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구름
후타바테이 시메이 지음, 이여희 옮김 / 태동출판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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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문학사에서 최초[1887년 발표]의 근대소설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먼저 언문일치를 처음 구현하였다는 점이다. 근대 이전에는 말할 때 쓰는 어투와 글 쓸 때 쓰는 어투가 확연히 구분되었다. 일본어에서 언문일치는 문장을 ~だ 또는 ~です로 끝맺음을 가리킨다. 지금에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 불과 백여 년 전에야 주창되었던 것이다. 다만 이 문체에 관한 사안은 원문에서는 명확히 체감할 수 있겠지만 번역문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부분이니 그렇다고 알고 넘어간다.

 

근대성은 정신 면에서는 서구 합리주의, 물질 면에서는 자본주의의 영향을 온몸으로 맞아들이며 시작한다. 근대성이 문학에서 발현되면 바로 사실주의로 대변된다. 대지에 단단히 두 발을 딛고 두 눈으로 바라본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그것이 아름답든 아니면 추하든 창작의 기본 토대로 삼고자 한다.

 

문학사적으로는 그러하다는 뜻이지만,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이 아닌 살아 숨 쉬는 작품으로 생존하려면 현재의 독자에게 소구할 수 있는 미덕을 지녀야 할 것이다. 그것이 감동이 되었든 아니면 재미가 되었던지 간에.

 

형식 면에서 두드러지는 특색은 작가가 화자로서 소설 중에 등장하여 작품 전개 방향을 주도하거나 작중 인물에 대한 주관적 감정을 노출시키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렇게 근세의 통속소설인 희작(戱作)의 어조를 차용한 점에 대해서 근대성의 불완전을 지적하는 견해도 있다고 한다. 나로서는 독자에게 친숙한 어조를 사용하여 흥미를 유도하고 전통의 무조건적 배격 내지 단절이 아니라 부분적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화자의 주도적 개입은 판소리계 소설과도 일정 유사성을 보인다.

 

내용 면에서 애정 소설인 동시에 사회 소설임이 곳곳에 드러난다. 결정적으로 분조의 내심 묘사와 전개에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는 심리 소설이기도 하다. 작품의 내부 축은 우쓰미 분조와 오세이 간 애정의 형성과 혼다 노보루의 개입으로 인한 단절이라는 삼각관계이다. 외부 축은 우쓰미 분조의 관계(官界) 취직과 면직, 부조리한 사회제도에 대한 비판이 담당하다. 내외를 연결하고 아우르는 것이 19세기 후반 일본 사회의 세태와 풍속에 대한 풍부한 묘사이다. 여성들의 헤어스타일과 패션, 서구문물 유입에 따른 문화와 관습의 변화 등이 비교적 세밀하게 언급되어 있어 이채롭기조차 하다.

 

아무래도 독자 입장에서는 애정 관계의 변화가 흥미가 당긴다. 분조의 눈에 비친 오세이는 외모와 언행, 지성의 모든 면에서 나무랄 데가 없는 완벽한 여성상이다. 작가와 독자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일개의 원숭이처럼 그저 유행이나 쫒는 여자가 되었다.” (P.37)
“오세이는 실로 경망스럽고 가벼운 여자이다.” (P.249)

 

분조도 나중에야 깨닫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오세이는 개화의 겉멋에 취한 평범한 여성에 불과한데, 분조는 여기에 자신의 마음 속 이상형을 투사하여 요조숙녀의 가면을 씌우고 이에 흐뭇해하였던 것이다.

 

분조와 노보루는 소설 첫 장면에서 자못 친구 사이로 등장한다. 분조와 달리 노보루는 외향적이며 처세에 능란하다. 다소 능력이 있지만 성격적으로는 비열하며 호색한으로서 그에 대한 분조의 평가는 매우 혹독하며, 노보루와 오세이의 사이가 가까워질수록 혐오가 강렬해짐을 알 수 있다.

 

7장의 당고자카로 국화구경을 가려는 장면에서 동행을 거부하는 분조를 노보루가 놀리는 대목이 나온다. 이때 분조는 입안으로 “바보같은 놈”을 두 번 되뇌는데 처음은 노보루에게 향한 것이지만 나중은 자신을 향한 비난이다. ‘바보같은 놈’은 분조를 바라보는 타인들의 시선과 평가를 의미하는 상징적 어휘다. 개화와 근대의 물결에서 깊은 사려와 진정한 배려 같은 종래의 덕목은 더 이상 존중받지 못하는 성격적 결함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것이 분조의 비극이다.

 

후반으로 갈수록 분조의 처신에 답답하기 그지없다. 과감하게 오마사의 집을 나와서 독립생활을 구하였다면 종국적으로 분조 자신을 위해서 좋았을 텐데. 처음에는 오세이에 대한 일말의 미련이 작용하였다. 나중에는 수렁에서 오세이를 구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책임의식이 가출을 막았다.

 

“이렇게 오세이를 저버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뿐만 아니라 저버리면 의리가 아니라고 생각한 분조” (P.281)

 

분조의 우유부단과 불행동을 손가락질하기는 쉽지만 자신을 분조의 입장에 놓고 보면 뾰족한 대안을 찾기가 힘들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의 독자적 예술작품으로 이 소설은 비교적 성공적이다. 독자로 하여금 책장을 빨리 넘기고 싶게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이 작품은 작가의 고심참담과 심사숙고의 산물이 아니다. 젊은 작가가 일필휘지의 경지에서 휘갈겨 쓴 글이다. 그럼에도 형식과 내용에서 많은 즐길 거리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할 수 있었다는 것은 천우(天佑)의 발로라고 하겠다.

 

※ 부록으로 두 편의 작가 에세이를 수록하고 있어 작가와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된다.
    - 나의 언문일치의 유래
    - 내 반생의 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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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지혜 - 꽃에서 펼쳐지는 탄생과 소멸의 위대한 생존 드라마
모리스 마테를링크 지음, 성귀수 옮김, 조영선 그림 / 김영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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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이후 마테를링크는 에세이, 특히 자연관찰 부문에 몰두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작품들은 곤충 3부작 외에 1907년 작인 <꽃의 지혜>이다.

 

목차와 해설, 연보 등을 모두 포함해도 160쪽 밖에 되지 않는 데다 활자와 조판도 여유롭고 원작에 없는 예쁜 꽃그림 삽화도 풍부하게 들어가 있어 실제 글의 분량은 부담 없는 편이다. 아담하고 예쁘장하여 소유욕을 불러일으킨다.

 

책이니만치 내용을 외면할 수는 없다. 마테를링크는 꽃을 포함한 식물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깨뜨릴 것을 주문한다.

 

이동이 자유로운 동물에 비해 뿌리로 땅에 천착하여 온 삶을 감내하는 식물의 천형(天刑). 좌절과 포기 대신 삶에의 무한한 본능을 이루기 위하여 끝없는 노력과 지혜를 발휘한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근원적 본능은 (개체의) 생존과 (종족의) 번식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고자 분투하며 짝짓기와 출산에 혈안이 되는 현상은 다 연유가 있는 것이다. 작가의 의도는 이러한 꽃들의 사례를 소개하여 우리네 인식을 각성시키고자 한다.

 

“우리 인간의 기술적인 영감이라고 해봐야 바로 엊그제 일이지만, 꽃의 재능과 아이디어는 그야말로 까마득한 세월을 이어 온 것입니다.” (P.82)

 

“우리와 마찬가지로 다채로운 지성을 소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거의 동일한 수준의 희망과 이상을 좇아 매진하는 것 같습니다.” (P.103)

 

가루받이, 즉 수분(受粉)을 위한 꽃들의 치열하고도 다각적인 의지적 연구와 고안은 식물의 수동성과 정태성이라는 선입견에 철저히 물들어 있는 우리에게 충격적인 사실로 비친다. 그들의 기발하면서 정교하기 그지없는 수분 장치를 보면 감탄을 금할 수 없을 정도다.

 

통발의 기압과 수압으로 조절되는 밸브 장치, 꽃자루를 스스로 끊어버려 삶과 생식을 교환하는 나사말의 수꽃, 비터멜론의 경이적 씨앗 분사력 등 예는 한없이 많다. 그 중에서도 작가는 난초를 가장 완벽하고 조화로운 지혜의 증거로 추천한다. 오르키스 마쿨라타, 피라미드 난초, 카타세툼, 개불알꽃, 두레박난과 같은 난초과 식물의 자세한 수분 전략과 전술을 묘사하는데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명료하면서 섬세한 필치로 기술된 글을 읽자면 파브르의 곤충 못지않은 감명을 느끼게 되고, 과연 식물들도 이성과 지혜를 갖춘 존재라는 주장에 무작정 반대하지는 못할 것이다.

 

마테를링크가 심혈을 기울여 꽃의 지혜를 설파하는 이유는 마지막 장에 드러난다. 바로 인간의 참다운 지혜에 대한 논지로 안내하기 위해서다. 대자연 앞에서 인간과 꽃들이 살아가도록 하는 본질적 기운과 원리는 동일함을 발견하고 자만을 벗어던지고 더 겸손해지자고 말이다.

 

“꽃과 우리가 서로 닮았고, 꽃이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 역시 가지고 있으며, 꽃의 방법과 습성과 관심과 성향과 욕망이 우리의 그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때, 우리가 억누를 수 없는 본능으로 희구하는 모든 것은 저절로 그 당위성을 확보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삶의 곳곳에 꽃의 지혜가 만개할진대, 어떻게 그 삶이 악과 죽음, 어둠과 허무에 대한 승리의 몸짓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P.142)

 

이 책의 미덕은 반복하자면 간결한 가운데 꽃들의 생존과 번식을 위한 알려지지 않은 신기한 사례들을 독자에게 소개하여 새삼스레 관심의 조명을 비추는 데 있다. 작품이 쓰여진 시기가 지금부터 근대 자본주의가 정점을 향해 달음박질치던 백 년 전임을 염두에 두면 정신적 측면을 강조하고 인간 위주의 관점을 탈피하고 자연에 눈 돌릴 것을 주창한 작가의 선구적 혜안에 탄복할 따름이다. 그것도 거창하고 단조로운 논설이 아니라 꽃을 제재로 한 얄팍한 에세이를 통해서.

 

여기에 더해서 원작에 없는 수채화풍의 아름답고 세밀한 꽃 그림들은 글을 통해서는 막막할 수도 있었던 꽃들을 눈앞에 생생하게 살려내어 책에 한층 격조를 높이고 있다. 이는 꽃 사진을 게재하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한마디로 여러 면에서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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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의 생활
모리스 메테를링크 지음, 김현영 옮김 / 이너북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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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파랑새>와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로 유명한 마테를링크(예전에는 메테를링크로 알았는데 외국어표기법이 변경된 모양이다)는 후기에 이르러 에세이 집필에 몰두하였다. 이 작품을 포함한 곤충 3부작 외에, <꽃의 지혜> 등 자연관찰에 남다른 흥미를 지닌 듯하다. 그다지 이상하지 않은 게 그의 삶을 살펴보면 언제나 은둔과 고독을 지향한 것을 알 수 있다.

 

<꿀벌의 생활>에서 작가는 양봉가의 시각으로 꿀벌을 관찰하면서 보고 듣고 읽고 깨우친 사항을 차근차근 적고 있다. 이미 한 세기도 더 경과된 1901년에 발표하였지만, 내용에 전혀 진부함을 느낄 수 없는 것은 양봉 벌꿀의 생태와 양봉가의 양봉 방식이 본질상 급격한 변화를 겪지 않음에 기인한다.

 

우리가 TV 다큐멘터리를 통해 주로 접하게 되는 동물은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한 야생 동물의 세계다. 생활 주위에 친숙한 존재인 개, 고양이 등의 애완동물과 소, 닭, 양, 염소 등의 사육동물은 호기심과 흥미를 자아내는 대상이 아니다.

 

이 책을 보면 이러한 선입견이 매우 그릇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전문 양봉가나 동물학자가 아닌 중에서 분봉의 기이한 열광, 벌집 건축의 우수성, 여왕벌들 간 생존을 건 혈투, 결혼 비행과 수벌의 비극, 대대적인 수벌 살육과 같은 신기하면서도 비극적이며 당혹스러움을 자아내는 행태 등에 놀라움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고백하지만, 모든 일벌들이 암컷임을 오늘에야 처음 알았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다. 지구상의 생물 중에서 최후이자 최상의 지위를 자부한다. 자연을 깊이 관찰한 애호가일수록 자연 앞에서 인간의 부족함과 한계를 절감한다고들 한다. 대자연이라는 호칭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외경과 겸허함을 드러내는 존칭이다. 마테를링크도 마찬가지다. 꿀벌의 생태를 소개하는 틈틈이 그는 꿀벌의 지성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는 의견에 대항하여 꿀벌들이 얼마나 치밀하게 과학적이며 행동 하나하나가 꿀벌 종의 미래를 염두에 둔 것이 밝히고 있다. 그들과 대비할 때 과연 인간이란 존재가 상대적 우수성과 우월성을 주장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회의적이기조차 하다.

 

“나는 지금 다른 생물에게도 우리와 다른 어떤 지성이 있고, 그들이 우리에게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우리가 인간이라는 하나의 작은 존재로서 다른 존재의 정신적인 영역에 대해 그렇게 큰소리칠 수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을 뿐이다.” (P.37)

 

“우리는 인간에 대해 말할 때에도 꿀벌에 대해 말한 것 이상의 것을 말할 권리가 없다. 우리도 어쩌면 단순히 고통에 대한 공포, 쾌락에 대한 이끌림을 따르고 있을 뿔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우리가 지성이라 부르는 것 역시 동물의 본능이라 부르는 것과 그 기원이나 사명에서 다르지 않다.” (P.51)

 

꿀벌의 속성 중에서 전체를 위한 개체의 희생은 매우 철저하다. 집단의 안녕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면 무수한 희생도 그들은 기꺼이 감내하는 듯하다. 그 무자비함은 진화 단계에서 일정부분 불가피한 측면을 지니지만, 지나치게 무게중심을 두면 인류가 겪은 전체주의의 악령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현대 사회의 기본 가치는 개인과 사회의 적절한 조화와 배분에 있다.

 

작가는 꿀벌 사회를 지탱하는 집단의지를 ‘꿀벌의 정신’으로 부른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지성체계처럼 작동하여 개개의 꿀벌들이 벌집의 번영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노력하고 끝내는 자아 희생을 감내하도록 통제한다. 그것이 우리의 눈에는 터무니없고 비이성적으로 비치겠지만 섣부른 비난과 멸시를 퍼붓지 말자고 한다. 인간보다 더 크고 우월한 외계의 이방인이 우리를 관찰할 때 인간도 결코 꿀벌에 대한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인간의 자연 이해는 편협하며 단편적이다. 현상의 일면 만을 흘끗 보아놓고 마치 핵심을 간취한 것처럼 기고만장해서는 자신만의 성을 구축하기에 바쁘다. 인간을 제외한 타 동물, 특히 곤충류는 이성적인 고민 없이 전적으로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원시적 발달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한다. 자연은 도처에서 인간을 뛰어 넘는다. 인간이 자족하고 방심하는 순간 자연은 예기치 않은 변화무쌍한 변이성을 보여준다. 자연 법칙은 인간 의도에 부합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종(種)의 생존과 불멸을 위해 꿀벌은, 자연은 지고의 노력을 경주한다. 인간의 평가에 그들은 귀 기울이지 않는다.

 

“꿀벌은 여름의 영혼이다. 꿀벌은 풍요의 시기를 알리는 시계다. 가볍게 날아다니며 향기를 내뿜는, 민첩하게 움직이는 날개다. 그리고 춤을 추는 지혜로운 빛이고, 흔들리는 빛의 속삭임이며, 몸을 쭉 뻗고 엎드려 쉬는 대기의 노래다. 그녀들이 나는 모습은 진정한 환희, 눈에 보이는 작고 확실한 음표다.” (P.42)

 

작가의 꿀벌 찬미는 아름다운 애정으로 가득하다. 애정은 꿀벌의 행동 양식에 대한 정확한 관찰과 솔직한 이해에 토대를 두었다. 마테를링크는 자연과학적인 꿀벌의 한계와 약점을 분명히 인식한다. 부풀린 기대와 헛된 희망을 자신의 애정물에 불어넣지 않는다. 꿀벌의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인정하면서 그녀들을 사랑한다. 조심스레 단언컨대 인간끼리의 바람직한 사랑 방식도 이에서 멀지는 않을 것이다.

 

※ 옮긴이의 약력을 보건대 일본어 번역본을 중역한 것으로 추정된다. 작가의 의도와 문체를 명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피상적으로 번역에 임하였다는 느낌이 든다. 시적이고 아름다운 문체로 자자한 작가의 명성을 확인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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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보는 만큼 보인다 - 신개정판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19
손철주 지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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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로 소위 대중미술서로 대박을 친 저자의 후속작이다. 예기치 않은 전작의 성공을 거둔 저자는 다음 저작을 쓰는데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전작과 유사하되 식상하지 않으면서 재판의 혐의를 피하는 묘책을 발견하는 일은 쉽지 않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무난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후속작이다. 상대적으로 참신성과 혁신성은 떨어지지만  좀 더 진지한 이론적 면모에 대한 고민과 아울러 회화를 넘어선 여러 미술 장르의 관심도 보여준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사안이다. 그림에 대해서 사전 및 배경 지식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하여도 그림이 저절로 가슴 속에 확 다가오지는 않는다. 화가 및 작가들의 반복되는 습작과 운동선수들의 끊임없는 연습처럼 체화시켜야 분야에서 일가를 이룰 수 있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미술 감상에서 행하는 것은 실제 감상행위를 가리킨다. 그림을, 조각을, 건축을 보지 않고 감상능력이 증대될 것을 기대한다면 어불성설이다. 알면 관심을 갖게 되고, 다음 수순으로 자주 접하다 보면 더 잘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된다. 그림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도 적용된다.

 

“잘 봐야죠. 귀 기울여야죠. 어느 순간 보이는 것이 전과 다르고, 들리는 것이 전과 다른, 돈오의 경지가 옵니다.” (<잘 보고 잘 듣자>에서)

 

동양화에서 바라보는 자연과 인간의 의의는 분명 서양화와는 다르다. 저자의 설명처럼 산수화는 물리적 실체로서의 산과 물 뿐만 아니라 어진 자와 슬기로운 자를 의인화[요산요수(樂山樂水)]하고 있다. 산수화는 산수를 그리되 심상화된 산수를 그린다는 것이다. 심상 또는 뜻, 정신을 그림 속에 표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데, 옛 초상화는 이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은 압도적으로 강인한 표현으로 유명하지만,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전신(傳神), 즉 이형사신(以形寫神)을 매우 중시한다. (<정신을 그리다> & <초상화의 삼베 맛>에서) 외모를 초상화 주인공의 입맛과 지위에 걸맞게 잘 꾸미는 게 아니라 생생한 내면세계를 얼굴에 여하히 잘 불러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 외적, 내적 가면을 벗어던진 소위 생얼의 재현이 지상목표였다는 것이다. <송인명 초상>과 <유척기 초상>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이처럼 회화에서 문화적 배경은 무시할 수 없다. 사람들이 지닌 미적 감정은 소속된 생활 공동체의 지배적인 관념과 자유로운 상상력의 집적이 은연중 투사되기 마련이다. 그림 속 잉어는 출세를, 해오라기와 연꽃은 과거급제를 상징하는 것은 문화코드를 모르면 도저히 함의를 파악할 재간이 없다. (<물고기와 새>에서) 단원의 <소림명월도(疏林明月圖)>와 조숙의 <숙조도(宿鳥圖)>를 관통하는 정서는 저자의 표현대로 거칠고, 성글고, 스산하고, 허허로운 맛이다. (<가난한 숫에 뜬 달> & <조선의 텃새>에서)

 

노력을 요할지라도 보면 읽히는 그림은 얼마나 행복한가. 장승업의 <고사세동도(高士洗桐圖)>나 유운홍의 <부신독서도(負薪讀書圖)>처럼 스토리가 있는 그림은 이야기를 파악하면 더 이상 생경하지 않다. (<음풍과 열정> & <보면 읽힌다>에서) 뚜렷한 이야기가 없더라도 감상하는 나와 그림 간에 대화가 가능한 작품도 존재한다. 이때 그림은 더 이상 낯선 타인이 아니다.

 

20세기에 발흥한 추상화는 여전히 난해하고 당혹스럽다. 추상화는 그림과 감상자 간 이야기와 대화를 스스로 거부한다. 추상화에는 그림 속의 대상(인물, 사물 등)이 부재한다. 회화 자체의 자율적인 존재가치를 부르짖는 것이 추상화다. 도구, 표현, 색채, 구도 등에서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그림의 본질과 화면의 자율성을 인정한다. (<화면이여, 말하라> & <달걀 그림에 달걀이 없다>에서) 그림이 본래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은 주변부로 밀려나고 색채가, 화면의 배치가, 그림을 그리는 도구가, 아니면 표현 기법 자체가 비로소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고 주목 받는다. 무엇이 회화의 본질인지는 미지수다. 소위 형식과 내용의 고전적 갈등의 전형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과도한 구상중심주의에 대한 극단적 반작용이 추상화로 드러난 것이다. 그럼에도 예술에 있어서 내용을 담지 않은 형식의 독자적 가치와 생명력의 영속성에 대한 주장이 지속적 힘을 발휘하기는 어려움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림이 나날이 어려워지고 이해 불가능하게 되면서 그림보다 말이 더욱 중요해지는 기현상이 생겼다. 아무도 정답을 모르므로 큰 목소리로 남보다 먼저 외치는 사람이 해석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모든 예술의 감상과 비평은 독단과 편애의 결과라고 한다. (<불확실한 것이 만든 확실 – 서원> & <미술 젓가락 사용법>에서) 하물며 추상화의 영역에서는 말할 나위가 없다.

 

만인의 유언과 찬미에 현혹될 필요는 없다. 자신 만의 안목을 가지고 찬찬히 살피고 주의 깊게 생각하는 태도에서 좋은 그림을 구별하고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능력이 길러진다. (<미술 젓가락 사용법>에서) 외화내빈하는 겉치레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진짜 문제는 제대로 된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아울러 과도한 의미와 상찬을 덧붙이는 데도 있다. 옹기도, 전통 기와도 우리네 시대에 와서 슬픈 운명을 맞이하였다. (<생활을 빼앗긴 생활용기 – 옹기> & <그저 그러할 따름 – 기와>에서) 반대로 물 건너간 막사발은 다완으로 승격하여 일본의 다도를 완성한 선승 센노 리큐의 깊은 철학적 의미가 덧붙여지면서 일본의 국보로 추앙받고 있다. 가난과 유적(幽寂)의 미학이라고 한다. (<물 건너간 막사발 – 다완>에서)

 

미술(또는 예술)의 역할 내지 위상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싶다. 미술은 높이 떠받들고 외경해야 할 존재인가 아니면 우리네와 더불어 일상 속에 살아 숨쉬도록 하는 게 마땅한 존재인가. (<말과 그림이 싸우다>에서) 무엇이 우리네 삶을 행복하고 풍요롭게 해줄 것인가.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네 민화 재발견의 필요성을 피력하는 저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덜 세련된 것이 주는 만만함과 예상에서 벗어난 일탈, 그곳에서 솟아나는 유머와 너름새는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라도 다 즐거운 감동을 안기나 봅니다.” (<어리숙한 그림의 너름새>에서)

 

이쯤에서 저자가 극찬한 최순우의 글을 읽고 싶다. (<‘봄 그림’을 봄> & <아름다움에 살다 아름다움에 가다>에서)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아는 눈과 느끼는 마음을 그의 아름다운 문장을 통해서나마 조금이나마 맛보고 싶은 소박한 바램을 터무니없는 과욕으로 치부해버릴 사람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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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코트 심해 행복한책읽기 SF 총서 7
아서 코난 도일 지음, 이수현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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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가스대>는 <잃어버린 세계>의 후속작이다. 챌린저 박사를 포함한 주요인물 4인이 그대로 등장하는 챌린저 시리즈의 하나다. 분량 상으로는 중편에 해당한다. 시간적으로는 전작의 수년 후, 장소는 런던과 근교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스펙트럼의 프라운호퍼 선이 흐릿하게 보이는 현상에서 에테르의 변화를 추론하고 이것이 지구상의 생명체를 파멸로 몰아넣을 것으로 예측하는 챌린저 교수의 주장은 거침없는 쾌도난마와도 같다. 의문점에도 불구하고 이를 받아들이면 이후에 전개되는 모골이 송연하고 오금이 저리는 인류역사상의 일대 재난을 경험하게 된다. 작가의 비길 데 없는 장점, 즉 독자를 자신의 글에 몰입시키는 능력은 여전하다. 일견 평범한 글쓰기로 오인될 수 있지만 점층되는 긴장의 제고와 심화되는 사건의 전개, 그리고 증폭되는 이야기의 재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야 가능한 수준이다.

 

챌린저 박사가 말하는 에테르는 서양의 근대 과학사 및 철학사에서 한때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던 개념이다. 코난 도일의 당대에는 다소간 생명력을 유지하였으나 아인슈타인 이후 완전히 종말을 고하였다.
“그것은 빛이 전해지는 매질, 항성으로부터 항성으로 퍼져 있으며 전 우주에 고루 퍼져 있는 미세한 에테르의 변화일 수 있을 것이오. 우리는 에테르의 대양 깊숙이에서 느린 해류를 타고 떠다니고 있소.” (P.159)

 

에테르의 변화로 발생한 교란은 모든 사람에게 서서히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며, 그것은 사람들의 언행이 평소와 달라진 점이다.
“오늘은 모든 게 이상해 보였다. 모두가 기묘하고 예기치 않은 말을 했다. 꿈 속 같았다.” (P.172)

 

코난 도일이 전 인류의 절멸이라는 거대하고 극단적인 현상을 제기하면서까지 보여주고자 하는 점은 챌린저 교수와 서멀리 교수의 언쟁 속에 나타난다. 지구상에서 인류라는 존재는 최후의,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은 독단 혹은 독선일 수 있다. 인간은 자연과 타 생명체 앞에서 더 겸손할 필요가 있다. 한바탕의 끔찍한 해프닝으로 결론 났지만, 작가가 굳이 ‘위대한 각성’이라고 표현한 연유가 있다. 유사 죽음을 경험함으로써 인류는 자신이 얼마나 무력하고 무지한 존재인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20세기 초의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의 발전과 사회 진보에 대한 낙관적 믿음은 이 작품이 발표된 지 불과 일년 후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미증유의 독가스대와도 같은 재난과 마주쳤다.

 

같은 영국을 배경으로 한 단편 <하늘의 공포>는 순전한 상상력이 더 가미된 작품이다. 조이스 암스트롱이라는 비행사의 유고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3만 피트 이상의 특정한 상층 대기(작가가 공중 정글이라고 표현하는) 속에 존재하는 괴물을 다룬다. 대기 상층부는 물론이고 대기를 벗어난 우주 탐사가 빈번해진 현시점에서는 가정의 근거 자체가 희박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아직은 비행기의 이용이 보편화되어 있지 않고 성능도 취약한 시절임을 염두에 두면 당대의 독자에게는 충분히 실감나게 다가왔을 소재일 것이다.

 

코난 도일은 여기서 비행에 관한 상당한 지식을 보여준다. 단발기가 서서히 고도를 높이면서 조종사가 받는 인상과 겪게 되는 현상이 매우 사실적으로 기술되어 있고 점층적으로 긴장을 높이는 효과를 주고 있다. 상당히 긴 비행 대목은 분량 면에서도 또한 작가가 기울인 공력을 감안하더라도 이 작품의 핵심이라고 해도 마땅할 것이다.

 

우리는 항상 미지의 존재나 현상에 공포를 품는다. 밤, 심해, 정글, 죽음과 사후 세계 및 영혼 등. 여기에 하늘과 우주를 추가하더라도 하등 이상하지 않다. 알지 못하는 것은 친구인지 적인지 판단할 수 없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최선보다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생존의 법칙이다. 코난 도일은 인간의 약점과 본능의 틈을 잘 헤집고 들어간다.

 

<마라코트 심해>는 작가의 말기작이다. 서양의 아틀란티스 전설과 심령학을 교묘하게 결합한 경장편 분량의 해양 모험소설에 해당한다. 마라코트 박사와 화자이자 필자인 헤들리, 기계공 스캔런이 모험을 겪는 인물이다. 창조된 캐릭터는 챌린저 시리즈의 4인방에 비하면 개성과 매력도가 뒤떨어진다. 과학소설의 조건 중 하나인 과학적 근거도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해저 2만5천 피트 아래의 심해를 일반적인 강철로 제작한 탐사선을 타고 내려갈 수 있으며, 그곳에서 사람이 특수 장비 없이 유영이 가능하다는 설정도 그러하다. 작가는 마라코트 박사의 입을 빌어 압력이 의외로 심하지 않다고 주장하지만 말이다. 한편 심해가 원생생물의 부패로 인한 가스 빛으로 의외로 어둡지 않을 수도 있다는 주장은 참신한 맛이 있다.

 

이 작품의 묘미는 심해의 온갖 기괴한 생물을 상상에서 현실로 불러오는 신기함과 호기심에 있다. 게와 바다가재의 중간형태의 거대한 생물, 거대한 담요고기, 몸길이 30피트의 검정 가오리, 길이 200피트 정도는 되는 바다뱀, 녹색 도끼비불 같은 프락사, 거대한 전기 바다 민달팽이, 심해판 피라냐인 하이드롭스 페록스 등. 그리고 아틀란티스 전설. 일찍이 플라톤이 제기한 전설은 곧 잃어버린 고대 문명과 결부되어 강인한 생명력을 현재까지 드리우고 있다. 철학자 베이컨도 관련 저작을 남긴 바 있다. 도일은 아틀란티스의 풍요와 타락, 그리고 최후를 사고 영상의 형식을 빌려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으며, 살아남은 후손들이 건설한 심해의 아틀란티스의 묘사에 사실성을 부여하고 있다.

 

작품의 마지막 7장은 ‘검은 얼굴의 군주’와의 대결이다. 말년에 코난 도일이 심취한 심령학의 영향이 여기서 매우 강하게 드러난다. 아틀란티스를 파멸로 몰고 갔던 악마가 거대한 폐허의 신전에서 되살아나서 고대문명의 후손마저 절멸시키려고 한다. 흑마법과 백마법의 대결이라!

 

코난 도일은 종종 작품 속에서 당대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경우가 있다. 아틀란티스 전설을 소개하면서도 교훈을 끌어낸다. 이것이 양차 세계대전을 사이에 둔 유럽의 정세를 감안할 때 예사롭게 여겨지지 않는 것은 과민한 소치인가.

 

“아틀란티스 인들의 흥성과 몰락으로부터 배운 교훈은, 국가에 닥칠 수 있는 가장 큰 위험은 그 지력이 영혼은 앞지를 때 온다는 것이다. 이 구문명을 파멸시킨 것은 바로 그러한 위험이었고, 어쩌면 우리의 종언 또한 그런 식으로 닥칠지 모른다.”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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