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랜포드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44
엘리자베스 개스켈 지음, 심은경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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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시대의 제인 오스틴이라 불리는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다. 확실히 오스틴 풍이 느껴지는데 개인적 그리고 시대적 차이가 미묘하며 색다른 풍미를 자아낸다. 제인 오스틴의 스타일을 은근한 유머로 표현한다면 개스켈은 직설적인 개그에 보다 가깝다. 독자의 웃음과 재미를 끌어내는 방식이 문체와 표현에서 보다 노골적이다. 자 이런 재밌는 대목이 있는데 한 번 웃어주지 않겠어요? 라고.

 

독자는 <크랜포드>에서 19세기 중반의 대영제국 시절, 시골의 하층 귀족과 중류층들이 살아가는 전형적인 모습을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다. 제인 오스틴의 글쓰기 소재가 가정과 연애 등 너무 미시적인 게 아닌가하는 비판가라면 개스켈을 앞두고는 아예 넌더리를 낼지도 모르겠다. 반복되는 일상사의 자잘한 행위들이 지칠 줄 모르고 작가의 손에서 독자에게로 전달된다. 과연 이 정도까지 당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세세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더구나 영국인도 유럽인도 아닌 일개 동양인이 말이다.

 

작품의 구성은 화자인 메리 스미스 양의 시각을 통해 본 크랜포드 마을의 인물군상들의 삶과 사건들이 열여섯 개의 장으로 배치되어 있다. 화자는 크랜포드 주민은 아니지만 가장 중심인물이라 할 수 있는 매티 양의 손아래 친척이자 친밀한 관계로 자주 방문하여 머무를 수 있는 인물이다. 관찰자로서는 적격자라고 하겠다.

 

크랜포드 마을은 여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며, 최고 지위는 귀족인 제미슨 부인이 누리고 있지만 사실상의 지도자는 매티 양의 언니인 젠킨스 양이다. 잠시 캡틴 브라운이 등장하여 호각세를 이루지만 그와 젠킨스 양이 잇달아 세상을 뜬 후 사건의 중심은 곧바로 매티 양으로 넘어간다. 사실 여기서 OOO 양하면, 결혼을 하지 않은 미스(Miss)의 개념인데 언뜻 생각되는 것과 같은 젊은 아가씨들이 아니다. 가장 젊은 축에 드는 화자마저도 대략 중년으로 추정되며 대부분 오,육십대의 어찌 보면 할머니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매티 양은 작품 내내 일관된 캐릭터로 등장하는데, 똑똑하고 과단성 있는 언니에 비해 소심하고 내성적이며 말수도 적고 세상사에 대해 경험도 부족하다. 사소한 일에도 결정을 못 내려 갈팡질팡하기 일쑤며 아랫사람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여 쩔쩔매기도 한다. 이루어지지 못한 결혼의 기억을 망각하지 못하고 상처와 추억에 전전긍긍하는 딱한 인물이기도 하다. 즉 순진무구하고 착하기만 초로의 할머니라고 하는 게 딱 어울린다.

 

매티 양과 함께 마을의 사교 클럽을 구성하는 인물들이 폴 양과 포레스터 부인, 후반에 등장하여 파격과 재미를 마을에 안겨주는 레이디 그렌마이어(의사인 평민 호긴스와 재혼하여 호긴스 부인으로 신분 하락을 스스로 선택한다) 등이 있는데, 이들의 일상생활은 지금 관점에서 보면 고리타분하지만 나름 진지하고 심각하며 고상한 예의범절과 관습의 거미줄로 세세하게 얽매여있다. 그네들에게는 정해진 예법의 틀을 무시하고 깨뜨리는 인물이야말로 몰상식하고 지위가 낮은 사람들의 행동으로 인식되므로.

 

특별히 해야 할 일도 없고 반복되는 평온한 일상을 누리는 그들에게 주된 관심은 생계와 생활이 아니다. 비록 넉넉하지 못한 형편일지라도 겉으로는 절대 내색하지 않으며 알더라도 모르는 척 외면해주는 게 그네들의 미덕이다. 그래서 모임에 나갈 때 입을 옷과 모자의 패션을 고르는 일이 중대 관심사가 되며, 사교모임과 파티에서 불러야 하는 호칭과 현관에서의 영접 예절, 음식서빙 방식이 간과할 수 없는 화제가 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내내 계속된다면 그다지 별 볼일 없는 작품이 아니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당대의 (특정한 한 유형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지만 크게 와 닿지 않는 평범한 대중 소설로 말이다. 그렇다면 제인 오스틴을 빗댄 평가는 잘못된 허명(虛名)이란 말인가?

 

후반부에서 주인공 매티 양은 전 재산을 투자한 은행의 파산으로 경제적으로 영락하게 된다. 중산층에서 하류층으로 말이다. 이때 친구들이 몰래 기부형식으로 그녀를 돕기 위하여 여유롭지 않은 형편에서 나름 최선을 다하는 대목은 감동적이다. 게다가 어릴 적 헤어졌던 동생 피터 씨가 귀국하게 되어 그야말로 새옹지마의 인생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모든 게 해피엔딩으로 매조지하는 것 또한 제인 오스틴의 주특기가 아니던가!

 

제인 오스틴은 젊은 남녀 간의 사랑과 결혼을 소재로 하여 당대인의 삶의 단면을 반짝반짝 넘치는 재치로 우리에게 보여준다. 시간이 경과한 현대의 관점에서 볼 때 비록 생활양식은 달라졌지만 오스틴이 제기한 인물들의 행동과 가치관이 빚어내는 고민과 삶의 모습은 여전히 유효하다.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작품 성향과 세계를 이 한 편의 소설로 재단할 수는 없지만 그녀는 남녀 간의 관계보다도 좀 더 시야를 넓혀서 마을 사람들 개개인에 동등한 관심을 쏟고 있다. 그네들의 다양하며 아기자기한 삶들이 부딪쳐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뿌려주는 가운데 슬픔과 기쁨이 어울려 삶의 각 단면을 구성한다. 그러면서 삶은 굴러가는 것 아니겠는가. 제인 오스틴과 마찬가지로 개스켈 또한 사람이 선하고 바르며 따뜻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으면 행복을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작가는 매티 양을 끝내 저버리지 않는 신의를 지킨다.

 

작가가 살던 시대에 이러한 삶의 장면은 보편적인 동시에 서서히 스러지는 옛 영화의 자취이기도 할 것이다. 이미 산업혁명의 파고는 도시화와 기계화를 가속화하고 있으며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어 빈민층들의 참혹한 삶에 대한 인식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작가가 찰스 디킨스와 친분이 깊었음을 상기해보라!) 좋았던 옛 시절 (belle epoch)의 아름다운 미덕들, 그것은 이미 도시에서는 찾기 힘들게 되었고 크랜포드 같은 시골에나 겨우 숨 쉬고 있을 정도이다. 작가는 사라져가는 선인들의 여유롭고 따뜻하며 예의가 갖추어진 인정과 문화를 동시대인과 후대인들의 기억 속에 오롯이 남기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문명화의 거스를 수 없는 대세를 반대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한번 망실되면 회복하기 어려운 소중한 무언가를 간단히 버리면 안 된다고 하면서.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산업화와 도시화가 극적으로 구현된 현대사회의 우리 또한 무관한 남의 나라 옛이야기를 보듯 무심하게 여기기 어려울 것이다. 크랜포드 작은 마을의 잔잔하며 소소한 이야기가 더더욱 마음을 울리는 연유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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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이유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제인 구달 지음, 박순영 옮김 / 궁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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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 모 방송사의 느낌표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적으로 알려진 책이다. 침팬지 연구가로서의 저자의 이력으로 기본적으로 침팬지 연구서로 추정하였다. 실제로는 제인 구달의 삶과 연구의 여정과 발견을 기술한 책으로서 저자가 침팬지 연구를 통해서 깨닫고 인간에게 제시하는 성찰과 통찰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저자는 영적인 자서전이라고 자술한다.

 

유명인들이 노년에 자신의 삶을 화려하게 치장하는 그저 그런 책이 아닐까 의구심이 떠올랐다. 더구나 제인의 침팬지 연구와 아프리카 행을 어릴 적부터의 운명으로 연결 짓는 대목에서 특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초의 미미한 연관을 침소봉대하여 운명론적으로 합리화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이러한 색안경은 책장을 넘김에 따라 자신의 삶과 침팬지 연구를 교차시키면서 담담하게 기술하는 문장에 서서히 젖어들면서 어느덧 사라져버렸다. 저자는 자신의 약점과 개인적 불행과 가족의 비극을 숨기거나 한치의 과장도 덧대거나 포장하지 않으면서 시종일관 스스로에 대해 겸손한 자세를 취한다.

 

제인이 침팬지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개방된 마음, 지식에 대한 열정, 동물에 대한 애정, 그리고 지극한 인내심을 가진 사람이었고 근면하고, 긴 시간을 문명 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져 지낼 수 있는 사람”(P.86)이었기 때문이다.

 

책의 내용을 통해 침팬지 생태에 대한 연구의 연원이 그리 오래지 않았음과 제인 구달이 거의 시초임을 여기서 알게 되었다. 더욱이 침팬지가 도구를 사용할 줄 안다는 점은 오늘날 코흘리개들도 아는 사실인데 당시에는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는 것이 오히려 흥미롭게 다가온다.

 

저자는 전통적 방법론에 따라 과학 공부를 하지 않았다. 게다가 일찍부터 종교와 신비주의, 명상, 영적인 체험에 상당한 관심과 무게중심을 두었으며 내내 변치 않는다. 이런 점에서 초월적 객관성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전통적 과학론에서 비판을 받지만 반대로 대상은 관찰자의 감정과 태도에서 자신을 온전히 드러낼지 아니면 감출지를 판단한다. 이것이 관찰 결과에서 커다란 차이를 좌우한다. 제인은 이렇게 기술한다.

 

이 지능적인 존재들에 대해 내가 이해가고 있는 것 대개는 감정 이입을 함으로써 비로소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P.114)

 

이러한 제인의 입장은 우리 눈에는 지극히 동양적 관점에 맞닿아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동질감과 친밀감마저 느끼게 된다. 생명의 존재 목적과 이유, 개체를 통한 전체의 이해와 책임의 각성. 이것은 인간을 타 생물과 구분되는 상위의 존재로 설정하고 군림과 지배를 당연시하는 관점이 아니다. 타 생명 역시 인간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지구 생태계의 소중한 일원이다. 인간은 전혀 자신을 오만하게 여겨야 할 근거가 없다.

 

물론 우리는 독특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온 것처럼 동물 세계의 다른 동물들과 그렇게 많이 다르지는 않다.” (P.278)

 

인간이 유인원에서 분화하여 별개의 종으로 진화한지 기껏 기백만 년에 불과하고 스스로를 우월하고 잘난 존재로 여기게 된 지 불과 수천 년 남짓하다.

 

제인은 아프리카 곰베에서의 생활에서 거의 완전한 만족과 행복을 누린 듯하다. 이런 평화는 항상 그러하듯이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는데, 유년 시절에 제2차 세계대전을 겪고 홀로코스트에 충격을 받은 제인은 탄자니아에서 침팬지 관찰을 하는 도중에 원치 않게 콩고와 부룬디, 르완다에서 발생한 종족 분규와 학살에 가까이 직면하게 된다.

 

인간이라는 종은 태생적으로 폭력성을 타고난 것인가? 이는 어떠한 수단으로도 결코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뿌리박힌 치명적인 결함인가? 침팬지를 지극히 사랑하는 제인이지만 침팬지 무리에 내재한 폭력성의 뿌리를 놓치지 않는다. 그녀에 따르면 고상한 유인원의 신화는 없다. 마음 아프지만 진실에 눈 감을 수는 없다. 폭력성은 모든 영장류의 피에 내재하는 숙명인가? 그녀는 끊임없이 자문한다.

 

인간은 본능을 뛰어넘어 두뇌를 악의적인 목적으로 의도하여 사용할 수 있다. 침팬지 같은 동물의 단순한 폭력적 본능과는 층위의 수준이 다르다. 인간의 폭력성과 동물의 그것과의 상이점이 여기에 있다.

 

책 중반부는 저자가 인간 사회의 폭력성의 원인 탐구와 이의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인간사회의 폭력성의 뿌리를 설명하는 기본 개념으로 의사종분화(pseudospeciation) 또는 문화적 종분화의 개념이 등장한다. 후자의 개념 정의가 쉬운 이해에 더 도움이 되었다.

 

의사종분화란......개별적으로 습득된 행위가 특정한 집단 내에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간이 지나면 이것은 그 집단의 집합적인 문화가 된다.” (P.171)

 

문화적 종분화가 극단적으로 되면, 외부 집단의 구성원들을 비인간화하고, 나아가서 그들을 거의 다른 종의 구성원으로 간주하게 할 수 있다. 이것은 집단 내에서 작동하는 금지와 사회적 제재로부터 구성원들을 자유롭게 하고, 집단 내에서 허용되지 않는 행동을 타자들에 대해서는 할 수 있도록 한다. 저울의 한편에는 노예제와 고문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비웃음과 사회적 매장이 있다.” (P.172)

 

불행하게도 문화적 종분화는 전세계에 걸쳐 인간 사회에서 고도로 발전되어 왔다. 선별된 내부 집단들을 만들어 민족적 배경, 사회 경제적 지위, 정치적 확신, 종교적 믿음 등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을 제외시키려는 경향은 전쟁이나 폭동, 갱 폭력, 그리고 다른 종류의 분쟁들을 야기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이다.” (P.174)

 

제인은 문화적 종분화가 인간의 도덕적 성장을 저해하고 사회적 평화를 방해하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지적한다. 이 개념으로 작금의 우리 사회를 한번 보자. 종교 대립과 지역 갈등, 학연과 혈연의 고착화, 우리와 그들의 구분. 학생들 사이의 왕따 현상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를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좌우 이데올로기의 충돌은 어떠한가? 문화적 소집단이 개인에게 제공하는 안전과 위안의 장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요는 동호회와 친목회가 배타적 이익집단으로 기능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집단구성원의 강한 결속력을 요구하면서 집단 경계 밖의 타자에게는 차별이 당연시하도록 인지를 왜곡시킨다. 나치의 유대인 차별과 홀로코스트가 전형적인 사례다.

 

하지만 제인은 인간에 대하여 긍정적인 시선을 포기하지 않는다.

 

절반은 죄인이고 절반은 성자인 우리 인간 영장류는 고대로부터 물려받은 두 가지 상반된 성향, 즉 폭력에 이끌리는 한편 동정심과 사랑을 느끼는 성향을 지니고 바로 여기에 서 있다.” (P.185)

 

우리가 공격적인 충동을 따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다행스런 일이다......나는 정교한 지성으로써 자신이 감당해야 할 당시의 대가뿐만 아니라 장래의 대가들을 다 알면서도 희생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인간뿐이라고 확신한다.” (P.188)

 

제인은 도덕적 진화라는 개념에서 희망의 끈을 찾는다. 인류는 생물학적 진화만 거듭해 온 것이 아니다. 도덕적인 면에서도 본능에서 고상한 수준으로 상승하고 있다. 다만 도덕적 진화는 진전이 느리기에 생물학적 진화와 불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분명 도덕적 진화는 짧은 기간에 큰 성취를 이룩했지만 현대 사회와 같이 문화적 종분화가 극심해지는 상황에서 절실한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더 높은 수준으로의 진화는 단기간 내에 실현을 기대하기 힘들다.

 

수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지구상에 서서히 생겨나고 생존해 온 우리 인류가, 이제 덜 공격적이고 덜 호전적이며 점차 배려하고 공감하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는 도덕적 자질들을 획득해가는 과정에 있다.” (P.239)

 

우리가 도덕적 진화를 가속화하고 인간의 운명에 조금이라도 빨리 도달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우리 모두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인간 존재로부터 성인으로 진화해야만 한다. 당신과 나 같이 범상한 사람들은 성인, 적어도 작은 성인이 되어야만 한다.” (P.251)

 

신을 믿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 즉 무신론자들은 어떠한가? 내 생각에는 다를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인간성에 봉사하고,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사랑과 존경으로 대하는 삶이야말로 성자와 같은 행동의 정수인 것이다.” (P.254)

 

나는 우리 인간들이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도덕적인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나도 잘 알고 있듯이,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래서 나는 단지 한 사람 한 사람이 조금씩이라도 더 성인다워지도록 노력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P.255)

 

제인은 인간이 작은 성인이 되어야 한다고 외친다. 개개인이 도덕적으로 뛰어난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할 때 도덕적 진화는 앞당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그녀의 어조는 차라리 종교적이다.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비관적 전망과 희망의 기대가 엇갈려 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실적인 차원에서 실행가능성이 높은 것은 차라리 동물 학대 금지와 존중이라는 인도적 방책의 추구라고 하겠다. 제인은 궁극적으로 동물 실험을 없앨 것을 주장하며, 채식까지는 나아가지 않더라도 비인도적 환경에서 양육되는 동물들의 처지를 개선하고자 애쓴다. 그것은 동물들뿐만 아니라 (불가피하게 육식을 해야만 하는) 인간 자신의 온전한 생존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그녀도 현실이 녹록치 않음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운명의 시간은 가속적으로 다가오고 있는데 우리들의 대응은 미적지근하기 그지없다. 자칫하면 인간이라는 종은 자신들만 그치지 않고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와 함께 동반자살을 감행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녀는 변화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여전히 품는다.

 

내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네 가지이다. 인간의 두뇌, 자연의 회복력, 전세계 젊은이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또 타오르게 할 수 있는 에너지와 열정, 그리고 마지막으로 불굴의 인간 정신이 그것이다.” (P.289)

 

바울이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기독교의 사도가 된 것처럼 제인 구달은 시카고 학술대회를 계기로 침팬지 연구가에서 동물보호론자, 나아가 환경보호론자 및 문명비판가로 변모하였다. 자신이 사랑하는 침팬지 종의 생존을 보호하는 길은 우리 인간과 사회, 문명의 전반적 반성과 개선이 없으면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점을 깨달았던 것이리라. 또한 우리 인간이 스스로 각성하지 않는다면 나아가 인류의 미래마저도 밝지 않으리라는 사실도 제인은 꿰뚫어보았다.

 

제인의 변모의 배경에는 생명에 대한 사랑이 기저에 자리잡고 있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남도 사랑할 수 있다.

 

우리가 사랑해야만 하는 자신은 우리의 자아도 아니고, 아무 생각도 없이 이기적으로, 그리고 때로는 불친절하게 행동하고 돌아다니는 일상인도 아니다. 우리 각각의 내면에 있는 창조주의 일부인 순수한 영혼의 불꽃, 즉 불교도들이 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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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 - 굳게 닫힌 연인의 마음을 여는 열쇠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4
제인 오스틴 지음, 조희수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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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제인 오스틴에게,

 

어느덧 당신을 만날 수 있는 마지막 때가 다가왔군요. 당신의 글을 통해서 심오한 사상의 무게와 현학적인 문구의 더께에 짓눌려 문학과 책읽기의 즐거움을 새삼 깨닫게 된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일상 속의 진리, 평범 속의 비범이라는 문구는 다소 상투적이지만 그래도 제 심경을 비교적 온전히 전달해주는 표현입니다.

 

이 소설은 당신의 완성된 작품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집필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40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만큼 초기작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를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확실히 그렇게 보입니다. 작가 자신의 모습이 짙게 투영된 작품이라고 하면 오독일까요? 주인공의 나이 설정에서 확연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작중 앤의 나이는 27세입니다. 이전 당신 작품 속 여주인공의 나이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을 벗어나지 않았지요. 그건 당시 여성들의 결혼 적령기를 반영하고 있어서입니다. 그래서 한 작품에서는 여성의 나이가 20대 초반에 이르자 여성의 엄마가 안절부절 못하는 장면도 나타나지요. 그렇다면 앤은 당대 기준으로는 노처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정도라면 30대 중반 정도? 한 평생 독신으로 지낸 당신으로서는 꽃다운 나이의 여성에게만 사랑과 결혼의 행복을 안겨주기에 싫증이 났던가요 아니면 불현 듯 자신의 체험을 통해 적령기를 벗어난 여성에게도 배려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앤은 첫사랑과 결혼에 실패하였습니다. 주변의 반대가 심한 까닭에 당시 어린 그녀는 이를 감내할 용기가 부족했지요. 덕분에 그녀의 전성기는 빠르게 지나가고 말아서 이제는 시들고 야위어 버린 상태가 되었습니다(P.13). 지금의 그녀라면 과거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만일 그 당시의 자기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젊은 사람으로부터 조언을 부탁 받는다면, 장래의 불확실한 행복을 위해 현재의 고통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P.44)

 

여기서 앤의 성품을 되짚어봅니다.

 

마음씨가 곱고 성격이 온화해서 진정으로 남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들로부터는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말이다.” (P.13)

 

남의 마음을 사로잡는 그녀 특유의 상냥함과 품위는 곧 효력을 발휘해서......” (P.137)

 

앞의 회한과 위의 성품을 통해 독자는 앤이 드물게 보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갖춘 여성임을 알게 됩니다. 그녀의 가족인 엘리엇 가문의 다른 구성원에게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자질이지요. 앤은 어릴 적 자신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습니다. 후에 웬트워스와 사랑을 재확인하고 결혼을 진행할 때 단호한 결정을 내린 것은 당연합니다.

 

앞선 작품들과 구분되는 특징의 또 하나는 소위 가문에 대한 집착의 경시와 행복한 가족의 요건에 대한 당신의 뚜렷한 주장입니다. <오만과 편견>에서 다아시의 주저와, <엠마>에서 엠마가 강조했던 신분과 가분에 대한 강한 의식은 여기서 희화화됩니다. 앤의 아버지인 월터 엘리엇 경이 준남작 명부만 꺼내 읽는 소설의 첫 대목이 이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내면에는 눈과 귀를 닫은 채 오로지 껍데기뿐인 작위와 가문만을 따지는 당대의 관행에 일침을 가하고 있지요. 앤이 그나마 긍정하는 것은 내실과 품위가 뒷받침되었을 경우의 가문일 따름입니다.

 

그녀는 신분이나 친족관계 문제에 대하여 대체로 하찮게 여기고 있지요(P.204). 오히려 그녀는 가족들이 한수 아래 낮추어보는 머스그로브 가족에게서 참된 가족의 모습을 찾고 있습니다. 앤은 자신의 집안에서 무관심과 냉대의 대상입니다. 가족 간에 애정이 없기 때문이죠.

 

집안에서 그녀의 말은 무시당했으며, 그녀의 편의는 언제나 맨 마지막으로 고려되었다. 그녀는 그저 앤에 불과했던 것이다.” (P.13)

 

그럼 앤은 여기 머물러 있는 편이 낫겠구나. 바스에서는 앤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을 것 같으니까.” (P.49)

 

이건 진심입니다. 앤은 부인과 비교할 때 저에게 아무것도 아니에요.” (P.199)

 

이런 그녀에게 있어 아웅다웅 하지만, 전적으로 애정과 신뢰에 기반을 둔 머스그로브 가족에게서 부러운 화목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하지만 앤은 갑자기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탐탁지 않고 불편하더라도 모든 일은 같이 알고 행해야 한다는 것, 그게 바로 머스그로브 가의 오래된 관습이었던 것이다.” (P.115)

 

앤과 웬트워스 간 관계의 회복과 진전에 대한 장밋빛 암시는 오랜만의 재회 및 상면 장면부터 등장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행복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웅크리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P.85)

 

두 연인이 사랑이 식어서 헤어진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외부적 여건에 의해 장기간 이별상태에 놓였다가 재회하게 됩니다. 두 사람 모두 아직 결혼하지 않은 채 그대로입니다. 이때 두 사람의 심경은 그새 애정이 식었든지 아니면 재 속의 불씨처럼 계기만 있으면 활활 타오르지 않겠습니까. 처음엔 어색하고 서먹서먹하겠지만 상대방의 마음이 여전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달라지겠죠. 웬트워스의 태도처럼 말입니다. 그의 가슴 속은 깊디깊은 회한으로 가득합니다.

 

저는 제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굳건하게 지키라는 겁니다.” (P.121)

 

그는 사랑을 두려워합니다. 친구인 벤윅 대령의 사랑에 빗대어 진실한 사랑의 절대성을 다음과 같이 옹호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깊고 지순한 사랑이 그리 쉽게 포기될 수 있는 거죠? 무언가 잘못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웬트워스가 듣게 된 앤의 진실한 사랑관은 웬트워스 자신의 것과 판박이와 같습니다. 다음의 말을 듣게 된 웬트워스가 앤의 진심을 알게 되고 사랑의 감정에 자신을 맡기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겠죠.

 

분명히 여자들은, 남자들이 여자를 잊어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남자를 잊어버리지 못합니다. 그것은 여자들의 미덕이라기보다 운명이에요.” (P.322)

 

남자들은 분명히 사랑하는 사람이 있거나 소중한 대상이 있을 때 자기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고 보호하고자 하겠지만, 여자들은 그 대상이 사라진 후에도 사뭇 오랫동안 잊지 못하고 가슴속에 간직해 둔다는 거죠.” (P.326)

 

이전 작품들에서 미스 제인 오스틴 당신은 다소간 우여곡절은 있지만 만남에서 결혼까지 멈춤 없는 사랑의 과정을 전개하였습니다. 읽는 이로서는 매우 흐뭇한 일이지만 사실 이상적인 연애와 결혼의 단계라고 하겠습니다. 실제 남녀 간의 사랑에는 굴곡이 존재합니다. 사소한 견해차가 나비효과를 발휘하여 이별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이 작품에서 당신은 단절된 사랑의 재결합을 다룹니다. 신분과 재산의 격차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 헤어졌음에도 잊지 못하고 결국 합치게 되는 사랑. 이것은 공상적이지만 오히려 더욱 현실적이기도 합니다. 사랑에는 기쁨보다는 더 많은 슬픔과 괴로움이 존재합니다. 그러기에 사랑을 노래한 많은 예술가들이 행복한 연인의 얼굴에 눈물을 그리는 게 아닐까요?

 

남성도 그러하지만, 여성에게 있어 사랑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습니다. 앞서 앤의 미모의 절정기는 금세 지나가서 쇠락한 모습으로 보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앤이 웬트워스를 의식하면서 아름다움을 되찾아 새벽이슬을 머금은 청초하면서도 눈부신 자태를 가진 여성으로 변모하였습니다.

 

아침바다의 상쾌한 바람 때문이었을까? 그녀의 눈에는 생기가 넘치고 얼굴에는 싱싱함이 가득 고여 있었다. 단정하면서도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은 마치 예전의 앤 엘리엇의 잔영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고 있었다.” (P.143)

 

남녀 간 애정사를 포함하여 사람 간의 진실한 관계는 외풍에도 흔들림 없는 단단한 사랑과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그것은 시작인 동시에 끝이기도 합니다. 당신의 <설득>에서 제가 발견한 삶의 미덕이랍니다.

 

이제 미스 제인 오스틴 당신과 헤어질 때가 되었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작품을 다룬 책을 읽어볼까 했지만 부질없는 것 같아서 그만두었습니다. 웬만해서는 재독을 하지 않는 성향으로 당신 소설들을 다시 읽을 가능성도 희박합니다. 즐겁고 아름다운 추억은 가슴 속에 묻어둘 때 더욱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저도 당신과 당신이 창조한 인물들의 기억과 상념을 품에 안은 채 여기서 작별 인사를 합니다.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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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박철 옮김 / 시공사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 돈키호테 1부를 읽은 후의 짤막한 상념들

 

먼저 이 촌평은 114일에 쓴 것이다. 한동안 뭉그적거리다 마음을 다잡고 단숨에 초고를 어지럽게 적어놓았는데, 일단 생각난 바를 대강 쏟아놓은 후 차츰 틀을 잡아 정리를 해나갈 의도였다. 하지만 세상사가 어디 생각대로 되던가. 어찌어찌 하다가 차일피일 미루게 되고 보니 두 달쯤 시간이 경과하게 되었다. 다시 읽어보니 한심할 정도로 형편없게 느껴지지만 이제 독서에 대한 상념도 오락가락 하는 사정인지라 다시 가다듬는다는 게 터무니없을 것 같아 그냥 초고 그대로를 수록한다. 그래야 책상 한구석에 놓인 책도 치울 수 있을 것이며 내 마음도 찜찜함을 덜 수 있을 것이다.

 

      

1. 구입한 지 거의 십년이 다되어 읽다. 그리고 읽은 지 3개월가량 지나 겨우 촌평을 쓰다. 아니 이것은 촌평이 아니라 차라리 넋두리다. 백에 구십구 인이 좋다고 하는데 이에 공감하지 못하는 일인이 어디에 하소연할 데도 없어 속으로 끙끙거리다가 조심조심 토로한다. 임금님 귀의 진실을 숲에서 외치는 심정으로.

 

2. 중학교 때 헌책방에서 구한 삼성판 세계문학전집의 돈키호테를 읽었는데 너무 오래되어 머릿속에 아무런 기억도 남아있지 않다.

 

3. 굉장한 기대를 가지고 완독을 마친 소감은 흠, 글쎄, 뭔가 미진함. 솔직히 썩 만족스럽지 않다. 그 이유를 생각해본다.

 

4. 돈키호테를 제외한 국내 번역된 세르반테스의 주요 작품들은 거의 읽었다. 다른 작품들은 무척이나 흥미롭게 느껴졌다. 세르반테스의 어법에 친숙하지 않아서라는 비판은 적절치 않다.

 

5. 역으로 세르반테스를 여럿 읽은 게 돈키호테의 매력을 감소시킨 게 아니었을까? 아니다. 그렇다면 돈키호테는 세계문학사상 첫손 꼽히는 불후의 명작의 자격이 없다. 고전과 명작은 다른 작품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독자적인 아름다움과 가치를 지닌다.

 

6. 돈키호테의 뛰어남을 알아채지 못한 지적 수준이 낮은 독자에게는 책임이 없는가? 확실히 그럴 수도 있다. 문학 작품, 특히나 돈키호테처럼 해학적 재미를 전면에 내세우는 소설의 경우 분석보다는 자체의 감흥을 중시한다. 문학의 가치는 일차적으로 감동(감명 또는 재미도 포함해서)이다. 분석과 비평은 후순위다.

 

7. 혹시 망설이지만 번역 상의 문제는 없을까? 이 대목에서는 조심스러워진다. 번역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스페인어문학자이며 세르반테스 연구가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도 그가 번역한 세르반테스의 작품에서 불만을 느낀 적이 없다. 한 가지 걸리는 점은 있다. 이것은 그의 전적으로 단독 번역이 아니라 대학원생들과 합동 번역이라는 점이다.

 

다른 이야기지만, 삼국지연의 번역에 있어 많은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는 김구용 번역본을 선호하지 않는다. 한줄 한줄 원문에 최대한 가깝게 꼼꼼하게 번역한 점은 평가할 만하지만, 읽다 보면 내가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읽는 건지 아니면 한문 고전을 읽는지 헷갈린다. 삼국지연의는 대중들을 위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면에서 이 책에서도 번역 자체에는 흠잡을 만한 부분이 별로 없다. 다만 어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돈키호테는 출판 후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서 무수한 아류본을 양산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대중 친화적인 작품이라면 정통 고전 어투가 아니라 통속적이며 구어체적 요소가 강했을 것이라는 게 무리한 추론은 아니리라.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완전히 배치된다.

 

결국 이 사항은 다른 번역본을 읽어야만 비교가 가능하다. 민용태 번역본을 잠깐 훑어보았다. 단독 번역에 구어적 어투를 반영하고 있다. 차후 이 번역본을 읽고 나서도 별다른 반응이 일지 않는다면 전적으로 독자의 함량 미달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판단 불가 상황이다.

 

8. 내용상으로 볼 때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이 눈에 들어온다.

 

1) 마르셀라 이야기 (P.168~169)

 

아름답기에 사랑받는 사람이 자신이 사랑받는다는 이유로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듭니다.”

저는 자유롭게 태어났고, 또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해 초원에서의 고독을 선택한 것입니다.”

 

사랑을 거절당한 그리소스토모가 죽자 친구 암브로시오는 마르셀라를 비난한다. 이에 대한 마르셀라의 답변은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논리정연하다. 마르셀라의 외침은 여권주의의 구호를 수백 년 앞서 선구적이다.

 

2) 죄수들을 풀어준 이야기 (P.267)

 

강제로라고? 아니 국왕 폐하께서 무슨 일을 강제로 시키는 게 가능하단 말이냐?”

죄목이 어떻든지 간에 이 사람들이 가고 있는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강요라는 것 아니냐?”

 

돈키호테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최우선시하고 있다. 국왕일지라도 의지에 반하여 강제로 형벌을 부과할 수는 없다. 사회 정의를 무시하는 발언인 듯하지만, 여기에는 정당성을 갖지 못한 기득권층과 지배층의 강압에 대한 반발심이 내재된 것이다.

 

3) 둘시네아 공주의 숭배 이유와 돈키호테의 이성 (P.327)

 

내가 둘시네아 델 토보소 공주님을 사랑하기에, 그분은 나에게 지상에서 가장 고귀하신 공주님인 것이다......나 역시 알 돈사 로렌소라는 훌륭한 아가씨를 아름답고 정숙하다고 생각하고 믿으면 그걸로 충분한 거야.....그저 내가 그녀를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공주님이라고 생각하면 될 뿐이다.”

 

돈키호테가 광기에 빠져서 농부 여인을 공주로 착각하여 숭배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에게는 누군가 공주로 여겨서 숭배할 대상이 필요했던 것뿐이다. 이를 광기로 치부하지 말자.

 

돈키호테의 말마따나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상대방을 실제 이상으로 뛰어나고 아름답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흔히들 콩깍지가 씌웠다고 하지 않는가. 주변에서 보기에는 어처구니없는 연인들도 부지기수다. 이들을 미쳤다고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자가 오히려 미친 사람이다.

 

4) 기사소설에 대한 작가의 견해 (P.438)

 

기사소설에서 말하는 그 어떠한 기사들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소. 그 모든 것들은 한가로운데 창의력만 있는 사람들이 각색하고 꾸며낸 이야기이며, 일꾼들이 그 책들을 읽으면서 즐거워하는 것처럼 시간을 보내며 기분을 전환할 목적으로 만든 것이오. 내 정말 당신에게 장담하건대, 그러한 기사들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러한 무훈이나 터무니없는 사건들 역시 이 세상에서는 단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소.”

 

돈키호테의 표면적 집필이유는 유행하던 기사소설의 허구와 폐해를 알리기 위해서다. 이 부분은 이러한 집필이유가 명확히 드러난 대목이다. 15세기 스페인은 기사도 소설의 전성기였다. 이는 기울어가는 황금세기의 번영과 사치 아래 심화된 사회적 계급적 갈등을 짐짓 덮어두는 역할을 하였다. 이에 대한 반발이 피카레스크 소설이며, 돈키호테 역시 독자적인 방식으로 인간의 허위와 사회적 모순을 폭로하고 있다.

 

5) 종교 경찰과 돈키호테의 대치 (P.639)

 

이리 오너라, 천박한 놈들아. 쇠사슬에 묶인 자들에게 자유를 주고, 붙잡힌 사람들을 풀어주고,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넘어진 사람들을 일으켜주고,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는 사람을 너희들은 노상강도라고 부르느냐? , 야비한 놈들 같으니라고......이리 와라. 종교 경찰이 아닌 도둑놈들 같으니라고. 종교 경찰의 면허를 갖고 있는 노상 강도놈들아, 말해봐라.”

 

광인이 아니면 당대 스페인에서 종교 경찰에게 감히 욕설을 퍼부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종교 절대주의가 지배하며 이단으로 선언되면 화형에 처해지는 사회. 여기에서 개인의 신체와 양심의 자유는 어불성설이다. 돈키호테가 당대인들에게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던 이유 중 하나는 이렇게 범인들은 내뱉을 수 없는 불만들을 대놓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었던 데 대한 일종의 대리만족이 아니었을까.

 

6) 산초 판사가 돈키호테를 따르는 이유와 그의 이성 (P.660)

 

저는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바람들지 않았습니다. 왕이라 해도 바람을 넣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접니다......저는 섬을 원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더 나쁜 것들을 바랍니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일한 만큼 얻는 법입니다. 인간인 이상 누구나 교황도 될 수 있고, 섬의 영주도 될 수 있습니다.”

 

돈키호테와 마찬가지로 광기에 빠졌다는 말에 대해 산초 판사는 이렇게 반박한다. 누구나 불가능한 것을 꿈꿀 자유가 있고 때로는 그것이 삶의 목표와 활력이 되기도 한다. 매주 로또 복권을 구입하며 인생역전을 꿈꾸는 가난한 직장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산초 판사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다. 그런 그가 돈키호테를 따르는 것은 반복되는 현실에서 탈피하여 망상에 가까울 수 있지만 보다 큰 꿈을 꾸기 위해서다.

 

7) 당대 연극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인식 (P.668~671)

 

연극이라는 것은 인간의 삶의 거울이며 관습의 표본이며 진실의 상이 되어야 하는데 지금 상연되고 있는 것들은 엉터리의 거울이고 우둔함의 표본이며 방탕함의 상입니다.”

훌륭한 연극을 보면 관객은 속임수를 즐기고, 진실을 배우며, 사건에 감동하고, 이성을 통해 분별력을 갖고 심한 속임수를 알아차리고, 모범적인 일에 명민해지며, 악에 분개하고 미덕을 사랑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8) 광인 돈키호테를 바라보는 세인들의 인식 (P.703)

 

그는 돈키호테의 얼굴에 비오듯 주먹질을 해댔고, 그 가련한 기사의 얼굴은 목동처럼 피투성이가 되었다. 교회법 연구원과 신부는 웃음을 터뜨렸고, 경찰들은 즐거워 들썩들썩하면서 싸우느라 얽혀 있는 개들을 부추기듯 두 사람의 싸움을 부추겼다. 산초 판사만이 절망에 빠졌는데, 주인을 돕지 못하게 괴롭히는 참사원의 조수를 내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서로 때리고 쥐어뜯으며 싸우는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환호와 축제의 분위기였다.”

 

이것이 소위 이성을 갖춘 정상적인 사람들의 작태다. 그들은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를 광인 취급하며 일말의 동정심을 품고 있지만 내면 한편에서는 기묘한 볼거리이자 놀림거리로 여기고 있다. 돈키호테의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신부와 이발사도 예외는 아니다. 여기서는 산초 판사가 오히려 이성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광인은 누구고 제정신은 누구란 말인가. 세상이 술에 취해 있는데 홀로 깨어난 사람은 미쳤는가 아닌가.

 

9) 작품해설

 

작가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정상인이 아니라 광인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광인의 입을 빌어서 당시 교회와 성직자 귀족 등을 유머러스하게 풍자하고 조소함으로써 검열관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 (P.720)

 

세르반테스의 문학에는 사회 구석구석에 살고 있는 인문들이 모두 등장한다. 이제 세르반테스 시대의 사회는 귀족이나 부유한 상류층들만이 아니라 하류계급의 건달, 매춘부, 깡패, 이교도 등의 세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세르반테스는 하류계층의 인간들도 우리의 이웃이며, 이 세계를 꾸려가는 중요한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이는 현대소설의 특징을 보여준다.” (P.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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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18
시마자키 도손 지음, 노영희 옮김 / 소화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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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한창이던 어느 날 문득 서릿발 같은 바람도 잠잠해지고 하늘도 맑게 갠데다 제법 햇볕도 온화한 기색이 깃들인다. 성미 급한 봄꽃들은 이제야 봄이 진군을 시작했나보다 서둘러 꽃망울을 터뜨리거나 부풀리기에 힘쓴다. 다음날 언제 그랬냐는 듯이 혹한이 휘몰아치고 칼날 같은 위세에 절로 옷깃을 여미기에 급급해진다. 여린 꽃잎들은 그대로 얼어서 바닥으로 떨어져버리고 봄을 머금은 망울은 속절없이 얼어붙은 채 겨우내 소망이 부질없어진다. ,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던가. 아직 진정한 봄은 이르지 않았건만 봄을 기대하는 어린 영혼들은 거리에 뛰쳐나가 꽃샘추위에 몸을 덜덜 떨고 만다. 시마자키 도손의 <>을 읽는 심정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세 가지의 봄을 다루겠다고 공언하였다. ‘이상의 봄예술의 봄인생의 봄. 작가의 말이 어느 정도나 실현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내가 보는 견지에서는 전혀 다루어지지 않았다. 아니, 이 소설은 봄 자체를 그린 소설이 아니다. 한겨울에 봄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하는 젊은 영혼들의 울분과 좌절을 기술한 소설이라는 게 보다 적합한 의견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전편을 면면히 흐르는 기조는 어둡고 차분하면서 가라앉은 분위기다. 멀리서 봄이 다가오고 있지만 아직은 전혀 알 수 없기에 희망도 빛도 보이지 않는 젊은이들. 기시모토의 방랑과 아오키의 발병으로 가시화된 겨울의 절정은 기시모토의 이루지 못한 죽을 결심과 아오키의 자결로 이어진다. 현실의 생기에 넘치는 봄과 인물들의 대비가 강렬하다.

 

방 밖에선 오후의 햇볕이 반짝이며 넘실거려서 왠지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먼지투성이가 된 거리의 수목들조차 지금은 새로운 잎으로 갈아입을 때로, 그 푸르고 밝은 색은 바라보기만 해도 눈부셨다. 모든 만물은 생기에 넘쳐 몸부림치고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견디기 어려운 계절이었다.” (P.229)

 

작품 전편의 주인공은 물론 기시모토 스데키치지만, 그의 비중은 전반부에서 그리 두드러지지 않는다. 전반부에서는 그의 문학적 친우들인 아오키, 스게, 이치카와의 신변과 사고가 보다 흥미롭게 그려져 있다. 특히 아오키의 굵고 짧으면서도 강렬한 삶은 인상적이다.

 

아오키를 비롯한 친우들의 소망은 근대화를 추구하는 19세기말 당대 일본이 문학과 예술을 포함한 문화 및 지성에서 보다 개화되고 계몽된 사회로 발전해 나가도록 자신들이 일조를 하고 그 성취를 목도하는데 있다. 하나 뿌리박힌 인습과 고루한 편견에 사로잡힌 세인들을 일거에 문화인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과업이었으면, 그들의 몰이해와 저속함에 고매한 이상과 깊은 감성을 지닌 젊은 영혼들의 좌절은 예견된 결과나 다름없었다. 세상은 그들이 자신들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도록 용인하지 않는다. 그렇게 아오키는 분투하다가 꺾였”(p.264)으며, 다른 친우들도 각자 나름의 행로를 밞아나가게 된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지를 생각해야만 된다. 10, 20년 뒤에도 보일지 어떨지 모르는 청년의 꿈을 지금 보려고 해 봤자 그렇게 세상이 허락하지 않는다.” (P.300)

 

함께 젊은 생명의 싹을 피우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같은 마음이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벌써 너는 너, 나는 나라는 식으로 각자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을 때는 왠지 슬펐다.” (P.306)

 

작중에서 기시모토의 방황은 분명한 사유를 드러내지 않는다. 은인의 집에서의 가출과 두 번에 걸친 방랑이 참을 수 없는 당대에 대한 반기의 의사표시 또는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처절한 위안의 발로라고도 이해하기 어렵다. 이 작품 <><파계>의 성공 이후 발표된 작품임에도 그의 중요 작품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단초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전편을 관통하는 기시모토의 애매한 행위의 모호한 동기. 반면 기시모토의 심경을 다르게 파악해 볼 수도 있다. 그는 작중에서 문학과 미술에 다소간 재능을 가졌으며 원체 다정다감하여 눈물을 곧잘 흘리며 연약한 의지력을 지닌 인물로 내성적이고 소심하며 말수가 적은 것으로 묘사된다.

 

전반부의 열의에 찬 청년들의 격정적이며 확고한 목소리와는 대조적으로 후반부에서는 무게중심이 기시모토의 진퇴양난의 처지와 우유부단한 내적인 고민으로 침잠한다. 맏형의 수감으로 졸지에 집안 생계를 떠맡게 된 기시모토의 분투와 괴로움. 사회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는 아직 미숙한 청년에 불과하며 삶의 최전선에 뛰어들고자 하는 의사도 취약하다. 그는 알고 있다. 자신마저 포기하면 가족들은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기시모토는 가쓰코의 죽음을 듣고 더욱 침울해졌다. 어느 때는 일할 마음도 없었다. 때로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머니가 있었다. 형수가 있었다. 불행한 형이 있었다. 아이코가 있었다. 그가 일하지 않으면 이 사람들은 먹는 것조차 곤란하다.” (P.294)

 

식구들은 구할 수가 있다면, 나는 어떻게 되어도 좋다.” (P.315)

 

반면 아오키의 분사에 자극받은 그의 정신은 포도청 같은 나날의 생계를 떠나서 확고한 방향을 정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이상과 영혼을 추구하는 길을 걸어가도록 요구한다. 가족에 대한 의무와 개인의 자아실현에 대한 갈망의 상충이 빚어내는 긴장과 갈등, 고뇌와 가쓰코의 사망에 따른 심적인 동요와 상실감은 기시모토를 점점 외지고 깊은 곳으로 가라앉게 만든다. 현실을 도피하고자 과거의 추억에서 위안을 얻으려고 하나 천진한 어린 시절의 허위성만을 깨달을 뿐이었다.

 

이케노하타라면 이전에는 날아서라도 가고 싶은 곳이었지만, 점차 기시모토의 발길이 뜸해졌다. 가도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이야기를 할 수 없었기에 재미가 없었다. 언제나 잠자코 물러앉아 있다 온다.” (P.298)

 

그는 많은 것들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P.316)

 

작품의 말미는 다소간 싱겁다. 그는 센다이의 학교 교사로 떠나갈 수 있게 되었고 그동안 가족의 생활비는 멀리 있는 둘째형도 도와주겠다고 하였다. 그는 이제 마음 놓고 자신의 길을 떠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개인의 독립과 발전을 도와주지 못하는 가족의 족쇄, 꽉 조여 오며 벗어날 길 없을 것처럼 단단한 수갑을 작가는 어이없을 정도로 손쉽게 벗겨낸다. 기시모토의 그동안의 처절한 고민과 심적 전투가 읽는 이로 하여금 무안할 지경으로.

 

, 나 같은 인간이라도 어떻게든지 살고 싶다.” (P.370)

 

끝 대목에서 차창 밖을 스치는 빗소리를 들으며 읊조리는 기시모토의 생각이다. 혹시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청년들이여, 아무리 절망과 좌절이 깊더라도 결코 자신을 버리거나 버리지 말라. 당장은 봄이 이르지 않더라도 어떻게라도 인내하고 버티어 살아가다 보면 가까운 시일에 봄이 성큼 다가옴을 깨닫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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