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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미친 바보 - 이덕무 산문집, 개정판
이덕무 지음, 권정원 옮김, 김영진 그림 / 미다스북스 / 200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이덕무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이덕무란 인물이 궁금해졌다.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알아보려면 결국 그가 남긴 자신의 글을 읽어야 할 것이다. 한 사람의 글에는 남들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글쓰기 스타일이 있으며, 은연중에 개성적인 사고와 가치관이 녹아들어 있다. 어쩌다가 한두 편은 인위적인 글쓰기가 가능하지만, 결국에는 본연의 모습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 산문선에서 볼 수 있는 이덕무는 어떠한 모습일까? 온화하면서도 옹골찬 선비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서자 출신인 그는 언제나 신분의 한계와 제약을 절감하면서도 글 읽기를 그치지 않는 선비의 자세를 보여준다. 간서치(看書痴)라는 자술처럼 그는 책읽기에 미친 존재였으며, 독서의 폭의 광대무변과 지식의 박학다식은 당대에 유명할 정도였다. 그의 박학함을 알려면 이 책에 실린 ‘중국의 문인과 문장에 대하여’와 ‘조선의 문인과 문장에 대하여’를 읽어보면 충분하다.
그가 독서를 하는 목적은 단순한 지식 축적도 아니며 입신양명의 목적에 구애됨 없이 오로지 마음을 닦고 성정을 길러 참다운 인간상을 구현하고 보전하기 위해서다.
“책을 읽는 이유는 정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으뜸이고, 그 다음은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 다음은 식견을 넓히는 것이다.” (P.51)
이러하였기에 당대 한시 4대가의 일인으로 손꼽히는 그였음에도 세인의 평가도 “품행을 제1로, 학식을 제2로, 박문강기를 제3으로, 문예를 특별히 제4로”(P.12) 칠 정도였다고 연암 박지원은 술회한다.
그는 글쓰기에서 무엇보다도 타고난 본성과 순수한 진정을 가장 우선시하였다. 자신의 첫 문집명을 <영처문고>라고 한 연유도 마찬가지다. 어린아이의 천진함과 처녀의 수줍음과도 같은 자연스러움으로 자신과 문장을 단속하고자 함이다. 이런 심안을 가지고 자연과 사물, 세태와 인정을 바라보면 인위는 줄어들고 자연스러움은 늘어나게 된다. 모방하지 않아도 꾸미지 않아도 자신만의 독자적인 개성미가 물씬 풍기는 청언(靑言)이 가능하게 된다.
“모방만 한다면 인위적인 것은 많고 자연스러움은 적을 것이다. 문장이란 하나의 조화인데, 조화가 어떻게 얽어매어 모방할 수 있겠는가?
무릇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문장 하나가 가슴속에 담겨 있는데, 이는 마치 그 얼굴이 서로 닮지 않은 것과 같다.” (P.96)
이덕무가 살아있었다면 그는 정조의 문체반정에 적극 호응하였을 것이다. 그의 글쓰기적 이상은 정조와 상당 부분 일치한다. 다만 그는 연암과 초정 같은 이들을 벗으로 하였기에 다른 글쓰기에 좀 더 관대하였다. 그는 “진실한 마음으로 사물을 사랑하는 일에 모든 마음을 기울이는 것”(P.160)을 중시하였기에 속빈 글쓰기를 경계하였다.
“고인들의 글 쓰는 방법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구속을 받아도 안 되지만, 완전히 버리는 것도 옳지 않다.” (P.98)
모기에 대하여 세밀히 관찰하면서 모기의 주둥이를 ‘꽃 같은 주둥이’(P.256~257)로 표현한 옛글의 올바름을 깨달은 그가 옛사람들의 꼼꼼하고 치밀한 관찰에 감탄하지만, 역시 같은 이유로 우리는 그에게 감탄하게 된다. 이덕무의 여러 글들이 실학풍과 밀접한 유사성을 지닌다고 평가받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그가 벗이자 후배인 이서구에게 <성학집요>와 <반계수록>, <동의보감>을 좋은 책으로 추천한 근원이 이것이다.
이덕무의 관점에서 볼 때 소설은 용납되지 못한다. 연암과 친하지만 자못 의외다. 비록 연암의 소설을 직접 거론하지 않고 주로 <삼국지>나 <수호전> 등을 비판하지만 소설 전반에 대한 그의 평가는 혹독하다. 오늘날 흥미 위주의 통속 소설에도 이 비판은 유효하다.
“소설에는 세 가지 미혹된 것이 있다. 헛것을 내세우고, 빈 것을 억지로 맞추려 하고, 귀신을 말하고 꿈을 말했으니, 지은 사람이 첫 번째 미혹된 것이다. 허황된 것을 감싸고 천한 것을 고취시켰으니, 논평한 사람이 두 번째 미혹된 것이다.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경전을 등한시했으니, 탐독하는 사람이 세 번째 미혹된 것이다.” (P.189)
그는 자신을 수양하는 데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는 선비는 거울과 먹줄같이 처신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거울은 닦지 않으면 먼지가 끼기 쉽고, 먹줄이 똑바르지 않으면 나무가 굽기 쉽다”(P.177)고 첨언한다.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고래로부터 소위 성선(性善)과 성악(性惡)의 견해가 대립되어 왔다. 설혹 성선의 견해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순수하고 천진한 품성을 부지런히 닦고 밝히지 않으면 거울과 먹줄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게 된다. 간과하기 쉬운 후천적 노력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하여 오히려 신선하다.
“나를 칭찬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후하게 대하지 말고, 나를 헐뜯는 사람이라고 해서 야박하게 대하지 말아야 한다.” (P.179)
개인적으로 마음에 다가오는 문장이다. 사람은 누구나 칭찬과 교언에 약하다. 자신에 대해 비판적인 언사라도 듣게 되면 불같이 화를 내거나 가슴 한켠에 앙심을 품는다. 귀에 쓴 말을 하는 사람이 선의를 가진 이라면 조언을 고맙게 수용해야 함이 마땅하며, 선의가 아니라면 타인에게 원한과 적개심을 살 만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도(道)는 노장사상에서는 우주 만물을 관통하는 근본 원리이지만, 가까이로는 바람직한 인성을 유지하는 정신이기도 하다.
“사람의 허물은 항상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데서 심해지고, 사람의 재앙은 항상 남을 업신여기는 데서 생겨난다.” (P.199)
“도란 일상생활 가운데 지극히 얕고 가까운 것에 있다. 집안에 물을 뿌리고 깨끗이 쓸며 말을 따라 대답하는 것만큼 얕은 것이 없고, 부모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일보다 가까운 것은 없다.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이는 거의 대부분 이것을 무시하고 높고 큰 것을 엿보며 먼저 하늘의 원리를 말하고 역의 법칙을 논하려고 한다.” (P.198)
이덕무는 딱딱하고 고리타분한 도학자인가? 그렇지 않다. 그가 남긴 편지글을 보면 사려 깊고 풍부한 인간성이 깊이 드러나 있다. 조카 이광석에게 보내는 글(P.127)에서 보면 보통 우리네와 다름없는 일상적 친근미가 보여서 정답게 다가온다. ‘부모님께 효도하고, 공부 열심히 하고, 건강해라’ 이것이 우리네들의 통상적 덕담과 기원 인사말 아니겠는가? 더욱이 그의 표현은 은근한 유머가 깃들어있어 읽다 보면 슬며시 웃음이 배어난다.
윤가기에게 보내는 글에서는 좋은 책을 구하게 되면 자기만 보지 말고 자신도 볼 수 있도록 꼭 빌려달라고 간곡히 청한다. “책을 빌려주는 것이 바로 천하의 큰 보시”(P.140)라고 애달플 정도로 하소연하는 대목에서 역시 ‘책에 미친 바보’라는 평판이 떠오른다.
마지막으로 이덕무의 행복론을 살펴본다.
“아무 일이 없을 때조차도 지극한 즐거움이 있는데, 단지 사람들은 스스로 알지 못할 뿐이다.” (P.233)
당신은 행복합니까? 라는 질문을 받으면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나는 행복합니다 라고 답변할 사람이 과연 얼마큼 많을지 궁금하다. 남녀 간, 가족 간의 사랑과 행복이 뼈에 새겨질 정도로 짜릿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항상 그러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훗날 돌아보았을 때 그때가 행복한 시절이었지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다. 행복은 무념무사(無念無事)에 가깝다. 파란만장하고 격동적인 삶은 행복하지 않다. 대양을 항해하는 뱃사람은 바람과 파도가 일면 걱정도 커진다.
이 책은 전반적으로 인간 이덕무와 그의 글쓰기를 한눈에 잘 알게 해준다. 책 구성도 자화상, 내가 책을 읽는 이유, 문장과 학풍에 대하여, 벗들과의 대화, 군자와 선비의 도리, 자연과 벗 삼아 등 주제별로 그가 남긴 글들을 선별하여 수록하고 있는 점도 장점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이덕무란 인물이 보다 친근하면서 존경스러운 존재로 다가온 것은 나만의 심정은 아닐 것으로 믿는다. 기회가 닿는다면 좀 더 그의 글을 읽고 싶다. 그만큼 그의 글에서는 담박하면서도 은은한 향기가 풍긴다. 쌉싸름한 국화와 그윽한 매화의 내음이.
참고로 4백 면에 가까운 분량 중에서 후반부의 백여 면은 부록으로, 역자 주와 연보, 등장인물과 책의 소개, 그리고 원문이 수록되어 있어 책읽기에 도움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