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동기담 - 일본 화류소설의 정수
나가이 가후 지음, 박현석 옮김 / 문예춘추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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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국내에 소개된 나가이 가후의 유일한 작품이다. 나름 일본 근대문학사에서는 지위를 인정받고 있는 작가인데 국내에서는 상대적으로 대접이 소홀하다고 할 밖에. 그는 초기에 자연주의 문학 풍을 선보였는데, 구미 유학 후에는 낭만주의와 상징주의 풍의 작품들을 잇달아 발표하였다.

 

이 <묵동기담>은 1937년에 발표한 그의 최후기작이다. 책 뒤표지의 소개 문구대로 소설인지 르포인지 수필인지 경계가 모호한데, 도쿄 뒷거리 스미다가와의 유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가의 분신인 화자는 여름밤 더위와 소음을 피해서 밤산책을 하다가 데라지마마치에 이르고 마침 내린 소나기로 인해 우연히 오유코라는 화류계 여성을 알게 된다. 화류계라고 우회적으로 표현하지만 정직하게 표현하자면 몸을 파는 매춘부이다.

 

화자는 화류계가 부정 암흑(不正暗黑)의 거리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뒷골목 음지의 유곽과 화류계 여성을 작품의 제재로 삼은 것은 일면 물론 에로티시즘에 관심을 기울여 온 가후의 특징이다.

 

“정당한 아내들의 위선적인 허영심, 공명한 사회의 사위적(詐僞的)인 활동에 대한 의분이 그를 처음부터 부정 암흑이라 알려져 있는 다른 한쪽으로 치닫게 한 유일한 힘이었다.” (P.86~87)

 

여기에 위와 같은 인식이 더해진다. 외면상 선하고 깨끗한 양 인위적으로 꾸미는 대신 깨끗하면 깨끗한 대로 더러우면 더러운 대로 현상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 화류계는 불결한 사회악으로 치부되지만 엄연히 우리네들 옆에 가까이에서 실존하는 세계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말초적인 자극을 간질이는 뭔가를 상상하면 큰 실망감을 느끼게 된다. 작품은 굴곡 없이 무덤덤하게 흘러간다. 별 볼일 없는 중늙은이와 마찬가지로 내세울 것 없는 유녀(遊女) 간의 일상적 만남과 대화가 이어진다. 여기에 화자 자신이 구상하는 소설에 관한 이야기가 병치된다.

 

사실 통속적으로 다가오는 제재라는 점을 제외하면 이 작품의 참된 모습은 다른데 있다. 화자가 데라지마마치를 자주 찾게 되는 것은 그것이 개발이 덜 된 도쿄 소시민과 하층민들의 삶이 예전과 유사하게 이어지는 터전이기 때문이다. 오유코도 동종 직종의 다른 여성들과는 달리 기모노 차림의 전통적 꾸밈을 하고 있어 화자의 향수를 불러일으킨 데 있다.

 

화자가 묘사하는 도쿄의 옛 거리와 인물들의 풍정(風情)은 작품이 쓰여진 당대에서는 이미 사라져 찾아볼 수 없는 과거의 추억이 되고 말았다. 일본이 근대화를 시작한 이후 급속한 도시화로 인해 도쿄도 대도시로 성장하면서 도쿄 특유의 모습들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세계적 강대국이 된 일본, 중일전쟁이 한창인 군국주의가 횡행하던 시절에 바람직한 현대인의 모습은 스스로 우월해지기 위해 경쟁을 불사하고 용쟁 분투하는 인물형이다.

 

화자와 같은 소시민은 정부와 주류가 선도하는 전체주의적 의식과는 무관하게 자신만의 개인적 삶을 영위하기에 급급할 뿐이다. 작은 것의 가치를 소중히 할 줄 아는 인식은 당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으며 이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여전하다.

 

작가는 도쿄의 유곽과 매춘부를 통해서 작고 평범한 존재의 가치를 되살리고 근대화란 명목으로 막무가내로 없애버리는 사회적 추세에 미약하나마 저항을 나타낸다. 결국 사회와 문명 비판으로 나아가는 이러한 연결점에서 작가는 크고 높은 목소리로 부르짖지 않는다. 담소를 나누듯 속삭이듯 나긋나긋한 어조로 더없이 담담하면서 평이한 어투로 낮게 읊조릴 따름이다. 역설적으로 이게 웅변보다 묘한 울림을 가슴 속에 남겨준다.

 

대산세계문학총서로 <묵동기담>이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설마 달랑 한 편만을 수록하지는 않을 것으로 기대하며, 본격적인 나가이 가후의 작품을 접할 수 있게 되길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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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색야차
오자키 고요 / 범우사 / 199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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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번안소설 <장한몽>의 원작으로 유명한 작품이다. <장한몽>이 귀에 설면 ‘이수일과 심순애’가 나오는 소설이라고 하면 반드시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한국을 빛낸 100인의 위인’이라는 동요에도 나올 정도라서 어린아이들마저도 알고 있는 인물들이므로.


오자키 고요는 일본 근대문학사에서 비중이 큰 인물이다. 초기 근대문학의 경향과 인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서 고다 로한과 더불어 소위 ‘고로 시대’를 열었으며, 겐유샤라는 문학 동호회를 결성하여 주도하였다. 


그의 작품 중에는 이 <금색야차>가 매우 유명한데, 길지 않은 작가의 삶 중에서도 이 작품에 쏟은 노력과 시간은 가히 압도적이다. 1897년 그의 나이 31세 때부터 요미우리신문에 연재를 시작하여 단속적으로 이어지다가 1903년 37세에 결국 미완성으로 끝낸 채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그의 후반생은 이 소설과 함께한 삶이었다. 작품의 구성은 금색야차(전편/중편/후편), 속편, 속속편, 신속편으로 연결되는데, 신문 연재라는 상황과 예상치 못한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후속작을 요구하는 여론의 압박이 심했음을 알게 한다.


작품은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불멸의 주제와, 정신적 가치와 물질적 가치 간의 대립이라는 당대 일본의 시류를 반영한 시대적 의식이 선명하게 대비되어 있다. 작가는 갈등 구조를 극한에 이를 정도로 철저히 몰고 가면서 대립적 색채를 두드러지게 하고자 애쓰고 있는데, 과유불급이어서 오히려 사실성을 놓치고 있을 정도다. 여기에 당대적 관점이 아닌 현대적 시각을 개입시키면 작가의 주제의식은 역으로 진부하기 이를 데 없으며, 구시대의 도덕률을 억지로 드높이는 게 아닐까 비판마저 나올 정도다.


미야에 대한 간이치의 배신감은 개인적으로 충분히 느낄 만하다. 비록 공식적으로는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간이치와 그녀는 부부의 연을 맺게 되리라고 자신들은 물론 보호자인 미야 부모도 암묵적으로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 간이치가 바라보는 미야는 단순한 젊은 아가씨가 아니라 여인으로서 지녀야 할 숭고한 덕성의 표본이었으므로 다이아몬드에 넘어간 충격은 한층 더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이후 그의 자멸적 삶을 정당화 해주지는 못한다. 


미야를 굳이 변호한다면, 그녀는 뛰어난 미모를 지녔지만 보통의 인성을 지닌 여인이다. 그녀의 내심은 부귀영화에 대한 환상과 기대를 품고 있었다[전편 제3장]. 오늘날 젊은 여성들이 갖는 백마 탄 왕자의 출현에 대한 몽상과도 동일하다. 그녀는 간이치에게 진정한 사랑을 품은 게 아니었다, 적어도 그를 버리고 도미야마와 결혼하기 이전에는. 그녀가 간이치에 대해 지닌 애정은 남녀 차원이 아닌 남매간과 가까운 것이었다. 그녀 자신도 그렇게 자신을 합리화 하였다. 그래서 미야는 별다른 고민 없이 쉽게 도미야마의 손을 잡았던 것이다.


“부부의 행복은 오직 이 애정의 힘에 달려 있는 거야. 따라서 애정이 없으면 이미 부부 사이도 끝난 거라 할 수 있지.” [전편 제8장]

부유하지만 애정 없는 결혼생활. 당대는 물론 현대의 수많은 남녀 군상들은 여전히 사랑보다 조건을 선택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이를 비판하기는 용이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네 부모 세대에 이르기까지 배우자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채 혼인을 치르지 않았는가. 열정적인 사랑은 없지만 부부 간의 은근한 애정은 상호 노력에 의해 충분히 생길 수 있다. 미야는 이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부귀영화의 욕구가 채워지니까 잠복해 있던 사랑의 욕망이 불현 듯 샘솟는 것이다[후편 제3장]. 여러 유한부인들이 남편 따로 애인 때로 있는 동기가 여기에 있다.


극도의 배신에 대한 분노의 표출 양태는 자기 발전과 자기 파괴의 상이한 행동 선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를 갈면서 분투노력하여 오히려 성공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간이치는 세상에 대한 불신과 체념, 그리고 자기 방기(放棄)로 나아간다. 그는 고리대금업자의 하수인이 되었다.

“고리대금과 같은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거의 사람을 죽일 정도의 배짱이 필요한 일을 날마다 다루면서 감정을 거칠게 하고 있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으니 고리대금이야말로 미친 사람한테는 안성맞춤의 장사입니다.” [중편 제2장]


여기서 소설은 세태 비판적 성향을 드러낸다. 간이치가 몸담고 있는 고리대금업의 세계와 생활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그들의 간교한 영업 사례를 보여주며, 그들에 대한 세간의 증오와 저주를 여과 없이 쏟아내고 있다. [중편 제8장, 후편 제1장, 이는 당대 일본이 자본주의화 되면서 고리대금업이 활발해지고 그 폐해가 증폭되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미야와 간이치의 두 중심인물 외에 네 명의 개성적인 인물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며 작중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들을 통해 작품 전개는 더욱 흥미진진해지면서 주인공을 한층 두드러지게 하며 작가의 주제의식은 더욱 선명해진다.


미야의 남편인 도미야마. 그는 사실 피해자이며 악인이라고 할 수 없다. 그는 미야와 간이치의 관계를 알지 못한 채 결혼 하였다. 결혼 후 미야에 대한 그의 나름대로의 노력과 헌신은 차라리 눈물겨울 정도다. 만약에 미야가 도미야마에게 조금만 마음을 열었더라면 그는 한층 훌륭한 인물로 성숙해졌을지도 모른다. 달면 삼기고 쓰면 뱉는 듯한 미야의 처사에 오히려 반감이 생겨서 도미야마의 타락에 미움보다 동점심이 일 정도다.


고리대금업자 와니부치. 그는 글자그대로 전형적인 고리대금업자의 화신이다. 그는 자신의 직업에 일말의 의구심과 회의감을 품지 않으며 전혀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 아들의 눈물어린 호소마저 외면하면서 오히려 고리대금업의 불가피성을 토로하는 그의 대사를 듣고 있노라니, 요즘 모 대부회사의 광고가 생각난다. 사람이 바쁠 때는 버스나 지하철이 아니라 비싸더라도 택시를 이용하는 게 필요하다는, 뭐 그런 거 말이다. 어쨌든 와니부치는 표리부동한 위선자와는 다른 철저한 악인다움의 구현이라는 면에서 역설적으로 흥미로운 인물임은 분명하다.


간이치의 유일한 친구 아라오. 참사관으로 성공가도를 달리다가 갑작스레 파산하여 몰락한 인물. 간이치가 음(陰)의 속성이라면, 그는 양(陽)의 속성을 지닌 듯하다. 그는 처지에 실의 낙담하지 않으며 올곧은 마음 자세를 견지한다. 외양상으로는 거렁뱅이나 광인에 가깝지만 그의 두 눈은 여전히 부리부리하며 활활 타오르고 있다. 그러기에 그의 마음은 두 남녀에 대한 안타까움과 끊지 못한 애정으로 여전히 아프다.


고리대금업자 미쓰에. 작중에서 그녀만큼 간이치에게 하대와 구박을 받는 인물이 달리 있을까? 그녀의 미모와 재산이라면 어찌하든 접근하려는 남자들이 수없이 많을 텐데. 그녀는 일편단심 간이치를 향한다. 그에 대한 그녀의 마음은 분명코 순정이며 연정이다. 보지 못하고 겪어보지 못한 미지의 존재에 대한 성취될 수 없는 갈망은 더욱 몸 달게 하기 마련이다. 그녀는 결코 다소곳하고 정적인 성격이 아니다. 간이치가 그녀를 거부하는 이유는 단지 하나, 자신의 가슴 속에 여전히 미야가 가득 자리 잡고 있어서다. 미야에 대한 사랑이 증오로 바뀌었지만 그 크기는 전혀 줄지 않았다. 그가 진실로 미야를 버렸다면 서슴없이 미쓰에를 받아들이지는 못하더라도 그렇게 박정하게 외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자신처럼 하찮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결코 물질적 조건에 대한 편애는 아닐 것이다. 아쉽게도 미쓰에의 행로가 향후 어떻게 전개될지는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작품은 중단되고 말았다.


간이치는 휴양지 여관에서 사야마와 게이샤 아이코의 사랑을 위한 죽음을 시도하려는 장면을 목도하고 세상과 여인과 자신에 대한 인식을 반성하는 계기로 삼는다[속속 제5장]. 이후 신속편에서 미야의 구구절절한 심경을 토로한 서신에서 작품을 완결되지 못하고 끝을 맺는다. 차라리 이편이 낫다. 구질구질하게 해피엔딩을 만들려고 애쓰거나 괜히 개과천선한 간이치의 훌륭한 선행을 억지로 독자에게 보여주려는 작가의 고심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괜찮다.


이 작품은 근대 우리 문학계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번안된 인물이지만 이수일과 심순애가 여전히 우리네 세계에 살아있다는 자체가 이를 증명한다. 작가 특유의 세련된 감각적 표현과 감상적 문체는 작품에 애상미를 고취하고 있으며 이는 일본문학의 전형적 특성으로 자리 잡는다. 현대에 와서 많은 신진 작가들이 역시 일본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에게서 문학적 세례를 받았던 것처럼 당대의 오자키 고요 또한 그러했던 것이다. 어쨌든 우리에게는 결코 바람직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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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아스와 멜리장드 지만지 희곡선집
모리스 마테를링크 지음, 이용복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마테를링크의 이 희곡은 첫 희곡 <말렌 공주>의 3년 후에 씌어진 작품이다. 어찌 보면 원작보다도 이를 토대로 한 당대 및 후대 작곡가들의 작품으로 더 성가가 높아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쟁쟁한 음악가들이 곡을 썼다. 드뷔시, 포레, 쇤베르크, 시벨리우스가 오페라 및 관현악곡을 썼다. 작곡가들이 이 작품에 관심을 기울였던 연유는 뭐니 뭐니 해도 사랑의 죽음이라는 영원한 테마에 더해 상징주의적 희곡으로서의 철두철미한 성격에 기인한다.


하나의 산문 작품에 이렇게 시종일관 다양한 상징과 암시와 뉘앙스를 무지막지할 정도로 쑤셔 넣은 사례는 문학사상 다시 찾기 어려울 정도다. 작품을 재독하면서 일독에서 간과했던 문구와 표현들이 깊은 함의를 가지고 있음을 비로소 깨닫는 경우가 많았다. 삼독, 사독의 결과는 어떠할지 예측하기 어렵다.


플롯 면에서 이 작품은 남편과 젊은 아내, 그리고 남편의 젊은 아버지가 다른 동생 간의 불륜이 뒤섞인 삼류 드라마에 가깝다. 아내는 남편에 애정을 느끼지 못하고 남편의 동생과 서로 사랑을 느낀다. 남편은 둘 사이를 의심하고 마침내 밀회의 현장에서 동생을 죽인다. 부부의 관계는 상호 간의 사랑과 믿음으로 엮여져야 하는 게 이론이라면,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 결혼 따로, 연애 따로라는 이율배반적 상황이 그치지 않는 연유는 인간의 불완전성에 기인한다.


젊은 남녀 주인공에 대한 안타까움에 비례하여 덩치 큰 골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자칫 그에 대한 시각을 왜곡시키는 경우가 있다. 원시인처럼 체격에 비해 두뇌는 뒤떨어진다는 인식 말이다. 제1막 제3장에서 주느비에브는 골로를 항상 신중하고 진지하고 의지가 강하다고 평가한다. 골로는 현실적 인물이다. “사람들은 기쁨이란 것을 매일 누리지는 않아.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해”(제2막 제2장). 그는 꿈과 상징과 보이지 않는 세계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사냥감을 쫓듯이 실질만을 추구한다. 따라서 그와 멜리장드는 애초부터 부합하지 않는 상대였다.


이 희곡을 실제 연극으로 상연한다면 연출자들은 심대한 고충을 겪지 않을까. 통상적 연극과 같이 접근하면 무미건조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결과만을 낳게 된다. 대사가 오롯한 대사가 아니다. 대사가 품고 있는 함의를 관객이 이해하려면 음조와 뉘앙스는 물론이고 배경 세팅에도 치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 작품에서 작가가 감추고 혹은 드러내는 상징과 암시들의 일부(그 전모는 오직 작가만이 알 수 있으리라!)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문과 문지방, 그리고 하녀들. 

제1막 제1장은 엉뚱하게도 문지기와 하녀들의 대화로 이루어진다. 하녀들은 문지방을 닦지만 대홍수의 물을 다 부어도 흔적을 다 지우지는 못할 것이라고 문지기와 더불어 중얼거린다. 지워야 되는 흔적이 무엇인지는 명시되지 않는다.

제3막 제5장에서 이뇰드는 펠레아스와 멜리장드가 종종 문 때문에 싸운다고 말한다. 문이 열려있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지막 제5막 제2장에서 멜리장드의 죽음이 임박해지자 하녀들이 방으로 들어와서 말없이 벽을 따라 늘어서서 기다리고, 멜리장드의 죽음을 가장 먼저 인지한다.


문은 안과 밖을 경계 짓는다. 안은 이승이며, 밖은 저승이다. 문지방은 곧 차안과 피안의 경계일 것이다. 운명은 문지방을 통해 드나든다. 문이 열려 있으면 운명의 출입이 용이해지며 그만큼 인간에 대한 운명의 개입은 강화된다. 문이 닫혀 있으면 생과 사의 영역이 분명해진다. 더 이상 불확실하고 변덕스러운 운명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 제4막 제4장에서 문이 모두 닫히게 된 사실을 알았을 때, 멜리장드는 차라리 잘됐다고 세 번이나 반복하여 말한다.


기독교에서 인간은 누구나 원죄를 안고 태어난다. 제아무리 내세를 위해 심신을 정화하더라도 원조의 흔적을 결코 없애지는 못한다. 하녀들은 이 엄연한 사실을 독자와 관객, 등장인물에게 직설적으로 상기시키는 역할, 곧 운명의 여신에 가깝다. 제5막 제1장의 대사를 살펴본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어요...”

“우린 언제 올라가야 할지 잘 알 수 있을 거야...”

“아직 때가 되지 않았어...”

“이제 그들은 우리를 두려워해...”


운명의 절대성과 가혹성.

마테를링크의 작품에서는 운명이 중요한 기제로 작용한다. 제아무리 등장인물이 난다 긴다 하여도 결국 운명이 심어놓고 파놓은 함정에 빠져 좋든 싫든 간에 정해진 운명의 길을 따르게 된다. 등장인물 누구도 운명의 힘에 거스르려는 의지를 보인다. 숙명처럼 체념하고 받아들인다. 개인의 선택과 행동은 상대론적 관점에서 해석될 수밖에 없다. 타인은 외부에서 관찰하고 지켜보지만 인물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의 운명과 미래를 알지 못하기에. 늙은 아르켈은 그래서 그저 기다리고 지켜보기만을 주장한다.


사람은 약점과 한계를 지닌 유한한 존재다. 그는 자신도 길을 잃었음에도 타인을 인도하려고 하며(제1막 제2장), 잔잔한 바다만 보며 나중에 올 폭풍우를 예견하지 못한 채 배를 타고 나간다(제1막 제4장). 어린 이뇰드조차 운명에 대한 인간의 역부족을 양떼를 통해 절감한다. “아! 아!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는군......그럼 어디로 가는 거지! 목동! 목동! 양들이 어디로 가는 거야?”(제4막 제3장)


이야기가 진행되는 왕국은 결코 태평성대의 낙원이 아니다. 심한 기근이 왕국을 황폐하게 만들어 거지들이 헤매고 있으며, 영역 밖에서는 적들이 기회를 엿보고 있으며(제2막 제3장과 제4장), 굶어죽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다(제4막 제2장). 왕궁의 토대도 단단하지 않다. 성 전체는 지하 동굴 위에 세워져 있는데, 곳곳에 균열이 생겨서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으며, 웅덩이에서는 죽음의 냄새가 올라온다(제4막 제3장).


행복의 의미.

멜리장드는 자신의 처지와 심적 상태를 행복하지 않다고 표현한다. 작중에서 이 대사는 수차 반복되어 나타난다. 제2막 제2장에서 골로에게 두 번 말하며, 제4막 제2장에서는 불행하지 않았다고 한 잠시 후, 행복하지 않다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외친다. 행복이라는 가치의 연원과 근거는 무엇인가? 물질적 요인의 충족을 행복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행복은 영혼과 정신적 차원의 문제다. 


반지의 의미

제2막 제1장에서 멜리장드는 펠레아스와 샘가에서 대화하던 중 반지를 샘에 빠뜨린다. 펠레아스의 주의에도 멜리장드는 반지를 갖고 일부러 위험하게 장난을 친다. 반지의 분실은 곧 그녀의 고의성임을 독자는 알 수 있다. 그녀에게 반지는 골로와의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의 올가미였던 것이다. 반면 골로에게 그 반지는 단순한 의미 이상의 것이다. “당신은 그게 어떤 것인지 몰라. 당신은 그게 어디서 온 것인지 몰라.”(제2막 제2장).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의 눈물과 떠나려는 의지.

남녀 주인공은 자주 운다. 별다른 외적 이유가 없음에도 그들은 남들과 달리 눈물을 잘 흘린다(제1막 제3장, 제3막 제1장과 제5장). 펠레아스는 계속하여 떠난다는 말을 되풀이한다(제1막 제4장). 실제로 그는 떠나려고 하지만 여건상 출발을 연기할 수밖에 없다(제2막 제4장. 멜리장드도 왕국에 영구히 정주할 것으로 비쳐지지 않는다. 어린 이뇰드는 그것을 직감한다. 그녀는 골로에게 떠나지 않으면 자기가 죽을 것이라고 예언한다(제2막 제2장).


우는 행위는 통상 슬픔의 발로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그리 나날이 슬픈 것인가? 그들은 항상 어둠 속에서 운다. 이유 없는 울음은 존재에 대한 본원적 슬픔에 기인한다. 인간의 유한성과불완전성보다 더 큰 눈물의 원천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들은 왜 떠나고자 하는가? 기쁨과 행복이 있는 곳에서 사람들은 떠나고자 하지 않는다. 고통과 슬픔이 멈추지 않는 곳에서 그들은 떠나고자 한다. 떠나서 그들은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목적지는 알지 못한다. 인간은 길 잃은 존재이며, 운명의 맹목적 인도에 우왕좌왕 휩쓸려 다니는 가련한 양떼다. 떠나는 행위는 외형적인데 국한하지 않는다. 내면에서도 떠나는 것이 가능하다. 떠남은 여행도, 도망도 될 수 있으며 초월로 이해될 수 있다. 


형제간의 운명적 불행.

골로는 펠레아스와 멜리장드가 머리카락으로 서로 유희하는 장면을 목격한 후 펠레아스를 지하 동굴로 데려온다. 펠레아스는 부패한 웅덩이에 빠질 뻔한 위험을 겪는데, 이는 실수와 우연이 아니라 골로의 살해 의도가 깃들여 있음을 짐작케 한다. 골로는 흥분하여 목소리가 떨릴 지경이었다(제3막 제3장). 압살롬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로 다윗의 아들이다. 자신의 동복누이를 강간하고 죽인 이복형제를 죽인 후 끝내 다윗에게 반기를 들기도 하였다. 골로는 멜리장드에게 폭력을 저지르며 압살롬의 이름을 외친다(제4막 제2장). 형제 살해의 불행한 운명은 이미 예고된 셈이다.


빛(밞음)과 어둠.

이 작품을 연극으로 상연하려면 무대 연출에 세심한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특히 빛과 어둠의 효과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궁전의 전체적 이미지는 어둠이다. 지하 동굴은 어둠의 분위기를 배가한다. 인물들은 빛과 어둠을 가지고 다툰다. 밞음을 지향하는 이뇰드와 어둠 속에 있고자 하는 골로(제3막 제5장). 보리수 그늘과 밝은 곳을 엇갈리게 희망하는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제4막 제4장). 빛과 어둠은 흔히 선과 악으로 해석된다. 또는 생과 사의 세계로도 이해된다. 땅 밑을 사후세계로 보는 관점은 세계 공통이다. 


순수와 진실.

멜리장드의 눈에서 아르켈은 거대한 순수를 발견할 때, 골로는 순수의 순수성을 의심한다(제4막 제2장). 아르켈은 멜리장드에게서 새 시대의 문을 열 사람임을 예상한다. 새 시대는 무슨 의미에서 구 시대와 구별되는가? 그것은 순수함에서이다. 거짓과 위선이 난무하며, 진실의 절대성이 의심받는 현실, 이것이 구 시대다. 현실과 실제가 존중받는 것은 허위와 몽상이 아닌 순결한 내면과 밝은 이성의 빛이 환하게 비출 때다. 운명의 덫은 사람들의 순수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어린아이처럼 장난을 쳤지만 세상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제4막 제4장). 진실을 말해도 상대방은 계속적으로 진실을 요구한다(제5막 제2장).


현실이 자신을 거부할 때 궁극적 해소책은 결국 떠나는 것이다. 영원한 떠남은 불가피한 동시에 차라리 잘 되었다고 역설적으로 표현된다(제4막 제4장). 정신 부재의 현실에서는 더 이상 살 수가 없다. “그녀는 살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녀는 이유없이 태어났어요...죽기 위해. 그리고 이유없이 죽는 겁니다...”(제5막 제2장). 멜리장드는 인간 세상이 아닌 숲 속에서 살아야 존재가 아니었을까?


보는 행위와 의미.

우리는 종종 착각을 한다. 사람의 내면을, 물질의 본성을 읽을 수 있다고. 작품에서 본다는 의미는 단순한 시각적 기능을 가리키지 않는다. 겉이 아닌 내면을, 현재가 아닌 미래를, 운명을 읽을 때 비로소 본다고 할 수 있다. 골로는 애초부터 보려고 하지 않는다. 늙은 아르켈조차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제1막 제3장에서 그는 이렇게 토로한다. “난 몹시 늙었지만 아직 내 안에서 한순간도 분명하게 본 적이 없구나.”. 


반면 그는 제2막 제4장에서는 펠레아스에게 보는 법을 가르쳐주겠다고 말한다. “난 더 이상 내 스스로 보지는 못하지만, 네게 보는 법을 가르쳐주겠다. 그리고 네가 그들에게 손짓을 하고자 하는 날, 너에게 그것들을 보여주마.”. 제대로 본 적 없는 이가 보는 법을 가르쳐주겠다고 하는 현상, 그것이 곧 인간의 모순된 모습이다.


결국 아르켈은 자신이 보지 못하는 존재임을 자각한다. 멜리장드의 죽음을 뒤늦게 깨달으며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음을 자탄한다(제5막 제2장)


이 희곡이 남녀 간의 사랑과 죽음을 주제로 삼은 작품이라면, 펠레아스가 제4막에서 죽임을 당한 후 멜리장드가 같이 죽지 않고 제5막이 덧붙여진 것은 사족에 가까웠을 것이다. 마테를링크는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골로의 애증 관계를 자신의 상징적 운명극을 구성하기 위한 장치로서만 활용하였다. 이들의 사랑과 고뇌는 주제가 아니라 제재에 불과하다. 제1막 제1장과 제5막 제1장에서 하녀들의 대사를 곱씹어올 필요가 있다. 마테를링크가 고심하여 설계했지만, 드뷔시가 간과한 대목이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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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7
모리 오가이 지음, 김용기 옮김 / 소화 / 1998년 8월
평점 :
절판


모리 오가이의 유일한 장편소설이다. 그럼에도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서 언급되지 않는데서 이 작품의 한계를 유추할 수 있다. 1910~1911년 발표된 작품으로서 아직 전기의 문학 성향을 지니고 있는데, 당시 오가이의 문학적 장점은 단정하면서 군더더기 없는 문장. 감정의 진폭이 크지 않으면서도 강렬한 여운을 남기는 말미. 예스러운 멋조차 느껴지는 낭만주의적 분위기, 은연중 배어나오는 따스한 휴머니즘과 봉건질서에 대한 거부감. 그러면서도 기성체제에 편입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체념과 순응의 심적 태도. 이러한 요소들이 그의 초기작에 두드러지며 중기에까지 이어지는 그의 특질이기도 하다.

 

극적인 사건 전개와 구성력에 치중하지 않는 스타일을 보건대 그의 성향은 단편소설에 어울리지 장편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 그의 중·단편을 보면 장편으로 쓰더라도 부족함이 없을 제재를 다루고 있다. 그는 과장과 허세와 요설을 기피한다. 군더더기를 싫어하는 그는 문장의 잡다한 곁가지를 잘라버리고 핵심에 다가서기 위해 노력한다.

 

이 소설은 오가이로서는 독특한 유형에 속한다.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해설에 따르면 나쓰메 소세키에게 자극받아 썼다고 한다. 이십대 중반의 젊은이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점에서 언뜻 <기러기>와 유사하지만, 두 작품이 가는 방향은 너무 멀다. 작가가 되기 위하여 상경한 준이치는 여러 유형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회적 인간관계 및 이성관계를 겪게 된다.

 

세토와 오무라는 정신적, 도덕적 측면에서 정반대의 인물이다. 세토는 지극히 현실적 인물이다. 의대생인 오무라는 폭넓은 교양과 인간에 깊은 통찰력을 지닌 인물이다. 준이치와 오무라 간의 철학적 대화를 보게 되면 이십대 젊은이들답지 않은 노숙한 성찰의 면모가 드러난다. 오무라는 준이치에게 정신적 멘토에 가깝다.

 

준이치가 마주치는 두 여성, 오유키와 사카이 부인 또한 상대성이 두드러진다. 처녀 대 미망인, 연하 대 연상, 순결 대 방종(내지 성적 자유), 수줍음 대 당당함, 전통적 대 현대적 등 양자는 대척점에 서 있다. 결혼을 염두에 두고 진지한 만남을 가진다면 응당 오유키를 택할 것이다. 사람은 누구라도 선(善)을 지향해야 마땅함을 인식하지만, 악과 부패의 유혹을 과감히 떨치지 못한다. 팜므 파탈에의 경도와 파멸이 현실성을 지니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준이치 역시 사카이 부인의 눈을 외면하지 못한다.

 

준이치가 작가를 꿈꾸는 만큼 나쓰메 소세키를 위시한 당대의 문인들이 실명 내지 가명으로 등장하고 언급된다. 모리 오가이조차 준이치에게서 부정적으로 비평받는 점이 흥미롭다. 비록 소설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준이치의 눈을 통해 본 문학계에 대한 인식은 작가 자신의 견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아무래도 당대 문학사조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지만 자신은 동의하지 않던 자연주의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엿볼 수 있다.

 

작품의 전개는 두 가지 방향으로 흘러간다. 하나는 개인의 인생관 내지 세계관 형성에 관한 의론이다. 일본의 근대화는 불가피하게 서구의 개인주의의 유입을 동반하였다. 집단문화와 의식이 팽배한 전통 일본사회에서 개인주의는 자칫 사회악으로 치부되기 쉽다. 반면 진정한 개인주의의 발흥 없이는 근대화는 공염불이다. 작중 소설가 후세키가 월례 문학회에서 강연하는 주제는 입센의 개인주의다. 준이치와 오무라가 열중하여 <파랑새> 작품을 분석하면서 토론을 하는 주제도 이기주의로 매도되기 쉬운 개인주의에 대한 것이며, 특히 오무라는 이타적 개인주의를 옹호하고 있다. 여전히 일본 사회를 감싸고 있는 집단주의에 대한 오가이의 비판이라고 하겠다.

 

준이치는 욕망의 발로에 따라 동정을 잃는다. 그는 사카이 부인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대우받길 원하지만 부인에게 있어 준이치는 잠시 호기심을 안겨준 청년에 불과하다. 합치할 수 없는 두 남녀 사이의 결별은 불가피적으로 임박해진다. 사랑 없는 육욕의 만족, 찰나가 지나면 여운은 씁쓸하기 짝이 없다.

 

청년은 가족이라는 온실을 떠나 세상에 직면한 순간부터 현실을 절실히 깨닫는다. 창문을 통해 바라 본 환상은 덧없이 깨지고 만다. 안온한 껍질이 깨지는 순간의 의미는 개개인마다 동일하지는 않다.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통과의례를 거쳐야 만 비로소 소년은 청년이 되며, 청년은 참으로 성인이 될 수 있음이다. 이를 거부하면 어떻게 될까? 영원한 피터 팬과 오스카로 남는 것뿐이다.

 

준이치는 하코네를 떠난다. 하숙집이 있는 도쿄로 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주저와 퇴행의 길이 아니다. 하코네의 사카이 부인, 도쿄의 세타와 뭇 현실, 이들의 실체를 준이치는 이미 경험하고 발견하였다.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더 이상 과거의 준이치는 아니다. 그는 글을 쓰고 작가가 될 터이지만 상경하던 시기에 품었던 상념과는 다른 형식, 내용, 차원의 글을 쓰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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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렌 공주 지만지 고전선집 620
모리스 메테르링크 지음, 이용복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청년 극작가 마테를링크에게 일약 명성을 안겨준 희곡으로 상징주의적 희곡의 하나의 전형으로 간주된다. 당대는 사실주의, 나아가 자연주의가 문단에서 득세하던 시기였다. 소설과 시는 물론이고, 연극에서도 마찬가지로 인간 삶의 세세한 면을 그것이 아무리 더럽고 추악하더라도 가감 없이 기술하고 묘사하는 경향이 주류를 이루었다. 자연주의의 약점은 인간 외면의 모습에 치우친 나머지 인간의 고유한 내면세계에 대한 무관심 내지 무능력에 존재한다. 정신과 영혼의 심원하고 미묘한 반짝임을 타인의 눈으로서 관찰하는데 본질적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자연주의에 대한 반발과 극복으로 모색된 흐름이 소위 상징주의라고 하겠으며, 마테를링크는 희곡 장르에서 이를 철저히 구현한 작가라고 하겠다. 이 작품을 읽어 보면 확실히 고전주의부터 리얼리즘에 이르는 극작들과는 차별화됨을 쉽사리 알게 된다.

 

배경 및 무대 설명의 생략. 각 막은 곧바로 인물들의 대화로 시작될 뿐 통상적 희곡의 구구절절하고 글로 그리는 듯한 상세한 무대 장면의 기술은 찾아보기 어렵다. 배경 및 무대에 대한 구체성의 결여는 작품에 추상성을 강화하며 작가에게 운신의 폭을 넓히는 재량을 부여한다.

 

사건과 행동에 대한 구체적 묘사의 회피. 얄마르 왕과 마르셀뤼스 왕 간 언쟁의 원인과 내용은 모호하게 언급될 뿐이다. 양국 간 전쟁으로 마르셀뤼스 왕이 죽고 말렌 공주의 나라로 폐허가 된 사실은 사후에 탑에서 탈출한 공주와 유모에 의해 비로소 드러난다. 안 왕비가 말렌 공주를 교살하는 장면도 독자는 간접적 기술에 의해 인지할 수 있게 된다. 구체성의 회피와 모호성의 강조는 역시 작품에 비현실성을 부여하며 독자로 하여금 인물의 태도와 성격, 그리고 작가의 지향점에 대해 통합된 해석을 거부할 수 있게 부추긴다.

 

상징과 암시 장치의 매설. 독자에게 혼란과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 효과적 수법은 명확한 인식이 어렵게 사건과 행위에 대해 암시와 상징을 던져주면 된다. 모래사장에서 발이 푹푹 빠져서 전진하기 어려운 것처럼 독자는 작가의 장치를 해석하고 되새기기 위하여 주춤거리다가 되돌아가기도 하는 등 과감히 떨치지 못한다. 양국 간 약혼식 날 장교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혜성과 비, 어두워진 하늘은 파국을 전조한다. 말렌 공주와 얄마르 왕자의 재회 장면에서 연인을 방해하는 부엉이와 두더지, 공주의 갑작스런 코피, 이상하게 울다가 죽는 분수의 물줄기 또한 연인의 재회가 해피엔딩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공주의 죽음과 관련되어서는 폭풍우와 벼락, 일식, 떨어진 성당의 십자가, 죽은 백조 등의 복선이 깔려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낯선 인물. 악역을 도맡는 안 왕비는 유틀란트에서 남편인 늙은 왕을 가두고 폐위시킨 전력이 있다. 그녀가 일흔 살이 넘은 얄마르 왕과 결혼한 목적은 불분명하다. 그녀는 왕을 부추겨 마르셀뤼스 왕과 다투게 하여 왕국을 멸망시키고 약혼을 파혼시킨다. 늙은 왕은 갑작스럽게 심신이 노쇠하기 시작한다. 얄마르 왕자에 대한 안 왕비의 사랑은 일반적 모자(계모와 전처의 아들 사이지만)간의 애정과는 차이가 있음이 곳곳에서 언급된다. 그녀는 자신의 딸 위글리안과 왕자를 결혼시키기 위해 무리한 일을 저지른 것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인물들의 동일 대사의 반복적 표현. 조금만 이 작품을 읽어보면 표현상의 뚜렷한 특징을 금방 알아차리게 된다. 인물들은 의사를 주고받을 때 한 번의 대사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두 번 내지 서너 번씩 반복한다.

 

“얄마르: 그래요! 그래! 그래! 오! 오! (밖으로) 이리 와요! 이리 와요! 목이 졸렸어요! 목이 졸렸어요! 목이 졸렸어요! 말렌! 말렌! 말렌! 말렌! 목이 졸렸어요! 목이 졸렸어요! 목이 졸렸어요! 오! 오! 오! 목이 졸렸어요! 목이 졸렸어요! 목이 졸렸어요!” (5막 4장)

 

위는 다소 극단적인 예시지만, 작품 전체에 이러한 반복적 대사가 지겨울 정도로 넘쳐난다. 작가의 모종의 의도가 개입된 결과라고 해석해야 될 것이다. 반복을 통한 강조 효과 또는 영탄의 증폭으로도, 한 번의 대사로는 소통과 행동 유도가 어려운 부재와 단절의 인간관계의 암시로도 추론이 가능하다. 그것이 무엇인지지 알기 어렵다. 다만 연극으로 실제 상연이 될 때, 배우들이 참으로 고생하겠구나 싶다. 동일한 어조와 감정으로 대사를 반복하면 배우도 관객도 모두 지루하고 따분해 하지 않겠는가.

 

첫 희곡 작품이니만치 후기 이후의 원숙한 필치와 심화된 상징 기법과 구조를 여기서 기대하기는 어렵다. 재료를 아낌없이 쏟아 붓는 풍성함이 주는 재미는 대가의 세련된 맛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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