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의 사랑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8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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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어엿한 중견작가로 자리 잡은 한강. 그가 이십대 중반의 시퍼런 나이에 쓴 이 작품들에서 예상치 못한 당혹감을 맞닥뜨렸다. 연령대와 표제를 통한 어림짐작의 상투성이 일거에 무너지면서 이것이 과연 그에게 합당한가 하는 의문마저 들 정도다. 이십대 중반의 조숙성일까 섣부른 조로 내지 애늙은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데뷔작 <붉은 닻>을 포함한 수록작 전체를 아우르는 분위기는 암울함이다. 그것은 상실에서 비롯한다. 가족과 고향의 상실. 공통적으로 반복되는 불행한 가족사는 고향으로부터의 불가피한 도피로 이어지기도 한다. 가족과 고향의 불행은 곧 존재의 뿌리를 박탈당했음을 의미한다. 가족은 사회의 기본 구성단위이자 개인의 안전과 생을 위한 최종 보루이다. 역으로 가족이 분열되고 해체될 때 개인은 존재 의의와 정체성의 혼란을 피할 수 없다. 이 작품들에 나오는 인물들이 모두 그러하다. 작게는 고뇌에서 크게는 죽음까지도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여수의 사랑>
나와 자흔은 비슷하면서도 상반된 캐릭터다. 나는 불행한 가족사로부터 도주하기 위하여 고향을 탈출하였으며 과거의 흔적으로부터 절연하고자 하는 욕망이 구토와 결벽증으로 발현된다. 자흔은 고향을 상실하였기에 오히려 부재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크다. 여수라는 지리적 공통분모는 이처럼 고향에 대한 중의성으로 구별된다.

 

<질주>
여기에서 불행한 가족사는 동생의 죽음이다. 인규의 달리기는 살아있음을 입증하는 몸부림이자 고뇌로부터의 도피다. 어머니의 질병으로 드러난 숨겨진 속내(죽은 자식에 대한 뼈아픈 슬픔)을 통해 인규와 어머니의 갈등 해소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 상대적으로 희망적이다.

 

<야간 열차>
쌍둥이 동생 동주의 사고를 겪으며 겨우 버티어내는 삶, 쌍둥이 동생마저 걸머져야 하는 삶을 살아가는 동걸에게는 나의 단순한 청춘의 방화마저 부럽기 그지없다. 그에게 있어 야간 열차는 삶의 무게와 질곡을 버티어내도록 해주는 최후의 지지대이며, 기차 바퀴 소리는 탈출을 희구하는 자아의 목소리일 것이다. 내게는 떠나는 일이나 머무르는 일이 다를 것이 없었던 반면, 동걸에게는 야간 열차를 타고 떠날 수 있다는 최후의 기대가 있었다는 점에서 나와 동걸의 차이점이 드러난다.

 

“동걸은 자신의 인생 전부를 오래 전부터 배신하고 있었던 것이다......떠나리라는 것 때문에 동걸은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세계에 속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강할 수 있었다. 단 한 번의 탈출로 자신의 인생을 완성시켜 줄 야간 열차가 있으므로 그는 어떤 완성된 인생도 선망할 필요가 없었다.” (P.107)

 

<저녁빛>
재헌과 재인 형제의 가족을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재헌의 출생의 비밀과 생모의 죽음. 이후 재헌은 철저히 혼자가 된다. 그에게 삶은 동력을 상실하였다. 어두워진 집안에서 재인 또한 혼자가 될 수밖에 없게 된다. 그의 삶 또한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되었으므로. 현재의 삶은 재인에게 존재 부정이라면 재헌에게는 자아 부정의 대상이다. 다만 재인은 극복과 변화의 여지가 있는 반면 재헌은 그러하지 못하였다. “살아 있다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무엇도 ...... 남아 있지 않”(P.163)은 재인은 살아남는다. 그리고 살아갈 것이다. 끼니때가 다가오면 허기져 있고, 밥벌이를 위해 애쓰는 자신의 모습에 혐오와 자괴감을 느끼더라도. 살아남은 자의 일상성,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진달래 능선>
정환은 어김없이 고향을 탈출한다. 그에게 고향은 아련한 정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새로 이사한 집의 “어딘가 황막하고 버림받을 것 같은 분위기가 정환에게는 차라리 친근한 것이었다.”(P.183)고 작가는 적고 있지만, 기실 작품의 분위기 및 작가의 정서 또한 그러하다. 정환에게 있어 진달래 능선이 상징하는 고향은 “오로지 어서 달아나야”(P.186) 하는 대상이다. 탈출의 절실성은 곧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의 절박함이다. 집주인이 정원의 나무를 하나하나 불태우고 마침내는 진달래마저 뽑아 불태워버리는 장면은 속죄 의식에 가깝다. 반면 정환에게 그것은 고향과의 되찾을 수 없는 영원한 단절을 의미할 것이다.

 

<어둠의 사육제>
홍콩 느와르를 연상시키는 짙은 허무주의적 대사와 생경하기조차 한 인물의 굳센 의지. 여성작가임에도 의외로 이 단편과 <여수의 사랑>에서만 여성 화자가 등장한다. 게다가 통상 기대하는 여성적인 느낌과는 그다지 가깝지 않음도 이색적이다. 세상이, 운명이 나에게 어둠의 도전장을 내밀었을 때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방기(放棄)적 굴복과 광분의 발작? 그가 택한 방식은 처연한 생존이다. 살기 위해 그는 인간미를 포기할 것을 작정한다.

 

“악하게 살아남아야 한다. 내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P.229)
“정을 준다는 것도 정을 받는다는 것도 모두 어리석은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P.236)
“나는 삶과 화해하는 법을 잊은 것이었다. 삶이 나에게 등을 돌리자마자 나 역시 미련 없이 뒤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P.251)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태도는 생존에 필수적이며, 남들로부터 칭찬의 대상이 된다. 다만 외로움에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부작용을 감내할 만큼 독한 성격을 지닌 인물만 가능하다. 그렇지 못하면 움츠러들고 제 칼날에 스스로를 해하게 된다. 명환의 경우처럼.

 

<붉은 닻>
동식과 동영 형제는 아버지에게서 비롯한 상처를 공유한다. 동식은 방탕과 간경변으로, 동영은 칩거 및 밤거리 배회로 대응 방식은 각자 다르다. 동식에게 동영은 죽은 아버지를 상기시키는 존재이다. 그는 동영이 거슬리고, 부담스럽다. 그가 사라지기를 바랐고, 동영이 변해서 낮의 세계로 돌아오기를 바랐다.

 

마지막 장면에서 형제가 서로에게 품었던 진심을 토로하기 시작하였다. 결과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어쨌든 희망의 조짐은 충분히 엿보인다.

 

 

작가는 무슨 연유로 한창 나이에 이처럼 삶의 질곡과 어두운 면을 다잡고 집요하게 응시하는가? 생을 거부하고 모멸하는 미래는 결국 죽음의 지향이다. 체험의 반영인가 아니면 순전한 상상의 소산인가, 후자라면 작가는 꼭지가 덜 익은 철없는 글쟁이에 불과하다. 그것도 아니라면 깊고 진지한 사색의 산물일지도.

 

이십년이 지나 작가에게 이 글들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서늘한 쓰라림을 안겨 줄 것인가 아니면 희미한 옛 생각의 자취만 아른거릴지도. 최근의 작품들에서도 여전한 작가의 주목과 지향점을 통해 어렴풋하나마 발전적 전망에 대한 희망을 가져본다.

 

수사적 표현에 대한 의식적 천착이 엿보인다. 당시로서는 아직 신인작가이므로, 괜찮다. 보다 아름답게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의 발현이므로. 이 또한 신진의 풋풋함으로 이해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작품해설의 두 대목을 인용한다. 작가 한강의 첫 작품집을 이해하는 주제를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한강의 주인공들이 진하게 가지고 있는 삶의 피로, 희망 없음의 원인이 그런 세태적인 결손 가족의 신산함에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바로 존재의 피로감, 희망 없음의 좌절감이라는 근원적인 정서적 상황의 드러냄인 듯하다......인간의 지울 수 없는 운명적 슬픔, 삶의 비애적 서정, 세계에 대한 비극적 전망을 그의 소설 속에 새겨넣는다.” (P.316)

 

“그녀의 슬픈 아름다움은 삶의 외로움과 고단함에서 온다......그녀는 세속적 희망을 버리는 대신, 삶의 근원성으로의 외로움과 고단함을 이끌어내고, 운명과 죽음에 대한 어두운 갈망과 그것들과의 때이른 친화감을 키워낸다.”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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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타고니아
브루스 채트윈 지음, 김훈 옮김 / 현암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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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메리카 대륙,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남부 지역, 그 드넓고 황량한 황무지를 일러 파타고니아라고 칭한다. 빙하의 강력했던 힘의 자취가 역력한 지형, 남극 대륙과 인접한 극단, 그럼에도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기 전까지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유일한 해상 통로였던 마젤란 해협을 몰아치는 불순한 일기와 몰아치는 강풍.

 

문명권에서 머나먼 땅에 사람들은 막연한 두려움과 아울러 호기심을 품는다. 실제 그곳은 어떤 곳일까. 정말로 인간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금단의 지역인지, 그곳에 사람이 산다면 누가 사는지 등등. 그중의 하나가 바로 파타고니아다. 해설에 따르면 이 책은 숨겨졌던 파타고니아의 실체를 세상에 드러낸 작품이다. 때는 1970년대 중반, 지금부터 삼십년 전이라는 시간의 격차는 실제 이상으로 넓고도 길다.

 

이 책은 기행문도, 여행안내서도 아니다. 미지의 자연 풍경과 낯선 문화에 대한 경이와 감탄이 여기에는 없다. 작가는 여기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의 눈은 오로지 파타고니아에 사는 사람들과 살았던 사람들, 그리고 여기에 얽힌 자신의 추억에 쏠려있다. 니컬러스 셰익스피어도 길다란 서문에서 이를 지적한다.

 

파타고니아는 특이한 곳이다. 문명과 모국으로부터의 단절과 고립은 기후적 요인과 결합하여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불안정하게 흔들어놓는다. 그래서 “술꾼은 술을 마시고, 경건한 사람은 기도를 하고, 외로운 사람은 더 외로워지며 가끔은 그 외로움이 치명적인 형태로까지 나아가기도 한다.”(P.10)

 

파타고니아 거주민들의 무리는 의외로 다채롭다. 그들 대부분은 유럽에서 도망치거나 피난 온 사람들이 그대로 눌러앉은 경우다. 웨일스인, 보어인, 독일인, 이탈리아인 물론 프랑스인이나 영국인은 구태여 강조할 필요도 없다. 작가에 따르면 그들은 모국과 본토보다도 더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에게 이것이야말로 자신과 고향을 잇는 유일한 동아줄이 아니겠는가. 오늘날 우리가 연변의 조선족이나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의 마을에서 낯설면서도 낯익은 정서와, 촌스럽고 예스러우면서도 푸근한 감성을 상기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게다가 이야기 중간에 흥미진진한 모험담이 덧붙여진다. 기인과 범죄자와 추방자들의. 자칭 파타고니아 왕국의 왕위계승 이야기는 참으로 재미있다.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의 주인공들인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의 방랑담을 발견하게 된 것은 의외의 소득이다. 혁명가 안토니오 소토도 파타고니아 역사의 중요한 지점일 것이다.

 

채트윈은 시간의 엄밀한 흐름에 구애받지 않는다. 목적지를 사전에 정해두고 이를 준수하는 방식이 아니다. 언뜻 발길 닿는 대로 지나가다가 문득 호기심이 생겨난 마을을 둘러보기 위해 여정을 이탈하기 일쑤다. 물론 여행의 거시적 목적은 자신이 표명한대로 브론토사우루스로 착각한 대형나무늘보 밀로돈의 추억을 더듬는 것이며, 밀로돈 가죽조각을 할머니에게 선물하였던 친척 찰리 밀워드 선장의 자취를 찾아보는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후반부에 밀워드 선장의 삶과 모험담이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이야기를 흥미롭게 만들기 위하여 부러 진실을 외면하거나 조작하지 않는다.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파타고니아 지역도 백인의 정복과 착취, 그리고 인디오의 수난과 억압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유럽인들에게 인디오들은 사람과 동물 중간, 때로는 동물 이하의 존재였다. 티에라델푸에고의 ‘붉은 돼지’ 알렉산더 매클레넌의 일화는 적합한 사례다.
“그는 직접 나서서 인디오들을 죽이는 걸 더 좋아했다. 그러면서도 동물들이 고통받는 광경을 보면 끔찍이 싫어했다.” (P.247)

 

지나간 과거사에 불과하다고?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채트윈이 만난 대지주 가문의 영국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인디오를 학살했다는 얘기들은 좀 지나치게 부풀려진 감이 있어요. 여기 인디오는 인디오들 중에서도 아주 열등한 자들이었어요. 아즈텍족이나 잉카족과는 달랐다는 얘깁니다. 문명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어요. 전체적으로 보아 그들은 아주 비천한 존재였죠.” (P.291)

 

채트윈의 이 책이 당대에 커다란 환영을 받았고 현재까지도 고전으로서 인정받는 연유는 명백하다. 오늘날 이를 읽는 독자도 시간의 간격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진부함과 구태의연함이 배어있지 않다. 그는 단순한 사실이 아닌 진실을 담으려고 노력하였다. 머나먼 미지에 대한 호기심 충족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극적이면서 개성이 넘치는 삶의 모습. 이 자체로 숨겨진 땅 파타고니아에 대한 관심은 증폭되었다. 그리고 세월의 경과에도 그네들의 삶의 본질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파타고니아의 자연과 환경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그의 진정한 성취는 파타고니아를 있는 그대로 서술했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파타고니아라는 풍경과 아울러 새로운 탐구 방식, 세상의 새로운 측면을 창조해냈다는 점에 있다.”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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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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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쪽이 훌쩍 넘는, 장편소설 중에서도 제법 두툼한 분량을 자랑하는 소설이다. 분량의 중압감에도 불구하고 독서 내내 지루함을 안겨주지 않는 작가의 역량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근래 들어 이렇게 압도적인 서사의 힘을 느껴본 기억이 있던가? 더욱이 여성작가라는 선입견을 단숨에 날려버릴 정도로 강렬하고 치밀하며 숨 막힐 듯한 거대한 힘의 위력을.

 

스쿠버다이빙, 프로야구, . 자체로도 이색적인 작품소재들이 여럿 등장한다. 게다가 작가는 이를 위화감 없이 한데 잘 버무려 놓고 있다. 잘 알지 못하는 영역에 대한 호기심 충족과 전문적 지식에 대한 낯선 외경의 느낌도 독자의 몰입을 유도하는 촉매제 구실을 한다.

 

주요 등장인물들은 모두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다. 하긴 누구나 모두 나름대로의 트라우마를 품고 있다. 차이점은 그것을 제어하는가에 달려있다. 이 작품은 인물들의 트라우마가 극한까지 도달하여 충돌하게 될 때 빚어지는 현상을 참혹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작가는 비정하다. 그가 조금이나마 온정의 펜 끝을 보여주는 인물이 과연 누굴까?

 

최현수는 아버지 살해라는 죄책감을 지니고 있다. 음주와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가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하는 심정. 우물에 빠진 아버지를 무의식중에 외면하는 아들. 이후 그는 끊임없이 꿈속의 인물에 시달린다. 그것이 현실화 된 것이 바로 용팔이 증세. 아들은 아버지를 미워하면서 닮는다는 속설이 있다. 최현수가 가장 두려워하던 것이 바로 그게 아니었을까. 자기가 증오하고 죽인 아버지 같은 인물이 되는 것. 그의 아들에 대한 판이하고도 치열한 사랑은 강한 거부의식의 발로이다.

 

최현수의 아내 은주도 마찬가지다. 가난하고 부끄럽고 창피했던 어린 시절, 과거로부터의 도피, 그것이 은주의 지상과제다. 번듯한 중산층으로 진입하고자 그녀는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아등바등 처절한 생존의 노력을 벌인다.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면서도. 그래도 그녀는 괜찮다. 남편보다 더 소중한 것이 눈앞에 있으므로. 그것은 뼈저리게 겪어본 자 만이 공감할 수 있다.

 

서원의 아저씨이자 보호자인 안승환도 마찬가지다. 한강에서 시체 인양하는 잠수부 집안의 아들. 온가족의 희망이 그의 양어깨에 묵직하게 드리워져있다. 자신의 선택이 자기 혼자만의 책임에 머물지 않고 모두의 삶을 좌우할 때, 누군들 인생이 힘겹지 않겠는가.

 

트라우마의 극단은 오영제에서 드러난다. 부유함과 우월성에 기인한 오만은 그의 인성에 독으로 작용한다. 소위 교정이라는 전문용어를 그는 자신의 기준과 판단에 부합하지 않은 타인의 행동에 무자비하게 적용한다. 그것이 아내와 자식일지라도. 게다가 오직 자신만이 해야 한다. 그의 소유물이기에. 오영제의 사고는 유아기에 정체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오영제의 사고와 행동은 인성에 흠결 있는 뛰어난 두뇌가 개인과 가족, 나아가 사회에 어떠한 해독을 미치는지 여실히 증명한다.

 

영제는 자신의 세계를 둘러싼 성벽은 높고 단단해 세상의 무엇도 무너뜨릴 수 없다고 믿었다......그렇게 만든 자를 용서할 수 없었다. 폐허를 인정할 수도 없었다.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어야 했다. 그가 정한 위치에. 그가 정한 모습으로.” (P.338)

 

이 모든 걸 아우르는 것이 바로 세령호다. 댐에 막혀 조성된 인공호수, 자욱한 안개와 그칠 줄 모르며 내리는 비. 세령호에 대한 작가의 묘사가 눈부시게 환하며 상쾌한 청량감을 준 경우가 있던가. 인물에 못지않게 배경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례가 있다. 기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세령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등장인물들의 트라우마가 증폭되고 심화되는 공간, 그것이 상호 충돌하며 불가피하게 파멸로 치닫도록 사건이 형성되고 귀결되는 공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놀이는 세령과 서원을 이어주는 가교의 구실을 한다. 생전에 대면한 적이 없던 두 아이는 생과 사의 다른 차원에서 교감을 나눈다. 세령은 생전에 함께 놀이를 할 친구가 없었다. 한솔등 소나무에 묶인 서원에게 이 놀이는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놀이를 통해 죽음의 공포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던 반면, 한층 놀이의 결과가 가져올 죽음의 의미를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서원에 대한 죽은 세령의 양가적 감정이기도 하다. 친구인 동시에 자신을 죽인 사람의 아들. 서원은 게임을 거부할 자격이 없다.

 

나는 영원한 술래였다. 잡지 못하면 벌을 받고, 잡으면 벌을 면하는 불공평한 술래......게임을 거부하거나 포기했을 때 받을 최후의 벌은 자명하고 자명했다. 호수가 나를 집어삼키게 될 터였다.” (P.463)

 

7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압박해온 오영제의 복수극을 끝낸 서원의 미래는 어떤 모습이 될지 궁금하다. 그를 괴롭혀온 추적은 끝났지만, 살인마의 아들이라는 굴레가 벗겨진 것은 아니다. 사건과 기록을 통해서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다소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이 그의 상처를 치료해주지는 못한다. 분노하지 않고, 당황하지 않으며 수치심도 느끼지 않는 삶의 방식, 인간적 도리를 외면함으로써 그는 버티어 왔다. 이것이 금방 달라질 수 있을까? 그것이 최현수와 안승환이 우려하고 걱정한 부분이다. 최현수가 최상사를 거부하면서도 결국 그의 전철을 밟았던 그러한 악순환에서 서원이 벗어날 수 있기를.

 

그래서…… 넌 아니기를 바란 거야.” (P.513)

 

그것은 오롯이 최서원의 몫이다. 7년을 품어온 트라우마가 그를 집어삼키는 괴물을 낳을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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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중국 당대문학 걸작선 1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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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관계의 본질은 사랑과 섹스 중 어디에 가까울까?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이런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우문(愚問)인 줄은 익히 알지만, 사랑과 섹스를 굳이 분리할 수 있다면 말이다.

 

우다왕과 류롄의 만남은 자연스럽지 않은 게 사실이다. 류롄은 우다왕의 젊은 육체에 성적 흥미를 가졌다. 우다왕은 류롄의 권력과 위협에 마지못해 굴복하였다. 일개 병사가 사단장의 부인의 명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자신과 가족의 미래와 운명이 달려있는데.

 

우다왕의 내심에 시골 아내와는 차원이 다른 희고 매끄러운 여체에 대한 미련이 잠복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아니 차라리 순전한 육욕과 일탈에 대한 갈망이다. 그래야 우다왕의 무지개가 설명되고 이후 류롄에 대한 우다왕의 헌신적 봉사와 태도가 이해된다.

 

“내심 깊은 곳에서 울리는 요란한 굉음과 함께 그의 눈앞에 섬광처럼 한 줄기 무지개가 스쳐 지나갔다.” (P.32)
“그는 단지 그녀를 한 번 힐끗 곁눈질로 쳐다봤을 뿐인데 눈앞에 무지개가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더니 눈알에 불이 붙기라도 한 것처럼 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P.34)

 

남성과 여성이 만나서 서로를 알고 사랑을 하게 된 후 섹스로 이어지는 과정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동시에 정상적이다. 또한 누구나가 이상적이라고 상찬해 마지않는다, 최소한 예술이라는 장르에서는.

 

두 주인공의 경우는 반대의 수순을 거친다. 섹스를 통해 사랑이 솟아난다. 사랑이 배제된 순전한 육체적 쾌락을 목적한 성교의 지속성의 결과로서. 물론 인정한다. 일회성 유희가 아닌 반복적, 계속적 유희는 양자 간의 거리를 좁히고 알몸 그대로의 교류는 허식과 위선의 탈을 벗기고 적나라한 본연의 모습을 비쳐준다는 점 말이다.

 

사랑이 항상 현실에 부합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남녀 관계에서 비극의 단초다. 우다왕과 류렌의 결혼 생활은 가장 중요한 요소, 즉 사랑이 결핍된 상태였다. 사랑을 막는 장벽은 사회 현실에 존재한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을 이루는 마오쩌뚱 시절의 중국 사회는 철저한 계급사회였다. 공산당원과 비당원, 도시와 농촌 거주민 사이에. 그들은 생존을 위해 또는 신분상승을 위해 수단과 처지를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작가는 우다왕과 아내 자오어즈, 우다왕과 류롄의 성(性)을 이렇게 비교한다.
“전자는 성이 실질적인 목적을 위한 육체적 포상이었던 반면, 후자는 아무런 목적없는, 그저 인간의 정신과 영혼의 반응에 대한 응답이었다. 전자는 본능을 드러낸 것에 지나지 않지만 후자는 영혼의 회귀이자 승화였다.” (P.197)

 

마오쩌둥의 금언 ‘爲人民服務’는 여기서 이중적 의미를 지니면서 작품 전개에 방향타 구실을 하게 된다. 당대 중국 사회의 지배적 가치관을 드러내면서 아울러 그것이 인간의 본연을 얼마나 저해하는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작가는 이 금언을 깨뜨리는 방편으로서 류롄과 우다왕의 정사를 택하면서 섹스 욕구를 전달하는 우스꽝스럽기 이를 데 없는 수단으로 전락한 팻말을 통해 금언, 나아가 시대적 지배적 가치관에 조롱을 퍼붓고 있다.

 

작품의 후반부에서 작가는 결말 처리에 고심한 듯 보인다. 두 사람의 금단적 사랑은 시한부에 불과하다. 사랑의 감정이 이끄는 대로 각자 이혼하고 밑바닥에서 새로이 출발할 것인가. 사랑과 현실을 분리하고 감정을 수습하여 각자 현실을 영위할 것인가.

 

우다왕은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모범사병이었다. 복무할 인민을 상실한 그에게 남아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후 십오 년의 삶은 무의미한 “망연한 공백상태”(P.246)일 뿐이다. 그는 마지막 용기를 낸다. 항상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던 팻말을 이제 처음으로 류롄에게 제시하고자 한다. 진정한 삶을 되찾고자 하는 마지막 발로. 결과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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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 - 신개정판 생각나무 ART 7
손철주 지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 외에 가볍게 읽을거리가 없나 하고 서가를 뒤적거리다가 오래전에 사놓은 이 책을 꺼내게 되었다. 본디 예술에는 문외한이지만 미술에 대해서는 완전한 까막눈이다. 그저 동서양의 세계적 명화를 보면 ‘좋은’ 그림인가 보다 짐작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좋은’ 그림의 객관적 기준은 없다고 생각한다. 극단적으로 따지자면 천만 사람이 명화라고 칭송하더라도 그것이 내 맘에 들지 않으면 ‘좋은’ 그림이 아닐 것이다.

 

모든 게 그렇듯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아는 만큼 가깝게 된다. 친숙해지면 단지 스쳐지나가는 무수한 이름 없는 현상에 불과하였던 존재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장점과 미덕을 홀연히 깨닫게 된다. 예전에 탈무드에서 읽었던 것으로 기억나는데, 유대인들의 언어에서 알다와 사랑하다는 같은 어휘라고 한다. 미술 감상에서도 이것은 참이다.

 

저자는 서문에 말한다.
“이 글들이 미술의 정체를 밝히고 있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오히려 변방에서 들리는 소식에 가깝지만 미술과 가깝게 지내려면 이 정도의 소식도 보탬이 될 날이 있을 것이다.” (P.9)

 

병법에서 강력한 적군을 상대할 경우 때로는 정공법보다도 우회전술이 효과를 거둘 수도 있다고 한다. 인간이란 일화, 에피소드 등 말랑말랑한 내용이 더 솔깃하고 기억에 오래 남는다.

 

서양미술, 특히 회화사에서는 사진의 발명이 시대적 구분의 기준이 된다. 자연과 사물을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고자 하는 미술은 존재 의의를 상실한다. 객관적 재생이 소멸하고 주관적 재현이 화두로 자리 잡게 되었다. 주관성의 극단은 추상표현으로 나아가지만, 사실을 배제한 주관은 사상누각이다. 예술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사실을 둘러싼 상상과 감정이다. 저자가 꿈을 버린 쿠르베를 반쪽 진실로 평가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현실과 꿈이 한 겹을 이룰 때 회화의 진실은 유통된다.” (P.58)

 

난 여전히 현대미술에 호감을 갖지 못한다. 앤디 워홀의 팝아트도,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도,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도 거리감을 느낀다. 백번 양보해서 미술사적으로는 특기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예술이란 항상 새로움에 목말라 있으니. 소비자로 하여금 신제품을 구입하도록 끊임없이 퍼부어대는 광고는 산업적 관점에서 필수적이다. 예술 산업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질문. 새로움이 곧 예술적 가치를 담보하는가? 그것이 ‘좋은’ 그림에 대한 보증서는 아닐 것이다. 나만의 감식안 계발이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단지 고루한 묵수(墨守)적 태도가 아니다. 여러 미술적 지식을 축적하고 많은 미술작품 감상을 통해 수준이 높은 작품과 아닌 것을 판별하고, 그 중에서도 자신의 취향에 부합하는 작품을 선별하는 안목, 그것이 평범한 미술애호가로서 갖출 수 있는 최상의 자질이 아니겠는가.

 

비단 전통적 명작과 대가의 작품만이 좋은 작품은 아닐 것이다. 그런 작품들은 대개 일반인이 구입하기에는 지나치게 고가이다. 모사품으로 대치할 수도 있으나, 존 러스킨의 <예술경제론>에 따르면 이는 미술계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몰지각한 행위다. 결국 우리네 뭇사람들은 무명화가나 대가의 저평가된 작품 중에서 ‘좋은’ 그림을 발굴해 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가까이는 감성과 정서를 풍부히 하는데 도움이 될뿐더러 혹시 아는가? 훗날 불세출의 대가로 추앙받아 의외의 재테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전에는 훌륭한 예술작품(음악, 미술 등을 포괄하여)은 깊은 정신적 함의를 담고 있어야 한다고 굳건히 믿었다. 내재된 예술가의 고뇌와 정신성의 깊이가 작품에 불멸의 의의를 더해준다고 생각하였다. 헨델, 텔레만, 비발디 보다는 바흐가 위대하고, 베토벤이 악성(樂聖)으로 추앙받는 것이 당연하였다. 연주자와 그 해석도 마찬가지였다.

 

동양화에서 사군자(四君子)는 단순한 그림의 소재 이상의 지위를 지닌다. 문인 화가들은 여기에 소위 정신성을 혼신을 다해 불어넣었다. 추사의 세한도를 비롯한 그림들을 보면 솔직히 아마추어적이다. 대강 붓으로 몇 번 쓱쓱 해버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빈 여백을 메꾸는 역할은 평론가들의 몫이다. 나는 그저 스산함과 처연함이 좋다. 몇 잎에 불과한 난초와 대나무 그림을 바라보노라면 절로 마음이 평온해진다. 여기에 이론과 기법의 분석이 개재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아름다움(美)의 의미와 효용은 무엇일까? 예술은 순수한 아름다움만을 추구해서는 안 되는가? 피카소는 “새소리가 아무 의미 없이 아름답듯이 미술의 아름다움도 마찬가지”(P.331)라고 반문하였다. 그림은 그저 좋으면 그뿐이다. 사랑이 그러하다. 생면부지의 사람을 좋아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다고 상대방의 외모와 학력과 가정형편 등을 일일이 재고 분석한 후 사랑의 념(念)을 품지도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의 전체가 모든 것이 단박에 가슴에 와 닿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최소한 그림에 대해서라도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하게 될 수 있도록! 그것이 이 책을 덮는 내 소박한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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