가? 길흉은 사람 마음에 따라 정해지며[91],

 

겐코는 밤의 드러나지 않는 정취를 아는 이가 멋진 사람이라고 말한다[191]. 벚꽃이 만개되기 전후와 만월이 되기 전후의 정취를 즐기는 정서도 마찬가지다. 만사는 시작될 때와 끝날 때가 오히려 좋다고 하며, 그래서 축제 후의 텅 빈 대로를 보는 것이 축제를 구경하는 것이나 진배없다고 보는 것이다[137]. 만개한 꽃의 화려함은 찰나의 현상에 불과하며 삭풍이 불어 가지만 앙상한 고목이 사물의 본질에 가깝다.

 

희로애락에 흔들리지 않으며 자기도 남도 의지하지 않는 항상심과 부동심을 지니고 치우치지 않고 항상 관대하게 처신하는 사람[211], 이 사람이 바로 마음의 주인이다[235].

 

작자가 종종 회고적 성향을 드러내는 것은 옛날과 비교할 때 당대의 현실에 비관적 인식을 가져서이다. 단순한 회고 취미가 아니라 그가 보기에 당대의 것은 멋이 없고 천박하다[22]. 와카를 보더라도 옛사람의 와카가 단순, 솔직, 산뜻, 정감이라는 면에서 더 뛰어나다고 말한다[14]. 와카사천왕으로 불리던 겐코의 견해이니 허튼소리라고 폄하할 수는 없으리라. 29단에서 32단까지에 고인에 대한 그리움과 회상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러면 겐코는 당대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아래 문장에 함축되어 나타난다.

 

어찌 되었든 거짓이 많은 세상이다.” [73]

 

도깨비 소동이 벌어져 야단법석과 싸움까지 일어나는 어이없는 현상은 참과 거짓마저 분명하지 않은 당대의 어지러움을 드러내는 사건이다[50]. 시가와 음악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성인들의 시대나 가능한 일이며, 실용성을 중시하는 당대에서는 어리석기 그지없다고 자탄한다[122]. 위정자의 역할에 대한 비판 또한 따갑기 그지없다. 평범한 백성을 궁지에 몰아 범법자로 만들어 벌하는 세상[142], 그것이 겐코의 당대 현실이며, 현재도 그다지 개선되지 않는 것 같다.

 

작자는 가슴에 담고 있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배가 불룩해질 것 같은 심정이 들어 붓 가는대로 생각을 맡겨 적어”[19]본다고 기술한다. 따라서 작품 전체를 하나의 통일된 체계로 이해할 필요는 없고 단별로 개별적 감상과 향수가 가능하다. 다만 옮긴이의 말처럼 그 속에 숨어있는 유기적 관계를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P.267). 그런 면에서 각 단의 제목을 붙인 점에 대해서는 일장일단이 존재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붙이지 않았으면 더 고마웠을 것이다. 내용상 정확하지 않기도 하고, 깊은 음미에 지장을 주는 선입견을 조장하기도 한다.

 

겐코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다. 한없는 욕망과 유한한 일생, 즉 무상(無常)의 세계로.

 

환영과 같은 삶 속에서 무엇을 이루려 하는가? 모든 욕망은 진리와 등을 지는 망상이다.”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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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angko 2014-08-06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요시다 겐코...검색으로 구경 잘 하였습니다....^^
 
방장기
가모노 조메이 지음, 조기호 옮김 / 제이앤씨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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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삼대 고전수필 문학에 속하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나머지는 세이 쇼나곤의 <마쿠라노소시>와 요시다 켄코의 <쓰레즈레구사>라고 한다. 분량은 얼마 되지 않는다. 1237단의 구성으로 본문만 따지면 100쪽에 미치지 못한다. 내용상 3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1장은 이 책 전체의 도입부에 해당한다. 2장에서 6장까지는 인간세상의 5대 재해를 기술하고, 7장부터 종장은 작자의 소회와 심경을 담고 있다.

 

1장에서 초메이는 흐르는 강물, 물거품, 시드는 나팔꽃, 사라져 버리는 아침 이슬과 같은 어휘의 사용을 통해 인생과 세상사의 무상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1장의 이런 분위기는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관통한다.

 

석가모니의 용어를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인생은 수많은 고통과 고난으로 점철되어 있다. 나는 온전하고자 하나 세상의 풍파는 끊임없이 나를 뒤흔들어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한다. 작가는 수십 년 전을 회상하여 자신과 세상에 충격을 준 다섯 가지 재해를 기술한다. 작가의 눈은 이는 단순한 재해가 아니라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자연의 준엄한 경고로 간주한다.

 

안겐 시대의 화재는 집과 재산에 열중하는 어리석음을 드러낸다. 지쇼 시대의 회오리바람은 지옥의 업풍과도 같은 신의 경고가 아니겠는가. 요와 시대의 기근 장에서는 사실적인 기술을 통해 굶주림의 비참함과 참담함을 극대화하고 있다. 인간이란 소수지어(少水之魚) 같은 가련한 존재다. 겐랴쿠 시대의 대지진 또한 인간사의 허무와 탄식을 자아낼 뿐이다. 인재라고 할 수 있는 후쿠와라[후쿠하라] 천도 장면은 급작스런 천도에 대한 세인의 불안과 불평을 진술하고 백성들에 대한 위정자의 자비심 부족을 질타한다. 아울러 귀족사회에서 무사사회로 변해가는 현상을 난세의 전조로 파악하여 우려를 표한다.

 

초메이는 여기에서 자신의 삶을 회고한다. 서른 살에 움막을 짓고 쉰 살에 출가하여 심산에서 세상을 등지니 그의 삶도 평탄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스스로 그럭저럭 견뎌내며 살아왔다고 술회한다(27). 그래서일까. 그의 글에는 염세적 인식이 짙게 배어난다.

 

단 한 순간이라도 마음의 불안을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인가? -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그렇게 될 것 같지는 않다.” (25)

 

얻고자 하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27)

 

그는 은거하기 위해 조그만 집을 짓는다. 7단에서 세인의 집짓는 어리석음을 비판한 초메이지만 암자는 단지 방장에 불과한 임시 거처일 뿐이다. 그 좁은 곳에서 작자는 자연을 벗 삼아 나름대로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긴다. 자신을 소라게와 물수리에 비유하며, 아무런 걱정 없는 삶.

 

세속의 원망을 마음에 간직하지 않고 억척스러워하지도 않으며, 그저 한가함 속에 조용하게 지내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근심 없는 나날을 즐거움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32)

 

자신의 처지와 심경을 초메이는 이렇게 자부한다.

 

내 한 평생의 즐거움은 선잠을 자고 있는 듯 가볍기 그지없으며,.....” (33)

 

살아 보지 않고 그 누가 이 좋은 기분을 확실하게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어느 누구도 이런 마음을 알 리가 없다.” (34)

 

세상을 등지고 출가하여 불도에 뜻을 둔 것은 속세의 번뇌와 집착을 벗어나기 위함이다. 그가 초암에서의 한가롭고 조용한 생활에 만족하고 집착하는 것은 출가의 진의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는 자문하고 반성하며 아미타불을 염불한다.

 

초메이가 살던 시기는 12~13세기 가마쿠라 막부시절이다. 헤이안시대의 평화는 사라졌지만 아직 분열과 전란의 시기는 본격적으로 도래하지 않았다. 따라서 초메이의 글에서 풍기는 무상과 염세의 정조는 상당 부분 개인적 이력과 체험에서 비롯되었다고 봐야 한다. 다섯 가지 재해는 인간사에서 언제든 들이닥칠 수 있는 위험이 아닌가.

 

세상은 그가 기대하는 것을 제공하지 못하였다. 신관의 직책도, 와카 시인으로서의 세속적 명성도. 세속에 실망하고 은둔자로서의 삶을 택하였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가능하다. 은자의 삶은 겉보기만큼 기실 그럴 듯하지 않다. 고사리와 풀뿌리를 캐며 연명하는 삶은 오히려 비참에 가깝다. 그럼에도 세속의 욕망을 덜어내자 심경은 평안을 얻는다. 높고 깊은 산 속에서 저 아래 세상을 바라보니 진세에서의 삶이 어리석게 느껴진다. 그 속에서 여전히 이전투구하며 악다구니하는 사람들이 가련하게 생각된다.

 

사방 한 장 정도의 초옥이면 충분히 몸을 쉴 수 있고, 재화와 지위를 구하기 위해 타인과 경쟁하고 눈치를 보며 마음을 졸일 필요 없이 그윽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흘러가는 강물 속에서 피었다 사라지는 물거품과도 같은 헛된 욕망에 연연해하는가. 그저 자연과 더불어 자연 속에서 소박함을 즐길 따름이다.

 

후대의 독자들은 초메이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으니 이후 수백 년간의 전국시대라는 일대 혼란기가 도래하기 때문이다. 생명과 도덕이 초개보다 못하게 취급받으니 그만큼 초메이가 보여준 탈속의 정서가 가슴 가득 다가왔으리라.

 

* 옮긴이는 첫머리에 자신의 일본시절 개인적 기념사진을 여러 장 수록하고 있으며, 머리말도 사적 소감이 장황하다. 더구나 백 쪽 남짓한 해제는 개인적 감상과 작품과 무관한 소견으로 상당한 분량이 채워져 있다. 특히 근래의 자연 재해와 노무현정권의 수도이전의 시시콜콜한 사실을 장황하게 나열하는 것이 작품 이해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도저히 이해부득이다. 좋은 작품이지만 좋은 책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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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야마 2014-08-17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원광보건대학교 교수. 일본어문학 담당.
무상감과 '죽음'의식, 장송의례 등에 관심이 많다.
 
오치쿠보 이야기 - 일본 고대의 신데렐라 이야기 일본명작총서 10
박연정 외 옮김 / 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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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는 낯설어도 부제-일본 고대의 신데렐라 이야기-를 보면 대충 무슨 이야기인지 짐작이 간다. 내용이 뻔할 거라고 지레짐작하여 흥미를 잃는다면 이 작품의 절반도 알지 못하게 된다. 일본 중세의 헤이안 시대 작품이므로 모노가타리 장르에서는 초기작에 속한다. 유명한 <겐지 이야기>보다 시기적으로 앞설 정도로.

 

계모에게 구박받는 전처의 자식이라는 점에서, 신데렐라와 마찬가지로 오치쿠보도 주인공의 초라한 지위를 상징하는 공간적 표상이라는 점에서 유명한 동화와 공통적이다. 반면 동화와 성인 대상의 모노가타리는 기본 성격에서 동질적일 수 없다. 게다가 고대 일본이라는 시대적, 지역적 차이점도 신데렐라의 나이브함과는 다른 독특한 성격을 부여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오치쿠보가 아니다. 전반부는 오치쿠보의 시녀인 아코기가, 후반부는 오치쿠보의 남편인 쇼쇼가 사실상 주인공이다. 오치쿠보의 역할과 캐릭터는 지나치게 소극적이다. 예쁘고 착한 인물인 것은 알겠지만 아무런 자기주장이 없다. 계모로부터의 학대에도 그저 괴로워하며 울기만 할뿐이다. 후에 쇼쇼가 계모에 대한 복수에 몰두하는 중에도 소극적 우려와 염려를 비칠 뿐이다. 물론 쇼쇼의 다음 말처럼 그 순수한 선함이 종국에 행복을 가져다주는 미덕이지만.

 

아씨한테는 속된 마음이란 것이 없다네. 본인에게 나쁜 마음을 품은 사람도 불쌍하다고 하는 사람이니.” (P.158)

 

아코기와 다치하키 커플은 굳이 오치쿠보와 쇼쇼를 맺어주기 위해 노력할 의무가 없다. 아코기는 다른 시녀들처럼 계모의 딸들을 시중들거나 아니면 아예 다른 집으로 가버리면 그뿐이다. 그녀가 오치쿠보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야말로 그녀의 마음씨를 돋보이게 한다. 오치쿠보와 쇼쇼가 부부의 연을 맺도록 안절부절 못하며 필요한 준비와 물품을 구하기 위하여 애쓰는 대목, 늙은 덴야쿠노스케가 오치쿠보를 강제로 취하지 못하도록 전전긍긍하는 장면, 다치하키와 상의하여 오치쿠보를 구출하도록 쇼쇼를 부추기는 등 그녀의 활약과 재치가 없었다면 오치쿠보의 일생은 평생 오치쿠보 상태에 머물렀으리라. 이 점은 같은 처지의 수많은 뇨보들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통쾌감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아코기가 성공하여 자신은 물론 남편마저도 출세의 길에 오르게 되는 것이야말로 뇨보들의 깊은 소망을 반영해주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의 작자는 신분 면에서 귀족층이 아니라 뇨보 같은 시녀들의 일상과 생각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중간계급으로 생각된다. 우아하고 고상한 어휘보다 인물들의 심정을 직접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속어적 표현과 희화적 장면이 거리낌 없이 등장하는 점도 이채롭다. 인물과 정경 묘사를 중시하지 않고 인물들의 행동과 사건 전개에 주안점을 두고 있어 보다 모노가타리적이라고 하겠다.

 

오치쿠보의 신데렐라 성공담은 전 4권 중에서 2권 전반부까지로 국한된다. 이후는 쇼쇼의 계모에 대한 철저한 복수로 점철된다. 이 점에서 서양의 동종 이야기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접어든다. 그런데 당사자인 오치쿠보는 내키지 않아 하는 복수를 쇼쇼가 집착하는 연유는 무엇일까? 복수에 대한 일본 고유의 관념과 사랑하는 여인의 박해에 대한 견딜 수 없는 분노가 상승 작용을 한 것은 틀림없다. 여기에 권선징악의 철저한 구현을 바라는 세인들의 소망이 가세되었다고 본다.

 

쇼쇼의 보복은 매우 가혹하다. 사람들 앞에서 계모 일행에게 모욕을 주는 행위도 수차에 걸쳐 서슴지 않는다. 계모의 셋째 딸의 남편을 빼앗고, 넷째 딸을 거짓 결혼으로 남부끄러운 사위를 얻게 만든다. 마침내 주나곤이 이사하려고 대대적으로 정비한 (오치쿠보 명의의) 저택마저 빼앗아 치명적 타격을 입힌다. 철천지 원한이 있지 않는 한 용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수의 정도가 처절하다. 물론 나중에는 아낌없는 효도로 되갚지만 말이다. 이런 게 가능한 것은 역시 권력의 힘이다. 계모와 주나곤은 감히 쇼쇼 집안에 대들지 못한다. 나중에 천황의 외숙이 되고, 대를 이어 태정대신이라는 최고의 자리에 오를 정도로 그 위세는 당당하기 그지없다. 권력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는 것이 어디 일본 사람뿐이겠는가. 다만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그들이 후에 쇼쇼의 호의에 모든 원한을 잊고 감사와 충성을 바치는 장면이다. 역시 우리네와는 정서가 차이를 보인다.

 

일본 중세의 독특한 결혼 풍습은 이미 알고 있지만, 정조보다 외양에 더 신경을 쓰는 오치쿠보의 태도는 여전히 낯설다. 체면과 허상을 중시하는 기질의 바탕으로 여겨진다.

 

오치쿠보는 남자의 정체보다 자신의 옷이 너무나 초라하고 속바지가 몹시 볼품없다는 사실이 신경 쓰였다.” (P.25)

 

오치쿠보는 부끄러움에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속옷은 제대로 갖추지도 못했고 윗옷에 바지 한 장만 달랑 걸쳐 입어 곳곳에 맨살이 드러난 옷차림을 생각하니 심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정도였다. 부끄러움으로 눈물보다 땀에 흠뻑 젖었다.” (P.27)

 

오치쿠보에 대한 계모의 태도는 단지 전처소생이라고 미워하는 것 같지 않다. 오치쿠보는 엄밀히 말해 정실 소생은 아니고 소실의 딸이라고 해야 옳다. 따라서 계모가 자신의 자식들과 오치쿠보를 차등하는 것은 납득이 간다. 소실의 딸이 자기 딸들보다 미모나 재주로나 뛰어남을 알고 있는 계모로서는 오치쿠보가 더욱 미웠으리라. 그래서 남자를 못 만나게 하고 계속 딸들 시중이나 들게 하면서 부려먹으려고 했던 것이다.

 

내 그리 남자를 만나지 못 하게 했건만 이렇게 분할 수가! 남자가 생긴 이상 결코 이 집에 그냥 붙어있지는 않을 게야. 남자 집으로 가겠지. 그 애가 없으면 큰일인데... 어여쁜 우리 딸들 옆에서 시중을 들게 하려 했는데.” (P.56)

 

그런 면에서 계모는 비록 악독한 인물이지만 강렬한 개성을 지닌다. 절 참배 길에 쇼쇼가 계모 일행을 괴롭히며 계모와 주고받는 대목이 이를 잘 보여준다.

 

(쇼쇼) “이제 충분히 질렸수?

(계모) “아직 안 질렸다.” (P.131)

 

고장난명(孤掌難鳴). 계모의 성격이 제아무리 독하고 모질다고 하더라도 혼자 힘만으로는 오치쿠보를 저리 박대할 수 없다. 오치쿠보의 아버지인 주나곤의 묵인과 외면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주나곤의 모호한 태도야말로 악랄함으로 일관하는 명확한 캐릭터의 계모와는 대조적이다. 주나곤은 딸아이가 오치쿠보로 불리는 것도 알고, 초라한 거처에 거주하고 있음도 잘 안다. 계모의 말만 듣고 구석방에 감금하고 괴롭혀 죽이라고 먼저 지시한 것도 주나곤이다.

 

이 작품의 문학적 의의를 해제에서 인용하며 끝맺는다.

 

“<겐지모노가타리>를 비롯한 헤이안 문학의 귀족적이고 우아한 미의식이 우월하던 시대에 그와는 전혀 동떨어진 해학적이고 사실적인 장면 묘사와 스토리로 당대의 대중성을 획득한 본 작품은 친밀한 계모담형 이야기, 개성적이고 일관된 성격의 인물 유형, 아코기나 다키하키 같은 조역들의 맹활약과 치밀한 플롯 전개로 고대 모노가타리의 세계를 초월하여 후대의 독자를 사로잡는 저력을 보여 준다.”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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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끼호떼 2 - 기발한 기사 라 만차의 창비세계문학 4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민용태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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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키호테 1권을 읽은 후 별다른 재미와 감흥을 느끼지 못한 데 대하여 독자로서의 지적 능력 한계에 대한 고백과 아울러 혹시 번역상의 원인은 없는지 의구심을 토로한 적이 있다. 좋지 않은 느낌은 항상 적중하는 법. 2권을 읽으면서 감동은 아니더라도 상당한 재미를 느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옮긴이는 번역 문투에서 고상함과 비속함을 대비하여 보여주고자 하는 고심이 역력하다. 돈키호테와 귀족들의 품위 있고 잘난 체하는 지적인 대목에서는 괜스레 현학적인 표현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반면 산초와 서민들의 일상적 대화에서는 평민과 하인들의 어투답게 시골풍의 어수룩함마저 가미하여 속되지만 가식 없이 진솔한 어조를 그려낸다. 그것이 이 작품 특유의 이야기로서의 성격과 묘하게 일치하여 작품을 막힘없이 술술 흘러가게 하면서 독자들이 작품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준다.

 

물론 다소간 논란의 여지도 존재한다. 독자들 이해 수준을 고려하여 당대 관직과 계급명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양반이나 선비처럼 우리네 전통 용어로 대치시킨 점에 대해 불만을 가질 수 있다. 스페인 특유의 속담 표현처럼 제 맛을 도저히 살릴 수 없는 경우 유사한 우리말 속담으로 대치한 것도 엄격한 번역 비평가라면 마뜩찮을 수 있다. 세상에 완벽한 번역은 없다. 이 점을 인정한다면 그런대로 봐줄 수 있지 않을까.

 

2부에서 돈키호테는 다양한 모험을 감행하는데, 특징적인 대목은 돈키호테가 공작의 성에서 머물기 전의 모험들을 별도로 한다면 공작의 성에서 머물면서 생긴 에피소드들, 산초가 총독으로 부임하여 겪게 되는 애환들이 주된 흐름을 이룬다. 여기에 돈키호테 아류작에 대한 작가의 불편한 심기와 비판이 끊임없이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흥미롭지 않은가? 돈키호테와 산초는 자신들의 모험 행각이 담긴 책이 대대적인 인기를 끌어 모든 이들이 자신들과 행적에 대해 알고 있음에 놀란다. 그들의 모험은 훗날의 역사가 아닌 당대의 실시간적 기록으로 남겨진 것이다. 더욱이 가짜 돈키호테 2권이 나와서 자신들의 인물과 행동이 왜곡되었음에 분노하고 허위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라나다로 향하던 여정을 바르셀로나로 변경하기까지 한다. 작가와 인물, 독자는 각자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상호간에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는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 그런 면에서 포스트모던 적이라고 하겠다.

 

판타지 장르적 속성은 어떠한지? 특히 돈키호테의 몬떼시노스 동굴 체험은 단순히 돈키호테의 상상력이 창조해 낸 공상에 불과하다고 속단하기 어렵다. 신기한 동굴로 인근에 명성이 자자하다는 것은 자연경관 이외의 불가사의한 요소가 동굴에 존재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따라서 때마침 돈키호테가 그 초자연적 현상을 목도하고 자신의 개인적 광기와 어울려 남다른 체험을 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다. 그런 면에서 판타지적 속성이 충분하다.

 

둘시네아가 마법으로 인해 농사꾼 여자로 변했다고 산초는 돈키호테를 속인다. 공작부인은 오히려 실제로 둘시네아는 마법에 걸렸고 산초가 속임을 당한 것이라고 속인다. 공작부인은 산초의 순박성과 순진성을 역이용한 것이다. 여기서 장자의 나비와도 유사한 근본적 의문이 제기된다. 공작부인의 논리는 진실과 허위 사이의 명확한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시네아는 귀부인일 수도 있고 농사꾼 여자일 수도 있다. 마법에 걸린 인물은 둘시네아가 아니라 사실은 돈키호테 또는 산초일 수도 있다. 공작부인은 산초가 돈키호테에게 구사했듯이 거짓말로 속인 것이지만 모르는 사이에 오히려 진실을 말한 경우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다. 그렇다면 속인 사람은 누구고 속임을 당한 사람을 누구란 말인가? 우리가 명확히 알고 있다는 진실의 기반이 확고하지 않고 이성이 오락가락할 수 있다면 공상이 실체가 되고 초자연이 일상으로 넘어올 수 있다면 그것이 판타지가 아니고 무엇일까?

 

싼초께서도 팔짝팔짝 뛰던 그 여자가 엘 또보소의 둘시네아였고 둘시네아 그 사람이며 무엇보다 확실하게 마법에 걸려 있다는 걸 믿으세요. 그러면 생각지도 않은 순간에 우리는 그녀의 원래 모습을 보게 될 것이고, 그리되면 그제야 싼초도 자기가 속아 살았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될 거예요.” (P.408)

 

<미쳐야 산다>라는 경영 관련 처세술 책이 인기를 끈 적이 있다. 책소개를 보면 신념을 가지고 열정으로 매진하면 높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내용이란다. <미쳐야 미친다>라는 인문학 책도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알려지지 않았던 매니아적 열정과 광기의 일화를 알려주고 이다. 예나 지금이나 미쳤다는 의미의 광기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의학적으로 이성을 잃었다는 병리학적 증상과 아울러 좋아하는 것에 전적으로 집중하여 이외에는 일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마음의 상태.

 

돈키호테는 단순히 미친 늙은이가 아니다. 그는 호기심이 많고 항상 새로운 사실들을 알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는(P.301) 인물이며 기사 모험담에 푹 빠진 매니아다. 그의 의상과 행동은 이른바 코스프레가 아니겠는가. 이미 1권에서도 수차 나왔지만 2권에서도 돈키호테의 역사와 고전, 문학에 대한 방대한 지식(작가의 자기과시?)과 방랑기사와 관련되지 않은 사항에 대한 사려 깊은 이성적 사고는 탄복할 정도다. 16장에서 돈키호테가 푸른 외투의 신사에게 들려주는 교육론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요즘 부모는 자녀가 하고 싶은 공부를 허용하기 보다는 자신들이 아이에게 바라는 공부를 요구하고 있는 형편이다. 학교와 학원을 뺑뺑이 돌려야 세상에 뒤처지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로 자기 위안을 삼는다. 하기야 교육시스템 자체가 이를 조장하고 있는 판국이다.

 

그나저나 돈키호테가 산초를 데리고 방랑하는 목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광기에 휩싸여 기사 복장을 하고 중세의 방랑기사처럼 모험을 겪고자 하는 것이라면 잠시 동안이면 충분하다. 하물며 돈키호테는 수차에 걸친 고난과 고초를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굳세게 여정을 이어나간다. 단순한 광기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오직 내가 애써서 세상에 이해시키고자 하는 건 사람들이 방랑기사가 성행했을 때의 그 행복한 시절을 부활시키지 못하는 그 잘못을 지적하려고 하는 것이오. 그러나 타락한 우리 시대는 그런 행복을 누릴 만한 자격이 없지요.” (P.44)

 

돈키호테도 알고 있다. 자신의 행위가 남들 눈에 기이하게 비칠 것이라는 점을. 그럼에도 그는 중단할 수 없다. 스페인의 황금세기라고 칭해질 정도로 왕정과 귀족사회가 번성을 누리던 시절, 그러나 도덕적 타락은 바닥없이 추락하고 있다. 중세의 방랑기사는 정의와 자비의 실현을 위해 스스로의 고초를 자초하는 상징적 인물로 전형화 된다. 돈키호테는 선인들의 험난한 길을 따라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난세에는 세상을 질타하는 예언자나 도인들이 불현 듯 출현한 역사적 기록들이 남아 있다.

 

2권에서 이채로운 점은 돈키호테와 산초를 자신의 성에 머무르게 하는 공작 부부이다. 돈키호테 모험담의 열렬한 독자이기도 한 그들의 돈키호테와 산초에 대한 태도는 별로 기분 좋지 않다. 그들은 마치 장난감이나 애완동물을 다루고 좋아하듯이 돈키호테 일행을 대우한다. 기상천외한 즐거움을 얻기 위해 지속적으로 돈키호테를 속이고 광기를 부추기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인다. 더구나 산초에게 저지른 가혹한 장난에 대해서도 후회의 상념 없이 적잖은 즐거움을 맛보았을 뿐이다. 이것은 그들이 막강한 권력과 재력을 가졌기에 가능한 것으로서 이른바 가진 자들의 무분별하고 비도덕적인 처사가 당대에 얼마나 널리 퍼져있으며 무감각하게 받아들여졌는지를 역설적으로 폭로한다.

 

이 점은 산초가 총독이 되어 섬을 통치하는 에피소드와 대조되어 두드러진다. 순박하고 어수룩한 산초의 껍데기는 가라! 왕정이나 귀족정이 아닌 평민들의 정치체제도 충분히 올바른 자생력을 가지고 있음을 우리의 위대한 산초’(45장의 표제에 나오듯이)는 보여준다. 산초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통치관을 들어보자.

 

좋은 통치자는 다리를 부러뜨려 집에 둬야지요. 일이 있는 사람들이 안타깝게 통치자를 찾는데 자기는 산에서 한가하게 놀고나 있으면 꼴좋겠수다! 그렇게 되면 정부 꼴이 망해가는 거지요! 나리, 제가 진심으로 말씀드리는데, 사냥과 심심풀이 오락은 통치자들에게 맞는다기보다는 노라리들에게 맞는 거지요.” (P.417)

 

우리 다 함께 삽시다, 그리고 평화롭게 함께 어울려 먹고삽시다요......난 법을 침범하지도, 뇌물을 받지도 않고 이 섬을 통치할 것이며, 모든 사람이 눈을 똑바로 뜨고 자기 일만 잘하게 하도록 하리다.” (P.575)

 

돈키호테가 산초에게 들려주는 충고의 고귀함도 빛난다.

 

싼초 이 사람아, 자네 혈통이 그다지 보잘것없음을 떳떳이 내보이고, 자네가 농부 출신이라고 말하는 걸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게. 자네가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아무도 자네를 함부로 모독하지 않을 걸세. 죄 많은 고관대작보다 덕 많은 보통 사람이 되는 걸 더욱 자랑으로 여기게......자네가 늘 덕을 무기로 삼고, 덕있는 행동을 하는 걸 좋아하면 왕이나 영주의 자손들이 가진 지체를 부러워할 필요도 없을 걸세. 왜냐하면 피는 이어받지만 덕은 습득해야 하고 핏줄이 가치가 없을 때도 덕은 스스로 혼자서도 빛나니까.” (P.497)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도 안에서 자네가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다해 그를 자비롭고 관대한 마음으로 대해주게.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주신 속성이나 덕은 모두 다 같지만 우리 생각에는 정의로운 마음보다 자비로운 마음이 훨씬 더 낫고 빛이 나는 것 같아.” (P.499)

 

산초가 짧은 재임기간 동안에 훌륭한 통치를 위해 제정한 법령을 살펴보면 당대인들이 통치자에게 바라는 올바르지만 시행되지 않았던 조치들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공작 부부와 수하들은 산초를 장난거리로 삼으려고 온갖 장치와 전쟁 소동마저 일으켰지만, 독자들의 눈에는 산초의 인간적 모습에 연민과 공감을 느낄 뿐이다. 후세에 영원토록 웃음거리가 된 것은 기실 그들 자신이었다. 순진하고 순박한 산초가 이러한 비인간적 행태가 횡행하는 섬을 떠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거울의 기사이자 하얀 달의 기사인 학사 싼손 까라스꼬에게 패배하여 돈키호테는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로서는 고향사람에 대한 연민과 동정으로 제정신을 찾게 해주어야겠다는 신념, 그리고 고향의 명성을 떨어뜨리는 데 대한 모종의 조치에 대한 의무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반면 돈키호테 자신과 그의 모험담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응당 같지 않다.

 

어이구, 나리,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미치광이 한분의 정신을 제대로 되돌아오게 하기 위해 세상 사람에게 끼친 피해를 하느님께서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나리, 돈 끼호떼가 그의 허튼짓으로 우리 모두를 재미있게 한 그 즐거움에 비하면 그가 정신이 말짱해져서 얻는 이득은 그에 못 미칠 거라는 것을 모르세요?” (P.769)

 

세인들에게 돈키호테의 존재는 지칠 줄 모르는 소소한 즐거움을 안겨주는 재미거리였다. 그들은 돈키호테라는 인간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저 개그콘서트를 쳐다보며 낄낄거리듯 돈키호테도 단지 웃음을 제공하는 장치로 인식한다.

 

돈키호테의 삶의 원동력은 방랑기사 생활에 있다. 그에게 더 이상 방랑하지 말라는 것은 생명의 불꽃을 줄이라는 말과 동의어다. 학사 까라스꼬 덕택에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제정신을 차렸지만 꿈과 열정을 상실한 늙은 돈키호테에게 남은 것은 오직 죽음뿐이다.

 

미쳐서 살고 정신 들어 죽다.” (P.857)

 

임종의 순간에 그는 행복하였을지 궁금하다. 거인을 향해 거침없이 돌진하는 기사의 환상이 망막 저 멀리 투영되지는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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