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과 하루 - 토머스 모어 서한집, 토머스 모어 경의 생애
토머스 모어.윌리엄 로퍼 지음, 이미애 옮김 / 정원출판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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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의 저자 토머스 모어의 삶과 사상에 대해 속속들이 알 수 있는 좋은 책이다. 기실 우리가 토머스 모어에 대하여 알고 있는 사실은 매우 미약하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로서 영국왕 헨리 8세의 이혼에 반대하다가 참수형을 당한 인물, 이 정도쯤. 이 책은 우리의 시야와 안목이 얼마나 협소한지 새삼 절감하게 만든다.

 

500쪽에 가까운 이 책은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전반부는 토머스 모어의 서한집이다. 모어가 가족과 지인들에게 보내고 받은 서한들이 빼곡하게 실려 있다. 모어의 현전하는 127편의 편지 중에서 선별된 66편과 가족의 편지 6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분량 상으로도 400쪽에 가까워 이 책의 핵심을 이룬다. 후반부는 그의 사위 윌리엄 로퍼-토머스 모어가 지극히 아끼던 맏딸의 남편-가 쓴 모어의 짤막한 전기다. 행장(行狀)이라고 하는 편이 더 가까우리라. 굳이 순서를 정하자면 후반부의 전기를 읽은 후 서한들을 읽는 편이 이해에 보다 도움이 될 것이다.

 

모어의 삶은 외관상 굴곡과 부침이 두드러지지 않고 대체적으로 평온하였다. 일평생 법관으로 봉직하다가 최고 지위인 대법관에까지 오를 정도로 국왕의 신임을 얻은 그였다. 그런 그의 말년을 어지럽게 휩쓴 사건은 헨리 8세의 이혼 건이었다. 단순한 국왕의 개인사가 아니라 유럽의 정치 및 종교계와 밀접하게 연관된 사건으로 결국 영국 성공회가 출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혼 문제의 개입을 극구 피하려 했던 모어는 로마 교황이 아니라 영국 국왕이 영국 내 교회의 수장임을 선포한 수장령(首長令)에 선서하기를 거부한다. 그는 종교 지도자가 아니었고 은퇴하였으므로 현직 고위관료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국왕은 그의 선서를 강력하게 요구하였으니 모어의 당대적 비중이 매우 지대하였음을 추론할 수 있다. 온갖 회유와 강압에도 그는 결국 죽음을 달게 선택하였는데, 그에게 이것은 정치와 종교적 관점을 떠나서 양심에 관한 중차대한 사안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유토피아>는 분명 흥미로운 저작이지만, 성격상 저자의 주관적이며 내밀한 감정과 사상이 온전히 드러나 있지 않다. 특정한 상대 또는 다중을 염두에 쓴 이 편지들은 그런 면에서 토머스 모어라는 세기적 인물의 생생한 면모를 자신의 육성과 필치로 직접 들어볼 수 있는 귀중한 계기가 될 것이다.

 

모어는 소탈한 성품으로 젠체하지 않는다. 가족과 지인에게 보내는 문구에는 유머와 따스한 애정이 깊이 배어있다. 용돈을 달라는 맏딸에게 더 많이 주고 싶지만 계속적으로 달콤한 요청을 받기 위해서 요구액만 주겠다고 답장한다. 에라스무스에겐 자신의 저술을 빗대어 인용하며 자신이 유토피아 왕국의 왕으로 지목되었다며 유쾌한 농담을 나열한다.

 

그와 에라스무스 사이의 우정은 각별하였다. 친우에 대한 세인들의 터무니없는 비판과 비방은 그는 좌시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옹호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마르턴 도르프에게 보내는 편지[15]와 수사에게 보내는 편지[83]. 일반적인 편지와는 달리 이 둘은 상당한 분량으로 쓰였는데 전자는 70여 쪽, 후자는 40쪽에 달할 정도로 장문이다. 분량과 내용으로 보건대 공개서한 형식의 논문이라고 하겠다. 에라스무스 비판자들의 요지는 <우신예찬>에서 그의 신학자 비판이 그릇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그가 희랍어 원전에서 직역한 라틴어 성경을 두고 희랍어 텍스트의 신뢰성이 의심된다는 점이다. 세밀하고 정확한 논리로 상대방 주장의 오류를 지적하고 에라스무스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점에서 과연 법률가이자 신학자 못지않은 종교인인 모어의 능력을 엿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극한까지 다그치지 않고 상대방이 운신한 수 있는 여지를 남기며 슬쩍 추켜올리는 것은 과연 그다움을 느끼게 된다.

 

모어의 여성관 및 교육관은 당대로서는 매우 선진적이었다. 그는 남과 여, 지위 고하의 구분 없이 동등한 교육을 몸소 실행하였다. 그는 자신의 집을 학교라고 불렀는데, 하녀조차도 교육의 기회를 부여하였을 정도다. 또한 여성을 무조건 폄하하지 않았다. 윌리엄 고넬에게 보내는 편지[63]에서 남녀 모두 인간으로서 이성을 지닌 존재이며, 학식을 통해서 이성이 계발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6세기 초 절대왕권의 시대임을 염두에 두면 혁신적임을 알 수 있다.

 

모어 사상의 토대는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앙이다. 그의 이성과 양심 역시 건전한 믿음에 기반한다. 종교에의 경도(傾倒) 정도가 그와 에라스무스의 차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사도들에게 이어졌고 그 후대가 바로 로마 교황이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이해관계가 상이하여 대립될 수 있지만, 종교적으로는 그에 순응해야 한다. 그것은 교황 개인에 복종이 아니다. 공의회를 거쳐 공인된 교리와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루터 등 소위 종교개혁론자들을 거부한다. 그리스도 교단 내부적으로 존재하는 부패와 타락 등은 교회의 틀 내에서 바로잡으면 되지 그것을 빌미로 교황과 공의회의 적통성을 부인할 수 없다고 본다. 그가 츠빙글리의 죽음에 기쁨을 표시([189] 요하네스 코클라이우스에게 보내는 편지)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시각에서 분리론자들은 교회의 적인 것이다.

 

그의 입장은 헨리 8세의 이혼과 수장령 선포에도 여일하다. 국왕의 총신으로서 응당 수장령을 지지하고 선서해야 하였음에도 그는 이를 거부한다. 영국 의회의 법으로서 세계 보편의 법칙을 규제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며, 교황의 지상권은 불변의 권리임을 주장한다.

 

모든 그리스도교 국가가 하나의 몸을 이루는데, 그것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 어떻게 그 몸 전체의 공동의 동의 없이 그 공동의 머리에서 이탈할 수 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199] 토머스 크롬웰에게 보내는 편지)

 

이러한 사상의 내면적 발로가 그의 양심론이다. 신앙에 관한 문제는 개인의 양심에 속하는 사안으로 강압할 수 없다고 한다. 이 양심은 단편적이고 즉흥적인 성격이 아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내 양심은 갑자기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해서 오랫동안 시간을 들여서 끈기 있게 탐구하면서 형성된 것이라고 말이지.”([200] 마거릿 로퍼에게 보내는 편지)

 

그것에 대해, 내 양심은 아주 오랫동안 부지런히 노력을 바쳐서 형성된 것이므로 나 자신의 구원과 일치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고 대답했단다.”([216] 마거릿 로퍼에게 보내는 편지)

 

그가 런던탑에 투옥되고 처형되기까지 일년 여 동안 그가 주고받은 편지의 기본적 화두는 바로 양심이다. 국가가, 군주가 지배할 수 있는 개인의 영역의 한계, 그것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며 이를 밝히기 거부한다는 이유로 처벌하는 행위의 부당성. 진실로 근대 이전에 이처럼 처절하고 철두철미하게 개인의 양심을 옹호하고 부당한 간섭을 배제하기 위하여 몸 바친 인물이 있었던가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유토피아>의 저자인 르네상스 인문주의자 토머스 모어는 빙산의 일각이다. 그의 삶의 중요한 행로였던 법률가와 진실한 종교인의 관점도 그의 전모 파악에는 부족하다. 차라리 그는 인간의 고유한 가치를 인식하고 옹호한 최초의 근대적 인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의 실체는 의외로 거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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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나라 - 불멸의 고전, 캄파넬라가 꿈꾸었던 유토피아
토마소 캄파넬라 지음, 임명방 옮김 / 이가서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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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상 사회 또는 이상 국가는 모든 인류의 오랜 염원이다. 양의 동과 서를 막론하고 철학과 사상의 근본이념은 완전한 사회의 요건과 구현 방식에 달려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러하고 공자와 맹자, 노자 등이 역시 그러하다. 이처럼 이상 국가는 현실 정치의 지도 이념인 동시에 현실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타파하는 역할도 수행하였으니 아이러니하다. 무릉도원의 도연명과 유토피아의 토마스 모어가 살다간 시대는 평화와 번영의 시기는 결코 아니었다.

 

16세기말과 17세기 전반의 이탈리아 사회는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유럽 각국의 각축장으로 전락되어 있었다. 종교적으로는 종교개혁의 반작용으로 수구적 가톨릭이 위세를 떨치던 무렵이기도 하였다. 정치적, 종교적, 그리고 경제적 후진성으로 대중들의 삶은 피폐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외세 지배에 대한 반감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었다. 이 격동의 시기를 온몸으로 살다 간 이가 바로 캄파넬라다.

 

캄파넬라에게서 모어의 직접적 영향의 흔적이 발견됨은 일견 당연하다. 근세 서양에서 모어는 근대적 이상국가론의 선구자이다. 종교적 관용, 엄정한 법에 의한 규율, 사유재산제의 부정, 무위도식자에 대한 혐오, 침략전쟁의 금지 등 그들의 이상 국가는 많은 유사점을 공유한다. 캄파넬라는 플라톤의 영향과 점성술의 비교(秘敎)를 더하여 독자적 면모를 드러낸다.

 

태양의 나라에서 군주를 대신한 최고 지도자는 태양으로 불리는데, 형이상학자 즉, 철학자로서 정신적·정치적 지도자이다. 플라톤의 철인(哲人) 정치론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자본주의의 확대로 빈부격차가 심해지는 현상의 대안으로 사유제를 아래와 같이 부정한다.

모든 소유관념은 인간이 자기 집을 소유하고, 자기 처와 자식을 가지는데서 발생하는 것으로, 바로 여기에 이기주의의 원천이 있다고 해석합니다......인간이 일단 이기주의를 버리게 되면 공공생활에 대한 사랑만 남게 된다는 겁니다.”(P.34)

 

공유제는 모든 사람을 부자인 동시에 빈자로 만들고 있는데, 빈자란 그들이 물품의 노예가 아니고 물품이 그들에게 봉사하고 있다는 뜻에서입니다.”(P.53)

 

이상 국가론은 사유제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인하여 대체로 공상적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로 평가되기도 한다. 위에서 사람이 물품의 노예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한 대목은 마르크스의 물신숭배를 연상시킨다.

 

캄파넬라는 노동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무위도식하는 귀족층에 대한 혹독한 비판을 아끼지 않기도 한다.

일반직공인을 상놈이라 천대하고 자기는 아무것도 배우지도 않고 빈들거리며, 많은 하인을 무익한 데만 부려먹음으로써 국가적 손실을 갖다 주는 소위 우리들 사회의 귀족이라 불리는 족속들은 그들에게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P.37~38)

 

캄파넬라는 공유제를 극한까지 추구하여 부인 공유제도 주장한다. 오늘날의 인간적 정서에 역행하는 의견이지만 특이한 담론으로서 흥미로운 면도 있다.

 

또 하나의 특이성은 점성학적 배경에도 존재한다. 그는 역사의 흐름이 별자리와 행성의 운행에 커다란 영향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소위 별들의 대회합이 세계사적 변화를 일으킬 것이라는 예언은 기실 오늘날에도 가끔씩 대중들의 혼란을 야기하는 데 일조하는 주장이기도 하다. 캄파넬라는 서기 1600년이 바로 그때라고 판단하여 무력 독립운동을 전개하려다 수십 년간 감옥에 갇히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그가 점성술을 절대시하는 것은 아니다. 확고한 이성과 의지를 갖춘 사람에겐 별의 영향은 소용없다고 단언한다.

 

, 그들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대단히 중요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십시오. 그들은, 예를 들어 40시간의 문책을 받는 일이 있더라도 자기들이 침묵을 지키고자 할 때는 입을 열지 않고, 그런 경우 먼 곳에서 영향력을 주고 있는 별들도 별 힘을 발휘 못한다고 하더군요. 별들은 인간의 감각을 부드럽게 변화시키므로, 이성보다 감각에 따라 움직이는 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답니다.”(P.94)

 

한편, 이 책의 후반부는 캄파넬라의 시편을 소개하고 있다. 14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개인적으로 예술성 자체가 뛰어난 편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다만 <태양의 나라>에서 확연히 드러나지 않은 캄파넬라의 사고와 사상이 솔직담백하게 표현되고 있음이 인상적이다.

 

세계와 그 부분에 관하여사고의 방법등에서 하찮은 존재인 인간의 오만함을 배격하고 우주와 신의 반영인 자연에 토대를 두는 사고와 인식을 주장함이 흥미롭다. 마지막 죄를 후회하며 고백하기를 원하면서, 코카서스에 읽은 배랄로에게 보내는 시는 짤막한 여타 시편에 비해 열세 절로 이루어진 대작이다. 표면상 자신의 과오에 대한 참회가 주를 이루고 있어 고해성사 신부와 위정자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내심으로는 글쎄, 사면과 면죄를 받기 위한 고도의 노림수의 뉘앙스가 풍긴다. 더불어 자신의 삶과 마음가짐을 새롭게 다잡으려는 의연한 결의의 태도가 느껴진다.

 

모어의 유토피아나,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는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사회의 모습이다. 어디에도 없는 곳, 하지만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그래서 추구를 멈출 수 없는 지향점. 이상 국가의 내용은 시대마다 다를 것이다. 우리가 새삼 그네들의 이상 국가론의 내용을 깊숙하게 파헤치고 분석하는 것은 그네들의 진정한 의도가 아닐 것이다. 모어와 캄파넬라가 이상 국가론을 주창할 수밖에 없던 배경은 이해하고 주창하였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보다 본연에 가깝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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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의 돌 - 아트 라이브러리 19 아트 라이브러리 19
존 러스킨 지음, 박언곤 옮김 / 예경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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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851년에서 1853년에 걸쳐 간행되었으니 <건축의 일곱 등불>의 후속작인 셈이다. 전작이 이상적 건축의 요건이라는 기본 이론서라면, 여전히 이론적 면모가 우세하지만 이 책은 그래도 건축의 실제적 측면에 보다 주목하고 있다.

 

3권으로 구성된 대작인데, 너무 방대하다고 생각한 저자 자신이 훗날 원본을 1/4로 축소한 요약본을 출간하였다고 한다. 옮긴이에 따르면 이 번역본의 저본은 요약본인데, 빠져버린 건축의 원리 부분을 포함시켰다고 한다.

 

구성을 보면 첫 번째 책은 건축의 이론으로서 건물의 구성 요소와 장식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 독자가 아름답고 진정한 건축의 특성과 미학에 대해 올바른 식견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는 후반부에 시대별 건축 사조를 이해하는 토대가 되기도 한다. 두 번째 책은 비잔틴 시대, 고딕 시대, 르네상스 시대 별로 건축의 특징과 변화를 소개하며, 산 마르코 성당과 두칼레 궁전을 건축미학적으로 상세히 분석하고 있다. 게다가 저자가 매우 높이 평가하는 고딕 건축의 본질도 명쾌하게 서술하고 있다.

 

서양 고전 건축의 기본 요소와 명칭, 구성 원리 등을 모른 채 <건축의 일곱 등불>을 읽어나갈 때 매우 답답한 심경이었다. 막연한 뜬구름 같은 개념 인식은 진지하고 심원한 이해에 건널 수 없는 장벽이 되었다. 이러한 심경을 알아차렸는지 전반부에서 러스킨은 차근차근 쉬운 표현을 사용하며 건축에 무지한 독자에게 감식안을 갖도록 하기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러스킨은 건축의 미덕 두 가지를 제시한다. 힘 또는 훌륭한 건설이 하나이며, 그것의 아름다움과 멋진 장식이 또 하나다. (P.29) 이를 달리 표현하면 첫 번째는 인간이 만들어 낸 훌륭한 작품이라는 표시이며, 두 번째는 자신의 것보다 더 나은 작품에서 느끼는 인간의 기쁨에 대해 표현하는 것이다.” (P.33) 전작에서 제시된 법칙과 유사하지만 보다 실제적 요소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에 제시된 미덕을 바탕으로 먼저 저자는 건축을 6가지 요소로 세분하고 있다. 벽과 지붕과 개구부(開口部)는 건물의 최소 요건이다. 벽의 내력을 높이기 위한 장치가 피어와 버트레스이다. 지붕은 지붕 자체와 지붕의 토대가 되는 아치나 상인방로 구별된다. 이어지는 내용은 이렇게 세분한 요소를 개별적으로 고찰하고 분석하는 시간이다.

 

벽은 토대와 벽체, 꼭대기에 해당하는 코니스로 구분된다. 벽은 공간을 내부와 외부로 나누고 안전하게 지붕을 받쳐야 한다. 벽의 모든 구조와 기법 등은 하중과 압력을 효과적으로 견디는 방안을 강구하는데서 출발한다. 회랑과 같은 열린 공간에서는 공간 구분 기능은 불필요하므로 이때는 최소한도의 벽만으로 하중을 버티기 위한 공학적 효율성의 이해가 추구된다. 그래서 벽은 기둥이 되고, 코니스는 주두로 발전한다. 아치와 박공지붕의 설명 또한 흥미롭다. 지붕은 수직압력과 수평압력을 잘 지탱해야 하는데 이용 가능한 재료를 활용하여 안전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아치 형태가 발생하였다고 한다. 아무리 구조 역학적으로 튼튼하게 설계와 시공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하중을 견디기 위한 목적에서 벽을 무한정 두껍게 할 수 없으며 미학적으로 보기가 좋은 편이 아니다. 버트레스가 이런 필요성에서 등장하였다.

 

장식은 순수 건축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장식이 없어도 건물의 용도 수행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장식은 순전히 심미적 차원이다. 러스킨은 이렇게 쓰고 있다.

인간의 작품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모든 장식은 저급하다. 확실하고도 명백한 이유가 없다면 그 장식은 진정으로 저급한 것이다. 우리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경탄의 대상으로 삼는 일은 비참한 자기만족이며 가엾은 일일 뿐이다. 그리고 모든 고귀한 장식들은 이러한 것들과 정반대로, 신의 창조물에 대해 느끼는 인간의 즐거움을 표현한 것이다.” (P.91)

 

러스킨의 건축 비평 인식은 근본적으로 종교적이다. 그의 미학의 중심에는 신에의 귀의가 핵심이다. 신과 신이 만들어낸 자연을 찬양하고 묘사하는 것은 언제나 상찬으로 추앙되지만, 인간에 치중하는 것은 저열하고 하급으로 치부한다. 이는 그만의 독특한 세계관이자 가치관으로서 당대 일각에서는 이러한 그의 예술 및 건축 비평에 대해서 과도한 관념론이라는 비판도 존재했다고 한다. 하긴 이러한 경향이 후대 사회 비평으로 방향을 바꾸게 된 숨은 동인(動因)일수도 있으리라.

 

러스킨의 글에는 문학적 향취가 자욱하다. 그의 글은 논설이나 학술서처럼 딱딱하지 않으며 기술과 공학을 다루면서도 예술적 감성이 스며들어 있다. 예술과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행복한 만남을 구현한 인물이라고 해도 과찬은 아닐 것이다. 12장 장식의 취급 말미를 보자. 그는 독자와 함께 파도바를 출발하여 여로에 오른다. 곤돌라를 타고 브렌타 강의 흐름을 좇으며 이윽고 말로 갈아타고 좁은 도로를 따라 선창에 다다라 다시 배를 타고 도시의 실체를 응시한다, 이곳 베네치아로. 독자의 눈길과 숨길을 단숨에 사로잡는 러스킨만의 뛰어난 구도와 문체가 단연 빛을 발한다.

 

두 번째 책은 앞서 기술했듯이 시대별로 베네치아의 건축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본다. 하고 많은 도시 중 하필 베네치아를 선택한 이유를 저자는 명쾌하게 밝힌다. 비잔틴 시대에서 전성기인 고딕 시대를 거쳐 르네상스 시대로 변천하는 건축의 흐름이 베네치아에 생생하게 남아 있으며, 그로테스크 르네상스로 변질되고 타락하는 현장이 유일하게 역력하다는 점이다.

 

러스킨의 글은 일종의 건축 에세이다. 그는 건축의 좁은 시야를 고집하지 않는다. 후반부의 첫 장은 베네치아 생성의 역사를 훑어나간다. 지리학적 고찰도 빼놓지 않는다. 그는 토르첼로 섬과 산 마르코 성당에서 이 시대의 전형을 발견한다. 러스킨 특유의 여행하는 보행자의 시선으로 멀리서 점점 다가가며 보고 발견하고 느끼는 엄숙한 감흥을 세밀하고 눈부신 색조로 묘사한다. 그 표현은 분명 시적(詩的)이지는 않지만 시적인 정서를 독자에게 안겨준다. 한 부분을 잠시 인용한다.

“......기쁨의 혼란이 한창일 때 그리스 기병의 가슴이 황금빛 힘의 웅대함 속에서 타오르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산 마르코의 사자는 별들로 뒤덮인 푸른 들판 위에 우뚝 솟고, 마침내 무아의 경지에 이른 것처럼 아치의 용마루 장식들은 대리석 거품으로 부서진 채 번쩍임과 조각된 물보라의 소용돌이 안에서 푸른 하늘 저 멀리 몸을 던진다. 그것은 마치 바닥으로 떨어지기 직전 얼어붙은, 리도 해안의 새하얀 파도 거품들을 바다의 요정들이 산호와 자수정으로 장식해 놓은 듯하다.” (P.137)

 

고딕 시대의 대표적 건축으로 두칼레 궁전을 분석하고 있는데, 30쪽에 걸쳐 평면도와 조감도, 그리고 각 건축의 세부 그림을 제시하여 역사적, 건축 미학적, 건축 요소별로 철저히 그 아름다움의 근원을 파헤치고 있다. 말미에 가서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두칼레 궁전이 너무나 친숙하고 낯익어서 오랫동안 잘 알고 있던 건축으로 여겨질 정도다.

 

개인적으로 후반부의 핵심이자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대목은 고딕의 본질장에 있다고 생각한다. 러스킨은 이전부터 공공연하게 고딕 건축을 가장 높이 평가해 왔다. 이 장에서 그는 고딕의 본질을 여섯 가지로 정리한다. 야만성과 거칠음, 변화에 대한 사랑, 자연에 대한 사랑, 교란된 상상력[기괴성], 완고함[견고성], 관대함이 바로 그것이다. <건축의 일곱 등불>의 주장 최고로 부합하는 건축 양식이 바로 고딕 건축이다. 고딕 속에는 신에 대한 찬미, 자연미, 박제화된 기교보다 거친 생명력이 살아 숨쉬며, 변화를 위한 변화가 아닌 고착화된 틀을 깨는 독창성 차원의 변화가 내재되어 있다.

 

고딕 건축과 르네상스 건축의 차이는 완벽성에 대한 추구에 있다고 러스킨은 인식한다. 과도한 완벽성은 건축에서 정교한 기교, 숙달된 솜씨, 세련미에 대한 요구로 드러난다. 이렇게 해서 위대한 고딕 정신은 서서히 파괴되어 갔다. 불명예스럽고 조악하며 타락한 최후의 양식을 그는 그로테스크 르네상스로 부른다. 그에게 더 이상의 베네치아는 의미가 없다, 건축에서도 현실에서도.

 

예전에는 불굴의 의지와 헌신으로 기독교의 도시들을 추월했던 베네치아가 이제는 방종의 교묘함과 다양한 허영심으로 그 도시들을 추월했다......평원 도시의 저주, 즉 자만심, 비만의 양식, 그리고 지나친 나태함과 같은 고대의 저주가 베네치아를 덮었다.” (P.224)

 

러스킨이 공들여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의 베네치아의 건축을 연구하고 분석한 것은 단순한 지적 호기심 때문은 아니다. 그의 의도와 목적은 분명하다. 그는 고딕을 당대 유럽에, 영국에 부활시키고 싶어 한다. 그의 시각으로 볼 때 당대 건축은 한심하기 그지없다. 건축은 단순한 돌무더기가 아니다. 진정한 건축은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마지막으로 러스킨의 고딕 건축 찬미를 그의 육성으로 들어본다.

그리스와 로마 건축이 생명력 없고 이롭지 못하며 비그리스도교적인 것처럼, 우리들의 옛 고딕은 역동적이고 쓸모 있고 신실하다. 옛 고딕은 모든 의무에 순종하고 모든 시대에 영속적이고 모든 마음에 교훈적이며 모든 직무에 고귀하고 거룩하다. 이것은 겸손함과 고귀함에 모두 적절하며, 마찬가지로 작은 집의 현관이나 큰 성의 성문에도 모두 적절하다. 일반 가정에 사용되면 친숙하고, 종교적 건물에 사용되면 경건하다. 단순하면서도 재미있기에 어린아이조차 이것을 이해할 수 있지만, 힘으로 싸여있어 가장 강한 사람이라도 위압할 수 있으며, 동시에 인간 정신의 고귀함을 찬양한다. 진정한 건축은 작업자의 모든 능력을 끌어내고 바라보는 사람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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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네버랜드 클래식 13
케니스 그레이엄 지음, 어니스트 하워드 쉐퍼드 그림, 신수진 옮김 / 시공주니어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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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작품 표제가 매우 서정적이다. 영문 원제는 <The Wind in the Willows>이며 운율 효과로 발음할 때 느낌도 역시 좋다. 무엇보다도 앞뒤 겉표지의 그림이 인상적이다. 잔잔한 냇가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 보트를 젓는 두 동물. 그냥 쳐다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흐뭇해진다.

 

앞을 잘 보지 못하는 어린 아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썼던 이야기들을 모은 게 이 작품이라고 한다. 일반적인 동화와는 이야기의 지향하는 바가 다소 다르다. 말로 들려줄 때 효과적이도록 청각적 표현이 자주 보인다. 듣는 이가 지루하지 않도록 등장 동물의 성격과 행동 묘사는 매우 개성적이며 생동감이 뚜렷하다. 정서 함양을 위하여 밝고 온화하며 따뜻한 분위기가 풍기도록 각별한 신경을 쓴 흔적도 역력하다.

 

와일드 우드와 강 마을을 배경으로 유유자적하며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는 네 동물이 이 작품의 주인공들이다. 두더지 모울, 물쥐 래트, 오소리 배저와 두꺼비 토드. 안온한 일상만 죽 나열된다면 곧 지루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작가는 몇 가지 에피소드를 배치하고 독자와 청자에게 흥미를 유발하고 더불어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두더지 모울이 땅속 굴을 박차고 나와 강변의 물쥐와 친구가 되고 같이 생활하는 장면은 아무래도 낯설다. 몰은 나중에 우연히 자기가 살던 굴 근처를 지날 때 강렬한 원초적 본능의 냄새를 느낀다. 너무나 익숙하고 포근하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것의 존재와 가치를 그는 깨닫는다. 그럼에도 그는 결코 친구들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물쥐 래트는 자신이 사는 강 마을을 너무나 사랑한다. 예술가적 기질이 농후한 그는 현재의 생활에 자족하며 유유자적하게 살아간다. 그는 낯선 고장과 모험을 싫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그럴까? 누구나 마음 한켠에 모험가와 방랑자의 자아를 품고 있다. 우리는 간혹 불안해진다. 나만 이대로 정체되어 있는 게 아닐까? 보다 넓은 세상을 향해 풍운을 무릅쓰고 뛰어드는 게 보다 멋진 삶이 아닐까? 방랑자 래트의 이야기에 불현 듯 몸을 부르르 떨며 눈빛이 흐려지는 게 어디 물쥐 래트 뿐이겠는가?

 

두꺼비 토드는 가장 독특하며 개성적인 캐릭터다. 천방지축에 흥미를 끄는 일에 앞뒤 안 가리고 몰두하는 성격. 그는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저택에 산다, 토드 홀. 숲속 친구들 중에서 유일하게 인간과 유사한 생활을 하며, 인간과 교류가 있는 것이 토드다. 이 작품의 후반부는 전적으로 토드의 모험담이라고 하겠다. 자동차를 훔쳐 타다 감옥에 갇히고 탈출에 성공하여 갖가지 고생을 겪다가 고향에 돌아온 그. 그의 부재를 틈타 족제비와 담비 일당이 무력으로 토드 홀을 강탈한다. 토드와 친구들이 힘을 합쳐 악당들에 대항하여 승리를 쟁취하는 것은 정해진 수순.

 

가장 어린이답고 그래서 어린이들에게 가장 열렬히 환영받을 만한 유형이 토드라 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확실히 순수하고 착한 마음씨를 가졌으며, 유혹에 약하고 참을성이 부족하다는 점도 굉장히 공통적이다. 토드의 존재는 잔잔한 연못에 이따금 파문을 그리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 작품은 역시 어린 시절에 읽어야 제격이다. 머리가 굳고 가슴이 차가워진 어른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감흥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워낙에 자극적이고 현란하며 재미있는 즐길거리들이 넘치는 세상이다. 그네들이 케네스 그레이엄이 들려주는 시적이고 전원풍의 환상적인 동화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다면, 아이들은 보다 정서가 풍부하고 가슴이 따뜻한 사람으로 커나갈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좋은 동화에게서 기대하는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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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강의 왕 마루벌의 새로운 동화 20
존 러스킨 지음, 최지현 옮김, 야센 유셀레프 그림 / 마루벌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다재다능하였던 존 러스킨이 1841, 20대 초반에 쓴 동화이다. 동화로서 제법 인정을 받은 셈인데, 여기 마루벌 외에도 숲속나라, 서강출판사에서도 동화 번역본이 나왔고 영어학습용으로 나온 종류도 있다. 이 중에서 마루벌 본을 선택한 것은 번역문의 어조나 형태가 더 마음에 들었으며, 게다가 야센 기젤레프의 신비롭고 몽환적인 삽화의 압도적인 매력에 끌렸다.

 

젊은 러스킨에게서 벌써 후대의 대가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문장은 억누를 길 없는 재치와 품위 있고 고상한 격조가 묘하게 어울려 있다. 기젤레프의 삽화는 금상첨화 격이다. 흑백 위주에 간혹 단색을 추가하고 있는데, 윤곽선을 살짝 흐리고 배경도 안개 입자 효과를 주고 있어(미술에 문외한이라 무슨 기법인지 알지 못한다!) 작품에 옛스러움과 비현실적 공기를 더하고 있다. 삽화만 봐도 작품의 성격과 분위기를 짐작케 한다.

 

내용면에서 이색적인 것은 없다. 대개 동화의 모티브는 유사하다. 못된 계모에게 구박받는 전처 자식, 나쁜 형과 착한 동생의 대비 등. 여기에 초자연적인 존재가 개입하여 권선징악을 행한다. 이 동화에서는 황금강의 왕이 다양한 형태로 변신하여 나쁜 형들과 착한 동생 글룩을 시험한다. 시험에 탈락한 형들은 검은 바위로 변하게 되고, 글룩은 다시 황금강 아래 보물의 계곡을 되찾게 된다.

 

두드러지는 특징은 러스킨의 정의관이다. 형들이 몰락하게 된 결정적 원인은 탐욕이다. 자신의 것을 남과 나누지 않으며, 타인의 것을 끊임없이 탐내는 물욕. 갑자기 후대의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가 연상된다. 두 작품의 정신은 일맥상통한다. 정의는 빈부의 격차를 당연시하지 않는다. 밑 빠진 항아리와도 같은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을 행위와 도덕의 준거틀로 인정하지 않는다. 나 혼자만 잘 살고 행복하면 된다는 논리는 정의에 위배된다. 나와 이웃이 다 함께 행복하고,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어야 참다운 정의가 실현된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개인들은 더 타산적이 되도록 노골적으로 강제된다. 제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도 금전적 성공을 거두지 못하면 그들만의 세계에서 동류로 취급받지 못한다. 물질적 성패는 사회적 지위와 치밀하게 맺어져 이제는 분리를 논하는 자체가 우습다.

 

이 동화를 읽을 만한 또래의 아이들은 이미 세상의 감추어진 이면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러스킨의 순진한 정의관이 어느 정도 호응 받을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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