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위트 사전
앰브로즈 비어스 지음, 정예원 옮김 / 함께(바소책)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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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비어스의 문명(文名)을 떨친 작품은 <악마의 사전>이다. 이 책의 표제와 타이틀이 상당히 흡사하지만 원제가 그러한지 아니면 유명작의 명성에 기댄 것인지는 알지 못하겠다. 다만 부제가 ‘판타지 우화집’으로 되어 있어 표제와는 달리 형식면에서 차이가 있음을 드러낸다.

 

전체 2부로 되어 있는데, 전반부는 작가 자신의 순전한 창작 우화이며, 후반부는 이솝 우화를 인용하여 재창작한 우화로서 전체적으로 전반부의 비중이 압도적이다.

 

우화란 무엇인가? 새삼스레 답변이 불필요한 우문(愚問)일 것이다. 우화는 2가지 속성을 지니는데 직설적이 아니라 빗대어 드러냄이다. 그리고 교훈과 풍자의 의도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재담과는 구분된다.

 

비어스가 빗대는 것은 당대 현실이다. 그가 바라보기에 남북전쟁 이후의 미국은 부조리와 불의가 판치는 어긋난 사회이며, 사람들 역시 그 무대에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의 본성을 왜곡시키기 위해 여념이 없는 딱한 이들이다. 웬만한 이라면 그저 그러려니 넘어가겠지만, ‘신랄한 비어스’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날카롭고 예리한 비평을 언론계에서 활약한 작가는 이를 허투루 여기지 않는다. 조그만 빈틈이라도 발견하면 뾰족한 송곳으로 사정없이 헤쳐 버리는 필치에 독자는 통쾌함과 아울러 짜릿함을 느낄 만하다.

 

풍자의 대상은 포괄적이지만, 대체로 종교, 정치, 언론, 정부 등이 타겟이 되고 있어 예나 지금이나 공공악의 존재 양태는 변함없으며, 공공 악에 대한 반감도 여전함을 알게 된다. 한편 간혹 드러나는 여성 편견은 시대적 한계라는 생각이 들어 비교적 인종평등 지향적인 진보성과는 묘한 대조를 이루기도 한다.

 

솔직히 이런 우화는 당사자가 읽고 마음속에서 공감을 느껴 피식 웃음이 번져 나와야 즐기는 제 맛이다. 따라서 섣부른 감상 소감은 출근시의 만원 전철에서 이어폰으로 개그 방송을 듣다가 혼자 낄낄거리다가 불현 듯 느끼는 주위의 시선으로 인한 민망함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1부와 2부에서 각각 짤막한(내용의 두드러짐보다는 순전히 길이에 초점을 두고) 우화를 소개하는 것으로 마친다.

 

국고와 정부 권력
국고는 정부 권력이 내용물을 꺼내는 것을 느끼며 외쳤다.
“의원님! 표결을 요청합니다.”
그러자 정부 권력이 말했다.
“의회 용어를 제법 아는 것 같군.”
국고가 답했다.
“예, 저는 입법부가 저를 비워가는 것에 익숙하답니다.”

 

뱀과 제비
법정에 둥지를 튼 제비가 어린 새끼들을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어느 날 뱀 한 마리가 벽의 틈새로 기어 나와 새들을 잡아먹으려 했다. 그러자 판사가 즉각 새들을 자신의 집으로 옮기라는 명령을 내리고 자신이 직접 잡아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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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독파하는 셰익스피어 이야기 - 소설로 읽는 10대 희극, 6대 비극, 4대 로맨스
찰스 램.메리 램 지음, 박별 옮김 / 나래북.예림북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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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사에서 셰익스피어가 차지하는 위상은 사뭇 대단하다. 문학작품 탐독에 관심 있는 이라면 누구도 그를 피해가지 못한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셰익스피어의 주 작품은 우리에게 그나마 익숙한 이야기체인 소설이 아니라 연극 상연을 전제로 하는 희곡이다. 희곡은 대중성 면에서 소설에 비할 수 없으며, 독서법도 소설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처음부터 셰익스피어에 도전하는 진지한 정공법을 택하는 독자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어쩔 수 없이 망설이게 되는 게 현실이다.

 

찰스 램과 누나 메리 램은 이에 착안하였다. 대중들이 조금 더 셰익스피어에 다가가도록 하자. 그의 익숙지 않은 희곡들을 말 그대로 이야기 형식으로 번안한 것이다. 이로써 독자는 셰익스피어 작품들에 부담 없이 다가갈 수 있으며, 원작인 희곡에 도전할 수 있는 든든한 베이스캠프를 갖게 된 것이다. 지금 단계에서는 작가 특유의 극적 구성과 언어적 표현 등은 일단 뒤로 제쳐놓자. 중요한 것은 원작의 묘미를 가능한 한 살리면서 독자에게 재미를 안겨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 그래서 이것은 재창작과 다름없다.

 

램 남매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작품 38편 중에서 역사극 등을 제외한 20편을 택하여 이야기로 바꾸어 놓았다. 각각 희극 10편, 비극 6편, 로맨스 4편으로 분류된다. 이 중에서 내가 읽어본 작품은 얼추 열편 남짓하다. 하도 오래전에 읽은 것이라 유명한 비극 몇 편을 제외하고는 줄거리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다. 특히 배경과 전개가 비슷비슷한 희극 작품들은 매우 헷갈린다.

 

셰익스피어하면 일단 4대 비극으로 각인되어 있고, 여기에 <로미오와 줄리엣>이 추가된다. 자고로 인간은 비극에 더 깊은 감명을 받는 존재인가 보다. 소위 카타르시스의 작용인가. 처음 접하는 <아테네의 타이몬>의 희극성과 비극성이 심금을 울린다. 인간성에 대한 신뢰가 깨지고 절망한 타이몬이 숲속에서 나체로 생활하며, 죽음에 이를 때까지 철저하게 인간과 사회를 혐오하고 증오한다. 비극 작품을 통해보건대 셰익스피어는 인간성에 대해 극히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희극과 로맨스는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고 본다. 희극 중에서 보다 주인공의 모험적 성격이 강한 것을 특히 로맨스라고 명명한 것이다. 셰익스피어 작품의 배경이 대개 이탈리아 등 영국 이외이지만, 로맨스는 희극에 비해 보다 이국적 요소가 강하다. <겨울 이야기>는 시칠리아와 보헤미아, <심벨린>은 고대 브리튼과 로마제국, <페리클레스>는 그리스이며, <폭풍우>는 아예 지중해의 외딴 섬을 설정한다.

 

10편의 희극 중 확연히 기억 남는 것은 <한여름 밤의 꿈>과 <베니스의 상인>이며, 나머지는 등장인물과 사건 등이 기억에 혼재되어 이것이 저것인양 머릿속에 어지럽다. 그만큼 셰익스피어의 희극은 인물과 사건 및 구성에 있어 상당한 유사성을 공유한다. 개별적 무대 공연을 체험했다면 독자적 개성을 목도할 수 있겠지만, 글로 읽어서는 혼동하기 딱 좋다.

 

셰익스피어는 초기에 희극, 중기에 비극, 후기에 로맨스로 작품 집필을 집중적으로 하였다. 따라서 희극 작품은 아무래도 작가의 원숙미가 부족하다는 생각이며, 비극 작품에서 그의 최고의 작품성이 구현된 것으로 이해된다. 로맨스는 확실히 초기 희극보다는 우수하지만 지향점이 다르다고 본다.

 

램 남매의 시도는 매우 성공적이다. 국내 출판계에서 왕성히 출판되고 있는 셰익스피어 이야기들이 이를 입증한다. 특히 아동 및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램 남매, 특히 찰스 램을 이 책 한 권만으로 평가하기는 무리다. 그는 수필 장르에서 중요한 소위 미셀러니의 대표자로, 그의 <엘리아 수필>은 문학사에서 뚜렷한 평가를 받고 있다.

 

간접적이지만 간만에 셰익스피어를 다시 접한다. 고전은 한 번 읽고 지나치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셰익스피어를 읽은 지 너무 오래되었다. 슬슬 그에게 손을 내밀어야 할 때가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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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록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지음, 이영석 옮김 / 누멘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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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록(A Vision)>은 예이츠의 작품 목록에서 특이한 성격을 지닌 작품이다. 1917년부터 기술된 기록은 초판 출판에 이어 전면적 재검토를 거쳐 예이츠의 말년에 개정판이 출판되었다. 이것을 문학 작품으로서 받아들여야 할지는 논의가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중기 이후 예이츠의 문학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창으로서 그 의의는 무시할 수 없다.

 

타이틀과 같이 이 책은 예이츠가 신들린 아내의 입을 통해 이루어진 영적 존재와의 대화를 통해 구현한 거대한 환상을 다루고 있다. 예이츠의 아내는 우리나라의 무당과 같이 신 또는 혼령과 접촉할 수 있는 색다른 감각 능력을 지닌 듯하다. 신이 내린 무당이 하는 말은 평상시의 무당 자신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때 무당은 신과 인간을 중개하는 매개의 도구가 된다. 예이츠의 아내 또한 마찬가지다. 영적 존재가 들려준 이야기는 그 아내의 인지를 초월한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주안점은 소위 이성과 감성으로 구축된 잘 갖추어진 체계가 아니라 무의식에서 구성된 환상에 대한 감수성과 수용력에 달려 있다. 환상에 공감하면 그것은 밝은 빛으로 다가올 것이며, 그렇지 못하면 허무맹랑하며 뜬구름 잡는 것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책을 읽으면서 수박 겉핥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정말 오랜만에 받았다. 글자가 글로써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개별적 철자에 불과할 때 이것을 독서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통상 이런 경우라면 재독, 삼독을 거쳐 이해에 다가가려고 노력하겠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예이츠의 전문적 연구자라면 모를까 순수한 독서가에 불과한 나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 게다가 단순한 환상과 꿈에 불과한 주장이 아니라 나름대로 치밀한 체계를 갖춘 일종의 철학이라는 판단이며, 그 철학에 대한 공감적 수용이 아니라면 제대로 된 이해는 거의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작가는 먼저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에즈라 파운드에게’와 ‘마이클 로바티즈와 친구들’이라는 글을 통해 이 작품을 집필하게 된 계기와 배경을 서술하고 있다. 이따금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대체적 이해는 가능한 대목이다.

 

이어서 세계를 분석하는 거대한 작업이 시작된다. 응답자들 또는 안내자들(예이츠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은 우주를 시간(주관)과 공간(객관)의 차원으로 이루어진 주관적 원뿔과 객관적 원뿔의 이중 원뿔로 이해한다. 그것은 또한 4가지 기능인 의지, 마스크, 창조적 마음, 그리고 운명의 몸으로 분류가 가능하며, 이것이 어우러져 다양한 인식의 차원이 생성된다. 예이츠는 이것을 28상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달의 수레바퀴로 도식화(P.86)하였다. 각각의 상은 4가지 기능별로 고유한 특성을 가지며 이는 100면~102면의 표로 설명되고 있다. 제1권 거대한 수레와 제2권 상징의 완성은 이러한 체계의 구축과 28상에 대한 개별적 상술을 다루고 있다. 사실 여기까지는 어지럽지만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대략적 이해와 추론은 가능하다. 물론 구체적 내용까지는 이해와 공감이 어렵지만 말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예이츠가 사용하고 구축한 체계의 방방법론에 대한 공감의 정도에 좌우된다.

 

한편 제3권 영혼의 심판은 완전이 해독 불가다. 아마 이 작품에서 가장 환상적인 대목을 손꼽으라면 단연 제3권이다. 아마 이 부분을 이해하려면 앞선 두 권을 철저하게 숙지하고 공감해야 하지 않을까?

 

제4권과 제5권은 앞에서 구현된 이해 체계를 바탕으로 역사를 분석하고 있다. 거대한 수레바퀴의 순환 주기를 다양하게 검토한 후 작가는 4000년을 한 주기로 제시한다. 그 한가운데가 바로 예수의 일생에 해당하며, 기독교의 시대는 이후 2000년을 지속한다. 작가는 각 시기별로 예술을 포함한 문명을 자신의 이해 체계에 맞추어 독자적으로 분석하고 있는데, 무척 흥미롭다. 그의 환상에 공감하지 않더라도 일독할 가치는 있다.

 

예이츠의 후기 시에는 그의 독자적 사상에 대한 이해 없이는 해독이 어려운 사례가 제법 많다. 마이클 로바티즈와 관련된 시편들, 종종 언급되는 거대한 원뿔과 순환, 비잔티움에 대한 찬미는 물론 직접적으로 달의 상(相)을 제재로 삼기도 한다. 이런 시들을 이해하기 위한 창문으로써 이 <환상록>은 매우 중요하다.

 

물론 도구로서의 의의 외에도 하나의 통합된 작품으로서 가치를 부여할 수도 있다. 옮긴이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무엇보다도, 이 책을 하나의 거대한 시로 본다. 산문시와 운문이 잘 짜인 아름답고, 정교하고, 신비로운 시, 가장 추상적이면서 구체적인 시이다. 하나의 환상이면서, 형형색색의 채석 창문들이 하늘로 나 있는, 환상들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신비주의적(종교적) 건축물이다.” (P.309)

 

역자의 의견에 동의하든 아니든 간에 분명한 것은 이 작품은 작가 특유의 철학 체계에 기반한 통합적 사상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환상으로서의 시의 속성에 주목한다면 이 작품을 시로 파악해도 무리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작품에 대한 이해가 선결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일반 독자에게는 무척이나 쉽지 않은 과제이다.

 

이 책은 <A Vision>의 우리말 번역문은 물론 영문 원문도 수록하고 있다. 원서 해독에 관심있는 이라면 도움이 될 것이다. 전체 면수도 번역문 319면과 원문 247면을 합한 566면으로 표기하는 게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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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맞이 언덕의 소녀 레인보우 북클럽 11
비욘스티에르네 비요른손 지음, 고우리 옮김, 어수현 그림 / 을파소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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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903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비요른손의 작품은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고 있다. 이는 북구 문학 전반에 관련된 사안으로 국내 출판계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현상이라 하겠다. 그나마 비요른손의 작품 중 간혹 소개되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이다. ‘양지바른 언덕의 소녀’ 또는 여주인공의 이름을 딴 ‘신뇌베 솔박켄’ 등의 여러 타이틀로 나왔는데 모두 단종되고 근래에는 소식이 없다가 이번에 을파소에서 아동과 청소년 문학 시리즈의 일환으로 새로 간행되었다.

 

이 작품이 작가 비요른손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가장 인기작이다. 아마도 북구의 전원을 배경으로 누구나 공감 가능한 소년과 소녀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기인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책을 읽기 전에는 아름답고 따뜻하며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같은 인상을 기대하였다.

 

북구의 자연환경이 작가의 필치와 문체에 우러나온다면 과장일까. 사건 전개상 완전히 아동을 대상으로 한 작품이 아님을 새삼 깨닫게 된다. 북구에서는 여름이 짧고 겨울이 길며 겨울의 추위는 매섭기 그지없다고 한다. 따라서 그네들에게 봄과 여름의 햇볕은 소중하기 그지없는 존재이며 심리적으로 받아들이는 영향도 자못 클 것이다. 이 소설이 딱 그러하다. 한마디로 하자면 밝음 속에 드리워진 북구의 정서! 그것은 자연 묘사와 사람들의 성격과 행동, 특히 토르비욘의 어린 시절을 지배했던 불량소년 아슬락에게서 두드러진다. 자연이 그 속에 안주하는 사람들의 삶과 문화에 미치는 영향은 얼마나 지대한가. 한편 아슬락에 대해서는 작가가 더 할 말이 많은데 아낀 흔적이 역력한데, 작품의 전체적 성격상 더 깊은 관심과 비중을 쏟아 붓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이해된다.

 

기실 토르비욘과 신뇌베는 비슷한 또래로 같은 마을에서 자라나 서로에 대해 잘 아는 사이였고, 우정이 애정으로 발전한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대도시도 아닌 적은 인구가 모여 사는 고립된 소도시 또는 마을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두 집안이 한쪽으로 크게 치우치지도 않으며, 비교적 원만한 이웃관계를 유지한 점도 나쁘지 않게 작용하였다. 그럼에도 두 청춘남녀가 맺어지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토르비욘의 인격적 성숙이다.

 

새삼 서구인들의 삶과 생활을 지배하는 교회와 종교적 영향력에 대해 주목한다. 환경과 교통으로 고립된 마을에서 교회는 사람들의 내적 불안을 완화시켜 줄 뿐만 아니라 마을 주민들이 모여서 교류와 소통을 하는 열린 공간의 기능도 담당한다. 게다가 탄생과, 견진성사, 결혼 및 장례 등 인생 대소사의 중요 의식이 거행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가는 제2장에서 새삼 “노르웨이 농부의 삶이란 교회와 연관 없이는 말할 수 없다”고 표현하고 있다.

 

타이틀에서 풍기는 뉘앙스만큼 밝고 화창하지는 않지만, 소년 소녀가 꾸려나가는 소박하면서 대견한 사랑은 한번쯤 읽어 볼 가치가 있다. 더구나 주인공들과 동년배의 독자들이라면 남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나의 것으로 쉽게 동화될 수 있을지 모른다. 아동에게 있어 동화, 청소년에게 있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으로 대표되는 성장문학의 의의가 바로 이런 것이다. 그 시기를 놓치면 이해는 하되 절대적 공감을 하기 어려운. 현재의 나가 아닌 당시의 나였다면 아마도 독서중과 독서후의 감회는 분명 지금과는 많은 차이를 보였을 것이다. 시기를 놓친 점이 자못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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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렘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10
구스타프 마이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책세상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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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링크의 작품은 흥미롭지만 결코 녹록치 않다. 작가 특유의 기묘한 신비성이 작품 중에 짙게 드리워져 있어 안개 속을 헤매는 양 분명한 이해와 인식을 어렵게 휘젓는다. 그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인 이 <골렘>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을 흥미롭게 하는 요소들을 몇 가지 추려볼 수 있다. 먼저 골렘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다. 골렘은 17세기 유대 랍비가 만든 진흙생명체라는 기술이 나와 있지만 이것이 궁금증을 해소해 주지는 못한다. 골렘은 츠바크의 말대로 30년마다 부활하는 실체를 가진 존재인가 아니면 일종의 집단 증후군인가. 작품 곳곳에 골렘을 지칭하는 표현이 모호한 어법으로 등장한다. 골렘은 유대 신비주의와 프라하의 유대인 게토지역의 토양에 뿌리박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나는 그 건물들의 벽 안쪽에서 마치 허깨비처럼, 마치 피와 살이 없는 존재들처럼 살면서 사고와 행동에 있어서도 아무렇게나 조각조각을 모아놓은 듯한 모습을 보이는 그 이상한 사람들을 마음속에서 차례로 떠올린다.” (P.34)

 

“눈에 보이지 않는 범죄의 유령이 사람들이 사는 이 골목 저 골목을 밤낮으로 누비고 있어. 그 유령은 허공에 떠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해. 그러다가 그것은 갑자기 인간의 영혼을 급습하는 거야. 우리는 그것의 존재에 대해 무감각해. 우리가 그 존재를 알아차리는 순간 그것은 사라져버리고 모든 것은 끝나버리는 거야.” (P.47)

 

“한 세대에 한 번씩 하나의 정신적인 전염병이 번개처럼 이 게토 지역을 훑고 지나가면서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어떤 목적을 위해 사람들의 영혼을 습격한다. 그때 어떤 특별한 존재의 윤곽을 신기루처럼 나타나게 한다. 어쩌면 이곳에 수백 년 전에 살았을 그 존재가 이제 형태와 모습을 갖추고 싶어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P.59)

 

누구도 골렘을 제대로 본 사람은 없지만, 누구나 골렘을 보면 그것이 골렘임을 순간적으로 깨닫게 된다. 페르나트는 골렘이 자신을 닮았음을, 자신의 도플갱어임을 강하게 의식한다. 이렇게 골렘은 실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작품 내내 화자를 비롯한 게토 지역 사람들의 정서를 휘감고 다닌다.

 

화자인 나는 곧 페르나트라는 점에 작중에서는 한 치의 의구심도 표명되지 않는다. 페르나트는 정신이상으로 과거의 기억을 거의 상실한 상태로 게토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그러다가 결말 부분에 화자인 나가 페르나트 소유의 모자를 쓰고 깊은 꿈에 빠졌음이 드러난다.

 

마이링크는 젊은 시절 삶에 회의를 느껴 자살을 하려던 순간 신비주의 전단지를 보고는 새로운 인생을 찾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동양의 신비주의 못지않게 서양도 신비주의의 연원이 자못 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기독교의 숱한 분파적 신비주의는 새삼 말할 것도 없다. 유대교의 경우도 카발라 밀교가 은밀히 전승되고 있으며, 기독교 전래 이전 서양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던 켈트와 게르만적 유산도 분명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생명 없는 인조인간들이 거리를 배회하는 끔찍한 광경, 이것은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라 마이링크가 바라본 당대 프라하 도시의 모습이다. 이것이 오늘날 첨단 도시 속을 살아가는 현대인과 무슨 차이점이 있으랴. 마이링크와 페르나트가 느끼는 골렘은 곧 인조인간화 된 현대인들의 자화상일 수도 있겠다. 현대 문명 비판자들은 인간이 도시화되고 문명화될수록 내면의 자연성과 인간성을 상실한다고 주장한다. 페르나트가 과거를 잃어버렸듯이 우리들도 자아의 한 부분을 상실한 채 물질문명 세계를 휘청거리며 배회한다.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알지도 모르는 채.

 

마이링크는 작품에 다양한 의미와 색채를 부여하기 위하여 여러 인물과 사건을 등장시키고 있다. 이 요소들이 페르나트를 둘러싼 채 작품을 보다 흥미롭고 풍요롭게 만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론 바서트룸과 차루세크, 안겔라와 사비올리 박사는 아론 바서트룸의 아들 자살과 관련하여 은원 관계에 휘말려 있다. 아론에 대한 차루세크의 증오는 자신과 생모를 버린 생부에 대한 혈연에 기인하며, 따라서 아론의 죽음과 함께 차루세크의 죽음도 예정된 것이라 하겠다.

 

페르나트의 친구들, 즉 츠바크, 프리스란더, 프로코프는 작품의 핵심인물은 분명 아니다. 그것이 이들의 중요성을 반감시키지는 않는다. 그들은 페르나트가 자신의 정체성에 의구심을 갖도록 하는 계기가 되며, 그와 독자들에게 게토 지역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골렘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소설의 분위기와 향후 전개방향을 암시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게다가 그들과 어울리는 페르나트를 통해 게토 지역의 현실의 삶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작중에서 가장 신비로운 인물들은 아마 셰마야 힐렐과 그의 딸 미리암이다. 랍비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힐렐은 심오한 영성과 깊은 예지, 철저한 종교적 생활로 인해 게토에서 독보적인 인물이다. 그의 전지전능함에 페르나트마저 무한한 존경심을 품는다. 반면 이런 완전하고 신비로움이 그의 독창적 인물 형성에 방해가 되었다는 인상이다. 확실히 그에게는 생동하는 자유로움과 인간다움이 부족하다.

 

작품 후반부의 가장 흥미진진한 전개는 개인적으로 페르나트와 미리암의 은근한 사랑이다. 기적과 신성한 생활을 꿈꾸는 미리암과, 그녀의 기적을 도와주는 페르나트. 페르나트가 감옥에서 안타까워한 가장 큰 이유는 미리암의 소망을 무너뜨렸다는 데 있다. 감옥에서 몇 달 만에 풀려난 후 페르나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들 모녀의 행방을 수소문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소설의 결말은 골렘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다시 뒤엎는다. 건물의 화재와 출입구가 없는 방, 그리고 페르나트가 본 것. 마지막 등불의 집에서 화자가 본 페르나트와 미리암의 행복한 모습. 자웅동체의 인물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그곳.

 

골렘은 정신병적 증후도 아니고 악마적 존재도 아니다. 골렘은 자신의 분신 즉 도플갱어라고 하였다. 지금의 나는 본디의 반쪽에 불과한 게 아닐까. 나와 다른 나가 결합해야 온전한 나로 변용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상징적으로 자웅동체라고 하였으며, 페르나트와 미리암은 합일에 도달한 것이다. 이렇게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결여된 것은 바로 골렘이다. 우리는 반쪼가리 자아를 갖고 그것이 전부인 양 목을 뻣뻣이 하고 세상을 종횡한다. 무엇이 부족한지도 모르는 채. 설사 잃어버린 반쪽과 조우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오히려 극도의 유사성과 기시감에 공포를 느끼며 거리감을 느낀다. 이것이 작가가 노리는 제2의 독법이라는 상념이 스친다.

 

그러고 보면 작품말미의 가상 인터뷰에서 마이링크는 이 작품의 주제를 ‘영혼의 임신, 즉 정신적 자기 실현’(P.385)이라고 밝힌다. 이렇게 “자신과 도플갱어가 하나가 될 때 자기 실현은 이루어진다”(P.385)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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