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일족
모리 오가이 지음, 노재명 옮김 / 북스토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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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수록작>
1. 아베일족
2. 사하시 진고로
3. 사카이 사건
4. 산쇼대부
5. 다카세부네

 

모리 오가이의 역사소설 모음집으로서 출판 컨셉이 뛰어나다. 오가이는 작품 활동 후기에 이르러 집중적으로 역사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흔히 역사소설이라고 하면 장편이나 대하소설을 연상하기 마련인데 오가이는 단편이나 중편만을 쓴다. 전업 작가가 아닌 만큼 장편을 쓸 물리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을 것이며, 특정 시대나 사회 전반을 포괄하기보다 개별 사건을 서술하기 위해서는 굳이 길게 쓸 필요도 못 느꼈을 듯하다.

 

기존에 읽은 작품들은 건너뛰고 처음 만나는 두 편 <사하시 진고로>와 <사카이 사건>만 읽는다.

 

<사하시 진고로>는 특이하게도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기를 배경으로 하며 당시 조선 왕조도 작중에 등장한다. 사하시 진고로라는 무사가 훗날 조선 통신사 일행의 교첨지로 변신한 사연이 작품의 기본 스토리다. 일본의 사무라이, 즉 무사는 칼질이나 제법 잘하는 낭인들이 아니다. 나름대로 엄격한 위계질서와 규범체계를 갖춘 계급집단이라고 해야 옳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규율을 지키면 커다란 명예가 따라오지만, 사소하더라도 규칙을 위반하며 불명예의 낙인이 찍힌다.

 

사하시 진고로는 촉망받는 청년 무사에서 고국을 떠날 수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하였다. 이유는 동료와 상관의 약속 이행 거부이다. 동료가 자신의 약속대로 아깝지만 칼을 양도했더라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색안경을 쓰지 않고 그의 충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면 사하시 진고로는 목숨을 바쳐 섬기는 훌륭한 무사가 되었을 것이다.

 

진고로가 수치-남색(男色)의 대상이 되는-를 감수하면서까지 임무를 완성한 것은 오로지 동료 살해의 죄를 씻고자 하는 일념이었다. 도쿠가와는 표면에 나타난 행위만을 중시하고 진정한 내면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단견을 드러내었고 끝끝내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한다.

 

<사카이 사건>은 일본 개항기 시절 일본군과 프랑스군의 교전 사건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메이지 천황의 사망에 잇따른 저명 인물들의 할복에 충격을 받은 오가이는 <아베일족>과 이 <사카이 사건>에서 집중적으로 할복을 다룬다. 전작에서 할복에 대한 작가의 태도는 중의적이었다. 할복 자체는 높이 평가하지 않으면서도 할복 문화의 불가피성 내지 일정 필요성은 인정하였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할복 행위 자체에 보다 집중하며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우연하게 발생한 양군의 충돌로 프랑스군이 피해를 입자 국제적 사태로 확대되는 것을 꺼린 정부는 프랑스 측의 요구를 수용한다. 교전을 벌인 일본군 중 20명을 사형에 처하는 것이다. 일본군으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군인으로서 최선을 다한 결과에 대해 포상은커녕 오히려 사형을 받게 되다니. 우리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전혀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당사자들의 강력한 반발과 정당한 명분에 정부는 그들을 무사로 인정해주고 할복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후반부는 할복 행위에 대한 사실적으로 세세한 기술을 통해 그들을 표면상 죄인이지만 당당한 영웅으로서 찬양한다.

 

할복은 지극히 일본적인 행동방식이다. 우리네 조상들은 자진(自盡)할 때 독약을 마시거나 목을 매달았다. 할복은 죽음을 정면으로 대면하고 과감히 도전하는 행위다. 할복하면서 비겁하거나 유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만큼 치욕의 대상이 되는 게 드물 것이다. 어찌 보면 가슴속에 지독한 독기를 품은 사람들만이 이런 극단적인 죽음의 양태를 선택할 수 있다. 더욱이 할복은 홀로 하지 못한다. 뒤에서 단칼에 목을 쳐줄 동료를 필요로 한다. 할복하는 본인은 물론 동료마저도 본인에 못지않은 굳센 각오와 의지가 필요하다.

 

오가이가 역사소설을 쓰게 된 내밀한 심리상태 가운데 나이 50이 넘어서 사고가 자연스럽게 보수적으로 흘러갔을 가능성을 무조건 배격하지 못할 것이다. 젊은이는 진보적이고 노인들은 보수적인 현상은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보편적이다. 오가이는 젊어서 독일 유학에서 체득한 근대화된 정신으로 당대 일본사회를 재단하였으나 이제는 일본 고유의 미덕을 찾고 드러내는데 주력한다. 물론 이것이 단순한 회고 내지 의고조의 태도는 아닐 것이다. 일본 전통의 좋은 점을 당대에 널리 주창하여 혼란스런 사회를 지탱하는 기본적 가치관으로 삼고자 하는 원대한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추정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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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98
모리 오가이 지음, 김영식 옮김 / 문예출판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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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1. 기러기
2. 다카세부네
3. 산쇼 대부
4. 성적 인생

 

<성적 인생>을 제외한 소설들은 이미 타 작품집에서 읽었으므로 국내 초역의 <성적 인생>이 오늘의 관심사다. 이 작품이 게재된 잡지는 당시 발매금지가 되었다고 한다. 현직 육군 장성이 쓴 중편 소설이 외설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니 당시로서는 상당한 스캔들일 수밖에.

 

중년의 한 철학자가 자신의 반생을 성욕적 관점에서 회고한다. 당대 유행하던 자연주의 소설은 작중 인물의 행동을 항상 성적 관념과 결부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이 인생의 본질을 잘 파헤친 것이라는 세간의 호평을 얻었다. 굳이 프로이트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성욕의 시각에서 사람들의 삶을 분석한다면 만사는 모두 성욕의 억압과 왜곡, 발현 등으로 설명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화자는 유년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가 매우 사소할지라도 성적 관점에서 유의미한 사건을 모두 기억에서 끄집어낸다. 가나이의 회상에서 춘화, 음담, 엿보기 등은 우리네들에게도 익숙한 경험이므로 그다지 낯설지는 않다. 게이샤라는 직업군은 우리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잠깐, 수많은 단란주점은 무엇이며, 아래로는 사창가에서 위로는 소위 텐프로에 이르는 음지산업의 활황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인가? 현대에는 과거에는 없는 야사와 야동이라는 용어가 남녀노소 구분 없이 이미 대중에게 친숙한 어휘로 자리 잡았다. 이런 문화적 환경에서 아이들이 성적으로 무균질 환경에서 자랄 것으로 기대할 수 없다. 또 기대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 온실 속의 화초로 키우는 것은 한계가 있다.

 

상대적으로 개방된 성 문화를 가진 일본임을 고려하더라도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은 남색(男色)의 보편화이다. 소년 시절부터 학교 기숙사 등지에서 남색이 성행하여 순결을 지키기 위하여 단도를 필요로 할 지경이었다는 점은 당대 일본의 성 문화의 일단을 알게 해준다. 연파와 경파라는 집단의 구분이 이채롭다. 일본 당국이 발매금지시킨 사유는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유감스럽게도 남색이라는 용어는 요즘 젊은 층에 낯선 표현이지만, 영어 단어인 ‘호모’ 또는 ‘게이’는 매우 친숙하다. 일상생활에서도 스스럼없이 사용할 정도로 보편화되었다. 하기야 서구 일부에서는 동성 결혼도 이미 법적으로 인정하고 있으니 놀랄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모리 오가이가 사회적 파장을 무릅쓰면서까지 이 작품을 쓴 동기를 추정해본다. 우선 작중에도 드러났듯이 자연주의 소설에 대한 반감이다. 인간의 행동과 사건을 성욕적 안경을 쓰고 보는 것은 설사 일단의 진실을 포함하더라도 침소봉대며 과도한 극단화가 아닐 수 없다. 회고담을 훑어보면 기실 성적으로 중차대하고 극적인 사건은 거의 없다. 사랑과 연애의 감정마저도 성욕으로 무리하게 재단하는 사례가 더 많다.

 

그리고 당대 사회의 도덕적 위선과 허울에 대한 거부감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문명화된 사회일수록 외면적 도덕기준과 내면적 행태 간 격차가 심한 법이다. 겉으로는 고상한 척하지만 뒤로는 호박씨를 까는 사람들이 바로 위선자에 해당한다. 작가가 보기에 당대 일본사회는 인간의 자연스런 성적 감정을 억압하고 왜곡하면서 오히려 고상한 척 자화자찬한다. 정말로 같잖고 역겨울 수밖에 없다.

 

성적 인생을 다루었으며 내용도 모두 성욕에 관련되었지만 음란하고 외설적인 느낌은 주지 않는다. 이 글에서 작가의 어조는 지극히 담담하며 관조적이다. 표현도 매우 절제되어 있고 세부 묘사를 아끼고 있다. 그의 문체가 원래 그렇다. 품위와 격조를 항상 유지한다. 흥겹더라도 망가지지 않고 술을 마시더라도 비틀거리지 않는다. 박장대소보다는 미소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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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일족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5
모리 오가이 지음, 권태민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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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오가이의 작품 경향은 독일 유학에서 체득한 근대적 가치관에 근거하여 작품의 테마를 설정한다. 주체적 자아로서의 개인의 발견과 당대 사회 관습과의 갈등 내지 충돌, 그리고 근대적 자아의 좌절. 수백 년간 봉건지배체제 아래서 철저한 신분제와 사무라이 정신의 억압 아래 외면되고 억눌려왔던 개인에 대한 자각이 서서히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남보다 빨리 서양 문물을 접하게 되면서 그는 당대 일본이 얼마나 구체제에 함몰되어 있는지를 깨닫고 문필 활동을 통해 환기와 각성에 진력한다.

 

<무희>의 엘리스와 <기러기>의 오타마는 이십년의 시간적 간극에도 불구하고 근대적 여성형과 전통적 여성형, 또는 서구적 여성형과 일본적 여성형을 대변한다. 엘리스는 화자인 나, 오타와의 사랑에 적극적이다. 화자의 아이를 임신한 그녀는 노모와 작별을 각오하면서까지 화자를 따라 이역만리인 일본으로 따라갈 각오마저 한다. 화자의 배신에 극도의 분노로 제정신을 상실하게 된 것은 서구여인다운 엘리스의 자아 표출임은 오히려 당연하게 여겨진다.

 

한편 오타마는 스스로 스에조의 첩으로 들어가지만, 마음에 없는 결혼 생활과 첩의 지위에 대한 세간의 경시는 오타마의 심중을 불편하게 한다. 서서히 오카다에 쏠리는 그녀의 마음은 다소 일방적이라고 하겠다. 오카다의 감정은 단순한 호감의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 반면 오타마의 감정은 애정의 수준으로 발전하여 오카다를 유혹하고 고백할 결심마저 품도록 한다. 오카다의 출국을 뒤늦게 안 오타마는 슬프고 씁쓸함을 느꼈을 테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 내면으로 삭이고 평상시의 삶을 영위하였을 것이다. 그것이 전형적인 일본의 전통적 여인상이므로. 오카다에게 오타마는 “불행한 기러기”(P.209)에 지나지 않는다. 그냥 기러기에게 돌을 던졌는데 맞아 죽은 것과 같이 오카다는 오타마에게 별다른 감정 없이 그저 호감을 표시했을 뿐이었다.

 

<무희>의 비극적 러브스토리는 독일을 배경으로 한다. 낯선 타국을 배경으로 하여 일본 유학생과 서양여성과의 사랑 이야기는 당대 독자에게 이국적 소회를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작가 자신의 체험을 밑바탕으로 하여 유학시절의 모습이 회고담 형식으로 잘 드러난다. <기러기>는 자신이 공부하였던 도교대학과 그 주변을 배경으로 삼는다. 역시 회고담 형식을 취하는데, 중편 분량에 대학시절, 시노바즈 연못에 이르기까지의 당대 거리 풍경과 인물을 꼼꼼하게 재현하고 있다. 더욱이 고리대금업자 스에조의 치부(致富)와 축첩(蓄妾) 과정, 본처와의 갈등, 오타마 아버지의 삶 등을 통해 당대 사회 풍속의 단면도 치밀하게 보여준다.

 

모리 오가이는 1912년을 계기로 작품세계에 다소간의 변화를 겪는다. 1912년은 메이지 천황이 죽고 당시 육군대장이 순사한 해다. 이때 이후로 그는 일본의 역사에서 작품 제재를 구하고 주제의식도 보다 일본적인 것에 치우친다. 일본의 전통에서 현대에도 드러낼만한 미덕을 탐사하고자 한다. 어찌 보면 진보에서 보수 성향으로 바뀌어간다고 볼 수도 있다.

 

<아베 일족>은 일본 무사도에서 두드러진 현상 중 하나인 순사(殉死)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무사도 정신은 철저한 상명하복(上命下服)을 근간으로 하며, 무사의 명예를 목숨보다 중시한다. 명예를 무시당하거나 상실한 무사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으며,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무릅써야 한다.

 

다다토시가 아이치에몬에게 순사를 허락하였으면 이후의 사단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야이치에몬은 순사 허락을 받지 못한 후 스스로의 의지로 순사를 감행하나 자신은 물론 일족에게도 순사의 명예는 남기지 못하였다. 순사가 무시당하고 일족의 명예가 위태로워진 시점에서 아베 일족의 선택은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새 주군인 다다토시의 아들 미쓰히사에게 죽음을 각오하면서 저항하는 길 밖에 달리 없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만도 못한 치욕만이 그들을 감쌀 것이므로.

 

군주나 영주든 절대지배체제의 지배자는 만인이 자신에게 절대 복종하기를 바란다. 일체의 딴생각 없이 오로지 충성과 명령 이행만을 기대한다. 누구라도 부하가 개별성을 지니고 독자적 판단과 행동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공적으로는 설사 신임하더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항상 의심과 꺼림이 존재한다. 다다토시가 야베 아이치에몬을 바라보는 심경이 그러하였다. 한비자가 말했듯이 유세만이 아니라 처세도 또한 어려운 법이다.

 

“야이치에몬은 스스로의 의지로 주군에게 충성을 다했다. 처음 다다토시는 그저 그에게 반대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뿐이었는데, 나중에 그가 스스로의 의지로 일한다는 것을 알고는 미워졌다.” (P.30-31)

 

순사(殉死)라는 전근대적인 관행이 일본에서 존재하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무사도 정신에 기인한 순수한 충성과 헌신의 표현이 외면적 포장이라면, 기실은 치열한 정치역학이 숨어있음을 여기서 알게 되었다.

 

“순사해야 한다는 스스로의 결의가 있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당연히 순사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자신은 순사를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있었다.” (P.17)

 

전대 영주가 세상을 떠나면 총신과 충신들은 상당수가 순사를 택한다. 응당 순사가 마땅한 인물이 순사를 하지 않으면 그는 명예를 상실하고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배척을 당하게 된다. 새 영주의 입장에서도 연배로나 경력으로나 아저씨뻘 되는 노 가신들이 좌우에서 간섭을 하게 되는 경우는 무척 싫을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구호가 여기에도 유효하다. 순사를 하게 되면 명예가 보존되고 유족들에게도 사회적, 경제적 혜택이 보전된다. 순사를 하지 않으면 명예도 잃고 결국 나중에는 유족들도 불이익을 받게 된다. 순사는 꺼려서도 안 되며 꺼릴 수도 없게 된다.

 

<다카세부네>는 매우 짧고 내용도 간결하며 나타내고자 하는 바도 명료하다. 동생의 자결을 목도한 형이 편히 숨을 끊도록 도와주다가 살인죄로 귀양을 가게 된다. 소위 안락사(安樂死)의 사안이다. 귀양 가는 형 기스케는 마음이 평온하다. 그의 내심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난에 시달리던 그는 귀양살이하는 죄인에게 주는 엽전 200문에 기뻐하고 있다. 이를 지켜보던 호송관리 쇼베에처럼 독자는 기스케의 만족할 줄 아는 마음에 놀라며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려고 동생의 목숨을 끊어준 그를 동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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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오가이 단편집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모리 오가이 지음, 손순옥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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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1. 무희 (舞姬)
2. 마리 이야기 [허무한 이야기]
3. 아씨의 편지 [편지 배달부]
4. 인신매매 산쇼 다유 [산쇼 대부]
5. 최후의 한마디

 

모리 오가이는 나쓰메 소세키와 더불어 일본 근대문학의 제일인자로 인정받는다. 그의 이력을 보면 당대 여타 작가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점이 있는데, 그 군의관 자격으로 독일로 유학을 다녀왔으며 군의총감이라는 최고직위까지 역임하였다. 그의 작품이(특히 초기작의 경우) 독일을 무대로 배경을 삼고 있는 것이 이에 연유한다. 게다가 공직에 바쁜 그가 많은 작품을 남기지 못했으리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이 단편집에 수록된 다섯 편의 공통적 특징은 모두 젊은 여성, 십대 후반의 아가씨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데 있다. 다만 시기적으로 첫 세 작품은 초기에, 나중 두 작품은 후기에 씌어졌고, 공간적 배경도 독일과 과거 일본이라는 차이점을 보인다. 작가가 젊은 여성을 주된 인물로 설정한 것은 우선 자신이 아직 이십대인 만큼 사랑이라는 소재에 관심이 쏠렸다고 이해된다. 봉건적이고 전제적 지배 체제 아래 놓여 있는 일본의 여성들에 비해서 서양 여인들의 처지와 자각 정도는 상대적으로 낫다고 볼 수 있다. 독일 삼부작에서 여주인공들은 독립적 정신의 소유자다. 그들은 가부장적 체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또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설 줄 안다.

 

오가이의 초기 단편들이 인기를 끈 요인 중 하나는 이국정서에 대한 기대감이 아니었을까. 근대화와 서구화를 시작한 일본이지만 서양 본토까지 유학을 하는 사례는 일반적이지 않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서구인과 서구문화에 낯설다. 이때 누군가가 문학적으로 아름다우며 깔끔하게 정돈하여 그네들의 사회와 문화를 보여줄 수 있다면, 그리고 스스럼없이 의사소통을 하고 여인들과 사랑까지도 속삭일 수 있다면 대중의 흥미는 매우 높아질 것이다.

 

삼부작을 통해 오가이의 초기 문학적 특질을 알게 된다. 단정하면서 군더더기 없는 문장. 감정의 진폭이 크지 않으면서도 강렬한 여운을 남기는 말미. 예스러운 멋조차 느껴지는 낭만주의적 분위기, 은연중 배어나오는 따스한 휴머니즘과 봉건질서에 대한 거부감. 그러면서도 기성체제에 편입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체념과 순응의 심적 태도.

 

삼부작은 일본적 특색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보편성을 체현하였다. 작중 인물만 우리 것으로 바꾸면 국내 작가의 작품이라고 소개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것은 모리 오가이가 서구 문화의 세례를 받은 입장에서 아직 일본 고유의 독자적 개성을 발견하지 못한 시기인 듯하다. 이런 면에서 나중 두 작품은 삼십 년이 지난 후 쓰여진 만큼 초기작과는 완연히 다른 색채를 띤다.

 

<산쇼 다유>에서 안주는 강제적 노비의 삶을 탈피한 방법은 탈출 밖에 없다고 판단한다. 동생 즈시오의 도주를 돕기 위해 자신은 기꺼이 목숨을 던진 과감성과 결단력은 여느 성인 남자들에게서도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강인한 행동이다. <최후의 한마디>는 더욱 두드러진다. 참수형에 처하게 된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수령에게 탄원서를 올리고, 차가운 어조로 최후의 진술을 담담하게 내뱉는 사사는 더 이상 연약한 어린 소녀라고 하기 어렵다. 조정은 틀림없이 올바른 판단을 내릴 것이며, 그렇지 못한 조정은 올바르지 않으므로 따를 수 없을 것이라는 단호한 결의가 한마디에 내포되어 있다.

 

“안주는 오늘 아침도 부처님이 사방으로 내뿜는 듯한 밝은 빛의 기쁨을 이마에 띠고 큰 눈을 빛내고 있다.” (P.135)
이것은 동생 즈시오와 영원한 작별을 목전에 둔 안주를 묘사한 대목이다.

 

“......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 눈은 차가웠고, 그 말은 차분했다.......앞서와 같은 차가운 어조로 대답했는데,” (P.170)
관원의 취조와 고문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주저함 없이 당당하게 진술하는 사사의 모습이다.

 

안주와 사사에게 닥친 운명의 타격은 심대하기 그지없다. 그저 절망과 비탄에 빠져 어찌할 줄 모른 채 소리 높여 울부짖더라도 일견 자연스러울 정도다. 도리어 그네들은 절제된 항상심을 갖추고 거칠고 잔인한 외부 풍파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또는 침착하게 받아들인다. 이제 일본의 여성들도 주체성을 당당히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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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층탑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8
고다 로한 지음, 이상경 옮김 / 소화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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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본 근대문학이 서구의 모방과 추종에서 비롯되었음은 분명 사실이다. 외국의 강력한 힘에 굴복하여 개방한 일본으로서는 앞서가는 서구를 뒤쫓는데 중점을 둘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고다 로한의 이 작품은 위와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 대세에 영합하지 않는 의연함을 보여주는 점에서 유독 두드러진다. 전통적 소재를 다루며 고유 가치의 미덕을 드러내 보이는데 주력한다.

 

소설의 도입부도 인상적이다. 작중 화자는 작가도, 작중 두 주요 인물인 겐타와 주베도 아니다. 겐타의 아내 오키치, 주테의 아내 오나미의 독백으로 작중 현실과 인물의 상황이 소개된다. 분량이 많지 않은 만큼 비교적 간단한 플롯에서 사건과 인물간 갈등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에 관심이 쏠린다.

 

겐타와 주베는 여러모로 대비되는 인물이다. 겐타는 큰형님으로 불리며 목수 집단을 거느리는 우두머리로서 실력과 인품 면에서 뛰어난 인물임을 작중 내내 볼 수 있다. 간노지의 중건을 지휘하였으며, 오층탑의 견적도 받았으니만치 그가 탑을 세워도 훌륭하게 해냈을 것이다. 주베는 같은 목수지만 남들로부터 느림보라고 멸시받는 처지다. 남들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말주변도 변변치 않은데다 일할 때는 느려서 기한을 놓치기 일쑤다. 그런 그가 로엔 큰스님을 찾아가서 자기가 탑 건립을 맡고 싶다고 의사를 밝힌다.

 

주베는 정말로 변변치 못한 인물인가? 주베의 아내는 이렇게 한탄한다. “어떻게든 우리 남편 솜씨를 반만이라도 남들이 알아주었더라면 이렇게까지 가난하지는 않을 텐데.” (P.17)
주베 자신의 말이다. “이 주베는 끌과 손자귀를 쥐면 겐타 님이나 누구라도, 먹줄을 잘못 치는 경우가 있을지 몰라도, 주베는 만에 하나라도 뒤지는 일은 틀림없이 틀림없이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P.30)
겐타도 인정한다. “자네가 솜씨가 있으면서도 불행히 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네. 자네가 평소에 박복한 것을 입 밖으로 내진 않지만 마음속으로는 얼마나 울고 있는지도 알고 있네.” (P.59)

 

주베가 주변 사람들의 온갖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오층탑 건립공사를 맡고 싶어 하는 까닭은 목수로서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바램이다. 자신이 결코 실력 없는 하찮은 느림보 녀석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로엔 큰스님은 탑 모형을 보는 순간 이를 깨닫는다.

 

이후 과정은 로엔 큰스님의 중재와, 겐타와 주베의 타협과 갈등의 반복이다. 겐타는 대승적 차원에서 윗사람의 관대함으로 탑 건립을 결국 양보한다. 주베는 공동 작업을 거부하고 단독으로 맡기를 고집한다. 오로지 순전한 자신의 실력과 노력으로 탑을 세우기를 고집한다. 소위 쟁이로서의 자존심. 단 한 마디, “아무래도 주베 그렇게 하는 것은 싫습니다.” (P.61)

 

우여곡절 끝에 탑 건립공사를 맡아서 진행하는 와중에 피습으로 부상을 당하는 주베. 며칠 안정을 취하라는 아내의 당부를 뿌리치며 내뱉는 말에서 그의 절박함과 치열함이 배어나온다.
“만에 하나라도 일을 그르쳐서는 큰스님, 텐가 큰형님께 얼굴을 들 수가 있겠는가? 이봐, 살아 있어도 탑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말야, 이 주베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야.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맡은 일을 완성시키지 않으면 당신 남편은 살아있지 않은 거야.” (P.131)

 

이 소설에서는 일본의 과거와 오늘을 지배하는 미덕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잘 보여준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한결같이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 나가는 장인의 자세. 자신의 일에서는 최선을 다하고 목숨마저 아끼지 않는 정신적 태도. 대승적 관점에서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며 보다 큰 공동의 선과 가치를 위해 협심하는 마음가짐. 여기에 로엔 큰스님처럼 드러나지 않은 명인과 재주를 발견하고 알아주는 안목의 가치.

 

이러한 미덕은 일견 사소하고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이기 쉽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회사 경영이 어려워 부도가 나서 회생이 불가능할 때 대표이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사죄하고 책임지는 모습을 국내 기업에서 보기는 어렵다. 조그만 음식점을 몇 대째 이어서 가업으로 이어나가는 후손들과 조금만 맛집으로 소문나면 반짝 대박을 기대하며 무리수를 두거나 자식에게는 고생을 넘겨주지 않겠다는 우리네 사람들과 비교해 보라. 진정한 장인정신의 차이라고 할 것이다.

 

고다 로한은 이 소설에서 문학적 형상화를 통하여 보여주고 강조하는 요지가 바로 이것이다. 비록 근대화를 위해서 서구화를 지향하더라도 무분별하게 휩쓸릴 것이 아니다. 불가피하더라도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자세와 중체서용(中體西用)의 마음을 유지하자. 이것은 편협한 국수주의와 묵수(墨守)적 태도와는 다른 차원이다.

 

작중 인물에 부정적 유형이 없다는 게 또 하나의 특색이다. 겐타 부부와 주베 부부, 성인과도 같은 로엔 큰스님, 물론 간노지의 몇몇 인물들은 일부 아쉬운 점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긍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세키치조차도 겐타에 대한 존경과 충성의 염(念)을 품고 피습을 저지른 것이지 성품 자체가 악한 인물이 아님은 세키치와 오키치 간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다.

 

간노지 오층탑 건립이라는 고덕(高德)한 보시를 서로 맡고자 벌이는 긍정적 인물들. 도중에 다툼과 불화가 있었지만 마침내 이루어진 오층탑 앞에서 이루어지는 인물들 간의 화해와 대단원. 인물들을 둘러싸고 사건을 해피엔딩으로 이끄는 고유의 전통적 가치들. 다소 작위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내용과 구성임에도 훈훈한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은 역시 작가의 탁월한 솜씨 덕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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