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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충 극장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04
카렐 차페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6월
평점 :
카렐 차페크의 희곡 선집이다. <로봇(R.U.R.)>을 제외한 주요 희곡을 모두 수록하여 한 권으로 차페크의 희곡 세계를 조감할 수 있는 좋은 기획이다.
애초 희곡으로 문학세계를 시작했던 만큼 차페크에게 희곡 장르는 후의 소설과 함께 그의 양대 작품 축을 이루는 중요성을 지닌다. 희곡은 통상적이라면 곧 연극 상연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소설과 달리 관객 앞에서 공연 형식을 통해 내용을 외부로 표출해야 한다. 속성상 외향성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소설과 차이를 보인다.
그는 이미 <로봇>을 통해 인간이 기계 문명의 편의에 굴복하고 인간다움을 상실해 갈 때 인류의 미래는 매우 어둡게 됨을 경고하였다. 이 책에 수록된 희곡들에서도 그의 메시지는 뚜렷하다. 즉 인간의 인간다움에 대한 집착이다.
차페크의 활동 시기는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불안한 휴지기다. 전대미문의 대전으로 서구의 구체제는 무너져버린 반면 새로운 질서는 아직 태동하지 않고 있어 사회는 혼란스럽고 불안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일각에서는 어두운 악의 세력이 서서히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이때 인간과 세상에 예민한 촉수를 드리운 작가는 무슨 글을 쓸 수 있을 것인가.
<곤충 극장>(<곤충의 생활> 또는 <곤충의 세계> 등으로 번역되기도 함)은 기실 외피만 곤충일 뿐 사고와 행동 양태는 인간 그 자체다. 전 3막의 각 막별로 화려하고 부박한 삶을 쫓는 나비들, 생존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끊임없이 살육을 저지르는 맵시벌, 그리고 국익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대대적인 전쟁을 일으키는 개미들이 등장한다. 이들 곤충은 얼핏 기대와는 달리 전혀 희화화되어 있지 않으며, 오히려 직접적으로 인간을 다룰 때보다도 더 비열한 인간 세상의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기에 이건 벌레들이지 인간이 아니라는 여행자의 절규는 역설적으로 처절하다. “다시 인간들을 찾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P.65)
그런 면에서 내내 탄생의 고통을 겪는 번데기의 결말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래고 힘든 산고 끝에 무언가 거대함을 내포한 그는 탄생과 거의 동시에 곧 죽음을 맞이한다. 덧없는 찰나의 삶을 살아야 하기에 오히려 하루살이의 생명에 대한 예찬과 갈구는 절실하고 아름답다. 하루살이처럼 민달팽이처럼 스러지고 계속 땅을 기더라도 만물은 모두 살기를 바란다. 겉으로는 하찮고 가치 없이 여겨지더라도 주어진 생명을 경시하지 않고 소박하게 꾸려나가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함을 작가는 주창한다.
<마크로풀로스의 비밀>은 야나체크의 동명의 오페라로 유명하다. 사람은 누구나 무병장수를 기원한다. 불로장생은 진시황제만의 꿈은 아니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 환갑은 우스워진지 오래고 백 살도 멀지 않다는 전망도 나오는 요즘.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장수를 넘어 영생을 할 수 있다면 인간의 행복을 지고에 이를 것인가. 앞서의 하루살이와는 반대되는 관점에서 생명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생의 처방을 받아 수백 년을 살아오고 있는 에밀리아 마르티. 그녀는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하여 여러 개의 이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최고의 성악가로 청자의 혼을 앗아갈 정도이면서도 그녀의 노래에서는 영혼이 느껴지지 않으며, 그녀와 동침한 프루스는 얼음처럼 차가워 시체를 안고 있는 기분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면서 그녀가 다시 영생을 갈구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것은 유한한 생명을 지닌 존재의 공통적 두려움일 것이다.
“모든 게 차갑고 무감각해져. 선에도 무감하고, 악에도 무감하고. 천국에도, 이승에도 무감해져...그런데 당신들한테는 만사에, 만물에 의미가 있잖아. 아, 하느님, 한때는 나도 당신들 같았는데! 소녀였고, 여자였고, 행복했는데, 나도…나도 인간이었는데! 맙소사, 하느님!” (P.224~225)
후반부는 전적으로 획득한 영생 처방의 처리에 관한 등장인물 간의 쟁론이다. 일견 어처구니없는 황당한 논쟁이지만, 진정으로 절실하기 그지없는 견해들이기도 하다. 특정인의 소유로 할 것인가, 특정 계급에 국한할 것인가 또는 인류 전체에 공개할 것인가. 이들의 논란은 가장 어린 크리스티나가 제조법을 불태우면서 잠잠해진다. 크리스티나는 말없이 웅변한다. 인간의 인간다움은 삶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감수하는 데 있음을. 유한함 속에서 가치를 더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에 생명의 아름다움이 있음을. 삶의 영원성은 개체 내가 아니라 개체 간을 통해서 실현된다는 것을.
<하얀 역병>은 10여 년 후에 씌어진 작품이므로 시대적 배경을 달리하지만 작품의 분위기와 주제의식은 여일하다. 나치 세력이 이미 역병처럼 유럽을 휩쓸고 있는 시기다. 이 작품에는 임박한 전쟁의 음울한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한편 인류의 불행을 막고 평화를 회복하려는 작가의 심경이 갈렌의 행동을 통해 두드러진다.
50대 이상만 걸리며 발병하면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역병. 와중에 독재자인 총사령관은 영국과의 전쟁에 광분한다. 역병과 전쟁, 양자는 모두 인류의 운명에 위협을 주는 요인이다. 지휘권을 가진 이들은 역병의 심각성을 외면한다, 적어도 자신들이 감염되기 전에는. 갈렌은 역병 치료법의 공개 조건으로 전쟁 중지를 요구한다.
이 작품에는 다양한 성격과 유형의 개성적 인물이 등장한다. 의사로서의 윤리와 역병 치료법 발견자로서의 명예 사이에서 이중적 언행을 구사하는 시겔리우스, 대조적으로 세속적 영광에 관심 없이 오로지 빈민과 평화 실현에 헌신하는 이상적 인물 갈렌, 국가의 리더로서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지만 막상 감염되자 죽음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히는 크루그 남작과 총사령관. 여기에 경제 침체기의 세대 간 갈등과, 전쟁을 열렬히 구호하는 군중 심리에 휩싸인 국민들의 모습 등. 이것은 조만간 닥쳐올 참혹한 비극의 적나라한 예시라고 할 것이다.
작품의 끝은 허무하기조차 하다. 군중에 짓밟힌 갈렌의 최후는 평화 달성의 불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을 뿐더러 동시에 하얀 역병의 치료법이 소실되어 총사령관의 목숨은 물론 인류 전체의 생명이 위태로운 처지에 놓이게 됨을 여실히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