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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롱뇽과의 전쟁
카렐 차페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0월
평점 :
단언컨대 이 작품은 매우 이색적인 걸작이다. 이색적이라 함은 그 제재와 기법 면에서 기존의 정통 문학과는 그 궤를 완전히 달리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인간이 아닌 일개 도롱뇽을 작품 전면에 내세우는 대담성은 물론이고 지능을 가진 도롱뇽이 인간의 진화과정을 답습하고 이내 이를 위협하는 단계는 비록 인간의 관점이긴 하지만 경이와 동시에 등골을 서늘하게 만든다. 안드리우스 스케우크제리의 발견과 발전을 최대한 생생하게 기술하기 위하여 작가는 다양한 기법을 사용한다. 언론보도, 보고서, 여행기, 표어, 전보 등은 기존 소설 서술의 한계를 극복하고 작품에 입체감을 부여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창의적 접근 면에서는 오히려 현대 문학보다도 뛰어나다.
걸작이라 함은 통속의 함정을 용케 벗어났음을 의미한다. 대중적 흥미와 신기함에의 호소에만 열을 올리다가 문득 단명에 그치고 마는 작품들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그래서 고전 명작은 오히려 외양 면에서는 수수하다. 작품의 내적 본질을 밝히고 드러내는데 성공해야 불멸의 고전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탐구이다. 차페크 역시 인간이라는 끈을 결코 놓지 않는다. 도롱뇽에 빗대어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역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장을 덮은 후에도 서늘한 메시지가 가슴과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그만큼 작가와 작품의 문학적 역량이 탁월한 덕분이다.
차페크 최초의 성공작 희곡 을 읽은 이라면 이 소설이 주는 의미가 보다 명확히 다가온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의 혼란기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야의 혼란기에 작가는 소재와 형식은 다르지만 내용과 주제의식 면에서 상당히 공통된 작품을 발표한 것이다.
인간이 로봇을 발명한 동기는 고귀한 동시에 불순하다. 노동의 고통에서 인간을 벗어나게 해주고자 하는 인간적 동기는 또한 인간에게 있어 노동은 삶의 본질적 요소임을 간과하는 것이기도 하다. 더욱이 로봇에게 보다 지적인 노동을 시키기 위하여 부여한 지능은 결국 인간을 닮은 로봇을 낳게 되며, 이는 자연스레 로봇의 각성과 인간과의 대결로 이어지게 된다.
도롱뇽은 어떠한가? 진화단계에서 고립된 진귀한 생물체를 인간세계에 끌어낸 것은 그들의 노동력을 활용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진주채취 사업이 한계에 도달하자 이내 토목공사 동원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그들을 잘 부려먹기 위해 역시 인간에 준하는 교육이 이루어지고 그들은 급속도(개체와 군집 모두)로 인간화 되어갔다. 그래서 유한한 지구를 둘러싸고 도롱뇽과 인간은 전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이렇게 기계인 로봇과 생명체인 도롱뇽에게 주요한 역할을 부여하고 있지만 그들은 결국 인간에 대한 안티테제로 설정되어 있다. 차페크의 관심은 그들에 비추어 본 인간 자신의 모습이라고 해야 한다.
소위 신대륙 발견과 산업혁명 이후 팽창되어 온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는 20세기 초에 이르러 일대 극성기에 도달하였다. 정복과 개척, 그리고 상품과 시장이 그들의 좌우명이 되었다. 이 소설에서도 역시 도롱뇽의 노동력을 활용한 간척사업과 지하개발이 언급되고 있다. 인간은 도롱뇽 덕분에 비로소 만물의 영장이 되어간다는 장밋빛 전망에 젖어들었으니 이는 기계문명 예찬론과 흡사하다.
“바르고 당당한 도롱뇽 시대의 사람들은 더 이상 <사물의 본질>에 대해 숙고하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숫자와 대량 생산에만 관심을 쏟을 것이다...도롱뇽들은 한마디로 <양>을 의미한다.”(P.267)
노예제도는 인류 역사상 장기간 존속되어온 제도이다. 인간은 상품화하는 그 비인간성과 비윤리성을 이유로 근대들어 서서히 소멸되었다. 우리는 로봇과 도롱뇽에 재산적 가치를 부여하여 즉, 상품화하여 이를 거래할 수 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로봇과 도롱뇽이 지능을 갖게 되어 인간에 버금가는 존재가 되었다고 할 때 그래도 역시 상품 거래가 타당할지와 그네들이 이를 계속 용인할지는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사안이다.
인간은 동물 중에서 유일하게 의도적으로 집단 살육을 자행하는 종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여러 설명이 분분하다. 그 중에 하나, 인간이 먹이사슬에서 최상층이며, 인간을 견제할 다른 종이 부재한다는 사실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외부 견제가 불가능하다면 내부 견제가 자연스럽게 싹트는 것이다. 그래서 개별적 살인뿐만 아니라 집단적 살인이 그침 없이 발생하며, 이것이 중지될 것을 누구나 소망하지만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전쟁의 불가피성은 전화에 휩쓸린 사람들의 비참과 고통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차페크는 16년 만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세계정세는 나날이 암울해지고 인간성에 대한 신뢰는 점점 허물어지고 있다. 지난 시간동안 그가 찾고자 하고 나누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란 존재의 의미와 정체성 회복이 아니겠는가. 그에게 있어 인간의 가치는 거시적이고 영웅적이지 않다. 오히려 미시적이고 소시민적인 평범한 일상 속에 진리가 존재한다.
무겁고 진지한 주제를 이렇게 위트 있고 산뜻하게 포장할 수 있는 능력은 차페크 특유의 미덕이다. 그는 독자를 숨 막힐 정도로 거칠게 몰아붙이지 않는다. 다년간 언론 생활을 했던 데다 타고난 기질은 아마겟돈의 디스토피아에서도 미소를 자아낸다. 작품의 결말은 분명 비관적이지만 낙관적 요소를 숨기지 않는다. 솔직히 이 방대한 팩션 작업을 치밀하게 수행한 작가의 역량에 감탄과 질시를 품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 장 '작가, 혼잣말을 하다'는 <평범한 인생>을 상기시킨다는 점도 언급하고 싶다.
아울러 이 멋진 작품을 아름다운 책으로 현재화시킨 공로는 옮긴이와 출판사에 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했다. 책의 만듦새가 신통치 않으면 일단 책에 손이 가질 않으며, 읽기에도 힘들다. 영문학을 전공한 옮긴이는 무슨 계기로 차페크의 세계에 빠져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지속적 관심과 세심한 노력으로 상당히 낯선 작품임에도 전혀 언어상의 곤란을 느끼지 않고 작품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도록 해주어 감사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