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이츠 시 전집
한국예이츠학회 지음 / 동인(이성모)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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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유일의 예이츠 시 전집이다. 단 조건부다. 우선은 현재 출간되어 유통되는 경우에 한하는 것으로 이미 1980년대에 최초로 시 전집(권의무/한신문화사)이 나온 적이 있다. 완전한 전집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어쨌든 대다수 작품을 수록하였으며, 이는 여전히 중고서점에서 구할 수 있다. 또한 이 책은 표제와는 달리 예이츠의 시 ‘전집’이 아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의 데뷔작 <어쉰의 방랑>을 포함한 장편 설화시가 누락되어 있다. 즉 이 전집은 서정시에 국한한 시 전집인 셈이다. 참고로 권의무 역본에서는 설화시도 수록되어 있다. 내친 김에 이 책의 아쉬운 점을 더 언급하련다. 여기에 수록된 시 작품들은 모두 우리말 번역본만 수록되어 있다. 영한대역이 아니다. 이는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책의 부피가 너무 방대한 점과 영문 원시의 경우 인터넷 등을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였다고 한다. 일견 이해되지만, 독자의 편의성 및 독서의 효과성 측면에서는 매우 아쉽다. 권의무 역본은 영한대역본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이 시 전집이 별볼일 없는 것처럼 생각될지 모르나 기실 그렇지 않다. 예이츠 만큼 시 선집과 시 전집의 세계가 차이나는 시인도 없을 것이다. 시중의 선집들은 고작 30편 내외의 작품을 수록한데다 선집의 한계상 시의 길이와 성격도 무난한 선택을 하고 있다. 예컨대 ‘미친 제인’의 경우 선집에는 주교와 이야기하는 한 편 정도만 수록되지만, 전집을 통해 미친 제인과 미치광이 톰이 세트임을 알 수 있고 총 25편으로 이루어진 연작시라는 진면모를 알 수 있다. 또한 ‘젊었을 때와 늙었을 때의 여자’는 11편, ‘초자연의 노래’는 12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얄팍한 선집은 40여년에 걸친 시인의 시작 경력과 전집에 수록된 12권의 시집을 감안하면 터무니없이 빈약하다. 그의 시 선집만을 읽고 시인에 대한 섣부른 평가를 내리는 것은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에 불과할 것이다. 나 역시 그러한 오류에 빠졌다.

 

예이츠의 시 세계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생애와 작품을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 개인과 사회, 존재의 통일로 발전되는 모습으로 구분하는 게 통상적이지만, 찬찬히 읽어나가 보면 이를 꼭 최적의 분류라고 하기도 어렵다. 초기작에도 후기 못지않은 사색적이며 철학적인 진지한 질문이 담겨 있으며, 후기작에도 초기 못지않은 순수한 서정을 읽어 나갈 수 있다.

 

대체로 보아 아일랜드의 민간 설화, 즉 켈트 문화에 연원을 둔 작품들은 전 기간을 통해 꾸준히 산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어쉰, 쿠훌린, 엥거스, 메이브 여왕 등. 이는 시인의 정신적 고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편 시인은 켈트를 넘어서 기독교 이전 또는 기독교에 물들지 않은 고대 문화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인도, 그리스 신화, 트로이와 헬렌 등.

 

시인은 현실에도 눈감지 않는다. 당대의 정치, 사회적 현실을 빗대거나 직접적 소재를 취한 작품들도 다수 존재한다. 아일랜드 독립투쟁, 자치정부 수립 후 혼란스러운 사회, 문화 예술에 대한 사회적 무지에 대한 반발 등.

 

그의 창작력에 불을 붙인 여인들(모드 곤 등)도 빼놓을 수 없다. 일각에서는 예이츠의 거의 모든 시를 모드 곤과의 관계를 통해 해석하려는 경향도 있다. 초기와 중기는 다소 그렇다하더라도 후기작까지 그렇게 연결짓는 것은 견강부회가 아닐까. 어쨌든 시인은 노년에 이르러서도 자신의 시적 관심은 정치보다는 사랑이라고 선언(<정치>에서)한다.

 

한편 후기작을 어떤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까는 예이츠 연구자에게 커다란 과제일 듯하다. 단순한 시어로 단순하지 않은 사상을 함축하는 대가의 경지를 발휘하고 있다. 여기서 신비주의 시인이라는 평가가 등장하게 된 연유이다. 아내와의 자동기술 체험을 통해 장기간에 걸쳐 그는 색다른 영적 경험을 겪게 된다. 이는 단순한 무의식의 반영에 그치지 않고 세계 문명에 대한 독자적인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서 후기작을 이해하는 데 <환상록>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2천년을 주기로 세계가 커다란 순환을 한다는 그의 인식은 이제 기독교가 역사적 한계에 도달하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당대적 관점에서 현대 문명의 문제점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과 지향점에 대한 선험적 체득을 보여준다. 그에게 있어 ‘존재의 통합’은 단순히 개인과 사회의 합일이 아니다. 바람직한 존재는 역사적 순환주기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그 안에서 자신과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바를 동일시한다. 그러한 개인과 사회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 찾고자 하는 끊임없는 갈구와 노력이 마이클 로바티즈와 비잔티움 등에 드러나 있다. 이런 면에서 예이츠를 예언시인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생겼으리라.

 

위에서 언급한 이 요인들 전부가 시인 예이츠의 면모이다. 다수의 요절하고 조로한 시인들과 달리 그는 노년기에도 창작력을 놓치지 않았으며 꾸준한 개인적, 시적 발전을 이루어냈다. 그에게 주어진 노벨문학상은 너무 일렀다는 개인적 생각이다. 그의 성취는 오히려 노벨상 수상 이후에 더욱 두드러진다.

 

석달에 걸쳐 띄엄띄엄 이 전집을 읽어나가는 시간은 내가 예이츠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고 얄팍한 선입견에 빠져 있었는가에 대한 자성의 시간인 동시에 재발견의 기간이기도 하였다. 진정으로 예이츠를 사랑하는 독자라면 어렵더라도 시 전집의 일부라도 통독해 보기를 권한다. 그것이 시 전집을 읽는 의의이자 가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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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음악으로의 초대
김현철 지음 / 음악세계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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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클래식 음악을 듣다 보면 어느 순간 싫증을 느끼는 때가 간혹 생긴다. 뻔한 작곡가에 한정된 레퍼토리를 반복하다 보면 연주 자체가 귀에 인이 박힐 정도가 된다. 이 진부성, 상투성을 벗어나고자 목마른 이가 물은 찾듯 새로운 연주를 갈구하는 함정에 빠진다.

 

그럴 때 고전시대 이전의 바로크 음악, 더 나아가 중세와 르네상스 음악을 접하면 생경함에 우선 놀라며, 나름 클래식 음악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하던 지적 오만이 산산이 깨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문제는 바로크 시기까지는 어떻게든 소화가 되는데 르네상스부터 그 이전은 도저히 친숙해지기 어렵다는 점이다. 각종 음악 가이드 및 음반 소개서도 바흐, 헨델, 비발디가 상한선이며, 제법 진지한 경우 몬테베르디를 살짝 소개하는 정도에 그친다. 학구열에 불타는 애청자가 아닌 이상 영어로 된 음반 내지를 독해할 욕구는 생기지 않는다. 이렇게 음악도 낯설고 형식과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음악은 곧 귀에서 멀어진다. 이것이 현재까지의 통상적인 국내 클래식 음악계의 감상수준(적어도 나에 국한하면 참이다!)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가치는 획기적이다. 르네상스 음악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어렵지 않은 용어로 친절하게 가르쳐주고 있다. 주요 악파와 작곡가들, 그리고 추천할 만한 음반들을 소개하고 있어 이 책 한 권이라면 르네상스 음악에 대해서는 어느 자리에 가서도 기죽지 않고 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다. 사실 몇몇 작곡가들을 제외하면 어지간한 클래식 음악 애호가조차도 생전 처음 들어보는 작곡가가 많이 등장하여 당대의 음악이 이렇게 풍성하였음에 새삼 놀라게 된다.

 

그레고리오 성가로 대표되던 중세 음악은 14세기 기욤 드 마쇼에 의하여 커다란 변화의 조짐이 잉태되었다. 그리고 15세기 초 영국의 던스터블이 선구자가 되어 부르고뉴 악파에서 싹이 튼 후 플랑드르 악파에서 활짝 개화한 후 유럽 각국으로 퍼져 나갔다.

 

르네상스 음악은 “고대 그리스 음악의 재현이라기보다는 그리스인들의 인간 정신의 부활이며, 억압받지 않는 인간 본래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려는 예술 운동”(P.26)이다. 가톨릭의 굳건한 위상이 약화되기 시작하여 르네상스 음악 시대 후기에는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과, 영국 국교회의 성립으로 종교적 혼란이 이어지지만 예수를 근간으로 기본 교리는 변함없이 당대인들의 머리와 가슴을 지배하고 있었다. 따라서 르네상스 음악의 지배적 형식도 종교곡에 치우쳐 있음은 당연할 것이다. 다만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 종교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음악성, 즉 예술성을 최대한 구현하려는 욕구를 반영하고자 하였으며, 세속음악에 대한 관심과 중요성이 점차 두드러지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음악사적으로 르네상스 음악은 몬테베르디를 전후로 하여 바로크 음악으로 이어진다. 바흐와 헨델, 비발디가 땅 위에서 불쑥 튀어나온 것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모차르트가 모테트와 레퀴엠을 쓰고, 베토벤이 장엄미사를 작곡하며 현대음악 시기로 넘어와서도 꾸준히 종교음악이 생산되는 것은 결국 음악사적 시기를 면면히 관통하는 그네들의 문화적 유산과 정신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기욤 뒤파이, 요하네스 오케겜, 조스캥 데 프레, 하인리히 이자크, 피에르 드 라 뤼, 오를란도 디 라수스 등 부르고뉴와 플랑드르의 저명한 작곡가들의 위상이 어떤지 쉽사리 이해하려면, 음악사에서 그야말로 모차르트, 베토벤 급의 대작곡가로 비유하면 쉽게 납득이 갈 것이다.

 

뒤파이는 “중세 말기의 여러 작곡 기법을 종합하여 여기에 자신의 개성을 불어 넣어 새로운 르네상스 음악의 방향을 결정한 작곡가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로크 음악을 완성하고 근세 음악의 길을 연 바흐에 비견되는 인물”(P.59)이다.

 

조스캥 데 프레는 “르네상스 시대 전 기간을 통해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평가되고 있다. 조스캥은 모든 시대를 통털어 가장 위대한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 회화에서 미켈란젤로가 한 일을 음악에서 했다고 평가되는 위대한 작곡가”(P.87)이다.

 

이탈리아의 팔레스트리나와 제수알도, 그리고 르네상스 음악 시기 또 다른 위대한 작곡가로 인정받는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는 어떠한가. 게다가 영국만 예로 들더라도 던스터블, 존 태버너, 토마스 탈리스, 윌리엄 버드, 존 다울랜드 같은 기라성 같은 작곡가들이 줄지어 있다.

 

몬테베르디는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작곡가로 르네상스 시대의 최후를 장식하는 작곡가였을 뿐만 아니라 바로크라는 새로운 음악을 창시한 위대한 음악가”(P.168)이다.

 

소개된 음악가들 면면이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이렇게 책장을 넘기면서 그들과 작품들, 유행하던 종교적, 세속적 음악 장르 및 악기 등에 관한 글들을 읽다보면 두 귀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은 욕구가 솟구쳐 오른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작곡가와 작품을 소개하더라도 음반을 통해 듣지 못한다면(실연 감상까지는 기대하지 않는다.) 뜬구름 잡기에 불과하며, 화중지병(畵中之餠)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저자는 틈나는 대로 구할 수 있는 음반을 짤막하게나마 성심껏 소개하고 있다. 만약 여기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저자의 또 다른 책 <르네상스 음악의 명곡·명반>을 참조하면 충분할 것이다.

 

마무리하자면, 이 책은 국내에서 르네상스 음악을 음악 애호가들에게 소개한 거의 유일한 책이다. 단순한 소개 차원에 그치지 않고 실제 감상으로 이어지도록 각 작곡가와 작품의 아름다움을 논평하고 추천음반도 제시하면 말 그대로 종합 가이드라고 할 수 있는 귀중한 저서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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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 청소부 예찬 세계문학의 숲 15
찰스 램 지음, 이상옥 옮김 / 시공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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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사에서 수필문학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엘리아 수필집>의 번역본이다. 기존 다른 번역본과 마찬가지로 완역이 아니라 발췌번역을 하고 있지만, 총 52편 중 27편을 수록하고 있어 번역본 중에서는 가장 많은 편수를 수록하고 있다.

 

흔히 수필문학을 분류하기를 에세이와 미셀러니로 나누고, 전자의 대표작을 몽테뉴의 수상록으로 후자를 찰스 램의 수필로 구분한다. 최소한 내가 학창 시절에 배웠던 바로는 그러하다. 이 수필집은 작가가 엘리아라는 필명을 사용하여 제재와 서술 방식 면에서 에세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신변잡기적 소재를 자유로운 방식으로 전개하고 있다.

 

찰스 램은 개인적 약점을 많이 지닌 인물이라고 한다. 가족과 자신을 괴롭힌 정신병력은 물론 말더듬이 증세도 있었다고 하며 평생 누나를 부양하며 독신으로 힘겹게 가난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에서는 은은한 따스함이 느껴지는데 이는 가히 천부적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자신이 경제적,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지 않는 만큼 그가 바라보는 시선도 하층민과 평민 계급을 많이 향하고 있다.

 

그의 수필들은 개인에 관한 것과 사회에 관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개인에 관한 것은 작가의 개인사와 일상사를 반영한 것인데, 몽상, 와병, 퇴직, 유년시절의 추억, 학창시절의 추억 등 개인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소재를 슬쩍 한 발짝 떨어뜨려놓고 담담하게 때로는 해학적으로 희화화하면서 기술한다.

 

사회에 관한 이야기들은 ‘굴뚝 청소부 예찬’이나 ‘수도에서 거지들이 쇠퇴하는 데 대한 불평’ 등 빈곤과 관련된 편들도 있으며, ‘돼지구이를 논함’과 ‘식전기도’, ‘현대의 여성존중 풍습’ 등 작가의 눈에 비친 사회 일반의 소재를 두루 다루고 있다. 마찬가지로 읽는 이에게 담백한 즐거움을 안겨주면서도 단순한 글장난이 아니라 사회현상에 대한 신선한 관점을 제기하여 새삼 되돌아보게 된다. 그러면서도 직설화법으로 직접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독자의 자연스러운 환기를 유도하는 솜씨는 역시 문학의 본령을 벗어나지 않는다.

 

엘리아의 수필은 명성에 비해 국내에는 그다지 큰 관심과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우선적으로 19세기 전반부의 대영제국 시기를 다루고 있는 시대적 배경의 차이가 크다. 허구에 기반을 두는 소설 문학과는 달리 수필 문학은 본질적으로 작가 개인 의존적이므로 시대적 배경에 밀접하다. 따라서 문화가 이질적이고 연대가 차이나는 램의 작품은 현대 우리나라 독자에 대한 소구력이 약하다.

 

또한 램은 수필에서 무수한 인용을 남발(?)하고 있다. 자신의 지적 능력의 과시와 아울러 고급독자에 대한 지적 욕구 충족의 목적도 있는 듯하다. 성서와 셰익스피어의 일상적 인용은 물론 라틴어와 시, 소설 등에서 불쑥 들이대는 문장은 그 원전을 익히 아는 이에게는 지적인 기쁨을 제공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우리네들은 주석을 외면하자니 영 미진하고 일일이 헤아리자니 문맥이 단절되는 이중고에 시달린다. 현대 독자에 대한 이러한 미배려는 당연히 관심 축소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엘리아의 어조는 흥미롭다. 그의 목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으며 쉽게 흥분하지 않는다. 이성적으로 또박또박 말을 이어가면서도 결코 차가운 논리에 매몰되지 않는다. 그의 시선은 자신과 이웃을 차별 없이 따뜻하게 감싸 안는다. 그는 타인과 사회의 허물 및 모순을 날카롭게 파헤치지 않고 우회적으로 기술한다. 그래서 허물은 더 이상 허물이 되지 않으며 사람들은 재밌게 글을 읽어나가면서 은연중 모순 개선에 동감을 하게 되는 것이다.

 

램의 글이 많은 수필가들이 그러하듯 신변잡기의 함정에 빠지지 않은 연유는 아마도 엘리아라는 필명을 통해 작가와 글 사이에 일정한 간격을 두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소설과 달리 수필은 자칫 개인적 속성의 과다 노출로 문학성을 놓치기 쉽다. 램은 이러한 함정을 용케 잘 피해나간다. 아울러 ‘크라이스츠 호스피틀 학교-35년 전 이야기’와 같이 엘리아의 글에 대한 반박 내지 보완이라는 패러디까지 만들어냈다.

 

램의 글을 읽지 않은 이는 그의 수필들이 자칫 지루하고 진부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섣불리 지니지 말지어다. ‘오래된 도자기’에서 가난한 시절의 아껴서 구입한 책과 대중석에서의 연극 관람이 주는 소소한 기쁨은 경제적 여유가 있는 현재에 비할 바가 못 된다는 누이의 주장은 물질적 풍요로 상실하기 쉬운 가난의 미덕을 재발견하고 있다.

 

‘수도에서 거지들이 쇠퇴하는 데 대한 불평’에서 엘리아는 거지들의 적선 행위의 진실성을 캐묻지 말라고 요청한다. 그냥 그들을 연극배우라고 여기라고 제안하다. “거지들이야말로 살찐 시민에 대한 건전한 억제요 저지”(P.160)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여성존중 풍습’은 이중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대의 여성존중은 엄밀히 말해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여성존중이 외모와 사회적 지위에 따라 차별받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거짓 치레”(P.226)에 불과하다고 엘리아치고는 강경한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작가는 여성 자신의 여성에 대한 존중이 매우 중요함을 지적하는데, 이는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 ‘돼지구이를 논함’을 읽으면서 가식없는 해학과 유머에 웃음 짓지 않는 이는 자신의 정서가 얼마나 메말랐는지 반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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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면순 - 조선시대 성풍속 소화집
윤석산 / 문학세계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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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중고로 책을 구입할 때 함께 딸려온 책이다. 제대로였다면 일부러 찾아서 읽지 않았을 터인데 인연의 끈이 길다. 표제와 부제가 모두 흥미롭다. 잠을 막는 방패, 즉 내용이 흥미진진하여 심심파적으로 으뜸이라는 말이다. 게다가 부제는 ‘조선시대 성(性)풍속 소화집(笑話集)’이다. 한 마디로 간추리면, 조선시대의 흥미로운 야설 모음이라고 할 수 있다.

 

유교 윤리가 지배하던 조선시대에 선비들이 음담을 즐겼다는 것은 이채롭다. 게다가 이런 유형의 책들을 쓴 이가 당대의 학자들이다. 강희맹과 서거정이 그러하며, 이 책의 작자인 송세림도 연산군과 중종 시절의 문신이다. 작중에는 신숙주의 이름도 등장한다. 이로써 당대 유학자들도 사람살이를 너무 팍팍하게 죄기 보다는 인간 본성의 자연스러운 분출을 인정한 것을 알 수 있다.

 

내용은 짤막한 우스갯소리 즉, 해학적 골계미가 넘치는 재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다수는 음담(淫談)이다. 옥문, 옥경, 양경, 양도 등 남녀 성기를 지칭하는 용어들이 거리낌 없이 등장한다. 선비와 기생, 주인과 계집종, 과부와 총각하인 등 관계도 다양하다. 심지어는 수간(獸姦)까지도 등장하는데 너무 천연덕스러워 오히려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질 정도다. 그 외 순수한 골계담도 간혹 들어있다. 작자는 음담을 위주로 하여 시중에 퍼져있는 여러 재미있는 이야기를 수집한 것이다.

 

매 편마다 참으로 흥미진진하여 무심코 읽다가는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책장을 넘기게 된다. 그러면서 이야기들이 별로 생소하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런 장르의 대표 격인 유명한 <고금소총(古今笑叢)>에 이 책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고금소총> 자체가 여러 이야기책들의 모음집이므로 충분히 그럴법한 일이다.

 

많은 이야기 중에서 ‘기생을 사랑하는 까닭’은 여운을 되새기게 한다. 어떤 선비가 아내를 멀리하고 기생만 가까이 하면서 아내는 공경과 분별을 해야 하는 정의가 있으므로 존경할 수는 있지만 희롱하기는 어렵다고 말하자, 아내가 화를 내면서 자신이 언제 분별 대우를 원하였냐고 대들었다는 이야기다. 확실히 사극을 통해 보더라도 조선시대 사대부가에서는 부부가 서로 존칭을 쓰며 공경하였으니 상호 수작을 벌이고 희롱하는 재미를 누리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기실 아내의 입장에서는 남편의 겉치레 공경보다도 허물없고 살가운 애정을 더 그리워함은 자명할 것이다.

 

가장 탁월한 이야기로 ‘주장군전(朱將軍傳)’을 꼽고 싶다. 분량 면에서도 두드러질뿐더러 남성 성기를 의인화하여 가전체 형식으로 기술한 솜씨가 자못 뛰어나다. 게다가 작중 인물과 배경도 모두 성적인 비유를 절묘하게 그려내고 있어 맹앙지(猛仰之)가 보지(寶池)를 개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한다는 제재와 주제 간의 유기적 연결이 빈틈없이 전개된다. 맹(猛)이 분투하는 장면을 인용한다.
“맹이 조칙을 받들어 머리를 두드리며 병사를 일으켜 고락을 함께 할 것을 기약하고 혹 타이르고 혹 빨리하고, 혹 나오고 혹 돌고, 혹 전체를 드러내어 굽히고 펴고 엎드리고 일어남에 다시 나오고 깊이 집어넣어 몸을 구부리고 힘을 다함에 반드시 죽음에 이르기를 기약하더라.” (P.62)

 

이 시절만큼이나 가정과 사회 전반에 성(性)이 넘실대는 때도 없을 것이다. 야설과 야사, 야동은 이미 남녀노소 불문하고 세인들에게 익숙한 용어가 된 지 오래다. 성의 상품화로 성에 대한 금기는 물론 신비도 아울러 깨져버렸다. 이런 시대에 자칫 수백 년 전의 성 이야기는 고리타분하고 진부한 것으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그런데 막상 읽어본 이야기는 현대의 적나라한 야설과 음담도 따라가지 못할 유쾌함과 밝음을 지니고 있다. 어둡고 으슥한 곳에서 소리를 죽여 가며 주고받는 것이 아닌 환한 대낮에 자연스러운 당당함을 지닌 성(性). 성(性)은 모름지기 자연스러워야 하며, 그것이 인간 본연의 속성임을 옛이야기에서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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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사전 - 기지와 해학 위트의 백과사전
앰브로스 비어스 지음, 정시연 옮김 / 이른아침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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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앰브로즈 비어스의 이름을 오늘날까지 떨치게 한 문제의 사전이다. 원래는 냉소자의 사전이라는 타이틀을 지녔으나 후에 현재의 표제로 바꾸었다고 한다. 글쎄, 개인적으로는 이전의 표제가 보다 적합하다는 생각이다. 내용상으로는 악마적이라고 볼 수 없다. 다만 당대에서 세간에 전달된 충격과 반향에서 악마의 입김을 연상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형식은 어휘 사전이다. 즉 어휘 명을 알파벳 순서에 따라 나열하고(번역본에서는 가나다순이다) 여기에 어휘의 뜻을 풀이하는 전형적인 사전 방식이다. 관건은 어휘의 뜻에 있다. 통상 사전에서 기대하는 의미가 아니라 작가 나름의 시니컬한 관점에서 파악한 의미가 제시된다. 사회비판적 인식이 강하므로 부조리한 정치, 사법, 행정, 종교 등을 냉소할 뿐만 아니라 사회와 개인의 일반적인 행동 양태에 대해서도 비딱한 빗대기가 심심찮게 나온다.

 

요즘이야 하도 네트워크가 발달하여 순수한 의미로 수용되고 해석되는 현상을 거의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이므로 비어스의 시니컬이 그다지 생소하지 않다. 그저 조금 흥미롭구나 하는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때로는 꽤나 색다른 관점에서 어휘적 정의를 이해하는데 대한 신기함이 관심을 끄는 정도다. 풍자와 비판, 독설이 난무하며 그래야 주목받는 때가 바로 작금의 우리 사회가 아닌가! 하지만 이 책이 출간된 20세기 직후의 당대 사회에서라면 어휘 하나하나에 짙게 배어있는 냉소와 어두운 그림자에 화들짝 놀랐을 수도 있겠다. 그만큼 여기에 수록된 2천여 개의 어휘에 대한 작가의 일관된 신랄함과 뒤틀린 위트는 낯선 매력을 제공한다.

 

대체적으로 단어의 의미만을 풀이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따금씩 사례 또는 해설이 덧붙여지는 경우도 있어 동일 형식의 반복적 나열에 따른 지루함을 깨뜨리고 있다. 광고 문구와 같이 악마도 웃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가벼운 마음으로 한 번 정도 훑어보면 어휘의 사전적 의미를 뛰어넘는 함의를 되새겨볼 수 있다. 또한 어휘가 사전에 박제된 것이 아닌 현실 사회에서 기능하고 작동하는 신선함도 느껴볼 수 있다. 덤으로 당대 사회나 현대 사회나 인간과 사회가 돌아가는 현실은 별다른 차이가 없음을 깨닫게 될 수도 있다.

 

훗날 기억을 위해 몇 가지 어휘만 임의로 인용한다.

 

남편 husband : 식사가 끝나면 설거지를 도맡는 인물.
비미국적인 un-America : 사악한, 용납할 수 없는, 이단의.
사임하다 resign : 쫓겨날 기미가 보일 때 하는 안성맞춤의 짓.
                          : 이익을 위해 명예를 포기하다. 더 큰 이익을 위해 하나의 이익을 버리다.
서양 occident : 동양의 서쪽(혹은 동쪽)에 위치하는 지구의 일부분.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위선자’로 알려진 기독교도가 살고 있다. 그들의 주요 산업은 살인과 사기인데, 그들은 이것을 전쟁과 무역이라 일컫고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동양의 주요 산업이기도 하다.
성나게 함 provocation : 사람들에게 그의 아버지가 정치가였다고 말하는 것.
소요학파의 peripatetic : 돌아다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관계가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 강의중에 자기 제자들의 반론을 피하기 위해 이곳 저곳으로 돌아다녔다. 그런데 이것은 불필요한 경계였다. 제자들도 철학에 관해서는 스승만큼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악당 blackguard : 시장에서 딸기상자를 볼품 있게 하기 위하여 좋은 것들만을 골라 맨 위에 늘어놓았는데, 심술궂게 밑바닥을 뜯어보는 사나이. 안팎이 뒤집힌 신사.
양손잡이의, 두 마음을 품은 ambidextrous : 남의 주머니라면 그것이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똑같은 솜씨로 훔쳐낼 수 있는

 

재밌는 것은 사전에 대한 정의다.
사전 dictionary : 언어의 자유로운 성장을 억제하여 탄력성 없는 것으로 고정시키고자 생각해 낸 언어와 문자에 관한 악랄한 저작. 단, 본 사전은 예외로 지극히 유익한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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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어 2014-05-25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꼭 읽어보고 싶은 책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