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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위의 세계 - 2012년 제43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정영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9월
평점 :
글머리의 작가의 말이 이 작품의 전반적 성격을 대변한다.
“내가 마음대로 뒤틀어 심하게 뒤틀리기도 한 이야기들이 있는 이 글에는 지극히 사소하고 무용하며 허황된 고찰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시도, 혹은 재미에 대한 나의 생각, 혹은 사나운 초록색 잠을 자는 무색의 관념들, 혹은 뜬구름 같은 따위의 부제를 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작품을 이렇게 어이없는 소개로 시작하는 작가도 달리 없을 것이다. 그런 만큼 이 소설은 내내 어이없는 행태와 사고와 존재 양식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 작품이 커다란 주목을 받았던 것은 이러한 안티적 글쓰기에 대한 낯선 시도가 첫 번째 사유일 것이다.
작가는 여기서 전형적 소설적 글쓰기를 작위적으로 버리고 있다. 일단 샌프란시스코 체류기 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 여행기로서의 인상이 언뜻 스치나 실제 내용상은 전혀 이와 무관하여 작가의 말마따나 표류기에 가깝다. 번듯한 인물도 등장하지 않으며, 작가 자신으로 추정되는 작중 화자의 진술이 작품 전체를 이끌어간다. 게다가 뚜렷한 사건 또는 갈등의 양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가 LA에서 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겪게 되는 삶 또는 사고의 단편적 양상이 반복된다. 여기에 공상이 사실인 것처럼 등장하기도 한다.
작가는 글머리 이외에도 중간 중간 등장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낸다. 그것은 한결같이 이 소설의 무의미성과 어이없음, 그리고 비소설성을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내용이다.
“나의 소심함과 자질구레함이 잘 드러나는 이러한 궁상맞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것이 지극히 사소하고 무용하며 허황된 글쓰기에 대한 시도라는 이 소설에 부합되기 때문이지만, 자질구레함을 넘어 거의 구차하게 여겨지는 이 이야기를 하고 있자 내가 어떻게 하다 이 모양이 되었는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P.139)
“이야기가 또 옆으로 새는데, 그것은 이 소설이 어디로 나아가도 좋기 때문이고, 이것은 또한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의 이야기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파생하고 이탈해 그것들이 뒤섞이며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는 소설이다.”(P.167~168)
“나는 이 마지막 장은 오직 구름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지만 어떻게 하다가 결국에는 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장도, 이 소설 전체도 사실은 구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그것은 이 소설이 뜬구름 잡는 것에 관한 뜬구름 잡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는 뜬구름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은 내 생각에 자연계의 모든 것 중에서도 그 안에 핵심이 없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뜬구름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생각과 말과 어지러운 장난에 지나지 않는 이 소설이 뜬구름처럼 아무런 핵심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P.270)
이 소설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문체에 있다. 일견 말장난에 가까운 언어적 유희를 식상할 정도로 시종여일하게 자주 써먹는 작가의 의도는 본인의 주장대로 이 작품의 무용성을 배가하여 강조하고자 함일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말장난을 쓸데없는 짓으로 치부한다. 소설도 궁극에는 말장난이겠지만 그럴듯하고 뭔가 감흥을 주는 말장난이 아닌 무용하고 허황한 말장난을 환영할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앞으로는 모래 위에 적힌 누군가의 이름을 보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지우는 짓 따위는 다시는 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런 짓은 살면서 한 번 한 것으로 족한 것처럼 여겨졌다. 아니, 절대로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자 그것은 해서는 안 될 짓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앞으로 절대 하지 않을 거라고 해서 하지 않게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런 짓은 하지 않으려 할 수는 있지만 막상 하게 된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런 일을 한 후 다시는 하지 않을 거라고 결심한 뒤 또다시 하게 되는 것이 될 수도 있었다.”(P.67)
“그 거지를 잠시 바라보며 있자, 거지는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거지가 되기도 하지만, 누구나 쉽게 거지가 되지는 못하는 거고, 거지가 꿈이었고 거지가 되려고 노력한 끝에 꿈을 이뤄 거지가 된 거지는 거의 없고 – 세상에는 별 사람이 다 있고, 그렇게 해서 거지가 된 거지도 있을 것이고, 그중에는 어려서부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가만히 보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사는 데에는 거지로 사는 것만 한 것도 없어 보여, 거지가 되기로 해 거지가 된 사람도 있을 것이다 - , 거지가 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지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한 끝에 거지가 되었고, 완전한 거지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거지가 되기까지 어떤 노력으로 볼 수도 있는 뭔가가, 쉽지 않은 어떤 노력이 기울여진 것으로 볼 수도 있고, 그래서 그들 나름대로 할 바를 다해 거지가 되었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P.221~222)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사실적 공상의 전면적 부정이다. 작가는 이야기의 끈을 쭉 연결해 나가면서 사고와 흥미를 한창 극도에 치닫게 한 후 불쑥 내뱉는다. 아니, 이는 실제로 일어난 게 아니며 상상일 뿐이라고. 방귀뀌기에 대한 상상, 금문교에서 과일을 떨어뜨리는 상상, 그리고 머리에 새똥을 맞는 상상 등에서 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열렬히 동참한 독자들을 한순간에 허무에 빠뜨린다. 마치 독자여, 내 소설은 어이없고 허황됨을 잊지 말라. 정통적인 소설과 문학에 익숙해져 있다면 그래서 내게도 그러한 유의 것을 기대한다며 일찌감치 꿈을 거두시게라고 말하듯이. 이러한 작가가 극도의 무용성의 예증으로 제시하는 게 삶은 옥수수 알갱이 세기다.
신문 기사를 보면 작가는 등단 후 제법 많은 작품을 발표했지만 한 번도 그럴듯한 평가를 받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생계도 소설 인세 수입이 아니라 번역고료로 연명했다고 하니 딱할 지경이다. 섣부른 예단이 아니라면 아마도 작가는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회의와 모색의 기회를 샌프란시스코에서 보냈던 것이다.
“내 소설 속 인물 모두가 어떤 정서적 장애를 겪으며, 사실상 다른 인물과 관계를 갖지 못하며, 자신만의 난감한 상태에 처해 있었는데, 현실 속의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나 자신이 세상의 누구와도 더 이상 관계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상태에 이르렀고, 그래서 관계가 문제가 되는, 인물들이 갈등을 빚는 소설을 쓰지 못하는 것 같았다.”(P.188)
“나는 오래도록 너무도 작위적인 삶을 살아왔고, 이제는 작위적인 것이 내게는 자연스러웠다. 내가 작위적인 삶을 산 것은 삶의 그 무엇도 사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았고, 그에 따라 삶에 진지할 수 없었고, 삶의 어떤 사실들이 아니라 그 사실들에 대한 생각들에만 관여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이것이 나의 삶의 가장 큰 실질적인 어려움이기도 했다.”(P.190)
작가는 자신이 “소설을 쓰는 것으로 소설에 대한 복수”(P.242)를 하고 있다고 증언한다. 이것은 꽤나 중요한 발언인데, 확실히 정통적 소설 작법에 대한 거부와 반항, 그것이 이 소설에 모래알처럼 박혀 있다. 하지만 이 책이 이론서가 아닌 이상, 즉 문학의 외피를 지니고 있는 이상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지 않으면 결국 실패한 셈이다.
자못 지루한 사상의 나열과 무의미한 나날의 연속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위험성을 탈피하게 만드는 것은 화자의 젠체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어조에 있다. 시종일관 진지한 고담준론을 읊조리는 화자, 하지만 실제적 행위와 생활의 모습은 근엄하고 단호함과 거리가 멀다. 모래사장에 쓰인 이름을 지우는 어이없는 행동은 물론 어슬렁거리며 호보(과연 거지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여전히 의아하다)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상호간에 어이없어 하는 장면 등은 절로 실소를 자아낸다. 이런 장치들 덕분에 제법 현학적이고 철학적 냄새가 풍기고, 게다가 속도감이 나지 않음에도 그다지 지루함을 느끼지 않고 독서를 마칠 수 있었다.
작가의 전작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상황에서 작가에 대해 왈가왈부할 자격도 없으며 그럴 의향도 없다. 진기명기는 어쩌다가 한 번 나오는 것이다. 이 소설과 같은 유의 작품은 지속적으로 재현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정도는 안다. 작가가 후속작에서 어떠한 변신을 할지 매우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