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선생
다야마 가타이 지음, 김욱송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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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야마 가타이는 일본 근대 자연주의 문학사조를 대표하는 작가로 인정받고 있으며, <이불>이라는 작품이 특히 유명하다. 이런 관점에서 자연주의에 대한 반감을 가진 이가 작가와 다른 작품들을 섣불리 재단하면 낭패를 볼 수 있음을 이 <시골선생>은 깨닫게 한다.


자연주의 사조는 인간의 고상하고 아름다운 면뿐만 아니라 추악하고 숨기고 싶은 모습마저 여과 없이 묘사해야 진정한 인간의 전모를 제대로 구현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이해된다. 원론적으로는 옳은 주장이지만, 자칫하면 우리가 소설을 읽는 원초적 동기와 소설이 인간 문화와 정신 영역에서 차지하는 지위를 과도하게 확대 해석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이 <시골선생>을 무리해서 자연주의로 규정할 당위성은 없다. 이 작품이 통상적 의미의 자연주의 범주의 하나라면 자연주의에 속하지 않는 작품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줄거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중학교를 졸업한 청년 하야시 세이조는 어려운 가정형편 덕분에 친우들과는 달리 시골학교 교사를 직업으로 택한다. 잠재된 꿈과 야심을 갖고 있지만 환경적 장애는 그를 점점 의기소침하게 하고 도덕적으로도 방황하게 된다.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다시금 교사로서의 삶에 매진하려고 하지만 심각해진 폐병으로 끝내 숨을 거둔다.


내용 자체는 지극히 비극적이며, 암울한 분위기가 작품 전편을 휘감을 것으로 충분히 예상되는 반면, 독자는 작품 분위기가 어둡기는커녕 밝고 의외로 담담한데 놀라게 된다. 분명 작가는 세이조의 답답한 심경에 대해, 나아지지 않는 형편에 관해 반복적으로 토로하고 있지만, 그것이 독자에게는 그다지 슬프고 침울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공언된 심각하고 진지한 기술과는 달리 언뜻 작중 인물의 상황은 이렇단다...하고 남의 이야기를 전언하듯 가볍게 지나치는 듯한 작가의 암묵적 의도가 엿보인다면 완전한 오독일까. 그만큼 주인공의 심경에 작가는 의식적으로 몇 발짝 떨어져서 관조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작가가 공감과 공명하지 않는 작중 인물의 행동과 태도는 그래서 창밖을 통해 바라보는 행인만큼이나 낯설고 간접적 존재로 간주된다.


가타이는 작품의 주된 배경인 사이타마 현의 자연묘사에 더욱 매력을 느낀 듯하다. 강과 들판이 어우러진 정경, 각종 꽃과 나무들에 대한 낱낱의 언급을 통해 당대 일본 전원의 풍경이 얼마나 아름답고 매혹적인지 백여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도 눈앞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작중 주인공은 세이조가 아니라 오히려 자연이 아닐까 의문시되기도 할 정도다. 여기에 시골사람들의 소박하면서 일상적인 삶의 풍속과 자취를 가감 없이 묘사하여 당대 일본의 시골 풍속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연주의 사조의 작품들이 대개 비정하고 냉혹한 것으로 치부된다면, 이 작품은 대척점을 이루는 다른 의미에서의 자연주의 흐름에 해당한다. 감상적 자연주의 내지 낭만적 자연주의 정도로. 작가가 여기에서 드러내는 것은 거창한 삶의 드라마와 투쟁이 아니다. 세이조가 처음에 비웃었던 시골사람들의 삶, 나날을 영위하고 자신들이 알고 가진 한도 내에서 성실하게 일생을 꾸려나가는 생활. 그것을 나중에 세이조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를 세이조의 의식의 퇴행으로 해석하지 말자. 


청년이라면 가슴 속 한켠에 나름의 야망을 품고 있다. 실현가능성과 관계없이 꿈을 가지고 있는 한 그는 행복하다. 꿈을 위해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갈 수 있다면 더욱 더 행복한 반면, 외부적 요인에 의해 꿈의 실현이 억제될 때 그는 무한한 절망과 아픔을 느끼게 된다. 세이조는 친구들의 전진을 기뻐하면서 비교하여 자신의 처지를 한층 슬퍼한다.


“친구의 성공을 축하하는 편지를 쓰던 중 세이조는 책상에 엎드려 자신의 불행을 생각하며 울지 않을 수 없다.” (P.131)


“세이조의 마음은 쓸쓸했다. 자신이 처한 환경은 실제 생활에 있어서도, 연애에 있어서도, 학업에 있어서도 점점 더 소극적으로 기울어지게 만들었다.” (P.165)


세이조는 풍금을 열심히 연습하여 도쿄의 음악학교에 지원하나 한계를 절감한다. 다소간의 문필적 재능이 있지만 뚜렷이 인정받을 수준은 되지 못한다. 스케치북에 자연을 그리는 걸 좋아하고, 생의 후반기에는 화초 표본 분류에 열의를 쏟기도 한다. 그는 특출한 재능을 지닌 청년이었던가. 아마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다소간 똑똑하며 자의식을 강하게 느끼는 평범한 청년이라는 것이 냉정하지만 오히려 적확한 평가에 가깝다.


그는 오규처럼 쉽사리 현실을 인정하고 수용하지 못한다.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되 현상에 함몰되지 않으며, 공상과 지나간 꿈에 연연하여 현실을 방랑하지 않아야 한다. 실제에 단단히 다리를 세운 채 일상에서 조금씩 전진을 도모할 수 있다면 그것도 의미 있는 삶이다, 오규의 생활처럼. 세이조는 병이 심해지고 나서야 친구의 진가를 알게 된다.


“예전에 이 친구를 평범하다고 본 것은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아직 미숙했던 탓이다. 오규에 비하면 나는 세상 물정도 많이 모르고 인정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오바타나 이쿠지와 이 친구를 비교해보니, 지금 처음으로 평범함의 위대함을 알게 되었다.” (P.286~287)


우리는 시골이라는 어휘에 모호한 금빛 색채를 부여한다. 시골을 전원과 동일시하고, 속세를 벗어난 초탈의 외피를 덧씌우고 스스로 황홀해한다. “청렴하고 이상적인 생활을 하며 자연의 평온한 품에 안겨 사는 곳이라고 생각했던 시골도 역시 전쟁터이며 사리사욕에 물든 세상이라는 것을 점점 깨닫게 되었다.” (P.195) 어딘들 사람들이 사는 곳이 그러하지 않겠는가. 이를 외면하고 부정한다면 그는 스스로 세상과 불화하고 소외되는 삶을 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현실을 긍정하고 소위 건전한 삶과 대조적인 삶의 방식이다. 세이조가 소학교가 위치한 동네를 마다하고 멀리 떨어진 절에서 살거나 아니면 학교 당직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방식은 스스로를 현실에서 격리시키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가 처음부터 시골마을에서 마을 주민들과 더불어 사는 길을 갔더라면 자발적 유폐와 고립의 길을 걷지 않았을 텐데.


죽음에 임박하여 새삼 자신과 현실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을 때 종전에는 나태하고 한심하게 보였던 사람들의 일상적 행동과 사고가 자체로서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답고 뜻 깊은 것인지 세이조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하뉴로 이사하여 가족이 다시 재회하게 된 날, 이웃에서는 새우튀김과 생선구이를 선물로 가져왔다. 집주인은 낚시와 나무 가꾸기를 좋아하는 재미있고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예전의 세이조라면 오뉴의 가치와 더불어 결코 알아차리지 못하였을 소소한 미덕들이다. 


작가의 <이불>이 워낙 당대에 파격적 논란을 불러온 연유로 그에 대해 과다하고 불필요한 선입견이 덧씌워지게 되었다. 이전 작품에서 그의 작품 경향이 대체로 감상적이고 서정적이었던 점과, 이 <시골선생>의 표현과 문체상 특징을 유추해 볼 때 단일한 사조로 치부해 버린다면 그의 작품세계의 여러 뛰어남을 크게 놓치게 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 20세기 초라는 시간적 배경과 근대 일본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감안할 때 작품 말미에 두드러지는 군국주의 일본에 대한 동시대인으로서의 자찬은 불가피성을 인정하더라도 씁쓸함을 안겨준다. 만주 진출을 당연시하고 애국적 색채로 포장하며, 러일전쟁의 승리를 강대국 세계의 당당한 일원으로 진입하였음을 찬미하는 사실은 작품 전체의 성격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아 오히려 기묘함을 안겨준다. 작가의 진정한 의도는 죽어가는 세이조가 드러내듯이 군국적 전체주의에 휩쓸려 들어가는 일본에 국민으로서 기여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한탄인가, 아니면 세이조의 죽음과 당대 군국주의의 비인간적이고 몰인정한 현실을 선명한 대조를 통해 뚜렷하게 부각하여 비판하고자 하는 작가의 치밀한 노림수인지 이 한 편만으로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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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새 지만지 희곡선집
모리스 마테를링크 지음, 이용복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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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의 작품에 뒤통수를 맞는 격이 있다. 잘 알지 못하던 작품을 접하고 신선한 충격을 받는 사례가 그것이며,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여 등한시하거나 짐짓 무시하던 작품을 정독하다가 자신의 오만과 무지에 탄식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마테를링크의 <파랑새>가 내게 후자의 뒤통수를 안겨주었다. 이 자리를 빌려 나의 천견(淺見)에 사과를 바친다.


<파랑새>라는 작품은 어지간한 유치원생도 알고 있다. 비록 동화로 압축되어 번안되었지만 치르치르와 미치르가 파랑새를 찾아 헤매다가 깨어보니 자신들의 새가 바로 파랑새였다는 사실의 기본 줄거리는 변함없다. 그래서일까. 행복은 가까운데 있다는 상투적이며 진부한 교훈과 식상한 줄거리 등 전형적인 아이들 동화로 여겨져 원작을 읽어볼 생각조차 품어보지 않았다.


일단 동화는 잊자. 원작은 아동극의 형식을 취했지만 전 6막 구성의 당당한 희곡이다. 치르치르와 미치르도 잊자. 이들의 원래 이름은 틸틸과 미틸이다. 책을 펴들고서 등장인물 소개에서 익숙한 두 이름이 나오지 않아 잠시 당황스러웠다. 우리네 문화에서 일본의 잔재와 영향이 얼마나 심대한지 여기서도 알 수 있다. 


1. 인간과 자연(혹은 영혼)


가장 놀랐던 점은 등장 캐릭터 간의 화합할 수 없는 대립구도다. 틸틸과 미틸, 개와 빛이 인간계의 입장이라면, 고양이와 밤, 나무들은 전형적인 반인간계 편에 서 있다. 특히나 고양이의 교묘한 처세가 눈길을 끈다. 반인간계에서는 인간들이 파랑새를 입수하는 것을 극구 저지하려고 한다. 


“여기 있는 모든 이들, 동물과 사물 그리고 원소들은 인간이 아직 알지 못하는 영혼을 지니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조금 남아 있는 독립이나마 지키는 거예요. 하지만 인간이 파랑새를 발견하게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고, 모든 것을 보게 될 거예요. 그럼 우리는 완전히 그의 손아귀에 들게 돼요.” (P.43, 고양이)


“우리는 모두 이름 없는 독재의 희생자들이 아닌가요? 독재자가 오기 전에 우리가 자유롭게 이 땅에서 살던 시절을 기억해 봐요.” (P.45, 고양이)


그들은 인간은 자신들의 적이라고 확실히 단언한다.


“그 애는 태초 이래 당신들이 인간에게 숨겨온 파랑새를, 유일하게 우리의 비밀을 알고 있는 파랑새를 찾고 있어요.” (P.89)


나무들과 고양이는 마침내 두 어린 인간을 죽이려고 한다. 두 주인공은 개의 도움으로 치열한 싸움 끝에 겨우 구사일생하게 된다.


2. 파랑새의 의미


여기서 파랑새의 의미가 동화와는 다른 뉘앙스를 갖는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파랑새는 그 자체로서 목적적 중요성을 지니기 보다는 일종의 수단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떡갈나무의 대사가 이를 입증한다.


“넌 파랑새를 찾고 있지. 말하자면 인간들이 우리를 보다 가혹하게 지배하기 위한, 사물과 행복에 대한 커다란 비밀 말이지.” (P.96~97, 떡갈나무)


“생명이 시작된 이래로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비밀도 빼앗아갈 수 있소... 그런데 우리는 인간을 잘 알기 때문에 그가 이 비밀을 소유하게 되었을 때 우리에게 가할 운명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있소.” (P.98, 떡갈나무)


작가 자신은 파랑새의 의미에 대해서 철학서적 한 페이지보다도 번역이 어려울 것이라고 일찍이 밝혔다. 파랑새의 의미가 그렇게 상투적으로 이해되기 어려움을 암시하는 것이다. 고양이와 밤과 나무들이 극력 결사적으로 이들을 가로막은 것도 단순한 반감이 아니라 자신들의 비밀을 뺏기고 완전히 지배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파랑새는 비밀을 여는 열쇠인가?


인간들이 파랑새를 소유하게 되었을 때 어떤 현상이 생길 수 예상할 수 있는 단초가 여기에 있다. 남매는 요정의 도움으로 다이아몬드 모자를 얻게 되고 다이아몬드를 돌리면 그들이 “눈을 뜨게”(P.25) 한다. 작가의 전작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에서도 ‘보다’라는 의미가 외면상 시각적 차원을 넘어서서 내면과 본성, 미래와 운명을 읽을 수 있음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3. 참된 인식으로서의 보기


요정은 남매가 보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그들이 눈을 뜨게 되자 사물 속의 영혼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눈을 감으면 다시 종래대로 돌아간다.


“환상적이지, 반대로... 그럼 즉시 사물 속에 있는 것을 보게 된단다.” (P.25, 요정)

“우린 이제 사물들의 진실을 보고 있어.” (P.135, 빛)

“멀리 가지 않아, 얘들아. 저기, 사물들의 침묵의 세계로...” (P.187, 빛)


눈을 뜬 남매에게 나무들처럼 자연과 사물의 영혼들은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 


“아니야, 그들은 항상 그래. 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알지 못하지. 왜냐하면 보지 못하니까...” (P.111, 빛)


인간은 실상 적대적인 존재에 의해 포위된 삶을 살고 있다. 단지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홀로 모든 것과 대면하고 있다는 걸 잘 알았지...” (P.111, 빛)


4. 행복을 다시 생각하다


남매는 행복의 정원에서 다양한 유형의 행복과 마주친다. 나무들의 공격에서 생사의 고비를 겪은 만큼 그들에게 행복이 주는 기쁨은 남다를 것이다. 빛은 그들에게 정원 바로 옆에 불행의 동굴이 있음을 상기시키며, 행복이 반드시 좋고 바람직한 것만은 아님을 상기시킨다.


“일반적으로 행복들은 아주 친절하지만 몇 명은 가장 커다란 불행보다 더 위험하고 더 사악하단다.” (P.124, 빛)

“두려워하고 또 행복하지 않은 행복들도 많이 있으니까.” (P.125, 빛)


행복 중에서 가장 뚱뚱한 행복은 자신들의 형제를 소개하는데, 허영심이 충족되는 행복, 목마르지 않을 때 마시는 행복, 배고프지 않을 때 먹는 행복,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행복, 상스러운 웃음 등이다. 


“저들은 위험해. 그리고 네 의지를 꺾어버릴 거야. 우리가 수행할 의무를 위해 뭔가를 희생할 줄 알아야만 해.” (P.129, 빛)


이것들이 위험한 이유는 위와 같다. 이는 제1장에서 요정이 존재들에게 화를 낸 연유와 유사하다. 바로 현실 안주!


“이런 참 바보들이군! 어리석고 겁쟁이들이야! 너희들은 파랑새를 찾으러 가는 아이들을 따라가기보다는 너희들의 보잘것없는 그릇 속에서, 마룻바닥 문 속에서, 수도꼭지 안에서 계속 사는 것을 더 좋아하지?” (P.34, 요정)


빛은 남매에게 진실하고 순결하고 참된 행복의 의미를 발견하게 한다. 


“사람들은 지상에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행복을 만나지.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전혀 발견하지 못하고 있어...” (P.136, 빛)


그리고 만나는 행복의 무리는 그들에게 행복이 멀리 있지 않음을 바로 일상의 주변에 널려 있음을 가리킨다.


“너의 집에 행복이 있냐고! 불쌍한 녀석! 집은 문과 창문들이 터질 정도로 행복으로 가득 차 있는데! 


건강하게 지내는 행복, 맑은 공기의 행복, 부모를 사랑하는 행복, 푸른 하늘의 행복, 숲의 행복, 태양이 빛나는 시간의 행복, 광란하는 에메랄드 빛의 봄의 행복, 석양의 행복, 별들이 뜨는 것을 보는 행복, 진주로 덮인 비의 행복, 겨울날의 불의 행복, 순진무구한 생각의 행복, 이슬 속에 맨발로 뛰어가는 행복 등등.


그리고 행복과 함께 커다란 기쁨들이 어울린다. 여러 기쁨 중에서 가장 순결한 기쁨은 모성애라는 기쁨.


행복과 기쁨의 원리는 망자의 세계에도 적용된다. 추억의 나라로 돌아가 보자.


“너희들이 생각으로 우리를 방문할 때 그게 우리의 유일한 기쁨이고 굉장한 축제가 된단다! 

우린 즐거운 일들이 달리 없단다...” (P.63, 할머니 틸과 할아버지 틸)


나중에 틸틸과 미틸이 꿈에서 깨었을 때 자신의 집이 어제와 마찬가지이지만 훨씬 아름답다고 느끼게 된 것은 그들이 행복의 진의(眞意)를 깨우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함을 느낀다.


“난 정말 행복해, 행복해, 행복해! 

나도 역시, 나도 역시!

......

이런! 이 모든 것들이 너무 예뻐. 그리고 난 정말 행복해!” (P.198, 틸틸과 미틸)


마지막으로 한 가지 상념을 더 언급하련다.


인간들이 제대로 보게 되고 참된 행복의 의의와 가치를 찾게 되는 것은 나무들을 비롯한 존재들에게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인간들은 사물들을 좀 더 존중하고 제대로 대우하지 않겠는가.


여기에는 인간에 대한 오래되고 깊은 불신이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가정과 사회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자연과 사물에 정복자적 태도를 견지하였다. 인간은 지배자이고 만물을 전횡할 수 있는 절대적 권력자이며, 만물은 단순한 대상이자 도구에 지나지 않게 간주하였다.


인간들의 본성에 커다란 변화가 생기고 개심하여 개과천선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만물이 진정한 가치와 영혼을 알아볼 리가 없겠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만물의 입장에서는 결코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함은 지극히 당연하다. 이러한 시각에서 나무들의 필사적인 공격을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홀로 모든 것과 대면하고 있다는 걸 잘 알았지...” (P.111, 빛)


빛의 말마따나 인간은 세상에 홀로 선 존재다. 밤의 한탄도 다소간 이해된다.


“몇 년 전부터 난 더 이상 인간을 이해하지 못해. 어쩌자는 거지? 모든 걸 다 알아야만 한단 말이야? 인간은 벌써 내 신비의 3분의 1을 알아차렸어.” (P.69, 빛)


인간은 과학기술의 개발로 더 이상 자연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예전에는 일출과 일몰이 인간의 활동 시간을 한계 지었는데 전등이 개발되면서 더 이상 밤은 인간에게 공포의 시간이 아니다. 개는 다른 동물에게서 인간을 지켜주었고, 빛은 인간에게 밤을 물리칠 수 있게 해주었다. 다른 사물들이 개와 빛을 인간과 한편으로 간주하는 것은 당연하다.


“빛은 인간 편에 섰어요, 그녀는 우리의 가장 위험한 적이죠.” (P.45, 고양이)


틸틸과 미틸의 파랑새를 찾기 위한 꿈속 모험은 결국 실패로 끝난다.


“추억의 파랑새는 검게 변했고, 미래의 파랑새는 온통 붉게 되었어요. 밤의 파랑새는 모두 죽었고, 숲의 파랑새는 잡을 수가 없었어요.” (P.180~181, 틸틸)


그럼에도 모험은 성공하였다. 파랑새는 구하지 못했지만 파랑새의 의미를 찾는 데는 성공하였다.


“넌 저기에서 네가 나를 볼 때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깨닫고 또 배우기 위해 이곳에 온 거야......우리가 서로 안아주는 곳이면 어디나 다 천국인 거야.” (P.147~148, 모성애)


마지막 장면의 매우 시사적이다. 그들은 파랑새를 놓쳐버렸다. 소녀는 새가 떠났다며 절망의 비명을 지르지만, 미틸은 의외로 담담하고 대범하다. 그는 관객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데, 이는 이미 깨달은 자의 어조다.


“혹시 누군가가 그 새를 발견하면 우리에게 돌려주시겠죠? 우린 나중에 행복해지기 위해 그 새가 필요하거든요.” (P.201, 미틸)



※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삶에 대한 태도는 낙관적이고 희망적이지 않은 듯하다. 인간을 둘러싼 사회와 운명의 엄혹성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인식이 여전히 이 극작품을 감싸고 있어 아동극의 외피를 무색케 한다.


첫째, 제1장에서 부잣집 아이들 집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는 장면을 엿보면서 남매가 주고받는 대사


미틸: 저 애들은 왜 금방 먹지 않지?

틸틸: 배고프지 않으니까...

미틸: (놀라서) 배고프지 않아? 왜?

틸틸: 먹고 싶을 때 먹으니까...

미틸: (믿지 못하며) 매일?

틸틸: 그렇다고 해... (P.17, 틸틸과 미틸)


둘째, 제10장 미래의 왕국에서 내년에 동생으로 태어날 아이와의 대화


틸틸: 가방에 뭘 가지고 있지? 우리에게 뭘 가져왔니?

아이: (매우 자랑스럽게) 난 세 가지 질병을 가져왔어. 성홍열, 백일해, 홍역...

틸틸: 그게 전부라면! 그럼 다음에는 뭘 할 거니?

아이: 그 다음에는! 떠날 거야...

틸틸: 오는 건 정말 고통이겠구나!

아이: 선택의 여지가 있어? (P.167, 틸틸과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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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동기담 - 일본 화류소설의 정수
나가이 가후 지음, 박현석 옮김 / 문예춘추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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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소개된 나가이 가후의 유일한 작품이다. 나름 일본 근대문학사에서는 지위를 인정받고 있는 작가인데 국내에서는 상대적으로 대접이 소홀하다고 할 밖에. 그는 초기에 자연주의 문학 풍을 선보였는데, 구미 유학 후에는 낭만주의와 상징주의 풍의 작품들을 잇달아 발표하였다.

 

이 <묵동기담>은 1937년에 발표한 그의 최후기작이다. 책 뒤표지의 소개 문구대로 소설인지 르포인지 수필인지 경계가 모호한데, 도쿄 뒷거리 스미다가와의 유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가의 분신인 화자는 여름밤 더위와 소음을 피해서 밤산책을 하다가 데라지마마치에 이르고 마침 내린 소나기로 인해 우연히 오유코라는 화류계 여성을 알게 된다. 화류계라고 우회적으로 표현하지만 정직하게 표현하자면 몸을 파는 매춘부이다.

 

화자는 화류계가 부정 암흑(不正暗黑)의 거리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뒷골목 음지의 유곽과 화류계 여성을 작품의 제재로 삼은 것은 일면 물론 에로티시즘에 관심을 기울여 온 가후의 특징이다.

 

“정당한 아내들의 위선적인 허영심, 공명한 사회의 사위적(詐僞的)인 활동에 대한 의분이 그를 처음부터 부정 암흑이라 알려져 있는 다른 한쪽으로 치닫게 한 유일한 힘이었다.” (P.86~87)

 

여기에 위와 같은 인식이 더해진다. 외면상 선하고 깨끗한 양 인위적으로 꾸미는 대신 깨끗하면 깨끗한 대로 더러우면 더러운 대로 현상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 화류계는 불결한 사회악으로 치부되지만 엄연히 우리네들 옆에 가까이에서 실존하는 세계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말초적인 자극을 간질이는 뭔가를 상상하면 큰 실망감을 느끼게 된다. 작품은 굴곡 없이 무덤덤하게 흘러간다. 별 볼일 없는 중늙은이와 마찬가지로 내세울 것 없는 유녀(遊女) 간의 일상적 만남과 대화가 이어진다. 여기에 화자 자신이 구상하는 소설에 관한 이야기가 병치된다.

 

사실 통속적으로 다가오는 제재라는 점을 제외하면 이 작품의 참된 모습은 다른데 있다. 화자가 데라지마마치를 자주 찾게 되는 것은 그것이 개발이 덜 된 도쿄 소시민과 하층민들의 삶이 예전과 유사하게 이어지는 터전이기 때문이다. 오유코도 동종 직종의 다른 여성들과는 달리 기모노 차림의 전통적 꾸밈을 하고 있어 화자의 향수를 불러일으킨 데 있다.

 

화자가 묘사하는 도쿄의 옛 거리와 인물들의 풍정(風情)은 작품이 쓰여진 당대에서는 이미 사라져 찾아볼 수 없는 과거의 추억이 되고 말았다. 일본이 근대화를 시작한 이후 급속한 도시화로 인해 도쿄도 대도시로 성장하면서 도쿄 특유의 모습들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세계적 강대국이 된 일본, 중일전쟁이 한창인 군국주의가 횡행하던 시절에 바람직한 현대인의 모습은 스스로 우월해지기 위해 경쟁을 불사하고 용쟁 분투하는 인물형이다.

 

화자와 같은 소시민은 정부와 주류가 선도하는 전체주의적 의식과는 무관하게 자신만의 개인적 삶을 영위하기에 급급할 뿐이다. 작은 것의 가치를 소중히 할 줄 아는 인식은 당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으며 이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여전하다.

 

작가는 도쿄의 유곽과 매춘부를 통해서 작고 평범한 존재의 가치를 되살리고 근대화란 명목으로 막무가내로 없애버리는 사회적 추세에 미약하나마 저항을 나타낸다. 결국 사회와 문명 비판으로 나아가는 이러한 연결점에서 작가는 크고 높은 목소리로 부르짖지 않는다. 담소를 나누듯 속삭이듯 나긋나긋한 어조로 더없이 담담하면서 평이한 어투로 낮게 읊조릴 따름이다. 역설적으로 이게 웅변보다 묘한 울림을 가슴 속에 남겨준다.

 

대산세계문학총서로 <묵동기담>이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설마 달랑 한 편만을 수록하지는 않을 것으로 기대하며, 본격적인 나가이 가후의 작품을 접할 수 있게 되길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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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색야차
오자키 고요 / 범우사 / 1992년 9월
평점 :
절판


번안소설 <장한몽>의 원작으로 유명한 작품이다. <장한몽>이 귀에 설면 ‘이수일과 심순애’가 나오는 소설이라고 하면 반드시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한국을 빛낸 100인의 위인’이라는 동요에도 나올 정도라서 어린아이들마저도 알고 있는 인물들이므로.


오자키 고요는 일본 근대문학사에서 비중이 큰 인물이다. 초기 근대문학의 경향과 인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서 고다 로한과 더불어 소위 ‘고로 시대’를 열었으며, 겐유샤라는 문학 동호회를 결성하여 주도하였다. 


그의 작품 중에는 이 <금색야차>가 매우 유명한데, 길지 않은 작가의 삶 중에서도 이 작품에 쏟은 노력과 시간은 가히 압도적이다. 1897년 그의 나이 31세 때부터 요미우리신문에 연재를 시작하여 단속적으로 이어지다가 1903년 37세에 결국 미완성으로 끝낸 채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그의 후반생은 이 소설과 함께한 삶이었다. 작품의 구성은 금색야차(전편/중편/후편), 속편, 속속편, 신속편으로 연결되는데, 신문 연재라는 상황과 예상치 못한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후속작을 요구하는 여론의 압박이 심했음을 알게 한다.


작품은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불멸의 주제와, 정신적 가치와 물질적 가치 간의 대립이라는 당대 일본의 시류를 반영한 시대적 의식이 선명하게 대비되어 있다. 작가는 갈등 구조를 극한에 이를 정도로 철저히 몰고 가면서 대립적 색채를 두드러지게 하고자 애쓰고 있는데, 과유불급이어서 오히려 사실성을 놓치고 있을 정도다. 여기에 당대적 관점이 아닌 현대적 시각을 개입시키면 작가의 주제의식은 역으로 진부하기 이를 데 없으며, 구시대의 도덕률을 억지로 드높이는 게 아닐까 비판마저 나올 정도다.


미야에 대한 간이치의 배신감은 개인적으로 충분히 느낄 만하다. 비록 공식적으로는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간이치와 그녀는 부부의 연을 맺게 되리라고 자신들은 물론 보호자인 미야 부모도 암묵적으로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 간이치가 바라보는 미야는 단순한 젊은 아가씨가 아니라 여인으로서 지녀야 할 숭고한 덕성의 표본이었으므로 다이아몬드에 넘어간 충격은 한층 더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이후 그의 자멸적 삶을 정당화 해주지는 못한다. 


미야를 굳이 변호한다면, 그녀는 뛰어난 미모를 지녔지만 보통의 인성을 지닌 여인이다. 그녀의 내심은 부귀영화에 대한 환상과 기대를 품고 있었다[전편 제3장]. 오늘날 젊은 여성들이 갖는 백마 탄 왕자의 출현에 대한 몽상과도 동일하다. 그녀는 간이치에게 진정한 사랑을 품은 게 아니었다, 적어도 그를 버리고 도미야마와 결혼하기 이전에는. 그녀가 간이치에 대해 지닌 애정은 남녀 차원이 아닌 남매간과 가까운 것이었다. 그녀 자신도 그렇게 자신을 합리화 하였다. 그래서 미야는 별다른 고민 없이 쉽게 도미야마의 손을 잡았던 것이다.


“부부의 행복은 오직 이 애정의 힘에 달려 있는 거야. 따라서 애정이 없으면 이미 부부 사이도 끝난 거라 할 수 있지.” [전편 제8장]

부유하지만 애정 없는 결혼생활. 당대는 물론 현대의 수많은 남녀 군상들은 여전히 사랑보다 조건을 선택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이를 비판하기는 용이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네 부모 세대에 이르기까지 배우자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채 혼인을 치르지 않았는가. 열정적인 사랑은 없지만 부부 간의 은근한 애정은 상호 노력에 의해 충분히 생길 수 있다. 미야는 이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부귀영화의 욕구가 채워지니까 잠복해 있던 사랑의 욕망이 불현 듯 샘솟는 것이다[후편 제3장]. 여러 유한부인들이 남편 따로 애인 때로 있는 동기가 여기에 있다.


극도의 배신에 대한 분노의 표출 양태는 자기 발전과 자기 파괴의 상이한 행동 선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를 갈면서 분투노력하여 오히려 성공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간이치는 세상에 대한 불신과 체념, 그리고 자기 방기(放棄)로 나아간다. 그는 고리대금업자의 하수인이 되었다.

“고리대금과 같은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거의 사람을 죽일 정도의 배짱이 필요한 일을 날마다 다루면서 감정을 거칠게 하고 있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으니 고리대금이야말로 미친 사람한테는 안성맞춤의 장사입니다.” [중편 제2장]


여기서 소설은 세태 비판적 성향을 드러낸다. 간이치가 몸담고 있는 고리대금업의 세계와 생활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그들의 간교한 영업 사례를 보여주며, 그들에 대한 세간의 증오와 저주를 여과 없이 쏟아내고 있다. [중편 제8장, 후편 제1장, 이는 당대 일본이 자본주의화 되면서 고리대금업이 활발해지고 그 폐해가 증폭되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미야와 간이치의 두 중심인물 외에 네 명의 개성적인 인물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며 작중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들을 통해 작품 전개는 더욱 흥미진진해지면서 주인공을 한층 두드러지게 하며 작가의 주제의식은 더욱 선명해진다.


미야의 남편인 도미야마. 그는 사실 피해자이며 악인이라고 할 수 없다. 그는 미야와 간이치의 관계를 알지 못한 채 결혼 하였다. 결혼 후 미야에 대한 그의 나름대로의 노력과 헌신은 차라리 눈물겨울 정도다. 만약에 미야가 도미야마에게 조금만 마음을 열었더라면 그는 한층 훌륭한 인물로 성숙해졌을지도 모른다. 달면 삼기고 쓰면 뱉는 듯한 미야의 처사에 오히려 반감이 생겨서 도미야마의 타락에 미움보다 동점심이 일 정도다.


고리대금업자 와니부치. 그는 글자그대로 전형적인 고리대금업자의 화신이다. 그는 자신의 직업에 일말의 의구심과 회의감을 품지 않으며 전혀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 아들의 눈물어린 호소마저 외면하면서 오히려 고리대금업의 불가피성을 토로하는 그의 대사를 듣고 있노라니, 요즘 모 대부회사의 광고가 생각난다. 사람이 바쁠 때는 버스나 지하철이 아니라 비싸더라도 택시를 이용하는 게 필요하다는, 뭐 그런 거 말이다. 어쨌든 와니부치는 표리부동한 위선자와는 다른 철저한 악인다움의 구현이라는 면에서 역설적으로 흥미로운 인물임은 분명하다.


간이치의 유일한 친구 아라오. 참사관으로 성공가도를 달리다가 갑작스레 파산하여 몰락한 인물. 간이치가 음(陰)의 속성이라면, 그는 양(陽)의 속성을 지닌 듯하다. 그는 처지에 실의 낙담하지 않으며 올곧은 마음 자세를 견지한다. 외양상으로는 거렁뱅이나 광인에 가깝지만 그의 두 눈은 여전히 부리부리하며 활활 타오르고 있다. 그러기에 그의 마음은 두 남녀에 대한 안타까움과 끊지 못한 애정으로 여전히 아프다.


고리대금업자 미쓰에. 작중에서 그녀만큼 간이치에게 하대와 구박을 받는 인물이 달리 있을까? 그녀의 미모와 재산이라면 어찌하든 접근하려는 남자들이 수없이 많을 텐데. 그녀는 일편단심 간이치를 향한다. 그에 대한 그녀의 마음은 분명코 순정이며 연정이다. 보지 못하고 겪어보지 못한 미지의 존재에 대한 성취될 수 없는 갈망은 더욱 몸 달게 하기 마련이다. 그녀는 결코 다소곳하고 정적인 성격이 아니다. 간이치가 그녀를 거부하는 이유는 단지 하나, 자신의 가슴 속에 여전히 미야가 가득 자리 잡고 있어서다. 미야에 대한 사랑이 증오로 바뀌었지만 그 크기는 전혀 줄지 않았다. 그가 진실로 미야를 버렸다면 서슴없이 미쓰에를 받아들이지는 못하더라도 그렇게 박정하게 외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자신처럼 하찮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결코 물질적 조건에 대한 편애는 아닐 것이다. 아쉽게도 미쓰에의 행로가 향후 어떻게 전개될지는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작품은 중단되고 말았다.


간이치는 휴양지 여관에서 사야마와 게이샤 아이코의 사랑을 위한 죽음을 시도하려는 장면을 목도하고 세상과 여인과 자신에 대한 인식을 반성하는 계기로 삼는다[속속 제5장]. 이후 신속편에서 미야의 구구절절한 심경을 토로한 서신에서 작품을 완결되지 못하고 끝을 맺는다. 차라리 이편이 낫다. 구질구질하게 해피엔딩을 만들려고 애쓰거나 괜히 개과천선한 간이치의 훌륭한 선행을 억지로 독자에게 보여주려는 작가의 고심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괜찮다.


이 작품은 근대 우리 문학계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번안된 인물이지만 이수일과 심순애가 여전히 우리네 세계에 살아있다는 자체가 이를 증명한다. 작가 특유의 세련된 감각적 표현과 감상적 문체는 작품에 애상미를 고취하고 있으며 이는 일본문학의 전형적 특성으로 자리 잡는다. 현대에 와서 많은 신진 작가들이 역시 일본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에게서 문학적 세례를 받았던 것처럼 당대의 오자키 고요 또한 그러했던 것이다. 어쨌든 우리에게는 결코 바람직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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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아스와 멜리장드 지만지 희곡선집
모리스 마테를링크 지음, 이용복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마테를링크의 이 희곡은 첫 희곡 <말렌 공주>의 3년 후에 씌어진 작품이다. 어찌 보면 원작보다도 이를 토대로 한 당대 및 후대 작곡가들의 작품으로 더 성가가 높아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쟁쟁한 음악가들이 곡을 썼다. 드뷔시, 포레, 쇤베르크, 시벨리우스가 오페라 및 관현악곡을 썼다. 작곡가들이 이 작품에 관심을 기울였던 연유는 뭐니 뭐니 해도 사랑의 죽음이라는 영원한 테마에 더해 상징주의적 희곡으로서의 철두철미한 성격에 기인한다.


하나의 산문 작품에 이렇게 시종일관 다양한 상징과 암시와 뉘앙스를 무지막지할 정도로 쑤셔 넣은 사례는 문학사상 다시 찾기 어려울 정도다. 작품을 재독하면서 일독에서 간과했던 문구와 표현들이 깊은 함의를 가지고 있음을 비로소 깨닫는 경우가 많았다. 삼독, 사독의 결과는 어떠할지 예측하기 어렵다.


플롯 면에서 이 작품은 남편과 젊은 아내, 그리고 남편의 젊은 아버지가 다른 동생 간의 불륜이 뒤섞인 삼류 드라마에 가깝다. 아내는 남편에 애정을 느끼지 못하고 남편의 동생과 서로 사랑을 느낀다. 남편은 둘 사이를 의심하고 마침내 밀회의 현장에서 동생을 죽인다. 부부의 관계는 상호 간의 사랑과 믿음으로 엮여져야 하는 게 이론이라면,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 결혼 따로, 연애 따로라는 이율배반적 상황이 그치지 않는 연유는 인간의 불완전성에 기인한다.


젊은 남녀 주인공에 대한 안타까움에 비례하여 덩치 큰 골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자칫 그에 대한 시각을 왜곡시키는 경우가 있다. 원시인처럼 체격에 비해 두뇌는 뒤떨어진다는 인식 말이다. 제1막 제3장에서 주느비에브는 골로를 항상 신중하고 진지하고 의지가 강하다고 평가한다. 골로는 현실적 인물이다. “사람들은 기쁨이란 것을 매일 누리지는 않아.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해”(제2막 제2장). 그는 꿈과 상징과 보이지 않는 세계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사냥감을 쫓듯이 실질만을 추구한다. 따라서 그와 멜리장드는 애초부터 부합하지 않는 상대였다.


이 희곡을 실제 연극으로 상연한다면 연출자들은 심대한 고충을 겪지 않을까. 통상적 연극과 같이 접근하면 무미건조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결과만을 낳게 된다. 대사가 오롯한 대사가 아니다. 대사가 품고 있는 함의를 관객이 이해하려면 음조와 뉘앙스는 물론이고 배경 세팅에도 치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 작품에서 작가가 감추고 혹은 드러내는 상징과 암시들의 일부(그 전모는 오직 작가만이 알 수 있으리라!)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문과 문지방, 그리고 하녀들. 

제1막 제1장은 엉뚱하게도 문지기와 하녀들의 대화로 이루어진다. 하녀들은 문지방을 닦지만 대홍수의 물을 다 부어도 흔적을 다 지우지는 못할 것이라고 문지기와 더불어 중얼거린다. 지워야 되는 흔적이 무엇인지는 명시되지 않는다.

제3막 제5장에서 이뇰드는 펠레아스와 멜리장드가 종종 문 때문에 싸운다고 말한다. 문이 열려있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지막 제5막 제2장에서 멜리장드의 죽음이 임박해지자 하녀들이 방으로 들어와서 말없이 벽을 따라 늘어서서 기다리고, 멜리장드의 죽음을 가장 먼저 인지한다.


문은 안과 밖을 경계 짓는다. 안은 이승이며, 밖은 저승이다. 문지방은 곧 차안과 피안의 경계일 것이다. 운명은 문지방을 통해 드나든다. 문이 열려 있으면 운명의 출입이 용이해지며 그만큼 인간에 대한 운명의 개입은 강화된다. 문이 닫혀 있으면 생과 사의 영역이 분명해진다. 더 이상 불확실하고 변덕스러운 운명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 제4막 제4장에서 문이 모두 닫히게 된 사실을 알았을 때, 멜리장드는 차라리 잘됐다고 세 번이나 반복하여 말한다.


기독교에서 인간은 누구나 원죄를 안고 태어난다. 제아무리 내세를 위해 심신을 정화하더라도 원조의 흔적을 결코 없애지는 못한다. 하녀들은 이 엄연한 사실을 독자와 관객, 등장인물에게 직설적으로 상기시키는 역할, 곧 운명의 여신에 가깝다. 제5막 제1장의 대사를 살펴본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어요...”

“우린 언제 올라가야 할지 잘 알 수 있을 거야...”

“아직 때가 되지 않았어...”

“이제 그들은 우리를 두려워해...”


운명의 절대성과 가혹성.

마테를링크의 작품에서는 운명이 중요한 기제로 작용한다. 제아무리 등장인물이 난다 긴다 하여도 결국 운명이 심어놓고 파놓은 함정에 빠져 좋든 싫든 간에 정해진 운명의 길을 따르게 된다. 등장인물 누구도 운명의 힘에 거스르려는 의지를 보인다. 숙명처럼 체념하고 받아들인다. 개인의 선택과 행동은 상대론적 관점에서 해석될 수밖에 없다. 타인은 외부에서 관찰하고 지켜보지만 인물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의 운명과 미래를 알지 못하기에. 늙은 아르켈은 그래서 그저 기다리고 지켜보기만을 주장한다.


사람은 약점과 한계를 지닌 유한한 존재다. 그는 자신도 길을 잃었음에도 타인을 인도하려고 하며(제1막 제2장), 잔잔한 바다만 보며 나중에 올 폭풍우를 예견하지 못한 채 배를 타고 나간다(제1막 제4장). 어린 이뇰드조차 운명에 대한 인간의 역부족을 양떼를 통해 절감한다. “아! 아!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는군......그럼 어디로 가는 거지! 목동! 목동! 양들이 어디로 가는 거야?”(제4막 제3장)


이야기가 진행되는 왕국은 결코 태평성대의 낙원이 아니다. 심한 기근이 왕국을 황폐하게 만들어 거지들이 헤매고 있으며, 영역 밖에서는 적들이 기회를 엿보고 있으며(제2막 제3장과 제4장), 굶어죽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다(제4막 제2장). 왕궁의 토대도 단단하지 않다. 성 전체는 지하 동굴 위에 세워져 있는데, 곳곳에 균열이 생겨서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으며, 웅덩이에서는 죽음의 냄새가 올라온다(제4막 제3장).


행복의 의미.

멜리장드는 자신의 처지와 심적 상태를 행복하지 않다고 표현한다. 작중에서 이 대사는 수차 반복되어 나타난다. 제2막 제2장에서 골로에게 두 번 말하며, 제4막 제2장에서는 불행하지 않았다고 한 잠시 후, 행복하지 않다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외친다. 행복이라는 가치의 연원과 근거는 무엇인가? 물질적 요인의 충족을 행복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행복은 영혼과 정신적 차원의 문제다. 


반지의 의미

제2막 제1장에서 멜리장드는 펠레아스와 샘가에서 대화하던 중 반지를 샘에 빠뜨린다. 펠레아스의 주의에도 멜리장드는 반지를 갖고 일부러 위험하게 장난을 친다. 반지의 분실은 곧 그녀의 고의성임을 독자는 알 수 있다. 그녀에게 반지는 골로와의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의 올가미였던 것이다. 반면 골로에게 그 반지는 단순한 의미 이상의 것이다. “당신은 그게 어떤 것인지 몰라. 당신은 그게 어디서 온 것인지 몰라.”(제2막 제2장).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의 눈물과 떠나려는 의지.

남녀 주인공은 자주 운다. 별다른 외적 이유가 없음에도 그들은 남들과 달리 눈물을 잘 흘린다(제1막 제3장, 제3막 제1장과 제5장). 펠레아스는 계속하여 떠난다는 말을 되풀이한다(제1막 제4장). 실제로 그는 떠나려고 하지만 여건상 출발을 연기할 수밖에 없다(제2막 제4장. 멜리장드도 왕국에 영구히 정주할 것으로 비쳐지지 않는다. 어린 이뇰드는 그것을 직감한다. 그녀는 골로에게 떠나지 않으면 자기가 죽을 것이라고 예언한다(제2막 제2장).


우는 행위는 통상 슬픔의 발로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그리 나날이 슬픈 것인가? 그들은 항상 어둠 속에서 운다. 이유 없는 울음은 존재에 대한 본원적 슬픔에 기인한다. 인간의 유한성과불완전성보다 더 큰 눈물의 원천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들은 왜 떠나고자 하는가? 기쁨과 행복이 있는 곳에서 사람들은 떠나고자 하지 않는다. 고통과 슬픔이 멈추지 않는 곳에서 그들은 떠나고자 한다. 떠나서 그들은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목적지는 알지 못한다. 인간은 길 잃은 존재이며, 운명의 맹목적 인도에 우왕좌왕 휩쓸려 다니는 가련한 양떼다. 떠나는 행위는 외형적인데 국한하지 않는다. 내면에서도 떠나는 것이 가능하다. 떠남은 여행도, 도망도 될 수 있으며 초월로 이해될 수 있다. 


형제간의 운명적 불행.

골로는 펠레아스와 멜리장드가 머리카락으로 서로 유희하는 장면을 목격한 후 펠레아스를 지하 동굴로 데려온다. 펠레아스는 부패한 웅덩이에 빠질 뻔한 위험을 겪는데, 이는 실수와 우연이 아니라 골로의 살해 의도가 깃들여 있음을 짐작케 한다. 골로는 흥분하여 목소리가 떨릴 지경이었다(제3막 제3장). 압살롬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로 다윗의 아들이다. 자신의 동복누이를 강간하고 죽인 이복형제를 죽인 후 끝내 다윗에게 반기를 들기도 하였다. 골로는 멜리장드에게 폭력을 저지르며 압살롬의 이름을 외친다(제4막 제2장). 형제 살해의 불행한 운명은 이미 예고된 셈이다.


빛(밞음)과 어둠.

이 작품을 연극으로 상연하려면 무대 연출에 세심한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특히 빛과 어둠의 효과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궁전의 전체적 이미지는 어둠이다. 지하 동굴은 어둠의 분위기를 배가한다. 인물들은 빛과 어둠을 가지고 다툰다. 밞음을 지향하는 이뇰드와 어둠 속에 있고자 하는 골로(제3막 제5장). 보리수 그늘과 밝은 곳을 엇갈리게 희망하는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제4막 제4장). 빛과 어둠은 흔히 선과 악으로 해석된다. 또는 생과 사의 세계로도 이해된다. 땅 밑을 사후세계로 보는 관점은 세계 공통이다. 


순수와 진실.

멜리장드의 눈에서 아르켈은 거대한 순수를 발견할 때, 골로는 순수의 순수성을 의심한다(제4막 제2장). 아르켈은 멜리장드에게서 새 시대의 문을 열 사람임을 예상한다. 새 시대는 무슨 의미에서 구 시대와 구별되는가? 그것은 순수함에서이다. 거짓과 위선이 난무하며, 진실의 절대성이 의심받는 현실, 이것이 구 시대다. 현실과 실제가 존중받는 것은 허위와 몽상이 아닌 순결한 내면과 밝은 이성의 빛이 환하게 비출 때다. 운명의 덫은 사람들의 순수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어린아이처럼 장난을 쳤지만 세상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제4막 제4장). 진실을 말해도 상대방은 계속적으로 진실을 요구한다(제5막 제2장).


현실이 자신을 거부할 때 궁극적 해소책은 결국 떠나는 것이다. 영원한 떠남은 불가피한 동시에 차라리 잘 되었다고 역설적으로 표현된다(제4막 제4장). 정신 부재의 현실에서는 더 이상 살 수가 없다. “그녀는 살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녀는 이유없이 태어났어요...죽기 위해. 그리고 이유없이 죽는 겁니다...”(제5막 제2장). 멜리장드는 인간 세상이 아닌 숲 속에서 살아야 존재가 아니었을까?


보는 행위와 의미.

우리는 종종 착각을 한다. 사람의 내면을, 물질의 본성을 읽을 수 있다고. 작품에서 본다는 의미는 단순한 시각적 기능을 가리키지 않는다. 겉이 아닌 내면을, 현재가 아닌 미래를, 운명을 읽을 때 비로소 본다고 할 수 있다. 골로는 애초부터 보려고 하지 않는다. 늙은 아르켈조차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제1막 제3장에서 그는 이렇게 토로한다. “난 몹시 늙었지만 아직 내 안에서 한순간도 분명하게 본 적이 없구나.”. 


반면 그는 제2막 제4장에서는 펠레아스에게 보는 법을 가르쳐주겠다고 말한다. “난 더 이상 내 스스로 보지는 못하지만, 네게 보는 법을 가르쳐주겠다. 그리고 네가 그들에게 손짓을 하고자 하는 날, 너에게 그것들을 보여주마.”. 제대로 본 적 없는 이가 보는 법을 가르쳐주겠다고 하는 현상, 그것이 곧 인간의 모순된 모습이다.


결국 아르켈은 자신이 보지 못하는 존재임을 자각한다. 멜리장드의 죽음을 뒤늦게 깨달으며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음을 자탄한다(제5막 제2장)


이 희곡이 남녀 간의 사랑과 죽음을 주제로 삼은 작품이라면, 펠레아스가 제4막에서 죽임을 당한 후 멜리장드가 같이 죽지 않고 제5막이 덧붙여진 것은 사족에 가까웠을 것이다. 마테를링크는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골로의 애증 관계를 자신의 상징적 운명극을 구성하기 위한 장치로서만 활용하였다. 이들의 사랑과 고뇌는 주제가 아니라 제재에 불과하다. 제1막 제1장과 제5막 제1장에서 하녀들의 대사를 곱씹어올 필요가 있다. 마테를링크가 고심하여 설계했지만, 드뷔시가 간과한 대목이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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