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
시마자키 도손 지음, 노영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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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품명을 보고 섣부른 판단을 하였다. 종교적 소재를 다룬 작품이겠거니 나아가서 종교에서 매우 민감한 파계 사유라면 남녀 간의 정욕에 관련된 것이 아니겠는가. <파계>는 훈계-아버지의 엄한 유훈-를 깨뜨린다는 의미였다.

 

전근대사회와 근대사회를 구분 짓는 특징 중 하나는 계급제 즉, 신분제의 철폐에 있다. 조선시대의 양반, 평민, 천민, 일본의 사무라이, 상민, 천민 등의 신분적 차별은 근대화를 선언하는 도상에서 명목상 폐지되었다. 하지만 이는 명목에 불과하였다. 수백 년, 아니 수천 년간 지속되었던 신분 질서가 하루아침에 소멸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애당초 어불성설이다. 우리나라에서 족보를 신뢰할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유다. 족보만 보면 우리는 모두 당당한 왕족 내지 양반 가문의 후손들이다. 자신의 조상들이 천민은커녕 평민이라고 밝히는 가문을 아직 본 적이 없다.

 

주인공 우시마쓰는 백정의 아들이다. 조선시대에도 백정은 천민 중에서도 그야말로 최하층이었다. 일본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신분철폐령에 따라 법률적으로는 평민이 되었지만 사회적으로는 기존 평민과 구별되는 신평민으로 분류되었다. 우시마쓰는 신분상승을 꿈꾸는 아버지의 노력 덕택으로 주위에 알려지지 않은 채 사범학교를 다니고 모범적인 초등교사 생활을 하게 된다.

 

그 역시 내면에 계급에 대한 강렬한 자의식을 품고 있다. 보통 사람들의 신평민에 대한 아무렇지 않게 내던지는 멸시와 모욕적 언사, 그것은 그에게 개개가 화살처럼 가슴에 꽂혔다. 차라리 교육을 받지 않았으면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고등교육을 받은 그는 지식과 이성을 통해 각성한 자아와 배치되는 현실 사이에서 치열한 갈등과 고뇌를 겪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나도 사회의 일원이다. 나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살아갈 권리가 있는 거야.” (P.66)

 

왜 신평민만 그렇게 천대받고 치욕을 당하는 것일까? 왜 신평민만 보통 인간에 낄 수 없는 것일까? 왜 신평민만 이 사회에서 살아갈 권리가 없는 것일까? 인생은 무자비하고 잔혹한 것이었다.” (P.303)

 

지금에 와서는 지극히 당연한 발언임에도 그것이 새삼스레 여겨지는 것은 당대에서는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음에 비추어서이다.

 

작가는 주제의식을 초반에 분명히 설정되어 있음을 독자에게 알린다. 독자는 이미 알고 있다. 우시마쓰는 자신의 신분을 공개할 것이다. 요는 그 시기가 언제쯤이며, 그 과정에서 주인공이 어떤 갈등을 겪는지가 관심의 대상이다. 자칫하면 지루하게 늘어질 우려도 있기에 전개 과정에서 독자가 긴장과 흥미의 끈을 놓지 않도록 하는데 작가의 역량이 판별될 것이다.

 

우시마쓰는 파계를 감행하고 싶다. 비밀을 숨기는데 따른 심적 불편과 정서적 불안을 감내할 정도로 담대하지 못하다. 작품에서는 우시마쓰의 두려움과 괴로움이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파계를 할 경우 그는 두 가지 두려움을 감수해야 한다. 신분이 공개됨에 따라 자신이 가르치는 학교를 그만두어야 할 것이며, 전혀 다른 데서 밑바닥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점차로 은근히 깊어가는 오시호에 대한 관심도 단절될 것이 분명하다. 한편 파계는 아버지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다. 아버지가 무슨 연유로 만근의 훈계를 명령했는지 잘 아는 처지에서 더구나 인륜의 관점에서도 이를 거스르는 것은 쉽지 않다.

 

너는 아비를 버릴 셈이냐.” (P.166 )

 

여기서 또 하나 아버지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작가의 문제 제기가 존재한다. 파계는 육친의 아버지와 정신의 아버지 간의 선택에 대한 갈등의 사안이다. 생물학적 아버지는 수치스러운 혈연을 숨기기 위해 필사의 노력과 희생을 무릅쓴다. 정신적 아버지는 신평민임을 숨기지 말고 당당히 세상의 편견에 맞서 싸우라고 요구한다.

 

우시마쓰가 도살장에서 정신적으로 방황을 거듭하는 장면(P.166)은 이러한 갈등의 한 정점이다. 렌타로의 지적 세례를 받은 우시마쓰는 렌타로의 주장에 깊은 공감을 하면서 그를 추종하고 적어도 그에게만은 자신이 그와 같은 계급임을 밝히고 싶어 한다. 양자 사이의 팽팽한 입장 차이가 작품 전체에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우시마쓰의 신경을 서서히 갉아먹는 구실을 하고 있다. 우시마쓰가 세 번이나 렌타로를 모르는 사람처럼 부인하는 대목(P.219)은 흡사 베드로가 예수를 부정하는 성서의 장면을 연상시킨다.

 

렌타로를 향한 우시마쓰의 숭배는 동일한 계급 출신이라는 차원을 떠나 그가 주장하는 인간답게 살고 대접받을 보편적 권리에 대한 이성과 감성 차원에서의 절대적 동의에 근거한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미성년일 때 아버지와 가족의 울타리와 보호 아래서 양육되던 우시마쓰는 이제 울타리가 속박으로 여겨진다. 울타리 밖은 거칠고 잠재된 위협이 도사린 미지의 세계이지만 언제까지나 이곳에 머물 수는 없다. 렌타로는 외부세계의 훌륭한 사표였다.

 

우시마쓰는 눈과 서리 아래서 싹튼 어린 풀이었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의심과 두려움으로 닫혀버려 안쪽의 생명이 발달할 수가 없었다. 눈과 서리가 해를 맞아 녹는 것에 무슨 이상함이 있으리. 젊은이가 마음이 가는 선배 앞에 경모의 정을 바치고 활발하게 전진하는 데 무슨 이상함이 있으리. 보면 볼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우시마쓰는 렌타로에게서 감화를 받고 정신의 자유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P.153)

 

우시마쓰는 렌타로의 죽음에 불현 듯 각성한다. 신분을 숨기고 노심초사하는 삶은 거짓의 삶’(P.319)이라는 사실을. 진실한 자신을 속이고 가면 뒤에 숨어 있는 삶은 결코 생의 참된 행복을 기대할 수 없다. 양심에 당당하고 세상의 편견을 질타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이야말로 사회를 나아가게 하는 추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출발은 처절한 자기 고백에서 시작해야 한다.

 

정말로 나는 백정입니다. 조리입니다. 불결한 인간입니다.” (P.336)

 

한편 작가는 우시마쓰를 둘러싼 여러 인물군상을 소개하면서 사회 내에 팽배한 부조리와 그릇된 전근대적 인식이 당대에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져있는지를 알려준다. 신분질서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은 제법 합리적인 인간으로 표현되는 우시마쓰의 친구인 긴노스케도 피해갈 수 없다.

 

신평민이 아름다운 사상을 가질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도저히 안 들잖습니까. 하하하.” (P.54)

 

백정은 일종의 특이한 냄새가 있다고 하는데, 맡아보면 알 수 있지 않겠나?” (P.284)

 

게다가 사회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성질이 아주 삐뚤어져 있지. 그런 신평민 속에서 남자답고 똑똑한 청년이 나올 리가 없어. 어떻게 그런 패가 학문이라는 방면에 고개를 들 수 있겠나.” (P.284)

 

비열한 성격을 가지고 이상하게 비뚤어진 말만 하는 것이 하등인간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주제넘게 사회에 참견하고, 그런 사상을 가진 것부터 잘못이야. 그 선생 따위에게는 가죽이라도 만지작거리면서 온순하게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이 참으로 어울리는데!” (P.292)

 

더욱이 교육계는 가장 깨끗한 곳이어야 함에도 당대에도 그러하지 못하였다. 작품 중에서 대표적인 부정적 인간형으로 묘사되는 교장과 분페이, 군 장학관의 삼각관계가 두드러진다. 학교를 자신의 권력욕이 지배하는 곳으로 만들려는 교장과, 정치에 의지하여 출세를 도모하려는 분페이의 이해관계는 딱 맞아떨어진다.

 

지방에 와서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의 첫 번째 요건은-다름이 아니라 이 교장처럼 세속적인 마음가짐이다......현명한 교육자는 언제나 지방회 의원과 결탁하여 제자리를 굳게 다지기를 꾀하는 것이 보통이다.” (P.24)

 

교장의 비교육자적 처사는 우시마쓰를 배웅하려는 학생들을 결석계도 안 내고 무단으로 등교하지 않는다며 반강제적으로 소환하는 데까지 이른다. 작가는 탄식한다.

 

, 교육자가 교육자를 꺼린다. 동료로서 질투하고, 인종으로서 경멸하고-세상을 태우는 불꽃은 출발 순간까지 우시마쓰의 신상을 쫒고 있었던 것이다.” (P.365)

 

결국 시마자키 도손은 <파계>를 통해 바람직한 근대사회로의 이행을 가로막는 구시대적 악습과 편견, 사회적 부조리를 일거에 고발하고 있다. 그것은 안으로는 근대적 개인의 성장에 장애가 되는 가족제도와 아울러 종내에는 개인의 양심이라는 도덕적 차원으로 귀결되는 사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이 당대 일본 문단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던 사유는 사람들이 숨기고 싶었던 문제, 혹은 미처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했던 죄악을 전면에 내세워 통렬한 반성을 요구함에 있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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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584 2014-06-23 0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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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우 외 7편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14
시마자키 도손 지음 / 소화 / 199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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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 작품>

1. 애비

2. 쓰가루 해협

3. 가축

4. 세 여자

5. 성장 준비

6. 폭풍우

7. 식당

8. 분배

 

시마자키 도손은 일본 근대문학사에서 자연주의 사조를 확립시킨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대표작은 <파계>이며, 문학동네에서 번역본이 나와 있다. 워낙 이 작품이 유명하여 다른 그의 작품들은 가려버린 느낌이지만 애초 그의 문학적 출발은 시인으로였으며 낭만주의 시작으로 당대에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파계> 외에 국내에 출간된 작품으로는 이 단편집과 또 다른 장편인 <> 정도이다.

 

이 책은 도손의 단편 중에서 초기의 세 편과 후기의 다섯 편을 수록하였다. 옮긴이는 도손이 쓴 단편의 맛을 고루 음미하기 위하여, 그의 처녀 단편집과 마지막 단편집에 실린 단편을 고루 배열하였음을 밝히고 있다초기작들은 운문에서 산문으로 전향하여 자신만의 글쓰기 양식을 아직 확립하지 못한 자취가 역력하다. 자연주의라는 이념에 지나치게 충실하기 위하여 비일상과 파격의 사건을 소재로 택하고 있다. 남김 없는 삶의 재현이 일상의 삶을 외면하라는 의미는 아니었을 텐데.

 

<애비>에서 작가는 분명 인간 성욕의 억누를 길 없는 분출과 도덕적 판단의 헛됨을 그리고자 했을 것이다. 오시마의 아들 미사오의 애비는 누구란 말인가? 숙부, 화자인 나, 스나가, 헌 옷 장수, 아니면 요시돈. 남녀의 사귐이 들꽃과 꿀벌처럼 자유분방함이 자연스럽다는 작가의 주장이 심금에 닿지 않는 연유는 역시 윤리적 잣대를 치울 수 없기 때문이다.

 

<쓰가루 해협>은 아들의 자살로 충격을 받은 부인을 위로하고자 떠난 선상 여행이 배경이다. 혼슈와 홋카이도를 나누는 쓰가루 해협, 러일전쟁의 위태로운 상황, 아들을 닮은 서생의 만남과 헤어짐. 한때의 우연한 에피소드일 따름이다.

 

<가축>은 버림받은 암캐의 살고자 하는 자연적 본능과 사랑스럽지 못한 외모를 이유로 개를 박대하고 없애려고 하는 인간의 무자비하고 잔혹한 속성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새끼를 낳은 그날 아침 그 놈은 처음으로 인간에게서 구박이 아닌 말과 행동을 보게 된다. 이후 그 놈의 형편은 역전될 것인가? 그렇더라도 깨지기 쉬운 불안한 평화와 행복일 것이다.

 

 

소재는 물론 구성과 문장의 호흡도 퍽퍽하여 그다지 뛰어난 인상을 받지 못해 명성에 비하여 대체로 범작인가 의구심을 가졌을 때 반전을 가져온 것이 후기 작품들이다. 거의 이십년에 가까운 시간적 경과는 도손의 개인적 삶은 물론 문학세계에도 커다란 변모를 가져왔을 것은 불문가지다.

 

<세 여자>는 온천 요양 온 미쓰코를 중심으로 여학교 동창들인 모모코와 다에코의 세 여자의 인생의 행로를 담담히 그리고 있다. 그녀들은 교육받은 소위 신여성들이다. 미쓰코는 또 다른 친구 나쓰코와 잡지 발행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녀들은 지적인 면에서는 새로운 시대를 추구하지만, 정서적 면에서는 아직 구시대에 끈을 드리우고 있다. 그녀들 중에서 삶에 좌초하거나 전통에 타협해서 아니면 가정의 꿈에 젖어서 가려던 길에서 벗어날 이들도 적지 않다. 남은 이들도 자신의 길에 대한 확신과 각오를 품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이는 모든 남녀 성인들에 해당되지만, 당대 신여성에게는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물음이리라.

 

미쓰코는 깊은 혼돈의 안개에 닫혀져 있는 사람은 자신뿐 아니라, 모모코와 같은 친구조차도 마찬가지로 저물기 쉬운 저녁과 같은 청춘의 한때를 오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 (P.64)

 

문득 자신과 주위를 되돌아보면 감상과 회한에 빠져들게 된다.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처지에 빠진 자신. 그것은 모모코가 가르치는 여학교를 방문하여 보게 되는 고엽으로 바뀌기 전의, 싱싱한 생명의 반짝임”(P.77)으로 넘쳐나는 어린 학생들과는 대조적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감상과 비관으로 가라앉지 않는다. 현실을 인지하지만 현상에 주저앉지 긍정적으로 수용하려는 태도. 그래서 미쓰코는 다시 한 번도쿄로 돌아가려고 한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놓지 않는 삶에 대한 한 조각의 긍정, 그것이 도손의 후기 작풍의 특징일지도 모른다고 섣부르게 추론한다.

 

자신 속에 있는 것은 빈약함뿐이다. 그러나 이 약한 자신의 힘으로 갈 수 있는 곳까지 가자. 가령 어떤 작은 것이라도 끝없는 힘으로 보살핌을 받고 있음을 믿고 가자.” (P.79)

 

딸을 키우는 홀아비 아버지는 어느 순간 벽에 부딪힌다. 이전까지 아빠의 기쁨이자 공주님이며 인형이었던 딸은 더 이상 없다. 내심 인정하기는 싫겠지만 딸이 여인으로 성장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딸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 어린아이와 어른의 도상에서 혼란스럽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성장 준비>에서 다루는 세계가 이것이다. 지금이라면 별다를 게 없겠지만, 당대로서는 이것조차도 조심스러운 소재였을 것이다.

 

1923년의 관동대지진은 일본인들의 삶과 정신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이에 비견될 만한 자연 재해는 사후 여파란 면에서 2011년의 동일본 지진과 해일 정도가 아닐는지. 대지진 전후를 배경으로 과거의 전통과 단절하고 새로이 출발하는 세대와 이를 씁쓸하게 지켜보는 기성세대의 대비를 보여주는 게 <식당>이다. 지진 전 고다케 상점 주인의 딸로서 후에는 마님으로서 평생을 보내온 오미와는 아들이 상점을 되살려주길 고대한다. 아들은 대지진을 통해서 인정 세파의 무쌍함과 덧없음을 알아차렸다. 과거에 안주하고 뒤돌아본다는 건 가능하지 않을뿐더러 바람직스럽지도 않다. 고통스러울지라도 눈을 전면으로 향하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비록 어머니 오미와가 서운해 할지언정. 고다케 상점의 회복은 반문마냥 그에겐 불가능한 꿈에 불과하다.

 

아직 어머니는 그런 꿈을 꾸십니까?” (P.161)

 

자신이 익히 알던 도쿄는 고다케 상점과 더불어 영영 과거의 기억으로 묻혀버리게 되었음을 오미와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형언할 수 없는 쓸쓸함...

 

<분배><폭풍우>는 유사한 배경을 공유한다. 넷이나 되는 아이들, 일찍 아내를 여위고 홀로 아이들을 키우는 작가인 화자.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첫째와 화가 지망생인 둘째, 그리고 막내는 딸아이라는 점도. 필경 일정 부분은 작가 자신의 실생활에서 차용했음을 짐작케 하여 묘한 동질감마저 느끼게 한다.

 

어른이 나이 들어 쇠약해지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면, 철부지 아이들이 어느덧 훌쩍 자라서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 매진하기 위하여 보금자리를 떠나는 것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부모 입장에서는 기특하고 대견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허전하고 씁쓸한 여운이 남지만 어쩔 수 없다.

 

<분배>의 화자는 생각지 못한 뭉칫돈이 생기자 이의 처리를 두고 잠시 고심한다. 저축을 하여 노년의 여생을 대비할 수도 있지만, 화자는 자식들이 각자의 장래를 위한 든든한 노잣돈으로 분배하기로 결심한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 아닐까? 자신들의 근검과 희생은 본인들의 성공과 행복만을 위한 게 아니라 자식들이 더 나은 여건에서 행복해질 수 있도록 바라는 것 말이다. 자신들에 대한 생각은 언제나 뒷전이다. 화자의 담박한 언명과도 같이.

 

내 앞에는 아직 조금밖에 들여다보지 않은 노년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여기까지 데리고 온 네 자식들을 위해, 무엇인가 각자 도움이 될 날이 오리라고 생각하고 긴 여행 도중의 길가에서 생각지도 않게 생긴 수입을 슬쩍 남겨두고 가려고 했다.” (P.194)

 

<폭풍우>는 수록작 중에서 분량 면에서나 내용 면에서 가장 비중이 커다란 작품이라고 하겠다. 훌쩍 자란 아이들에게 현재의 집은 비좁기 그지없다. 역시 작가인 화자는 새로운 집으로 이사할 생각을 지니고 적당한 집을 아이들을 통해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7년이나 함께 사는 동안 아이들은 자신들만의 미래를 설계하고 실현하기 위해 조금씩 전진해 나아갔다. 아버지인 화자는 집밖의 폭풍우가 집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파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네 아이들 간의 다툼과 소동이라는 폭풍우를 가라앉히기 위해 무진 애를 쓰기도 하였다. 아이들이 무사히 자랄 수 있도록 일편단심으로 지키는 사람, 그것이 바로 부모이다.

 

하야가와 켄과 기노시다 시게루를 외치던 셋째가 프랑스의 빗세르를 찬사한다. 이처럼 세 아이들은 각각 변해가고 있었다.”(P.116) 그리고 새로운 사람, 새로운 것에 현혹되는 그들은 아버지를 기존의 것에 천착하는 구시대의 인물로 여기게 된다. 증폭되는 갈등을 해소하는 길은 댐의 수문을 개방하듯이 그들에게 각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출구를 열어주는 일이다. 비록 한동안은 모두에게 강한 폭풍우”(P.116)가 휘몰아치더라도.

“......내가 몸을 일으켰을 무렵에는 지난 7년 동안 계속해 온 듯한 쓸쓸한 폭풍우의 흔적을 다시 볼 마음이 일어났다. 이런 마음가짐은 그 큰아들의 집을 볼 때까지는 나에게 생기지 않았던 일이다.” (P.139)

 

첫째가 농부로서 고향에서 그런대로 제법 무난히 지내는 광경을 보면서 화자는 다소간 신뢰에 무게를 더할 수 있게끔 되었다. 둘째도 곧이어 형이 있는 고향으로 내려갈 준비를 한다. 셋째도 나름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막내딸도 여성적인 자태를 드러내게 되었다.

 

모두 모두 그렇게 같은 길을 걷지 않아도 좋아.” (P.141)

 

중요한 것은 남이 정해준 길이 아니라 스스로 발견하고 깨달은 자신만의 길을 걷는 것이다. 화자도 지금 사는 집을 버린 마음을 되돌려 다시 한 번 좁고 답답한 이 집에서 버텨 보려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시마자키 도손의 초기작은 처음에 자연주의 경향에 집착한 나머지 과도한 소재와 표현, 구성으로 인위적이며 정제되지 못한 느낌을 주었다. 연륜과 각고의 노력 덕분인지 후기작, 특히 <폭풍우>에 와서는 자연주의 사조가 자신의 삶과 펜에 녹아들어가 두드러지게 강조하지 않아도 작품 속에서 깊은 풍미를 갖출 수 있게끔 발효되었음을 알게 된다. 지극히 담박하고 은은하면서도 삶과 세상에 대한 관조의 경지를 느낄 수 있다고 해도 과찬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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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색일대남
이하라 사이카쿠 지음, 손정섭 옮김 / 현실과미래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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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부터 무궁무진한 호기심을 자아내는 이 책은 음란하지만 외설적이지 않다. 그래서 광고 문구대로 일본 성(性) 문학의 하나로 헛된 기대를 품은 사람이라면 실망하기 딱 좋다. 이 작품은 유곽과 성(性) 문화를 다룬 풍속소설로 이해해야 마땅하다.

 

이하라 사이카쿠는 일본 근세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라고 일컬어진다. 일본 근세는 경제력을 갖춘 상인계급의 부상에 따라 그들의 관심과 취향을 반영하는 방향으로 상인계급 출신의 작가들이 작품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고 한다. 사이카쿠 역시 상인의 신분을 지녔다. 주인공 역시 상인의 아들이며 나중에 부유한 상인이 된다. 일본 문학사상 귀족과 무사들이 아닌 상인과 평민이 문학작품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 또한 이때부터이다.

 

구성도 독특하다. 주인공 요노스케가 7세가 되던 해부터 60세가 될 때까지 매해를 한 장으로 하여 총 54장으로 구성하고, 매해는 한 편의 대표적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해설에 따르면 이 작품의 문장은 하이카이조로 씌어졌다고 하니, 운문소설로 분류될 수 있겠다. 작가 사이카쿠는 당대에 하이카이의 대가로 인정받았으며, 이 소설은 그가 산문으로 전향한 첫 작품이다.

 

작가가 처녀작을 하필 性을 제재로 삼은 연유가 무엇일지 생각해본다. 경제적 부의 축적에 성공한 상인 계급은 엄격한 신분제도 하에서 자유를 봉쇄당하고 정치적 발언권도 행사할 수 없었다. 그들의 자신의 넘치는 에너지를 부(富)와 성(性)에 쏟았다. 부는 그렇다 치고 성의 자유로운 향유는 어찌 가능했을까? 그것은 당시 막부에서 정치적 억압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창구로 유곽 제도를 공인한데 따른 것이다. 독재 정부에서 3S 정책을 펼치는 것과 동일한 차원이라고 해야겠다.

 

사이카쿠가 작가적 시선을 가장 강력하며 절실한 화두에 돌렸음은 당연하다. 얼핏 일그러진 사회와 풍속을 비판하기 위한 의도가 깔려 있을 것으로 추정하기 쉽지만, 작가는 전혀 비판의 상념조차 없다. 그는 오로지 자신이 듣고 보고 겪은 당대의 성 문화를 관찰자적 관점에서 독자에게 내보일 뿐이다. 작가의 요노스케에 대한 태도는 긍정적이며 때로는 경탄의 어조도 아끼지 않는다.

 

작품은 시종일관 요노스케가 종횡무진으로 다니며 여성과 남성을 섭렵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여자가 3724명, 남색의 상대가 725명이라고 하니 확실히 대단한 숫자다. 각각의 이야기는 요노스케가 겪은 사건들을 기술하고 있다. 제한된 지면에 사건과 행위 위주로 서술하다 보니 실제적 성애 장면의 묘사는 지극히 단편적이거나 생략되기 일쑤다. 오히려 유곽의 유녀(遊女)에 대한 소개와 외모와 복장에 대한 묘사가 더욱 두드러진다.

 

요노스케는 풍류남아다. 그가 색을 밝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무작정 취하려고 강제로 덤비지는 않는다. 유녀로서의 자색과 태도, 품위 등을 나름 선별하여 빼어난 여인을 높이 평가한다. 한편 사정이 딱한 유녀는 거금을 주고 유곽에서 빼내주는 사례도 심심치 않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요노스케의 일생에 걸친 모험이 아니다. 비슷비슷한 이야기들은 몇 번만 반복되더라도 식상하기 마련이다. 구체성과 세부적 개성이 미비하니 심금에 다가서기 어렵다. 현대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18세기 일본 사회의 서민 생활을 가감 없이 엿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유곽, 사창가, 창녀촌을 찾는 이들은 결코 지배계급이 아니다. 그네들이라면 좀 더 은밀하고 품위를 지킬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할 것이다. 유곽은 예나 지금이나 사회의 밑바닥 영역에 속한다. 그들의 손님은 돈 많은 상인들에서 날품팔이에 이르기까지 신분제의 사다리에서 중간 이하에 해당한다. 게다가 성(性)의 영역은 지나칠 정도로 적나라하게 허울을 벗겨낸다. 제아무리 잘난 체하고 젠체 해봤자 성(性) 앞에서는 평등하다.

 

일본 근세의 유곽 현황과 유녀들의 구분 및 유곽 문화에 대해 알게 되어 또한 흥미롭다. 오사카, 교토, 에도의 3대 유곽에서 최고급 유녀인 타유로 불리는 이들은 극소수이며, 그만큼 그네들의 자태와 위세는 당당하다. 유녀들이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하여 거짓 사랑편지, 머리카락, 손톱 등을 활용하는 장면에서는 영악함에 탄복할 정도다.

 

미남자 요노스케도 나이가 드니 외모가 점차 추레해지게 된다. 이제 그의 화려한 시절은 지나가고 쓸쓸히 과거의 영광을 반추하는 따분한 신세로 전락하게 되는 요노스케.

 

“이제 몸은 어느 새 사랑에 야위었고, 더 이상 욕망에 대한 미련도 없었다. 부모도 없고 자식도 없으니 정처도 없다. 여색, 남색에 온 정기를 빼앗겨 다리는 뽕나무 지팡이가 없으면 서 있지도 못할 지경이었고 귀는 멀어 들리지 않았다.” (P.278)

 

예순 살의 요노스케는 결코 색(色)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의 마지막 모험은 배를 건조하여 정력에 좋은 음식과 보약 등을 잔뜩 싣고 여인들만 산다는 여호도라는 섬을 향해 항해를 시작하는 대목에 끝난다. 진정한 호색일대남이라고 할 밖에.

 

이 작품의 주인공 요노스케는 도덕적 면에서 볼 때 바람직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호색에 빠져 부모를 버리고 가출하였으며, 비구니와 유녀 등을 끝없이 탐하는 행위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일본판 피카레스크 소설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피카레스크 소설 자체가 귀족이 아닌 평민 대중을 주인공으로 삼아 사회의 법률적, 도덕적 제약과 족쇄를 무시하고 파괴하는 인물형을 만드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읽는 내내 작품의 명성의 근거는 무엇일까 고심했다. 작품 자체의 내재적 가치가 결코 뛰어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시대적 배경과 제재의 이색성을 함께 파악할 때 당대 독자에게 크게 어필했던 사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또한 현대 독자에게는 표피적 흥미 외에는 그다지 다가오지 못하는 연유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근세 일본과 일본문학을 이해하려면 일독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본다. 다만 번역과 체재는 새롭게 해서 원작의 분위기를 좀 더 살릴 필요가 있다. 일본 기생의 호칭과, 요정의 명칭, 유곽의 풍습, 유곽 도시를 소개한 부록은 사전 배경지식으로 유익하다.

 

그런데 많은 남성들이 화류계에 빠지는 이유가 궁금하다. 이 책에서는 이해를 위한 단초를 제시한다. 이것이 수컷의 생물학적 속성 외에 유력한 설명의 근거가 될 수 있겠다.

 

“기생은 아름다운 존재. 목숨 바쳐 사랑에 빠진 손님에게는 인간의 도리 운운하며 멀리 대하고 자신과의 소문을 낸 손님에게는 즉시 그 유곽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쓰라림도 줬다. 또 으스대는 손님에게는 속세를 떠나 보도록 권하기도 했다. 유부남에게는 부인이 얼마나 원망할 것인지를 이야기해 주고, 반면 남들이 싫어하는 남자들에게도 상냥하게 말을 걸어 주고 손도 잡아 줬다. 모두들 타유에 대한 마음을 어찌할 줄 몰라 하다 어느 새 눈물바다가 되고 말았다.”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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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사메 모노가타리 일본명작총서 8
우에다 아키나리 지음, 조영렬 옮김 / 문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수록 작품>

피 묻은 휘장

아마쓰 오토메

해적

2세의 인연

외눈박이 신

죽은 목의 미소

스테이시마루

미야기의 무덤

노래의 명성

한카이 (/)

 

이 이야기책은 우에다 아키나리의 유작이다. 작가는 최만년에 일단 완성을 하였지만 간행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손질을 하다가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이후 이 작품은 몇 편만 단편적으로 전해지는 외에 오랫동안 망실된 상태에 놓였다가 1951년에 원고가 발견되어 전모를 알 수 있게 되었다고 하니 나름 사연이 있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생전에 발간되어 그의 명성을 높여준 <우게쓰 이야기>와 비교하면 참으로 독특한 면모를 보게 된다. 모노가타리의 우리말 번역을 이야기로 쓰는 것은 모노가타리가 이야기로서의 분명한 서사구조를 지니고 있기에 타당성이 있다. 고전 형태의 소설로 간주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물론 우타 모노가타리처럼 이야기가 부차적 요인이 되는 유형도 존재하지만 주류는 아니다. <우게쓰 이야기>는 문학적 서사로서의 모노가타리 속성에 충실한 반면, 30년 후의 이 <하루사메 모노가타리>는 성향이 완전히 다르다.

 

옮긴이가 작품 해석을 의지한 나카무라 히로야스의 글이 세간의 인식을 대표한다고 보겠다.

아키나리는 꾸며낸 이야기라는 방법을 통해서, 자신의 학문연구 과정에서 산출된 결과물을, 학문이라는 닫혀 있는 울타리에서 추출하여 모노가타리라는 열린 구조 속에 풀어놓았다.” (책 뒤표지)

 

작가는 이야기 자체의 본질적 속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 단편들은 그의 역사 탐구와, 와카 연구와 고전 사상의 이해 도정에서 (주관적 관점에서) 의문을 품거나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든지 아니면 당대의 주류적 사상을 비판하기 위한 목적에서 의도적으로 모노가타리 형식을 차용하였다. 작가는 독자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별 관심이 없다. 따라서 독자들이 이야기로서의 구성적 미결성과 내용적 미진성에 불만을 느끼게 됨은 당연하다.

 

 

1. <피 묻은 휘장>은 헤이안 시대에 벌어진 구스코의 난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이 난을 일으킨 악역을 나카나리와 구스리코 남매에 뒤집어씌우고 헤이제이 천황은 여기에 직접적 관련성이 없는 것으로 의도적으로 사실(史實)을 곡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작가는 헤이제이 천황의 성격이 선하고 온유하며 사욕이 없고 존귀하다고 평한다. 이러한 천황의 눈과 입으로 유교와 불교의 사상을 비판하고 있다.

 

유교가 건너와, 성인의 현명한 가르침 덕에 악을 선으로 고쳤는가 보니, 도리어 사실을 왜곡하고 말을 교묘하게 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널리 퍼졌는데, 세상은 시끄러워졌다. 나는 책 읽는 일에 어두우니,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정사에 힘을 쏟으리라.” (P.22)

 

유가의 천()은 너무 여러 갈래이다. 불씨는 천제도 머리를 기울이고 불법을 들으셨다고들 한다. 참으로 번거롭구나.” (P.27)

 

 

2. 이 작품은 뒤의 <아마쓰 오토메>와 연계하여 이해할 때 의미 파악이 용이하고 명료해진다. 작가가 앞서 헤이제이 천황을 일부러 높이 평가한 의도는 뒤의 사가 천황과 대비하기 위함이다. 헤이제이 천황은 일본 고유의 미덕을 갖추었고, 사가 천황은 중국의 문물을 모범으로 삼고 준수하고자 노력하였다. 이것이 작가 아키나리의 사상적 견해로는 못마땅했던 듯하다. 왕희지의 진적 관련 에피소드는 작가의 풍자적 비꼼을 보여준다.

 

“......온 나라의 국토마저 중국풍으로 바뀐 듯하다고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P.36)

 

“......오직 유교의 예법만이 채용되었다. 그렇지만 불법은 전혀 쇠퇴하지 않았고......정사가 자연히 그들의 가르침에 이끌려 가는 일이 적지 않았다.” (P.39)

 

불도는 여전히 융성했으니 이상한 일이었다. 유교도 아울러 행해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수레의 한쪽 바퀴가 얼마간 손상되어, 가는 것이 더딘 듯이도 보였다.” (P.41)

 

우키나리는 여기서 와케노 기요마로와 요시미네노 무네사다의 생의 여정을 비교하여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충직한 기요마로는 정권을 틀어쥔 요승 때문에 좌천과 유배로 점철된 삶을 보낸 반면, 무네사다는 재능과 학식이 있지만 유흥과 노래로 천황의 총애를 받다가 천황 붕어 후 도망치듯이 출가하였는데 나중에 승직의 최고위인 승정에까지 올랐다고 한다. 탄식 한 줄에 작가의 내심이 절절히 드러난다.

 

불도라는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이다......헨조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였을 터이다.” (P.49)

 

 

3. <2세의 인연> 또한 불교 비판적인 논의를 견지한다. 선정(禪定)에 들어갔던 법사가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칠칠치 못한 사내로 갱생하는 사건을 통해 부처의 가르침이 헛되고 부질없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선정이라는 지극히 선한 전생의 행위조차도 후세의 좋은 보답을 기약할 수 없다. 삿된 기대를 버리고 현세를 충실히 사는 것이 참되고 중요한 것이다.

 

어처구니없구나. 부처님께 빌어도 정토에 가는 것은 힘들구나싶다. 살아 있는 동안 힘써야 할 것은, 이 세상에서 몸에 붙인 가업이 아닐까.” (P.72)

 

 

4. 아키나리는 <해적>에서 관심을 사상에서 학문으로 돌린다. 이 작품은 헤이안 시대의 <도사 닛기>의 저자인 기노아손 쓰라유키를 작중 인물로 내세우고 있다. 임기를 마치고 귀경길에 오르다가 마주친 해적이 쓰라유키를 비롯한 <고킨와카슈> 편찬자들을 학문적 관점에서 매섭게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 후반에는 대조적으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높이 평가하는 논평을 전개한다.

 

그대는 노래를 잘 읊지만, 고언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천황마저 욕되게 하였습니다.” (P.55)

 

노래는 그럴싸하게 읊어도, 칙찬집을 엮은 네 명 모두 찬가의 필법이 틀린 것은 학문이 없기 때문입니다.” (P.57)

 

그대는 노래는 잘 읊지만, 한적을 많이 읽지 않아 얼핏 봐도 결점투성이다.” (P.64)

 

 

5. <외눈박이 신>도 마찬가지다. 와카의 도를 배우기 위하여 상경하던 관동 지방의 젊은이에게 신사의 신은 이렇게 말한다.

 

글을 짓고 노래를 읊는 것은 제 스스로 마음으로 터득해야 하는데, 어떻게 가르침대로 되겠는가. 물론 처음에는 스승을 모시는 일이 예도에 들어가는 입문 역할은 한다. 허나 깊이 들어가자면 제 스스로 만드는 길 외에 배울 방법이 있겠는가.” (P.79)

 

아마도 아키나리는 유명한 스승의 명성에만 의존하고 스스로 갈고 닦지 않는 시대의 풍조에 일침을 가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6. 이 점에서 <노래의 명성>은 작가의 노래, 즉 와카에 대한 견해가 잘 드러나 있다. <만요슈>에 수록된 노래들은 오직 자신의 마음에만 충실하였지, 타인의 모방이나 비평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역으로 말한다면 작가 당대에는 진실한 내면보다는 외형적 기교에 신경을 썼다는 비판이기도 할 것이다.

 

옛 사람은 마음이 순수하여, 남의 노래를 훔친다는 의식이 없었고, 자기 마음의 느낌을 정직하게 진술했다......오직 마음에 감동한 것을 솔직하게 읊은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노래의 참된 길이다.” (P.132~133)

 

 

7. <죽은 목의 미소>는 당대 실제 사건을 모델로 하는데, 인색한 부잣집 아들과 가난하지만 바르게 자란 집의 딸 간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다루고 있다. 이와 같은 사례가 어디 세상에 한두 건이겠는가 마는 여기서 관심의 초점은 시종 인색하며 무자비한 부친 고소지도 아니며, 여동생의 목을 친 모토스케와 이를 알고도 의연한 모친도 아니다.

 

작품 모두에 작가는 고소지와 대조적으로 아들 고조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훌륭한 성격에 문무의 재주도 탁월하며 굳센 마음의 소유자로서 너그러우면서도 예의가 바르다고 하니 더 이상의 찬사가 없을 정도다. 문제는 이런 고조가 애정 문제에 있어 이도저도 아닌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취한다는데 있다.

 

여인네 집에 가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부모를 설득하여 혼인을 치르겠다고 살살 달래다가도 막상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서는 부친의 엄명에 일언반구 항변도 하지 못한다. 고조의 주저와 갈등은 외견상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관리의 말마따나 고조의 마음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P.97)

 

언뜻 보면 고뇌하는 고조에게 아키나리가 동정을 품은 것처럼 생각될 수 있지만 작가는 고조의 갈등과 고민을 담담한 어조로 뉘앙스만 풍기지 구체적이며 세부적으로 기술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조의 의지박약을 내심 질타하는 듯한 인상마저 풍긴다. 세상의 여인네들이여, 고조 같은 남자에게 사랑을 바치지 말지어라, 그는 그럴만한 자격이 없도다.

 

 

8. 일본은 막부 시대 이래로 오랜 기간 무사도의 국가였다. 무사도는 명예를 중시하여 이것이 손상당할 경우 목숨을 걸고 복수하였으며, 세인들의 찬사도 뒤따랐다. 아키나리는 <스테이시마루>에서 맹목적인 복수의 타당성에 의문과 비판을 동시에 제기한다.

 

오해와 악의가 겹쳐 살인범의 신세로 쫓기는 거한이자 장사인 스테이시마루. 등 떠밀려 어쩔 수 없이 복수의 길에 나서는 죽은 부자의 아들 고덴지. 두 사람은 모두 그릇된 관행과 제도의 피해자들이다. 이들이 힘을 합쳐 바위산에 터널을 뚫은 일은 사자를 위한 공양을 넘어 잘못된 세상을 향한 태산 같은 웅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9. 마지막 두 편은 전통적 모노가타리의 형식에 가깝다. <미야기의 무덤>의 미야기는 몰락한 가문의 여인으로서 속임수에 빠져 유녀 신세로 전락한다. 게다가 정인(情人) 주타베와의 관계를 질시한 촌장의 간계로 정인을 잃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말미에 수록된 작가의 탄가는 그녀를 동정하는 아키나리의 헌가이리라.

 

이 작품에서 이채로운 대목은 미야기가 세상을 버리기 전 호넨 쇼닌이라는 고승에게서 염불을 전수받는 장면이다. 시종 불교에 호의적이지 않은 작가가 유독 여기서는 후하게 서술하고 있다. 신분의 고하와 귀천에 관계없이 일체 중생에게 구제의 길을 만들어주려는 스님의 자비심에 공명하는 작가의 심중의 발로로 받아들이고 싶다.

 

10. <한카이(樊噲)>는 분량 면에서나 내용적 측면에서 이 작품집에서 제일 문제작이다. 일본 문학에서 이전에 이런 유형의 모노가타리가 없었다면 단연 일본문학 최초의 피카레스크 소설, 즉 악한소설에 해당한다. 거한이자 장사란 점에서 스테이시마루와 비슷하지만, 한카이는 도덕과 윤리의 틀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도박에 빠져 부친과 형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패륜적 죄를 저지르고 이후로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며 강도와 살인을 밥 먹듯이 자행한다. 그럼에도 한카이는 미워할 수 없는 사내이다. 재물에 활수하고, 제법 의협심이 있으며, 악기에도 재능이 뛰어나다. 그는 철저히 자신의 욕망과 본능에 충실하다. 그는 번거롭다며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난세라면 호걸이라는 명성을 얻어 나라를 빼앗고 적을 두렵게 했을 터인데. 참 용맹스러우신데......난세라면 영웅이 되었겠지. 허지만 치세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도적질한 죄과로 처벌을 받을 것이야.”(P.172)

 

한카이는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전란의 시기는 사라졌다. 에도 막부의 통치아래 수백 년간 평화로운 시절이 이어졌다. 더 이상 세상은 한카이같은 호걸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골치덩이일뿐이다. 근세 일본은 상업이 활발해지면서 자본주의가 가속화되고 있었다. 아키나리는 사라진 옛 시절의 유물을 흥겹게 반추하고 있다.

 

한카이가 정직한 법사를 따라 세속의 연을 끊고 대화상이 된 것은 시사적이다.

 

“‘마음을 간직하면 누구라도 불심이요, 놓치면 요마라는 것은 이 한카이를 두고 한 말이리라.” (P.180)

 

 

어찌하다 보니 잡설이 길어졌다. 본디 잘 모르고 이해가 안 되면 말이나 글이 주저리주저리 늘어지게 되는 법이다. 그만큼 <하루사메 모노가타리>에 수록된 개개의 단편들은 쉽게 이해하기가 어렵다. 표피상의 글귀만을 좇는 것은 용이하며 그렇게 받아들여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뭔지 가슴 한켠에 묵직하게 들어앉아 심정을 답답하게 만드는 원인을 찾아서 하루빨리 속을 시원하게 뚫고 싶었다.

 

옮긴이는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비유하자면, 풍경화라기보다는 암호와도 같은 이정표에 가깝다.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풍경이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지점을 가리키는 표지 같다는 느낌을 준다......암호를 풀어 나타난 이정표가 가리키는 곳은 어디인가. 그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그것은 읽는 이가 제 발로 걸어가서 보아야 할 풍경일 것이다.”

 

어려운 작품의 쉽지 않은 도전이다. 조금만 더 보완했더라면 국내 초역이라는 명예와 더불어 갈채의 박수를 보냈을 것이다. 번역문과 편집이 매끄럽지 못하고, 손이 덜 간 자취가 역력하다. 작품해설과 주석에 옮긴이의 내공이 다소 딸린다는 인상을 준다. 석사논문을 다듬었다고 하는데, 옮긴이 자신의 독자적 연구보다는 나카무라 히로야스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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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렬 2014-03-03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위 책의 역자 조영렬입니다. 역자로서 위 평가에 100% 동의합니다. 번역하고 주석 달고 작품 해설 쓰면서 느낀 제 심리적 움직임을 이렇게까지 정확하게 파악하는 분이 있다니 놀랍기도 하고 끔찍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아니 무엇보다, 부족한 번역서를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우게쓰 이야기 대산세계문학총서 70
우에다 아키나리 지음, 이한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수록 작품>

시라미네

중양절의 약속

잡초 속의 폐가

꿈속의 잉어

불법승

기비쓰의 가마솥 점

뱀 여인의 음욕

푸른 두건

빈복론

 

일전에 이즈미 교카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전통적 미학을 반영한 독특한 작품세계와 환상적 작풍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오늘 이 작품집을 읽으면서 이즈미 교카가 외따로 떨어져 있던 작가가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다. 양자 모두 기담 내지 환상 문학이라는 동질성을 지니고 있는데, 우에다 아키나리의 백수십 년을 앞선 작품들에서 명백한 근대성의 뿌리와 아울러 탁월하면서도 개성적인 작품성을 발견할 수 있음은 큰 수확이다.

 

수록된 아홉 편의 단편들을 일관하는 공통성은 바로 환상성이다. 모든 작품들은 비현실적인 존재가 등장하여 이야기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수백 년 전에 한을 품고 죽은 스토쿠 상황과 도요토미 히데쓰구의 혼령,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결한 무사의 영혼, 전란 속에서 남편을 기다리다 병사한 아내의 영혼, 잉어로 변신한 스님, 배신한 남편에게 복수를 하는 아내의 원혼, 평정심을 잃고 인육을 먹는 반요괴가 된 스님, 인간을 집요하게 사랑한 뱀 요괴, 황금의 정령 등이 이 작품에 등장한다.

 

혼령, 귀신, 요괴, 정령 등이 등장하는 여부는 근대 이전과 근대를 구분하는 바로미터이다. 근현대 문학에서 이들은 옛이야기나 동화에서나 볼 수 있는 허튼소리 또는 유치함의 표상이었다. 주류 문학에서 소외도어 연명을 거듭하던 환상적 이야기들이 환상문학이라는 독자적 장르로서 수면 위로 급부상한 것은 이십 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부터라고 하겠다. 18세기에 발표된 작품집이니 응당 전근대적 유치함이나 황당함이 들어있겠거니 지레짐작한다면 단연 섣부른 편견이라고 단언하련다.

 

이 이야기들은 작가의 순전한 창작이 아니다. 중국과 일본의 설화에서 소재와 줄거리를 상당수 차용한 일종의 번안소설이다. 글을 읽다보면 어디선가 한두 번은 읽거나 (영화 등에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단순한 번안에 그쳤다면 곧 독자의 기억에서 잊히고 말았을 테지만 시간의 도전을 버티어낸 것은 전래의 소재에 작가가 새로이 불어넣은 예술성의 탁월함 때문이다.

 

옛 전거들은 사건의 전개에 주력하였고 교훈적 요소를 강조하였다. 아키나리는 그렇지 않다. 사실성을 불어넣기 위하여 역사적 배경을 교묘하게 설정하였다. 사실(史實)과 가공이 뒤섞인 작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는 실제로 발생했던 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을 정도다. 일례로 <시라미네>의 주된 인물은 실존하였던 사이교 법사다. 그가 산 속 스토쿠 상황의 묘소에서 맞닥뜨린 상황의 혼령과 치열하게 논쟁을 벌인 대목은 역사상 호겐의 난과 헤이지의 난이 벌어졌던 헤이안 시대의 말기(12세기)의 역사적 상황이다. <잡초 속의 폐가>에서 장사를 하러 떠나간 남편과 아내가 재회하지 못하게 된 사유는 역시 15세기 무로마치 막부 후기에 관동 지방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전란이 배경이었다.

 

아키나리는 또한 인물과 배경의 묘사에도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인다. <시라미네>의 도입부에서 스님이 일본 각지를 주유하는 장면, <꿈속의 잉어>에서 병든 스님이 잉어가 되어 비와 호수의 명소를 헤엄치며 유람하는 대목 등은 간결함과 아름다움을 갖춘 자연 묘사의 빼어남을 보여준다. <중양절의 약속>의 청빈한 학자 하세베 사몬, <뱀 여인의 음욕>의 선량하면서 우유부단한 미남자 도요오와 마력적인 미모와 사랑에의 집착이 두드러지는 마나고 등 인물들의 개성적 성격도 분명히 하고 있다.

 

근대문학의 특징은 인물의 입체적 성격에 있다. 고전 문학의 인물들은 선과 악이 처음부터 구분되어 끝까지 획일적 성향이 유지되는 반면, 근대 문학에서는 인물들의 본성은 선과 악이 혼재되어 있다. 본성과 상황이 결부되어 선인이 악인이 되거나 그 반대도 가능해진다. 때로는 선악을 판단하거나 종잡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기비쓰의 가마솥 점>에서 남편의 배신에 죽어서 원혼이 된 이소라는 생전에는 효행과 정절로 칭찬받았는데, 죽어서는 처절한 복수만을 노리는 사악한 원혼이 되고 만다. <푸른 두건>의 주지 스님은 원래 덕이 높았는데 미쳐서 식인귀가 되었다가 가이안 선사의 인도로 죽어서나마 악업에서 벗어나게 된다. 압권은 역시 <뱀 여인의 음욕>이다. 마나고는 뱀 요괴임에 분명하지만 작중에서 과연 사악한 존재인지는 미지수다. 그녀는 오로지 도요오에 대한 사랑만을 갈구하고 있다. 도요오와 마나고의 교합의 결과는 알 수 없지만, 단지 인간에 대한 사랑을 문제 삼아 결국 뱀 여인을 죽게 한 것은 정의와 선악에 대한 가치판단을 어렵게 한다. 뱀 여인의 마지막 외침처럼 진정 무정한 것은 요괴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일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여기에 한 가지 장치를 더 마련하고 있다. 작품들의 시대적 배경이 되고 있는 중세 일본의 분위기를 재현하기 위해 당대의 사건 외에 동시대의 여러 저작들을 인용하고 있으며 특히 다수의 와카를 많이 끌어와 삽입하고 있다. 이 와카들은 작품의 내용과 성격에 부합하게 교묘하게 배치하여 마치 등장인물들이 직접 지은 것 마냥 작품과 밀접한 관련성을 보여준다.

 

구성과 기법, 주제의식 측면에서도 반추해볼 대목이 여럿 있다. 기본 뼈대는 옛이야기와 유사하지만 도입부에서 역사적 사실 및 사건과 결부시키는 방법이 가져오는 효과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개별 작품의 후반부에서 원작과는 다른 방향으로 작가의 주관적 의도가 짙게 반영되어 결말이 전달하는 종국적 인상은 상당히 다르게 다가온다. <중양절의 약속>은 정의의 복수극으로 성격이 변하였다. <기비쓰의 가마솥 점> 전반부의 바람둥이 남편과 지고지순한 아내의 순정극은 후반부에서 모골을 송연하게 하는 괴기담으로 변전하였고, 특히 결말의 암시적 묘사는 처절한 비극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빈복론>은 재물과 부()에 대해 긍정하는 근대 자본주의적 사고가 팽배해지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처럼 아키나리의 이 작품집은 단순히 번안에 그치는 게 아니다. 작가가 비록 소재와 주요 대목을 앞선 설화집에서 가져오긴 했으나 구성과 주제의식, 문체와 기법 등에서 철저하게 작가 자신의 스타일로 가공하여 완전히 재창조하고 있다. 이러한 요인들의 결과로 얼핏 터무니없는 괴담에 불과할 수도 있는 이야기는 당당한 문학작품으로 탈바꿈하는데 성공하였다.

 

솔직히 일종의 의무감 비슷한 심정으로 마지못해 책장을 펼쳐들었는데 읽을수록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현대적 의미의 환상소설을 작가는 이미 18세기에 거의 완벽하게 구현해 놓았다. 번역도 원작의 중세적 우미한 분위기를 잘 살려 깔끔하고, 충실한 작품 개별 해설과 종합 해설, 주석 등 별달리 흠잡을 데가 없을 정도로 편집도 완성도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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