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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렘 ㅣ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10
구스타프 마이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책세상 / 2003년 6월
평점 :
절판
마이링크의 작품은 흥미롭지만 결코 녹록치 않다. 작가 특유의 기묘한 신비성이 작품 중에 짙게 드리워져 있어 안개 속을 헤매는 양 분명한 이해와 인식을 어렵게 휘젓는다. 그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인 이 <골렘>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을 흥미롭게 하는 요소들을 몇 가지 추려볼 수 있다. 먼저 골렘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다. 골렘은 17세기 유대 랍비가 만든 진흙생명체라는 기술이 나와 있지만 이것이 궁금증을 해소해 주지는 못한다. 골렘은 츠바크의 말대로 30년마다 부활하는 실체를 가진 존재인가 아니면 일종의 집단 증후군인가. 작품 곳곳에 골렘을 지칭하는 표현이 모호한 어법으로 등장한다. 골렘은 유대 신비주의와 프라하의 유대인 게토지역의 토양에 뿌리박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나는 그 건물들의 벽 안쪽에서 마치 허깨비처럼, 마치 피와 살이 없는 존재들처럼 살면서 사고와 행동에 있어서도 아무렇게나 조각조각을 모아놓은 듯한 모습을 보이는 그 이상한 사람들을 마음속에서 차례로 떠올린다.” (P.34)
“눈에 보이지 않는 범죄의 유령이 사람들이 사는 이 골목 저 골목을 밤낮으로 누비고 있어. 그 유령은 허공에 떠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해. 그러다가 그것은 갑자기 인간의 영혼을 급습하는 거야. 우리는 그것의 존재에 대해 무감각해. 우리가 그 존재를 알아차리는 순간 그것은 사라져버리고 모든 것은 끝나버리는 거야.” (P.47)
“한 세대에 한 번씩 하나의 정신적인 전염병이 번개처럼 이 게토 지역을 훑고 지나가면서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어떤 목적을 위해 사람들의 영혼을 습격한다. 그때 어떤 특별한 존재의 윤곽을 신기루처럼 나타나게 한다. 어쩌면 이곳에 수백 년 전에 살았을 그 존재가 이제 형태와 모습을 갖추고 싶어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P.59)
누구도 골렘을 제대로 본 사람은 없지만, 누구나 골렘을 보면 그것이 골렘임을 순간적으로 깨닫게 된다. 페르나트는 골렘이 자신을 닮았음을, 자신의 도플갱어임을 강하게 의식한다. 이렇게 골렘은 실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작품 내내 화자를 비롯한 게토 지역 사람들의 정서를 휘감고 다닌다.
화자인 나는 곧 페르나트라는 점에 작중에서는 한 치의 의구심도 표명되지 않는다. 페르나트는 정신이상으로 과거의 기억을 거의 상실한 상태로 게토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그러다가 결말 부분에 화자인 나가 페르나트 소유의 모자를 쓰고 깊은 꿈에 빠졌음이 드러난다.
마이링크는 젊은 시절 삶에 회의를 느껴 자살을 하려던 순간 신비주의 전단지를 보고는 새로운 인생을 찾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동양의 신비주의 못지않게 서양도 신비주의의 연원이 자못 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기독교의 숱한 분파적 신비주의는 새삼 말할 것도 없다. 유대교의 경우도 카발라 밀교가 은밀히 전승되고 있으며, 기독교 전래 이전 서양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던 켈트와 게르만적 유산도 분명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생명 없는 인조인간들이 거리를 배회하는 끔찍한 광경, 이것은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라 마이링크가 바라본 당대 프라하 도시의 모습이다. 이것이 오늘날 첨단 도시 속을 살아가는 현대인과 무슨 차이점이 있으랴. 마이링크와 페르나트가 느끼는 골렘은 곧 인조인간화 된 현대인들의 자화상일 수도 있겠다. 현대 문명 비판자들은 인간이 도시화되고 문명화될수록 내면의 자연성과 인간성을 상실한다고 주장한다. 페르나트가 과거를 잃어버렸듯이 우리들도 자아의 한 부분을 상실한 채 물질문명 세계를 휘청거리며 배회한다.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알지도 모르는 채.
마이링크는 작품에 다양한 의미와 색채를 부여하기 위하여 여러 인물과 사건을 등장시키고 있다. 이 요소들이 페르나트를 둘러싼 채 작품을 보다 흥미롭고 풍요롭게 만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론 바서트룸과 차루세크, 안겔라와 사비올리 박사는 아론 바서트룸의 아들 자살과 관련하여 은원 관계에 휘말려 있다. 아론에 대한 차루세크의 증오는 자신과 생모를 버린 생부에 대한 혈연에 기인하며, 따라서 아론의 죽음과 함께 차루세크의 죽음도 예정된 것이라 하겠다.
페르나트의 친구들, 즉 츠바크, 프리스란더, 프로코프는 작품의 핵심인물은 분명 아니다. 그것이 이들의 중요성을 반감시키지는 않는다. 그들은 페르나트가 자신의 정체성에 의구심을 갖도록 하는 계기가 되며, 그와 독자들에게 게토 지역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골렘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소설의 분위기와 향후 전개방향을 암시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게다가 그들과 어울리는 페르나트를 통해 게토 지역의 현실의 삶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작중에서 가장 신비로운 인물들은 아마 셰마야 힐렐과 그의 딸 미리암이다. 랍비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힐렐은 심오한 영성과 깊은 예지, 철저한 종교적 생활로 인해 게토에서 독보적인 인물이다. 그의 전지전능함에 페르나트마저 무한한 존경심을 품는다. 반면 이런 완전하고 신비로움이 그의 독창적 인물 형성에 방해가 되었다는 인상이다. 확실히 그에게는 생동하는 자유로움과 인간다움이 부족하다.
작품 후반부의 가장 흥미진진한 전개는 개인적으로 페르나트와 미리암의 은근한 사랑이다. 기적과 신성한 생활을 꿈꾸는 미리암과, 그녀의 기적을 도와주는 페르나트. 페르나트가 감옥에서 안타까워한 가장 큰 이유는 미리암의 소망을 무너뜨렸다는 데 있다. 감옥에서 몇 달 만에 풀려난 후 페르나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들 모녀의 행방을 수소문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소설의 결말은 골렘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다시 뒤엎는다. 건물의 화재와 출입구가 없는 방, 그리고 페르나트가 본 것. 마지막 등불의 집에서 화자가 본 페르나트와 미리암의 행복한 모습. 자웅동체의 인물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그곳.
골렘은 정신병적 증후도 아니고 악마적 존재도 아니다. 골렘은 자신의 분신 즉 도플갱어라고 하였다. 지금의 나는 본디의 반쪽에 불과한 게 아닐까. 나와 다른 나가 결합해야 온전한 나로 변용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상징적으로 자웅동체라고 하였으며, 페르나트와 미리암은 합일에 도달한 것이다. 이렇게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결여된 것은 바로 골렘이다. 우리는 반쪼가리 자아를 갖고 그것이 전부인 양 목을 뻣뻣이 하고 세상을 종횡한다. 무엇이 부족한지도 모르는 채. 설사 잃어버린 반쪽과 조우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오히려 극도의 유사성과 기시감에 공포를 느끼며 거리감을 느낀다. 이것이 작가가 노리는 제2의 독법이라는 상념이 스친다.
그러고 보면 작품말미의 가상 인터뷰에서 마이링크는 이 작품의 주제를 ‘영혼의 임신, 즉 정신적 자기 실현’(P.385)이라고 밝힌다. 이렇게 “자신과 도플갱어가 하나가 될 때 자기 실현은 이루어진다”(P.385)라고.