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꽃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6
노발리스 지음, 김재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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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문학사에서 낭만파 운동은 오성 만능의 계몽주의, 따라서 고전주의와도 대항하여 감정과 공상의 주체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 파의 시인들은 셰익스피어와 괴테를 숭배했고, 즐겨 조국 독일의 중세에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고전주의의 형식미에 대항하여 서정적 및 음악적 미를 존중했고, 형식의 미완성 따위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따라서 공상이 자유롭게 활약할 수 있는 동화의 형식을 즐겨 사용했다.” <세계문학사 작은사전(김희보 편저)>

 

낭만파 작품 중에서 위와 같은 특성을 가장 잘 대표할 수 있는 작품을 하나 꼽는다면 바로 <푸른 꽃>이 될 것이다.

 

스물아홉 해의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노발리스에게는 한 편의 장편소설을 완성시킬만한 시간조차도 부족하였다. <푸른 꽃>은 제2부의 첫 장까지만 마치고 작가의 죽음으로 영원한 미완성이 되고 말았다.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이 미완성임에도 불구하고 또는 미완성이기에 후대에 더욱 각광받았던 것과 같은 평가를 노발리스의 이 작품도 누린다. 미완성임에도 낭만파의 전형적인 요소가 내포되어 있는 성공적인 작품으로서.

 

이 작품의 원제는 <하인리히 폰 오프터딩겐>으로서, 작품의 주인공 이름이기도 하다. 노발리스는 13세기 초의 유명한 궁정 연애가수 즉, 민네징거의 이름을 작품명으로 그대로 가져왔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도 형식적이지만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과거의 역사적 소재에 즐겨 관심을 기울이는 것 또한 낭만주의의 특징이다.

 

민네징거는 시인 겸 음악가이다. 대중가요로 치자면 싱어송라이터라고 하겠다. 예술이 분화되기 이전 시와 음악은 분리될 수 없는 존재였다. 하인리히는 곧 작가 자신의 분신이다. 작가 또한 작중 곳곳에 여러 편의 시와 노래를 삽입하여 스스로 민네징거임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시와 음악은 계몽주의와 산업혁명으로 점차 합리성과 객관성이 증대되는 시대적 현상에서 인간 본연의 고유성을 수호하고자 하는 본능적 위기의식의 발로일 것이다.

 

작품의 형식과 관련하여 우선 이 작품은 한 편의 동화에 가깝다. 여기서 동화라 함은 국내적 개념이 아닌 독일의 전통적 메르헨의 의미에서다. 푸른 꽃에 대한 꿈을 꾸는데서 시작하여 어머니와 함께 외가인 아우크스부르크로의 여행 출발. 시인 클링스오르 그리고 그의 딸인 마틸데와의 만남. 그녀와의 운명적인 사랑과 결혼 약속. 모든 것이 너무나 평온하고 아름답게 전개되어 간다. 세상이 주인공에게 무한한 호의를 품은 듯하다. 후대의 아이헨도르프와 슈티프터가 노발리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유추할 수 있다. 사회와 세계에 대한 갈등의 부재와 밝고 경쾌한 발걸음, 이것이 작품에 사실적 느낌이 아닌 동화적 성격을 부여한다. 게다가 제1부의 제9장은 자체로 완결성을 지닌 동화가 아닌가. 더욱이 작가는 제2부에서 작심하고 이 작품의 동화성을 극대화하려고 시도한 듯 보인다. 취아네와의 대화는 지극히 몽환적이다.

 

괴테는 빌헬름 마이스터를 통하여 교양소설 또는 성장소설의 전범을 구축하였다. 이전에 한 번 읽었지만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다시 한 번 재독을 검토 중이다. 괴테를 계승하기 위하여 또는 반발하는 차원에서 이후에 여러 편의 교양소설이 나왔는데, <푸른 꽃>은 광의로 보면 이 범주에 속한다. 노발리스는 다만 시의 의의에 보다 큰 비중을 두고 있어 과연 괴테와는 차이를 보이고 있어 낭만주의 작가다운 면모를 보이는 동시에 스스로가 시인임을 여실히 드러내 보인다.

 

하인리히가 어머니와의 여행을 통해서 만나고 듣고 겪게 되는 것은 좁은 고향의 영역을 벗어나 드넓은 세상으로의 인식의 확장을 의미한다.

 

그때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드넓은 세계와 자신과의 모든 관계를 한눈에 조망해 보면서, 세계를 통해 지금의 그가 있게 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앞으로 세계가 그에게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를 느꼈다. 그러면서 그는 예전에 세계에 대해 생각하면서 어렴풋이 느꼈던 모든 낯선 표상들과 자극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P.107)

 

상인, 기사, 동방의 여인, 광부, 은둔자 등 하인리히가 마주치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그에게 삶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상업을 통한 세상의 현실, 전쟁의 흥분과 슬픔, 광업과 역사를 통한 인간사의 진실을 깨닫는다. 게다가 등장인물은 모두가 시인이자 철학자라고 할 만하다.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시인 클링스오르와의 상면은 하인리히의 성장에서 화룡점정에 해당한다. 그에게서 참다운 시의 가치와 시인의 역할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다. 아마도 제2부의 구상은 보다 웅대하였을 것이다. 교육과 철학의 경계마저 거침없이 넘나들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는 명백히 포함되어 있다.

 

노발리스의 작품은 매우 상징적이다. 표제 자체가 이미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작품 곳곳에서 대수롭지 않게 표현되는 요소들이 개개마다 깊은 상징적 의미를 띠고 있어 표면적으로는 단순하게 여겨지지만 실제로 천천히 음미해 나가면 작가가 표현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고 숨은 의미를 찾기 위하여 멈칫거리다가는 작품 본래의 화창한 봄날과도 같은 묘미를 놓칠 우려가 있으니 유의할 필요가 있다.

 

노발리스에게 완전한 인간형은 참다운 시인이다. 그가 생각하는 시인은 동시에 음악가이며, 마법사이고, 예언자이자 성직자요 입법자이자 의사(P.39)이다. 고대의 신화에서와 같이. 클링스오르의 입을 통한 시와 시인에 대한 관점은 노발리스가 품고 있는 견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시라는 것은....무엇보다도 엄격한 예술로서 추구해야 하는 거야. 단순한 즐거움만을 위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시가 아니야. 시인이 하루 종일 이미지와 느낌을 찾아서 한가하게 돌아다녀야 하는 것은 아니야. 그건 오히려 아주 잘못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지. 순수한 열린 마음, 민활한 성찰력, 그리고 자신의 모든 능력을 생명력을 부여하는 활동으로 전환하여 계속 그렇게 유지시키는 것, 이것이 우리의 예술에 필수적인 것들이야.” (P.158~159)

 

1부 제9장의 묘한 동화는 다분히 상징적이다. 길고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지만, 통상적으로는 시와 사랑의 힘으로 차가운 합리성의 지배를 극복하고 평화를 구하여 빛나는 생명의 나라를 구현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 동화를 단독으로 보면 전체적 구도에서 생뚱맞게 보인다. 1부의 표제가 기대이고, 2부는 실현임을 상기해보면, 이상한 동화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2부가 미완성이기에 그 동화의 실현이 작품 내에서 완성되지 못했을 따름이다. 노발리스의 구상에 따르면 제2부는 하인리히가 세계를 편력하고 역사를 거슬러 오르며 인간계를 넘어 자연계마저 경험한 후 종내는 죽음의 세상마저 초탈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즉 작가는 진정한 시인과 시의 정신이 충만한 세계가 올바른 세상이자 지향해야 할 미래라고 보고 있다. 이것이 <푸른 꽃>이 못다 이룬 광대한 세계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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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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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상실과 단절, 그리고 소통의 작품이다. 책장을 덮으면서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한줄 소감이다.

 

사람은 나면서 죽는 순간까지 사회적 경계 내에서 타인과 교류 관계를 유지한다. 단독적 존재를 꿈꾸어도 이것이 불가능한 것은 사람 자체의 태생적 한계이다. 상호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감각 중 가장 대표적인 게 바로 시각과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시각은 정보 획득과 비언어적 소통의 수단이고, 언어는 자체로 의사소통의 전형이다. 시각 내지 언어 감각을 상실한다는 것은 단순한 감각의 부재가 아니다. 그것은 타인, 즉 나아가 사회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단절은 고립의 다른 표현이다. 타의에 의해 세상에 홀로 된 존재가 된다. 외부와의 주고받는 관계가 박탈당한다. 소외된 이는 내면세계로 침잠한다. 그는 추억을 반추한다. 그의 대화상대는 자기 자신이 된다. 불가피하게 독백의 형식을 취하게 된다. 혼잣말은 큰 소리를 낼 필요가 없다. 자신만 들을 수 있으면 된다. 들릴 듯 말 듯 나직한 그것이 이 소설의 주인공들의 목소리다.

 

몇 편 읽지 않았지만 - <몽고반점><바람이 분다, 가라> 정도 내게 한강의 작품은 관능이든 사건이든 극단으로 몰고 가는 아슬아슬함으로 기억된다. 활화산처럼 분출하지는 않지만 꾹꾹 눌러도 가라앉지 않는 감정의 꿈틀거림이 작품 전체에 배어있는. 그런 면에서 <희랍어 시간>의 서늘하고 나직함은 사뭇 의외로 다가왔다.

 

두 명의 주인공과 별다른 사건 없는 단촐한 전개, 감정의 기복이 없는 평면적 독백. 넋두리인 듯 반생을 반추하는 수기처럼 느릿느릿 화자는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독자 아닌 화자 자신에게. 그들은 상호교감을 갖지 않는다. 남자는 희랍어 강사로, 여자는 희랍어 수강생으로. 여백의 미가 두드러지는 한 폭의 한국화라고 하면 이상하겠지만, 활자들로 빼곡한 지면 대신 행간이 여유롭고 표현에 생략과 절제가 전면에 나서는 후반부는 특히 그러하다.

 

감각의 상실 못지않게, 아니 두 사람에게 그보다 더욱 절실했던 것은 인간관계의 상실이다. 남자는 청소년기 이후 독일에서 이민생활을 하였다. 암암리에 존재하는 인종적 차별은 그를 힘들고 쓸쓸하게 하였다. 언제나 주목받는 동양의 아이. 그는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주목받지 않는 존재가 될 수 있기를 갈망하였다. 소위 모국에 대한 근원적 그리움이라고 할까. 남자가 가족의 반대에도 어두워져가는 시력에도 불구하고 귀국한 연유는 일종의 수구초심(首丘初心)에 가깝다. 여자는 심리적 불안정으로 이혼을 겪고 아이의 양육권마저 남편에게 빼앗겼다. 여자의 언어 상실은 분명히 심인성이다. 낯선 언어에 대한 노출이 잃어버린 언어기능의 회복을 가져올 수 있다는 기대감, 그것은 곧 잃어버린 아이를 되찾기 위한 필수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고립과 단절의 사람 사이를 잇는 계기는 공감과 동정이다. 여자가 부상당한 남자의 집에서 그의 독백을 밤늦도록 들어주는 행동. 새벽에 집에 갔다가 아침에 다시 돌아온 행동. 그것은 소외당한 이들의 본능적 이끌림일 것이다. 버려지고 외톨이가 된 사람들이 서툴고 힘겹게나마 자신들의 끈을 새롭게 연결시키고자 하는 필사의 몸부림. 상대방의 따뜻한 체온에 대한 그리움. 그들의 애처로운 끌어안음은 존재론적 의미를 지니기에 관능의 울림이 느껴지지 않는다.

 

작가 한강은 이 작품을 쓰기 전 한동안 소위 슬럼프에 빠졌다고 한다. 글 쓰는 작가가 글을 쓸 수 없게 되는 상황, 그것은 곧 작중 인물처럼 소통의 도구를 잃어버린 것과 마찬가지의 경험이다. 작가 자신의 고해성사는 이렇게 이어진다.

 

말을 잃기 직전, 그녀는 어느 때보다 활달한 다변가였다. 어느 때보다 오래 글을 쓰지 못했다.”(P.56)

 

셀 수 없는 혀와 펜들로 수천 년 동안 너덜너덜해진 언어. 그녀자신의 혀와 펜으로 평생 동안 너널너덜하게 만든 언어.”(P.165)

 

이것은 힘겨운 작품이다. 작중 여자가 침묵의 질곡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러했듯이 작가 또한 어휘 하나, 문장 한 줄을 완성하기 위해 몸부림쳤을 것이다. 이전의 자신의 작법은 모두 제쳐두고 새로운 언어를 배우듯이 기초부터 천천히 하나하나씩 말이다. 출산의 두려움이자 신생(新生)의 고통이기도 하다.

 

작중 여자의 향후 삶의 전개 방향은 독자가 알 수 없다. 다만 이전과는 같지 않을 것임을 짐작할 뿐이다. 작가 한강에게 이 작품의 의의가 어떠할 지도 마찬가지다. 다변보다는 침묵이 두드러지고, 쏟아질 듯 넘실거림이 소박과 절제로 선회하였다. 이것이 작가의 문학 여정에서 일대 전환점이 될 것인가. 우연히 들렀던 한곳 휴식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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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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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가슴에 온통 먹먹한 감정이 뭉클거리는 것은 김애란이 만들어 낸 인물들의 한없는 막막함 탓이다. <침이 고인다> 이후 5, 그 동안 이 작가가 많은 변모를 겪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단순한 시간의 경과 또는 성숙이라는 진부한 표현만으로는 해명되지 않는 문학적 변화. 이것이 내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김애란의 세계가 맞단 말인가.

 

앞선 두 권의 작품집이 내게 남긴 김애란의 특성은 경쾌함과 싱싱함이었다. 중하층의 별 볼일 없는 서민들의 일상사를 그리면서도 결코 궁상맞다는 느낌을 주지 않고 바탕에 삶에 대한 근거 없는 낙관주의를 깔고 있는. 여기서도 앞선 특성의 흔적은 사뭇 남아있다. 작심하고 쓴다면 여전히 과거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을 테지만 그는 일부러 그 세계에서 떠나려고 한다.

 

작중 인물은 여전히 힘겹고 팍팍하다. 현실의 많은 사람들처럼 그네들의 삶도 여전히 밝은 전망이 비치지 않나 보다. 작가는 인물의 궁핍함을 정면으로 돌파하고자 한다. 경쾌한 발걸음으로 하지만 다부진 결의가 문장 곳곳에 드러난다. 제아무리 희망을 가지고 싶으나 현실은 녹록하지 않고 나날이 가라앉기만 한다. 따라서 그의 작품 분위기는 한결 잿빛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비관적 공기가 팽배하다.

 

작품집의 평론가도 언급했듯이 표제는 명백히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일반인은 알기 어려운 비행운(飛行雲)과 비교적 쉽게 다가오는 비행운(非幸運). 표제와 연결시키자면 작중 인물들은 모두 후자에 속하는 인물이다. 삶의 행로에서 운이 따라주지 않는 이들. 그들은 로또 당첨 같은 거창한 행운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지극히 평범하고 소박한 바램, 즉 남들처럼 보통 수준의 삶을 누리고 싶다는 정도의 행운이면 그들은 충분히 만족스럽다. 그렇지 않기에 그들은 비행운(非幸運)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비행운적 인물들이 사회 내에 그리고 주변에 점점 많아진다는데 있다. 사회적 양극화니 청년실업이니, 고용 없는 성장 등이 다 이를 지칭하는 용어들이다.

 

그들은 바로 여기에 정착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삶의 목표와 방향을 잃어버렸다. “수천 개의 표지판 아래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고아 같은 얼굴”(P.198, <하루의 축>)을 하고 있는 기옥 씨처럼. 갈 수도 안갈 수도 없는 엉거주춤한 태도의 처량한 처지, 그러다가 결국은 마지못해 쫓겨나는 사람들.

 

그렇게 오래 여행 가방 옆에 있자니 어쩐지 우리가 떠나온 사람 떠나갈 사람이 아니라 멀리 쫓겨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꽤 오래전부터 그렇게 커다란 가방을 이고 다녔던 것 같은 기분도.”(P.244, <큐티클>)

 

여건이 그러하다 보니 그네들의 인간관계도 악화일로를 치닫는다. 대학선배에게 속임과 이용을 당하고, 사귀던 남자친구와는 헤어지고, 옛 애인에게는 사기를 당한다. 가족과 친지들마저 그의 곁을 떠난다. 고독과 불행은 서로를 부추겨 악순환으로 몰고 간다.

 

그네들의 현재 상황을 개인적 결함으로 귀인 시키는 것은 무책임한 소산이다. 그네들도 못지않게 부지런하고 총명하고 열심히 살았다.

 

부푼 꿈을 안고 대학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저는 제가 뭔가 창의적이고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며 살게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보시다시피 지금 이게 나예요. 누군가 저한테 그래서 열심히 살았느냐 물어보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쩌다, , 이런 사람이 됐는지 모르겠어요.”(P.316, <서른>)

 

여기에 항변의 목소리가 들린다. 다단계에 빠져서 살아남기 위해 학원 제자를 사지로 팔아넘긴 나이 서른의 여성.

 

수록된 여덟 편 중 <너의 여름은 어떠니>, <큐티클>, <호텔 니약 따>는 그래도 비교적 과거 김애란의 풍에 가깝다. 나머지 작품에서는 작가의 변화의 방향과 정도를 예감케 한다. 연령적 스펙트럼과 표현의 깊이와 강도가 훨씬 더해지고 있다. 게다가 개인적, 주변적 관심을 유지하면서도 관찰의 눈을 사회 전반에까지 직접적으로 아우르고 있어 작가의 또 다른 일면으로의 전환도 추단케 한다.

 

개인적으로 <물속 골리앗><서른>이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두 작품 모두 주인공이 처절할 정도로 나락에 떨어지는 비극적 상황에 맞닥뜨린다. 전자의 비극성이 유례없는 폭우라는 비일상성을 배경으로 하기에 현실미는 덜한 반면 극도의 환상성이 오히려 소년의 고통과 비극을 생생하게 부각시킨다. 후자는 극히 간결하고 나직한 어조로 체험을 수기화한 것인 양 누구나 빠져들기 쉬운 불법 다단계 업종의 위험성과 폭력성을 고발하여 사회구조적 문제와 결부시키고 있다. 일종의 고발문학이라고도 할 정도로 평범한 젊은 여성이 지옥의 밑바닥에 떨어지는 과정이 절제된 톤으로 낮은 목소리로 읊조려지고 있다.

 

서양 신화에서 판도라의 상자에 남은 것은 희망이라고 한다. 희망이 있다면, 기대할 수 있다면 눈앞의 불행을 감내하고 헤쳐 나갈 용기를 낼 수 있다. 희망이 없다면 그때는 기약할 수 없는 행복을 기다린다는 것은 몹시 지겨울 것이다. 삶이 말이다. 그걸 알기에 독자의 가슴은 먹먹해질 수밖에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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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열림원 이삭줍기 2
뱅자맹 콩스탕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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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람들 중에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관계도 있으며, 불행히 만났다면 빨리 헤어질수록 좋은 관계도 있다. 특히 남녀 관계는 더욱 그러하다. 서로 간의 사랑의 결과로 인간적, 사회적 발전에 이를 수 있는 관계는 권장할 만하다. 시대를 초월하여 신분과 기타 제약조건을 뛰어넘은 사랑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인구에 회자되는 것은 그만큼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사람들의 찬미가 크다는 증거이다.

 

뱅자맹 콩스탕의 이 짤막한 경장편은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서로 간에 파국으로 귀결되는 씁쓰름한 사랑의 이면을 보여준다. 일종의 연애소설로 보기에는 만남과 사랑에 비해 고뇌와 이별에의 열망이 지나치게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아돌프의 엘레노르에 대한 구애는 확실히 순수하지 못하고 일종의 유희 내지 심심풀이 유혹이라고 할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어쨌든 아이가 있는 사실혼 관계에 있는 유부녀를 안온한 가정의 뜰 밖으로 끌어낸 것이므로. 이후 그녀에 대한 그의 심경과 태도가 비록 사랑은 아니었음에도 나름대로 성실과 책임을 보여주었다고 하여도 불의가 경감되지는 않는다.

 

남성의 사랑과 여성의 사랑은 근원적 차이를 두고 있다. 남성은 사랑에 전적인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반면, 사랑에 빠진 여성에게 사랑은 전부 그 자체이다. 엘레노르가 그러하듯이. 그녀는 아이도, 남편(법적이지는 않지만), 그리고 사회적 체면도 모두 던져버리고 아돌프에게 달려갔다. 솔직히 엘레노르를 비난하고 싶지 않다. 그녀는 아돌프의 사랑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여기에 올인 한 것이므로.

 

사랑이든 아니면 사랑의 착각이든 부부와 연인 간의 관계가 장기간 지속되려면 뜨거운 열정만으로는 오히려 부족하다. 흔히 일심동체(一心同體)라고 표현되지만 이것이 불가능함을 재빨리 인식할수록 좋다. 상호간에 개인적 고유 영역이 존재함을 인정해야 한다.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을 항상 같이 있을 수는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각자가 잠깐이지만 나름 자신의 생활을 처리하고 재회할 때 짧은 이별이 가져오는 반가움과 그리움의 감정은 사랑을 더욱 증폭시킨다. 대체로 여인의 사랑에서 이 점이 부족하다, 엘레노르처럼. 그녀의 걱정은 아돌프에게는 감시로 비쳤으며, 한시라도 함께 있고자 하는 열망은 권태와 우울을 유발하였다.

 

반면 아돌프에게 결여된 점은 의지와 결단력이다. 사랑의 부재를 깨달았음에도 그는 머뭇거렸다. 과감한 이별을 감행하든가 여러 면에서 불가능함을 알았다면 차라리 그녀와의 관계를 공식화했다면 양자의 파국은 막았을 것이다. 그네들의 나날은 수렁에 빠졌음에도 나올 줄을 몰라 괜한 몸부림만 치는 사람들과 같다. 상대방을 꼭 안은 채 골짜기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모습과 흡사하다.

 

이 작품에는 사랑의 감미로움이 등장하지 않는다. 시종일관 사랑의 고뇌와 쓰라림이 주조를 이룬다. 두 남녀 외에 다른 인물들은 잠깐씩 나타났다 사라지는 부수적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남녀 간의 사랑을 둘러싼 갈등이 주된 사건이며, 특히 아돌프의 심리상에서의 무쌍한 변화가 치열하게 전개된다.

 

재미로 하는 연애는 진실한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유희이기에는 너무 압도적이고 과중하다. 사랑은 동정도 아니다. 동정심은 호혜적이지 않으므로 일방에게 부담을 가중시킨다. 일방적 사랑은 상호 발전을 끌어내지 못한다. 아돌프는 알았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엘레노르는 너무 늦게야 깨달았다.

 

나는 불가능한 일을 바라고 있었어요. 사랑은 내 인생의 전부였지만, 당신에게도 그럴 수는 없는 일이지요.”(P.139)

 

우리가 아돌프를 비난하기는 쉽다. 자신의 일이 아니면 남을 단죄하는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게 마련이다. 그의 성실함과 고상한 품성 등 존중할 만한 미덕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랑의 수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였다. 작가는 아돌프에 대하여 무자비하다. 아돌프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성격이라고 밝힌다.

 

환경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타고난 자신의 성격인 것입니다. 외부의 사물이나 사람과는 그 관계를 끊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지만, 자기 자신과는 관계를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P.157)

 

우리는 확실히 아돌프에게 조금의 성실을, 용기를 기대한다. 그러면 양자가 더 나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과연 엘레노르도 여기에 동의할까? 사랑 외에 모든 것을 포기한 그녀에게 아돌프와의 헤어짐은 감내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그렇다면 작가의 성격론은 차라리 엘레노르에 대한 아돌프의 허영에 찬 유혹의 시도에 대한 본원적 비판에 해당할 것이다.

 

작가는 반성 없이 맺어진 관계는 고통 없이 깨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세간의 인식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를 서문에서 지적한다. 깊은 애정의 뿌리를 끊는 과정에서 영혼의 일부를 죽이고 가장 좋은 성질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밝힌다.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어 애정 관계를 정리해봤자 그에게 남는 게 무엇이겠는가.

 

뱅자맹 콩스탕의 집필 의도가 무엇인지는 알기 어렵다. 자신의 개인적 체험에 바탕을 둔 것인지, 또는 당대의 경박한 일반적 사회 풍조를 비판적 시각에서 보여주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진실한 남녀의 사랑의 조건과 태도는 어떠한지를 역설적으로 표현하기 위함인지.

 

다만 이 점은 분명하다. 아돌프의 사랑을 가장한 동정, 엘레노르의 맹목적 사랑의 관계는 현대의 연인 또는 부부 관계에 비추어 볼 때 여전한 적시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아돌프의 통렬한 자기 분석과 처절한 고뇌와 절망은 시간의 간극에도 마음을 아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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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F/B1 일층, 지하 일층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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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대표적인 허구의 문학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소설이 갖는 허구성의 양대 연원은 현실과 상상이다. 현실에 기반을 두고 치밀한 관찰과 체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은 굳이 리얼리즘 계열이냐를 떠나서 소설 문학의 주류를 형성해 왔다. 사람은 자신에게 익숙한 이야기에 공감을 표시한다. 더구나 개인과 사회에서 벌어지는 실제의 드라마틱한 사건은 어지간한 소설이라면 이름도 못 내밀만큼 흥미진진하지 않는가. 비주류이지만 오랜 역사를 지닌 한 분야, 즉 상상을 외면할 수 없다. 멀리는 신화에서부터 비롯하여 동화와 판타지 문학을 아우르는 작지만 강력한 영역을 구축하였다. 더구나 영상 미디어가 주도하는 현대에서 판타지는 무수한 파생물을 낳을 정도로 상품성이 뛰어나 한층 각광을 받고 있다.

 

김중혁의 이 작품집은 대별하면 상상에 치우쳐 있다. 일전의 <핸드메이드 픽션>의 경우도 사실성을 그다지 추구하지 않았는데 김중혁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수록작 중 일부는 환상문학이니 장르문학이니 하는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을 정도다.

 

나는 이 속된 도시가 좋다. 여기에서 살아갈 것이다.”(P.304)

말미의 작가의 말이 이채롭다. 옆쪽의 그림은 책상 위에 노트북 컴퓨터가 놓여 있고 그 뒤로 다양한 도시의 건물 모형들이 세워져 있는 풍경이다. 차례는 어떠한가. 7편의 작품들은 고층 건물의 층수를 알려주는 듯 한 배치로 늘어서 있다.

 

작가는 도시를 정말 제대로 보여주고 싶은 모양이다. 그의 도시는 외관이 번지르르한 마천루가 아니다. 땅속으로 깊이 내려간 주야의 구분을 없앤 코엑스 류의 아케이드도 아니다. 고층 아파트들로 넘실거리지도 않는다. 그의 도시는 일상에서 숨겨진 뒷골목이며, 지하의 또는 후면의 음영이 짙은 공간이다.

 

<C1+y=:[8]:>은 미로와도 같은 도시의 후미진 골목이다. <냇가로 나와>는 도시화되기 이전 교외의 냇가를 배경으로 한다. <바질>의 경우 도시의 야산이 공포의 무대로 등장한다.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는 미래의 도시를 다룬다. <1F/B1><유리의 도시>는 각각 빌딩을 소재로 하지만 전자는 빌딩 관리인, 후자는 빌딩에 부착된 대형유리의 숨겨진 세계가 실체를 드러낸다. <크랴샤>의 경우 퇴락한 도심지역이 화려한 마술과 결부된다.

 

작가는 도시 탐험가다. 그는 익숙한 도시의 낯선 풍경을 오지를 탐험하듯이 찾아 헤맨다. 도시에서 그가 마주치는 인물과 사물은 사실적이며 동시에 공상적이다. 작가는 가공의 존재를 실제인 것 마냥 슬그머니 작중에 집어넣는다. 독자는 긴허리아기말원숭이에 호기심을 보이며, 하마까 형님의 슬픔을 동정하며, 괴물 바질에 공포를 느낀다. 날 때부터 생존시간이 운명 지어진 여자아이 99에 안타까워한다. 슬래시 매니저들의 비밀본부와 알루미노코바륨도 놓쳐서는 안 된다. 이 모든 것들을 작가는 미지의 자연과 동식물을 탐험하여 대중에게 소개하듯이 독자에게 보여준다.

 

작가는 뛰어난 여행 가이드다. 골목을 지나칠 때면, 블록을 통과할 때마다, 언덕을 넘어서는 매번 그는 특유의 기발한 착상과 재치 넘치는 입담으로 독자의 귀를 매료시킨다. 그는 장르를 넘나든다. 소시민적 휴먼 드라마에서 공포물, SF, 다큐, 탐정물은 물론 매혹적인 마술의 영역까지도 포괄한다. 소설의 본질이 이야기에 있다고 한다면, 독자를 솔깃하게 하는 재미난 이야기를 창작할 수 있는 천부적 재질이야말로 소설가의 제일 미덕이 아니겠는가.

 

신기한 탐험과 흥미진진한 여행만이 김중혁의 도시 탐사의 목적은 아닐 것이다. 그의 도시는 삶과 죽음이 엇갈린다. 새것이 옛것을 대체한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이어진다. 외로움을 사랑이 다독인다. 빛과 그늘이 상존하며, 지상과 지하가 병존한다. 삭막한 미래가 현재를 투영한다. 이처럼 도시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넘쳐난다.

 

무엇보다 도시에는 사람들이 많다. 북적이는 인파에 짜증을 내며 일탈과 자연을 꿈꾸지만 막상 자연에서는 두려움과 방황을 겪는 사람. 도시의 번잡함에 오히려 안도하며 편리함에 길들여져 있으며, 혼탁한 공기에 편안한 호흡으로 숨 쉬는 도시인. 낮은 지붕과 꼬불꼬불한 골목 대신 하늘에 치솟은 초고층 타워에 열광하며, 아파트를 싫어하면서도 선호하는 이율배반적 존재.

 

작가는 스러져 가는 도시의 옛 흔적을 천착한다. 화려함에 깃든 고독과 삭막함, 생경함을 끄집어낸다. 이면과 사이에서 주목받지 못하지만 도시가 제대로 기능하도록 헌신하고 있는 존재의 가치를 재음미한다. “아주 미미하지만 꼭 필요한 존재들”(P.203). 이들은 점차 소멸되고 있다. 그런데 소멸된 것들은 되살아날 수 없다. 그리고 찢어진 것들은 절대 다시 붙지 않는다.”(P.273) 이들이 없다면 당신의 도시는 행복할까? 이것이 작가의 질문이다. 그리고 작가의 답변은 아래의 토로에 있다.

 

내가 만들고 싶은 도시가 있었다. 모든 골목과 골목이 이어져 있고, 미로와 대로의 구분이 모호하고, 골목을 돌아설 때마다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한 또 다른 풍경이 이어지며, 자신이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기도 쉽지 않을 정도로 무수히 많은 갈래길이 존재하는 도시를 만들고 싶었다.“(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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