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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사랑 ㅣ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8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은 어엿한 중견작가로 자리 잡은 한강. 그가 이십대 중반의 시퍼런 나이에 쓴 이 작품들에서 예상치 못한 당혹감을 맞닥뜨렸다. 연령대와 표제를 통한 어림짐작의 상투성이 일거에 무너지면서 이것이 과연 그에게 합당한가 하는 의문마저 들 정도다. 이십대 중반의 조숙성일까 섣부른 조로 내지 애늙은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데뷔작 <붉은 닻>을 포함한 수록작 전체를 아우르는 분위기는 암울함이다. 그것은 상실에서 비롯한다. 가족과 고향의 상실. 공통적으로 반복되는 불행한 가족사는 고향으로부터의 불가피한 도피로 이어지기도 한다. 가족과 고향의 불행은 곧 존재의 뿌리를 박탈당했음을 의미한다. 가족은 사회의 기본 구성단위이자 개인의 안전과 생을 위한 최종 보루이다. 역으로 가족이 분열되고 해체될 때 개인은 존재 의의와 정체성의 혼란을 피할 수 없다. 이 작품들에 나오는 인물들이 모두 그러하다. 작게는 고뇌에서 크게는 죽음까지도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여수의 사랑>
나와 자흔은 비슷하면서도 상반된 캐릭터다. 나는 불행한 가족사로부터 도주하기 위하여 고향을 탈출하였으며 과거의 흔적으로부터 절연하고자 하는 욕망이 구토와 결벽증으로 발현된다. 자흔은 고향을 상실하였기에 오히려 부재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크다. 여수라는 지리적 공통분모는 이처럼 고향에 대한 중의성으로 구별된다.
<질주>
여기에서 불행한 가족사는 동생의 죽음이다. 인규의 달리기는 살아있음을 입증하는 몸부림이자 고뇌로부터의 도피다. 어머니의 질병으로 드러난 숨겨진 속내(죽은 자식에 대한 뼈아픈 슬픔)을 통해 인규와 어머니의 갈등 해소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 상대적으로 희망적이다.
<야간 열차>
쌍둥이 동생 동주의 사고를 겪으며 겨우 버티어내는 삶, 쌍둥이 동생마저 걸머져야 하는 삶을 살아가는 동걸에게는 나의 단순한 청춘의 방화마저 부럽기 그지없다. 그에게 있어 야간 열차는 삶의 무게와 질곡을 버티어내도록 해주는 최후의 지지대이며, 기차 바퀴 소리는 탈출을 희구하는 자아의 목소리일 것이다. 내게는 떠나는 일이나 머무르는 일이 다를 것이 없었던 반면, 동걸에게는 야간 열차를 타고 떠날 수 있다는 최후의 기대가 있었다는 점에서 나와 동걸의 차이점이 드러난다.
“동걸은 자신의 인생 전부를 오래 전부터 배신하고 있었던 것이다......떠나리라는 것 때문에 동걸은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세계에 속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강할 수 있었다. 단 한 번의 탈출로 자신의 인생을 완성시켜 줄 야간 열차가 있으므로 그는 어떤 완성된 인생도 선망할 필요가 없었다.” (P.107)
<저녁빛>
재헌과 재인 형제의 가족을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재헌의 출생의 비밀과 생모의 죽음. 이후 재헌은 철저히 혼자가 된다. 그에게 삶은 동력을 상실하였다. 어두워진 집안에서 재인 또한 혼자가 될 수밖에 없게 된다. 그의 삶 또한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되었으므로. 현재의 삶은 재인에게 존재 부정이라면 재헌에게는 자아 부정의 대상이다. 다만 재인은 극복과 변화의 여지가 있는 반면 재헌은 그러하지 못하였다. “살아 있다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무엇도 ...... 남아 있지 않”(P.163)은 재인은 살아남는다. 그리고 살아갈 것이다. 끼니때가 다가오면 허기져 있고, 밥벌이를 위해 애쓰는 자신의 모습에 혐오와 자괴감을 느끼더라도. 살아남은 자의 일상성,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진달래 능선>
정환은 어김없이 고향을 탈출한다. 그에게 고향은 아련한 정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새로 이사한 집의 “어딘가 황막하고 버림받을 것 같은 분위기가 정환에게는 차라리 친근한 것이었다.”(P.183)고 작가는 적고 있지만, 기실 작품의 분위기 및 작가의 정서 또한 그러하다. 정환에게 있어 진달래 능선이 상징하는 고향은 “오로지 어서 달아나야”(P.186) 하는 대상이다. 탈출의 절실성은 곧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의 절박함이다. 집주인이 정원의 나무를 하나하나 불태우고 마침내는 진달래마저 뽑아 불태워버리는 장면은 속죄 의식에 가깝다. 반면 정환에게 그것은 고향과의 되찾을 수 없는 영원한 단절을 의미할 것이다.
<어둠의 사육제>
홍콩 느와르를 연상시키는 짙은 허무주의적 대사와 생경하기조차 한 인물의 굳센 의지. 여성작가임에도 의외로 이 단편과 <여수의 사랑>에서만 여성 화자가 등장한다. 게다가 통상 기대하는 여성적인 느낌과는 그다지 가깝지 않음도 이색적이다. 세상이, 운명이 나에게 어둠의 도전장을 내밀었을 때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방기(放棄)적 굴복과 광분의 발작? 그가 택한 방식은 처연한 생존이다. 살기 위해 그는 인간미를 포기할 것을 작정한다.
“악하게 살아남아야 한다. 내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P.229)
“정을 준다는 것도 정을 받는다는 것도 모두 어리석은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P.236)
“나는 삶과 화해하는 법을 잊은 것이었다. 삶이 나에게 등을 돌리자마자 나 역시 미련 없이 뒤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P.251)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태도는 생존에 필수적이며, 남들로부터 칭찬의 대상이 된다. 다만 외로움에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부작용을 감내할 만큼 독한 성격을 지닌 인물만 가능하다. 그렇지 못하면 움츠러들고 제 칼날에 스스로를 해하게 된다. 명환의 경우처럼.
<붉은 닻>
동식과 동영 형제는 아버지에게서 비롯한 상처를 공유한다. 동식은 방탕과 간경변으로, 동영은 칩거 및 밤거리 배회로 대응 방식은 각자 다르다. 동식에게 동영은 죽은 아버지를 상기시키는 존재이다. 그는 동영이 거슬리고, 부담스럽다. 그가 사라지기를 바랐고, 동영이 변해서 낮의 세계로 돌아오기를 바랐다.
마지막 장면에서 형제가 서로에게 품었던 진심을 토로하기 시작하였다. 결과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어쨌든 희망의 조짐은 충분히 엿보인다.
작가는 무슨 연유로 한창 나이에 이처럼 삶의 질곡과 어두운 면을 다잡고 집요하게 응시하는가? 생을 거부하고 모멸하는 미래는 결국 죽음의 지향이다. 체험의 반영인가 아니면 순전한 상상의 소산인가, 후자라면 작가는 꼭지가 덜 익은 철없는 글쟁이에 불과하다. 그것도 아니라면 깊고 진지한 사색의 산물일지도.
이십년이 지나 작가에게 이 글들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서늘한 쓰라림을 안겨 줄 것인가 아니면 희미한 옛 생각의 자취만 아른거릴지도. 최근의 작품들에서도 여전한 작가의 주목과 지향점을 통해 어렴풋하나마 발전적 전망에 대한 희망을 가져본다.
수사적 표현에 대한 의식적 천착이 엿보인다. 당시로서는 아직 신인작가이므로, 괜찮다. 보다 아름답게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의 발현이므로. 이 또한 신진의 풋풋함으로 이해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작품해설의 두 대목을 인용한다. 작가 한강의 첫 작품집을 이해하는 주제를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한강의 주인공들이 진하게 가지고 있는 삶의 피로, 희망 없음의 원인이 그런 세태적인 결손 가족의 신산함에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바로 존재의 피로감, 희망 없음의 좌절감이라는 근원적인 정서적 상황의 드러냄인 듯하다......인간의 지울 수 없는 운명적 슬픔, 삶의 비애적 서정, 세계에 대한 비극적 전망을 그의 소설 속에 새겨넣는다.” (P.316)
“그녀의 슬픈 아름다움은 삶의 외로움과 고단함에서 온다......그녀는 세속적 희망을 버리는 대신, 삶의 근원성으로의 외로움과 고단함을 이끌어내고, 운명과 죽음에 대한 어두운 갈망과 그것들과의 때이른 친화감을 키워낸다.” (P.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