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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산 스님.초롱불 노래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3
이즈미 교카 지음, 임태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평점 :
근세 일본은 개항 후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그네들은 근대화는 곧 서구화이며, 궁극적으로는 당당한 서구 열강의 일원이 되는데 있었다. 문학예술에 있어서도 근대 문학은 서구 지향적이었음은 당연한 것으로서 리얼리즘, 곧 사실주의 나아가서 자연주의가 근대 일본문학의 주류가 되었다.
주류가 있으면 비주류가 있게 마련이다. <오층탑>의 고다 로한이 길을 개척하고 이즈미 교카가 전면적으로 확장시킨 일파가 여기에 해당한다. 일본 고유의 전통 문화를 존중하고 받아들이면서, 사실 못지않게 상상과 환상의 영역에 대한 중시가 이즈미 교카 문학의 전형적인 특성을 이룬다. 교카가 사실주의를 강조한 오자키 고요의 열렬한 문하라는 점이 이채롭다.
교카에 대한 문학적 평가는 당대보다도 후대에 점점 높아지고 영향력도 더 커지는 현상을 보인다. 각박한 현대 도시문명 속에서 사람들은 긴장의 끈을 풀고 마음과 정신이 숨 쉴 수 있는 여지를 간절히 갈망하고 있다.
<고야산 스님>은 1900년에 발표한 작품으로서 작품 활동 초기의 대표작이다. 일본 중부 와카야마 현의 고야산에 있는 절의 스님이 화자에게 들려준 이야기로서 단순 액자소설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 액자소설의 성격상 액자 내에서 진행되는 이야기가 핵심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에는 유독 요괴, 괴수, 도깨비 등과 같은 초자연적 존재들이 많이 나타난다. 단순히 민족성 또는 취향의 문제로 치부해버리면 간단하지만, 잠시만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일본만큼 자연환경과 기후가 인간에게 극단적으로 작용하는 곳도 드물 것이다. 기후가 온난하고 물이 풍부하며 섬이라서 수산물도 많아 살아가는데 유리하다. 반면 심한 무더위와 태풍의 피해, 빽빽한 숲과 험준한 지형, 화산과 지진 등은 삶을 위협하는 요소들이다. 인간은 본디 초자연적 위험을 모두 신적 존재로 간주하여 두려워하고 신성시한다.
이 소설의 배경은 기후 현에서 나가노 현으로 넘어가는 산길이다. 나가노라면 수년 전에 동계올림픽이 열렸을 정도인 심산유곡이다. 깊은 산속에서 고야산 스님이 마주치는 숲의 커다란 뱀들과 무수한 산거머리들은 산 내지 숲의 환상성을 나타낸다. 스님이 뱀을 산신령으로 간주하여 목숨을 비는 장면은 초자연적 존재의 인정과 아울러 위력을 알 수 있게 한다.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는 자연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다. 마법을 무리는 인간, 인간의 형체를 한 인간 아닌 존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두 공포감을 자아내 두려워하면서 때로는 집단적 탄압과 처형의 대상이 되기도 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숲 속의 여인이 이러하다. 그녀는 분명 인간이지만, 초자연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일찍이 병자의 아픔을 진정시키는 능력을 가졌으며 점차 자유자재로 사물을 부리고 형태를 변화시키는 영묘한 능력을 갖게 되었다. 소위 마녀가 된 것이다.
모든 남성에게 있어 최후이자 고난도의 유혹은 여색(女色)이다. 수행을 하는 스님의 제일 금계도 마찬가지다. 숲 속 여인은 빼어난 미모로 지나가는 남성을 홀리고 시들해지면 동물로 둔갑시켜 버린다. 유혹과 위험의 양면성의 이중적 속성은 기실 모든 여성의 천부적 자질이다. 고야산 스님도 여인의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 무한한 신심을 발휘해야 했을 것이나 하마터면 그녀에게 돌아갈 뻔하였다. 평범한 남성들이야 어찌 그 아련하면서도 달콤한 족쇄에 스스로 두 손과 두 발을 기꺼이 내밀지 않겠는가.
<초롱불 노래>는 1910년에 발표되었고, 내용적으로나 시기적으로 그의 후기 문학 활동의 걸작이다. 이 소설은 당대로서는 몇 가지 이채롭고 지금의 관점으로는 매우 선구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작품은 백여 년 전의 통속문학인 짓펜샤 잇쿠의 희작 <도카이도 도보 여행기>의 여정을 따라가고 있다. 남들이 근대화를 부르짖을 때 교카는 홀로 고루하고 구태의연한 것으로 치부되던 고유 유산을 소설 구조의 전면에 등장시킨 것이다. 여정만이 아니라 작중 인물의 이름이나 별칭도 빌려 쓰고 있다.
여기서는 일본 전통기예인 노(能)의 노래와 춤이 작품의 주요 소재로 다루어진다. 촉망받는 기다하치는 기예에 뛰어나 소잔이라 자칭하며 우쭐대던 안마사를 수치스럽게 하여 죽음에 몰아가고 결국 떠돌이 악사가 된다. 소잔의 딸 오미에는 게이샤가 되어 기다하치에게 노를 배운다. 단지 여행객인줄 알았던 두 노인은 노에 있어 당대 최고의 배우와 악기연주자이며, 그 중 일인은 기다하치의 숙부이기도 하다.
작품 구조적 관점에서도 되새겨볼 여지가 있다. 두 가지 이야기의 흐름이 서로 맞물려 가다가 종내는 하나로 합쳐지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떠돌이 악사 기다하치가 우동집에서 여주인과 안마사에게 털어놓는 과거사가 하나이다. 두 노인네가 여관에서 게이샤를 부르는데, 춤도 못 추고 샤미센도 연주 못하는 오미에가 (기다하치에게 배운) 노 무용과 노래를 선보인다. 각 이야기는 서로 엇갈려서 격자형식으로 맞물려 간다. 마지막에 두 노대가의 연주소리에 기다하치가 합류하여 한바탕 향연이 어우러진다. 오미에의 춤, 기다하치의 노래, 그리고 셋소의 장단. 비약하자면 헤겔의 변증법적 구조라고 할 것이다. 정과 반, 그리고 합.
한편의 영화를 감상하는 기분이다. 전통예술의 득도와 참된 구현이 인물들의 삶과 어우러지는 점에서 읽는 동안 영화 <서편제>가 머릿속에 언뜻 떠올랐다. 나그네의 여로와 방랑, 빼어난 재주와 오만함으로 죽음에 몰고 간 죄책감, 아버지의 죽음으로 기구한 삶을 겪게 된 딸, 아끼던 조카이자 제자를 내칠 수밖에 없었던 예인(藝人)의 엄정한 태도.
그러고 보니 옮긴이와 출판사의 편집 역량이 놀랍기 그지없다. 이 책에 수록한 두 편의 소설은 단순한 작품 선정이 아니라 교카 문학의 두 영역을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간략화의 위험을 무릅쓴다면 <고야산 스님>은 환상성, <초롱불 노래>는 고유성을 각기 주요 테마로 삼고 있다. 후자는 국내 초역이기도 하다.
섣부른 판단일지 모른다. 교카의 문학적 특질은 문체 면에서도 확실히 구별되는 점이 있다. 고다 로한에게서 간결성과 단호함을 느낄 수 있었다. 모리 오가이는 단아하면서 높은 격조와, 지적인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이즈미 교카는 예술적 문학을 쓰는 인물임을 알게 해준다. 비록 번역상의 한계는 있을지언정 표현 자체에서 매우 섬세하고 다채로우며 세심하게 선별한 어휘와 리듬 효과를 노리고 있음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과연 일본어의 연금술사로 평가받는 연유를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