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사용법 - 제16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대상작 신나는 책읽기 33
김성진 지음, 김중석 그림 / 창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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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원고 공모 대상작

 

모름지기 동화는 읽을 때 다소 유치한 맛이 있어야 제격이다. 본격 성인 대상 문학인마냥 젠체하고 거들먹거리면 동화로서 미덕이 미흡하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완연한 동화이다.

 

소위 생명장난감을 소재로 한 내용은 사실 좀 섬뜩하다. 생명을 지닌(또는 흉내 낸) 장난감이라니! 작가의 의도는 이해되지만 읽는 내내 개운찮은 뒷맛을 남기는 게 또한 사실이다.

 

공언된 일차적 주제는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가족 내 엄마의 역할과 의미에 대한 반성. 진정한 사랑으로 자식을 보듬어주지 않고 물질적 서비스만 제공하는 것은 참된 엄마가 아니다.

진짜 엄마이시군요. 생명장난감은 집안일은 잘 하지만 아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거든요.”(P.106)

 

한편 이차적 주제는 외형적 물질만능주의와 생명존중 부재에 대한 비판이 될 것이다. 비록 이 작품은 가상의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눈길을 오늘로 돌린다면 생명장난감은 바로 애완동물이 된다. 혹자에게는 가족의 일원으로 대우받지만 여전히 단순한 장난감 취급받는 경우도 많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니 무수한 버림받은 개와 고양들이 존재하게 된다. 근본적인 고민은 생명을 지닌 존재가 장난감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근원적인 차원이 돼야 할 것이다.

 

작품 내에서 생명장난감 엄마가 고장 난 것으로 의심받는 대목은 현대인에게 있어 매우 시사적이다.

저거야! 저 장난감이 소리 내어 웃었어! 생명장난감은 마음이 없어야 해! 저건 불량품이야! 잡아가야 해! 폐기처분해야 한다고!”(P.87)

 

인간의 인간다움은 바로 마음에 있다. 희로애락을 느끼고 동정과 연민의 감정을 지닐 때 우리는 인간적이라고 칭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마음이 존재하는 탓에 불량품으로 분류되는 사회. 그것은 속도와 경쟁만이 찬양받고 승자가 독식하는 비정한 우리 사회를 일컫는 것에 다름 아니다. 마음을 가지면 약해지고 약해지면 뒤처지고 도태되어 패배하는 사회,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접어두고 냉혹해지기를 요구한다.

 

이 작품은 단순한 듯 하면서 실로 무시무시한 함의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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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정리 편지 창비아동문고 229
배유안 지음, 홍선주 그림 / 창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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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동화치곤 특이하게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석규가 파격적인 세종대왕 역할로 나와 화제가 되었던 드라마와 일맥상통하는 주제를 다루는 것도 이채롭다.

 

세종대왕이 심심풀이로 또는 자기만족에 겨워서 한글이라는 새 글자를 만들지 않았음은 훈민정음 서문에서도 익히 드러난다. 언문일치와 애민(愛民)이야말로 한글 창제의 기본 정신이다. 자신이 다년간 애써 만든 글자가 백성들에게 잘 수용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할 것이다. 여기서 세종대왕은 자신이 만든 글자를 어떻게 테스트하였기에 확신을 가졌을지 사뭇 궁금하다.

 

이 작품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장운과 세종의 만남은 그래서 작위적이지만 불가피하다. 세종 외에 반포 전에 장운에게 한글을 가르쳐 줄 이가 누가 있겠는가. 이후 작품방향은 두 갈래로 전개된다. 장운으로부터 누이 덕이, 난이, 오복이로, 또한 석수장이들로 한글은 자연스레 확산된다. 이는 한글의 습득 용이성과 실용성을 웅변적으로 입증하는 셈이다. 아울러 글자는 지식의 권력화를 가능하게 한다. 한글은 양반들이 독점적으로 소유해왔던 지식 특권을 평민들이 더 이상 인정하지 않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한글 창제에 그토록 사대부들의 반대가 극심했음은 자명한 것이다. 즉 한글은 은연중에 계급의식을 표출하는 셈이다.

 

장운의 행장을 통해 한글의 보급이 이루어지는 과정이 작품의 날줄을 구성한다면, 계급 간 갈등과 피지배층의 곤궁의 묘사는 씨줄을 담당한다. 이것이 맞물려서 이야기의 사건과 갈등을 증폭하여 추진력을 높이는 동시에 이야기에 흥미를 증폭시켜 준다.

 

작가는 이에 만족하지 않는다. 장운이 점밭과 석수장이들로부터 돌 깍는 기술을 배우는 과정을 비중 있게 다루면서 스스로를 낮추면서 진정한 장인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 낮은 곳으로, 아래로 임하는 것, 그것은 바로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뜻이 아니겠는가.

 

물이 들어와 펑퍼짐한 연꽃 속에서 찰랑였다. 마치 온 세상을 연꽃이 감싸고 있는 듯했다. 살짝 아래로 처진 꽃잎 하나가 물길을 터 주었다. 맑은 물이 연꽃에 감싸였다가 다시 흘러 내렸다.

아래로 죽 이어지는 물줄기가 작은 강 같았다.”(P.208)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동화로서는 주제의식이 너무 진지하지 않나 생각되기도 한다. 과연 어린이들이 한글 창제의 깊은 함의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기도 하는 한편, 요즘 아이들은 상당히 지적 이해수준이 높으므로 충분히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차피 수용 여부는 그네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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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밥 공주 창비아동문고 249
이은정 지음, 정문주 그림 / 창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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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원고 공모 대상 수상작

 

동화는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무대에 따라 현실 동화와 가상 동화로 구분할 수 있다. 말 그대로 현실 동화는 현실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일상적 생활 속에서 인물과 사건을 서술한다. 반면 가상 동화는 가상의 시공간이 배경이 된다. 그것은 먼 과거나 미래가 될 수 있으며, 지상의 실재 공간이 아닌 지하, 해저 및 우주를 무대로 삼을 수 있다.

 

가상 동화는 독자에게 공상과 환상을 제공하기 용이하다. 독자는 제한된 현실을 떠나 무한한 상상을 가슴속에 품을 수 있다. 게다가 호기심을 유발하기도 좋다. 반면 이야기를 비현실적으로 받아들이면 동화의 목적은 많이 상실된다. 이에 비해 현실 동화는 일단 생소함과 이질감을 주지 않아서 좋다. 독자는 친숙한 일상에서 간과하였던 생활을 재발견하는 기쁨과 즐거움을 누린다. 어찌 보면 가상 동화와 현실 동화는 양면성을 지닌 듯하다.

 

이 작품은 전형적인 현실 동화다. 그리고 동화가 주는 정통적 재미와 교훈을 듬뿍 담고 있어 읽는 동안 미소는 물론 콧잔등을 짠하게 한다.

 

안공주가 맞이하는 현실은 행복하지 못하다. 엄마 없는 편부 슬하, 게다가 아빠는 알콜중독 재활원에 가있다. 생활비는 국가에서 나오는 보조금이 전부. 이 작품에는 이외에 청년실업, 집주인과 세입자 간 관계 등 평범한 소시민 사회의 일상과 갈등이 반영되어 있다.

 

정상적이지 못한 환경의 아이들은 자칫 비뚤어지기 십상이다. 어린 그네들이 감당하기에는 세상의 어둠과 시련은 혹독하다. 그래서 이 작품의 핵심적 사건은 안공주의 일순간의 비행에서 비롯한다. 탈탈 털어 560원으로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안공주 눈앞에 등장하는 해님마트에서 배달 온 수북한 장바구니. 견물생심(見物生心)이며 사흘 굶어 남의 집 담벼락 안 넘는 이 없다는 속담은 허튼소리가 아니다.

 

여기서 현실과 동화는 차이를 보인다. 현실 세상에서 그까짓 남의 장바구니에 손댔다고 두고두고 양심이 찔릴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하지만 안공주는 그렇지 못하다. 이는 안공주의 본성이 어려운 환경에도 선함을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럴듯한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도 오히려 맛이 없고, 폭식증에 걸린 양 아무리 먹어도 포만감을 느끼지 못하며, 그나마 먹은 게 체하여 몸이 온전치 못하여 쓰러지기조차 한다.

 

전형적인 동화답게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속물덩어리로 비쳤던 팽 여사는 의외로 가슴이 따뜻한 아이엄마이며, 해님마트의 사장 또한 돈에만 눈먼 장사꾼이 아니다. 안공주의 아빠 또한 반드시 알콜 중독을 극복할 것을 다짐한다.

 

이렇게 사건과 갈등은 해결된다. 선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교훈도 어린 독자에게 남겨준다. 그런데 이게 다일까?

 

어른이라면 여기서 한걸음 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부모의 자격과 마음가짐, 국가의 소년소녀가장에 사회복지 정책의 제고 필요성 등 거창한 구호는 생각하지 말자.

 

안공주가 원하는 것은 특별한 게 아니다. 따뜻한 가족, 소박한 밥상. 이런 자그마한 소망조차도 이루지 못하는 가정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이의 실현과 지원을 위한 개인을 물론 사회와 국가의 역할과 노력은 어떠한가. 여기에서 허울 좋은 정치 구호는 꼬리를 감춰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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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조금 이상한 사람들
카렐 차페크 지음, 홍성영 옮김 / 민음사 / 199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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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페크는 미스터리 소재에 관심을 많이 보였다. 그런 그가 작심하고 쓴 이야기 모음집이 1929년에 출간된 <오른쪽 호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왼쪽 호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이 책은 두 권에서 각각 18편씩 추려내어 전체 36편으로 단편들을 구성하고 있다. 당초 신문에 게재한 이야기들이므로 각 이야기들은 매우 짧은 분량을 지니고 있어 편당 서너 장을 넘기지 않는다.

 

차페크의 작품 경향에 공상과학이니 미스터리니, 다소 판타지 풍이 많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 이채롭다. 유독 그가 특히나 흥미를 보인 것은 다름 아닌 범죄의 수사와 재판에 관련된 소재다. 이 책에 수록된 이야기들의 대다수가 바로 이러한 유형에 해당한다. 그의 주요 작품들을 조감해 보면, <호르두발>이 이의 전형적인 사례이며, <유성><평범한 인생> 역시 범죄는 아니지만 특정 인물의 삶을 추적해가는 과정을 다루는 점에서 유사성이 깊다. <마크로풀로스 사건>도 역시 재판과 관련된다. 그가 범죄 수사와 재판에 천착하는 이유는 뭘까.

 

인간의 본성은 평상시 외견상의 모습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평소 온화하고 친절한 사람일지라도 극도의 슬픔과 분노에서는 부동심을 유지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인간 본연의 적나라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순간인 것이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국외자는 겉에 드러난 외양과 결과만을 가지고 사건을 판단하기 마련이다. 일견 당연하다. 소위 객관적 증거는 사건 연루자 간의 내면적 심리상태를 중시하지 않으므로. 그래서 처음 순간에 사건 당사자를 매도하다가 후에 숨겨졌던 진실이 드러나면 모두 머쓱해하곤 한다. 때론 법과 정의조차도 진실을 대변하는 데 실패한다.

 

농장 사건에서 재판장은 이렇게 말한다.

이보게, 그 친구도 나나 자네처럼 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거야. 그것은 내가 소를 죽인 백정이나 흙두덕을 파는 두더지를 심판하는 것과 같아. 가끔 이건 우리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자네도 내 마음을 알거야, 법이나 정의의 문제가 아니야...”(P.142~143)

 

어린 백작 아가씨에서 화자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이제 모든 것이 밝혀졌다.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 사건의 전체적인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모든 사실의 폭로, 가성, 처참한 사실, 실망, 고통스러운 경험. 이 모든 것들은 진실의 한 작은 부분일 따름이다. 전체적인 진실은 더 위대한 것이다...사랑에 빠진 사람은 정말 아름답고 놀라운 존재이다. 이것이 진실의 더 위대한 모습이다.”(P.214)

 

차페크는 일관되게 인간 본성의 발견과 회복을 주창한다. 그가 주목한 인간성은 거창한 것도 아니며 특별하지도 않다. 가장 평범하고 소박한 삶에 진실한 본성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초기작 에서 비롯하여 철학소설 3부작을 지나 <하얀 역병>까지 변함없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혼란기에서 그는 인간성에 대한 옹호만이 서구 문명의 파국을 막는 길임을 본능적으로 각성한 듯하다. 전쟁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가장 철저한 파괴가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그는 거짓과 진실이 교묘하게 섞여 있고 서로 충돌하는 현장에 주목하였으리라. 그것이 바로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이다.

 

우표 수집<평범한 인생>을 연상시킨다.

내가 살아온 삶은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내 자신의 삶은 펼쳐지지 않았다.”(P.288)

 

배심원은 후일 <호르두발>3부를 예고한다.

재판장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이 사건이 끝나지 않으리라 생각했을까?...그러는 동안 아무런 결론 없이 폐회되었다...거듭되는 시간 동안 사람들은 죽은 카다니크나 그의 결혼에 관해 얘기하지 않았다. 대신 나 혹은 다른 배심원 즉 우리 자신에 관해 얘기하고 있었다.”(P298)

 

개별 이야기는 자체로도 무척이나 흥미진진하여 재미가 넘친다. 때로는 작가의 위트와 유머가 반짝반짝 빛을 발하여 절로 웃음을 머금게 된다.

 

히르쉬의 실종의 결론이다.

이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품의 질이라는 사실이다. 만약 그 아르메니아인이 싸구려 염색의 카펫 대신 양질의 카펫을 밀수했다면 히르쉬를 해치운 사실이 그렇게 일찍 발각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엉터리 물건을 팔면 곧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다.”(P.259)

 

하브레나의 판결의 서두 부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문을 읽을 때 먼저 사회란의 범죄 기사부터 읽는다. 도덕적, 법적 함양 때문인지 잠재적인 범죄성 때문인지는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열성으로 읽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래서 신문에는 반드시 범죄 기사가 있어야 한다.”(P.266)

 

더욱이 단순히 재미의 전달을 넘어 쭉 읽어나가다 보면 아, 작가가 단편들을 통하여 말하고 싶은 게 무엇일지 어렴풋하게나마 느낌이 다가온다. 그것이 범상한 탐정작가들과 차페크의 차별점이다.

 

그런데 그것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진실일까?

 

※ 표제가 나중에 <단지 조금 이상한 사람들>에서 <단지 조금 이상해 보이는 사람들>로 변경되었다. 수록작 중에서 표제를 따온 것이라면 나중 표제가 보다 올바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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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인생
카렐 차페크 지음, 송순섭 옮김 / 리브로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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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노년에 과거를 회상할 때 비교적 평탄한 인생을 살아온 것으로 자평하곤 한다. 물론 자신의 일생을 책으로 엮으면 대하소설이 될 것이라고 할 정도로 드라마 같은 삶은 누린 일부 사람들도 있지만.

 

이 소설은 차페크의 철학소설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아울러 가장 탁월한 작품이라는 게 주관적인 나의 평가다. 그만큼 이 작품이 주는 흡입력은 앞의 두 작품을 훌쩍 뛰어넘는다. 그것은 나 자신 또한 평범한 인생을 살고 있기에 작가가 던지는 화두가 남다르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작품은 노년에 다다른 한 노신사가 심장에 이상이 있음을 깨닫고 자신의 삶을 정리할 생각을 품으면서 시작한다. 소위 말하면 자서전, 즉 자신에 대한 전기를 쓰는 것이다. 전기는 위대한 인물의 삶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일진대 평범한 사람이 전기를 쓰는 게 온당할지 화자는 회의한다. 이것은 우리들 모두의 의구심이기도 하다.

 

화자의 삶은 스스로 밝히듯이 단순하고 정돈된 삶”(P.19)이었다.

 

나의 삶에서는 비일상적이고 극적인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돌이켜보면 내 뒤에 놓인 직선적이고 분명한 길을 걸어온 것이 기쁘다.”(P.23)

 

그는 평범한 삶에 대한 전기를 쓰는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인생이란 별난 모험이 아니고 일상적 법칙의 흐름이다. 삶에 나타나는 특이하고 비일상적인 것은 단지 삶의 바퀴가 덜컥거리는 소리일 뿐이다. 오히려 정상적이 평범한 삶을 찬미해야 옳지 않을까?”(P.24)

 

전체 34장 가운데 전반부 19장까지는 화자의 삶의 기록이다. 소소한 돌출은 있을지언정 그는 비교적 평탄한 생을 누렸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삶의 역정을 추적하는 일은 더구나 지루하기는커녕 자못 재미가 있다. 역시 범인(凡人)의 삶도 타인의 한살이는 자신의 그것과 비교하여 저절로 반추하게 되며, 자신이 겪지 못한 또 다른 인생 행로를 탐험하는 듯한 기분을 자아낸다.

 

그는 반복적으로 자신의 생이 평범하였다고 진술한다.

 

강물 물결처럼 늘 똑같고 늘 새로운 생활...늘 똑같고 늘 새로운 반복...이것이 인생이란 말인가? 그렇다. 이것이 인생이다.”(p.86)

 

그리고 자신의 일생은 아름답고 단순한 질서”(P.90)로 이루어져 있음을 자각한다. 어릴적 철도의 추억, 프라하의 철도 플랫폼, 그리고 철도청의 취직 등.

 

단순한 우연에 기인하는 것은 아무것도, 거의 아무것도 없었고 모두가 필연의 사슬로 연결되어 있었다.”(P.87~88)

 

인생은 보이지 않는 연관성들로 점철된 심오하고 필연적인 단일체로 나타났다.”(P.90)

 

이렇게 평범한 인생의 가치와 미학의 발견에 아름다운 의미를 부여하는 게 이 작품의 미덕이구나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칠 즈음, 내면의 다른 목소리가 등장한다.

 

20장부터 등장하는 또 다른 나의 존재는 화자의 삶이 앞선 기술만큼 평범하지도 단순하지도 않았음을 강력히 주장한다. 표면적 평범성 속에 사실은 자아의 갈등과 억압과 타협이 잠복되어 있음을! 이제 화자의 삶에 대한 정반대의 해석이 가능하다.

 

그건 행복한 인생이 아니었고 끔찍한 삶이었어. 그걸 모른단 말인가?”(P.150)

 

전반부의 평화롭고 행복한 나날은 새로운 조명을 받는다.

 

남자에겐 자신의 일을 몰두할 수 있는 곳이 가정처럼 느껴지는 법이다.”(P.119)

이것은 가정, 즉 아내와의 거리가 멀어졌음을 시사한다.

 

놀랍게도, 우리가 사랑을 시작할 때와 신혼시절에 대해서도 거의 회상하지 않는다. 제일 많이 떠오르는 생각은 우리들의 역에서 보낸 조용하고 변화 없는 시절이다.”(P.123)

그는 역과 가정의 주인이었어. 그것은 작고 폐쇄된 세계였지만 그의 것이었고 그를 숭배했어. 그때가 사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은 아내를 회상할 때면 실은 바로 이 시기를, 그의 자존심을 강하고 건강하게 만족시켜 주던 이 시기를 생각하는 거야.”(P.147)

 

이후 숨어있던 다양한 자아 또는 인생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모두 8개의 삶인데, 그 중 평범한 자아, 억척스런 자아, 우울증 환자인 자아의 3개는 외부로 표현되어 화자의 공식적 삶을 대변하는 속성이 되었고, 나머지는 잠재되어 이따금 은밀히 표출되곤 하였다.

 

여기서 또다시 인생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제시된다.

 

인생은 여러 상이하고 가능한 삶들의 집합이며 그 중에서 단지 하나 또는 몇 개만이 실현되고, 반면 다른 삶들은 단편으로서나 가끔 발현되든지 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P.212)

 

이 집합은 자체의 단일성을 지니면서도 내적 긴장과 갈등 또한 내포하고”(P.214) 있다. 이러한 집합 내의 갈등이 인생의 드라마를 구성한다.

 

여기에 개체를 초월하여 세대로 이어진다면 무수한 사람들의 총합이 가능하다. 즉 우리가 선택 가능했던 삶의 경우의 수는 거의 무한대로까지 확장된다. 그래서 화자는 이렇게 깨닫는다.

 

내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이 평범한 삶의 흐름이 갑자기 내게 전혀 다르게, 한없이 위대하고 신비스럽게 보인다. 그건 내가 아니었고 우리였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았고 얼마나 총체적인 삶을 살았던 것인가!”(P.221)

 

우리들 각자가 어떤 다른 가능성을 살기 때문에 우리는 똑같은 사람들이다...우리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면 우리 모두는 평범한 사람들이다.”(P.236~237)

 

그것이 진정하고 평범한 인생이며 가장 평범한 인생이다.”(P.237)

 

작품의 표제 평범한 인생은 이런 의미에서 일종의 역설이다. 그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가장 비범한 인생을 담고 있음을 지칭하는 것이므로.

 

차페크의 3부작을 통해서 이 소설의 의의를 되새겨 본다. 그의 추구는 삶에 있어 진실은 무엇인가에 있다. 즉 개인의 진정한 정체성의 존재와 발견 가능성에 대한 탐문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개인의 삶이, 표면적으로 평범하고 단순한 인생일지라도 실은 그것이 자아의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구현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런 무한(無限)이 유한(有限)한 특정의 개인의 삶으로 수렴되는 것, 그것이 인생의 신비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작품 말미에 철학소설 3부작에 부치는 작가의 말이 7면에 걸쳐 수록되어 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내가 3부작에 읽은 것과의 차이 및 내가 놓친 것 등을 종합적으로 비교할 수 있어 매우 유익하다.

 

차페크의 예술적 극성기를 대표하는 3부작 가운데 가장 걸작인 동시에 핵심인 이 작품이 절판되어 시중에서 구할 수 없음은 너무나 유감스럽다. 조만간 새로운 판본으로 나오길 열렬히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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