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올더스 헉슬리 지음, 송의석 옮김 / 청년정신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두 가지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우선 헉슬리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점이다. 40여년에 걸친 그의 창작 활동의 종지부를 찍는 소설이니 그것만으로도 관심을 끈다. 게다가 유명한 <멋진 신세계>와 대칭을 이루는 유토피아 계열 작품이라면 호기심은 증폭된다.

 

이러함에도 전작만큼 대중적 명망에서 현저한 약세에 처하는 것은 곧 이 작품의 성격과 한계에 연원한다. 헉슬리는 전작에서 역설적 표현을 통해 과학기술의 맹신과 진보가 가져오는 참담한 미래사회의 모습을 디스토피아적 관점에서 서술한다. 이는 소설의 형식을 빌어서 당대에 경각의 종을 크게 울린 것이었다.

 

이제 그는 유토피아를 그린다. 과학과 문명을 적합한 한도 내에서 최소한만 받아들이면서 인간의 육체와 내면의 수양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는 이상향. 자고로 이상향은 존재한 적이 없으며, 존재를 시도하더라도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만다. 현재적으로 영속할 수 없는 유토피아는 따라서 디스토피아다.

 

빽빽한 활자와 조판으로 450면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 헉슬리는 전작과는 달리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작가의 의욕은 소설에 문학적 요소를 위축시킨다. 전작은 비교적 생생한 인물 창조에 성공하였다. 마르크스와 레니나 및 헬름홀츠는 물론이고 야만인 존과 그의 모친, 소장에 이르기까지 비중의 경중을 막론하고 나름 자기 목소리를 개성껏 표현했다.

 

여기서는 그러하지 못하다. 기자이자 석유회사의 에이전트인 윌이 금지된 섬 팔라에 진입하여 문자 그대로 보고 듣고 경험한 팔라의 모든 것을 독자에게 설명하고 있다. 때로는 지리하고 현학적인 해설을 곁들여서. 작중 인물은 모두 전형적이다. 윌은 전달자에 불과하다. 한쪽에는 무르간과 모친 라니, 그리고 이웃 랜당의 독재자 디파 장군이 위치한다. 이들은 팔라에 풍부히 매장된 석유자원을 개발하고 과학기술과 현대문명을 도입하려고 한다. 즉 그들은 현재의 팔라를 뒤엎을 의도를 품고 있다. 반대편에는 닥터 로버트와 수쉴라로 대변되는 팔라의 가치를 지키려는 이들이 자리한다.

 

헉슬리는 박학과 다식을 겸비한 지적인 작가답게 다채로운 지식을 쏟아놓는다. 그의 지적 편력은 공간적 양의 동서를 포괄하며, 시대적으로는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횡적으로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넘나든다.

 

가상의 섬 팔라는 지리적으로 동남아시아에 비정된다. 종교적으로 힌두교와 불교, 무슬림 등이 언급되는 것을 봐서는 말레이나 인도네시아 어디가 해당될 듯싶다. 팔라의 미래는 예견된다. 자유와 행복으로 충만한 작은 섬은 전적으로 오만이자 다른 인류에 대한 고의적인 모욕이므로. (P.93)

 

헉슬리의 태도는 지극히 반서구적이다. 그의 방대한 논설의 요지는 기독교로 대변되는 서구 영혼의 토대에 내재된 허위를 비판하는 데 있다. 맹목적 과학과 기술의 숭배로 타락하는 현대인에 대한 냉소가 바닥에 깔려 있다. 한낱 물질문명의 우위가 무엇이란 말인가? 진정한 문명이라면 인간의 자유와 행복에 기여하고 이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릇된 본성을 바로잡고 영혼의 본원적 신비를 발견하고 순수성을 지켜나가야 하는 게 아니겠는가.

 

전작에서 많은 놀라움을 안겨주었던 그의 지나치게 앞선 주장들은 여전하다. 팔라에서는 가족 제도가 엄격하지 않다. 가정은 확대되고 선택될 수 있으며, 부모의 독점권은 인정받지 못한다. 남녀 간의 자유로운 성적 유희는 여전히 권장된다. 인공수정을 통한 출산으로 생물학적 우량 형질의 개선을 도모한다. 앞서의 환각제 소마는 여기서 모크샤라는 명칭을 지니고 다른 효과를 발휘한다. 정신적 쾌락을 얻으려는 용도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체험하고 여행하여 영혼의 순수한 본성을 깨닫고 발견하는 구도적 도구로 승격된 것이다. 신의 존재는 독자성을 상실한다. 신은 인간의 내재적인 존재로서 이해된다.

 

윌이 모크샤를 복용한 후 체험하는 영적 신비와 합일의 느낌은 마지막 장에 기술되어 있다. 흡사 법열, 열반, 종교적 황홀경 등의 경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각성과 해탈을 하게 되면 인간사와 세상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일련의 유토피아 문학에서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이다. 이상사회의 외양과 물질적 요건뿐만 아니라 자유와 행복의 달성이라는 사회적 요구를 반영하는 동시에 인간 스스로의 내면적 순수성 회복의 불가결성을 작가는 주장한다. 이상사회론으로서는 매우 흥미롭고 뜻 깊다. 반면 문학작품으로서는 아쉬움이 많다. 많은 작가들이 빠지는 함정이기도 한데, 이상사회를 소개하는 데 주력하다 보니 문학적 감동이라는 소설의, 예술의 기본적 미덕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헉슬리 또한 이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드릭 이야기 네버랜드 클래식 20
프랜시스 호즈슨 버넷 지음, C. E. 브록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세드릭 이야기라면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나처럼. 대신 소공자(小公子)’라고 하면 달라진다. 아련한 어릴 적 추억이 물밀 듯 다가온다. 정말 오랜만에 다시 읽은 소공자는 의외로 여전한 즐거움을 안겨준다. 소년시절의 생생한 감명을 되새기고자 읽은 책들이 오히려 생경함과 실망감을 주는 경우가 다반사다.

 

작품의 어떠한 점이 우리에게 호소하는 바가 있는지 생각해 본다. 아 그래, 무엇보다도 신데렐라 이야기다. 여기에 소위 출생의 비밀까지 맞물려 있다.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상투적이고 진부함에도 반복하여 끌어오는 제재, 그것은 분명 사람들의 심금을 건드리는 무언가가 있다.

 

게다가 주인공 세드릭의 천연스러운 순진무구함이라니. 그의 엄마 에롤 부인과 더불어 한켠에는 지극히 선한 사람들이 자리 잡고 반대편에는 도린코트 백작의 완고하고 나쁘다고 할 만한 유형이 상호 대조를 이룬다. 해피엔딩의 결말은 모든 독자를 흐뭇하게 하지 않겠는가.

 

이 작품은 이야기 성격에 충실하다.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반복적인 도덕적 훈계는 자칫 동화의 재미에 저해를 가져올 수 있다. 버넷의 뛰어남은 독자로 하여금 이야기의 전개에 몰입시키는 능력일 것이다. 특히 도린코트 백작이 세드릭과의 만남을 통해서 서서히 내면적 변화를 거치며 선한 인간형으로 변모하는 대목은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자아내며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면서 읽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세드릭의 미덕은 다음에 잘 정리되어 있다.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 곁에 살면서 항상 착한 생각만 하고 남을 배려하라고 배운 덕분이었다. 아주 작은 것일지 모르지만 결국은 이런 것이 가장 중요하고 훌륭한 법이다......세드릭은 꾸밈없고 순수하고 애정어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토록 사랑스러웠던 것이다.” (P.258)

 

이 작품은 다른 측면에서도 소소한 흥미를 제공한다. 미국과 영국이라는 다른 문화권의 비교와 대조다. 신분제도가 없는 미국과, 여전히 귀족과 왕이 존재하는 영국. 미국 독자들에게는 낯선 문화가 이채롭게 다가왔을 것이다. 여기에 부유한 백작으로 대변되는 소위 상류층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점도 무시하지 못한다.

 

동화는 동화로서 수용되어야 한다. 동화는 시대적 속성과 작가의 개성에 종속되며 결코 한계를 초월하지 못한다. 비단 동화뿐만 아니라 어떠한 예술 및 문학 작품도 그러하지 못하다. 동화에 섣부른 비판의 화살을 겨누기보다 한 세기 이상 고전으로서 자리 잡은 그 가치에 주목하는 게 바람직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삼성판 세계문학전집 41

 

원제는 Point Counter Point . 라틴어에서 유래된 말로 음표 대 음표라는 의미를 지닌다. 음악용어인 대위법(counterpoint)의 어원이기도 하다. 대위법은 단선율의 화성적 전개가 아니라 독립적 다성부의 병행과 결합의 전개를 특징으로 한다. 다성부의 독자성을 인정하되 그것이 개별로 이산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 조화를 지향한다.

 

헉슬리는 음악기법을 문학작품에 직접적으로 도입하려고 시도하였다. 단일의 주인공에 의한 단일의 사건 전개를 가진 작품이 아니다. 거의 대등한 비중을 갖는 복수의 인물들이 각자 자신들의 삶과 사고를 드러내며 병행하거나 교차하며 나아간다. 그런 면에서 보편적인 표제의 번역어인 연애 대위법은 전적으로 잘못되었다. 청춘남녀들의 연애와 사랑을 그린 소설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기 딱 좋은, 작품 성격과 방향과는 천양지차다. 물론 사랑이 중요한 화두이기는 하지만 중심 주제는 아니다. 따라서 굳이 번역하자면 삶의 대위법내지 인생 대위법이 적합하달까?

 

작품의 배경은 1920년대다. 미증유의 제1차 세계대전은 종전 후에도 여전히 유럽 각국의 사회와 정신에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전쟁 후 확고한 평화가 정착된 것도 아닌데다가 사회의 혼란과 모순에 대한 다양한 사고와 해석들이 소용돌이처럼 휘감아 돌고 있었다. 소설의 등장인물들도 마찬가지로 혼란에 빠져 있다. 지난 세기에 바탕을 둔 전통적 세계관과 가치관에 안정적 근원을 두고 싶지만 이는 무너지고 말았다. 새로운 세기의 정체는 아직 명확한 실체를 알 수 없다. 정치면에서는 급진적 전체주의가 신흥세력으로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사회면에서는 자본주의가 대중 속에 깊이 뿌리내리기 시작하여 빈부 격차라는 회피할 수 없는 모순이 더욱 심화되었다. 한편 과학기술의 발전은 더 이상 일부 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구조적 요인의 성격이 강화되고 있었다.

 

그들은 갈 곳을 모른다. 그들은 방황한다. 필립 쿼얼즈는 정신과 이성의 영역에서 허우적거린다. 그것이 그의 아내를 절망케 하고 반대되는 인간형인 에버라아드 웨블리에게 다가서게 만든다. 월터 비들레이크는 유부녀 마아저리를 꾀어내지만 여성적 매력이 빈약한 그녀에게 곧 멀어지고 섹시하고 육감적인 루우시 탠터마운트에게 이끌린다. 차라리 루우시는 현대적 가치관을 지닌 인물로 볼 수 있다. 그녀는 남성을 지배하길 원하며 남성에게 매달리기를 싫어한다. 사랑과 무관한 육체관계 및 찰나의 쾌락에 몰두하는 정경은 현대인들의 초상과도 흡사하다.

 

한편 그들의 부모인 존 비들레이크와 제네트 비들레이크, 시드니 쿼얼즈와 레이첼 쿼얼즈, 에드워드 탠터마운트와 힐다 탠터마운트도 모두 실패한 결혼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그들이 법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그나마 그것이 사회적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고, 명예와 경제적 관점에서 안전하기 때문이다.

 

위선자 데니스 버얼랩과 비어트리스 길레이, 에델 코베트의 관계 또한 독자적 영역을 차지한다. 고상하고 독실한 체하는 버얼랩이 성적으로 미숙한 비어트리스를 서서히 무너뜨리는 대목이 이 작품의 대미를 장식하는 게 매우 흥미롭다. 어떤 암시라고 할까?

 

일리지와 스팬드럴, 웨블리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별동대다. 일리지는 한미한 계급 출신으로 부르주아 계급에 적대감을 지니고 있다. 그의 적대감은 하지만 열등감의 표출이다. 그 또한 기회만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계급 상승을 꾀할 것이다. 스팬드럴은 작품 내에서 철저한 반()인간형이며, 철저한 음지의 인물이다. 그의 사고는 물론 웃음조차도 반사회적이다. 그가 웨블리를 살해한 것에 대한 명확한 동기는 설명되지 않는다. 일리지라면 모를까. 그가 마지막에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며 램피언과 벌이는 인간성에 대한 논쟁은 극적인 동시에 눈물겨울 따름이다.

 

작품 내 등장인물은 이처럼 대부분 하자를 지니고 있으며, 작가로부터 부정적 평가를 받는 인간형들이다. 예외가 있다면 마아크 램피언과 그의 아내 메어리 램피언이다. 헉슬리는 마아크와 메어리가 신분을 달리한 상황에서 만남을 갖게 된 사연을 친절하게 들려준다. 램피언은 뛰어난 소설가이자 화가이다. 그는 순수한 인간성과 자연을 찬미한다. 이성과 영혼에 함몰되지 않고 순수하게 자연 그대로의 몸과 감정을 긍정하는. 그에 따르면 사람들이 자연과 순수를 감추고 외면하면서 세상과 사회가 타락하게 되었다고 한다. 소설 속에서 그는 홀로 존재한다. 그와 필립, 그와 스팬드럴 등과의 논쟁을 통해서 그는 반기계적, 반과학적, 반이성적, 반종교적 가치관을 분명히 한다.

 

헉슬리는 이처럼 다양한 유형과 계층과 사고를 지닌 인물들이 당대 영국 사회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영위하는 삶의 과정을 글자그대로 대위법적으로 노정하면서 진지하게 묻고 있다. 진정한 삶이란 무엇이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요인은 어떠한가를. 단지 사랑만이 아니다, 에로스적이거나 플라토닉 하거나를 떠나서. 그것이 이 작품을 연애 대위법이라고 한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엘리너 쿼얼즈가 남편 필립에게 바라는 것은 단지 뜨거운 육체적 사랑이 아니다. 이성의 세계에 빠져서 감성의 존재를 상실한 남편에게 실망한 것이다. 그것은 따뜻한 포옹과 몇 마디의 말로써도 충분할 터인데.

 

헉슬리는 과학자 집안 출신답게 과학적 지식으로 무장하고 있음은 곳곳에서 쓰이는 생경한 과학 용어로써 잘 알 수 있다. 그의 독특함은 과학의 한계와 위험성에도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중 작품인 <멋진 신세계>에서 확대되는 주제의식이 여기서도 이미 싹을 드러내고 있다.

 

인상적인 장면은 마지막 37장에서 램피언과 스팬드럴이 함께 감상하는 베토벤의 현악4중주 제15번곡에 대한 이해와 분석이다. <어떤 회복기의 환자가 신에게 바치는 애조곡에 의한 거룩한 감사의 노래>에 대해 스팬드럴은 신의 존재와 예수의 도덕의 우월함을 입증해주는 증거로 받아들이지만, 램피언은 오히려 천국이고 영혼의 생활이기에 현실에 추출한 가장 완벽한 정신적 추상으로 거부한다. 추상적 영혼이 아닌 일개 인간을 그는 옹호한다. 이어서 후반부 곡조의 기적적 선율에 대해 지나치게 훌륭하여 도리어 비인간적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떠한 삶을 영위해야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램피언의 화두이자 작가 헉슬리가 제기하는 질문의 요체다. 이것은 우리네들 모두가 여전히 풀지 못한 문제이기도 하다.

 

* 1984년에 번역 초판이 발행되어 19871228일에 21판이 발행되었으니 당시로서는 꽤나 인기가 좋았던 작품이다. 이제는 신간 번역이 없어서 30년이 지난 헌책만 중고서점에서 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새로운 감각과 충실한 연구 성과를 담은 새 번역본이 나오길 기대한다. 한편 빽빽한 조판으로 500면에 가까운 분량이니 요즘 같은 작고 얄팍한 판형이라면 거뜬히 두 권으로 분책이 가능할 것이다.

 

* 최근에 연애대위법 번역본이 동서문화사에서 출간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기쁜 일이다. (2013.5.1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난을 이기는 위안의 대화
성 토마스 모어 지음, 성찬성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솔직히 이 책을 읽는데 많이 망설였다. 토머스 모어의 몇 안 되는 저작을 접하고 싶은 욕망과 한편으로 비기독교도 입장에서 굳이 종교서적을 볼 필요가 있을까 하는 회의 사이에서.

 

고난(tribulation)은 종교의 유무와 상이와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 고난에 마주쳤을 때 현명하게 대처하는 정신적 자세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이것이 긍정적으로 마음을 돌린 중요한 사유이다.

 

이 책은 토머스 모어가 감옥에 갇혀있던 최후의 시기에 씌어졌다. 모어는 참수형에 처해지고 이 작품은 그의 사후에 유작으로 출간되는 운명을 맞이한다. 수감된 모어가 온갖 회유와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목전에 다가오는 죽음을 바라볼 때의 심경이 여기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그의 영혼의 자서전이다.

 

작중의 헝가리는 당대의 영국이며, 오스만 투르크의 임박한 공격과 이로 인한 기독교 신앙의 위기는 헨리 8세의 수장령 선언으로 국교회를 설립한 영국의 정치 상황과 이로 인한 가톨릭교도의 신앙 위기와 중첩됨을 조금이나마 모어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알아차릴 수 있다.

 

외부의 적대적 위협에 감연히 맞서 투옥 내지 죽음을 감내할 것인가 아니면 신앙을 버리거나 잠시 숨겨서 이생의 삶을 구걸할 것인가는 그래서 작중의 안토니오 뿐만 아니라 모어 자신에게도 절실한 질문에 해당한다.

 

사실 당대 영국의 무수한 종교인들과 귀족들 및 지성인들은 수장령을 받아들이는 입장을 취했다. 고위직 가운데 가톨릭을 포기하지 않아 처형을 당한 이가 모어와 피셔 대주교 등을 포함한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은 역으로 말하면 모어가 가톨릭을 포기하였다고 해서 비난받을 처지가 아니었음을 가리킨다. 그럼에도 모어는 자신의 (참다운) 신앙을 택하였다.

 

믿음을 택하는 것은 외적인 많은 상실을 가져온다. 육체적으로는 감금과 투옥, 고문 내지 죽음을 감수해야 하며, 물질적으로는 사회적 지위와 재산 등 외적 자산의 상실이 뒤따른다. 모어는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믿음을 저버려서는 안 되며, 외적 상실을 능가하는 더 큰 내적 위안을 설파한다.

 

위안의 최고 단계는 바로 독실한 신앙이다.

 

이 단계는 위안의 최고 목표를 하느님께 두고, 자신의 고난을 인내로이 감수함으로써 그 분의 총애를 얻고, 자신이 겪은 고통의 대가로 천국에서 그분이 내리시는 보상을 받는 것을 위안의 최고 대의로 여기고 수용하는 단계인 것이다.”(P.42)

 

우리의 첫 번째 결론은 영적 위안은 어떤 것이든 간에 반드시 신앙의 토대를 전제로 하고 있고, 신앙은 하느님 아닌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불어넣을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하느님께 이를 끊임없이 간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P.47)

 

모어는 신앙인이지만 법관으로서 오래 봉직하였다. 그의 글에는 방법론적으로 상황과 문제의 원인을 세밀하게 정리하고 분석하는 성향이 엿보인다. 애매하고 모호한 여지를 남기지 않고 차근차근하면서 철저하게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여기에서도 그는 고난을 원인에 따라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한다. 우리의 명백한 잘못에 따른 고난과, 죄를 알지 못하거나 예방하는 차원에서 주어지는 것, 그리고 순전히 공로를 키워주기 위한 고난.

 

이슬람과 기독교의 종교적 갈등과 영국 국교회와 가톨릭 간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종교의 토대 자체가 상이하지만 후자는 거의 동일하며 다만 로마 교황의 종주권의 인정 여부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로마 교황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느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성서에 대한 믿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비롯된 현대의 무수한 개신교도 결국은 범 기독교에 속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연한 의문이다.

 

모어의 입장은 단호하다. 예수의 가르침은 사도에게 정통이 있으며, 사도의 후계자가 바로 로마 교황이다. 종교상의 위기는 가톨릭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교황 개인과 성직자들이 타락에 기인한 것으로 공의를 받아들여 개혁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이를 빌미로 교황권을 부정하는 세력들을 매우 불순한 것으로 신앙을 위협하는 존재로 파악한다.

 

고난의 감수는 현세의 고통과 상실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이를 능가하는 위안은 결국 종교적인 것, 즉 내세에서의 평온과 행복에 대한 기대감에 있다. 천국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희망이 현세의 고난에 따르는 고통을 상쇄시킬 수 있다.

 

이 말을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들은 위안을 지금 당장 육신을 즐겁게 하고 만족시켜주는 현재의 쾌락으로 이해하지 않고 아름다운 희망, 사람들이 마음속에 품는 희망에서 비롯되는 평안함,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어떤 좋은 일 때문에 생기는 평안함으로 이해한다.” (P.140)

 

모어는 고난을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흔연히 껴안는 고난과 흔연히 감내하는 고난, 그리고 도저히 모면할 수 없는 고난이 그것이다.(P.173) 그 중에서 두 번째가 분석의 핵심이다. 모어는 유혹과 박해의 관점에서 검토한다.

 

먼저 시편 91절을 인용하여 유혹을 네 가지 종류로 세분한다.

그분의 진실은 큰 방패와 갑옷이라네. 너는 무서워하지 않으리라. 밤의 공포도 낮에 날아드는 화살도, 어둠 속에 돌아다니는 흑사병도 한낮에 창궐하는 괴질도.” (P.205)

 

그는 네 가지 유혹을 성경 구절과 연관 지어 상세히 설명한다. 즉 밤의 공포는 소심증에서 비롯한 불안과 자살 유혹으로, 낮에 날아드는 화살은 교만으로, 어둠 속에 돌아다니는 흑사병은 현세적 용무 내지 볼일에 대한 집착으로, 한낮에 창궐하는 괴질은 명백하고 노골적인 박해로 말이다.

 

3부는 박해에 대한 상술이다. 박해의 대상이 되는 외적 자산, 즉 땅, , 명성, 아첨, 지위 및 재화 등 현세의 물질과 구금과 죽음 등 육신에 미치는 고통에 대처하는 올바른 마음의 자세를 강조한다. 요컨대 굳건한 신앙의 힘으로 버티고 감내하며 순교마저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현세의 삶은 찰나에 불과하지만 사후의 삶은 영구하므로 지옥의 고통과 천국의 기쁨을 생각해 볼 때 찰나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이 장면에서 모어의 최후가 오버랩 되어 지나간다. 런던탑에 갇힌 모어, 헨리 8세의 돈독한 신임을 얻어 대법관의 지위에 올랐던 그는 왕의 기대와는 달리 수장령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타인의 눈으로는 감금된 처지지만 그는 오히려 위안으로 받아들였다. 그에게 있어 외적인 고난은 추호도 그의 믿음에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그가 사형대에 오르면서 보인 담담하고 의연한 태도, 그것은 이미 천국의 빛나는 희망을 눈으로, 가슴으로 보았던데 연유하였을 것으로 믿는다.

 

읽기 어려운 책은 아니지만 책장을 넘기기에 쉬운 책도 아니다. 기독교인이 아니어서 모어의 서술이 뜻하는 깊은 의미를 정확히는 이해하지 못한다. 때로는 너무 과하게 의미를 부여하고 확대 해석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였다. (특히 시편 구절을 가지고 유혹과 박해를 풀이하는 대목) 그럼에도 모어의 굳건한 확신에는 절로 마음이 숙연해진다. 더욱이 서술이 매우 평이하여 종교서에 흔히 보이는 난삽하고 현학적이고 수사적인 대목이 일체 없다. 유머가 흘러넘치며 흥미진진하지는 않지만 이해에 어려움을 주는 장애요소도 없는 역시 모어식 글쓰기의 전형이라고 하겠다.

 

이 작품은 기독교인에게는 성경을 보완하는 좋은 신앙서의 구실을 할 것이다. 모어와 같이 바른 삶을 살다간 인문주의자 신앙인이 특히 고난을 극복하는 마음의 자세에 대해 이와 같이 500쪽이 넘는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는 자체가 하나의 축복이다. 이 작품을 쓰면서 모어 자신도 분명 크나큰 위안을 얻었을 것임은 당연하다.

 

기독교라는 틀과 시야를 벗어나 인간 고유의 내면성과 양심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도 커다란 의의가 있다. 모어는 자신의 신앙관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믿고 생각하지만 타인은 다를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나의 믿음을 내면의 양심에 위배되도록 강제로 요구하는 것은 잘못이다. 양심의 자유는 현세의 누구도 속박해서는 안 된다. 모어는 압제자에게, 세상에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디스토피아적 미래 소설의 대표적 작품이다. 그 철저한 비관주의와 냉소적 분위기는 확실히 전대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작품을 낳은 시대적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과 종전 후의 혼란한 사회적 영향이 일차적 요소에 해당한다. 여기에 만개한 산업자본주의가 가져온 기계적, 획일적 가치관에 대한 비판이 추가된다. 여기까지는 동시대의 예민한 예술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헉슬리는 과학적 낙관주의가 가져온 파멸적 현상에 대한 위기의식과 비판적 경향을 덧붙인다. 작가의 집안 내력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과학, 특히 생물학에 대한 지적 토대 위에 이 작품이 구성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작가의 시니컬함은 사람들이 신()을 언급할 때 쓰는 호칭에서 드러난다. 더 이상 god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포드(Ford)를 외친다. 포드 자동차 회사의 설립자이며, 소위 포드 시스템의 창시자인 그를. 프로이트(Freud)도 그에 못지않게(심리학적인 일을 언급할 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게다가 이상 사회의 열등자의 이름이 마르크스다!

 

풍자 문학의 특징은 현상을 극단적으로 비틀고 확대하여 미처 인지하지 못했거나 범상하게 넘겨버렸을 현상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표출하는 데 있다. 헉슬리가 창조한 미래는 고도의 생물학적 계급사회이다. 각 개인은 수정 단계에서부터 시작하여 출생과 양육 단계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계획되어 용도에 맞게 성장된다. 계급 수준에 맞는 지적 능력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감정적, 심리적 측면에 관한 한 극도의 유아기적 단순성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마라는 약물의 복용이 장려되며, 유아 때부터 성적 유희가 권장되고 성인이 되어서도 남녀 간의 개체적 독자성은 인정되지 않는다.

 

이러한 작중 인물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차갑고 냉소적이다. 자신이 만들어낸 인물들에 이토록 냉정한 작가도 드물 것이다. 전반부의 주인공 격인 버나드 마르크스와 레니나 및 헬름홀츠 등도 온도차는 있지만 마찬가지다. 이들은 그래프 상의 다른 궤적을 보이는 인물의 전형이다. 레니나는 전형적인 미래 사회의 인물, 그녀는 체제에 완벽하게 순응하며 어떠한 의구심도 갖지 않는다. 내부적 시각의 입장에서는 그녀를 이토록 한심한 속물로 처리하는 게 부당할 것이다. 버나드와 헬름홀츠는 반대적 유형이다. 헬름홀츠는 과도하게 우월한 신체적, 정신적 능력으로 체제의 정상범위에서 일탈하였다. 버나드는 열등함으로 인해 체제에서 자신을 분리시키게 되었다. 그의 속물 됨은 야만인을 데려온 이후 두드러진다.

 

야만인 존은 유일하게 긍정적인 인간상이다. 그는 이상 사회에 순응하기를 거부한다. 그가 보기에 이상 사회는 인간다움을 상실한 곳이다. 인간다움은 개체의 독자성을 인정하며, 행복의 갈망에 못지않게 불행을 감내하겠다는 의지의 발현이다.

 

하지만 저는 안락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을 원합니다. 시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을 원합니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자네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고 있군 그래.”

그렇게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야만인은 반항적으로 말했다.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 (P.305)

 

야만인은 이상 사회를 벗어나 독자적 삶을 추구한다. 여기에서 작가는 다시금 무자비한 면모를 보인다. 유일한 긍정적 인간을 가차 없이 목매달게 만든다. 미래 사회에 대한 작가의 비관적 인식의 반영이다.

 

표제 <멋진 신세계>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에 의거하였다고 한다. 물론 역설적 표현이다. 감탄형이 아닌 의문형으로서.

 

헉슬리의 염세적 세계관은 지적인 분석과 풍자적 어조의 도움을 받아 현재도 여전히 매력을 지닌다. 너무 흔하여 식상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일거에 날려 버릴 정도로 충격적이면서도 강력한 경고를 우리에게 날린다.

 

인류의 행복이라는 미명하에서 유전자 조작과 심리적 세뇌는 언제든 표면화될 수 있다. 사회적 안정의 요구는 미디어와 정보 통제 및 조작을 합리화하는 구실을 낳을 수 있다.

 

멋진 신세계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