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7
모리 오가이 지음, 김용기 옮김 / 소화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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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모리 오가이의 유일한 장편소설이다. 그럼에도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서 언급되지 않는데서 이 작품의 한계를 유추할 수 있다. 1910~1911년 발표된 작품으로서 아직 전기의 문학 성향을 지니고 있는데, 당시 오가이의 문학적 장점은 단정하면서 군더더기 없는 문장. 감정의 진폭이 크지 않으면서도 강렬한 여운을 남기는 말미. 예스러운 멋조차 느껴지는 낭만주의적 분위기, 은연중 배어나오는 따스한 휴머니즘과 봉건질서에 대한 거부감. 그러면서도 기성체제에 편입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체념과 순응의 심적 태도. 이러한 요소들이 그의 초기작에 두드러지며 중기에까지 이어지는 그의 특질이기도 하다.

 

극적인 사건 전개와 구성력에 치중하지 않는 스타일을 보건대 그의 성향은 단편소설에 어울리지 장편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 그의 중·단편을 보면 장편으로 쓰더라도 부족함이 없을 제재를 다루고 있다. 그는 과장과 허세와 요설을 기피한다. 군더더기를 싫어하는 그는 문장의 잡다한 곁가지를 잘라버리고 핵심에 다가서기 위해 노력한다.

 

이 소설은 오가이로서는 독특한 유형에 속한다.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해설에 따르면 나쓰메 소세키에게 자극받아 썼다고 한다. 이십대 중반의 젊은이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점에서 언뜻 <기러기>와 유사하지만, 두 작품이 가는 방향은 너무 멀다. 작가가 되기 위하여 상경한 준이치는 여러 유형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회적 인간관계 및 이성관계를 겪게 된다.

 

세토와 오무라는 정신적, 도덕적 측면에서 정반대의 인물이다. 세토는 지극히 현실적 인물이다. 의대생인 오무라는 폭넓은 교양과 인간에 깊은 통찰력을 지닌 인물이다. 준이치와 오무라 간의 철학적 대화를 보게 되면 이십대 젊은이들답지 않은 노숙한 성찰의 면모가 드러난다. 오무라는 준이치에게 정신적 멘토에 가깝다.

 

준이치가 마주치는 두 여성, 오유키와 사카이 부인 또한 상대성이 두드러진다. 처녀 대 미망인, 연하 대 연상, 순결 대 방종(내지 성적 자유), 수줍음 대 당당함, 전통적 대 현대적 등 양자는 대척점에 서 있다. 결혼을 염두에 두고 진지한 만남을 가진다면 응당 오유키를 택할 것이다. 사람은 누구라도 선(善)을 지향해야 마땅함을 인식하지만, 악과 부패의 유혹을 과감히 떨치지 못한다. 팜므 파탈에의 경도와 파멸이 현실성을 지니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준이치 역시 사카이 부인의 눈을 외면하지 못한다.

 

준이치가 작가를 꿈꾸는 만큼 나쓰메 소세키를 위시한 당대의 문인들이 실명 내지 가명으로 등장하고 언급된다. 모리 오가이조차 준이치에게서 부정적으로 비평받는 점이 흥미롭다. 비록 소설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준이치의 눈을 통해 본 문학계에 대한 인식은 작가 자신의 견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아무래도 당대 문학사조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지만 자신은 동의하지 않던 자연주의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엿볼 수 있다.

 

작품의 전개는 두 가지 방향으로 흘러간다. 하나는 개인의 인생관 내지 세계관 형성에 관한 의론이다. 일본의 근대화는 불가피하게 서구의 개인주의의 유입을 동반하였다. 집단문화와 의식이 팽배한 전통 일본사회에서 개인주의는 자칫 사회악으로 치부되기 쉽다. 반면 진정한 개인주의의 발흥 없이는 근대화는 공염불이다. 작중 소설가 후세키가 월례 문학회에서 강연하는 주제는 입센의 개인주의다. 준이치와 오무라가 열중하여 <파랑새> 작품을 분석하면서 토론을 하는 주제도 이기주의로 매도되기 쉬운 개인주의에 대한 것이며, 특히 오무라는 이타적 개인주의를 옹호하고 있다. 여전히 일본 사회를 감싸고 있는 집단주의에 대한 오가이의 비판이라고 하겠다.

 

준이치는 욕망의 발로에 따라 동정을 잃는다. 그는 사카이 부인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대우받길 원하지만 부인에게 있어 준이치는 잠시 호기심을 안겨준 청년에 불과하다. 합치할 수 없는 두 남녀 사이의 결별은 불가피적으로 임박해진다. 사랑 없는 육욕의 만족, 찰나가 지나면 여운은 씁쓸하기 짝이 없다.

 

청년은 가족이라는 온실을 떠나 세상에 직면한 순간부터 현실을 절실히 깨닫는다. 창문을 통해 바라 본 환상은 덧없이 깨지고 만다. 안온한 껍질이 깨지는 순간의 의미는 개개인마다 동일하지는 않다.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통과의례를 거쳐야 만 비로소 소년은 청년이 되며, 청년은 참으로 성인이 될 수 있음이다. 이를 거부하면 어떻게 될까? 영원한 피터 팬과 오스카로 남는 것뿐이다.

 

준이치는 하코네를 떠난다. 하숙집이 있는 도쿄로 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주저와 퇴행의 길이 아니다. 하코네의 사카이 부인, 도쿄의 세타와 뭇 현실, 이들의 실체를 준이치는 이미 경험하고 발견하였다.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더 이상 과거의 준이치는 아니다. 그는 글을 쓰고 작가가 될 터이지만 상경하던 시기에 품었던 상념과는 다른 형식, 내용, 차원의 글을 쓰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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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렌 공주 지만지 고전선집 620
모리스 메테르링크 지음, 이용복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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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극작가 마테를링크에게 일약 명성을 안겨준 희곡으로 상징주의적 희곡의 하나의 전형으로 간주된다. 당대는 사실주의, 나아가 자연주의가 문단에서 득세하던 시기였다. 소설과 시는 물론이고, 연극에서도 마찬가지로 인간 삶의 세세한 면을 그것이 아무리 더럽고 추악하더라도 가감 없이 기술하고 묘사하는 경향이 주류를 이루었다. 자연주의의 약점은 인간 외면의 모습에 치우친 나머지 인간의 고유한 내면세계에 대한 무관심 내지 무능력에 존재한다. 정신과 영혼의 심원하고 미묘한 반짝임을 타인의 눈으로서 관찰하는데 본질적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자연주의에 대한 반발과 극복으로 모색된 흐름이 소위 상징주의라고 하겠으며, 마테를링크는 희곡 장르에서 이를 철저히 구현한 작가라고 하겠다. 이 작품을 읽어 보면 확실히 고전주의부터 리얼리즘에 이르는 극작들과는 차별화됨을 쉽사리 알게 된다.

 

배경 및 무대 설명의 생략. 각 막은 곧바로 인물들의 대화로 시작될 뿐 통상적 희곡의 구구절절하고 글로 그리는 듯한 상세한 무대 장면의 기술은 찾아보기 어렵다. 배경 및 무대에 대한 구체성의 결여는 작품에 추상성을 강화하며 작가에게 운신의 폭을 넓히는 재량을 부여한다.

 

사건과 행동에 대한 구체적 묘사의 회피. 얄마르 왕과 마르셀뤼스 왕 간 언쟁의 원인과 내용은 모호하게 언급될 뿐이다. 양국 간 전쟁으로 마르셀뤼스 왕이 죽고 말렌 공주의 나라로 폐허가 된 사실은 사후에 탑에서 탈출한 공주와 유모에 의해 비로소 드러난다. 안 왕비가 말렌 공주를 교살하는 장면도 독자는 간접적 기술에 의해 인지할 수 있게 된다. 구체성의 회피와 모호성의 강조는 역시 작품에 비현실성을 부여하며 독자로 하여금 인물의 태도와 성격, 그리고 작가의 지향점에 대해 통합된 해석을 거부할 수 있게 부추긴다.

 

상징과 암시 장치의 매설. 독자에게 혼란과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 효과적 수법은 명확한 인식이 어렵게 사건과 행위에 대해 암시와 상징을 던져주면 된다. 모래사장에서 발이 푹푹 빠져서 전진하기 어려운 것처럼 독자는 작가의 장치를 해석하고 되새기기 위하여 주춤거리다가 되돌아가기도 하는 등 과감히 떨치지 못한다. 양국 간 약혼식 날 장교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혜성과 비, 어두워진 하늘은 파국을 전조한다. 말렌 공주와 얄마르 왕자의 재회 장면에서 연인을 방해하는 부엉이와 두더지, 공주의 갑작스런 코피, 이상하게 울다가 죽는 분수의 물줄기 또한 연인의 재회가 해피엔딩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공주의 죽음과 관련되어서는 폭풍우와 벼락, 일식, 떨어진 성당의 십자가, 죽은 백조 등의 복선이 깔려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낯선 인물. 악역을 도맡는 안 왕비는 유틀란트에서 남편인 늙은 왕을 가두고 폐위시킨 전력이 있다. 그녀가 일흔 살이 넘은 얄마르 왕과 결혼한 목적은 불분명하다. 그녀는 왕을 부추겨 마르셀뤼스 왕과 다투게 하여 왕국을 멸망시키고 약혼을 파혼시킨다. 늙은 왕은 갑작스럽게 심신이 노쇠하기 시작한다. 얄마르 왕자에 대한 안 왕비의 사랑은 일반적 모자(계모와 전처의 아들 사이지만)간의 애정과는 차이가 있음이 곳곳에서 언급된다. 그녀는 자신의 딸 위글리안과 왕자를 결혼시키기 위해 무리한 일을 저지른 것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인물들의 동일 대사의 반복적 표현. 조금만 이 작품을 읽어보면 표현상의 뚜렷한 특징을 금방 알아차리게 된다. 인물들은 의사를 주고받을 때 한 번의 대사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두 번 내지 서너 번씩 반복한다.

 

“얄마르: 그래요! 그래! 그래! 오! 오! (밖으로) 이리 와요! 이리 와요! 목이 졸렸어요! 목이 졸렸어요! 목이 졸렸어요! 말렌! 말렌! 말렌! 말렌! 목이 졸렸어요! 목이 졸렸어요! 목이 졸렸어요! 오! 오! 오! 목이 졸렸어요! 목이 졸렸어요! 목이 졸렸어요!” (5막 4장)

 

위는 다소 극단적인 예시지만, 작품 전체에 이러한 반복적 대사가 지겨울 정도로 넘쳐난다. 작가의 모종의 의도가 개입된 결과라고 해석해야 될 것이다. 반복을 통한 강조 효과 또는 영탄의 증폭으로도, 한 번의 대사로는 소통과 행동 유도가 어려운 부재와 단절의 인간관계의 암시로도 추론이 가능하다. 그것이 무엇인지지 알기 어렵다. 다만 연극으로 실제 상연이 될 때, 배우들이 참으로 고생하겠구나 싶다. 동일한 어조와 감정으로 대사를 반복하면 배우도 관객도 모두 지루하고 따분해 하지 않겠는가.

 

첫 희곡 작품이니만치 후기 이후의 원숙한 필치와 심화된 상징 기법과 구조를 여기서 기대하기는 어렵다. 재료를 아낌없이 쏟아 붓는 풍성함이 주는 재미는 대가의 세련된 맛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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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미 교카의 검은 고양이 일본명작총서 13
이즈미 교카 지음, 엄인경 옮김 / 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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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즈미 교카의 초기 작품을 모은 책이다. <살아있는 인형>은 1893년, <야행순사>와 <검은 고양이>는 1895년 작으로 이십대 초반의 무르익지 않은 풋풋한 교카를 접할 수 있는 기회라고 하겠다.


일단 초기작이므로 잘 짜여진 구조라든지 깊이 있는 통찰 또는 정교한 언어 표현 등에서는 아무래도 중기 이후의 작품들에 비하면 열세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작품 시기 초반의 교카는 다양한 장르 실험을 시도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괴기와 환상 풍의 이야기, 일본 전통의 제재 등 교카의 트레이드마크는 아직 전형화 되지 못하였다. <살아 있는 인형>은 탐정소설이며, <야행순사>는 관념소설로 분류된다. <검은 고양이> 정도가 훗날 교카의 본령에 가깝다고 하겠다.


<살아 있는 인형>은 탐정소설적 관점에서는 다소 미흡한 점이 드러난다. 장르적 뿌리가 서구 사회에 기반을 둔만큼 일본 사회의 시각에서는 탐정의 존재와 지위가 애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주목할 점은 아카기 저택이 마을 사람들에게 요괴가 사는 집, 유령집 등의 호칭으로 불린다는 데 있다. 아무리 젊더라도 교카는 교카인 것이다. 


현실과 주인공의 관념이 갈등과 충돌을 빚을 때, 관념과 의지를 극단적으로 추구할 경우 인물의 말로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누구나 특정 상황에서는 대치되는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을 겪게 된다. <살아 있는 인형>의 시즈에도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 가출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가문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와 사명감은 그녀를 아카기의 감금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결과에 이르렀다. 탐정 다이스케도 시즈에를 구할 것인가 범인을 체포할 것인가 사이에서 고민한다.


“아아, 공무와 인정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정과 공무를 둘 다 받들기는 어렵다. 만약 공무를 택한다면 인정을 버려야 하고, 인정을 따르면 공무를 버리게 된다.” (P.110)


<야행순사>의 핫타 순사가 늙은 인력거꾼과 젖먹이가 딸린 거지 여인에게 대하는 태도를 봐서 공무상 인정을 기대하기 힘든 인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공무를 택한다. 그가 맞닥뜨린 극단적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으며 자신의 육체적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는 경우에도 여전하다. 그의 사후 사람들은 그를 인의롭다고 칭송하지만, 기실 그는 순사로서의 직무상의 책임, 즉 책무에 고지식하게 얽매여 죽음을 자초한 것에 불과하다. 관념은 현실에서 추출하여 현실을 비추는 사고이지 현실을 재단하고 현실보다 우월한 존재가 아님을 사람들은 곧잘 망각하고는 한다. 이데올로기를 생(生)에 우선시할 때 생기는 병폐가 무엇인지 우리는 역사에서 충분히 찾을 수 있다.


<검은 고양이>의 어둡고 괴기스러운 분위기와 동시에 어처구니없는 결말로 이어지는 플롯은 작가가 단편 속에 서로 엇갈리는 아이디어와 복선을 여럿 삽입한 데서 연유한다. 맹인 도미노이치가 오사요에게 품은 집착에 가까운 사랑, 오사요가 보여주는 검은 고양이 구로에 대한 과도한 애정이 작품의 한 축을 이루는 갈등 구조이다. 반대편에는 화가 슈잔과 오시마와 오사요 간의 사랑의 삼각관계가 잠복해 있다. 


맹목적 사랑에 인성마저 파멸해가는 맹인과 그의 저주. 검은 고양이 구로의 표변은 저주의 결과로 도미노이치의 악령이 깃든 것인가 아니면 오사요의 변심에 따른 동물적 분노의 단순한 표출인가. 오시마가 도미노이치를 돕는 장면에서 보여주는 냉혹하며 호탕한 여장부로서의 면모는 자신과 오사요가 사실은 같은 처지임을 깨닫는 순간 허물어지면서 오히려 맹인에게 애원하는 연약한 장면과 극단적 대조를 보여 실소와 허탈을 자아내기조차 한다.


어쨌든 작중 검은 고양이는 결국 도미노이치의 원혼으로 판정되고 악마의 사자로서 최후의 전력을 다하다가 칼에 찔려 죽게 된다. 악역을 맡은 인물과 동물이 모두 사라졌으니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살아남은 공인된 커플 오사요와 슈잔은 행복할까? 작가는 살포시 의문을 드리우면서 결말을 맺는다. 


사람들 간에 갈등과 증오가 발생하고 증폭되는 과정에는 사랑과 욕망의 미비와 실패에 따른 왜곡이 개입된다. 적절한 지점에서 욕망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만족할 줄 아는 것은 개인은 물론 사회 차원에서도 안녕과 평화의 출발이다. 도미노이치의 오사요에 대한 사랑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지위와 처지를 감안하여 발생 여부를 조절하게 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맹인은 사랑을 넘어서 욕망의 실현에 집착하면서 사건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핫타 순사의 연인 오코의 큰아버지의 비뚤어진 복수도 결국 사랑의 왜곡에서 출발한다. 


교카는 어린 시절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면서 모성에 대한 그리움의 상념을 항상 품고 있었다고 한다. 이 작품집에 나오지 않지만 교카의 작품세계에는 게이샤가 매우 비중 있는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다. 이는 작가가 후에 게이샤와 결혼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세 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의 살펴보는 것도 꽤나 흥미로울 것이다. 한 가지 공통점은 이들은 연약하지만 외부의 물리적 억압과 위협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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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실 기담문학 고딕총서 7
이즈미 교카 지음, 심정명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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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수록작>
1. 고야성(高野聖)
2. 외과실
3. 눈썹 없는 혼령
4. 띠가 난 들판

 

2007년 이즈미 교카 작품집으로는 국내에서 처음 출간된 책이다. ‘기담문학 고딕총서’의 일편으로 나왔으므로 작가의 삼백여 편 중 괴기성과 환상성이 두드러진 작품을 골랐다. 그런 면에서 <외과실>은 기획의도에 썩 부합하지는 않는다.

 

<고야성(高野聖)>은 문학동네 임태균 번역본에 대한 졸평을 참조 바라며 건너뛴다.

 

<외과실>은 <야행순사>와 더불어 1895년에 발표된 교카의 사실상 문단 데뷔작이다. 매우 짤막한 작품으로서 과감한 생략과 함축적 표현 기법을 사용하여 완독 후에도 뉘앙스가 명확히 다가오지 않는다. 그의 초기작은 관념소설로 평가받는다. 주인공의 직무와 윤리 등의 관념이 사랑과 현실 등과 충돌을 일으켜 결국 주인공의 죽음 또는 파멸로 이어지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작품에서 외과의사 다카미네와 백작부인은 젊은 시절 공원에서 우연히 단 한번 스쳐지나간 적 밖에 없다. “진정한 아름다움이 사람을 움직인다는” 말과 같이 한 번의 조우만으로 그들의 내심에는 상대에 대한 강한 연모의 정이 뿌리박혔다. 자식과 남편이 있음에도 연모의 마음을 놓지 않은 백작부인,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내밀한 언사를 드러낼까봐 절체절명의 수술에서 마취를 거부한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은 나를 모르겠지!” (백작부인)
“잊지 않았습니다.” (다카미네)

 

두 사람의 세상에는 오직 둘만이 존재하였다. 그들 외에 다른 사람은 안중에 들어오지 못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한날 세상을 떠났다.

 

<띠가 난 들판>은 1911년 중기의 작품이다. 수년 전 시리즈로 나왔던 <데스티네이션>이라는 영화가 있다. 극중 주인공은 운명에 의해 죽음이 예정되었다. 제아무리 회피하고 저항하려고 발버둥 쳐 봤자 맹목적인 운명의 무자비한 힘은 그를 끝내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더위에 지쳐 새벽에 깨어난 다다키치가 이야기를 나누게 된 빈집인 뒷집의 여인이 그렇다. 만삭인 그녀는 정원 산책 중 넘어져 사산을 하고 자신도 몸이 불편하게 된다. 이때부터 꽹과리를 치는 약장수 중이 기분 나쁘고 집요하게 그녀 주위를 배회한다, 병원에 실려 갈 때까지. 병원에서는 죽음의 망령이 침대 옆 공중에서 그녀를 지켜본다. 그녀에게 죽음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면서. 망령은 잠시 그녀를 떠나는 듯하지만 종내 다시 돌아온다.

 

“너 참 끈질기구나, …… 우선 다른 데로 가겠다.”
“너, 아무래도 다시 왔어…….”

 

그 섬뜩한 커다랗고 검은 손은 다다키치 보는 앞에서 드디어 목적을 달성한다. 여인의 운명은 결국 그리될 것으로 정해졌던 것이었다.

 

<눈썹 없는 혼령>은 1924년 작으로 후기작 중에서는 비교적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서두가 <초롱불 노래>와 마찬가지로 짓펜샤 잇쿠의 <도카이도 도보 여행기>를 인용하며 시작하여 흥미롭다. 주인공 사카이가 나라이에서 묶는 동안 일본의 여관 생활과 문화의 멋과 재미를 잔잔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들려주고 있다.

 

사카이와 여관 주방장의 대화는 신비와 기이에 대한 작가 자신의 의견이나 진배없으며,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암시다.
“이 심산유곡에서 일어나는 일은 인간의 지혜로는 못 미치지요.”

 

아무도 없는 여관 별채 목욕탕에서 낯선 여자의 목욕소리가 잇달아 들린다. 방에서 눈썹을 민 낯선 여인의 혼령이 화장을 하는 장면을 비몽사몽간에 목도한다. 이후 소설은 여관 주방장의 이야기로 묘하게 진행된다. 화가의 간통 사건이 벌어지면서 도라지 연못의 눈썹 없는 혼령과, 화가를 찾아온 정부 오츠야의 이미지는 중첩된다. 화장을 마친 오츠야의 모습은 도라지 연못의 여인과 자매간으로 보일 정도로 비슷하다. 두 여인은 화장 후 “어울립니까?”하고 묻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보인다.

 

여관방에서 사카이가 마주친 것은 도라지 연못의 혼령인가 아니면 마물로 오인 받아 총에 맞은 오츠야의 원혼인가? 전자와 후자는 상이한 존재인가 아니면 동일한 현상의 발현인가? 여기서 작가는 혼령과 여인의 이미지를 교묘하게 뒤엉키게 제시하여 독자를 혼란 속으로 의도적으로 몰고 간다. 마지막에 두 사람이 목격한 오츠야와 초롱을 든 주방장 자신이 다가오는 장면과 역시 “어울립니까?”하는 섬뜩한 물음은 등장인물뿐만 아니라 독자의 등골마저 오싹 전율하게 만든다.

 

어쨌든 나름대로 교카의 판타지풍의 작품세계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시기별로 적절히 안분하여 수록작을 고심하여 선별한 투가 역력하다. 하지만 천려일실(千慮一失)! 교카 소개를 위하여 고른 배분에 주력하다 보니 <고야성>을 제외하면 그를 대표할 만한 뛰어난 작품성의 소설을 담는 데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온라인서점의 서평의 엇갈린 평점은 이를 말해 준다. 출간에 대한 찬사와 작품 선정에 대한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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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산 스님.초롱불 노래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3
이즈미 교카 지음, 임태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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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일본은 개항 후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그네들은 근대화는 곧 서구화이며, 궁극적으로는 당당한 서구 열강의 일원이 되는데 있었다. 문학예술에 있어서도 근대 문학은 서구 지향적이었음은 당연한 것으로서 리얼리즘, 곧 사실주의 나아가서 자연주의가 근대 일본문학의 주류가 되었다.

 

주류가 있으면 비주류가 있게 마련이다. <오층탑>의 고다 로한이 길을 개척하고 이즈미 교카가 전면적으로 확장시킨 일파가 여기에 해당한다. 일본 고유의 전통 문화를 존중하고 받아들이면서, 사실 못지않게 상상과 환상의 영역에 대한 중시가 이즈미 교카 문학의 전형적인 특성을 이룬다. 교카가 사실주의를 강조한 오자키 고요의 열렬한 문하라는 점이 이채롭다.

 

교카에 대한 문학적 평가는 당대보다도 후대에 점점 높아지고 영향력도 더 커지는 현상을 보인다. 각박한 현대 도시문명 속에서 사람들은 긴장의 끈을 풀고 마음과 정신이 숨 쉴 수 있는 여지를 간절히 갈망하고 있다.

 

<고야산 스님>은 1900년에 발표한 작품으로서 작품 활동 초기의 대표작이다. 일본 중부 와카야마 현의 고야산에 있는 절의 스님이 화자에게 들려준 이야기로서 단순 액자소설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 액자소설의 성격상 액자 내에서 진행되는 이야기가 핵심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에는 유독 요괴, 괴수, 도깨비 등과 같은 초자연적 존재들이 많이 나타난다. 단순히 민족성 또는 취향의 문제로 치부해버리면 간단하지만, 잠시만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일본만큼 자연환경과 기후가 인간에게 극단적으로 작용하는 곳도 드물 것이다. 기후가 온난하고 물이 풍부하며 섬이라서 수산물도 많아 살아가는데 유리하다. 반면 심한 무더위와 태풍의 피해, 빽빽한 숲과 험준한 지형, 화산과 지진 등은 삶을 위협하는 요소들이다. 인간은 본디 초자연적 위험을 모두 신적 존재로 간주하여 두려워하고 신성시한다.

 

이 소설의 배경은 기후 현에서 나가노 현으로 넘어가는 산길이다. 나가노라면 수년 전에 동계올림픽이 열렸을 정도인 심산유곡이다. 깊은 산속에서 고야산 스님이 마주치는 숲의 커다란 뱀들과 무수한 산거머리들은 산 내지 숲의 환상성을 나타낸다. 스님이 뱀을 산신령으로 간주하여 목숨을 비는 장면은 초자연적 존재의 인정과 아울러 위력을 알 수 있게 한다.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는 자연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다. 마법을 무리는 인간, 인간의 형체를 한 인간 아닌 존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두 공포감을 자아내 두려워하면서 때로는 집단적 탄압과 처형의 대상이 되기도 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숲 속의 여인이 이러하다. 그녀는 분명 인간이지만, 초자연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일찍이 병자의 아픔을 진정시키는 능력을 가졌으며 점차 자유자재로 사물을 부리고 형태를 변화시키는 영묘한 능력을 갖게 되었다. 소위 마녀가 된 것이다.

 

모든 남성에게 있어 최후이자 고난도의 유혹은 여색(女色)이다. 수행을 하는 스님의 제일 금계도 마찬가지다. 숲 속 여인은 빼어난 미모로 지나가는 남성을 홀리고 시들해지면 동물로 둔갑시켜 버린다. 유혹과 위험의 양면성의 이중적 속성은 기실 모든 여성의 천부적 자질이다. 고야산 스님도 여인의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 무한한 신심을 발휘해야 했을 것이나 하마터면 그녀에게 돌아갈 뻔하였다. 평범한 남성들이야 어찌 그 아련하면서도 달콤한 족쇄에 스스로 두 손과 두 발을 기꺼이 내밀지 않겠는가.

 

<초롱불 노래>는 1910년에 발표되었고, 내용적으로나 시기적으로 그의 후기 문학 활동의 걸작이다. 이 소설은 당대로서는 몇 가지 이채롭고 지금의 관점으로는 매우 선구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작품은 백여 년 전의 통속문학인 짓펜샤 잇쿠의 희작 <도카이도 도보 여행기>의 여정을 따라가고 있다. 남들이 근대화를 부르짖을 때 교카는 홀로 고루하고 구태의연한 것으로 치부되던 고유 유산을 소설 구조의 전면에 등장시킨 것이다. 여정만이 아니라 작중 인물의 이름이나 별칭도 빌려 쓰고 있다.

 

여기서는 일본 전통기예인 노(能)의 노래와 춤이 작품의 주요 소재로 다루어진다. 촉망받는 기다하치는 기예에 뛰어나 소잔이라 자칭하며 우쭐대던 안마사를 수치스럽게 하여 죽음에 몰아가고 결국 떠돌이 악사가 된다. 소잔의 딸 오미에는 게이샤가 되어 기다하치에게 노를 배운다. 단지 여행객인줄 알았던 두 노인은 노에 있어 당대 최고의 배우와 악기연주자이며, 그 중 일인은 기다하치의 숙부이기도 하다.

 

작품 구조적 관점에서도 되새겨볼 여지가 있다. 두 가지 이야기의 흐름이 서로 맞물려 가다가 종내는 하나로 합쳐지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떠돌이 악사 기다하치가 우동집에서 여주인과 안마사에게 털어놓는 과거사가 하나이다. 두 노인네가 여관에서 게이샤를 부르는데, 춤도 못 추고 샤미센도 연주 못하는 오미에가 (기다하치에게 배운) 노 무용과 노래를 선보인다. 각 이야기는 서로 엇갈려서 격자형식으로 맞물려 간다. 마지막에 두 노대가의 연주소리에 기다하치가 합류하여 한바탕 향연이 어우러진다. 오미에의 춤, 기다하치의 노래, 그리고 셋소의 장단. 비약하자면 헤겔의 변증법적 구조라고 할 것이다. 정과 반, 그리고 합.

 

한편의 영화를 감상하는 기분이다. 전통예술의 득도와 참된 구현이 인물들의 삶과 어우러지는 점에서 읽는 동안 영화 <서편제>가 머릿속에 언뜻 떠올랐다. 나그네의 여로와 방랑, 빼어난 재주와 오만함으로 죽음에 몰고 간 죄책감, 아버지의 죽음으로 기구한 삶을 겪게 된 딸, 아끼던 조카이자 제자를 내칠 수밖에 없었던 예인(藝人)의 엄정한 태도.

 

그러고 보니 옮긴이와 출판사의 편집 역량이 놀랍기 그지없다. 이 책에 수록한 두 편의 소설은 단순한 작품 선정이 아니라 교카 문학의 두 영역을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간략화의 위험을 무릅쓴다면 <고야산 스님>은 환상성, <초롱불 노래>는 고유성을 각기 주요 테마로 삼고 있다. 후자는 국내 초역이기도 하다.

 

섣부른 판단일지 모른다. 교카의 문학적 특질은 문체 면에서도 확실히 구별되는 점이 있다. 고다 로한에게서 간결성과 단호함을 느낄 수 있었다. 모리 오가이는 단아하면서 높은 격조와, 지적인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이즈미 교카는 예술적 문학을 쓰는 인물임을 알게 해준다. 비록 번역상의 한계는 있을지언정 표현 자체에서 매우 섬세하고 다채로우며 세심하게 선별한 어휘와 리듬 효과를 노리고 있음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과연 일본어의 연금술사로 평가받는 연유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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