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고호의 모험 - 황금양피를 찾아 떠난 그리스 신화의 영웅 55인
아폴로니오스 로디오스 지음, 김원익 옮김 / 바다출판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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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작가는 기원전 2세기의 인물이다. 희랍어로 씌어진 서사시로서 원문은 총 5,385행으로 <일리아스>의 3분의 1 분량이라고 한다. 희랍 원전을 번역하였는데 내용 전달하여 주력하여 현대적 산문형식을 택하였다. 따라서 장중한 고전 운문체의 느낌 대신 에피소드가 곁들여진 한바탕 모험담의 인상이 강하다. 이는 옮긴이의 의도라고 하겠는데 조금이나마 더 독자에게 친숙하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

 

2005년 이 번역본에 이어 2010년에 강대진 번역본도 출간되었는데, 책소개에 따르면 보다 원전에 충실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일종의 레퍼런스로 삼기 위한 목적이리라. 이 김원익 번역본의 장점은 먼저 서두에 30여 면에 달하는 충실한 해설에 있다. 작가에 대하여, 작품에 대하여 아무래도 생소한 이들을 위하여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이 잘 되어 있다.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희랍 신화의 한 영역에 포괄된다. 황금양피를 찾기 위한 모험은 아폴로니오스의 창작이 아니다. 희랍 신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면 작품 해독에 어려움을 느끼고 지속적 흥미를 갖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리고 지도다! 신화적이거나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저작에서는 지도는 필수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막연히 낯선 지명을 쭉 나열하면서 전개되는 사건 및 활동들을 막무가내로 쏟아놓는 것은 독자에 대한 실례다. 충실한 지도는 직관적 내용 이해와 심화 인식에 크게 유용할뿐더러 암흑의 바다에서 독자를 구조하는 효과적 수단이다. 아르고호의 원정로를 따라 희랍과 흑해 주변, 그리고 이탈리아와 지중해 전도는 아르고호 모험의 스케일과 고난의 깊이를 생생하게 입증한다. 실로 아르고호는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의 3개 대륙에 걸친 모험을 떠난 것이다.

 

55인의 영웅들이 가져오고자 하는 황금양피의 정체가 궁금하다. 무슨 대단한 보물이기에 온 희랍의 영웅들이 집결하여 그 물건을 찾고자 온갖 고난을 무릅쓰는 모험을 감행할 정도인가. 황금양은 계모에게 곤경당하는 프릭소스 남매를 구하기 위하여 제우스가 보내준 신성한 동물이며, 나중에 제물로 바쳐졌다. 그 양피는 프릭소스가 자신을 거두어 준 콜키스의 아이에테스 왕에게 선물로 주었다. 백번 생각해 보아도 황금양피는 희랍의 것이 아니며 타국의 것을 무력을 불사하면서까지 가져가고자 하는 것은 의롭게 여겨지지 않는다. 더욱이 양피에 무슨 비상한 능력이 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일각에서는 왕권, 태양 또는 부의 상징 등으로 해석하는 의견도 존재하는데 신빙성이 높지 않다.

 

원정대의 대장은 아이손의 아들 이아손이며, 그는 헤라 여신의 각별한 총애를 받는 영웅이다. 작품을 읽다 보면 그를 포함한 소위 영웅들이 정말 영웅이 맞는지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 한둘이 아니다. 여색에 쉽게 빠지고(렘노스 섬을 봐라) 위험과 난관 앞에서는 사기가 축 쳐져서 소심하게 구는 그들이 어떤 면에서는 인간적이기조차 하다. 특히 아이에테스를 두려워하여 쩔쩔매며 비겁하게 처신하는 장면은 가관이다. 작가도 몇몇 대목에서 이아손을 교활하다고 표현한다.

 

메데이아의 사랑과 도움이 없었다면 아르고 호의 모험은 결코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솔직히 이아손의 업적 보다 메데이아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 청동 황소의 불길도 무력화시키고, 뱀의 이빨을 뿌려 땅에서 솟아나온 병사들을 물리친 것도 모두 메데이아의 마법과 조언 덕택이다. 황금양피를 지키는 용을 잠재운 것도 메데이아였다. 메데이아가 아버지와 동족, 그리고 조국을 버리고 이아손을 따라나선 것은 에로스의 화살이 불러일으킨 사랑의 힘이다. 아폴로니오스는 특히 메데이아의 사랑의 심리 묘사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후에 메데이아는 희랍 신화에서 제일가는 악녀로 지탄받는다. 그녀는 사랑을 위하여 자신의 오빠를 죽였으며, 사랑의 배신에 절망하여 자신의 두 아들을 죽였다. 사랑에 모든 것을 건 메데이아에게 이아손의 배신은 감내할 수 없는 분노와 치욕과 절망감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아손 보다는 메데이아를 탓하는 것은 희랍신화의 남성우위의 가부장적 구조에 기인할 것이다. 다행히도 이 작품에서는 이아손과 메데이아의 혼인까지만 내용이 전개된다.

 

지도의 원정로를 짚어가다가 알게 된 사실이다. 아르고 호의 모험담이 여정의 길이를 감안할 때 매우 불균형하게 수록되었다는 점이다. 원정 여정은 이렇다. 희랍 중부의 이올코스를 출발한 아르고 호는 헬레스폰토스와 보스포로스를 지나서 흑해에 진입한다. 아나톨리아 반도 북부 해안을 따라서 동진하여 흑해 동안의 콜키스에 도착한다. 귀로는 콜키스에서 아나톨리아 반도 해안 중간까지는 동일하다. 이후 흑해를 가로질러 이스트로스강[다뉴브강] 하구로 진입하여 강을 거슬러 올라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아드리아해로 빠져 나온다. 다시 바람에 밀려 지중해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이탈리아의 에리다노스강[포강]을 거슬러 올라간 후 알프스의 호수에서 프랑스의 로다노스강[론강]을 통해 지중해로 나온다. 이후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거쳐 희랍 서안에 다가가지만 역시 바람에 밀려 아프리카의 리비아로 상륙하여 고생하다가 간신히 신의 도움으로 출발지 이올코스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두 여로를 비교해보자. 길이와 난이도를 감안할 때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가는 비희랍은 그리 관심이 없는 듯 간략한 분량만을 기술에 할애하고 있다.

 

솔직히 아르고 호보다도 더 대단하고 놀라움을 안겨준 것은 아이에테스의 추격대다. 일대는 아르고 호를 따라서 이스트로스강을 앞질러 가기도 하였으며, 다른 일대는 보스포로스를 거쳐 희랍 근해에서 아르고 호를 기다리고 있을 정도였다. 이로써 콜키스의 아이에테스의 강대한 위세와 막강한 권위를 짐작케 한다.

 

우여곡절 끝에 아르고 호는 귀환하였고 영웅들도 일부 손실을 겪었지만 임무를 완수하였다. 제우스와 헤라의 분노는 가라앉았고 그들의 정의는 회복되었다. 이 시점에서 묻고 싶다. 아르고 호 모험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이었는지를. 그들이 겪고 무릅쓰고 헤쳐 나온 위험과 고난이 나타내는 의미는 무엇이었는지를. 단순한 모험심에서 그들이 배를 띄운 것은 아니다. 지리상의 발견을 위한 것도 더더욱 아니다.

 

희랍인들은 인간의 불가측하고 불가해한 운명을 신의 뜻이라고 여겼다. 감당할 수 없는 자연의 위력도 신의 행위라고 수용하였다. 신이 먼저 존재하는 게 아니라 역으로 필요에 의해서 신을 만들어 냈다고 볼 수도 있다. 운명과 자연 앞에서 인간은 무력하다. 신의 의지 앞에서 인간-제아무리 위대한 영웅일지라도-이 보잘 것 없는 존재인 것처럼.

 

친절한 돌리오네스인들과 사생결단의 전투를 벌이게 되어 이아손은 키지코스 왕의 가슴에 창을 꽂았다. 이 대목에서 작가의 탄식을 보자.
“인간은 절대로 이런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우리 주변 어디에나 커다란 운명의 그물이 쳐져 있다. 키지코스도 영웅들과 싸우던 그날 밤 바로 그 그물에 걸려든 것이다.” (P.98)

 

메데이아가 자신을 추격한 오빠 압시르코스를 죽이기 위하여 계책을 꾸미는 장면에서 아폴로니오스는 이렇게 외친다.
“무정한 에로스여, 당신은 인간들 사이에 얼마나 많은 고뇌와 증오의 씨앗을 뿌리십니까! 당신으로부터 끔찍한 불화와 탄식과 불평뿐 아니라, 다른 숱한 고통들로 비롯됩니다.”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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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세계 행복한책읽기 SF 총서 1
아서 코난 도일 지음, 김상훈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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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탐정 셜록 홈즈 시리즈로 유명한 코난 도일 경이 수편의 모험소설을 썼다니 흥미롭기 그지없다. 더욱이 후대에 지속적 영향과 자극을 주어 마이클 크라이튼은 동명의 소설을 썼고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의 크라이튼의 작품을 토대로 유명한 <쥐라기 공원>을 제작하였다. 20세기 대중문화에 끼친 영향은 셜록 홈즈에 못지않았던 셈이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모험소설은 사실상 매우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장르 특성 상 사실성을 외면할 수는 없다. 독자들은 작가가 제시하고 인물들이 겪는 모험과 탐험이 어느 정도 그럴 듯하다고 여겨야 한다. 순전한 공상 내지 상상의 소산이라면 환상 내지 백일몽으로 치부해 버리기 쉽다. 게다가 소설로서의 요건상 문학적 상상력은 필수적이다. 사실성과 상상력이 인절미에 떡고물을 묻히듯 적당하게 어울려 있어야 독자는 이야기에 몰입하게 된다. 재미는 대중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순수문학도 비록 의미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재미 가 미흡해서는 박물관의 유물이나 박제가 되고 만다. 당대 및 후대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생생하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몰입도는 이처럼 중요하다.

 

남미 아마존 강 상류 유역 어딘가로 설정한 지리적 배경은 현시점에서 보면 신빙성도 떨어지고 시대착오적이다. 코난 도일이 이 작품을 발표한 게 1912년, 이미 백 년 전이다.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여 당시의 지리적 인식 수준과 과학적 지식 역량의 한계를 인지한 상태에서 소설을 읽을 필요가 있다. 이 점만 유념하면 의외로 상당한 스릴과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책을 펼쳐드는 순간부터 독자들의 시선을 딱 고정시키는 능력이 정말로 탁월하다. 스토리텔러로서 코난 도일의 역량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쥐라기 공원>에 익숙한 독자의 시각에 익룡을 제외한 육지 공룡은 정작 초식공룡 이구아노돈과 스테고사우루스만 등장하여 심심하기는 하다. 커다란 두꺼비 같은 무시무시한 정체모를 공룡류가 등장하지만 우리에게 낯익은 티라노사우루스나 알로사우루스, 아니면 벨로시랩터 등은 나오지 않는다.

 

작품 후반부의 주요 사건은 원인류와 현대 인디언 부족 간의 생사를 건 종(種)의 전쟁이다. 인간의 승리로 끝나는 전투의 결말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은 미묘하다. 진화론에 입각한 우세한 종의 승리에 대한 찬미인지, 아니면 냉소적 희화화일지.

 

“수많은 세대에 걸친 숙원과, 협소한 역사 속에서 펼쳐진 증오와 학살, 박해와 학대의 모든 기억이 하루만에 통째로 불식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인간은 영장(靈長)의 자리에 올랐고, 수인(獸人)들은 자신의 위치를 감수하게 되었다.” (P.260)

 

작품의 내용 외에 명확한 개성을 지닌 등장인물들의 갈등과 협력, 성격과 행동의 뚜렷한 대비 등이 작품에 다채로움과 다이내믹을 더해 준다. 챌린저 교수와 서멀리 교수는 체격과 외모, 성격에서 극명한 대조를 보이지만, 풍부한 학문적 역량을 통해 작품의 과학적 지식 제공에 큰 기여를 한다. 록스턴 경은 탐험단의 실질적 대장이라고 할 정도로, 학문적 영역을 제외한 분야에서 그의 존재와 역할이 없었더라면 탐험단은 진작에 괴멸되었을 정도다. 그의 거의 완벽하다시피 한 (사냥과 스포츠 등에서) 역량은 오히려 비현실적이기조차 하다. 화자인 멀론은 기자로서 탐험단의 기록을 담당한다. 탐험단의 발견 성과를 대내외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기록이 필수인데 직업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미식축구 선수인 그의 신체적 능력 또한 탐험을 위해서는 최적이라고 하겠다.

 

록스턴 경이 가져온 값진 다이아몬드를 분배하며 작가는 독자에게 속편의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모험광 록스턴 경은 재차 잃어버린 세계를 방문할 생각을 지니고 있으며, 실연당한 멀론은 주저할 필요가 없다. 후대 많은 소설과 영화 등에서 상투적 수법으로 자리 잡게 된 여운을 남기는 장치를 이렇게 코난 도일은 앞서 써먹고 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왜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감내하고 떠나려고 하는 걸까? 극지 정복, 최고봉 등정, 사막 횡단, 심해 탐사 같은 고전적 유형을 떠나서 알프스에서 산악자전거 타기, 스카이다이빙 등의 소위 익스트림 스포츠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심경을 헤아리기 어렵다. 하긴 가까이는 테마파크에서 자이로드롭이나 롤러코스터를 즐기는 사람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젊은 친구, 바로 그 멋진 위험이야말로 삶의 소금이라고 할 만한 존재야. 그걸 다시 경험함으로써 비로소 살아갈 가치가 있는 거지. 우리 모두 너무 부드럽고 지루하고 편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어. 광활한 황무지와 넓은 공간 만 주어진다면, 나는 언제든지 손에 총을 쥐고 발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찾아나설 용의가 있네.” (P.95)

 

존 록스턴 경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내면 깊숙이에는 노마드에 대한 갈망이 잠재되어 있다는 주장도 섣불리 부인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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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라인
브루스 채트윈 지음, 김희진 옮김 / 현암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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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한 땅을 눈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선이 가로질러 달린다. 그 선의 굽이굽이마다 깃들어 있는 이야기는 노래를 통해 생명을 유지한다. 조상과 후세가 만나는 길, 부족과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되새길 수 있는 길, 그것이 호주 원주민 애버리진의 송라인이다.

 

<파타고니아>으로 일약 명성을 떨친 채트윈은 십년 만에 이번에는 남미가 아닌 호주를 선택한다. 그들의 노래의 길을 찾아서. 호주 중앙의 뜨겁게 달아오른 황야는 파타고니아와는 다른 의미에서 여전히 오지이자 변방이다. 자연의 위력이 인간 삶의 유형과 양태를 조건 짓는 곳. 정작 그곳에서 사람들을 지치고 힘들게 하는 요인은 불순한 자연환경이 아니라 타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 자신들이다.

 

노마드에 대한 채트윈의 관심은 오래전부터였다. 그의 최초로 시도했던 저작도 노마드에 관한 것이었음은 전작의 작품해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전작의 성공 이후 저자의 삶의 편력을 추적해 보면 자신 또한 전형적인 노마드임을 깨닫게 된다. 채트윈은 결국 자신의 본질적 속성에 되돌아온 것이다.

 

이 책의 후반부에 노마드에 대한 상당한 분량의 단상들이 삽입되어 있고, 이것은 작가의 송라인에 대한 추적과 서로 교차하며 작품의 중요한 전개 구조를 형성한다. 송라인 자체가 노마드를 내포하고 있다.

 

“애버리지니의 믿음에서 노래 불리지 않는 땅은 죽은 땅이었다. 따라서 노래가 잊히면 땅 자체도 죽음을 맞이할 것이었다.”(P.85)

 

“음악은 세계에 대한 자신의 길을 찾는 기억 은행이죠.” (P.167)

 

호주 원주민들은 노래를 통해 역사를 기억하고 정체성을 재발견한다. 노래의 길끼리 마주치는 곳에서는 소통과 교류가 이루어진다. 영역의 관념을 함유하고 있으나 결코 영토의 개념은 아니다. 3차원적 면이 아니라 2차원적 선이므로 상호 중첩되지 않으며 이해관계의 충돌 여지가 없다. 그들은 소위 울타리를 두르는 땅따먹기에 관심이 없다. 그들의 삶의 기원은 길의 시작과 끝, 그리고 도중의 이야기에 있다. 그들은 조상이 물려준 길을 당대와 후대에도 변함없이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문화를 자신의 시각에 따라 단선적으로 파악하는 사람들은 결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호주에 갓 도착한 유럽인들이 그러하다. 일단 자신을 우위에 놓으면 만사는 다 열등하게 보인다. 열등시 해버리면 공감과 이해가 생겨날 여지는 없게 마련이다.

 

“그들[애버리지니]과 백인의 차이는 세상을 보는 관점에 있었다. 백인은 자신들의 의심스러운 미래관에 맞춰 끊임없이 세상을 바꿔왔다. 애버리지니들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데 정신적 에너지를 다 쏟았다. 그것이 대체 어떤 면에서 열등하단 말인가?” (P.190)

 

근년 들어 노마드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주목이 급증하였다. 유목민적 삶의 가치가 부활한 것은 물론 산업적, 경제적 관점에서 비롯한다. 끊임없는 경쟁과 개발 노력이 기업과 시장의 성장을 보장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중앙 오스트레일리아의 두 부족의 예(P.426)를 통해서 정주민과 이주민의 성향 차이를 알 수 있다. 정착 생활을 하는 아란다족은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로서 순수한 혈통을 내세운다. 반면 서부 사막 민족은 이동 생활을 하는데 매우 개방적이며 언제나 쾌활하게 웃는다.

 

채트윈은 인간은 기본적으로 노마드에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존재임을 많은 인용과 단상과 일화를 통해 눈앞에 제시한다.

 

파스칼, 보들레르, 성 안토니오, 페트라르카, 랭보, 다윈, 칼레발라, 키르케고르, 아나톨 프랑스, 아이타레야 브라흐마나, 석가모니, 워즈워스 등등.

 

그리스 아토스 산에서 한 헝가리인은 채트윈에게 “인간은 정착하도록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P.306)고 말하였다. 인간의 정착과 도시화는 문명을 낳았지만 개인에게는 불행의 출발이라고 볼 수 있다.

 

“이븐할둔의 철학 체계는 인간은 도시를 향해 나아갈수록 도덕적·육체적으로 타락한다는 직관에 바탕을 둔다.” (P.305)

 

가만히 있지 못함에도 가만히 있어야만 할 때 품게 되는 불안감이야말로 문명화되고 정착된 삶을 누리는 현대인을 안절부절 못하게 하는 원인이다. 우리 유전자에는 옛 선조들의 노마드 흔적이 각인되어 있는지 모른다. 이것이 실제적 삶으로 극단적으로 체현되었을 때 지칭하는 용어가 소위 ‘역마살’이다. 채트윈이야말로 액운에 씐 팔자가 아니겠는가. 남미 파타고니아, 중앙 오스트레일리아, 사하라 사막의 이쪽과 저쪽의 지역들, 인도와 동양 등. 역마살이 아니라도 우리에게는 정형화된 일상을 훌훌 털고 일어나고 싶은 욕구를 지닌다.

 

사십 대의 채트윈은 확실히 문체에서도 글의 호흡에서도 십년 전과는 다른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쫓기는 듯한 치열함을 잃은 대신 보다 넉넉히 현실을 받아들이고 때의 순역(順逆)을 기다릴 줄 안다. 전체적 흐름과 글쓰기의 방식은 전작과 유사하다. 기행문과 에세이를 넘나드는 애매한 장르 구분. 대신 여기서는 홀로가 아니라 믿음직한 동행자 아카디와 일행들이 있다.

 

“송라인이 반드시 오스트레일리아에만 있는 현상은 아닌, 보편적인 것이라 느꼈다. 송라인은 인간이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는, 그리하여 자신의 사회적 삶을 조직하는 수단이었다고 말이다. 그 이후 생겨난 다른 모든 체계는 본디 모델의 변종, 혹은 왜곡된 형태였다.” (P.438)

 

“내 눈에는 송라인이 모든 대륙과 모든 시대를 누비며 뻗어 있는 것이 보인다. 발 디디는 곳마다 인간은 노래의 발자취를 남겼“다. (P.438)

 

채트윈은 송라인의 보편성을 지적한다. 인간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존재와 영역을 표현하고자 한다. 가장 원초적인 동시에 강한 생명력이 노래라는 틀에 담겨 전해온다. 눈에 쉽사리 보이지 않기에 혹자에게는 자칫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오해가 가능하다. 다만 진정과 이해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미약하나마 노래의 길이 인적없는 황무지 한복판에서도 오롯이 떠오름을 볼 수 있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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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아노스의 진실한 이야기 아모르문디 세계문학 1
루키아노스 지음, 강대진 옮김, 김태권 그림 / 아모르문디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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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진실한 이야기 1
진실한 이야기 2
저승 가는 길, 또는 참주
카론, 또는 구경꾼들
죽은 자들의 대화
꿈, 또는 루키아노스의 생애

 

서기 2세기 로마제국 시대의 풍자작가 루키아노스의 주요 작품집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진실한 이야기>가 유명한데, 환상문학 또는 SF문학의 선구자로 일컬어진다. 옮긴이는 서문에서 독자들이 루키아노스라는 이름을 이 책에서 처음 접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다행히도 나는 이 작가의 이름과 대표작에 대한 정보를 이미 접하였다. 즐겨 참조하는 <세계문학사 작은사전>(김희보 편저)에 작가에 대하여 흥미롭게 소개되어 있어서. 요는 이러한 작품이 과연 척박한 국내 출판시장에서 번역의 빛을 볼 수 있을지에 회의적이었는데, 따라서 이 책의 출간 소식을 접하고는 정말로 깜짝 놀랐다.

 

서양 고대의 희랍어와 라틴어 원전 번역이라고 항상 근엄하고 고답적이며 격조 높은 저작들만을 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당대 사람들도 오늘날의 우리들과 사는 양태는 별로 차이가 없을 것이다. 희로애락을 지니고 미신과 종교 사이에서 방황하며 행복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해 치열하게 분투하는 인간의 본질. 원전 번역이 표준적 텍스트에 집중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보다 다변화되어 이처럼 인간적인 작품들도 많이 다루어주기를 바란다.

 

<진실한 이야기>는 방랑과 환상의 모험담이다. 이는 서양문학사의 많은 작품들을 떠올리게 하는데, 희랍신화의 헤라클레스와 오뒷세우스의 방랑, 켈트 신화의 쿠훌린(?), 후대 라블레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세르반테스의 마지막 소설 <사랑의 모험>, 콜로디의 <피노키오> 등. 고대인의 사유와 상상력이 얼마나 풍성하고 자유로왔는지 루키아노스는 잘 보여준다. 희랍의 철학자와 작가들을 마음껏 인용하고 변용하는 데서 그의 지적 역량이 출중함도 알 수 있다. 여기서 그는 모험담에 치중하고 있어 날카로운 풍자성은 다소 덜한 편이다.

 

그는 포도주 섬나라, 공중에 떠있는 섬들, 달나라, 거대한 고래 뱃속 세상 등 온갖 기묘한 세계를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묘사한다. 후편에서는 얼음나라에 갇혔다가 ‘행복한 자들의 섬’이라는 선인들의 사후 세상도 방문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순전한 가공임을 서두에서 밝히고 있다. 당대의 몇몇처럼 겪지도 않은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꾸며내어 진실이라고 우기지 않는다. 작가는 독자들에게 이 이야기들을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애당초 존재할 수도 없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결코 믿어서는 안된다고 친절한 당부조차 아끼지 않는다. 이렇게 자신이 이야기의 허위성을 스스로 인정하으므로 이제 그의 발언은 진실하게 된다. 그래서 <진실한 이야기>라는 역설이 성립한다.

 

<저승 가는 길, 또는 참주>와 <카론, 또는 구경꾼들>은 짤막하면서도 풍자적 재미가 뛰어나다. 당대인들은 죽어서 사후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헤르메스의 인도로 뱃사공 카론이 모는 배를 타고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강을 건너야 한다고 믿었다. 죽음 앞에서는 생전의 제반사가 모두 덧없기 마련이다. 부귀도 영화도 명예도 지위도 삶과 죽음의 껍데기에 불과하다. 죽음은 오로지 적나라한 본연의 것만 허용한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여전히 아귀다툼에 골몰한다. 인간의 유한함과 부질없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하루살이마냥 한치 앞도 모르면서 싸우고 죽고 죽인다. 저승의 카론 입장에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며, 도대체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이승의 삶이 그토록 아름답고 행복하다면 모르겠지만, 일생을 천대받고 병들고 굶주림에 허덕이면서도 사람들조차도 저승을 앞두고 몸부림을 치며 대성통곡한다.

 

“그들이 만일 처음부터, 자신들이 필멸의 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이 짧은 시간 동안 삶에 머문 후에 모든 것을 땅 위에 남기고, 마치 꿈에서처럼 떠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의식했다면, 좀 더 현명하게 삶을 살아갈 것이고 죽을 때도 덜 괴로워할 텐데 말입니다.” (P.145)

 

<꿈, 또는 루키아노스의 생애>는 자전적 요소를 지니고 있어 흥미롭다. 작가는 꿈 속 여신들의 논변을 통해 직업 선택과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표어가 여전히 주창되고 있지만 당위성에 불과하지 현실은 엄연히 귀천의 차이를 두고 있다. 예외를 인정한다면 교육의 양과 질이 곧 직업의 수준을 결정하며 이는 곧 지위와 명예, 나아가 빈부의 차원마저도 좌우하기 쉽다. 교육의 여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루키아노스가 얼른 기술의 여신을 외면하고 등돌린 것은 당연하다. 서글픈 현상이지만 당대에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것이 여전한 진실이다.

 

<죽은 자들의 대화>는 <진실한 이야기>와는 다른 의미에서 뛰어난 작품이다. 전작이 모험담인데 비해 후자는 대화편이다. 25편의 짤막한 대화편에서 저승세계의 여러 영혼들과 신들이 등장하여 다채로운 이야기를 전개한다. 핵심 주제는 마찬가지로 사후 세계의 시각에서 볼 때 생전의 부귀와 지위는 무의미하며, 소박한 삶으로 순수한 본성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루키아노스는 희랍 철학에서 에피쿠로스학파와 견유학파를 상대적으로 높이 평가하며, 소피스트들과 같은 철학자와 수사학자에 대해서는 사기꾼이라고 부를 정도로 비판적이다. 제10편 ‘카론과 헤르메스의 대화’에서 철학자와 수사학자의 허위와 가식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진다.

 

<저승 가는 길, 또는 참주>에서는 퀴니스코스가, 여기에서는 메닙포스와 디오게네스가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 그들은 거리낌이 없다. 하루빨리 이승을 벗어나 저승을 오지 못해 안달할 지경이다. 속세에 가진 것 없고 속박된 게 없으니 그들은 자유롭다. 모든 이가 괴로워 눈물을 흘리는 와중에도 그들만이 활기차고 호탕한 웃음을 날린다. 이들은 저승의 신들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제11편 ‘크라테스와 디오게네스의 대화’ 중 한 대목은 루키아노스가 중시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크라테스: 정말 필요했던 것은, 당신은 안티스테네스에게서 물려받았고, 저는 당신에게서 물려받았으니까요. 그건 페르시아 제국보다 훨씬 더 크고 존엄한 것이었죠.
디오게네스: 뭘 하는 건가?
크라테스: 지혜, 자율성, 진리, 거침없는 발언, 그리고 자유입니다.” (P.218)

 

<에라스무스 격언집>과 마찬가지로 여기도 삽화가 들어 있다. 옮긴이와 삽화가가 전작과 동일하다. 전작의 삽화는 개인적으로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삽화가의 지향점과 나의 중시점이 어긋났다. 여기서는 삽화의 존재도 인식 못하였다. 곳곳에 있는 그림은 당대의 신화를 그린 그림들로 생각하였다. 그만큼 고전의 분위기와 성격에 완전히 부합하여 전혀 이질감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삽화는 양날의 칼과도 같다. 이 책에서는 올바른 방향으로 칼이 휘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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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이브 세계문학의 숲 30
오귀스트 빌리에 드 릴아당 지음, 고혜선 옮김 / 시공사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과학과 기술의 발달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양가적이다. 장밋빛 전망은 과학자, 기술자 및 이로 인해 직접적 이득을 얻는 자본가의 태도이며, 기계로 인해 일자리를 빼앗긴 노동자와 농민 등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잿빛 시각이 우세하다.

 

릴아당의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 전자에 가깝다. 미래의 여성, 즉 이브를 안드레이드라는 로봇을 만들어 대체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과학기술의 압도적인 능력을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에게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는 인간을 닮고 인간을 흉내 내는 기계적 존재, 그것을 안드로이드라고 부르든 아니면 릴아당처럼 안드레이드로 명명하든 그 본질은 동일하다.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고 무한성에 도전하는. 그것은 과학기술의 완전성에 대한 굳건한 신념에 근거한다.

 

작가는 당대 독자들에게 안드레이드 로봇 제작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과학자 에디슨의 이름을 사용한다. 에디슨이 비밀리에 안드레이드 아달리를 창조(인간적 존재이므로 발명이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하였다는 식으로. 게다가 작품 중반부의 상당 분량을 에디슨이 아달리를 제작한 방법에 대한 설명에 할애한다. 전기의 마법사 에디슨답게 각종 전기적 장치로 구현한 아달리에 대해 듣다보면 확실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구나 하는 동감이 들 정도다. 오늘날이라면 IT 외에 나노와 생명공학 등의 첨단 기술을 적용하여 만들었다는 셈이다.

 

미래의 이브가 의도한 인간의 미비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영국 귀족 에왈드 경의 아름다운 애인 알리시아에 있다. 인간의 내면과 외면이 조화를 이룬다면 참으로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남녀를 불문하고. 에왈드 경은 여성에게 외적인 미모와 함께 높은 수준의 정신적 능력을 기대한다.

 

“알리시아 양의 영혼과 육체 사이에 있는 것은 제 오성을 당황하게 만들고 괴롭히는 불균형이 아니라 ‘부조화’였습니다.” (P.75)

 

기실 젊은 귀족이 절망하고 에디슨이 마지못해 동의하는 알리시아 양의 사고와 행동 양태는
당대, 아니 오늘날의 일반적인 현상과 큰 차이가 없다. 실리적이고 현세적이며 주위의 인정에 목말라하면서 지성과 도덕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것, 그것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보편적 인간유형이 아니던가.

 

“당신이 사랑하고 있으며 당신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실재하며 살아 있는 존재는, 지나가는 인간의 형상 속이 아니라 당신의 ‘욕망’ 속에서 ‘나타나는’ 존재입니다.” (P.155)

 

“당신은 바로 그 ‘그림자’만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자’를 위해서 당신은 죽으려고 합니다. 당신이 절대적으로, 실재라고 인정하는 것은 이 ‘그림자’뿐입니다!” (P.156)

 

현실의 인간은 수많은 결함과 약점을 지니게 마련이고, 여기에 실망을 금하지 못할 수도 있음을 충분히 인정한다. 에디슨은 에왈드 경을 비판하는 것은 현실의 여인이 아닌, 환상의 존재를 꿈꾸는 데 있다. 이상은 가슴 속에 품는 것이지 두 발로 설 수 있는 단단한 대지가 아니다. 릴아당은 당대 자본주의 사회 속의 부르주아의 변질된 인간성과 아울러 구 귀족계층의 비현실적이며 진부한 의식을 동시에 비판한다.

 

그렇다면 에디슨이 안드레이드 제작에 나선 동기는 무엇일까?

 

“한 인간의 혼을 변화시켜 구제해줄 수 있는 전기인간의 창조를 공식화 할 수 있다면, ‘과학’으로부터 ‘사랑’의 방정식을 끌어내 보도록 합시다. 이 방정식에서 사랑이란 제일 먼저, 인류에 느닷없이 더해진 전기인간 없이는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증명된 저주들을 초래하지 않을’ 사랑이며, 사랑의 불길을 막을 사랑입니다.” (P.275)

 

“우리의 신들도 우리의 희망도, 이미 ‘과학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게 되었는데, 사랑 역시 과학이 되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잊힌 전설, 과학에 의해 경멸당한 전설에 나오는 이브 대신에, 저는 과학적인 이브를 드리겠습니다.” (P.359)

 

가까운 친우의 뜻밖의 타락에 의한 파멸을 지켜보면서 에디슨은 육체적 결합관계를 배제하고 공허하고 변질된 영혼 대신 올바른 지적 능력이 갖추어진 인공적 존재를 생각하였다. 그것이 남녀 간의 무수한 비극적 연애사(戀愛死)를 방지해 주고 나아가 인류의 개인적, 사회적 발전에 일익을 담당할 것으로 생각하였던 듯하다.

 

안드로이드 로봇과 관련된 영화들을 떠올린다.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에서 영원한 생명은 인간을 기계인간으로 개조하는 데 있다. 영화 <에이 아이(AI)>에서 로봇은 인간을 닮는데 그치지 않고 인간이 되기를 꿈꾼다. 또 다른 영화 <아이, 로봇>에서는 독자적 사고와 감정능력을 지닌 로봇이 인간을 공격한다.

 

작가도 후반부에서 완성된 아달리에게서 설계되지 않은 미지의 지적 발달을 언급한다. 형이상학적인 신비가 개입하여 아달리의 기계적 색채를 서서히 지워나간다. 이처럼 로봇은 인간에 근접해지고자 하며 점차로 인간의 조역이 아닌 주역을 지향하고자 하는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로봇 발달의 필연적 귀결인 인간과 같은 로봇, 그래서 사람들은 안드로이드에 열광하는 한편 깊은 우려를 품는다. 그것이 인간 존재의 기본적 가치와 연결된 사안임을 본능적으로 느끼게 된다.

 

릴아당은 과학진보에 찬동하는 입장이 아니다. 그의 다른 작품집 <잔혹한 이야기>에는 당대 자본주의 확산에 따른 인간 양태를 절묘하게 희화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래의 이브>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표피적 전개에 현혹되다 보면 릴아당의 본의를 오독할 우려를 유의하여 음미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아달리가 바다 속에 수장되는 마지막 대목을 통해 명확하게 구현된다. 이로써 작가는 두 가지를 암시한다. 안드레이드 로봇은 본질적으로 신과 인류의 가치에 대한 위배라는 점, 따라서 가까운 시일 내 현실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오늘날 과학기술의 추종자들은 여전히 과학의 순수성 내지 탈 가치성을 주장할 것인가?

 

※ <잔혹한 이야기> 번역본에서 <미래의 이브>가 근간 예정이라고 하였는데 수년이 흐른 뒤 출판사가 바뀐 채 드디어 나왔다. 저간의 속사정이야 알 수 없으나 우여곡절 끝에 번역본이 나오게 된 점이 반갑다. 유력한 세계문학전집의 일환으로 출간된 점은 다수 독자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확대하였다는 점에서 보다 긍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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