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일곱 등불 마로니에북스 시각문화 총서 2
존 러스킨 지음, 현미정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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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러스킨의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를 읽게 된 후 급작스레 저자에게 관심이 생겼다. 러스킨의 삶은 전반기와 후반기로 뚜렷이 구분된다. 후반생의 그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회비평가라면, 전반생에서는 저명한 예술비평가였다. 특히 회화와 건축 부문에서 그 성과가 두드러졌다. 무슨 연유로 그는 관심의 영역을 예술에서 사회로 전환 아니, 확장하였는가? 그가 사회문제에 주의를 기울인 계기는 무엇인가? 이런 의문에 대한 대답을 그의 전반기의 저작에서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내가 이 책을 펼쳐든 까닭이다. 건축에는 무지하고 문외한인 주제에.

 

뒤돌아보건대 쉽지는 않은 책이다. 건축에 대한 기초지식을 지니고 고딕과 초기 르네상스 건축양식에 조예가 깊은 이라면 읽어나가는데 비교적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일단 건축용어 자체부터 낯설고 그것이 건물에서 정확히 지칭하는 바가 무엇인지 애매한 경우가 빈번하였다.

 

다행히 이 책은 건축의 기술적 측면을 다룬 기술서적이 아니다. 러스킨은 오히려 건축의 정신을 강조한다.

건축은 인간이 세운 구조체를 배열하고 장식하는 예술로서, 사용목적이 무엇인건 간에 그 모습이 인간 정신의 건강, 힘 그리고 즐거움에 기여하도록 하는 것이다.”(P.21)

이러한 관점에 기초하여 당대의 건축문화에 대하여 비판적 시각에서 그는 건축이 지향해야 할 일곱 법칙(원칙, 원리, 정신 등)을 제시하고 이것이 건축의 앞길을 비추어야 진정한 건축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희생의 등불

이것은 건설을 위해 값진 물건을 제공하는 정신”(P.23)이다. 건축가가 지닌 모든 물질적, 정신적 자원을 모두 투입해야 함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건축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라는 것이다. 이는 최소비용의 투입으로 최대의 성과를 기대한다는 경제학적 논리와는 상반된 주장이기도 하다. 러스킨은 당대 건축에서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정신이 사라졌음을 언급한다.

우리 중 누구도 전력을 다하지 않고서는 좋은 건축가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는 한, 최근에 세워진 건물 중에서 건축가나 건설자가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나는 것은 없다. 이것이 현대 건축의 특별한 성격이다. 옛 건물들은 거의 대부분 각고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어린아이가, 야만인이, 시골뜨기가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항상 최선을 다했다.”(P.35)

 

진실의 등불

건축은 진실해야 한다. 거짓되어서는 안 된다. 당연하지만 진부한 명제인데, 러스킨은 새삼 강조한다.

우리는 중상모략과 위선, 배신에 격분한다. 그것이 거짓이라서가 아니고 우리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거짓으로 인해 손실과 피해가 생기지 않는다면 별로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가장 큰 해악은 사실 달콤하게 속삭이는 번들거리는 거짓말이자, 친절하게 들리는 그릇된 견해들이다.”(P.46)

그는 거짓과 진실을 통상적 관념과는 다른 의미로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그이기에 건축에서의 속임수를 다음의 세 가지 부류로 제시한다.(P.51)

첫째, 거짓된 구조나 지지 방식을 제시하는 것

둘째, 표면을 칠해서 본래의 재료와 다른 재료를 재현하거나, 평면의 그림을 입체의 조각처럼 보이도록 거짓으로 재현하는 것

셋째, 어떤 종류이건 주형으로 뜨거나 기계로 생산한 장식을 사용하는 것

 

러스킨의 당대에 철재가 건축에 도입되기 시작한 모양이다. 이에 대한 러스킨의 반응은 사뭇 부정적이다.

내 생각에 그 규칙이란 금속은 결물로는 쓰일 수 있을지언정 구조물로는 쓰일 수 없다는 것이다.”(P.58)

금속이 한계 내에서 사용되어 건축의 존재와 본성을 파괴하지 않는다 생각되더라도 너무 사치스럽고 빈번하게 쓰인다면 작품의 품위뿐 아니라 정직성 또한 손상시킬 것이다.”(P.59)

 

그의 견해를 현대 건축의 주류에 비추어 보면 매우 흥미롭다! 러스킨이 건축의 경제적 효용이 아니라 정신적 가치에 중점을 두고 있음을 새삼 드러낸다.

 

진실의 관점에서 러스킨은 건축의 올바른 재료는 자연에서 얻어진 것으로 국한한다.

진정한 건축의 색은 자연석의 색이다.”(P.70)

 

힘의 등불

당대 건축에 대한 러스킨의 비판적 인식은 힘의 결여를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당대 건축은 외관상 말쑥한 반면 소심하고 갑갑하고 빈곤하고 가련하다. 게다가 형식화된 기형, 움츠러든 정확성, 굶주린 정밀도, 옹졸한 인간혐오는 얼마나 해괴한 감각인지”(P.124)하며 절망적 탄식을 내뱉고 있다. 즉 예전 건축에 비해 당대 건축은 세련된 반면 본원적 힘을 상실하였다는 것이다.

 

건축에서 힘의 의미는 다음의 문장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정신에서 나온 배치와 지배로서 건축의 품위를 좌우하는 것은 그 정신적 힘의 표출이며, 또한 그 정도에 비례하여 숭고함도 높아지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건물은 인간이 수집한 뭔가를, 또는 인간이 지배한 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성공의 비결은 그가 무엇을 모으고 어떻게 지배할지를 아는 데 있다. 이것이 건축의 위대한 두 지성의 등불이다. 하나는 지상에서 행한 일들에 대해 그에 합당한 존경을 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일들에 대한 지배권이 인간에게 귀속되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P.90~91)

 

러스킨은 힘을 부여하는 그림자의 중요성에 주목한다. 흔히 두드러지는 겉면에 시각이 분산되기 쉽지만, 건축에 깊이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그림자라는 간과되지만 의미심장한 언급을 한다.

긍정적인 그림자의 활용은 화가보다 건축가에게 더 필수적이고 숭고한 것이라는 점이다......이런 까닭에 크기와 무게 다음으로, 건축의 힘은 그림자의 양에 의존한다고 할 수 있다......이 그림자의 실제적인 역할, 즉 인간의 일상에서 그것의 용도와 영향력은 일종의 인간적 공감을 표현하는 것이다.”(P.104~105)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비잔틴 건축의 종교적 고귀함에 대한 상찬을 아끼지 않으며, 이런 미학을 파악한 이가 거의 없음을 밝힌다.

 

아름다움의 등불

건축 또한 예술의 한 영역인 만큼 아름다움의 요소를 빼놓을 수 없다. 앞선 진실의 등불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러스킨은 아름다움을 자연과 연관시켜 파악한다. 그에게 인공미(人工美)는 진실한 아름다움이 아니다.

매우 아름다운 형태와 생각은 모두 자연물에서 직접 가져온 것이라는 점이다. 나아가 그것의 역 또한 기꺼이 가정하고 싶기에, 자연의 대상에서 오지 않은 형태는 추할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 있다.”(P.129)

 

기이하거나 이색적인 것은 신기할 수는 있지만 아름답지는 않다. 아름다움은 평범함에 내재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우리는 빈도에 의해 아름다움을 추론할 수 있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어떤 것이 흔하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그것이 아름답다고 추정해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가장 흔한 것이 가장 아름답다고 가정할 수 있다.”(P.131)

 

건축의 장식에서 중요한 부분인 조각에 대한 그의 견해도 독자적이다. 조각도 별개의 예술 영역으로서 미적 가치를 지니지만 그것이 건축과 구별될 정도로 튀는 것은 곤란하다고 본다. 가장 완벽한 조각은 가장 순수한 건축의 일부이어야 한다.”(P.164)

 

생명의 등불

건축에서 생명을 찾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와 같은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이 점을 러스킨이 모르지 않음에도 그는 일말의 거리낌 없이 생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희생, 진실, 힘과 아름다움이 반영된 건축에 생명이 빠질 리 없다. 건축은 인간의 지성과 감성을 그대로 투영한다.

 

모든 사물은 생명이 충만할수록 고귀하다.

건축은 인간 정신 외의 다른 생명체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기분 좋은 소리의 음악이라든지 흠잡을 데 없는 색의 그림과 같이 본질적으로 자신 안에 즐거운 것들을 구성하지도 못하는, 즉 자력으로 행동할 수 없는 물체이다. 때문에 건축은 자신의 위엄과 즐거움을 위해서는 상당부분 그 생산에 관여하는 인간의 지성을 생생하게 표현하는 수밖에 없다.”(P.197)

 

살아있는 건축의 확실하고 오해할 수 없는 징표가 나타나는데, 바로 지독한 성급함이다. 뭔가 이루지 못한 것을 향한 몸부림, 그것은 하위의 것들을 모두 경시한다. 그래서 아주 만족스럽다고 인정되는 것이나, 많은 시간과 신경을 필요로 하지만 그럴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는 것들 모두를 가차 없이 경멸하는 풍조가 생긴다.”(P.205)

 

생명력을 잃은 조각은 차가운 조각이다.

올바른 완성이란 의도한 인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고, 고도의 완성이란 좋은 의도를 생생한 인상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재현은 정교한 처리보다 거친 처리에 의해 실현되는 경우가 더 많다.”(P.222)

 

흥미로운 점은 예술에서 차용과 모방에 대하여 비교적 너그러운 점이다. 순전한 창작은 불가능하다는 인식일 것이다. 그가 보기에 더 나은 예술을 위해 필요하다면 차용과 모방을 할 수 있으며, 문제는 흥미를 끌지 못하는 차용과 무작위적인 모방”(P.201)에 있다고 한다.

 

기억의 등불

건축은 자체로 역사성을 지닌다. 잘 지어진 건축물은 수백 년도 거뜬히 견디어낸다. 오늘날은 내구연한이 짧을수록 오히려 각광받는다. 신축된 지 이십년만 경과해도 벌써 노후화라는 표현이 오르내린다. 재개발, 재건축이 환영받는다. 경제적 이해득실 때문에. 그 지역에, 건축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안중에 두지 않는다. 이런 현상을 러스킨이 목도했다면 분명 땅을 치며 통곡했을 것이다.

 

공공건물과 주거건물이 진정한 완벽성을 획득하려면 기억하거나 기념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에 동의한다면 건물들은 좀 더 견고하게 지어질 것이고, 다른 면에서는 결과적으로 장식들이 은유적, 역사적 함의를 담아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나는 오직 한 세대를 버티기 위한 집을 짓는 것은 그 사람의 악덕을 표시하는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내가 말하는 바는, 정말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았다면 그들의 집은 신전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감히 훼손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안에서 사는 것만으로도 우리 자신을 성스럽게 할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P.232~233)

 

우리가 의도하고 계획한 좋은 쓸모가 동시대인을 넘어 우리 인생여정의 계승자에게 전해지지 않는다면, 이 지상에서 우리의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없다. 신은 우리에게 우리의 삶 동안 이 땅을 빌려주셨다. 이는 위대한 신탁상속이다. 우리 뒤에 올 사람들도 마찬가지의 권리를 가진다.”(P.239)

 

건물의 가장 위대한 영광은 건물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에 달려 있고 말하고자 하는 바의 울림과 엄밀한 관찰의 깊이에 달려 있으며, 또한 찬성이나 비난이 교차하더라도 인간애의 물결로 오랫동안 씻긴 그 벽을 보며 우리가 느끼는 불가사의한 공감에 달려 있다.

우리가 기대하는 건축의 진정한 빛과 색과 고귀함은 시간이라는 저 황금의 얼룩 안에 있다.”(P.240~241)

 

제아무리 잘 관리해도 건축물은 서서히 소멸될 운명에 처해 있다. 여기서 복원에 대한 요구가 등장한다. 듣자하니 이탈리아에서는 고대 로마의 유적지에 인공적 수리와 복원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세월의 풍화 자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 현상이라며! 반면 우리의 경우는 없는 건축물도 만들어낼 판이다. 진정한 문화적 고민의 결론이라기보다 상업적 고려의 흔적에 가까우리라. 화재로 소실된 숭례문에 대한 미약한 복원 논쟁을 기억한다면 여기에 대한 러스킨의 일침을 듣자.

복원은 건물에 가해질 수 있는 가장 완전한 파괴를 의미한다. 어떤 잔여물도 거두어들일 수 없는 파괴다. 더불어 파괴된 작품에 대해서 거짓된 묘사를 하는 것과 같다. 건축에서 언젠가 위대하고 아름다웠던 것을 복구하는 것은 마치 죽은 자를 깨우는 것처럼, 불가능하다.”(P.248~249)

 

복종의 등불

러스킨은 대뜸 자유를 부정하며, 오히려 복종을 높이 평가한다. 그는 자유주의자가 아니며 전체주의자였단 말인가? 오해의 소지를 살만한 발언을 그는 왜 하는 것일까?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당대는 자유방임주의가 기세등등하게 세력을 떨치던 시기였다. 마음대로 하게 그대로 내버려 두면 만사가 잘 처리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laissez-faire . 러스킨은 자유방임의 폐해를 예견하고 있다. 과도한 자유는 곧 무질서에 다름 아니다. 규율된 자유, 그것을 복종으로 이해하는 게 아닐까?

 

가장 적당하고 진실한 이름은 바로 복종이다. 복종은 실제로 자유를 토대로 한다. 그렇지 않다면 단순한 예속일 뿐이다. 자유가 주어질 때 복종은 더 완벽하다.”(P.256)

 

무질서라는 것은 질병에 상응하는 동의어다. 반면 명예와 아름다움의 증가는 개성보다는 오히려 절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P.257)

 

예술에서 개성은 중요한 미덕이지만, 지고의 가치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무수한 예술가와 예술작품이 범람하는 시대에서 일단 주목받기 위한 용이한 방편은 튀어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예술성과는 다른 수준이다.

 

오늘날의 건축가들은 원형성의 본질과 의미에 대해 그리고 그를 구성하는 모든 것에 대해 놀랄 만한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자신만의 위상이나 특이성을 위해 이러한 변화가 추구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튀기 위해 언어의 규칙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위반 없이는 언어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피할 수 없고 계산되지 않은 빛나는 노력의 결과다.”(P.260)

 

러스킨의 조언은 오히려 우리 시대에 더 적합하다. 대중은 기이하고 이색적이며 신기한 것에 열광한다. 비록 찰나적이지만. 그것이 인기로 포장되고 상업적 가치는 높아진다. 대중예술은 물론 순수예술도 점차 경박단소에 물든 지 오래다.

 

 

내용에 대한 소회가 다소 장황해져 버렸다. 이는 어쩔 수 없다. 그만큼 존 러스킨이 제시하고 주장하는 견해가 신선하면서 재기발랄하면서도 깊은 지혜를 품고 있다. 건축 비평을 빙자한 인간도덕론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이 책의 본령이라 할 러스킨 자신이 그린 유럽의 초기 고딕과 르네상스 건축과 건축 장식 도판 및 이에 대한 분석과 설명도 분명 흥미진진하다. 불행히도 내게는 이를 받아들이고 음미하며 감상할 식견이 부족하다.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사물에 대한 언급은 언제나 공허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대신 건축을 기본으로 하지만 사회 전반에 확장하여 적용할 수 있는 그의 일곱 등불은 남다른 관심이 끌린다. 불과 서른 살의 이립(而立)에 그는 후반생의 사상적 기초를 이미 확고히 갖추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는 결코 우연히 탄생한 것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러스킨의 발언 중 유독 내 마음을 뜨끔하게 하는 구절이 있다. 비단 나 외에도 여러 사람에게도 해당될 것이다.

 

밥벌이를 위해 해야 하는 일이 있다. 그리고 그 일은 열심히 해야 한다. 우리의 기쁨을 위해 하는 일은 다른 일이며, 그 또한 마음을 다해서 해야 하는 일이다. 대강 하는 게 아니라 의지로 하는 일이다.”(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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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찬가 - 한권의시 59
노발리스 / 태학당 / 199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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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노발리스의 <푸른 꽃> 외에도 시 작품이 번역 출간된 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겨우 구해서 읽어보게 되었는데, 목차에서부터 대략 난감이었다. 노발리스의 시선집인줄 알고 있었는데, <밤의 찬가> 달랑 한 편만 수록되어 있을 줄이야, 게다가 이 시가 장시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소설을 통해 작가가 녹록치 않음을 알고 있었지만, 시는 정말 대략 난감이다. 가뜩이나 상징성이 풍부한 시인답게 종횡무진 현란한 표현을 구사하면 정서의 폭과 깊이를 넘나든다. 빛과 어둠의 대비 정도만 눈에 들어올 뿐. 할 수 없이 해설의 도움을 받고 재독해 보니 대략적이나마 시의 구조 내지 미약하나마 시인의 시적 의도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노발리스의 삶에서 한 여성 조피 폰 퀸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첫사랑이자 약혼녀인 그녀의 때이른 죽음은 어찌보면 노발리스의 요절을 예고한 것이 아닐른지. 그녀의 죽음 당시 그가 받은 정신적 충격의 크기와 깊이에 대한 일화는 이를 알려준다.

 

<밤의 찬가>는 전체 6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4찬가와 제5찬가의 분량이 상대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 표제와 같이 을 찬양하고 있다. 낭만파에서 밤은 특별한 지위를 갖는 소재다. 낮의 환함, 명징성, 이성이 전시대의 고전주의와 계몽주의를 지칭한다면, 밤의 어둠과 모호함, 감성은 바로 낭만주의의 정신이다.

 

1찬가는 빛의 찬미로 시작한다. “오직 빛이 있는 곳에 풍만한 세계의 경이로운 영광이 계시된다.” 찬미는 바로 밤으로 향한다. “나는 스스로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성스럽고 신비로운 밤으로 향한다.” 이제 시인은 본격적으로 밤에 대한 찬미를 아끼지 않는다. 그는 빛이 초라하고 어리석다고 하며, 낮과의 작별을 기쁘다고 표현한다.

 

2찬가는 잠을 노래한다. 밤은 잠과 불가분의 관계다.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밤의 사도인 성스러운 잠이 수행하는 역할과 그 의의를.

 

밤의 기쁨, 낙원의 졸음이 엄습하자 시인의 슬픔은 어느덧 사라져버리고 그곳에 기쁨의 눈물만이 흐른다. “그것은 유일한, 첫꿈이었지.” 이렇게 제3찬가는 잠에서 꿈으로 나아간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밤이 끝나고 아침이 되면 시인은 잠에서, 그리고 꿈에서 깨어나게 된다. 애인이 부재한 현실로, 기쁨과 즐거움을 기대할 수 없는 세상으로. 시인은 중얼거린다. “밤의 안식처인 신세계를 쳐다 본 자라면 누구나, 이 현세상에 돌아오지 않으리,” 이렇게 제4찬가는 죽음을 예언한다. 화려한 허상의 빛이 아니라 고귀하고 사랑스런 의미를 부여한그리고 어머니처럼 잉태하고 은혜를 베풀어 주는 밤의 실상으로. 영원한 밤과 어둠은 곧 죽음이 아니겠는가.

시인은 이제

난 자유로운 몸이 되어

사랑하는 이의 품에

안겨 있으리.“

 

시인은 이제

내가 죽음의 싱싱한 흐름을

느끼면

......

그리고 밤엔

성스러운 정열에 묻혀 죽으리.“

 

가장 긴 제5찬가는 역사와 종교와 철학의 혼합체에 가깝다. 에두르지만 명백하게 서양의 희랍 문명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노래한다. 시인은 예수를 통하여 개인의 죽음을 역사적 종교적 차원으로 승화시키려고 하는 듯하다.

이제 우리는 영원히 살고자

그들에게 따라가네.

 

사랑하면서 믿는 자, 이제

어느 무덤 가에서도

고통스럽게 울지는 않으리.“

 

6찬가는 유일하게 소제목이 주어져 있다. <죽음에의 동경>이라는.

밤의 영원함을 찬양하고

잠의 영원함을 찬양하는 시인이 가야할 곳은 이미 정해져 있다. 바로 아버님의 집이다. 불안한 동경과 감미로운 전율을 품고 시인은 고향으로의 여정을 시작하려고 한다.

무엇이 우리의 고향 가는 길을 막을까.

사랑스런 사람들 이미 오래 전에 인식하는데,

그녀의 무덤은 우리 생의 편력이 끝나는 곳,“

 

시의 형식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지만, 이 작품은 언뜻 보아도 자유로운 산문형식임이 두드러진다. 4찬가 후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운문체가 등장할 정도로. 즉 전반부에는 산문이 후반부에는 운문이 우세한 표현형식을 이룬다.

 

밤의 찬가는 자칫 ()의 찬가로 오독될 여지가 농후하다. 시적 내용도 결국 밤을 죽음과 연계시키고 있지 않은가. 이는 건강한 낭만이 아닌 후대의 퇴폐주의 내지 허무주의로 변질될 위험성을 태생적으로 내포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밤의 찬가>와 거의 비슷한 기간에 쓰여진 <푸른 꽃>과는 성향의 차가 크다. 아무래도 율리와 새로 시작한 사랑의 영향이 분명 없지 않을 것이다.

 

백여 면의 얄팍한 시집, 게다가 시의 원문도 수록되어 있어 실질적 분량은 그다지 많지 않다. 덕분에 삼독이 가능했다. 애석하게도 이 책은 절판되었다. 범우사에서 나온 <푸른 꽃> 번역본 에는 소설 외에 시로서 이 <밤의 찬가><성가>도 같이 수록되어 있다. 노발리스의 시 세계를 접하고자 하는 이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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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1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발리스 밤의 찬가를 읽고 싶어 책을 찾는데 정보도 별로 없고 도서도 현재 구매 가능한게 없네요~ㅠ 올리신 댓글이나마 잘 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성근대나무 2024-02-13 15:27   좋아요 0 | URL
http://aladin.kr/p/yPjbA

댓글 감사합니다. 그리고 위 링크의 책에 ‘밤의 찬가‘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푸른 꽃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6
노발리스 지음, 김재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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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문학사에서 낭만파 운동은 오성 만능의 계몽주의, 따라서 고전주의와도 대항하여 감정과 공상의 주체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 파의 시인들은 셰익스피어와 괴테를 숭배했고, 즐겨 조국 독일의 중세에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고전주의의 형식미에 대항하여 서정적 및 음악적 미를 존중했고, 형식의 미완성 따위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따라서 공상이 자유롭게 활약할 수 있는 동화의 형식을 즐겨 사용했다.” <세계문학사 작은사전(김희보 편저)>

 

낭만파 작품 중에서 위와 같은 특성을 가장 잘 대표할 수 있는 작품을 하나 꼽는다면 바로 <푸른 꽃>이 될 것이다.

 

스물아홉 해의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노발리스에게는 한 편의 장편소설을 완성시킬만한 시간조차도 부족하였다. <푸른 꽃>은 제2부의 첫 장까지만 마치고 작가의 죽음으로 영원한 미완성이 되고 말았다.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이 미완성임에도 불구하고 또는 미완성이기에 후대에 더욱 각광받았던 것과 같은 평가를 노발리스의 이 작품도 누린다. 미완성임에도 낭만파의 전형적인 요소가 내포되어 있는 성공적인 작품으로서.

 

이 작품의 원제는 <하인리히 폰 오프터딩겐>으로서, 작품의 주인공 이름이기도 하다. 노발리스는 13세기 초의 유명한 궁정 연애가수 즉, 민네징거의 이름을 작품명으로 그대로 가져왔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도 형식적이지만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과거의 역사적 소재에 즐겨 관심을 기울이는 것 또한 낭만주의의 특징이다.

 

민네징거는 시인 겸 음악가이다. 대중가요로 치자면 싱어송라이터라고 하겠다. 예술이 분화되기 이전 시와 음악은 분리될 수 없는 존재였다. 하인리히는 곧 작가 자신의 분신이다. 작가 또한 작중 곳곳에 여러 편의 시와 노래를 삽입하여 스스로 민네징거임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시와 음악은 계몽주의와 산업혁명으로 점차 합리성과 객관성이 증대되는 시대적 현상에서 인간 본연의 고유성을 수호하고자 하는 본능적 위기의식의 발로일 것이다.

 

작품의 형식과 관련하여 우선 이 작품은 한 편의 동화에 가깝다. 여기서 동화라 함은 국내적 개념이 아닌 독일의 전통적 메르헨의 의미에서다. 푸른 꽃에 대한 꿈을 꾸는데서 시작하여 어머니와 함께 외가인 아우크스부르크로의 여행 출발. 시인 클링스오르 그리고 그의 딸인 마틸데와의 만남. 그녀와의 운명적인 사랑과 결혼 약속. 모든 것이 너무나 평온하고 아름답게 전개되어 간다. 세상이 주인공에게 무한한 호의를 품은 듯하다. 후대의 아이헨도르프와 슈티프터가 노발리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유추할 수 있다. 사회와 세계에 대한 갈등의 부재와 밝고 경쾌한 발걸음, 이것이 작품에 사실적 느낌이 아닌 동화적 성격을 부여한다. 게다가 제1부의 제9장은 자체로 완결성을 지닌 동화가 아닌가. 더욱이 작가는 제2부에서 작심하고 이 작품의 동화성을 극대화하려고 시도한 듯 보인다. 취아네와의 대화는 지극히 몽환적이다.

 

괴테는 빌헬름 마이스터를 통하여 교양소설 또는 성장소설의 전범을 구축하였다. 이전에 한 번 읽었지만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다시 한 번 재독을 검토 중이다. 괴테를 계승하기 위하여 또는 반발하는 차원에서 이후에 여러 편의 교양소설이 나왔는데, <푸른 꽃>은 광의로 보면 이 범주에 속한다. 노발리스는 다만 시의 의의에 보다 큰 비중을 두고 있어 과연 괴테와는 차이를 보이고 있어 낭만주의 작가다운 면모를 보이는 동시에 스스로가 시인임을 여실히 드러내 보인다.

 

하인리히가 어머니와의 여행을 통해서 만나고 듣고 겪게 되는 것은 좁은 고향의 영역을 벗어나 드넓은 세상으로의 인식의 확장을 의미한다.

 

그때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드넓은 세계와 자신과의 모든 관계를 한눈에 조망해 보면서, 세계를 통해 지금의 그가 있게 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앞으로 세계가 그에게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를 느꼈다. 그러면서 그는 예전에 세계에 대해 생각하면서 어렴풋이 느꼈던 모든 낯선 표상들과 자극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P.107)

 

상인, 기사, 동방의 여인, 광부, 은둔자 등 하인리히가 마주치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그에게 삶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상업을 통한 세상의 현실, 전쟁의 흥분과 슬픔, 광업과 역사를 통한 인간사의 진실을 깨닫는다. 게다가 등장인물은 모두가 시인이자 철학자라고 할 만하다.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시인 클링스오르와의 상면은 하인리히의 성장에서 화룡점정에 해당한다. 그에게서 참다운 시의 가치와 시인의 역할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다. 아마도 제2부의 구상은 보다 웅대하였을 것이다. 교육과 철학의 경계마저 거침없이 넘나들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는 명백히 포함되어 있다.

 

노발리스의 작품은 매우 상징적이다. 표제 자체가 이미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작품 곳곳에서 대수롭지 않게 표현되는 요소들이 개개마다 깊은 상징적 의미를 띠고 있어 표면적으로는 단순하게 여겨지지만 실제로 천천히 음미해 나가면 작가가 표현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고 숨은 의미를 찾기 위하여 멈칫거리다가는 작품 본래의 화창한 봄날과도 같은 묘미를 놓칠 우려가 있으니 유의할 필요가 있다.

 

노발리스에게 완전한 인간형은 참다운 시인이다. 그가 생각하는 시인은 동시에 음악가이며, 마법사이고, 예언자이자 성직자요 입법자이자 의사(P.39)이다. 고대의 신화에서와 같이. 클링스오르의 입을 통한 시와 시인에 대한 관점은 노발리스가 품고 있는 견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시라는 것은....무엇보다도 엄격한 예술로서 추구해야 하는 거야. 단순한 즐거움만을 위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시가 아니야. 시인이 하루 종일 이미지와 느낌을 찾아서 한가하게 돌아다녀야 하는 것은 아니야. 그건 오히려 아주 잘못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지. 순수한 열린 마음, 민활한 성찰력, 그리고 자신의 모든 능력을 생명력을 부여하는 활동으로 전환하여 계속 그렇게 유지시키는 것, 이것이 우리의 예술에 필수적인 것들이야.” (P.158~159)

 

1부 제9장의 묘한 동화는 다분히 상징적이다. 길고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지만, 통상적으로는 시와 사랑의 힘으로 차가운 합리성의 지배를 극복하고 평화를 구하여 빛나는 생명의 나라를 구현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 동화를 단독으로 보면 전체적 구도에서 생뚱맞게 보인다. 1부의 표제가 기대이고, 2부는 실현임을 상기해보면, 이상한 동화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2부가 미완성이기에 그 동화의 실현이 작품 내에서 완성되지 못했을 따름이다. 노발리스의 구상에 따르면 제2부는 하인리히가 세계를 편력하고 역사를 거슬러 오르며 인간계를 넘어 자연계마저 경험한 후 종내는 죽음의 세상마저 초탈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즉 작가는 진정한 시인과 시의 정신이 충만한 세계가 올바른 세상이자 지향해야 할 미래라고 보고 있다. 이것이 <푸른 꽃>이 못다 이룬 광대한 세계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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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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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상실과 단절, 그리고 소통의 작품이다. 책장을 덮으면서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한줄 소감이다.

 

사람은 나면서 죽는 순간까지 사회적 경계 내에서 타인과 교류 관계를 유지한다. 단독적 존재를 꿈꾸어도 이것이 불가능한 것은 사람 자체의 태생적 한계이다. 상호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감각 중 가장 대표적인 게 바로 시각과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시각은 정보 획득과 비언어적 소통의 수단이고, 언어는 자체로 의사소통의 전형이다. 시각 내지 언어 감각을 상실한다는 것은 단순한 감각의 부재가 아니다. 그것은 타인, 즉 나아가 사회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단절은 고립의 다른 표현이다. 타의에 의해 세상에 홀로 된 존재가 된다. 외부와의 주고받는 관계가 박탈당한다. 소외된 이는 내면세계로 침잠한다. 그는 추억을 반추한다. 그의 대화상대는 자기 자신이 된다. 불가피하게 독백의 형식을 취하게 된다. 혼잣말은 큰 소리를 낼 필요가 없다. 자신만 들을 수 있으면 된다. 들릴 듯 말 듯 나직한 그것이 이 소설의 주인공들의 목소리다.

 

몇 편 읽지 않았지만 - <몽고반점><바람이 분다, 가라> 정도 내게 한강의 작품은 관능이든 사건이든 극단으로 몰고 가는 아슬아슬함으로 기억된다. 활화산처럼 분출하지는 않지만 꾹꾹 눌러도 가라앉지 않는 감정의 꿈틀거림이 작품 전체에 배어있는. 그런 면에서 <희랍어 시간>의 서늘하고 나직함은 사뭇 의외로 다가왔다.

 

두 명의 주인공과 별다른 사건 없는 단촐한 전개, 감정의 기복이 없는 평면적 독백. 넋두리인 듯 반생을 반추하는 수기처럼 느릿느릿 화자는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독자 아닌 화자 자신에게. 그들은 상호교감을 갖지 않는다. 남자는 희랍어 강사로, 여자는 희랍어 수강생으로. 여백의 미가 두드러지는 한 폭의 한국화라고 하면 이상하겠지만, 활자들로 빼곡한 지면 대신 행간이 여유롭고 표현에 생략과 절제가 전면에 나서는 후반부는 특히 그러하다.

 

감각의 상실 못지않게, 아니 두 사람에게 그보다 더욱 절실했던 것은 인간관계의 상실이다. 남자는 청소년기 이후 독일에서 이민생활을 하였다. 암암리에 존재하는 인종적 차별은 그를 힘들고 쓸쓸하게 하였다. 언제나 주목받는 동양의 아이. 그는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주목받지 않는 존재가 될 수 있기를 갈망하였다. 소위 모국에 대한 근원적 그리움이라고 할까. 남자가 가족의 반대에도 어두워져가는 시력에도 불구하고 귀국한 연유는 일종의 수구초심(首丘初心)에 가깝다. 여자는 심리적 불안정으로 이혼을 겪고 아이의 양육권마저 남편에게 빼앗겼다. 여자의 언어 상실은 분명히 심인성이다. 낯선 언어에 대한 노출이 잃어버린 언어기능의 회복을 가져올 수 있다는 기대감, 그것은 곧 잃어버린 아이를 되찾기 위한 필수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고립과 단절의 사람 사이를 잇는 계기는 공감과 동정이다. 여자가 부상당한 남자의 집에서 그의 독백을 밤늦도록 들어주는 행동. 새벽에 집에 갔다가 아침에 다시 돌아온 행동. 그것은 소외당한 이들의 본능적 이끌림일 것이다. 버려지고 외톨이가 된 사람들이 서툴고 힘겹게나마 자신들의 끈을 새롭게 연결시키고자 하는 필사의 몸부림. 상대방의 따뜻한 체온에 대한 그리움. 그들의 애처로운 끌어안음은 존재론적 의미를 지니기에 관능의 울림이 느껴지지 않는다.

 

작가 한강은 이 작품을 쓰기 전 한동안 소위 슬럼프에 빠졌다고 한다. 글 쓰는 작가가 글을 쓸 수 없게 되는 상황, 그것은 곧 작중 인물처럼 소통의 도구를 잃어버린 것과 마찬가지의 경험이다. 작가 자신의 고해성사는 이렇게 이어진다.

 

말을 잃기 직전, 그녀는 어느 때보다 활달한 다변가였다. 어느 때보다 오래 글을 쓰지 못했다.”(P.56)

 

셀 수 없는 혀와 펜들로 수천 년 동안 너덜너덜해진 언어. 그녀자신의 혀와 펜으로 평생 동안 너널너덜하게 만든 언어.”(P.165)

 

이것은 힘겨운 작품이다. 작중 여자가 침묵의 질곡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러했듯이 작가 또한 어휘 하나, 문장 한 줄을 완성하기 위해 몸부림쳤을 것이다. 이전의 자신의 작법은 모두 제쳐두고 새로운 언어를 배우듯이 기초부터 천천히 하나하나씩 말이다. 출산의 두려움이자 신생(新生)의 고통이기도 하다.

 

작중 여자의 향후 삶의 전개 방향은 독자가 알 수 없다. 다만 이전과는 같지 않을 것임을 짐작할 뿐이다. 작가 한강에게 이 작품의 의의가 어떠할 지도 마찬가지다. 다변보다는 침묵이 두드러지고, 쏟아질 듯 넘실거림이 소박과 절제로 선회하였다. 이것이 작가의 문학 여정에서 일대 전환점이 될 것인가. 우연히 들렀던 한곳 휴식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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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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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가슴에 온통 먹먹한 감정이 뭉클거리는 것은 김애란이 만들어 낸 인물들의 한없는 막막함 탓이다. <침이 고인다> 이후 5, 그 동안 이 작가가 많은 변모를 겪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단순한 시간의 경과 또는 성숙이라는 진부한 표현만으로는 해명되지 않는 문학적 변화. 이것이 내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김애란의 세계가 맞단 말인가.

 

앞선 두 권의 작품집이 내게 남긴 김애란의 특성은 경쾌함과 싱싱함이었다. 중하층의 별 볼일 없는 서민들의 일상사를 그리면서도 결코 궁상맞다는 느낌을 주지 않고 바탕에 삶에 대한 근거 없는 낙관주의를 깔고 있는. 여기서도 앞선 특성의 흔적은 사뭇 남아있다. 작심하고 쓴다면 여전히 과거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을 테지만 그는 일부러 그 세계에서 떠나려고 한다.

 

작중 인물은 여전히 힘겹고 팍팍하다. 현실의 많은 사람들처럼 그네들의 삶도 여전히 밝은 전망이 비치지 않나 보다. 작가는 인물의 궁핍함을 정면으로 돌파하고자 한다. 경쾌한 발걸음으로 하지만 다부진 결의가 문장 곳곳에 드러난다. 제아무리 희망을 가지고 싶으나 현실은 녹록하지 않고 나날이 가라앉기만 한다. 따라서 그의 작품 분위기는 한결 잿빛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비관적 공기가 팽배하다.

 

작품집의 평론가도 언급했듯이 표제는 명백히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일반인은 알기 어려운 비행운(飛行雲)과 비교적 쉽게 다가오는 비행운(非幸運). 표제와 연결시키자면 작중 인물들은 모두 후자에 속하는 인물이다. 삶의 행로에서 운이 따라주지 않는 이들. 그들은 로또 당첨 같은 거창한 행운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지극히 평범하고 소박한 바램, 즉 남들처럼 보통 수준의 삶을 누리고 싶다는 정도의 행운이면 그들은 충분히 만족스럽다. 그렇지 않기에 그들은 비행운(非幸運)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비행운적 인물들이 사회 내에 그리고 주변에 점점 많아진다는데 있다. 사회적 양극화니 청년실업이니, 고용 없는 성장 등이 다 이를 지칭하는 용어들이다.

 

그들은 바로 여기에 정착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삶의 목표와 방향을 잃어버렸다. “수천 개의 표지판 아래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고아 같은 얼굴”(P.198, <하루의 축>)을 하고 있는 기옥 씨처럼. 갈 수도 안갈 수도 없는 엉거주춤한 태도의 처량한 처지, 그러다가 결국은 마지못해 쫓겨나는 사람들.

 

그렇게 오래 여행 가방 옆에 있자니 어쩐지 우리가 떠나온 사람 떠나갈 사람이 아니라 멀리 쫓겨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꽤 오래전부터 그렇게 커다란 가방을 이고 다녔던 것 같은 기분도.”(P.244, <큐티클>)

 

여건이 그러하다 보니 그네들의 인간관계도 악화일로를 치닫는다. 대학선배에게 속임과 이용을 당하고, 사귀던 남자친구와는 헤어지고, 옛 애인에게는 사기를 당한다. 가족과 친지들마저 그의 곁을 떠난다. 고독과 불행은 서로를 부추겨 악순환으로 몰고 간다.

 

그네들의 현재 상황을 개인적 결함으로 귀인 시키는 것은 무책임한 소산이다. 그네들도 못지않게 부지런하고 총명하고 열심히 살았다.

 

부푼 꿈을 안고 대학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저는 제가 뭔가 창의적이고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며 살게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보시다시피 지금 이게 나예요. 누군가 저한테 그래서 열심히 살았느냐 물어보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쩌다, , 이런 사람이 됐는지 모르겠어요.”(P.316, <서른>)

 

여기에 항변의 목소리가 들린다. 다단계에 빠져서 살아남기 위해 학원 제자를 사지로 팔아넘긴 나이 서른의 여성.

 

수록된 여덟 편 중 <너의 여름은 어떠니>, <큐티클>, <호텔 니약 따>는 그래도 비교적 과거 김애란의 풍에 가깝다. 나머지 작품에서는 작가의 변화의 방향과 정도를 예감케 한다. 연령적 스펙트럼과 표현의 깊이와 강도가 훨씬 더해지고 있다. 게다가 개인적, 주변적 관심을 유지하면서도 관찰의 눈을 사회 전반에까지 직접적으로 아우르고 있어 작가의 또 다른 일면으로의 전환도 추단케 한다.

 

개인적으로 <물속 골리앗><서른>이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두 작품 모두 주인공이 처절할 정도로 나락에 떨어지는 비극적 상황에 맞닥뜨린다. 전자의 비극성이 유례없는 폭우라는 비일상성을 배경으로 하기에 현실미는 덜한 반면 극도의 환상성이 오히려 소년의 고통과 비극을 생생하게 부각시킨다. 후자는 극히 간결하고 나직한 어조로 체험을 수기화한 것인 양 누구나 빠져들기 쉬운 불법 다단계 업종의 위험성과 폭력성을 고발하여 사회구조적 문제와 결부시키고 있다. 일종의 고발문학이라고도 할 정도로 평범한 젊은 여성이 지옥의 밑바닥에 떨어지는 과정이 절제된 톤으로 낮은 목소리로 읊조려지고 있다.

 

서양 신화에서 판도라의 상자에 남은 것은 희망이라고 한다. 희망이 있다면, 기대할 수 있다면 눈앞의 불행을 감내하고 헤쳐 나갈 용기를 낼 수 있다. 희망이 없다면 그때는 기약할 수 없는 행복을 기다린다는 것은 몹시 지겨울 것이다. 삶이 말이다. 그걸 알기에 독자의 가슴은 먹먹해질 수밖에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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