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초록숲 정원에서 온 편지
카렐 차페크 지음, 윤미연 옮김, 요제프 차페크 그림 / 다른세상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차페크는 극작가, 소설가로서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다양한 활동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비평집, 대담집, 여행기, 서한집, 우화 및 동화 등등. 이 책은 이색적인 차페크의 면모를 알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를 부여한다.
이 책은 1929년에 발표된 <원예가의 열두 달>이다. 여기서 원예가라 함은 주택에서 조촐하게 취미삼아 화초를 심고 가꾸는 이들을 지칭한다. 그는 순전히 아마추어 애호가의 관점에서 열두 달을 기술하고 있다. 형식이나 내용 등을 감안하면, 잡지 게재물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솔직히 소설과 희곡의 스타일과 내용을 통해 이해한 차페크에게 원예가의 자질이 있다는 것은 의외이다. 이래서 작품과 작가를 섣부르게 동일시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는 화초에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다. 낯선 품종들을 구분하고 줄줄이 쏟아내는 것은 여간 공력이 아니다. 화초에 관한 한 전혀 무지한 나로서는 경이롭기조차 할 지경이다.
여기서 차페크는 어깨에 힘을 빼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헤친 채 원예에 심취한 이들의 전형적인 대변자이다. 본인이 직접 손대지 않으면 결코 이해하지 못할 원예의 즐거움과 어려움 등을 다소 해학적으로 묘사하여 읽는 이의 마음을 흐뭇하게 만든다. 게다가 형인 요제프 차페크의 우스꽝스런 삽화가 간간이 들어가 있어 글과 그림의 어울림도 제법 그럴듯하다.
1월부터 시작하여 12월까지 월별로 원예가가 바라보는 일 년은 통상의 열두 달과는 상이하다. 한겨울인 원예가는 1월에도 한가하지 않으며 새봄을 기다리며 철저한 준비에 매진한다. 이윽고 날이 풀려 꽃이 피어나는 계절이 오면 그의 몸은 한가할 틈이 없으며 하루가 부족할 지경이다. 비가 안 와도 또 많이 와도 고민하며, 여름휴가를 마지못해 떠나서도 머릿속에는 온통 정원에 대한 생각뿐이다. 이 대목에서 문득 법정 스님의 ‘무소유’가 떠오른다. 즐거움이 집착하는 변하는 것은 찰나의 순간.
마른 잎이 떨구어지는 시절, 이제 사람들은 한 해가 마무리된다고 하지만 원예가에게 가을과 겨울은 또 다른 봄이다. 땅속에서 봄철을 기약하는 무수한 생명의 약동을 감지할 수 있으므로. 이렇게 정신없이 열두 달을 보면서 원예가가 정원을 가꾸는 목적은 물론 아름다운 화초를 감상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정원일에 치이느라 막상 원예가는 감상할 여유도 시간도 갖지 못한다. 눈 덮인 한겨울이 되어야 비로소 여유가 생기지만...
원예가는 정원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자연은 시련을 줄지언정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자연을 벗하는 이들은 그래서 순박하다. 이는 간교함과 악으로 물들어 가는 사회에 대한 나직하지만 강력한 경고이다.
“베이컨만큼 기름진 흙...이 흙들은 저마다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반면에 미끈거리는 흙...이런 흙들은 모두 추하고 한심하다. 인간이 지닌 냉혹함, 완고함, 사악함만큼이나 추하다.” (P.184)
“정원은 결코 완성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정원은 인간 세상과 인간이 하는 모든 일과 유사하다.” (P.197)
“정말로 정원에는 죽음과 같은 것이 전혀 없다. 잠과 같은 것도 없다. 우리는 단지 한 계절에서 또 다른 계절로 나아갈 뿐이다. 우리는 삶에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삶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P.212)
“미래는 이미 우리 내부에 있다. 지금 우리 내부에 없는 것은 미래에도 역시 없을 것이다. 우리는 새싹이 땅 밑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지 못한다. 우리는 미래가 우리 내부에 있기 때문에 미래를 알지 못한다...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미래의 은밀한 분주함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지난날에 대한 향수나 미래에 대한 불안 같은 것은 되잖은 헛소리라고,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이 되는 것, 즉 성장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할 것이다.” (P.219~220)
차페크는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어렵고 험난한 시기를 정면으로 살아간 작가이다. 미증유의 인재(人災)는 인간에 대한 신뢰와 인식의 밑바닥부터 뒤흔들어 놓았다. 그는 정원일을 통하여 인간에 대한, 나아가 생명에 대한 본질은 흔들림이 없음을, 따라서 여전히 미래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됨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닐는지.
차페크의 이 작품이 후에 헤르만 헤세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데, 연대적 배경을 감안하면 일견 당연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