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베 일족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5
모리 오가이 지음, 권태민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평점 :
모리 오가이의 작품 경향은 독일 유학에서 체득한 근대적 가치관에 근거하여 작품의 테마를 설정한다. 주체적 자아로서의 개인의 발견과 당대 사회 관습과의 갈등 내지 충돌, 그리고 근대적 자아의 좌절. 수백 년간 봉건지배체제 아래서 철저한 신분제와 사무라이 정신의 억압 아래 외면되고 억눌려왔던 개인에 대한 자각이 서서히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남보다 빨리 서양 문물을 접하게 되면서 그는 당대 일본이 얼마나 구체제에 함몰되어 있는지를 깨닫고 문필 활동을 통해 환기와 각성에 진력한다.
<무희>의 엘리스와 <기러기>의 오타마는 이십년의 시간적 간극에도 불구하고 근대적 여성형과 전통적 여성형, 또는 서구적 여성형과 일본적 여성형을 대변한다. 엘리스는 화자인 나, 오타와의 사랑에 적극적이다. 화자의 아이를 임신한 그녀는 노모와 작별을 각오하면서까지 화자를 따라 이역만리인 일본으로 따라갈 각오마저 한다. 화자의 배신에 극도의 분노로 제정신을 상실하게 된 것은 서구여인다운 엘리스의 자아 표출임은 오히려 당연하게 여겨진다.
한편 오타마는 스스로 스에조의 첩으로 들어가지만, 마음에 없는 결혼 생활과 첩의 지위에 대한 세간의 경시는 오타마의 심중을 불편하게 한다. 서서히 오카다에 쏠리는 그녀의 마음은 다소 일방적이라고 하겠다. 오카다의 감정은 단순한 호감의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 반면 오타마의 감정은 애정의 수준으로 발전하여 오카다를 유혹하고 고백할 결심마저 품도록 한다. 오카다의 출국을 뒤늦게 안 오타마는 슬프고 씁쓸함을 느꼈을 테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 내면으로 삭이고 평상시의 삶을 영위하였을 것이다. 그것이 전형적인 일본의 전통적 여인상이므로. 오카다에게 오타마는 “불행한 기러기”(P.209)에 지나지 않는다. 그냥 기러기에게 돌을 던졌는데 맞아 죽은 것과 같이 오카다는 오타마에게 별다른 감정 없이 그저 호감을 표시했을 뿐이었다.
<무희>의 비극적 러브스토리는 독일을 배경으로 한다. 낯선 타국을 배경으로 하여 일본 유학생과 서양여성과의 사랑 이야기는 당대 독자에게 이국적 소회를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작가 자신의 체험을 밑바탕으로 하여 유학시절의 모습이 회고담 형식으로 잘 드러난다. <기러기>는 자신이 공부하였던 도교대학과 그 주변을 배경으로 삼는다. 역시 회고담 형식을 취하는데, 중편 분량에 대학시절, 시노바즈 연못에 이르기까지의 당대 거리 풍경과 인물을 꼼꼼하게 재현하고 있다. 더욱이 고리대금업자 스에조의 치부(致富)와 축첩(蓄妾) 과정, 본처와의 갈등, 오타마 아버지의 삶 등을 통해 당대 사회 풍속의 단면도 치밀하게 보여준다.
모리 오가이는 1912년을 계기로 작품세계에 다소간의 변화를 겪는다. 1912년은 메이지 천황이 죽고 당시 육군대장이 순사한 해다. 이때 이후로 그는 일본의 역사에서 작품 제재를 구하고 주제의식도 보다 일본적인 것에 치우친다. 일본의 전통에서 현대에도 드러낼만한 미덕을 탐사하고자 한다. 어찌 보면 진보에서 보수 성향으로 바뀌어간다고 볼 수도 있다.
<아베 일족>은 일본 무사도에서 두드러진 현상 중 하나인 순사(殉死)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무사도 정신은 철저한 상명하복(上命下服)을 근간으로 하며, 무사의 명예를 목숨보다 중시한다. 명예를 무시당하거나 상실한 무사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으며,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무릅써야 한다.
다다토시가 아이치에몬에게 순사를 허락하였으면 이후의 사단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야이치에몬은 순사 허락을 받지 못한 후 스스로의 의지로 순사를 감행하나 자신은 물론 일족에게도 순사의 명예는 남기지 못하였다. 순사가 무시당하고 일족의 명예가 위태로워진 시점에서 아베 일족의 선택은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새 주군인 다다토시의 아들 미쓰히사에게 죽음을 각오하면서 저항하는 길 밖에 달리 없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만도 못한 치욕만이 그들을 감쌀 것이므로.
군주나 영주든 절대지배체제의 지배자는 만인이 자신에게 절대 복종하기를 바란다. 일체의 딴생각 없이 오로지 충성과 명령 이행만을 기대한다. 누구라도 부하가 개별성을 지니고 독자적 판단과 행동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공적으로는 설사 신임하더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항상 의심과 꺼림이 존재한다. 다다토시가 야베 아이치에몬을 바라보는 심경이 그러하였다. 한비자가 말했듯이 유세만이 아니라 처세도 또한 어려운 법이다.
“야이치에몬은 스스로의 의지로 주군에게 충성을 다했다. 처음 다다토시는 그저 그에게 반대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뿐이었는데, 나중에 그가 스스로의 의지로 일한다는 것을 알고는 미워졌다.” (P.30-31)
순사(殉死)라는 전근대적인 관행이 일본에서 존재하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무사도 정신에 기인한 순수한 충성과 헌신의 표현이 외면적 포장이라면, 기실은 치열한 정치역학이 숨어있음을 여기서 알게 되었다.
“순사해야 한다는 스스로의 결의가 있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당연히 순사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자신은 순사를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있었다.” (P.17)
전대 영주가 세상을 떠나면 총신과 충신들은 상당수가 순사를 택한다. 응당 순사가 마땅한 인물이 순사를 하지 않으면 그는 명예를 상실하고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배척을 당하게 된다. 새 영주의 입장에서도 연배로나 경력으로나 아저씨뻘 되는 노 가신들이 좌우에서 간섭을 하게 되는 경우는 무척 싫을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구호가 여기에도 유효하다. 순사를 하게 되면 명예가 보존되고 유족들에게도 사회적, 경제적 혜택이 보전된다. 순사를 하지 않으면 명예도 잃고 결국 나중에는 유족들도 불이익을 받게 된다. 순사는 꺼려서도 안 되며 꺼릴 수도 없게 된다.
<다카세부네>는 매우 짧고 내용도 간결하며 나타내고자 하는 바도 명료하다. 동생의 자결을 목도한 형이 편히 숨을 끊도록 도와주다가 살인죄로 귀양을 가게 된다. 소위 안락사(安樂死)의 사안이다. 귀양 가는 형 기스케는 마음이 평온하다. 그의 내심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난에 시달리던 그는 귀양살이하는 죄인에게 주는 엽전 200문에 기뻐하고 있다. 이를 지켜보던 호송관리 쇼베에처럼 독자는 기스케의 만족할 줄 아는 마음에 놀라며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려고 동생의 목숨을 끊어준 그를 동정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