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쓰미추나곤 모노가타리 일본명작총서 7
유인숙.박연정.박은희.신재인 옮김 / 문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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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 작품>

벚꽃을 꺾는 쇼쇼

연상

벌레를 좋아하는 아가씨

어울리는 상대를 연모하네

사랑하는 여인을 얻지 못하는 곤추나곤

가이아와세

뜻하지 않게 다른 아가씨와 밤을 지낸 쇼쇼

꽃과 같은 아가씨들

그을음

부질없는 이야기

 

11~12세기 무렵 헤이안 시대 말기에 편집된 단편 모노가타리 모음집이다. 이 작품집에는 일본 최조라는 수식어가 붙는데, 통상의 모노가타리는 장편에 해당하는 반면 여기 실린 모노가타리들은 단편들이라는 점이 이채롭다.

 

이 모음집의 단편들은 앞서 읽은 <이세 이야기> 같은 우타 모노가타리 류가 아니므로 작품을 이끌어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산문으로 된 이야기다. 물론 매 작품마다 와카가 몇 편씩 등장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헤이안 시대에 와카가 그만큼 개인의 감정을 표현하거나 상대방에게 호소하는 수단으로 정착되어 있음을 뜻한다.

 

장편과는 단편의 특성상 짧은 분량에 핵심 되는 사건이나 인물 소개, 아니면 이야기가 완결되어야 하므로 필체는 간략하면서도 개성적인 소재를 집중력을 갖고 다루고 있어 흥미롭다. 개별 작품들을 간략히 훑어보면 그 독자성과 주안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벚꽃을 꺾는 쇼쇼>는 아름다운 아가씨를 보쌈 하는 이야기다. 마지막의 (보쌈한 여인의 실체에 대한) 반전이 묘미라고 하겠다.

 

<연상>은 세 편의 짧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여타 작품과는 성격이 다른 간결함이 특징이다. 뒤의 두 편은 이야기가 완결되지 않아서 여운을 독자의 가슴에 드리운다.

 

<벌레를 좋아하는 아가씨>는 소재 자체만으로도 주목을 끈다. 당대의 풍조와는 전혀 다른 엉뚱한 아가씨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는 남성. 뒷이야기는 다음에 이어질 것이라며 무 자르듯 싹둑 끊어버려 결말을 궁금해 하는 독자를 아쉽게 한다.

 

<어울리는 상대를 연모하네>는 젊은 남녀들 간의 짝짓기를 다룬다. 시종들과 그들의 주인들이 각각 연분을 맺게 되는데, 주인 남자의 일견 후회하는 듯한 마지막 대목이 묘하다.

 

<사랑하는 여인을 얻지 못하는 곤추나곤>은 단오절에 벌어지는 전통 행사인 네아와세를 배경으로 하여 그네들의 전통 축제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수 있다. 창포 뿌리와 창포 노래 경연을 벌이는 이 행사에서 외모는 물론 출중한 실력을 선보여 뭇사람들의 찬탄을 받은 곤추나곤이 정작 사랑을 갈망하는 여인으로부터는 아무런 보람이 없다.

 

<가이아와세>에서 외톨이 신세의 전처의 딸과 계모의 딸 간 조개 경연은 전자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다. 우연히 알게 된 주인공이 딱하게 여겨 이길 수 있도록 몰래 도와준다.

 

<뜻하지 않게 다른 아가씨와 밤을 지낸 쇼쇼>에서 영락한 귀족 집안의 아름다운 두 딸이 각각 당당한 집안의 청년들과 정을 주고받는다. 그들의 사랑은 남자 부모의 반대로 몰래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실정. 실수로 바뀐 연인과 같이 밤을 보낸 여인들의 망연한 심정. 두 남자는 자매 모두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그들의 앞날은...

 

<꽃과 같은 아가씨들>은 여인들이 자신들이 모시는 여주인을 여러 꽃들에 비유하여 평하고 이어서 꽃을 소재로 한 와카를 서로 노래한다. 여주인의 특장과 상황을 다양한 꽃들에 절묘하게 비유하는 재치와 묘미가 뛰어나다. 후반에서는 이를 지켜본 한 호색한이 그 여인들을 품평한다.

 

<그을음>은 한 남자를 둘러싼 전처와 후처 간의 대조적 처지 변화가 슬픔과 웃음을 자아낸다. 표면상 분명히 아름답고 착한 전처의 해피엔딩에 기뻐하게 되지만, 돌이켜보면 후처에게는 무슨 잘못이 있었던가? 그렇다면 오락가락하는 남자 역시 시대와 제도의 피해자라고 하겠다.

 

<부질없는 이야기>는 한 승려가 제자인 귀족집 아가씨에게 몇 가지 물건을 달라고 요청하는 서신문 형식을 사용한다. 심산에 은거하겠다며 요구하는 품목이 꽤나 거창하지만 결국은 용두사미와 같이 하찮은 물품들이다.

 

각 작품들은 이와 같이 소재와 형식, 내용과 기법 면에서 뚜렷한 개성미를 보여준다. 가볍게 생각하면 옛 일본의 재밌는 이야기 몇 편을 흥미롭게 감상하는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대한 수요와 관심은 시대를 불문하고 항상 있어오지 않았는가.

 

이 책에는 후반부의 작품 해설 외에도 전반부에는 두 편의 해설-‘시대와 문화를 통한 헤이안 문학 되돌아보기헤이안시대의 결혼과 연애풍속도’-이 따로 붙어 있다. 이는 뒤의 모노가타리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 개념과 이해의 밑바탕을 소개하는 취지다. 전자는 일본은 물론 세계사적으로도 이른 시기인 헤이안시대의 문학이 급작스럽게 번성하게 배경을 밝히고 있다. 가나문자의 정착, 섭관정치로 정착된 귀족문화, 독특한 뇨보 문화의 전개 등이 주된 사유라고 한다.

 

한편 후자는 당대의 연애와 결혼과 관련된 문화를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결혼해도 동거하지 않는 쓰마도이곤문화, 남편이 저녁에 아내의 집을 방문하여 머물다가 새벽에 돌아온다. 노래나 편지를 통한 연애의 시작과 결혼 및 자연 이혼의 요건도 이색적이다. ‘기누기누 노래는 남녀가 잠자리를 함께 한 다음날 남자가 감사의 편지로 보내는 노래라고 한다. 이를 보내지 않는 것은 당대의 에티켓에 매우 어긋났다고 하니... 아울러 뛰어난 여류 문학 작품을 남기게 된 뇨보(女房)의 신분과 역할도 알려준다.

 

이 해설은 내용 이해와 숨은 의미를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앞서 읽었던 <이세 이야기>의 많은 와카들에서 표면상 간과하였던 무수한 함축된 배경 중 다수도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문학은 결코 시대와 동떨어져 있다. 작가는 시대의 문화와 공기를 호흡하며 은연중 그 숨결을 자신의 작품 속에 깊숙이 새겨 넣는다.

 

헤이안시대의 여인을 상상해본다. 허리 아래로 늘어뜨릴 정도의 긴 머리는 미인의 필수 요건이다. 얼굴은 매우 희고, 눈썹을 뽑고 먹으로 그리며, 치아는 검게 물들인다. 그래야 흑백의 대조 효과로 흰 얼굴이 더욱 두드러지게 된다. 그네들은 집안에 칩거하면서 상대방 남자들이 와카나 편지로 접근하기를 학수고대한다. 연분을 맺고 혼인을 치르더라도 대개의 경우 동거를 하지 않으며 남편이 방문하기를 오매불망 기다린다. 연달아 오지 않으면 버림받은 신세가 되는 것이므로 언제쯤 오려나 전전긍긍이다. 임금이 처첩들의 방을 밤마다 순례하는 사극이 연상된다.

 

반대로 남자는 행동이 자유로우므로 오며가며 곁눈질의 유혹에 노출되기 쉽다. 예로부터 일본은 성()에 관한 한 개방적인 민족이었다. 사촌과 결혼하거나 여기서처럼 두 명의 아내를 갖거나 또는 두 자매와 동시에 사랑을 해도 심각한 사안으로 인식되지 않을 정도로.

 

그래도 그녀들은 뒷세대를 바라보면 위안을 삼을 만하다. 막부와 전란의 시기를 거치면서 여인들의 자유는 더욱 억압되었고 철저하게 남성에게 예속되는 처지로 전락하였다. 헤이안시대의 찬란한 개화는 곧이어 기나긴 엄동설한에 움츠려야만 했다. 수백 년 후 근세 일본의 여류작가인 히구치 이치요는 자신의 신세가 일개 보잘 것 없는 여인임을 자탄하고 있다.

 

일본 문학을 번역할 때 선택의 문제가 발생한다. 인명과 지명, 관직명 등의 고유명사를 표기하는 방식에서 원어 충실과 내용 충실의 갈등이 존재한다. 그나마 최근에는 인명(풍신수길 ->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과 지명(동경 -> 도쿄 등)은 얼추 합의가 이루어진 듯하다. 애매한 경우가 관직명이다. 작중에서 쇼쇼, 주조, 추나곤, 다이나곤, 우다이쇼, 아제치는 모두 벼슬 이름으로서 한자어로 번역하면 소장, 중장, 중납언, 대납언, 우대장, 안찰사가 된다. 이중 일부는 우리 옛 관직명과도 유사하므로 귓전을 튕겨나가는 일본어보다는 훨씬 이해가 용이하다. 실제로 지금 읽고 있는 <우게쓰 이야기>의 역자는 관직명을 우리식 발음으로 옮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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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 이야기(伊勢物語)
구정호 엮음 / 인문사(도서출판)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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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고전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모노가타리(物語)는 형태상 쓰쿠리 모노가타리와 우타() 모노가타리로 구분할 수 있다. 후자는 노래와 산문이 혼재된 형식이며, 이때 노래는 전통 시가인 와카(和歌)를 의미한다. 그리고 최초의 우타 모노가타리 작품으로 꼽히는 작품이 9세기경의 <이세 이야기>이다.

 

우리 옛글도 아니고 세계적 고전 명작도 아닌 작품에 일반 독자들이 관심을 가질 일은 거의 없다. 이 번역본은 일본고전을 연구하는 후학들을 위한 책이다. 번역문뿐만 아니라 원문도 수록하였으며, 충실한 주석을 달았고 수록된 와카를 찾아보기 쉽도록 색인도 추가하였다.

 

  

<이세 이야기>의 작품 성격은 해제에 잘 소개되어 있다.

 

“<이세 이야기>는 총 125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인공인 어떤 남자가 초단에서 성인식을 치루고 마지막 단인 125단에 이르러 세상을 하직하는 일대기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 헤이안 시절의 귀족의 이야기다.” (P.8)

 

주인공인 어떤 남자는 아리와라노 나리히라라고 하는 실존 인물을 빌려온 것으로 내용에는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 있다. 이 작품에서 다루어지는 가장 커다란 사건은 주인공과 두 여인 간의 사랑이다. 전반부에서는 니조노 이사키라는 황실의 여인과, 중반부에서는 이세신궁의 재궁으로 있는 여인-역시 황실의 여인-과 각각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을 나눈다. 둘 다 허구의 사건인데 당대 독자의 흥미를 유도하기 위하여 가공의 스캔들을 삽입한 것으로 설명된다.

 

각 단의 시작은 대개 유사한 패턴을 보인다. 상당수가 옛날에 (, 어떤) 남자가 있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간략한 이야기가 소개되고 와카로 마무리한다.

 

색인을 제외하고 해제와 본문을 합하면 270면 정도의 분량인데, 절반가량은 원문이므로 실제 가독 분량은 그리 많지 않다. 전체적으로 일독을 한 후의 소감은 별로 재미는 없다고 요약할 수 있다. 각 단의 내용상 핵심은 이야기가 아니라 와카인데, 운문의 특성상 번역문을 통해서는 원작만의 기법상, 정서상 미묘함을 파악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이 여기서도 유효하다. 더구나 와카는 정형시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동음이의어를 활용한 언어 유희적 기법이 자주 쓰인 점도 인상적이다.

 

시적 진미를 제쳐놓으면 천년 이전의 일본인들의 감수성은 현대인들과 그리 멀지않음을 알게 된다. 아름다운 이성에 한눈에 반하여 사랑을 갈망하고, 연인의 무정한 마음에 가슴 아파하며, 다투고 헤어져서는 눈물과 한숨에 젖어든다. 사랑 이야기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그 밖에는 빼어난 경치의 찬미 또는 권력자에 대한 경의 등을 읊조리기도 한다.

 

솔직히 말해서 해제에서 언급한 일대기 형식을 염두에 둘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일관된 줄거리를 갖춘 인물의 삶을 추적하는 일대기가 아니다. 중간에 주인공을 상기시키는 이야기들이 등장할 뿐 거의 대다수는 어떤 남자와 어떤 여자 간의 사랑 관련 에피소드이며 이것을 반드시 주인공의 행위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만큼 각 단의 독립성이 강하여 하나씩 따로 읽더라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즉 별개의 이야기와 와카 모음집으로서.

 

당시 일본은 국가 체제가 정비되고 가나 문자가 발명되며 후지와라 가문을 중심으로 하는 신분제적 귀족정치가 안정됨에 따라 정치적 격변이 가라앉게 되었다. 정치적 안정은 자연스레 고급문화에 대한 수요와 필요를 낳았고 세련된 교양의 중요성이 대두되었다.

 

여기서 미야비라고 불리는 풍류, 멋스러움, 세련됨 등과 같은 풍조가 유행하고 우대받게 되었다. 멋진 남성 또는 여성으로 인정받으려면 무엇보다도 외모의 아름다움이 중요하지만 그게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세련된 복장과 품위 있는 언행, 그리고 와카를 자유롭게 지을 수 있는 능력 등이 열정적인 사랑과 결합되어야 진정으로 미야비를 갖춘 것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무수한 사랑 일화가 등장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당시의 시대적 문화적 풍조는 그것을 예찬하고 격려하였다. 각 단의 이야기와 와카를 다소간의 지루함을 참고 차근차근 읽어나가다 보면 당대인들의 감정과 사고에 문득 친숙하게 다가옴을 깨닫게 된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의 틀을 인정하면서도 계급을 뛰어넘어 사랑을 이루려다가 좌절하고, 수도를 떠나 정처 없이 지방을 방랑하면서 마주치는 여인들과의 인연, 그리고 잊지 못하는 사랑에 대한 아쉬운 탄식.

 

실존 인물의 반영과 허구의 사건 등을 도입하고, 이야기와 운문이 뒤섞인 이 작품에서 때와 곳, 문화를 달리하는 우리들이 느끼고 이해할 점은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두면 이 책은 학술적 의의를 떠나 일반 독자에게도 충분히 소구할 만하다.

 

 

참고삼아 짤막한 제3단을 소개한다.

 

옛날에 한 남자가 있었다. 마음에 둔 여자에게, 녹미채라는 것을 보내려고,

 

사랑한다면 덩굴풀 잠자리도 나는 괜찮소

비록 이부자리로 옷소매 깔더라도

 

니조노 기사키가 아직 천황을 섬기지 않으시고 보통의 사람으로 계셨을 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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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하게 피는 꽃 이치요
히구치 이치요 지음, 박영선 옮김 / 북스토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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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절한 일본 근대의 대표적 여류 작가의 일기 모음집이다. 기본적으로 작가가 공개를 염두에 두지 않는 일기의 출간에는 다소 부정적 입장이지만, 저명한 문인 및 학자들의 사후 출간된 일기를 무작정 외면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읽고 싶은 강한 흥미를 느끼게 하는데, 한 개인의 내밀한 사적 영역을 엿보는 일종의 관음증적 욕망과 함께 겉으로 언명되지 않아 더욱 진실에 가까울 수 있는 저자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음에서이다.

 

이백면 정도 분량의 이 책이 히구치 이치요가 쓴 일기 전부를 수록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15세와 19세 이후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기록을 보건대 일부만 공개된 게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할 따름이다. 독자는 여기에 담고 있는 내용만 보더라도 히구치 이치요의 삶의 척박함과 굳건한 의지, 문학에의 열정을 공감하기에 충분하다.

 

문학 수업과 연관 지을 수 있는 활동은 15세부터 시작한 와카(和歌) 수업과 19세에 나카라이 도스이와의 만남이다. 수년 간 지속된 와카 수업은 그녀의 독특한 문체적 특징을 형성하고 그녀의 작품에서 쉽사리 발견할 수 있는 시적인 간결함과 정서적 기조를 갖출 수 있도록 하는데 일조하였을 것이다. 한편 나카라이 도스이를 통해서는 본격적인 소설 작법을 수업하였을 것이며 그녀가 문단에 진출하는 데도 도움을 받는다.

 

그녀의 삶에서 나카라이 도스이는 양가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문학적 스승으로서 존경심을 품었던 그에게 또한 스캔들 유포로 인한 실망감과 배신감을 갖기도 하였고 심적 혼란은 이치요에게 극심한 영향을 미쳤음을 일기에서 여실히 찾을 수 있다.

 

나는 너무나 깜짝 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나카라이 선생님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너무나 결백한 나에게 있지도 않은 오명을 씌우고, 자기 자신은 사람들에게 기세등등한 얼굴을 하다니! 너무나 미워서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다.” (P.78)

 

나카라이 도스이에 대한 감정은 존경과 사랑의 감정이 혼재되어 있었을 것이다. 갓 스물을 넘은 그녀가 지속적인 교제를 하는 유일한 남성, 선배 문인, 가르침을 받는 존경하는 선생님 등 이런 감정을 갖는 것은 당연할 수 있다.

 

19세 자신의 일기에 새싹 사이로라는 제목을 붙인 그녀. 자신의 글을 평하기를 꽃의 아름다움도 없고 문장도 요염하지 않다”(P.16)라고 하였다. 그녀는 알았을 것이다. 아름다움과 요염함이 문장의 본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잎을 통해서 가지와 줄기로 면면히 흐르는 강인한 생명력이야말로 진실한 기초이자 핵심임을.

 

그녀에게 소설은 한낱 여흥과 여기가 아니었다. 현실적으로는 엄연히 가족의 생계수단이지만

경박한 대중에게 영합할 의사는 추호도 없다. 일기를 통해서 이치요의 솔직한 소설관을 알게 된다. 그녀에게 소설은 자신의 온 생애를 쏟아 부어야 하는 필생의 과제이다.

 

나역시 소설가라 그저 그런 작가의 작품처럼 한번 읽고 곧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그런 글은 쓰지 않으려 한다......인간의 진심에 호소하는 것을 쓰고, 인간의 진심을 그려낸다면 설령 단 한 장의 작품이라도 문학으로서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P.62)

 

일기 곳곳에 그녀 삶의 궁핍함을 느낄 수 있는 대목들이 많다. 부족한 생활비로 고심하고 돈을 빌리고 원고료에 일희일비하는 이치요. 일기가 아니라면 적나라한 그녀의 탄식을 어디에서 들을 수 있겠는가.

 

이번 달은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겠다. 아아, 쌀도 떨어지고, 돈도 전혀 들어올 것 같지 않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무조건 붓을 들고 뭔가를 쓰는 일밖에 없다. 그렇게 해도 원고료 한 장 값은 얼마 안 된다.” (P.153)

 

요시하라 유곽 근처로 이사한 일은 그녀에게 매우 상심되는 사건이었다. 21세 그녀의 일기는 티끌에 묻혀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영락해가는 자신의 환경을 티끌 속에 묻혀버리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 이런 그녀가 걱정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은 의외로 사랑의 상실에 대한 우려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초라해져 버려 일생동안 그 선생님도 뵐 수가 없을 것 같다. 결국 나의 사랑은 흘러가는 구름처럼 허무하게 사라져버리고 말 것인가......두번 다시 만나주지도 않을 테고......” (P.114)

 

절교하였지만 나카라이 도스이에 대한 감정의 끈을 놓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며 두 사람은 나중에 오해가 풀리고 다시 교제를 재개하게 된다.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 히구치 이치요는 오히려 마음을 단단히 추스른다. 역경에 굴하지 않고 시련은 오히려 그녀를 더욱 옹골차게 만든다.

 

나는 이 인간 세상에 고통과 실망을 위로하기 위해 태어난 시신詩神의 자식이다. 교만한 자를 포용하고 고통속에 있는 사람을 구하는 것이 나의 의무이다. 그래서 한시라도 자신에게 경계를 게을리할 수 없다. 내가 쓰러져 죽는 그 순간까지 이 미를 향한 정신을 남기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이 멸망치 않는 한 나의 시(소설)는 사람들의 생명으로 남게 될 것이다.” (P.142)

 

22살의 봄날에 그녀는 확고한 결심을 굳힌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추구해야 할 길, 자신의 앞에 높인 가시밭길을 헤쳐 나갈 각오를 다진다. 이것이 기적의 14개월을 이룩하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내 마음은 이미 천지자연과 일체이다. 나의 뜻은 국가의 대본大本이다. 힘이 모자라 쓰러져 내 몸이 들판에 버려져 굶주린 개의 먹이가 될 지라도 뜻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바칠 것이다.” (P.143)

 

어느 날 문득 그녀의 작품들이 잇달아 세상의 호평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키재기>는 당시 문단의 양대 산맥인 모리 오가이와 고다 로한 양자에게서 극찬을 받게 되었다. 세인들의 열광적인 호응과 칭찬에도 이치요의 심경은 오히려 차분하고 담백하다. 기쁨에 못지않게 슬픔을 토로한다. 찬사와 비방을 손바닥 뒤집듯 거리낌 없이 하는 세상의 명성은 헛되고 덧없음을 그녀는 알고 있다.

 

마지막 해의 220일자 일기를 살펴보면 이것이 대체 24살 한창 때의 아가씨의 글인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그녀를 염세가로 지칭하는 이들도 있다고 하는데, 분명히 글을 통해 본 그녀는 염세적 성향을 풍긴다. 가난과 고독, 허약한 몸 그리고 몰인정한 세상인심은 이치요를 오래전부터 서서히 갉아먹고 있었다. 그리고 회복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저 별 볼일 없이 써 놓은 글은 세상에 내면 대단한 작가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과장되게 칭찬을 남용해 놓고는 내일을 같은 입으로 비방을 한다. 얼마나 기막히고 허무한 일인가.

매일 만나는 사람 중에서 단 한 사람도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다. 나를 정말 이해해주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니, 나 혼자 이 세상에 태어난 생각이 든다. 정말 견딜 수가 없다.” (P.173~174)

 

부족하나마 이 일기를 통해서 우리는 히구치 이치요에 보다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책의 표제대로 그녀는 치열하게 피는 꽃이었다. 그 꽃이 아름답거나 요염하지는 않더라도 개화를 위해 몸부림친 그 치열함만은 적어도 인정해야 한다.

 

히구치 이치요가 무라사키 시키부와 세이 쇼나곤을 평한 대목이 있다. <겐지이야기><마쿠라노소시>의 작가들이므로 유독 관심이 쏠렸다. 무라사키 시키부와 비교하면 쇼나곤의 재능에 비해서 인덕의 부족함을 인정한다. 넉넉하지 못한 생활형편 상 노력하고 키워야 하는 인덕의 양성 면에서 미흡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녀와 자신의 불우한 처지에 공감을 한 탓인지 쇼나곤에 대해서 이해와 동정을 아끼지 않는다.

 

소일거리로 썼다고 하는 마쿠라소시를 읽어보면 표면적으로 단풍잎 같이 아름답기만 해보이지만, 두세 번 읽다보면 애처롭고 쓸쓸한 마음이 그 속에 깃들어 있다.”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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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스필드 파크 2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7
제인 오스틴 지음, 김지숙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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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제인 오스틴에게,

 

앞서 띄운 서신에서 당신이 어떤 식으로 작품을 전개할지 무척 궁금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특히나 말미에 공언된 패니에 대한 헨리의 유혹 말이지요. 서둘러 2권을 읽어나가면서 당신이 독자의 심리를 꿰뚫어 보는 정확성에 새삼 놀라게 됩니다.

 

1권과 동일한 패턴으로 2권이 전개되었다면 인내심이 부족한 독자들은 지루함을 못 이겨 이내 읽던 책을 내던지고 자리를 박차고 나설 것입니다. 가련한 독자들의 바램은 매우 소박합니다. 착하고 겸손한 우리 패니가 헨리의 유혹을 잘 견디기를 바라며, 마음 한구석에 간직한 사촌오빠 에드먼드에 대한 사랑이 행복한 결실을 거두기를 간절히 소망할 따름입니다. , 또 하나 있군요. 패니를 그렇게도 구박하는 노리스 이모가 응분의 보답을 받았으면 하는 것이지요. 그래야 고진감래와 사필귀정이 권선징악으로 이어지는 상투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진정한 대단원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반부 플롯의 대세는 패니에 대한 헨리의 끈질긴 구애입니다. 작중에서 헨리는 비록 악역이지만 제인 당신은 그에게 동정할 미덕과 여지를 남기고 있습니다. 패니의 아름다움을 최초로 깨달은 사람이 바로 헨리 아니겠습니까. 헨리가 패니에 관심을 기울인 연유도 실상은 여느 아가씨와는 다른 미덕을 발견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불순한 동기로 시작된 헨리의 사랑놀이는 얼마 후 불타는 진실한 감정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지요. 이때부터 패니 대 헨리 및 맨스필드 가문 간의 팽팽한 대치가 시작됩니다. 패니는 매우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헨리의 성격상 결점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부유하면서 훌륭한 신사의 전형일 수밖에 없으니 패니의 거절을 이해하기 어렵겠지요. 패니를 한순간에 난처한 궁지로 몰아넣은 제인 당신의 솜씨와 한편 비정함에 아연할 따름입니다.

 

당신이 구성한 결말과 다르게 헨리와 패니가 맺어졌으면 어떨까 궁금합니다. 솔직히 무리한 추론은 아니지요. 당신은 패니의 마음이 조금씩 약해지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었으니 헨리가 시간의 도전을 극복했다면 충분히 가능한 전망입니다.

 

헨리가 이상하리만큼 좋아졌다. 좀 전에도 패니는 그 생각을 했었는데, 그녀의 생각의 흐름 속에서 가장 위안에 가까운 것은 이것뿐이었다......패니는 자신의 건강과 안락을 그토록 염려하는 헨리의 말투와 태도에서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그토록 자신에게 섬세하게 신경을 써주는 만큼 그녀가 몹시 괴롭게 여기면서 완강하게 거절해온 구혼을 이제는 받아들여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드는 것이었다.” (P.266)

 

마음을 다잡은 헨리의 끈질긴 구애에 패니가 마음을 열고 청혼을 받아들였다면, 헨리가 러시워스 부인과 도주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겠지요. 패니의 감화로 헨리는 점차 바람직한 모습으로 변화하였을 테죠. 에드먼드와 메리 사이도 바램대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아졌을 것이며 에드먼드의 다소간의 실망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모든 사람들이 커다란 불행 없이 그네들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는 재미가 없겠죠. 독자들도 이를 바라지 않고요. 톰은 중병에 걸리게 하고 러시워스 부인은 헨리와 다시 만나 가정을 버리는 극단적 선택을 하며 줄리아마저 애인과 줄행랑을 칩니다. 토머스 경의 입장으로서는 통탄할 노릇일 테죠. 메리의 근본적 성격상 흠결을 깨달은 에드먼드의 결별, 이혼당한 마리아를 돌보기 위한 노리스 이모의 자발적 은거. 사건 진행은 일사천리로 급속도로 흘러갑니다. 1권의 유유자적하고 느릿느릿함에 비하여 폭풍 같은 전개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겁니다. 격류의 대단원은 에드먼드와 패니의 결혼으로 이어지는 거죠. 모두가 열렬히 기대마지 않은 바로 그것.

 

결론적으로는 제인 당신은 독자층의 기대에 부응하여 당신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해피엔딩으로 이끌어 가는데 성공합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여전히 이색적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답니다. 왜냐고요?

 

줄리아가 감행했던 사랑의 도피는 이전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소재였으므로 새롭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미혼 남녀의 섣부른 행동은 결국 결혼으로 무사히 수습되었으니까요. 떳떳하지는 않지만 도덕적으로 지탄의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결혼한 여성의 경우는 다르지요. 마리아의 간통과 가출은 이제까지 당신의 작품 성향에 비추어 볼 때 이례적으로 파격적인 소재입니다. 당신의 지론은 가족 간, 연인 간 티격태격하더라도 결국은 행복으로 귀결된다는 밝고 긍정적인 플롯을 항상 지향하고 있었지요. 이 작품에서 처음 일탈이 나온 겁니다. 당신이 대충 아무런 소재나 끌어다 쓰지는 않았을 테지요. 작품 세계에서 이전과 다른 시도를 하려고 했던 것 아닌가요.

 

메리에 대한 패니의 감정과 평가는 어떠했던가요. 패니는 사촌오빠와 메리의 교제를 대단히 불만족스럽게 받아들입니다. 자신과 메리의 친분에 대해서도 탐탁지 않아 합니다. 결과론적으로 봤을 때 옳은 판단이라고 할 수 있지만 중간 대목에서는 패니의 질투라고 밖에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메리에 대한 부당할 정도의 잇따른 비판과 두 사람 간의 진척에 극도의 초초함을 표명합니다. 사촌오빠에 대한 순수한 애정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정도가 과하다는 뜻입니다.

 

역시 천성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어서 메리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마음은 바르지 않은 쪽으로 치닫고 눈이 멀어 있는 건 분명한데도 자신은 그것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그러므로 패니가 메리의, 앞으로의 향상 가능성을 거의 절망적으로 봤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P.199)

 

패니가 포츠머스에 있는 친 가족을 방문하여 머무르는 장면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 작품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패니는 맨스필드 파크에서 괄시받는 처지에 있어서 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환상을 한켠에 지니고 있었지요. 이것이 산산이 부서지고 전혀 회복이 되지 않습니다. 특히나 부모에 대해서는 구제불능으로 창피하게 여길 정도지요. 그녀에게 있어 진정한 가족은 낳아준 부모가 있는 곳이 아니라 바로 맨스필드 파크가 된 것이지요. 이것은 북적대는 가족들 간의 아옹다옹을 정답고 행복한 모습을 그렸던 여타 작품들과는 상당히 대조적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리고 패니의 성격과 관련하여서인데 맨스필드 파크에서 패니는 거의 아무런 자율성을 보장받지 못하고 매사에 수동적이고 의존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포츠머스의 생가에서 그녀는 기대고 의존할 존재에 없습니다. 자신의 판단과 행동을 통해 사태의 악화를 막아야 하고 조금이나마 개선시키려고 노력을 해야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되니 비로소 그녀에게 감추어져 있던 독립성과 자율성이 발현되었던 겁니다.

 

자기 명의로 무엇이 된다는 것이 놀랍고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이 경이로울 뿐이었다. 패니는 누구의 강요도 받지 않고 스스로 읽고 싶은 책을 자기가 직접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P.244)

 

이것이 매우 중요하였던 점은 풍비박산이 난 맨스필드 파크에서 버트램 가 사람들을 위로하고 의지가 되며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던 사람은 패니가 유일하였다는 데 있었습니다. 매사에 소극적이고 구석이나 다락방에서 숨어 눈에 띄지 않았던 그녀가 자신의 겸손과 분별을 유지한 채 전면에 당당히 나설 수 있는 토대가 포츠머스에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여곡절 끝에 패니는 당당한 주인공으로서 에드먼드와 사랑의 결실을 이루었습니다. 관찰자의 지위에서 우려를 극복하고 중심인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독자들도 충분한 보답을 받았지요. 2권에서는 앞서 와는 달리 밀고 당기는 사랑의 줄다리기, 자신과 상대방의 세밀한 심리와 행동에 대한 치밀하면서 미묘한 묘사 등 제인 당신에게 기대할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을 재발견할 수 있었으니까요. 무엇보다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흥미로움과 읽는 재미가 두드러졌답니다.

 

이제 당신이 공들여 쌓아온 맨스필드 파크를 떠날 시간이 되었군요. 다음 행선지는 아마도 노생거 사원이 될 것 같습니다. 다만 바로 향하지는 못할 것 같고, 당분간은 일본 중세와 근세를 한번 돌아볼 생각입니다. 그럼 다시 만날 때를 기약하며 여기서 작별을 고합니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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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스필드 파크 1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6
제인 오스틴 지음, 김지숙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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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제인 오스틴에게,

 

당신이 남긴 여섯 편의 소설 중에서 어느덧 네 편째를 읽고 있군요. 남은 두 편인 <노생거 사원><설득>은 사후에 발간된 작품들이니 생전에 당신이 심혈을 기울여 다듬은 작품으로서는 마지막입니다.

 

당신의 작품들은 국내 출판계에서 꽤나 인기 있는 아이템이기도 합니다. 유독 이 작품 <맨스필드 파크> 만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가 오히려 이상한 정도지요. 왜 그럴까요? 작품의 분량이 가장 방대한 점이 아무래도 다소간 영향을 미치겠지요. <엠마>의 경우 무리해서라도 한 권으로 수록이 가능하지만 이 작품은 두 권으로 분책이 불가피합니다.

 

이 작품은 여타 작품들과 전개방식과 분위기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당신의 작품들에서 기대하는 경쾌하고 발랄한 진행과 재치 있는 대사와 유머 감각 등과는 다른 뭔가 낯설고 이질적인 요인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대중독자들에게는 동질감을 느끼기 어렵게 하는 듯합니다. 당신은 여기서 작풍의 변화를 꾀하고 있던 게 아니었을까요?

 

먼저 주인공을 보면 다른 소설들에서는 중심 화자가 곧 주인공이었지요. 모든 사건은 주인공을 둘러싸고 발생하며 독자는 주인공의 눈을 통해 사건의 전개를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소설에서는 패니 프라이스가 중심 화자의 역할을 담당하는데, 주인공인 듯하면서도 사실은 작중에서 충실한 관찰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적어도 1권에서는 말이지요. 작중의 사건은 맨스필드 파크의 집안 식구들과 헨리 자매들 간에 복수적으로 발생하며 패니는 옆에서 한발 비켜난 상태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사실 당신의 작품들에서 관찰의 의미는 매우 중요합니다. 당신이야말로 세심하며 충실한 관찰자로 불릴만합니다. 당신의 글을 통해 우리는 18세기 영국 귀족사회와 그들의 가정생활 및 문화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패니가 중심인물이 아니다 보니 관찰이 사건전개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지 못하고 단조롭게 흘러가는 인상을 주는 것은 어쩌면 불가피하겠지요.

 

소설의 초반부는 맨스필드 파크의 가족사와 패니가 이종사촌의 집에 오게 된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이어 어린 패니가 아가씨로 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지요. 그렇습니다. ‘성장이 들어가 있다는 점도 역시 다른 소설들과 차이를 보이는 점입니다. 간단한 배경 설명 후 곧바로 인물과 사건들이 쉴 새 없이 밀고 당기기를 시작해야 하는데 여기서는 한참 후에야 등장하니 말입니다. 성장과 관찰이라는 두 요소는 소설 전개를 느슨하게 하고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됨을 부인할 수 없군요.

 

그러면 제인, 당신이 작품 구성을 이렇게 설정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허투루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이야깃거리가 부족하여 이렇게 질척거리도록 하지도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혹시 제가 예상했던 그 목적이었다면 충분히 납득이 갑니다만.

 

패니는 집안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이 두드러지지 않는 존재이니 관찰자로서는 최적입니다. 패니를 굳이 관찰자로 비중을 축소한 연유는 그녀 자신의 행위보다 타인의 행위를 관찰하는데 주력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닐까요? 남을 관찰하는 행위는 정확한 이해력과 판단력을 필요로 하며, 필연적으로 관찰 결과에 대한 도덕적 평가가 뒤따르게 됩니다. 패니를 통해 독자들은 버트램 가를 둘러싼 인물들의 성품과 언행, 사고방식 등을 적나라하게 알 수 있으며 그들이 보여주는 미덕에는 감탄하지만 어리석음에는 탄식을 금할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이 제인, 당신이 노리는 의도라고 생각이 드는군요.

 

패니의 관찰자적 역량을 알 수 있는 대목을 한두 개 보도록 하지요.

 

패니는 모든 장면을 시종일관 지켜보았기 때문에 자초지종을 알고 있었으므로 줄리아가 질투심에 눈이 멀어 이성을 잃은 것이라 생각하니 여간 측은해지지 않았던 것이다.” (P.226)

 

사촌들은 자기네가 선택하고 있는 희곡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했는지, 그것을 판단할 만한 분별력도 없는지 의심스러워는 것이었다.” (P.227)

 

그럼 당신과 패니의 눈으로 살펴본 버트램 가의 인물들을 한번 확인해 보지요.

 

토머스 경은 대체로 여러 장점을 지닌 긍정적 인물로 소개됩니다. 다만 가정생활에서 평온함을 우선시하며, 딸들에게 애정을 겉으로 표현해주지 않음으로써 나중에 딸들이 올바르게 자라지 못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는데 단초를 제공하게 됩니다.

 

버트램 영부인에 대해서는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없네요. 동생인 노리스 이모는 작중에서 유일하게 시종일관 패니를 구박하는 악역을 전담하고 있으며 그녀의 말과 태도를 통해 당대 사회의 신분제 질서에 대한 보수적 인식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패니와 버트램 가는 사촌 간이지만 친척 간의 정은 신분의 격차를 넘을 수 없다는 점 말이지요. 덕분에 패니도 이를 당연히 수용하게 됩니다.

 

사촌 언니들의 흥겨움에 대해서 들을 때면 몹시 부럽기도 했지만 자기는 신분이 낮다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곳에 나가게 되리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그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특별히 자기와 관련있는 일이라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P.61)

 

““패니는 정말 은혜라곤 눈곱만치도 모르는 아이 같구나. 이모나 사촌들의 소원을 그토록 박정하게 거절하니 말이야. 정말 몰라도 너무 몰라.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절대 그렇게 하지는 못할 거야.” 노리스 부인이 쌀쌀맞은 태도로 말했다.” (P.242)

 

패니는 이모의 말이 분명히 이치에 닿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녀 자신은 안락함을 누릴 권리를 박탈당한 너무나 비천한 신분이라는 것을 노리스 이모의 표현으로 다시 한 번 깨달아야 했던 것이다.” (P.351)

 

사촌오빠로는 톰과 에드먼드가 있는데, 장남인 톰은 귀족가문의 전형적인 맏아들 유형으로 유쾌하지만 경박하고 사치스러움이 두드러집니다. 반면 패니가 좋아하는 에드먼드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성품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에드먼드의 태도는 항상 조용하고 침착했다. 어쩌면 그런 진지하고 침착하고 소탈하기조차 한 올바른 성품이 그의 매력인지도 몰랐다.” (P.116)

 

사촌언니들인 마리아와 줄리아. 두 자매의 장점은 외모에 치중된 반면 작중에서는 점차로 그네들의 결점이 사건이 전개될수록 두드러집니다. 먼저 마리아의 결혼에 대한 인식과 결혼의 조건은 시대적 통념을 반영하고 있으며 우리 세대와도 별반 차이가 없으므로 비난하고픈 마음은 없습니다.

 

그녀는 가능하다면 제임스와 결혼하는 게 당연하고도 명백한 의무라는 생각이 들었고, 결혼 상대자를 선택하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경제적인 조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P.67)

 

마리아의 허영심은 또 어떻습니까?

 

사륜마차가 저택의 현관 앞 넓은 돌층계 앞에 멎었을 때, 그녀의 기분은 우월감과 허영심으로 가득 차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고 몹시도 흥분한 상태였다.” (P.143)

 

그녀 주체적으로 인생을 결정하고 책임지려는 의지조차 없이 오로지 주변의 입김과 허영심을 따른 결과, 헨리와의 사랑놀음에 상처받고 홧김에 제임스와 결혼식을 서두릅니다. 여기에는 부친의 속박에서 벗어나고픈 강렬한 욕구도 한몫 거들지요.

 

마리아는 평온하기 짝이 없는 집에 대해서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조금도 틈을 주지 않는 아버지의 속박에 대해서는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실연으로 인한 슬픔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자신이 결혼하려는 상대에 대한 경멸감도 그만큼 컸다. 하지만 그런 일로 인해서 오히려 결혼식을 치를 마음의 결정을 빠르게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P.323)

 

사실 마리아는 순수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만과 간계를 모르는 그녀는 제대로 된 만남을 가졌다면 제법 훌륭한 귀족부인이 될 수 있었을 겁니다. 러시워스와의 섣부른 약혼 이후 헨리에 대한 그녀의 마음은 진실한 것이었으니까요. 마리아가 헨리에게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는 대목은 그녀의 처지에 빗대어서 매우 인상적입니다.

 

전망이라고요? 말씀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을까요? 그래요, 정말 눈부신 전망이 펼쳐지고 있군요. 정말 햇빛은 찬란하게 빛나고 파크는 무척 아름답군요. 하지만 불운하게도 저 철문은 굳게 닫혀 있어서 속박과 무정한 느낌을 전해주고 있군요. 도저히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요.” 마리아도 헨리와 마찬가지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진심을 털어놓은 그녀는 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P.169)

 

동생인 줄리아는 어떨까요? 그녀도 언니와 유사한 면모를 보여줍니다. 뛰어난 미모에 비해 이성적 능력의 부족함. 작중에서는 이러한 그녀의 단점이 직설적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줄리아에겐 참을성이 부족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바른 배려도 부족했고, 자기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옳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나 원칙도 그녀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본래 그런 것들은 교육의 본질적인 면을 이루고 있는 것이었는데 줄리아는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던 것이다.” (P.155)

 

또 다른 인물 축인 헨리와 메리 크로퍼드 남매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빠인 헨리는 사랑놀이를 즐기고 도덕적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한마디로 바람둥이 인물입니다. 그에게 젊은 여성을 유혹하는 행위는 하나의 심심풀이 유희에 불과합니다. 버트램 가의 두 딸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는 유복한 신분이면서도 본받을 만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분별력이 없고 자기 욕심대로만 행동하려 하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그저 눈앞의 일밖에 보려고 하지 않았고 미래를 내다보면서 행동하거나 계획할 줄도 몰랐다. 미인이고 영리하며 자신을 좋아하는 듯한 두 자매는 그의 가슴속에 하나의 놀이 대상이었던 것이다.” (P.194)

 

에드먼드가 사랑을 품은 메리도 흠잡을 데 없는 듯하면서도 이따금씩 표현하는 언행에서 결점이 드러납니다. 특히 결혼관과 목사에 대한 인식에서 말이지요.

 

인간사 중에서도 이 결혼이라는 거래에 있어서는 상대방으로부터는 최대의 것을 기대하면서 자기 자신은 가장 부정직하게 되거든요......결혼이란 밀고 당기고 하는 일종의 거래 같은 흥정이라고 생각해요.” (P.81)

 

목사란 게으르고 자기중심적이며, 신문이나 읽고 날씨나 살피고 부부 싸움을 하는 정도밖에 하는 일이 없죠. 일은 전도사가 모두 처리해주니까요. 평생 동안 하는 일이란 식사하는 것뿐이에요.” (P.186)

 

메리의 결혼관은 매우 현실적이며 내밀한 사회적 본질을 꿰뚫고 있습니다. 결혼에서 이러한 속성이 있음을 부인하기란 어려우니까요. 특히 목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메리 개인의 편견이 아니라 당대의 일반적 견해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나아가 제인 당신의 인식이 반영된 것은 아닌가요?

 

이렇게 패니의 입장과 시각에서 등장인물들을 보면 외관상 번지르르한 우리들 개개인들이 얼마나 성격과 행동 면에서 흠결을 지닌 존재들인지 잘 알 수 있게 됩니다. 다른 작품들에서는 이러한 결점을 지닌 인물들의 좌충우돌이 작품을 맛깔나게 하는 양의 작용을 하는데 반해 여기에서는 철저히 비판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어 작중 분위기가 밝고 화사하지 않고 객관적이며 다소 냉랭함을 안겨주어 이채롭습니다.

 

너나 누님이나 식구들은 최근 한 달 반 동안 그 아가씨의 인물이 매혹적이게 아름다워졌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 것 같더라.” (P.364)

 

어느덧 패니는 열여덟 살이 되어 소녀에서 아가씨로 자라게 되었습니다. 패니의 미모가 한층 빼어나게 되어 미운 오리새끼가 백조로 변했음을 알아차린 것은 헨리가 처음입니다. 그리고 헨리는 동생에게 패니를 유혹할 계획을 털어놓습니다.

 

이것으로 1권은 끝을 맺는데 2권에서는 제인 당신이 어떤 식으로 패니와 헨리의 관계를 구성할지 무척 궁금합니다. 패니가 계속 관찰자의 영역에 머무를지 아니면 알을 깨고 나와서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으로 거듭날지도 마찬가지랍니다. 당신이 이색적인 작품 분위기를 이대로 견지할지 많은 독자들이 기대하는 기존의 작품들처럼 시트콤적 성향으로 복귀할지도요. 제인 당신의 행보를 주목하겠습니다.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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