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무렵 무라사키
히구치 이치요 지음, 박영선 옮김 / 북스토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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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수록 작품>

1. 매미

2. 십삼야

3. 키재기

4. 제 아이는 말이죠

5. 해질 무렵 무라사키

 

옮긴이와 출판사의 노력과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 거의 십년 전에 국내에 그다지 인지도가 높지 않은 이치요의 소설집 두 권과 일기 한 권을 동시에 출간해 내놓다니. 이야말로 시대를 앞선 혜안이 아니겠는가. 수록 작품 5편 중에 <십삼야><키재기>를 제외한 세 편을 일독하기 위해 이 책을 꺼내들었다. 곁들여 상기 두 작품을 재독하는 즐거움도 나쁘지 않다.

 

<십삼야><키재기>에 대한 감상은 을유문화사 판에 서술한 소감이 여전히 유효하며 여기에는 미비한 점을 첨언한다. <십삼야>에서 작가는 애정 없는 결혼의 비극적 실체를 여실히 보여준다. 요는 이러한 선택이 당사자 개인의 자율적 의지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전통적 가족관계의 역학과 자식과 가족에 대한 내적 윤리의식이 여기로 이끌고 벗어나지 못하도록 꽉 짜인 틀을 구축하고 있다. 남편이 아니고 원수로 생각되는 하라다의 사모님이라는 허울을 벗어던지길 원하는 세키는 견고한 그물에 포위되어 현실에 주저앉는다.

 

아이를 불쌍하게 만들어 버린 것 같아 소리 내어 울고 싶은 심정이다.” (P.47)

 

아아, 나 혼자 내 멋대로 남의 출세 길을 막을 순 없다. 돌아가야 하나, 돌아가야만 하나. 그렇게 비인간적인 사람 곁으로 돌아가야 하나. 그 냉랭하고, 비정한 남편이 있는 집으로,,,,,,” (P.44)

 

하지만 부모를 위해, 또 동생을 위해, 타로도 있지 않니, 여태까지 참고 살았는데 앞으로도 못 해나갈 것이 뭐가 있니?” (P.61)

 

앞으로 그녀는 남은 생을 허위적허위적 헤쳐 나가게 될 것이다. 하라다의 처로 남은 세키는 살아 있으되 살아 있지 않은 존재가 된다. 그것이 모두의 소망임을 알고 있으므로. 그것이 일본 근대에도 여전한 여성 억압적 가치관과 질서 체계라는 점을 작가는 모두에게 명백히 알리고 있다.

 

그저 제가 죽은 셈치고 살면 풍파도 일어나지 않고 아이도 부모 손에 자랄 수 있지요.” (P.61)

 

<키재기>의 종반부를 특징짓는 사건은 미도리의 일변한 태도에 있다. 이전까지의 구김 없고 자유분방하던 미도리는 어느 날 시마다 머리를 하고 그토록 친하던 쇼타에게도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열네 살 아이는 얌전하고 부끄러움을 잘 타는 소녀가 되었다. 도대체 미도리에게 무슨 일이 생겼던 걸까?

 

어제까지의 미도리로서는 전혀 알지도 못할 일이 생긴 것이었다. 그 부끄러움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P.155)

 

요 며칠 동안 일어난 일 때문에 자신이 자신 같지 않았다. 그저 뭐랄 것도 없이 부끄럽기만 했다.” (P.160)

 

을유문화사 판의 해설에 따르면 두 가지 견해가 두드러진다. 초경을 겪은 데 따른 심신의 충격이라는 설과, 미도리 언니의 직업과 가족들이 사는 곳이 유곽이니만치 어린 소녀가 소위 머리를 얹었다는 설이다. 개인적으로 미도리의 나이로 보아 후자의 추정은 과도하게 인식된다. 오히려 요즘에 비해 예전에는 초경이 다소 늦은 점을 감안한다면 전자가 타당성이 높다. 소년의 첫 몽정, 소녀의 초경은 모두 당혹스럽기 그지없다는 사실을 우리들 자신의 기억에서 상기해 보자.

 

확실한 것은 이 사건으로 인해 미도리는 성적 자각을 하게 되어 더 이상 또래의 소년들과 어울리기를 원치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미도리의 앞날의 방향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으나 이제부터는 여성으로서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신뇨도 스님 수행을 하기 위하여 머리를 깎는다. 요시하라 아이들에게 인생의 한 시절이 마무리되고 있다.

 

나머지 세 편은 비교적 소품들이다.

 

<제 아이는 말이죠>는 다중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십삼야>와 같이 행복하지 않은 결혼 생활이 여성 화자의 독백에서 주된 내용을 차지하고 있다. 다만 여기서는 부부 간 불화의 원인이 명확하지 않다. 오히려 화자의 일방적 의심과 딱딱한 언행이 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생각될 정도다.

 

우울하고 지겹다. 어째서 이런 남편과 인연이 닿아 길고 긴 인생을 빛도 들어오지 않는 어둠에서 살아가야 하는 걸까. 지루한 일상. 어처구니없는 인생.” (P.167)

 

파국으로 향하던 이들의 관계에 전환점이 된 것은 아이의 탄생이다. 아이의 방긋거리는 얼굴을 보고 미소 짓고 대화를 시작하는 부부. 이들 가족의 앞날에는 구름이 걷히고 서광이 비칠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해피엔딩? 왠지 께름칙하다. 일방적 희망찬 전망을 비추기에는 그들 사이의 상흔이 너무 깊다. 갈등의 원인이 진정 해소되었는가? 메울 수 없는 갈등과 다툼, 그리고 화해와 미소, 그것은 정도의 차는 있지만 모든 가정 내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미완성인 <해질 무렵 무라사키>의 여성 화자는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녀의 가정은 외형적으로 평온하고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한 가지 그녀는 남편에 대해 전혀 애정이 없다. 결혼은 했지만 그녀는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몰래 만나고 있다.

 

나는 악녀야!” (P.185)

 

악인이라 뭐라 해도 나는 상관없어.” (P.189)

 

남편을 속이고 외간남자를 만나는 자신의 행동이 옳지 않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녀는 스스로 당당하다. 이렇게 스스로를 악녀라고 선언한다. 이 작품은 여기에서 멈추는데 작가가 요절하지 않고 마무리를 하였다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갔을지 무척 흥미롭다.

 

여성의 전통적인 이상적 모럴은 정조를 지키는 데 있다. 처녀성을 보전하고 있다가 남편에게 순결을 바친 후 이후로는 절대 외간남자에 눈 돌리지 않는 것. 이것은 엄격한 유가사회의 동양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일부일처제의 기독교 사회도 이를 찬미하고 있다. 극단적으로는 순결과 정절을 위해 목숨마저도 아끼지 않는 정신과 행동은 사회적 예찬과 권장 사항이기도 하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악녀가 되어 온갖 비난과 심지어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한다.

 

<매미>는 정신이상이 된 유키코라는 젊은 여성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그녀가 정신이상이 된 것은 우에하라의 죽음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그는 유키코를 범하려다 실패하고 죄책감으로 자살하였다. 그녀는 이러한 사태에 충격을 받고 발작을 일으킨다.

 

일이 이렇게까지 벌어진 건 유키코가 아무 일도 아닌 걸 가지고 고민을 너무하다가 이렇게 된 것이지만,......이렇게까지 정조라는 걸 지켜온 것을 가엾게 여겨 주기 바라네.” (P.27)

 

그런데 유키코는 발작 중에 끊임없이 우에하라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이름을 끄적거린다. 잘못한 건 그녀 자신이었다는 외침! 그녀와 우에하라는 무슨 관계인가? 양자가 사랑하는 사이였다면, 유키코의 부모가 이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관계였다면, 이는 단순한 정조유린의 실패 사건이 아닐 수 있다.

 

만약에 (반쵸) 도련님이 없었더라면 아가씨가 이렇게까지 가슴 아프게 되지 않았을 거야......” (P.37)

 

하녀들의 대화에서 얼핏 진상이 드러난다. 유키코는 오빠인 양자로 들어온 반쵸와 앞날이 정해진 상태다. 여기에 우에하라가 등장하고 그를 사랑하게 된다. 사랑과 의무, 내면의 감정과 사회적 질서.

 

우에하라의 의외의 불행한 죽음에 그녀는 매미가 될 수밖에 없었다. 허물을 벗어 빈 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유키코. 그녀의 영혼은 이미 우에하라를 따라 스러졌다. 육신의 외양은 뜰에 굴러다니는 매미 껍데기”(P.35)가 되어 곧 바람에 흩날리게 되리라.

 

이상에 보듯이 비교적 어린 나이임에도 그녀의 통찰력은 심오하다고 일컬어질 수준에 도달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녀가 관찰하고 드러내고 제기한 사안은 당대의 일본 사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상황에서는 언제든 마주치기 마련인 보편적 질문을 근원적 차원에서 되묻고 있다. 삶과 죽음의 본질에 대해서, 그리고 사랑과 결혼의 의의에 대해서. 이것이 백여 년 전에 이십대 초반에 삶과 이별한 한 여성 작가의 단편들이 우리에게 생생하게 다가오는 연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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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눈으로 본 현대 예술 - 삶을 어루만지는 예술 그리고 철학 이야기
최도빈 지음 / 아모르문디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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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연이 있는 책이다. 에라스무스의 격언집에 대해 남긴 촌평을 보고 출판사 담당자가 인문학에 관심을 기울여줘 고맙다고 신간인 이 책을 보내주었다. 그때부터 이 책은 내게 계륵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선의와 감사의 표시로 받은 책이니 어떻게든 읽긴 읽어야 하겠는데...가뜩이나 골치아픈 현대 예술을 게다가 철학의 눈으로 본다고 하니...그리고 벌써 일년이 흘렀다.

 

저자는 미국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있는데, 소개에 따르면 미술과 건축을 좋아한다고 한다. 철학자가 무슨 예술 관련 서적을? 하고 의아하게 여길 수 있겠지만, 순수 철학이 아닌 미학을 전공하였으므로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설사 순수 철학 전공이라고 하더라도 예술을 논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 조항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 판형보다 가로가 1cm 정도 더 긴 개성적 판형이다. 예술 서적이란 특성상 지질도 고급용지를 사용하였고 미술관과 작품들의 컬러 도판이 듬뿍 들어가 있다. 요컨대 만듦새는 꽤 고급스럽고 그럴 듯하다.

 

전체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현대 미술(시각 예술)의 현재를 다루고 있으며, 2부에서는 미술(시각 예술)의 영역을 확장하는 현상을 소개한다. 각 장의 내용은 특정 미술관(주로 미국의 미술관 위주)에서 이루어지는 전시를 보며 작품전이 내세우는 작가 또는 주제를 통해 현대 미술의 실제와 핵심으로 직접 파고드는 방식을 취한다. 한편 3부에서는 미술(시각 예술)의 범위를 뛰어넘어 공연 예술의 현장을 살펴보고, 예술의 발전을 위한 고언과 자기반성으로 끝을 맺는다.

 

과연 철학도답게 단지 예술적 관점에서만 공간과 개인과 사물을 파악하지 않는다. 작품의 행간과, 예술가의 행위 배후를 고찰하며, 미술관의 설립 의의와 지향점을 철학적 무게감을 실어(주로 동서양의 고전적 철학자들의 사상 인용을 통해) 살펴보고 있다. 1부보다는 2부에서 책 표제에 부합하는 철학적 안내와 인용이 두드러진다. 각 장마다 본문 뒤에 ‘Reflections’라고 하여 보충적 설명 또는 저자의 소회를 수록한 점도 특색이다.

 

 

뉴욕 현대 미술관은 고전이 되지 않는 현재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다.

 

예술이 기념비가 되는 순간 그 예술적 힘은 죽고 만다. 예술의 힘은 과거를 기념하는 데서 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은 현재를 고발하고, 미래를 향한 새로운 길을 제시할 수 있으며, 또한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래서 예술은 늘 파괴와 전복을 꿈꾼다.” (P.40)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예술은 정체되는 순간 화석이 되고 만다. 그 중에는 기념비가 되어 유명 미술관에 전시되는 영예를 누릴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의 존재 가치와 의의를 상실하게 되는 모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예술가는 결국 배불러서는 결국 안 되고 고난과 궁핍에 시달려야 한다는 말과 다를 게 없다. 예술을 위해서는 불가피하겠지만, 인간으로서의 예술가에게는 불행한 일이다.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에서는 유튜브 전시회를 보면서 진정한 보수주의를 논한다. 묵수적 수구를 보수와 혼동하는 우리네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보수는 무변화가 아니라 점진적인 변화를 뜻한다. 고인 물이 썩는 것은 자연현상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진정한 보수주의를 실현하기는 어렵다. 보수주의의 핵심인 내적 기준은 끊임없는 자기비판으로 벼려져야 하는데, 권력을 쥐게 되면 스스로에게 너무도 관대해지기 때문이다.” (P.52)

 

일반 감상자들에게 여전히 골치아픈 구상과 추상의 비교를 통한 미술의 본질에 대한 물음을 저자는 런던의 테이트 모던에서 제기한다. 버려진 발전소 건물을 그대로 활용하여 현대적 미술관으로 탈바꿈시킨 영국인들의 해법은 전통과 혁신의 공존과 균형을 찾는데 성공한 사례이다. 여기에는 오래된 건물은 무가치하다고 판단하여 무조건 철거하고 최신공법의 건물 신축만 일삼는 현실에 대한 일침이 숨겨 있기도 하다.

 

리히터는 끊임없이 회화의 본질에 대해 물었다. 그 결과 대척점에 있는 듯한 현대 회화의 두 갈래-구상과 비구상-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자신의 작품 세계 속에서 보여 주었다. 대상의 모방이라는 회화의 전통과 자유분방함에서, 비결정성에서, 무목적성에서, 궁극적으로 그림 그리는 행위 자체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현대적 혁신을 동시에 담아내는 그의 긍정적 양면성50년 동안 보여 준 작품 활동 안에 오롯이 담겨 있다.” (P.64)

 

테이트 모던과 리히터가 보여준 전통과 혁신의 긍정적 양면성이 부럽다면, 그 성과는 보다 나은 것, 보다 본질적인 것에 대한 끈질긴 질문과 사유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P.66)

 

사람들이 테마파크와 동물원을 찾는 이유는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다. 거기서는 일단 지루할 여가가 없다. 인파로 북적거리고 다이내믹한 체험 또는 언제 봐도 마냥 신기한 동물의 세계 등. 동물원 옆 미술관은 어떠한가? 진실로 미술에 관심과 흥미가 있어서 자발적으로 오는 수가 얼마나 될지 의심스럽다.

 

도쿄 롯폰기의 모리 미술관 편에서 저자가 찾아낸 미술관의 현대적 기능은 우리들 상식에서 벗어난 효용의 변용 가능성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더 이상 전시물을 보려고 미술관을 찾지 않는다고 한다.

 

관객의 방문 목적이 더 이상 어떤 가치 있는 대상을 보는 것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관람행위의 관심은 오히려 그 대상이 아닌 행위 자체에 쏠려 있다. 여가 시간은 교양 있게보냈다는 자족감을 들게 하는 데는, 전시물의 유의미성보다는 사람들이 몰리는 고품격 장소의 방문 경험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P.96)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농담을 주제로 한 전시회는 저자에게 표현의 자유와 풍자라는 상념을 일깨운다. 저자는 아직은 연령 면에서나 의식 면에서 기성세대에 분류되고 싶지 않은 의사가 역력하다. 진정한 예술 애호인이라면 응당 뼛속부터 반골기질이 당연하리라. 그는 이편에서 그들이 줄기차게 폭로하고자 했던 권력자의 국가 사유화를 짚으면서 표현의 자유가 지닌 사상적 무게에 대한 우리의 몰이해를 돌아보고 싶었다.”(P.140)고 밝힌다. 더불어 표현의 자유에 있어 과도한 지 여부를 누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도 반문한다.

 

우리는 과거부터 배운 사실과 겪었던 경험 등을 토대로 하여 판단에 있어 불변의 준거점을 나름대로 설정하고 이에 근거하여 세상을 판단하고 평가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보수적이며, 변화에 저항적인 타성적 속성을 지닌다.

 

관성은 인간의 개별적 믿음이나 사회적 통념에도 적용된다.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끊임없이 변화함에도, 자신의 믿음은 예전 상태로 유지하며 바꾸지 않으려 한다.” (P.230)

 

예술은 본질적으로 변화와 혁신을 지향한다. 당대인들의 냉대로 실의와 절망 속에 숨을 거둔 무수한 천재 예술인들의 이야기를 모두가 알고 있다.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고 과연 이것도 예술이라고 불릴 수 있을까 의아해할 정도로 예술의 영역을 나날이 새롭게 커지고 있음을 코닝 유리 박물관에서 우리는 깨닫게 된다.

 

3부에서 저자의 관심 영역은 시각을 벗어나 청각과 함께 한다. 먼저 버펄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이야기가 나온다. 마이너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지휘계에서 마이너인 여성 지휘자, 그리고 나치에 의해 역사에 파묻혀 마이너 작곡가로 잊혀진 티베르크. 그리고 마이너 음악으로 전락한 클래식 음악의 위상...하지만 마이너가 곧 하급 또는 저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미국 독립기념일의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연주회에서 저자는 애국의 본질을 반문한다. 국가에 대한 사랑과 헌신의 강조는 개인을 말살하고 전체주의에로 경도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합리적 비판을 하는 사람들은 비애국자이자 반역자, 나아가 매국노로까지 지탄받는다. 민주주의 국가에도 함정은 상존한다. 개인에게 내재한 심적 유약성과 미디어의 통제와 조작 가능성이 항상 유령처럼 따라붙어 우리는 항상 깨어있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국가의 간섭과 개인의 삶 사이의 바람직한 균형, 즉 개인과 집단 간의 예의’(P.302~303)가 중요성을 갖는다.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이 동등하다는 것에서 그 이론적 기반을 찾는다. 그렇다면 그 운영 원리는 다수결이 될 수 없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동등한사람들의 생각을 존중하는 것, 그것을 바탕으로 서로 끊임없이 소통하며 예의를 지키는 가운데 합의를 낳는 과정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P.305)

 

라스베이거스 태양의 서커스 쇼는 매우 예술적인 공연이라고 평가가 자자하단다. 저자는 예술적인 서커스 쇼가 진짜 예술이 되지 못하는 연유를 쇼를 보면서 깨닫는다.

 

진정한 예술이라 어떠한 물음을 품지 않고는 존립할 수 없다......현실을 망각하고 환상을 반복적으로 공급하는 일는 예술적이라고 칭할 수는 있어도 그 자체로 예술이 되지는 못한다.” (P.326)

 

문제는 현대인들은 물음을 원치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괜히 골머리를 썩이고 싶지 않다. 유한한 인생에 가뜩이나 복잡한 현대사회를 헤쳐 나가느라 괴롭고 힘든 상태이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하하 호호 낄낄거리면 번민을 잠시나마 잊고 싶을 따름이다.

 

자본주의와 배금주의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는 단기간에 성과 내지 수익을 기대할 수 없다면 세인들의 관심과 주목을 끌기 어렵다. 이른바 인문학의 위기라는 반복되는 비명과 상업적 대중문화의 우월적 대두도 여기에 기인한다. 대학교에서 인문학 계열은 폐과와 정원 축소가 지속되는 반면 경영학 계열은 지원자와 후원금으로 넘쳐난다. 근시안적 안목을 탈피하고 긴 호흡으로 먼 장래까지를 아우를 수 있는 마인드를 저자는 댄스 고담과 플라톤의 철인왕을 연결하여 아쉬움을 토로한다.

 

보다 좋은 삶을 향해 나아가기 위하여 저자는 현상의 유지와 생존이라는 목표를 뛰어넘길 요구한다. 전체와 개인의 조화와 균형은 묵자와 양주 이래로 지난하고도 뿌리 깊은 과제이지만 여기에서 정면으로 도전하여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진보를 기대할 수 있다.

 

한 사회가 생존을 넘어 보다 좋은상태로 발전하길 원한다면, ‘실용을 넘어 인간의 창조성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침로를 잡아야 할 것이다.” (P.359)

 

 

불행히도 여기에서 소개된 수십 개의 미술관 중 단 하나도 가본 적이 없다. 따라서 무엇보다 내게는 미국의 미술관 투어 소개기로 인식되었다. 어디선가 들어보았음직한 아니면 난생 처음 듣는 이름의 미술관들을 지면을 통해서나마 만나는 것도 제법 흥미롭다. 뉴욕에 이렇게 쟁쟁한 미술관들이 여럿 있다는 사실도 비로소 알게 되었고, 공업도시 피츠버그가 앤디 워홀의 안식처라는 사실도 금시초문이었다.

 

미술에 관한 책은 몇 권 읽었지만 여전히 까막눈에 문외한이다. 인상파까지는 그런대로 고개를 끄덕일 준비가 되어 있지만, 추상화부터 시작해서 앤디 워홀 류의 예술과 상업의 경계가 불분명한 영역에 대해서는 여전히 심적 거부감이 드는 게 사실이다. 개인적 호오(好惡)와 상관없이 예술의 지평과 차원이 나날이 확대될 것은 부인하지 않지만.

 

무엇보다도 바로 미국 시각예술계의 현재와 지향을 일람할 수 있는 즐거움을 누렸으며, 저자의 시의적절한 묵직한 철학적 사유를 들여다 볼 수 있어 지적 충족감마저 채울 수 있었다. 예술과 철학은 그러고 보면 닮은 점이 제법 있다. 무엇보다도 현상에 안주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점이다. 예술은 변화와 변혁을 도모하며, 철학은 현상이 올바른지 반문한다. 양자의 시각으로 볼 때 현재의 우리 사회는 건강하고 발전을 기약할 수 있는 상태인지 궁금하다. 저자의 비판과 탄식을 볼 때 아닌 듯도 하지만, 이런 푸념이 존재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일말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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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2
제인 오스틴 지음, 최정선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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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엠마 우드하우스에게,


엠마, 이렇게 불러도 큰 실례는 아니겠지요? 미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통해 당신과 다소간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혹시라도 엘튼 부인처럼 경우 없다고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미스 제인 오스틴의 작품들 중에서 <오만과 편견>과 <이성과 감성>을 대표작으로 꼽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중적 인지도와 선호도 면에서 비교 해봐도 실제로 그렇습니다. 엠마 당신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 소설을 높이 평가하는 평론가들도 제법 있으니 별로 서운해 하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대중적 인기와 작품성이 항상 동행하지는 않으며, 주인공들에 대한 평가도 더더욱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소설 <엠마>가 분량이 많다는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은 게 아닐까요. 현대 독자들은 두터운 책을 힘들어하는 추세랍니다. 장편소설 중에서도 소위 경장편이 최근에 두드러지는 경향도 이를 말해주죠.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 자신은 <엠마> 보다는 <오만과 편견>을 더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사건이 속출하며 엠마 당신이 쉴 새 없이 좌충우돌하는 약간은 우연과 인위성에 의존하는 작품 전개 구조가 재미와는 별도로 선뜻 다가오지 않습니다.


엠마, 당신은 엘리자베스와 엘리너와 비교하면 활발하고 역동적이지만 약점이 두드러지는 인물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좋은 가문 배경에 자부심을 갖고 있지요. 자신은 이를 굳건히 지켜야 할 원칙으로서 의무와 책임을 느끼고 있는 반면, 타인 특히 해리엇에 대해서는 이것이 급격히 흐트러짐을 보게 됩니다. 해리엇에 대한 맹목적 편애로 당신은 해리엇의 상황과 처지에 대한 합리적 판단을 하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가 사랑하는 해리엇에게 두 번이나 사랑의 헛된 기대를 품게 하고 슬픔을 겪게 하는 일의 반복이었습니다.


엘튼 씨와 해리엇을 엮어주려는 눈물겨운 노력에서 엘튼 씨가 보여준 적극적 관심과 호의의 대상이 과연 누구였는지 독자들은 이미 눈치 챘답니다. 미스 제인 페어펙스와 딕슨 씨의 관계를 의심하는 듯 한 발언을 할 때 프랭크의 응대에서 뭔가 미묘한 변화를 당신을 제외한 독자들은 짐작할 수 있었지요. 당신처럼 분별력 있고 똑똑한 분이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오로지 이성 보다는 감정과 직관에 의존한 당신의 능력을 과신한 탓이 아니었을까요? 


엠마, 당신은 스스로에 대하여 잘 모릅니다. 당신은 좋은 가문에, 뛰어난 미모에 탁월한 지적 감수성과 배려심을 가진 젊은 여인입니다. 신분 고하와 연련 다소를 막론하고 모든 남성들이라면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미혼 남성의 경우라면 결혼 상대자로서 현실적으로든 또는 공상에서나마 한 번씩은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스스로 결혼에 대한 의향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들의 바램마저 억제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망각했던 거지요.


당신이 호의를 가지기 힘들었던 두 인물, 엘튼 부인과 미스 제인 페어펙스에 대해서 전자라면 나 역시 마찬가지 의견입니다. 철저히 자기중심적이고 속물적이며 과시적인 데다가 타인에 대한 우러나오는 배려심과 동정심이 결핍된 졸렬한 품성의 타입 말이죠. 미스 제인 페어펙스에 대한 그녀의 관심과 친절도 그다지 호의로 인식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지위의 상대적 우월함에 기초한 불우이웃돕기 차원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반면 불쌍한 미스 제인 페어펙스에 대한 당신의 태도는 지나치게 옹졸하고 편향적이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당신이 뒤늦게라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 점에 대해서는 기쁘게 생각합니다만.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하지요. 당신이 제인의 입장과 처지에 놓여 있다면 마찬가지로 상대방에게 자신의 언행에 대해 보다 공감과 이해심을 요청하는 마음을 가졌을 겁니다. 빼어난 미모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집안 처지라 앞날에 대한 밝은 기약도 갖기 어려우며, 부유한 동년배의 여성으로부터 아무런 친교와 친절도 받지 못한 상황. 누구나 다 마찬가지랍니다. 내세울만한 게 없는 처지에서는 세상에 당당하기 어렵습니다. 소극적이고 주저하며 조용함에 머물러 있게 마련이지요. 그런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차갑다고 오해하고 해리엇이 백배는 낫다고 주저 없이 단언하는 당신은 섣부르고 가혹합니다. 나이틀리 씨의 평가를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어요.

“제인 페어펙스도 감정이 있어요. 나는 그녀가 감정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녀는 감정이 섬세하고, 참을성이 있으며, 자제력에 있어서나 인내심도 강한 편이지요. 다만 툭 터놓는 맛이 없고, 모든 것을 속으로만 감추는 사람이지요.” (P.3120


엠마, 한 가지 궁금한 사실은 당신이 남들의 인연 맺어주기에 왜 그리 관심이 많은지 이상할 정도랍니다. 미스 제인 오스틴의 다른 작품들의 경우 결혼은 이상이 아닌 당장 눈앞에 닥쳐오는 현실적인 사안입니다.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이 거의 인정되지 않는 시대적 분위기, 소위 결혼 적령기를 놓치고 나면 노처녀로 일생을 보내며 경제적 궁핍을 감수해야 하는 불안감. 젊은 아가씨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괜찮은(경제적, 사회적으로) 남성을 만나려고 노력합니다. 이건 매우 당연하므로 그네들의 관심사가 전적으로 여기에 쏠려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닙니다.


엠마 당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 자신은 몸이 불편하고 성미가 까다로운 늙은 아버지를 생각하여 당분간 결혼 생각이 없습니다. 스스로가 잘났음을 자각하고 있기에 자신에게 어울리는 적합한 상대를 쉽게 찾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도 작용했겠지요. 더군다나 가정교사였던 미스 테일러를 웨스턴 부인으로 만드는데 성공한 즐거운 기억도 추가됩니다. 이런 요인들과 타인의 삶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분수를 넘는 자신감이 결합되어 결국 해리엇의 결혼 주선이라는 외견상 터무니없는 세 바탕의 에피소드를 연속해서 만들어내었던 것입니다. 


뒤돌아 생각해보면 당신의 사고는 기실 그다지 합리적이지 못합니다. 이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오만과 편견에 빠져 있는 게 아닐까요. 해리엇의 출신에 대한 환상과 나이틀리 씨가 높게 평가하는 농부 마틴 씨에 대해 지닌 계급적 차별의식. 자신에 대한 엘튼 씨의 구애에 대해 어이없어 하면서도 그에 대해 해리엇의 결혼 가능성을 부추기는 이중적 잣대. 이성적으로는 미스 제인 페어펙스에게 다정히 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모순된 행동 등.


언뜻 보면 제가 당신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애정어린 관심의 표명이라고 받아들여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저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에게 도저히 적개심을 품을 수가 없군요. 나이틀리 씨 또한 동종의 감정을 가졌을 겁니다. 그러기에 그는 당신에게 화를 내거나 실망하기도 하면서도 당신에 대한 사랑을 키워나갈 수 있었을 테지요. 위에서 말한 결점들은 당신이 자아내는 모든 미덕에 비한다면 하찮습니다. 당신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고 편하게 만들어주는 싹싹하면서도 즐겁고 활기찬 태도를 보여줍니다. 당신의 말과 태도는 즉흥적이지 않고 대부분 신중한 분별력에 기반하여 이루어집니다. 당신의 외모와 신분은 엠마 당신 자신의 참다운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장신구입니다.


우리말 중에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엠마 당신은 나이틀리 씨의 당신에 대한 감정을 단순한 친구 사이의 우정으로만 여겼습니다. 당신 자신의 감정도 그렇게 해석하였지요. 진정으로 소중한 존재는 어느 날 하늘에서 우연히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언제나 마땅히 그러하듯이 우리 주변에서 자신을 과시하지 않고 오롯이 우리를 지켜보며 감싸주고 따뜻한 마음을 베풉니다. 대개는 뒤늦게야 이를 깨닫고 뼈저린 후회를 하지만요.


해리엇이 나이틀리 씨를 좋아한다고 고백했을 때 비로소 당신 자신의 숨겨진 감정이 드러났던 것입니다.

“화살처럼 날아드는 생각은 바로 나이틀리 씨는 자기말고는 누구하고도 결혼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P.438)


이쯤에서 소설에서 당신을 창조한 미스 제인 오스틴을 생각합니다. 그녀는 약혼자에게 파혼 당하고 노처녀로 오빠네 집에 얹혀살며 생활을 위해 글쓰기를 하게 되는 불행한 처지에 놓였습니다. 자신이 처한 형편에 대한 한탄을 엠마 당신의 입을 통해 잠시 엿볼 수 있습니다.


“독신 생활이 혐오감을 주는 것은 가난 때문이야! 쥐꼬리만한 수입을 가진 독신 여자는 우스꽝스럽고 흉하지.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기에 딱 알맞지만 일정한 수입을 가진 독신 여성은 어느 누구 못지않게 존경받을 수 있고 호감도 줄 수 있지.” (P.98)


미스 제인 오스틴은 불과 6편의 소설만을 세상에 남겨놓았지만 후대에 문학사상의 귀중한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에서 거창한 인류사적 사건과 이념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당시에 자신이 보고 듣고 겪었던 일상의 소소하고 자잘한 사건과 인물 등이 그녀의 주된 관심사입니다. 남녀 간의 사랑과 결혼이라는 아이템은 자신의 이루지 못한 애정사와 맞물려 그녀에게 무궁한 소재와 대리만족을 제공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독자들은 그녀의 작품을 통해 불변하는 인간사와 인간관계의 다채로움을 맛볼 수 있으며, 국경과 시기를 달리하는 사고와 관습을 관찰하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엠마, 부디 나이틀리 씨와 잘 사시고 부모를 닮은 멋지고 예쁜 아이들을 낳아서 많이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을 좋아하는 팬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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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재기 외 을유세계문학전집 33
히구치 이치요 지음, 임경화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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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 작품>

1. 섣달그믐

2. 키 재기

3. 탁류

4. 십삼야

5. 갈림길

6. 나 때문에

 

히구치 이치요는 일본 근대문학사 상에서 독보적인 여류작가이다. 불과 24세의 새파란 나이에 요절했다는 생의 이력은 그가 남긴 몇 편 안되는 단편들의 탁월한 작품성에 장식적 아우라를 더해 준다. 물론 그의 작품에 내재된 조숙한 천재의 반짝거림과 더불어 시간의 무게만이 부여할 수 있는 노숙함의 결여는 피할 길이 없다. 특히 일부 초기작은 이러한 순진함이 이야기를 문학이 아닌 흥미로운 미담(美談) 차원으로 퇴색시키기도 한다.

 

이런 약점을 넘어서는 그의 대단한 점은 20세기가 시작하기 이전에 작품 활동을 마감하였음에도 넘칠 정도로 충분한 근대성을 선취하고 있다는 데 있다. 때는 문호 개방과 메이지 유신 이후 20여년 만에 남성 작가들도 근대성의 원초적 의미를 갓 발견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사회적 약자인 여성의 처지에서, 평생 가난에 허덕이는 입장에서 그의 글에는 유한계급 사람들의 여흥으로서의 글쓰기와는 구별되는 지향점을 찾을 수 있다. 여성의 역할과 지위에 대한 냉철한 인식과 그네들을 향한 따뜻한 공감과 연민은 사회적 하층계급(하녀, 화류계 여성 등)에 대한 시선으로 확산된다.

 

먼저 <섣달그믐>은 한 편의 결말 반전의 에피소드로 간단히 치부할 수 있지만, 빈부와 사회적 지위 격차에 대한 원시적 인식이 순진하게 드러나 있어 흥미롭다. 하녀 오미네는 단돈 이 엔이 절박하지만, 주인여자에게는 일일이 신경 쓰기도 싫은 사소한 사안에 불과하다. 여기에 전처소생의 장남과 계모 간이라는 가정 내 전통적 대립 요소가 반영되어 집안 갈등을 증폭시킨다. 장남 이시노스케의 심중에 든 생각이 무엇이었을지 궁금하다.

 

이치요는 생활고 때문에 유곽 근처에서 한동안 거주한 적이 있다. 당시의 체험이 반영된 작품이 <키 재기>인데,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며 이 책에서도 표제작으로 내세우고 있다. 읽어보면 확실히 그럴듯하다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우리는 종종 유곽에도 사람들이 살아간다는 사실을 망각하곤 한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요시와라와 현대의 유곽이 동일한 의미를 갖지 않음을 감안하더라도 사회적으로 내세울만한 곳이 아님은 마찬가지다. 여기에는 이러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소년 소녀들이 청소년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갖게 되는 인식과 태도, 관계와 감정의 생성과 변화를 다룬 일종의 성장소설로 분류될 수 있다.

 

축제날에 한바탕 큰길파와 골목파 간에 주먹다짐이 벌어져 소동이 일어났지만 그들 모두는 결국 나름대로의 모습으로 자라날 것이다. 고리대금업자가 되기도 하고, 아버지처럼 토목 기술자가 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신뇨처럼 출가하는 아이도.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집 아이는 역시 가난함을 무릅쓰고. 그들에게 어린 시절의 떠들썩한 일화와 친우들은 조만간 추억으로 회상될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자라서 커나가고 어른이 되는 법이다.

 

언제나 항상 인형놀이나 하고 소꿉장난만 하고 있으면 얼마나 기쁠까. 아아, 싫어, 싫어. 어른이 되는 것은 싫어. 왜 이렇게 세월이 흐르는 거야. 하다못해 일곱 달, 열 달, 아니 일 년 전으로 돌아갔으면” (P.93)

 

언니의 뒤를 따라 게이샤가 되는 미도리의 상념과도 같이. 철부지 어린 시절이야말로 가장 즐겁고 행복한 시절이다. 이치요도 우리도 그것을 모두 알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풋풋함은 곧 다가올 거센 세파와 대비되어 더욱 아련한 아쉬움과 애상을 불러일으킨다.

 

유곽, 집창촌, 창녀촌, 매음굴 등 지칭하는 용어는 다르지만 이들이 가리키는 본질은 동일하다. 그곳은 유녀, 매춘부, 창녀라 불리는 여성들과 이들의 몸을 찾는 손님들과 소위 상거래 관계가 형성되는 공간이다. 이치요는 <탁류>에서 이곳의 인물과 정경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유곽은 역사적으로 그 어디에서도 사회적으로 환영받고 인정받는 존재가 아니다. 엄연한 사실을 외면하고 무시한다고 해서 사실의 존재 자체를 없앨 수는 없다. 유곽이 생성되고 운영되는 현실, 양갓집 여인이 유녀로 전락하게 되는 사회경제적 현상을 직시하자. 가정을 가진 남성들이 유녀에게 홀려 가산과 가정을 탕진하고 수렁으로 몰아넣게 되는 참혹한 현실도 실재한다. 작가는 시끄럽게 소리 높여 외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의 양태를 간명하게 기술한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빈곤층 여성이 사회적 지위를 일거에 제고시킬 수 있는 수단 중 하나는 부유한 집안에 시집가는 방법이다. 특히 여성의 외모가 뛰어난 경우 매우 유리하고 가능성이 높은 전략이다. 이렇게 신분차를 뛰어넘어 결혼에 이른 여인네들의 삶은 과연 행복한가. 이렇게 작가는 묻고 있다. 전형적인 불행의 사례를 눈앞에 제시하면서. 달님에게 경단을 바치는 <십삼야>의 밤에 친정으로 가출한 오세키와 아무것도 모르고 딸의 결혼의 결과에 흐뭇해하는 부모의 모습이 극적인 대조를 보인다.

 

사랑이 전부는 아닐지라도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결혼 생활이 행복한 삶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은 뒤늦어서야 깨닫는다. 지위, 재산 등과 같은 요소는 일종의 겉치장에 불과하다. 자신의 인생에 삶의 의의를 두지 않는다면 모르겠지만, 장식은 소임을 다하면 잊혀지고 버려지기 십상이다. 그때 비로소 애써 숨겨두고 눌러왔던 본연의 속마음이 슬며시 고개를 들고 우리들은 회한에 눈물짓는다. 오세키와 이사오, 오세키와 로쿠노스케 역시 시대가 낳은 비극의 소산이다. 이치요도 알 것이다. 이것이 당대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시대를 막론하고 지역을 불문하고 어디에나 공통된 슬픔이라는 사실을.

 

<갈림길>은 빈곤층 젊은 여성의 또 다른 대안을 보여준다. 부유한 집의 첩으로 들어앉는 선택이다. 허영에 들떠 첩이 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자발적 선호로 첩의 길을 무릅쓰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발버둥쳐도 소용없는 가난과 현실을 탈출하는 최후의 마지못한 수단이다. 오쿄는 바느질 일만 하는 삶에 지쳤을 것이다. 해도 해도 언제나 그 자리에서 호구지책에만 급급한 자신의 처지. 눈앞에 꿈으로나마 터널의 빛나는 출구를 바라볼 수 있다면 고생도 가난도 기꺼이 달게 감수하련만. 기치조는 이런 오쿄를 이해하지 못한다. 열여섯 꼬맹이에 불과한 외톨이지만 그는 시대에 당당히 도전할 패기를 지니고 자신의 삶을 개척할 가능성을 지닌 남자이므로. 인생의 갈림길에서 오쿄와 기치조의 선택은 이렇게 서로 다르다.

 

<나 때문에>는 비정한 작품이다. 부부 관계, 나아가 인간 관계에서 외화(外華)를 향한 욕망의 뿌리 깊음과 물질 욕구에 대한 집착의 폐해를 역설적으로 제시한다. 오자키 고요의 <금색야차>와 유사하게 화류계에 바람 들린 아내의 가출로 남편은 하급관료에서 오직 돈을 부르짖는 고리대금업자로 변모하여 수만금의 부자가 된다.

 

데릴사위로 막대한 재산의 소유자가 된 사위에게 아내는 이제 거치적거리는 존재에 불과하다. 애시당초 그들에게 순수한 애정은 기대하는 것은 금물이다. 자식이라도 있다면 공통의 화제거리가 생기겠지만 이마저도 없으니 둘 사이는 더욱 소원해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아내는 고귀한 집안 출신도 아니며 품위나 행동거지 면에서도 고위 관료인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밖에 나가면 자신에게 온갖 아양을 떠는 예쁘장한 여인네들이 화류계에 넘쳐난다. 부부 사이의 파국은 예정된 일이나 다름없다. 그것이 서서히 갈라지는가 아니면 치졸함과 결합하여 급격하게 무너지는가는 부부에게 달려있다.

 

이치요는 서구 근대문화의 세례를 받지 못하였다. 해설에 따르면 그의 문체는 근세 일본의 전통적 문체를 답습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외형적 한계에서도 그의 작품 내용이 당대의 주류 작가들이 인지하지 못한 사회의 깊은 저변을 훑어나갈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의 짧은 생과 맞물려 경이롭기조차 하다.

 

자신의 성적인 정체성과, 살아온 이력 및 주변 환경을 작품세계에 반영한 결과로 작품의 주인공이 가난한 집안의 여인으로 비정되는 것은 당연하다.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 낮은 신분, 그리고 성적 피지배계층인 여성이라는 세 가지 요소의 결합으로 젊은 여성들의 삶의 행로는 선택에서 오늘날과 달리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일단 미모를 무기로 상류층 집안과 결혼하여 일거에 제약을 뛰어넘는 방안이 최선이다. 정실부인(<십삼야>)이라면 금상첨화겠지만, 첩이 되는 길(<갈림길>)도 마다하지 않는다. 여기에 마음의 끌림은 고려 요소에 포함되지 않는다. 다음으로 현재의 처지를 불가피하게 인정하고 가난하지만 정직한 길을 답습하는 대안이다(<섣달그믐><나 때문에>의 전반부). 하지만 여기에도 위험은 있다. 사람의 마음은 연약하기 그지없어 유혹에 노출되기 십상이다. 표피적 화려함에 압도되어 걷기로 결심한 길에서 이탈할 가능성은 언제든지 존재한다. 그것이 도덕적 무감각과 결부되면 게이샤가 되어 화류계에 종사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탁류>). 화류계로 통칭되지만 층위는 상이하다. 단순 매춘부에서 고급 게이샤에 이르기까지. 마치 오늘날 우리사회에서도 집창촌의 여성들과 소위 강남의 텐프로로 일컬어지는 여성들 간에 인식상 넘사벽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키 재기>에서 초키지, 쇼타로, 산고로, 신뇨 등이 훗날 어떻게 성장할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들이 저마다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갈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들의 미래의 모습이 전부 바람직하고 훌륭한 형태로 자라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난다. 온실의 화원에서도 부패한 독초가 생겨나듯이 진흙탕에서 연꽃이 피어나오는 게 가능하다. 인생의 행로에서 환경 요인은 중요하지만 절대적이지 않다.

 

미도리가 어엿한 유녀로 성장하는 대목에서 가슴 한켠이 아릿하지만 그나마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작가 이치요의 나직하고 절제된 어조의 덕택이다. 원치 않은 일이었겠지만 그녀는 세상의 빛과 어둠을 너무 빨리 봐버렸다. 삶의 숨겨진 원리를 너무 일찍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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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답게 사는 즐거움
이덕무 / 솔출판사 / 1996년 7월
평점 :
절판


이덕무는 학문과 일생을 통해 참다운 인간상을 구현하고 보전하는데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독서 목적, 성리학 외의 소위 잡학에 대한 관심, 고증학적 치밀함 등은 순전한 지식욕의 추구 차원이 아니다. 내적으로는 영혼의 순정하고 충일함을 구현하기 위함이며, 외적으로는 가난, 질병 등의 물리적 제약으로 인하여 내적인 수양이 지장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는 알고 있다. 인간의 성정은 거울과도 같이 깨끗하고 맑지만, 나날이 닦아주지 않으면 금세 손때가 묻고 흐릿해지기 십상이다. 그가 <사소절>을 쓴 연유도 여기에 있다. 선비는 작은 행실, 사소한 예절부터 주의를 기울여 법도를 잃지 않아야 한다. 그는 말한다. “작은 예절을 닦지 않고 큰 의리를 실천하는 자를 나는 보지 못하였다.”(P.4). 이 책에서 이덕무는 선비 자신은 물론 아이와 부녀자가 지켜야 할 일상의 규율 등을 상세히(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밝히고 있다. 


여기에 제시된 모든 예절이 현재 시점에서 전부 유효한 것은 아니다. 일부는 시대적, 문화적 차이로 인하여 오늘날에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진부하고 구태의연한 가르침도 분명히 있다. 더욱이 유가의 기본 틀을 신봉하고 수호하려는 그의 자세는 세세하고 꼼꼼한 측면까지 신경을 쓰다 보니 과도한 측면도 분명히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우리들은 옥석을 가리는 심경에서 이해를 도모해야 한다. 시간의 흐름을 이겨내고 여전히 유효한 가르침은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것이다. 진부한 옛말이라면 저자가 이런 글을 쓴 당대의 문화적 배경의 실상을 파악해보면 납득이 갈 것이다.


“부부의 화목은 가정의 행복이다. 화목하면 아무리 빈천하더라도 걱정할 것이 못 된다. 부부의 불화는 가정의 재앙이다. 불화하면 아무리 부귀하더라도 기쁠 것이 못 된다.” (P.78)


“남편과 시부모가 사납게 성질을 부리거든, 부인 된 사람은 머리를 숙이고 숨을 죽이고 조심조심 받들어 더욱 공손한 태도를 보이고 조금도 비위를 거스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무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P.92)


여성의 예절 편에 나오는 가르침이다. 화목한 가정의 중요성은 고금을 막론하고 여전히 금과옥조다. 다만 화목 유지의 책임을 조선시대에서는 여성에게 부과하고 있음을 여기서 알 수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말없이 참고 견디라는 것, 그것은 시집가서 시댁의 귀신이 될지언정 친정에 돌아와서는 안 된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이것이 뿌리 깊은 그 시대의 정신이었다.


“여자가 윷놀이를 하고 쌍륙치기를 하는 것은 뜻을 해치고 위의를 거칠게 만드는 일이니, 나쁜 습속이다.”


친족 간 친선을 도모하기 위하여 전통놀이를 장려하는 관점에서 보면 당혹스러운 주장이다. 하물며 이덕무가 현대인들의 고스톱 놀이를 본다면 기절할 지경이리라. 과연 바둑이나 장기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그답다. 


선비가 지켜야 할 것으로 언급한 시시콜콜한 예절 중 몇 가지 사례다. 우습기도 하며 어처구니없을 지경이다. 물론 지키면 좋겠지만 생리학적으로 불가피한 경우는 어쩌란 말인지.


“남과 함께 회를 먹을 때에는 겨자를 많이 먹음으로써 재채기를 해서는 안 되며, 또한 무를 많이 먹고 남을 향해 트림하지 말라.” (P.140)


“상추·취·김 따위로 쌈을 쌀 때에는 손바닥에 직접 놓고 싸지 말라. 점잖지 못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P.141)


단편적 내용만으로 별 볼일 없는 책으로 치부해서는 잘못이다. 의외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딱딱한 예의범절만 나열하지 않고, 과거와 선대의 구체적 사례와 인용이 많이 수록되어 있어 옛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간접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믿고 헤어 나오지 못하는 소위 미신이라는 영역(관상, 풍수지리, 사주팔자 등)에 대한 이덕무의 입장은 단호하다. 


“담명(談命)·석자(析字)·관상(觀相)·감여(堪輿)를 하는 부류는 본디 마음이 삐딱하여 좋지 못한 사람들이다. 백성을 우롱하고 요망한 말로 마구 속이니 사군자는 물리쳐 멀리해야 한다.” (P.243)


세상이 날로 삭막하고 흉흉해지고 있다. 핵가족화와 고령화의 사회적 충격은 가족 간, 친족 간 정리마저도 나날이 옅게 만들고 있다.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는 가족 전체가 아니라 오직 본인들의 사고와 입장만을 독선적으로 부르짖고 있다. 개인이 인간으로서의 기본 도덕률을 무시하면 가정이 본연의 모습과 역할을 유지할 수 없다. 뿌리가 흔들리는 사회와 국가는 불안정의 위험과 대가를 멀지 않은 미래에 톡톡히 치를 수밖에 없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옛말은 낡은 허언이 아니다. 개인 각자가 스스로의 참모습을 계발하고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이토록 중요하다. 


개인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가르침을 여럿 찾을 수 있었다. 그 중에서 학문을 하는 적절한 단계를 제시하는데, 한학을 공부할 때 참고하면 도움이 되겠다.


“대학·논어·맹자·중용은 학문을 해 올라가는 과정에서 계단이 일사불란하다. 그 뒤를 이어서 공부할 책은 격몽요결·소학·근사록·성학집요로서, 규모가 정밀하여 얕은 데서 깊은 데로 들어가는 계안이니, 나는 일찍이 그것은 후사서(後四書)라고 불렀다.” (P.180)


사람 간 교제에 관하여 경구라고 할 만한 문장도 있다.


“거짓된 인품은 사람을 많이 상대할수록 더욱 교활해지고, 참된 인품은 사람을 많이 상대할수록 더욱 숙련된다.” (P.199)


그러면 그가 생각하는 우도(友道)는 어떠한가.


“겸손하고 공손하며 아담하고 조심하며 진실하고 꾸밈이 없으며, 명절(名節)을 서로 부지하고 과실을 서로 경계하며, 담박하여 바라는 바가 없고 죽음에 임하여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 참된 벗이다.” (P.199)


이덕무는 정통 유학자다. 그는 평생 한학을 공부하고 갈고 닦는데 심신을 전념하였다. 한글은 부녀층과 서민층에서 일부 사용되었지만 점잖은 선비들은 여기에 관심을 기울여서는 안 될 뿐더러 구태여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다. 그의 수많은 시작품이 모두 한시(漢詩) 형태임을 기억하자. 그런 이덕무가 한글에 대하여 제법 흥미롭게 언급한 대목을 찾게 되어 기억에 남기는 차원에서 끝으로 이를 옮겨 적는다.


“훈민정음은, 자음·모음의 반절과 초성·중성·종성과 치음·설음의 청탁과 자체(字體)의 가감이 우연한 것이 아니다. 비록 부인이라도 또한 그 상생상변하는 묘리를 밝게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말하고 편지하는 것이 촌스럽고 비루하여 모범적인 것이 될 수 없다.”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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