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작위의 세계 - 2012년 제43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정영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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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머리의 작가의 말이 이 작품의 전반적 성격을 대변한다.

내가 마음대로 뒤틀어 심하게 뒤틀리기도 한 이야기들이 있는 이 글에는 지극히 사소하고 무용하며 허황된 고찰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시도, 혹은 재미에 대한 나의 생각, 혹은 사나운 초록색 잠을 자는 무색의 관념들, 혹은 뜬구름 같은 따위의 부제를 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작품을 이렇게 어이없는 소개로 시작하는 작가도 달리 없을 것이다. 그런 만큼 이 소설은 내내 어이없는 행태와 사고와 존재 양식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 작품이 커다란 주목을 받았던 것은 이러한 안티적 글쓰기에 대한 낯선 시도가 첫 번째 사유일 것이다.

 

작가는 여기서 전형적 소설적 글쓰기를 작위적으로 버리고 있다. 일단 샌프란시스코 체류기 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 여행기로서의 인상이 언뜻 스치나 실제 내용상은 전혀 이와 무관하여 작가의 말마따나 표류기에 가깝다. 번듯한 인물도 등장하지 않으며, 작가 자신으로 추정되는 작중 화자의 진술이 작품 전체를 이끌어간다. 게다가 뚜렷한 사건 또는 갈등의 양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가 LA에서 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겪게 되는 삶 또는 사고의 단편적 양상이 반복된다. 여기에 공상이 사실인 것처럼 등장하기도 한다.

 

작가는 글머리 이외에도 중간 중간 등장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낸다. 그것은 한결같이 이 소설의 무의미성과 어이없음, 그리고 비소설성을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내용이다.

 

나의 소심함과 자질구레함이 잘 드러나는 이러한 궁상맞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것이 지극히 사소하고 무용하며 허황된 글쓰기에 대한 시도라는 이 소설에 부합되기 때문이지만, 자질구레함을 넘어 거의 구차하게 여겨지는 이 이야기를 하고 있자 내가 어떻게 하다 이 모양이 되었는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P.139)

 

이야기가 또 옆으로 새는데, 그것은 이 소설이 어디로 나아가도 좋기 때문이고, 이것은 또한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의 이야기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파생하고 이탈해 그것들이 뒤섞이며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는 소설이다.”(P.167~168)

 

나는 이 마지막 장은 오직 구름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지만 어떻게 하다가 결국에는 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장도, 이 소설 전체도 사실은 구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그것은 이 소설이 뜬구름 잡는 것에 관한 뜬구름 잡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는 뜬구름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은 내 생각에 자연계의 모든 것 중에서도 그 안에 핵심이 없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뜬구름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생각과 말과 어지러운 장난에 지나지 않는 이 소설이 뜬구름처럼 아무런 핵심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P.270)

 

이 소설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문체에 있다. 일견 말장난에 가까운 언어적 유희를 식상할 정도로 시종여일하게 자주 써먹는 작가의 의도는 본인의 주장대로 이 작품의 무용성을 배가하여 강조하고자 함일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말장난을 쓸데없는 짓으로 치부한다. 소설도 궁극에는 말장난이겠지만 그럴듯하고 뭔가 감흥을 주는 말장난이 아닌 무용하고 허황한 말장난을 환영할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앞으로는 모래 위에 적힌 누군가의 이름을 보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지우는 짓 따위는 다시는 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런 짓은 살면서 한 번 한 것으로 족한 것처럼 여겨졌다. 아니, 절대로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자 그것은 해서는 안 될 짓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앞으로 절대 하지 않을 거라고 해서 하지 않게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런 짓은 하지 않으려 할 수는 있지만 막상 하게 된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런 일을 한 후 다시는 하지 않을 거라고 결심한 뒤 또다시 하게 되는 것이 될 수도 있었다.”(P.67)

 

그 거지를 잠시 바라보며 있자, 거지는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거지가 되기도 하지만, 누구나 쉽게 거지가 되지는 못하는 거고, 거지가 꿈이었고 거지가 되려고 노력한 끝에 꿈을 이뤄 거지가 된 거지는 거의 없고 세상에는 별 사람이 다 있고, 그렇게 해서 거지가 된 거지도 있을 것이고, 그중에는 어려서부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가만히 보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사는 데에는 거지로 사는 것만 한 것도 없어 보여, 거지가 되기로 해 거지가 된 사람도 있을 것이다 - , 거지가 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지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한 끝에 거지가 되었고, 완전한 거지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거지가 되기까지 어떤 노력으로 볼 수도 있는 뭔가가, 쉽지 않은 어떤 노력이 기울여진 것으로 볼 수도 있고, 그래서 그들 나름대로 할 바를 다해 거지가 되었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P.221~222)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사실적 공상의 전면적 부정이다. 작가는 이야기의 끈을 쭉 연결해 나가면서 사고와 흥미를 한창 극도에 치닫게 한 후 불쑥 내뱉는다. 아니, 이는 실제로 일어난 게 아니며 상상일 뿐이라고. 방귀뀌기에 대한 상상, 금문교에서 과일을 떨어뜨리는 상상, 그리고 머리에 새똥을 맞는 상상 등에서 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열렬히 동참한 독자들을 한순간에 허무에 빠뜨린다. 마치 독자여, 내 소설은 어이없고 허황됨을 잊지 말라. 정통적인 소설과 문학에 익숙해져 있다면 그래서 내게도 그러한 유의 것을 기대한다며 일찌감치 꿈을 거두시게라고 말하듯이. 이러한 작가가 극도의 무용성의 예증으로 제시하는 게 삶은 옥수수 알갱이 세기다.

 

신문 기사를 보면 작가는 등단 후 제법 많은 작품을 발표했지만 한 번도 그럴듯한 평가를 받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생계도 소설 인세 수입이 아니라 번역고료로 연명했다고 하니 딱할 지경이다. 섣부른 예단이 아니라면 아마도 작가는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회의와 모색의 기회를 샌프란시스코에서 보냈던 것이다.

 

내 소설 속 인물 모두가 어떤 정서적 장애를 겪으며, 사실상 다른 인물과 관계를 갖지 못하며, 자신만의 난감한 상태에 처해 있었는데, 현실 속의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나 자신이 세상의 누구와도 더 이상 관계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상태에 이르렀고, 그래서 관계가 문제가 되는, 인물들이 갈등을 빚는 소설을 쓰지 못하는 것 같았다.”(P.188)

 

나는 오래도록 너무도 작위적인 삶을 살아왔고, 이제는 작위적인 것이 내게는 자연스러웠다. 내가 작위적인 삶을 산 것은 삶의 그 무엇도 사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았고, 그에 따라 삶에 진지할 수 없었고, 삶의 어떤 사실들이 아니라 그 사실들에 대한 생각들에만 관여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이것이 나의 삶의 가장 큰 실질적인 어려움이기도 했다.”(P.190)

 

작가는 자신이 소설을 쓰는 것으로 소설에 대한 복수”(P.242)를 하고 있다고 증언한다. 이것은 꽤나 중요한 발언인데, 확실히 정통적 소설 작법에 대한 거부와 반항, 그것이 이 소설에 모래알처럼 박혀 있다. 하지만 이 책이 이론서가 아닌 이상, 즉 문학의 외피를 지니고 있는 이상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지 않으면 결국 실패한 셈이다.

 

자못 지루한 사상의 나열과 무의미한 나날의 연속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위험성을 탈피하게 만드는 것은 화자의 젠체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어조에 있다. 시종일관 진지한 고담준론을 읊조리는 화자, 하지만 실제적 행위와 생활의 모습은 근엄하고 단호함과 거리가 멀다. 모래사장에 쓰인 이름을 지우는 어이없는 행동은 물론 어슬렁거리며 호보(과연 거지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여전히 의아하다)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상호간에 어이없어 하는 장면 등은 절로 실소를 자아낸다. 이런 장치들 덕분에 제법 현학적이고 철학적 냄새가 풍기고, 게다가 속도감이 나지 않음에도 그다지 지루함을 느끼지 않고 독서를 마칠 수 있었다.

 

작가의 전작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상황에서 작가에 대해 왈가왈부할 자격도 없으며 그럴 의향도 없다. 진기명기는 어쩌다가 한 번 나오는 것이다. 이 소설과 같은 유의 작품은 지속적으로 재현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정도는 안다. 작가가 후속작에서 어떠한 변신을 할지 매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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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의 에라스무스 평전 - 종교의 광기에 맞서 싸운 인문주의자, 아롬옛글밭 2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민영 옮김 / 아롬미디어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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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광풍이 독일을 본격적으로 휘감기 시작한 1934년, 슈테판 츠바이크는 불현 듯 에라스무스의 평전을 발표한다. 이윽고 그는 히틀러를 피해 돌아오지 못할 망명길에 접어든다. 츠바이크는 이미 1939년을 예감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온 사회가 광신에 빠져들면 평화는 유린되기 마련이며 이성 대신 오로지 피와 힘에 의한 대결로 치닫게 됨을 그는 역사에서 드러내었다. 그것이 에라스무스의 삶이자 그의 비극이다.
 

세계사에 나오는 <우신 예찬>의 저자 정도로만 인식되던 에라스무스의 역사적 위상은 실로 대단하였다. 저자에 따르면 그는 당대 지성 세계의 제왕이었다. 학문과 종교에 관한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자체로 군주와 교황도 무시 못 할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에라스무스는 평생 방랑의 삶을 살았다. 그에게 고향은 자신이 한동안 머무를 수 있는 고장을 지칭한다. 일찍부터 고전에 경도된 그의 평생 언어는 라틴어였으며, 기독교 신학을 바탕으로 그리스 로마 고전을 전범으로 하는 인문주의 세계관이 그의 것이었다.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 그래서 모든 갈등과 대립도 대화와 타협으로 무리 없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세계가 그가 꿈꾸는 이상향이었다. 그래서 그는 광신을 철저히 외면하였다. 광신은 항상 독단과 아집으로 귀결되어 남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무슨 수를 써서든 반드시 내가 이겨야 하는 게 바로 광신의 법칙이다.
 

츠바이크는 그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철저한 공감을 표시한다. 저자가 살고 있던 20세기 초의 현실에 있어 매우 시의적절하며, 혼란의 시기에 결여되어 있는 유일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반면 에라스무스에게서 그는 암운에 뒤덮인 유럽의 미래를 내다본다. 정신적 우월성과 고상함만을 가지고는 세계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할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이 모두 교육과 감화를 통하여 정신적으로 승화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매우 비현실적이며 지극히 이상론에 치우쳐 있다. 이상론은 언제나 힘을 지닌 현실론자에 의해 패배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역사의 흐름을 뒤바꿀 수 있는 결정적 시기에 언제나 행동으로써 참여하기를 회피한 그에게 츠바이크는 반복적으로 장중한 애석과 탄식을 토로하는 것이리라.
 

당시 종교개혁의 바람은 필연적이었다. 대항해시대와 르네상스의 과학적 발견의 성과는 영적인 측면에도 영향을 미쳤다. 종교계의 억압과 부패에 대하여 더 이상 무조건 머리를 숙이지 않으려는 성향이 생겨났다.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의 선구자이다. 그가 <우신예찬>을 비롯한 여러 글들에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타락한 가톨릭에 대한 따가운 비판이다. 에라스무스와 마르틴 루터는 출발을 같이 하였지만 점점 멀어지는 길을 선택하였다. 전자는 가톨릭의 자정(自淨)과 개선을 희망하였으나, 후자는 가톨릭의 파괴와 대체를 요구하였다. 
 

에라스무스는 신교와 구교 간의 갈등에서 낭자한 유혈을 본능적으로 예감하였다. 그래서 양 세력 간의 중재에 나섰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 어려운 것이 중도이며 중용이다. 극단은 선명성을 얻기 용이하다. 중용은 기회주의자, 회색분자로 취급되기 마련이다. 날짐승과 들짐승 간의 싸움에 낀 박쥐처럼. 에라스무스가 종교개혁을 소리 높여 외친 루터에 동조하지 않은 것은 그에게서 광신의 냄새를 맡았던데 연유한다.

“광신은 단지 자기 체제와 자기 진실만을 인정하기 때문에 신이 원한 다양한 현상 내의 다른 모든 현상을 억압하기 위해 폭력에 손을 뻗을 수밖에 없다.”(P.125)
 

츠바이크는 에라스무스를 이렇게 평한다.

“에라스무스의 진실된 실체는 단지 투명성이었다. 에라스무스는 깊은 사상가, 심오한 사상가는 아니라 하더라도 비범하게 넓은 정신의 소유자였으며......올바른 사상가, 총명한 사상가, 자유 사상가였고 고상한 단어로 말하자면 모범적인 이해자, 그리고 이해하도록 만들어 주는 자, 계몽자였다.(P.61)

“그의 정신의 모습을 보며, 그처럼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그 작은 사내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갖는 천성적인 난폭한 힘 한가운데서 대중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기에는 부적합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P.78)
 

계몽자에게 투사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그것이 그와 루터와의 본질적 차이점이다. 보름스 제국의회와 훗날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 그는 자신의 천부적 소심성으로 마지막 화합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에라스무스와 마르틴 루터는 상호간에 있어 필생의 숙적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역사는 루터를 승자로 만들었다. 츠바이크가 두 사람을 비교한 문장을 읽어보면 지독한 대비성을 알 수 있다.

“온건 대 광신, 이성 대 격정, 문화 대 원초의 힘, 세계시민 대 민족주의, 진화 대 혁명, 이것이 그들이 보여주는 대비이다.”(P.141)

“에라스무스적인 모든 것들은 결국 정신의 평온과 평화를 목표로 하고, 루터적인 모든 것들은 고도의 긴장과 감정의 동요를 목표로 한다.”(P.146)

“개개의 인간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가 정직하고 단련된 의지를 통해 더 숭고한 도덕성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그는 그처럼 경직된, 거의 이슬람교적인 광신에 철저하게 저항할 수밖에 없다.”(P.212)
 

이 책의 압권은 제9장 <루터와의 위대한 논쟁>이다. 서로 직접적 공격을 자제하면서 타협의 길을 모색하던 두 인물이 드디어 상대방을 겨냥하면서 펜으로 벌인 무혈의 전투이다. 각각 <자유 의지론>과 <부자유 의지론>, 그리고 <히페라스피스테스>로 이어지는 논쟁은 단순한 신학을 뛰어넘는다. 그것은 인간이란 존재를 어떻게 규정지으면, 신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 철학의 문제이다.
 

에라스무스의 위대성을 입증하는 저자의 찬사를 살펴보자.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보편적 인간과 결합시키면서, 의식적으로 단순한 교회 법규로부터 분리하고자 한다.”(P.101)

“에라스무스에게 있어서 유럽은 하나의 도덕적 이념으로서, 철저히 비이기주의적이고 정신적인 요구로 나타난다.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실현되지 못한, 공동 문화와 문명 속에 통일된 유럽 국가라는 요구는 에라스무스에게서 시작되는 것이다.”(P.118)
 

물론 에라스무스도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에라스무스에게서 민주주의자와 자유주의의 선구자를 본다는 것보다 더 잘못된 생각은 없을 것이다. 에라스무스와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민중,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과 미성년자에게 최소의 권리라도 부여할 생각은 한순간도 하지 않았다.”(P.130)
 

세상이 흐린데 홀로 맑고, 모든 사람들이 술에 취하였을 때 홀로 깨어있던 사람, 그이가 바로 에라스무스였다.

“지나치게 흥분한 모든 사람들 한 가운데서 홀로 밝은 이성을 구현해야 하는 일, 그리고 펜으로만 무장한 채 유럽의 통일, 교회의 통일, 인류애와 세계 시민의 통일을 붕괴와 파괴로부터 지켜 내는 일이 그의 과제인 것이다.”(P.167~168)
 

에라스무스의 역사적 패배와 더불어 고상한 이념과 지성은 자취를 감추고 분열과 폭력이 지배하는 세상이 등장하였다. 그 후의 세계사가 과연 평화와 진보라는 측면에서 어떠했는지 새삼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극심한 사례가 이 평전을 쓴 츠바이크가 예감했던 나치와 제2차 세계대전이 아니겠는가. 그는 에라스무스와 종교개혁의 시대를 빌어 자신이 살던 시대에 오버랩 시켰을 뿐이다.
 

에라스무스는 위대한 패배자다. 그는 잊혀지는 듯했지만 다시 부활하고 있다. 21세기 들어 유럽에서 새삼 그의 이름이 자주 인구에 회자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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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30 17: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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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02 15: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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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의 아동교육론
에라스무스 지음, 김성훈 옮김 / 한국학술정보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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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는 교육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미신과 광신에 빠지는 것을 혐오하였으며, 항상 인문주의 정신을 회복하고 지키는 데 주력하였다. 중세적 사고의 질곡에 갇혀 있는 동시대인들에 대해 계몽 정신의 선구자인 그로서는 깨우침의 자극을 부여할 수밖에 없었으니 그것은 곧 교육의 본질이기도 하다.

 

그는 <우신예찬> 이외에 후반부에 <기독교 군주의 교육><아동교육론>을 각각 저술하였다. 이 중 후자가 비록 영어 번역본에 의한 중역이지만 국내에 출간되어 기본적 윤곽을 알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무려 5백년 전의 인물임에도 그가 이 얄팍한 책에서 쏟아내는 교육의 본질에 대한 역설은 전혀 시간의 간극을 느낄 수 없으니 참으로 대단하다.

 

에라스무스는 기본적으로 아동교육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 어릴 적에 나쁜 물이 들기 전에 서둘러 소양 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인 자식의 교육에는 매우 소홀히 함을 개탄한다. 말이나 개 등의 훈련에는 최고의 열성으로 우수한 전문가를 아낌없이 초빙함에도 오히려 자식을 방치함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어린 아들의 마음이 아직 악에 물들지 않고 산만함에서 자유로울 때, 가장 발달 가능하고 감수성이 예민할 때, 그리고 그의 정신이 모든 영향에 개방적이며 동시에 모든 것에 최고의 기억력을 발휘할 때 지체 없이 자유 교육과 첫 만남을 가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P.21)

 

그는 인간은 올바른 교육에 의하지 않고는 결코 훌륭한 인물로 자라날 수 없다고 말한다. 동물이 본능의 힘에 의존하여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꾸려나가는 것과는 다르다. 더구나 동물조차도 새끼들에게 생존에 필요한 요령을 학습시키려고 노력하니 이성적 존재라고 주장하는 인간이 본성과 도덕과 의무를 게을리 하는 것에 개탄한다.

 

이성의 능력은 오직 인간에게만 주었습니다. 그래서 인간 성장의 과업을 교육이라는 것을 통해 성취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행복의 시작으로부터 끝에 이르기까지의 그 전체의 합이 훌륭한 양육과 교육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P.30)

 

아이가 태어나면 (귀족의 경우) 유모에게 맡겨진다. 따라서 유모야말로 아이의 첫 번째 교사인 셈이다. 좀 자라나면 가정교사를 들여 교육을 맡긴다. 유모와 가정교사의 자질과 능력은 아동교육에 있어 매우 중요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깊은 성찰 없이 또는 단순한 비용 고려만을 통해 자질이 속되고 형편없으며 미신에 물들고 사악하기 조차한 사람에게 아이를 내맡기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고 에라스무스는 비판한다.

 

가정교사를 선택하는 문제에 있어서만은 당신은 진실로 아르고스의 눈을 필요로 합니다. 전장에서 두 번의 실수는 결코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서는 심지어 단 한번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P.72)

 

에라스무스는 인간의 참된 본성은 이성에 따라 삶을 사는 것이며, 이성적 존재인 인간에게 가장 해로운 것은 무지(P.52)라고 말한다. 그는 본성은 방법에 의해 계발되어야 하고, 방법은 실천을 통해 완성으로 나아가야행복한 삶을 기대할 수 있다고 본다. 방법은 곧 학습이다. 이처럼 그는 인간에게 교육의 중요성과 의의를 한껏 드높이고 있다.

 

학습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이 학교다. 불행히도 저자에 따르면 당대의 학교는 그러하지 못하다. 남을 교육시킬 수 있으려면 교육자가 피교육자보다 지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우월해야 함은 상식에 속한다. 교사가 지적으로 열악하고 정신이 저열하며, 품성이 야수적이라면 어떨까?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체험을 소개하며 학교란 곳이 얼마나 비교육적이고 반교육적인 곳인지 여실히 고발한다. 습관적 가혹행위와 구타가 난무하는 곳, 그곳이 바로 학교다.

 

그는 참다운 학교의 장면을 그린다. 온화함과 우아함이 지배하는 곳. 제아무리 지겨운 공부라도 능력 있고 뛰어난 교사의 솜씨로 재미있는 놀이처럼 아이에게 받아들여져 유용함이 즐거움과, 완전함이 쾌활함과 함께 추구(P.100)되는 곳, 그곳이 진정한 학교의 모습이다.

 

에라스무스의 교육론이 오늘날 교육학계에서 어느 정도 인식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분명히 시대적 한계도 일정 부분 내포하고 있을 것임은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이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여전히 그의 아동교육에 대한 선구적 혜안은 놀랍기 그지없다. 이는 자신의 체험과 관찰과 진지한 사색의 결과일 것이다. 실상 그 자신이야말로 끊임없는 학습을 통해 당대 최고의 지성인으로 추앙받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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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 격언집
에라스무스 지음, 김남우 옮김, 김태권 그림 / 아모르문디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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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는 고전적 저작인 <우신예찬>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우연한 기회에 이 책을 읽어보니 의외로 뛰어난 점이 많아서 새삼 에라스무스에 관심이 생겼다. 그래서 저자의 다른 책이 나온 게 없나 살펴보다 그의 <격언집>이 나온 걸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상기 고전의 유명세에 가리워졌지만 실상 에라스무스의 필생의 역작이라고 할 만하다. 최초의 명성을 안겨다 준 것도 이 책이며,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적으로 개정판을 낼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다. 게다가 그 어마어마한 분량이라니! 처음 발행 시 800여 개, 나중에는 4,100여 개까지 늘어났다고 한다. 60개 정도의 그나마 짧은 글들을 맛보기로 모은 게 이 책이니 완역을 한다면 최소 수십 권의 두꺼운 책들이 쭉 펼쳐지는 장관을 볼 수 있게 된다.

 

각 격언의 구성은 먼저 격언 명이 제시되고 이어 숨은 뜻을 풀이한다. 다음엔 그 격언의 최초 출처와 이후 재인용된 유명한 고전의 저자와 내용이 소개된다. 가끔씩은 에라스무스 자신의 해석이나 논평이 추가되기도 한다.

 

한편 별도의 그린이에 의해 각 격언마다 라틴어 독음과 삽화가 덧붙여졌는데, 특히 삽화는 고전과 현대의 명화를 격언의 내용에 부합되게 패러디하고 있다. 자체로서 흥미롭고 격언만 나열될 때에 비해 반복되는 지루함을 없애는 데 일조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하나 반드시 이 격언집의 고전적 격조와 성격에 적합하다고 만은 할 수 없다.

 

에라스무스는 격언집에 서문을 달고 있는데, 격언의 정의와 성격 및 독자성과 유용성, 사용된 비유법 등을 다루고 있어 일종의 격언론이라고 불릴 만하다. 그는 비유적 치장으로 즐거움을 가져다주며, 담겨있는 생각으로 동시에 유익을 전하고 있는 격언이야말로 최고의 격언”(P.21)으로 평한다. 옮긴이는 서문의 전문을 한번에 소개하지 않고 중간마다 분할 배치하여 역시 편집의 묘를 꾀하고 있다.

 

수록된 격언들의 풍부함과 소개된 고전들의 다양함을 통해 독자는 에라스무스의 고전 이해의 폭과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그리스 로마 시대 및 이후 중세에 이르기까지 고전 사상가와 작가들의 수많은 저작과 문학작품들을 거리낌없이 자유자재로 인용하고 있다.

 

격언은 우리의 속담과 금언 또는 고사성어 등과 유래와 형태 및 용도 등에서 유사하다. 그래서 소개된 몇몇 격언은 우리에게도 오히려 귀에 익다. ‘유유상종’, ‘시작이 반이다’, ‘연기를 피하다 불 속에 떨어지다’, ‘모기를 코끼리로 만들다’, ‘밑 빠진 독. 게다가 에라스무스는 단순히 고전의 소개에만 그치지 않는다. 몇몇 격언들에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뚜렷이 남기고 있다.

 

사도 바울은 저마다의 생각이 다름을 인정함으로써 당파 간의 논쟁을 피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오늘날 신학자들이 만약 바울의 이런 넉넉함을 조금이라도 배운다면 요즘 비일비재한 바, 하찮은 문제로 그렇게까지 싸우고 갈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문제들은 그저 잊고 지내도 좋았을 것이며, 잊는다고 신앙심에 흠결이 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사람 수만큼 생각도 다르다’, P.87)

 

사람들은 왕후의 궁전에서 또 다른 종류의 원숭이들도 만날 수 있다. 만약 이들에게서 걸치고 있는 겉옷과 목걸이, 팔찌 등 장식을 걷어내면 그야말로 돈만 밝히는 형편없는 인간을 보게 된다.”(‘원숭이가 주단 관복을’, P.140)

 

격언을 선별하는 기준 설정과 과정에서, 그리고 고전 문헌에서 적절한 인용을 뽑아내는 과정에서 그리고 이의 당대 현실과의 비교에서 편집자의 주관과 해석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신예찬>의 맹아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에라스무스는 상아탑과 수도원에 갇혀 탁상공론만 일삼는 인물이 결코 아니다. 그는 시대의 모순과 아픔을 처절히 인식하고 이를 개선하고자 하는 열의를 지녔으나 시대적 한계에 가로막혀 스러져 간 참된 지식인이다.

 

이 책은 재미 외에 독자에게 두가지 유용성을 제공한다. 하나는 에라스무스에 대한 보다 심층적 이해가 가능하게 되는 점이다. 그리고 실용적 관점에서 인용된 그리스 로마 고전들을 통해 정서적 거리감을 극복하고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친근감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에라스무스를 통해 서양 고전들이 화석과 박제 상태에서 뛰쳐나와 우리와 같이 뼈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들의 글임을 새삼 발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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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브 공작부인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9
라파예트 부인 지음, 류재화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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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대함과 정중함이 앙리2세 치세 말년만큼 프랑스에 눈부시게 나타난 적은 없었다. 왕은 우아하고 친절하고 다정했다. 디안 드 푸아티에, 그러니까 발랑티누아 공작부인을 향한 왕의 열정은 이십 년 전에 시작되었지만, 그때보다 덜 열렬하지도 덜 눈부시지도 않았다.”(P.9)

 

이 작품은 이렇게 시작한다. 해서체의 단정하고 우아한 문체는 작가의 특질을 그대로 전달한다. 급작스런 감정의 변화에 빠지지 않고 침착하며 조리 있지만 차갑지 않고 차근차근한 어투.

 

남녀 간의 애정사는 자고로 여러 문학작품의 끊이지 않는 샘이 되었다. 이는 유럽의 궁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서 왕 이후 궁정풍의 사랑은 훌륭한 기사의 필수 덕목으로 자리 잡았다. 더구나 결혼이 사랑이 아니라 이해관계에 따라 맺어진 경우 배우자와의 무심한 관계는 애인을 필수적으로 요구하게 되었으며 오히려 드러내놓고 자랑할 꺼리가 되곤 하였다. 이는 부정과 불륜으로 진전될 소지가 많았기에 도덕적 문제가 존재한다.

 

이 작품이 출판된 게 17세기 후반이며, 작품의 배경은 16세기 중반의 프랑스 왕정 체제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작품 속에 드러나는 여러 공공연한 부정의 정황으로 보건대 당대는 이미 도덕적으로 많이 허물어진 시기임을 알게 된다.

 

야망과 연애, 이것이 궁정의 정신이었고 사내들이건 여자들이건 하나같이 그 일에 전념했다......권태도 몰랐고 여유도 몰랐다. 쾌락에 혹은 밀통에 바빴다.”(P.23)

 

작품의 전반부는 대체적으로 프랑스 궁정 비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권력을 잡기 위한 각 세력들의 비상한 합종연횡, 그리고 국제 정세와의 맞물림 등. 때문에 16세기 서양사, 특히 프랑스사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상당한 혼란을 겪을 정도다. 물론 라파예트 부인의 당대 독자라면 부연 설명 없이도 충분히 이해를 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작가의 의도는 아마도 사랑과 야망[사업]이 이질감 없이 동거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비추는데 있을 것이다. 클레브 공작부인은 사랑을 모르는 채 결혼한다. 시장에서는 적당한 수요가 있을 때 얼른 거래를 성사시켜야 한다. 자칫하면 악성재고로 전락하게 된다. 클레브 공작은 부인을 열렬히 사랑하는데, 공작부인은 남편에 대한 존중과 호의만 가지고 있으니 비극은 여기서 배태되었다.

 

샤르트르 양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클레브 공작은 자기를 만족시킬 만한 감정을 그녀가 갖기에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그가 말하는 감정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P.32)

 

애정 없는 결혼 생활도 현실에서는 영위에 어려운 것은 아니다. 사랑 외에 결혼 생활을 존속시킬만한 다른 요소는 충분하므로. 그런데 배우자가 아닌 인물에게 사랑의 감정이 눈떠지게 되면 매우 곤란하게 된다. 사랑은 이성으로 제어되는 게 아니다.

 

클레브 공작부인은 도덕적 정숙함이 남다르다. 그런 그녀는 사랑에 강하게 저항하지만 운명처럼 다가온 느무르 공에 대한 사랑은 가랑비에 옷 젖듯이 그녀의 마음에 깊게 스며들었다. 그녀의 부질없는 저항은 눈물겨울 정도다. 그녀는 결코 자신의 감정을 상대에게 표출하지 않았으며 비난받을 만한 행위도 저지르지 않았다.

 

클레브 공작부인은 이것이 자신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말에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았고, 그 말을 묵인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척, 그가 말한 여자가 자기라고 생각하지 않는 척해야 할 것도 같았다. 말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고, 또 절대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P.81)

 

그녀는 자신의 감정 상태를 남편에게 고백한다. 사실 이건 매우 어처구니없는 행동이다. 모르는 게 약이며, 아는 게 병이라고 했던가. 제아무리 부부 간이라도 자신의 내밀한 감정까지 털어놓는 것은 오히려 원만한 결혼생활을 저해함을 그녀는 미처 몰랐던 것이다. 다만 자신의 진정성과 정숙함을 남편이 이해하여 주기를 바랐을 뿐이다. 사랑에 이해는 없다.

 

당신의 고백은 너무나 고결해서 나로서는 당신을 전적으로 믿을 수밖에 없소......당신은 그 어떤 아내도 남편에게 보이기 힘든, 가장 위대한 정직을 보여주었고, 그래서 나를 가장 불행한 남자로 만들어버렸소.”(P.139)

 

질투는 클레브 공작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그녀는 남편의 죽음의 원인이 자신임을 알고 커다란 충격과 절망과 자책에 빠진다. 어쨌든 남편의 사망으로 그녀는 혼자가 되었으며, 법적, 도덕적 장애물도 사라졌다. 그녀에 대한 느무르 공-뭇 여성이 질시할 만한 완벽한 남성-의 구애는 한층 집요해졌다.

 

그녀는 앉아 있던 자리에 두 시간이나 머문 후, 결국 그를 보는 것은 자신의 의무와 전적으로 상반되는 일이니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집으로 돌아갔다.”(P.204)

 

이 작품은 16세기 프랑스 궁정사를 잘 보여주는 역사소설이며, 당대 상류층의 비도덕적 애정사를 비판하는 사회소설이다. 또한 클레브 공작부인의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변화를 미묘하게 그려낸 사랑소설이기도 하다. 여기서 작가는 격정의 분출 없이 절제된 어조와 행동 묘사를 통하여 공작부인과 공작, 공작부인과 느무르 공 간의 삼각관계에서 빚어지는 긴장과 갈등을 탁월하게 그려내고 있다. 매우 예민하고 위험한 소재임에도 구질거리지 않고 끈적거림 없이 담백한 뒷맛을 풍기는 것은 역시 작가의 솜씨일 것이다.

 

작품해설에서 알베르 카뮈가 이 작품의 빼어난 스타일을 칭찬하였다고 한다. 확실히 다른 작가 및 작품과는 구별되는 독특함이 한눈에 불쑥 다가오지는 않지만 은연중에 다름을 인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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