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여신의 바보 예찬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 지음, 차기태 옮김 / 필맥 / 201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표제만 보고는 도무지 무슨 책인지 감을 잡을 수 없다. 저자를 확인하기 이전까지는. 옮긴이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한다. 한글세대에 한글식으로 제명을. 하나 교과서가 고쳐지지 않는 한 우리는 <우신예찬> 또는 <광우예찬>에 더 익숙하다. 비록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세계사 수업에서 달달 외운다.

 

너무나 유명한 고전은 잘 안 읽게 된다. 읽지 않아도 마치 읽은 듯한 기독감(旣讀感) 때문이거나, 아니면 고전이라는 무게감에 짓눌려 지레 겁먹고 펴볼 엄두도 내지 않는다. 게다가 고전은 대체로 낯설고 딱딱하며 재미가 없는 편이 사실이다. 그래도 중압감을 무릅쓰고 고전을 펼치면 의외로 많은 수의 작품들이 그리 어렵지 않으며 오히려 호기심을 유발할 정도임을 알게 된다. 에라스무스의 이 책도 마찬가지다. 어떠냐 하면 이런 재미나고 흥미진진한 책을 이제야 보게 되다니 하며 후회가 물밀 듯 몰려올 정도다.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의 마르틴 루터, <유토피아>의 토머스 모어 등과 동시대를 살아간 인물이다.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가톨릭과 중세 봉건 영주 체제가 여전히 굳건히 위세를 떨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두면 당대의 종교 세력과 정치 세력을 풍자하는 것의 어려움과 위험성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에라스무스는 바보 여신을 화자로 내세웠다. 바보 여신이니만치 그의 어조와 주장 등은 신랄해서는 안 된다. 어리숙하게 보여야 하며, 내용도 우스꽝스럽고 해학적으로 비쳐야 한다. 그 속에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날카로운 비수로 드러나지 않게 당대를 파헤쳐야 하는 어려운 작업이기도 하다.

 

전체적 구성은 바보 여신이 자신이야말로 정말로 칭송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며 자화자찬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하여 온갖 그리스 로마의 전거를 들먹이는 동시에 엄숙하고 도덕적인 체 하는 속물들의 실체를 우회적으로 까발린다. 그네들의 위선적인 생활과 언행에 매우 비판적인 반면, 평민들에 대해서는 우호적이다. 그들은 삶에 충실하며 간혹 발생하는 잘못도 어리석음과 본능에 충실한 데서 비롯한다고 본다.

 

이쯤에서 표제를 되돌아본다. 에라스무스는 표제에서 이미 반어법을 사용하였다. 중세 사회에 대한 풍자라는 표면적 이해만 가지고 볼 때, 그가 당대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바보 여신으로 의인화하여 풍자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이는 완전한 착각과 오해다. 그는 바보 여신의 입을 빌려 오히려 바보 여신의 주장에 가깝게 사는 것이 인간의 행복에 도달하는 길이라고 역설한다.

 

바보 여신은 종교적 엄숙주의, 경건주의 및 철저한 도덕주의를 배격한다. 인생이 슬프고 지루하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으며, 어리석음이 가미될수록 인간의 삶은 유쾌하고 즐거워진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의 삶에 있어 유희의 필요성, 사랑과 우정에 있어 맹목적 요소가 차지하는 비중 등 자신의 영역이 발휘하는 힘을 과시한다. 부부 관계나 처세술에 있어 때로는 환상과 아첨이 중요하다는 것도. 이것의 절정은 바로 자기 사랑일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이성과 종교와 도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본능 자체이다.

 

이렇게 전반부는 바보 여신의 자기 예찬으로 전개되는데, 후반부는 다소 지향점이 다르다. 본격적으로 풍자와 비판에 나서는 것이다. 그는 학문은 행복을 위해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본성에 맞게 사는 것이므로 불행하지 않으며, 상식은 어리석음과 통하므로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학문에는 결코 가까이 가지 않고 자연이 인도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P.104)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현인 티를 내는 위선자를 일일이 열거하면서 그 허위를 사정없이 까발린다. 문법학자, 웅변가, 책을 쓰는 사람들, 법률가, 철학자, 신학자, 수도사들. 특히 마지막 두 유형에 대해서는 인정사정없다. 예수의 사도들조차 신학자와 신학상의 문제에 관해 논의를 한다면 다른 영혼의 도움을 필요로 할 것이라며(P.181), 그리고 수도사들은 누구에게나 혐오의 대상이 된다고 하며(P.193). 이 점에서 당대에 종교의 해악이 얼마나 지대하였으며, 종교개혁 운동의 발생이 불가피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바보 여신은 왕과 제후들, 귀족들도 빠뜨리지 않는다. 하지만 곧바로 교황, 추기경, 주교 등 성직자에게로 넘어간다. 이는 세속 권력자에 대한 은연중 눈치 보기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세속권력을 교황이 움켜쥐고 있기에 성직자들의 부정과 부패가 그만큼 극심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마지막 단락에서 그는 각종 전거를 들먹이며 어리석음이야말로 모든 축복과 행복의 근원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스 로마의 고전은 말할 나위도 없고 성서도 다채롭게 인용하고 있다. 정리해서 말하기를 기독교는 어떤 형태로든 어리석음과 일종의 혈연관계를 맺고 있는 게 분명해요. 그렇지만 지혜와는 거의 관계가 없고요.”(P.263)라고 하면서 가장 큰 바보는 그리스도의 경건함에 대한 열정에 완전히 사로잡힌 사람들이라고 언급한다. 당대에 진실한 신앙인이 얼마나 적은지와 아울러 역설적으로 참된 신앙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언명이다. “경건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보상은 광기”(P.270)라는 것이다.

 

에라스무스가 살아가던 시절은 과도기이자 혼란기였다. 공고한 중세 체제는 많은 균열이 있음에도 여전히 종래의 권력 끈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치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마르틴 루터를 위시한 종교개혁 운동이 각지에서 발생하여 세속권력자들과 연합하여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종교와 이념의 갈등은 세속적 욕망의 충돌보다 훨씬 더 위력적이며 무자비한 유혈사태를 불러옴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극단이 춤추는 곳에서 중용은 자리 잡기 어렵다. 중용은 자칫 공공의 적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며 섣부른 오해의 대상이 되기에도 딱 알맞다. 그럼에도 정의와 진리를 주장하면서 극단적 충돌도 마다하지 않는 것은 그 주장의 가부와 진위 여하를 떠나서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에라스무스는 당대 사회현실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판의 메스를 날렸지만 결코 직설적이지 않다. 바보 여신의 어리석고 우스움을 전면에 내세워 해학 속에 깃든 진실을 은연중에 알게 하였던 것이다. 그런 그로서는 낡은 체제의 허위도 새로운 체제의 위선도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참된 지식인의 자세와 고뇌가 엿보인다면 억측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핸드메이드 픽션
박형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들은 단편집의 제명을 대개 가장 핵심적인 단편작품의 표제를 그대로 가져온다. 간혹 수록작품들의 배경, 작품세계 등을 공통으로 아우를 수 있는 제명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분명 박형서는 후자의 예를 따랐다.

 

소설치고 핸드메이드가 아닌 것이 있으랴? 더욱이 픽션이 아닌 소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굳이 작가는 이 제명을 선택하였다. 그 연유의 추론은 곧 작가의 의도를 밝히는 첩경일 수도 있다.

 

소설은 분명 허구를 그린다. 하지만 작가가 소설 속에 그리는 인물과 사건, 배경 등은 완전한 허구가 아니다. 현실에 기반을 둔 그럴듯한허구인 것이다. 따라서 작가는 현실 세계의 많은 요소를 관찰하고 작품에 그대로 또는 가공하여 도입한다. 그래서 독자는 소설 속 내용을 그럴듯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박형서는 아니다. 수록된 8편의 단편들은 철저하게 작가가 지어낸 이야기들이다. 간혹 나타나는 인물과 배경 등의 현실성은 오히려 이질감을 두드러지게 하여 비현실성을 배가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그에게 있어 그럴듯함은 별다른 고려 요소가 아니다. 역으로 그럴듯하지 않음을 노리고 작위적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전개해 간다. 산신령과 물신령이 서로 싸우며, 호숫가의 커다란 바위 구멍에 머리가 끼어 죽는다든가, 고양이가 스스럼없이 사람처럼 행세하며, 금도끼은도끼 실험으로 산신령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측정하는 시도 등은 얼핏 터무니없지만 독자는 그 황당함에 오히려 매료된다. 그의 상상력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피리 부는 사나이를 소재로 천년의 시간과 전 세계의 무대를 비좁게 만든다.

 

박형서의 이 작품집은 분명히 판타지 문학이다. SF나 유령이 나오는 작품만 판타지는 아니다. 현실에 기반하지만 이성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현실의 비현실적 속성을 다루는 게 오히려 수준 높은 판타지다. 언뜻 황당무계할 수도 있지만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현실에 잠복해 있는 진실을 재발견할 수 있도록 해준다.

 

<너와 마을과 지루하지 않은 꿈>은 화자의 독특한 시점이 흥미롭다. 2인칭 전지적 작가시점이라고 할까. 화자는 언제나 너와 마을을 배회하며 관찰한다. 결말은 충격적 의외성을 안겨준다. 이색적인 이야기 자체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정류장>에서는 순진한 부정(父情)에 가슴 맺힌다. 아들을 위해 버스정류장이 들어서도록 온갖 노력을 하는 아버지. 염원대로 정류장은 들어서지만 이는 오히려 그들 부자와 마을에 재앙을 가져오고 만다. 수십 년 후 화자가 우연히 수몰된 고향을 찾게 된 것은 결국 마음 한구석에 잠재된 아버지에 대한 소멸되지 않는 기억의 작용이리라. 이제 그는 낡은 정류장을 떠날 수 있게 되었으며, 아버지도 그를 떠나보낼 수 있게 되었다.

 

<나무의 죽음><열한시 방향으로 곧게 뻗은 구 미터가량의 파란 점선>은 산신령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지닌다. 전자에서는 도로 개설을 두고 산의 정령과 물의 정령이 서로 다투는 과정이 현실과 교묘하게 결합되어 엉뚱하지만 별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후자는 설화를 과학적으로 재현해 본다는 황당함이 등장인물들의 진지한 학술적 태도에 압도당해 독자마저도 숨을 죽이고 재현 결과를 기다리게 만든다. 산과 물은 본시 하나임에도 인간 앞에 그들은 갈라져 버리고, 자연은 죽어간다. 그네들을 분열시키고 망쳐버린 것은 외견상 정령들 자신이지만 실상은 이를 부추기고 밀어붙인 인간들이다. 이러한 건방진 인간들에게 자연의 가공할 위력을 보여준 것이 금도끼은도끼의 산신령이다. 설화를 자체로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는 그들에게 산신령은 외경의 대상이 아니라 한낱 분석과 실험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신의 아이들>은 무엇보다 시() 자체에 대한 논의가 흥미롭다. 언어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이를 극복하고 본질을 드러내려는 가열찬 치열함이 시인의 숙명임도. 그것은 도구를 달리하지만 모든 예술에 공통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천재성이 아무에게나 주워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술은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랬다면 살리에리는 좌절하지 않았을 것이며, <달과 6펜스>의 비극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원로시인의 자괴감도.

 

<갈라파고스><자정의 픽션>도 이채롭다. 둘 다 동물이 주된 인물이라는 점, 그리고 이름이 동일하게 성범수라는 점. 작가의 지향은 인간이 아닌 동물의 시각에서 사건을 구성하고 전개하는 데 있다. <너와 마을과 지루하지 않은 꿈>도 동물-땅벌-의 시각으로 구성되지만 관찰자에 그칠 뿐 사건을 주도적으로 이끌지는 않는다. 반면 이 두 작품에서는 당당한 주인공 역할을 수행한다. 둘 다 순환구조라는 점도 흥미롭다. 인간의 허울을 벗겨버리면 인간 자체는 매우 연약하고 초라한 존재다. 그럼에도 가난한 연인이 꾸는 꿈은 평화롭고 안온하며 행복하리라.

 

수록작 중 가장 길며 웅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것이 <나는 부티의 천 년을 이렇게 쓸 것이다>인데, 천년을 훌쩍 뛰어넘고 동서양을 넘나드는 장쾌함에 압도된다. 고대 인도의 종교적 요소를 피리 부는 사나이이야기와 교묘하게 연결시키고 불사의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 일주의 대탐험을 겪고 우리나라에 오게 한다. 영원한 생명을 버리고 유한적 존재가 되기로 결심하여 평범한 늙은이가 된 부티=한분태의 엄숙하고 진지한 한마디가 패러디되는 장면을 보자.

 

박형서, 그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자 스토리 크리에이터이다. 어떤 순간에도 절로 웃음을 자아내는 진지한 골계미는 작가 특유의 미덕이다. 소설마저도 철학과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시기다. 거창한 작품해설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야기 본연의 힘과 재미를 끌어낼 수 있는 박형서 만의 프로젝트가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멜라 2 대산세계문학총서 80
새뮤얼 리처드슨 지음, 장은명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2권은 1권에 비하면 다소 장황하고 지리함을 독자에게 안겨준다. 그것은 B씨의 개과천선 및 파멜라에 대한 정식적 청혼과 이후 결혼에 이르는 과정이 죽 나열되고 있음에 연유한다. 흡사 주인공의 치열한 분투를 그린 TV 드라마가 주인공의 성공 이후에 갑작스레 긴장이 풀리고 느슨해지는 것과 유사하다. 이것을 해결하는 방안은 작가의 뛰어난 문체적 역량 아니면 새로운 갈등 구조의 도입이 될 것이다. 리처드슨은 후자를 택하였다.

 

파멜라에 대한 스콰이어 B씨의 감정과 태도는 점차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단순한 열정의 대상에서 인생의 동반자로 진지한 고민을 거듭하는 것이며, 이것은 호칭 변화를 통해 두드러진다. 처음에 B씨는 하인들 앞에서 파멜라를 언제나 그 애또는 그 년등 여실히 주인으로서 하녀에 대하는 게 확실한 하대를 하였다. 이것이 어느 순간 아씨라는 호칭으로 격상(P.65, P.71)된다.

 

작중에서 B씨는 악과 선으로 커다란 내외적 변모를 이루는 반면, 파멜라는 시종일관 흠결 없는 자세를 유지한다. 10대 중반이라는 나이가 도저히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언행은 완벽하고 지혜와 사려가 깊으며 신앙 면에서도 독실하다. 게다가 사상 면에서도 일면 평등의식을 품고 있을 정도로 앞서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모두가 원래 동등했잖아요...이 오만한 사람들은 인생이 얼마나 짧은 시간인지를 결코 생각하지 않는 게 틀림없어요. 그리고 그들이 아무리 자만하더라도 그들이 어쩔 수 없이 굴복해서 우리와 동등하게 되어야만 하는 때가 올 것이라는 것도 생각지 않나 봐요.”(P.76~77)

 

이 작품에 대한 당대와 후대의 많은 비판 중 하나는 지나치게 모범적이고 완벽한 파멜라가 오히려 비현실적이고 때로는 가식적인 인상을 준다는 점이다. 부모님께 알려드린다는 미명 하에서 자신에게 벌어진 남녀 관계의 제반사를 천진난만하게 미주알고주알 수다를 떠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순진을 가장한 허영의 그림자가 살짝 스치는 느낌도 드는 게 (아주 조금이지만) 사실이다. 후에 B씨의 누이 레이디 대버스와 벌어진 일을 B씨에게 천진하게 이야기하는 파멜라를 보면서 정말 순수하던지 아니면 남매관계를 분열하기 위한 가식이 아닌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한편 B씨에 대한 파멜라의 심적 태도는 다분히 이중적이다. 그녀는 귀족의 첩이 되는 것은 단호히 거부하지만, 정식 아내가 된다는 것에는 환호작약하며 받아들인다. 그녀가 누리는 지극한 행복감은 내심에 이를 진작부터 기대하고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분명히 있다. 그녀의 내밀한 욕망이 드러나는 대목은 결혼 후 아내로서 집안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며 나날을 보낼지를 B씨에게 말하는 장면(P.86~89)인데, 장장 3면에 걸쳐 거침없이 나열함으로써 자신이 준비된 아내임을 표출하고 있다.

 

사실 이런 식으로 파멜라에 대하여 삐딱한 시각으로 보는 태도는 문제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은연중에 뛰어난 인물에 대하여 시기심을 품는 경향이 크다. 지나치게 훌륭하면 오히려 반감을 초래한다. 옛말에도 물이 너무 깨끗하면 고기가 살지 못하다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파멜라의 성공에는 기본적으로 빼어난 미모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녀가 예쁘지 않았다면 B씨가 그녀에게 눈도 돌리지 않았을 것이며, 더구나 그녀의 미덕을 발견하는 것도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파멜라 반대파의 지적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유사 이래로 인간사회에서 여성을 보는 남성의 시각은 변함이 없으며 이것은 생물학적 차원으로 연결되는 사항이므로.

 

어쨌든 다시 순수한 시각으로 파멜라를 바라보자.

 

파멜라의 덕성은 그녀의 주위 인물과 적들을 모조리 감화시키는 위력을 발휘하였다. B씨 저택의 하인과 하녀들은 말할 것도 없고 레이디 대버스조차도 결국은 자신을 받아들이게끔 하였다. 게다가 커다란 어려움을 예상하였던 주위 귀족들과의 교류도 뛰어난 미모와 자태, 덕성으로 수월하게 극복하였다. 이처럼 파멜라의 미덕은 혼탁한 세상을 비추는 한줄기 등불이 되어 점차로 주위를 밝게 만들었는데, 이는 작가가 다소간의 지리함을 무릅쓰고 파멜라에게 부여한 사명이며 동시에 독자가 깨닫고 감화되기를 바라는 동기일 것이다.

 

B씨는 이렇게 말한다.

난 당신이 지금 그대로, 또 지금까지 그랬던 대로 있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사람이 되는 것도 바라지 않소. 당신이 더 이상 훌륭해지는 것은 불가능하니 말이오.”(P.349)

 

새뮤얼 리처드슨은 분명한 교육적 의도를 이 작품에 담고 있다. 그것은 여성의 참된 미덕과 본분, 진정한 부부 간의 관계가 어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방향 제시(그의 도덕관은 확실히 시대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이다. 이로써 당대의 도덕률에 경종을 울리기를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도 이 작품이 문학으로서 예술성을 갖추지 못하였다면 아무런 호응도 받지 못하고 잊혀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수백 년 동안 살아남았고 여전히 영국 근대소설의 기원으로 인정받는다는 딱딱한 평가를 제쳐 놓더라도 책을 몇 줄 읽어나가다 보면 파멜라의 무구한 재잘거림에 쏙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점이 이 작품의 진정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멜라 1 대산세계문학총서 79
새뮤얼 리처드슨 지음, 장은명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원제는 <파멜라; 또는 미덕의 보답>이다.

 

이 작품은 두 가지 두드러진 특징을 지닌다.

우선 서간체 소설이라는 점. 번역본 기준으로 9백면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 전부 편지 형식이다. 처음엔 너무 지루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심도 들었다. 그런데 막상 책장을 펼치니 전개가 매우 흥미진진하여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었다. 다만 이 작품은 진정한 의미의 서간체는 아니고, 서간체 형식을 차용했을 뿐임이 금방 드러난다. 통상 서간체는 두 주인공 간의 주고받음을 포함하는데, 여기서는 오로지 파멜라의 일방적 글쓰기만이 존재한다. 어찌 보면 형식만 다를 뿐 자전적 고백이라는 측면에서 일기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 중반부터는 수신자가 표시되지 않고, 요일이 대신 표기되어 일기라고 해도 무방하다.

 

표제는 이 소설의 다른 특징을 드러낸다. 미덕의 보답이라고 하여 작가가 교훈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귀족 주인에게 순결을 위협받는 하녀가 현명한 처신으로 순결을 지킬뿐더러 주인과 결혼을 하게 되어 행복과 신분상승을 쟁취한다는 줄거리는 이를 명백히 한다. 전반부는 위협과 감금에도 정조를 지키려는 파멜라의 눈물겨운 사투가 독자를 사로잡는다면 후반부는 주인에게 진정한 사랑을 일깨워준 파멜라가 계급의 벽을 깨고 여주인으로 입신함으로써 마찬가지로 독자에게 대리만족을 제공한다. 일견 매우 통속적이지만 그만큼 대중의 정서에 잘 부합하는 것이어서 당대에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의 진정한 가치는 여성심리에 대한 우아하고 섬세한 묘사에 있다. 편지를 쓰는 이가 파멜라이므로 관찰자는 자연스레 여성의 시각에서 인물과 주변을 조감하게 된다. 10대 후반의 소녀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압력과 위험에 결연히 맞서지만 내심은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할 것인가. 우월한 신분과 권력을 가진 자 앞에서 그녀는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리는 한없이 여리고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그녀는 부모님께 몰래 보내려는 편지에서 이 모든 것을 한 치도 숨김없이 진실 되게 토로한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기대와 낙담, 이 모든 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소박하게 기술되어 있어 작가가 당연히 여성일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그만큼 작가의 가면이 거의 완벽하다.

 

파멜라는 당대의 관점에서 이색적 존재이다. 그녀는 하녀라는 낮은 신분이므로 계급적 오만과 독선에 젖어있지 않으며, 부모의 교육과 신실한 종교적 감화로 고상한 도덕 기준을 갖추었으며, 돌아가신 주인마님의 교육으로 여느 숙녀 못지않은 교양을 쌓을 수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언제나 낮은 곳을 바라보며 그녀의 가슴은 항상 따스함을 품고 있다.

 

풍요로우면서도 불의한 것보다는 가난과 정숙함을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편안하겠니?”(P.52)

 

한 시간 동안 순결하게 사는 것이 오랜 세월 동안 죄지으며 사는 것보다 나아요. 또 순결을 지키려다 제 생활이 아주 비참해진다 해도 정결을 지키는 저의 행복한 시간을 제가 만약이라도 최후의 일각까지 연장시키지 않는다면 전 제 자신을 절대로 용서하지 못할 거예요.”(P.249)

 

이렇게 그녀는 내내 한결같이 순결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며 정조와 재화의 타협적 거래를 단호히 거부한다. 이것이 작가가 세상에 전하는 중대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만큼 당대의 도덕적 관념이 많이 흐트러졌음을 역으로 드러낸다.

 

18세기 초반이라는 시대적 배경, 엄연히 신분과 계급의 차별이 공인되던 사회임을 감안하면 파멜라의 의식은 매우 선구적이다. 자신의 욕망 충족을 거부한다는 이유만으로 비록 하녀일지라도 물리적 위협과 신체적 감금을 마음대로 자행하고 이것이 용납되는 시절이다. 그녀가 아무 잘못이 없음에도 주인에게 무릎 꿇고 눈물로 애원하는 역전된 현상,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강압적으로 순결을 박탈당하게 되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한 호소 등에서 출발하여 점차적으로 결국은 신 앞에 동등하다는 인식으로 확장된다.

 

파멜라의 고난은 이 1권에서 내내 계속된다. 그녀가 겪는 고통과 위험은 독자에게 공감대와 흥미를 불러일으켜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엇갈린 쾌감을 선사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롱뇽과의 전쟁
카렐 차페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단언컨대 이 작품은 매우 이색적인 걸작이다. 이색적이라 함은 그 제재와 기법 면에서 기존의 정통 문학과는 그 궤를 완전히 달리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인간이 아닌 일개 도롱뇽을 작품 전면에 내세우는 대담성은 물론이고 지능을 가진 도롱뇽이 인간의 진화과정을 답습하고 이내 이를 위협하는 단계는 비록 인간의 관점이긴 하지만 경이와 동시에 등골을 서늘하게 만든다. 안드리우스 스케우크제리의 발견과 발전을 최대한 생생하게 기술하기 위하여 작가는 다양한 기법을 사용한다. 언론보도, 보고서, 여행기, 표어, 전보 등은 기존 소설 서술의 한계를 극복하고 작품에 입체감을 부여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창의적 접근 면에서는 오히려 현대 문학보다도 뛰어나다.

 

걸작이라 함은 통속의 함정을 용케 벗어났음을 의미한다. 대중적 흥미와 신기함에의 호소에만 열을 올리다가 문득 단명에 그치고 마는 작품들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그래서 고전 명작은 오히려 외양 면에서는 수수하다. 작품의 내적 본질을 밝히고 드러내는데 성공해야 불멸의 고전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탐구이다. 차페크 역시 인간이라는 끈을 결코 놓지 않는다. 도롱뇽에 빗대어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역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장을 덮은 후에도 서늘한 메시지가 가슴과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그만큼 작가와 작품의 문학적 역량이 탁월한 덕분이다.

 

차페크 최초의 성공작 희곡 을 읽은 이라면 이 소설이 주는 의미가 보다 명확히 다가온다. 1차 세계대전 종전의 혼란기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야의 혼란기에 작가는 소재와 형식은 다르지만 내용과 주제의식 면에서 상당히 공통된 작품을 발표한 것이다.

 

인간이 로봇을 발명한 동기는 고귀한 동시에 불순하다. 노동의 고통에서 인간을 벗어나게 해주고자 하는 인간적 동기는 또한 인간에게 있어 노동은 삶의 본질적 요소임을 간과하는 것이기도 하다. 더욱이 로봇에게 보다 지적인 노동을 시키기 위하여 부여한 지능은 결국 인간을 닮은 로봇을 낳게 되며, 이는 자연스레 로봇의 각성과 인간과의 대결로 이어지게 된다.

 

도롱뇽은 어떠한가? 진화단계에서 고립된 진귀한 생물체를 인간세계에 끌어낸 것은 그들의 노동력을 활용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진주채취 사업이 한계에 도달하자 이내 토목공사 동원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그들을 잘 부려먹기 위해 역시 인간에 준하는 교육이 이루어지고 그들은 급속도(개체와 군집 모두)로 인간화 되어갔다. 그래서 유한한 지구를 둘러싸고 도롱뇽과 인간은 전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이렇게 기계인 로봇과 생명체인 도롱뇽에게 주요한 역할을 부여하고 있지만 그들은 결국 인간에 대한 안티테제로 설정되어 있다. 차페크의 관심은 그들에 비추어 본 인간 자신의 모습이라고 해야 한다.

 

소위 신대륙 발견과 산업혁명 이후 팽창되어 온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는 20세기 초에 이르러 일대 극성기에 도달하였다. 정복과 개척, 그리고 상품과 시장이 그들의 좌우명이 되었다. 이 소설에서도 역시 도롱뇽의 노동력을 활용한 간척사업과 지하개발이 언급되고 있다. 인간은 도롱뇽 덕분에 비로소 만물의 영장이 되어간다는 장밋빛 전망에 젖어들었으니 이는 기계문명 예찬론과 흡사하다.

바르고 당당한 도롱뇽 시대의 사람들은 더 이상 <사물의 본질>에 대해 숙고하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숫자와 대량 생산에만 관심을 쏟을 것이다...도롱뇽들은 한마디로 <>을 의미한다.”(P.267)

 

노예제도는 인류 역사상 장기간 존속되어온 제도이다. 인간은 상품화하는 그 비인간성과 비윤리성을 이유로 근대들어 서서히 소멸되었다. 우리는 로봇과 도롱뇽에 재산적 가치를 부여하여 즉, 상품화하여 이를 거래할 수 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로봇과 도롱뇽이 지능을 갖게 되어 인간에 버금가는 존재가 되었다고 할 때 그래도 역시 상품 거래가 타당할지와 그네들이 이를 계속 용인할지는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사안이다.

 

인간은 동물 중에서 유일하게 의도적으로 집단 살육을 자행하는 종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여러 설명이 분분하다. 그 중에 하나, 인간이 먹이사슬에서 최상층이며, 인간을 견제할 다른 종이 부재한다는 사실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외부 견제가 불가능하다면 내부 견제가 자연스럽게 싹트는 것이다. 그래서 개별적 살인뿐만 아니라 집단적 살인이 그침 없이 발생하며, 이것이 중지될 것을 누구나 소망하지만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전쟁의 불가피성은 전화에 휩쓸린 사람들의 비참과 고통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차페크는 16년 만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세계정세는 나날이 암울해지고 인간성에 대한 신뢰는 점점 허물어지고 있다. 지난 시간동안 그가 찾고자 하고 나누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란 존재의 의미와 정체성 회복이 아니겠는가. 그에게 있어 인간의 가치는 거시적이고 영웅적이지 않다. 오히려 미시적이고 소시민적인 평범한 일상 속에 진리가 존재한다.

 

무겁고 진지한 주제를 이렇게 위트 있고 산뜻하게 포장할 수 있는 능력은 차페크 특유의 미덕이다. 그는 독자를 숨 막힐 정도로 거칠게 몰아붙이지 않는다. 다년간 언론 생활을 했던 데다 타고난 기질은 아마겟돈의 디스토피아에서도 미소를 자아낸다. 작품의 결말은 분명 비관적이지만 낙관적 요소를 숨기지 않는다. 솔직히 이 방대한 팩션 작업을 치밀하게 수행한 작가의 역량에 감탄과 질시를 품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 장 '작가, 혼잣말을 하다'는 <평범한 인생>을 상기시킨다는 점도 언급하고 싶다.

 

아울러 이 멋진 작품을 아름다운 책으로 현재화시킨 공로는 옮긴이와 출판사에 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했다. 책의 만듦새가 신통치 않으면 일단 책에 손이 가질 않으며, 읽기에도 힘들다. 영문학을 전공한 옮긴이는 무슨 계기로 차페크의 세계에 빠져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지속적 관심과 세심한 노력으로 상당히 낯선 작품임에도 전혀 언어상의 곤란을 느끼지 않고 작품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도록 해주어 감사를 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