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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벨룽겐의 노래 ㅣ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17
허창운 옮김 / 범우사 / 1997년 2월
평점 :
품절
다음은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확인한 부르군트왕국에 대한 자료의 내용이다.
동(東)게르만의 일파였던 부르군트족(族)이 세운 서양 중세 초기의 왕국(413∼436, 443∼534).
1세기경에 오데르강(江)과 비슬라강 중류에 거주하던 부르군트족은 군디카르 영도하에 3세기부터 점차 남서쪽으로 이동하여 413년에는 서(西)로마의 맹방부족(盟邦部族)으로서 마인강(江) 남쪽에서 라인강 중류 지역에 있는 보름스를 수도로 왕국을 세웠는데, 436년에 서로마와 동맹관계에 있던 훈족(族)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이 사건은 나중에 전설화되어 《니벨룽겐의 노래》의 주제가 되었다...
<니벨룽겐의 노래>는 바로 이 부르군트왕국과 훈족 사이에 벌어진 사건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구전되어 오던 영웅담이 기록화된 것은 13세기 전후, 게다가 단일한 작가에 의하여 창작된 것이 아닌 만큼 다양한 사건과 일화들이 시대와 관계없이 구전 과정에서 덧붙여졌다. 북유럽 게르만족의 원형 신화의 자취가 여실히 남아 있으며, 여기에 후대 프랑크왕국에서 벌어진 내전의 이야기가 작품 전개에 깊은 영향을 드리우고 있다.
<니벨룽겐의 노래>를 바탕으로 리햐르트 바그너는 북유럽 신화를 가미하여 독자적인 서사를 구축하고 여기에 음악을 추가하니 유명한 <니벨룽겐의 반지>가 그것이다. <반지>의 주요 등장인물 중에 알베리히, 하겐, 지크프리트, 브륀힐데 등이 등장함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여하튼 독일 고전문학의 일대 대작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12~13세기는 프랑스와 독일에 걸쳐 많은 구전 설화 및 로망스들이 문자화되는 시기로서 프랑스에서는 크레티앵 드 트루와를 필두로 마리 드 프랑스의 이름이 보이며, 독일에서는 <파르치팔>과 <트리스탄> 등의 대서사시가 창작되기도 하였다. 즉 르네상스에 앞선 소박한 문학 부흥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역사적 가치를 떠나 <니벨룽겐의 노래>의 예술적 가치는 어떠한가. 이미 옮긴이도 언급한 것이지만, 번역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운문으로서의 매력은 상실되었다. 따라서 하나의 산문문학으로서의 판단 여지만 남게 되었다. 우선 구비문학인 만큼 플롯의 전개가 매끄럽고 통일적이지 못한 태생적 한계는 여전하다.
작중 인물과 사건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중립적이다.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는 경우도 있지만 재빠르게 밸런스를 회복한다. 영웅 서사시에 흔히 있기 마련인 영웅 편애와 권선징악에 입각한 악인에 대한 증오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이는 작품을 유장하게 흐르게 하는데 효과가 있는 반면, 극적인 긴장의 조성에는 불리한 측면을 지닌다. 작가의 시점은 저 하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듯하다. 그곳에서는 세상사와 인간사의 다툼은 하찮게 보이기 마련이다.
이 작품의 특징적 요소를 살펴보면, 제1부와 제2부의 등장인물은 동일 인물이라 할지라도 편차가 매우 크다. 부르군트족의 왕 군터는 트리스탄 이야기에서 마크 왕을 연상시킨다. 과거에는 고귀하고 훌륭하였지만 현재는 나이 들어 그렇지 못한 노쇠한 영웅이었던 그(“그가 일찍이 강했던 적이 있었다 해도 이제 그는 더 이상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639연))는 수십 년 후 제2부에서는 강력하고 위대한 영웅으로 여전한 존재감을 떨친다. 이는 “젊은” 기젤헤어가 세월의 흐름에 무관하게 계속 “젊은 왕”으로 남아있고 뤼디거의 딸과 약혼한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이런 관점에서 크림힐트의 미모도 시간을 가뿐히 초월한다. 언뜻 계산한 바에 따르면 크림힐트가 복수를 하기 위해 동족들을 초청하였을 때 최소 쉰 살에 다다랐을 터인데, 전설 속 영웅들은 거의 신적인 존재인가보다.
제1부의 주인공 지크프리트는 반신반인의 영웅이다. 브륀힐트가 지크프리트를 증오하게 된 사유는 일면 이해가 되는 부분인데, 여기서 군터 왕은 소극적인 반면 오히려 하겐이 이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기실 하겐이 군터 왕을 설득하여 지크프리트를 암살하게 된 근본적 목적은 명확하다. 하겐은 단순히 왕비의 복수를 도모하지 않는다. 부르군트왕국보다 더 큰 세력을 떨치고 부를 자랑하는 지크프리트를 제거함으로써 얻게 될 정치적, 경제적 이해를 노린 것이다. 그것이 군터 왕을 설득한 가장 큰 논리이다.
“그는 군터왕에게 지크프리트가 죽게 되면 많은 왕국들의 영토 지배권을 얻게 될 것이라고 속삭였고, 그로 인해 군터왕은 심한 갈등 속에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870연)
브륀힐트와 크림힐트 간의 갈등은 남편의 지위를 통해 대변되는 여인들의 신분 질서에 관한 사항이다. 브륀힐트가 보기에 군터는 왕이며, 지크프리트 역시 비록 왕이지만 군터의 종사일 뿐이다. 반면 크림힐트의 입장에서 군터와 지크프리트는 지위에 있어 동격이다.
“지크프리트는 군터와 완전히 동등한 신분이랍니다!” (819연)
중세의 관념에서 신분과 계급질서는 매우 엄격하며 개인과 사회를 떠받치는 근본적 개념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상호간의 신분을 확인함으로써 사회 내 질서를 유지하려고 하며, 오늘날과 달리 이러한 질서를 혼란스럽게 하거나 뒤흔드는 일은 매우 패역적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래서 두 여왕 간에는 한 치도 양보 없이 팽팽한 신경전과 언쟁이 계속되었다.
제1부의 주인공이 지크프리트라고 하면, 제2부에서는 하겐이 그러하다. 아니 이 작품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인물이 바로 하겐이다. 하겐과 군터왕의 관계는 단순한 왕과 신하의 관계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봉건제 하의 왕과 제후에 해당하지만, 하겐은 더 나아가 왕에게 독자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권신(權臣)으로 이해된다. 하겐은 간웅이자 영웅이기도 하다. 제2부에서 하겐의 절대적 활약상에서 죽음에 초연한 그의 태도를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모든 불화의 원인이기도 하다. 지크프리트를 죽이고, 크림힐트에게서 모든 보물을 빼앗으려 하며, 훈족의 땅에 가서는 에첼과 크림힐트의 아들을 죽임으로써 화해의 여지를 없애는 그의 모든 행동을 군터왕은 감히 저지하지 못한다. 물론 이러한 그의 행동이 군터왕에 대한 충성을 기본으로 하고 있음은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니벨룽겐의 노래>는 중세 기사문학의 대표작 중 하나로 일컬어지지만, 여기서 우리는 기사도의 본령이 아닌 쇠락하고 일그러진 기사도만을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지크프리트의 영웅성은 제1부에서 끝을 맺는다. 이는 그의 신화적 영웅성이 현실적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암시하며, 신화적 관념이 더 이상 사람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다는 점이기도 하다. 부르군트족의 죽음을 앞둔 처절한 항전에서 보이는 당당한 기개, 뤼디거의 고귀한 고민 등이 그나마 돋보이지만, 이 분쟁의 끝은 승자가 없다. 분쟁 당사자들은 모두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여기서는 나치 독일이 그렇게 추앙하던 ‘독일정신’과 ‘독일인’의 본령을 찾을 길 없다. 작가가 노래한 것은 결국 영웅 정신의 소멸과 스스로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인간 정신의 간교함, 비열함의 발현 결과가 아닐까.
문학 작품에서 우열을 논하는 것은 위험하며 무의미하지만, 그리스와 로마의 서사시에 비교할 때 이 작품은 두드러지는 인간성의 부정적 요인과 파괴성으로 인하여 보다 우수하다고 평하기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